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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대통령, "평화는 강력한 힘과 철통같은 안보태세가 지킨다"
    25일 대구 엑스코에서 6.25 전쟁 74주년 행사가 열렸다. 많은 참전영웅과 귀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여러 식순 후 윤석열 대통령의 연설이 이어졌다. 윤석열 대통령은 연설 초반에 "625전쟁은 적화통일의 야욕에 사로잡혀 일으킨 돌이킬 수 없는 참극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자유와 번영의 길을 달려올 때에도 북한은 퇴행의 길을 고집하였다"라며 "주민들의 참혹한 삶의 외면하고 동포들의 인권들을 탄압하면서 정권의 안위만을 고집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이어 "북한은 여전히 핵과 미사일 능력을 고도화하여 끊임없이 도발을 획책하고 있고 최근에는 오물풍선 살포와 같이 비열하고 비이성적인 도발까지 서슴치 않고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전쟁을 일으킨 러시아와 포괄적전략동반자관계 조약을 맺고 유엔안보리결의를 정면으로 위반하는 군사 경제적 협력 강화마저 약속했다"라고 일침을 가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러한 북한의 적대적 태도와 도발에 대해 "우리 군은 어떠한 경우라도 북한이 대한민국을 감히 넘보지 못하도록 확고한 대비태세를 유지하고 북한의 도발에 압도적으로 대응할 것이다"라고 예고했다. 마지막으로 "평화는 강력한 힘과 철통같은 안보태세가 지킨다"라며 더이상 싱거운 대응이 아닌 강력한 태세로 국민들을 지킬 것을 말했다. 북한은 이념갈등으로 인해 대한민국을 끊임없이 적대국으로 치부하고 북한 동포들에게 대한민국은 적대국임을 세뇌시켜왔다. 또한 북한 동포들이 반민주주의 정권에 굴복하도록 도청하고 감시했다. 북한 동포들이 인권을 외치면 잔인하게 처형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다. 이러한 북한정권이 최근 대한민국에 대한 적개심을 표면위로 드러내자 대한민국 정권이 더욱 단호한 대응을 했다는 분석이다. 한편 25일 경찰에 따르면 오전 5시 기준 서울에서 북한 대남 풍선을 발견했다는 신고가 10여건 접수됐다. 경찰 관계자는 발견된 낙하물 전부를 군 당국에 인계한 상태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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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5
  • 윤석열 대통령 탄핵 소추안 국민청원, 10만 명 이상 동의로 국회 심사 예정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탄핵 소추안 발의를 촉구하는 국민청원이 10만 명 이상의 동의를 얻어 국회 절차에 따라 소관 상임위원회에서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25일 오전 6시 이후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 의하면,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 요청에 관한 청원'은 이날 오후 기준으로 14만 9천여 명 이상의 동의를 얻은 것으로 집계되었다. 청원을 올린 권모 씨는 게시글에서 윤 대통령 취임 이후 경제, 안보, 외교, 민생, 민주 등 대한민국의 모든 분야가 총파산하고 있다며, "이미 탄핵 사유는 차고 넘친다"라고 주장했다. 권 씨는 "총선에서 민심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윤 대통령은 국정 기조를 전환할 의지가 없다"러고 지적하며 22대 국회가 즉각 탄핵안을 발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권 씨가 주장하는 윤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요약된다. 주요 사유는 외교·안보 분야에 집중되어 있으며, △한반도 전쟁 위기 조장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 사건의 친일적인 해법 강행 △일본 후쿠시마 오염수의 해양투기 방조 등이 포함된다. 국내 현안으로는 △해병대 채 상병 순직 사건 수사 과정에서 외압 행사 △김건희 여사의 명품 수수 등 부정 비리 등이 제기되었다. 헌법 26조에 따라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기관에 문서로 청원할 권리를 가진다. 이에 따라 국회는 홈페이지에서 30일간 5만 명 이상의 국민 동의를 얻은 사안을 소관 상임위에 회부하는 국민동의청원 제도를 운영 중이다. 이번 청원은 이러한 기준을 충족하여 23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접수되어 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헌법상 대통령에 대한 탄핵 소추는 국회 재적 의원 과반수의 발의와 재적 의원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탄핵안이 국회 문턱을 넘으면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 결과에 따라 탄핵 여부가 최종 결정된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국회에서 탄핵안이 발의되어 가결된 사례는 노무현(2004년), 박근혜(2016년) 전 대통령 두 명이 있다. 청원인 권 씨의 주장은 민주당이 여권을 상대로 공세를 펼치는 지점과 일치한다. 이날 국회에서 열린 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당 지도부는 채 상병 사건의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해 "지난 법사위 청문회를 통해 수사 외압의 실체가 양파 껍질 벗겨지듯 드러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21일 청문회에서는 국방부가 경찰로부터 채 상병의 사건 기록을 회수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실이 관여했다는 취지의 증언이 나왔다. 이에 대해 장경태 민주당 최고위원은 "대통령이 전방위적으로 사건에 외압을 행사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사실이라면 탄핵 사유"라고 주장했다. 국민청원이 국회 상임위에 회부 된 만큼 국회는 해당 청원을 심사하고 이를 통해 탄핵 소추안 발의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하지만 탄핵 소추가 실제로 이루어지려면 국회 내에서 충분한 찬성을 얻어야 하며 이후 헌법재판소의 탄핵 심판을 거쳐야 한다. 따라서 실제 탄핵이 성사될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불확실하다. 이번 청원은 대통령 탄핵 소추라는 중대한 문제를 국민이 직접 제기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국민의 목소리가 국회에서 어떻게 반영될지 주목되며 이를 통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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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5
  • 우원식 국회의장, 개헌과 갈등 해결 위한 정치 개혁 강조
    우원식 국회의장은 24일 서울 광화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개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5년 단임제가 가지는 갈등 요소를 제거하고 권력 구조와 정치적·정서적 대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고 밝혔다. 우 의장은 개헌의 필요성에 대해 이미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중 하나가 5년 단임 대통령에게 집중된 과도한 권한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 사회 전반에서 갈등이 극심해지고 있다. 그리고 삶의 요구가 다양해지고 사회가 분화하면서 갈등의 종류와 양상이 복잡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국회도 갈등의 자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때로는 갈등의 진원지, 때로는 갈등의 대리인이 되어 정치가 불신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갈등이 커질수록 정치 불신이 깊어졌다. 이는 국민의 실망과 낙담으로 이어진다 언급했다. 이런 상황은 22대 국회가 직면한 도전이며 정치가 해결해야 할 근본적인 과제라고 덧붙였다. 우 의장은 두 가지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밝혔다. 첫째는 개헌을 통한 극한 갈등과 대치의 해소, 둘째는 국회가 갈등을 다루는 관점의 변화라고 설명했다. 그는 대통령 권력을 목표로 한 갈등이 이제는 의회를 넘어 광장과 열성 지지자들로 확장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국회에 상정된 여러 현안이 갈등 의제이며 앞으로 해결해야 할 기후, 인구, 지역소멸, 노동 등의 문제도 복잡한 이해관계와 가치가 얽혀 있다고 말했다. 우 의장은 국회 운영의 키워드로 '현장', '대화', '균형', '태도'를 제시했다. 현장을 중시하는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국민의 삶을 지키는 것이고 이를 위해 정치가 현장에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대화와 토론이 위축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주장과 표방보다는 조율과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 의장은 사회적 대화와 대타협을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사회적 대화를 활성화하고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국회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러면서 갈등의 중심에 있을수록 균형을 찾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또한 여야의 문제를 넘어 입법부와 행정부의 관계 속에서 균형을 이루어가겠다고 밝혔다. 끝으로, 우 의장은 국회가 현장 중심 정치를 활성화할 방안을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적 합의를 모아가는 과정에 언론인의 지혜를 구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우 의장은 22대 국회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한 정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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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5
  • 한동훈,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 선거 출마 선언…윤석열 대통령과의 관계 주목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차기 당 대표 선거에서 대세론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윤석열 대통령과 관계에도 관심이 커지고 있다. 윤 대통령과의 갈등 문제가 아직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 전 위원장은 김건희 여사 특검법, 해병대원 특검법 등 민감한 문제들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한동훈 전 위원장은 오는 23일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 선거 출마 발표식에서 직접 작성한 입장문을 읽을 예정이다. 출마 선언문에는 여당 대표 후보로 역할과 책임, 민생 경제 대책, 국민의힘의 지난 총선 패배에 대한 반성 및 정치 개혁 방안 등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또한, 보수 지지층의 우려를 잠재우기 위해 '윤·한 충돌'에 대한 설명도 포함될 것으로 예상된다. 한 전 위원장은 최근 당내 친윤계 인사들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출마 의사를 밝히며 도움을 요청했다. 지난 19일에는 윤석열 대통령에게도 통화로 "이기는 정당을 만들겠다"라며 당 대표 출마 의사를 전했다. 여권 내의 전언을 종합하면 둘 사이의 불편한 기류는 여전하다. 하지만 전당대회를 앞두고 여전히 견고한 친윤계 세력을 무시하기 어려운 만큼 한 전 위원장이 표면상의 봉합 작업에 나설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한 친윤계 의원은 뉴스1에 "대통령과의 관계는 안타까운 상황"이라면서도 "대통령과 여당 대표 관계가 어긋나면 국민이 불안해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총선을 앞두고 발언에 제한을 뒀던 과거와 달리 한 전 위원장이 대통령실과 거리를 두고 할 말을 하는 당 대표로서의 모습을 구축할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이번 전당대회는 한동훈, 나경원, 원희룡, 윤상현까지 4파전으로 치러질 전망이다. 유력 당권 주자였던 안철수 의원과 유승민 전 의원은 불출마를 선언했다. 최근 뉴스1이 한국갤럽에 의뢰해 지난 14~15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8명 대상 실시한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 선호도 조사'에서는 유승민(29%), 한동훈(27%), 안철수(10%), 나경원(9%), 원희룡(6%), 김재섭(2%), 윤상현(1%) 순으로 높은 지지율을 보였다. 윤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운 한 전 위원장이 선두를 달리는 가운데 본격적인 출마 선언 전부터 후보들 사이에서는 '윤심' 마케팅에 불이 붙었다. 원희룡 전 장관은 전날 기자들과 만나 "대통령께 출마를 전화로 보고드렸다"라며 "의례적인 덕담을 들었다"라고 밝혔다. 또한, 원 전 장관은 대통령이 윤상현 의원과 나경원 전 의원과도 만나 격려했다고 전했다. 조사는 통신사 제공 휴대전화 가상번호 무작위 추출을 통한 무선 전화 인터뷰로 진행되었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이며 응답률은 10.4%이다.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를 참조하면 된다.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의 국민의힘 차기 당 대표 선거 출마 선언이 임박하면서 윤석열 대통령과의 관계, 친윤계와 소통, 그리고 보수 지지층의 우려가 주요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이번 전당대회가 국민의힘의 향후 방향과 지도체제를 결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 전 위원장이 당내 다양한 목소리를 어떻게 조율하고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 어떤 행보를 보일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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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2
  • 의협, "간호사 특혜법"이라며 간호법 철회 요구
    22대 국회 출범 이후 여야가 잇따라 '간호사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이하 간호법)을 재발의하자 대한의사협회(의협)가 "간호사 특혜법"이라며 즉각 철회를 요구했다. 의협은 21일 보도자료를 통해 "간호법은 불법 의료행위를 조장한다"라며 철회를 촉구했다. 국민의힘이 전날 당론 발의한 간호법은 '간호사 및 전문간호사는 검사, 진단, 치료, 투약, 처치 등에 대한 의사의 전문적 판단이 있은 후에 의사의 포괄적 지도나 위임에 따라 진료 지원에 관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라고 명시했다. 이는 의사 인력이 부족한 현실을 고려해 전문간호사뿐 아니라 일반 간호사도 일정 요건 하 진료 지원(PA)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지난 19일 발의한 간호법 역시 '불법 진료 문제 해소를 위해 의사·치과의사·한의사의 지도하에 시행하는 진료 보조에 대한 업무 범위와 한계를 대통령령으로 정하도록 한다'라고 규정했다. 이러한 법안들은 의사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자 간호사들의 역할을 확대하려는 취지로 발의되었다. 이에 대해 의협은 강력히 반발했다. 의협은 "간호법안은 전문간호사의 무면허·불법 의료행위를 조장하고, 헌법상 포괄 위임 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우리나라 의료체계는 의료법에서 모든 의료인을 통합해 규율하는 단일법 형태"라며 "재발의된 간호법은 전문간호사와 간호사에게 현행 의료법 체계를 벗어난 무면허 의료행위를 하게 하는 국민 건강을 외면한 법안"이라고 비판했다. 의협은 또한 "전체 보건의료 직역이 유기적으로 협조하는 의료 시스템에 균열을 초래하는 악법"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간호법이 특정 직역의 권리와 이익만을 대변하고 보건의료 직역 간 유기적인 협조 체계를 파괴한다고 주장했다. 의협의 주장에 따르면, 간호법은 간호사들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여 무면허 의료행위를 조장할 위험이 있다. 이들은 의료법의 통합적 규율 체계를 강조하며, 간호법이 이러한 체계를 무너뜨린다고 주장한다. 또한, 헌법상 포괄 위임 금지 원칙에 위배된다는 점을 들어 법안의 법적 정당성에도 의문을 제기했다. 반면, 간호법을 지지하는 측에서는 현재 의료 현장에서 간호사들이 실제로 많은 진료 지원 업무를 수행하고 있으며, 이를 법적으로 명확히 하고 적절한 교육과 자격을 갖춘 간호사가 더 전문적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는 의료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의사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의협은 "간호 직역을 포함한 모든 보건의료 인력의 처우 개선이 필요한 것은 인지하고 있다"라며, 소모적인 분쟁만 만들지 말고 간호법 논의를 중단해야 한다. 그리고 보건의료 인력 모두의 처우 개선을 위해 국회와 정부가 나설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간호법이 간호사들의 특혜를 주기 위한 법안으로 간주했다. 그러면서 보건의료 시스템 전체의 개선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의협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간호법 재발의는 의료계 내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간호사의 역할 확대와 이에 따른 법적 정비가 필요하다는 주장과 무면허 의료행위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의협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 문제는 단순한 법안 통과의 문제를 넘어 대한민국의 보건의료 시스템의 미래와 직결된 중요한 사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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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2024-06-22
  • 국회 법사위 '채 상병 특별검사법' 청문회, 의혹만 더 커져...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 '채 상병 특별검사법' 입법청문회에서 핵심 관련자들이 증인 선서를 거부하고 답변을 회피해 논란이 일었다. 윤석열 대통령 외압 의혹의 핵심 증인들이 추후 법적 책임을 피하려는 모습으로 비쳤다. 이에 더불어민주당 소속 정청래 법사위원장이 이례적으로 세 차례의 '10분간 퇴장 명령'을 내렸다. 이날 청문회는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등 사건의 핵심 증인 3명이 증언 선서를 거부하면서 시작부터 충돌이 빚어졌다. 이들은 국회 증언·감정 등에 관한 법률 제3조와 형사소송법 제148조를 들어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라고 주장했다. 형사소송법 제148조는 형사소추 또는 공소제기를 당하거나 유죄의 염려가 있을 경우 증언을 거부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이 전 장관은 "현재 공수처의 법에 따라 피고발인 신분으로 돼 있어 특검법안의 수사 대상에도 고발 내용이 포함돼 있다"라며 법률상 증언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정청래 위원장은 "증언과 선서를 거부하거나 허위 증언할 경우 국회 증언·감정법에 따라 고발할 의무가 있다"라고 경고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무시했다. 증인들의 답변 회피가 계속되자, 정청래 위원장은 퇴장 명령을 통해 압박을 가했다. 이시원 전 대통령실 공직기강비서관에게 "대통령 지시로 전화를 한 것인가, 아니면 본인의 판단으로 전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이시원 전 비서관은 "수사 중인 사안이라 답변하기 어렵다"라고 답했다. 이에 정 위원장은 "이시원 증인, 10분간 퇴장하세요"라고 명령했다. 또한, 이종섭 전 장관은 김용민 민주당 의원의 질문에 끼어들어 정청래 위원장의 제지를 받았다. 정 위원장은 이 전 장관에게 퇴장 명령을 내렸다. 이에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퇴장하면 더 좋은 것 아닌가"라며 비꼬았다.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도 정 위원장의 "지금 진술은 본인 지휘권이 실질적으로 있었다는 것을 반증한다"라는 발언에 반박하다가 퇴장을 명령받았다. 증인들의 불성실한 태도는 민주당 의원들의 강한 비판을 초래했다. 장경태 민주당 의원은 "선서를 거부한 분들은 변명으로 일관하고, 선서한 분들은 답변을 거부하고 있다"라며 "계속 허용하면 안 된다"라고 지적했다. 증인들이 '기억나지 않는다', '수사 중이라 답변할 수 없다'라는 말을 반복하는 데 대해 국민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번 청문회는 대통령실과 국방부, 경북경찰청 간의 전화 통화 내역 공개로 채 상병 사건 수사에 대한 외압 정황이 드러난 상황에서 열렸다. 그러나 핵심 증인들의 노골적인 답변 회피와 선서 거부는 대통령실 개입 의혹을 더욱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증인들의 태도는 특별검사제 도입의 명분을 더욱 부각됐다. 결국 '순직 해병 진상규명 방해 및 사건은폐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검사 임명법'(채 상병 특검법)이 21일 더불어민주당 단독으로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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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2
  • 조국 대표, "채상병 특검 청문회 증인과 참고인, 세 갈림길 앞에 서 있다"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21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법사위) '채상병 특검' 입법 청문회에 대해 "청문회 증인과 참고인이 걸어갈 길은 세 갈래"라고 밝혔다. 조 대표는 이날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법사위 청문회 증인으로 채택된 12명과 참고인 5명의 이름을 열거하며 이같이 말했다. 조 대표는 "먼저 겁쟁이의 길이다. 박성재 법무부 장관과 신원식 국방부 장관, 당신들은 청문회에 불출석했다"라며 "진실을 마주하기 두려워했고 사실 말하기를 회피했다. 당신들은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국무위원 자격이 없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대한민국 역사와 정치사에 겁쟁이, 비겁자로 기록될 것"이라며 "더 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다. 그러나 당신들은 결국 특별검사 앞에 앉게 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 대표는 "두 번째 갈림길은 거짓말쟁이의 길이다. 출석은 하되 거짓말을 늘어놓을 것"이라며 "조직, 아니면 자기편을 보호하려고 피노키오가 되려고 할 것"이라며 "적극적인 거짓말부터 '모른다, 기억이 안 난다'라고 할 것이다. 그런 당신들은 오늘 청문회에서 나중에 현실의 법정에서 더 뒤에는 역사의 법정에 거짓말쟁이라는 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조 대표는 "세 번째 길이 있다. 바로 진실한 시민의 길"이라며 "법률가들이 시비를 따지는 법정이 아니라 민심의 재판소인 청문회장에서 국민께 진실을 말씀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민에게서 권한을 위임받은 국회의원들에게 진상을 밝히라”라며 “그 길만이 당신들이 역사 안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라고 했다. 그는 "증인들은 대부분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선서한 군인들"이라며 "청문회에서 거짓을 말하느냐, 진실을 말하느냐, 어떤 것이 나라를 지키는 방법인지는 자명하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조 대표는 "여당인 국민의힘에 요구한다. 국회 청문회장에 나오시라”라며 “거부해 봐야 장두노미(藏頭露尾), 즉 머리만 숨기고 꼬리는 숨기지 못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에 불과하다. 국회에 와서 옳고 그름을 따지시라"라고 말했다. 앞서 국회 법사위는 이날 채상병 특검 입법 청문회 증인으로 박성재 법무부 장관, 신원식 국방부 장관,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 이시원 전 대통령비서실 공직기강 비서관,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이용민 포병여단 포7대대장, 박진희 육군 56사단장, 신범철 전 국방부 차관, 임기훈 국방대학교 총장 등 12명을 채택했다. 참고인으로는 김정민, 김규현, 김경호 등 변호사 3인이 결정됐다. 이번 청문회에서는 채상병 순직 사건 수사 과정에서의 외압 의혹을 규명하는 것이 주요 쟁점이 될 전망이다. 특히, 채상병 순직 사건이 정치적 압력에 의해 왜곡되었는지, 누가 개입했는지를 밝히는 데 초점이 맞춰질 것이다. 이는 순직 해병 수사 외압 의혹에 대한 본격적인 진상 규명의 첫 단계로, 청문회 결과는 향후 정치적 파장과 국민의 신뢰 회복에 중요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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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1
  • 유승민 전 의원,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 불출마 선언… '한동훈 대세론' 강화될 듯
    유승민 전 미래통합당(현 국민의힘) 의원이 다음 달 23일 열리는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이번 결정으로 인해 '한동훈 대세론'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유승민 전 의원은 21일 자신의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당 대표 경선에 출마하지 않겠다. 무의미한 도전이라고 결론 내렸다"라고 밝혔다. 그는 "변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절박함이 시작될 때 저의 역할을 다하겠다"라고 덧붙였다. 유 전 의원은 그동안 '반윤'(반윤석열) 색채가 강한 인물로 국민의힘 당 대표 후보로 꾸준히 거론에 올랐다. 총선 패배 이후 당의 혁신과 쇄신이 제1과제로 떠오른 상황에서 그의 출마 여부는 큰 관심사였다. 그러나 유 전 의원이 출마를 포기하면서 '어대한'(어차피 당 대표는 한동훈) 기류가 더 강해질 것이라는 분석이 정치권 안팎에서 나오고 있다. 유 전 의원의 불출마 선언으로 한동훈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지지층 결집 효과를 더 누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 전 위원장은 총선 과정에서 몇 차례 윤석열 대통령과 대립한 적이 있어 '반윤'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이에 따라 당내에서는 대통령과 당 대표가 충돌의 경우 당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 목소리도 나온다. 5선 중진 나경원 의원은 한동훈 전 위원장을 겨냥해 "우리 당은 친윤, 비윤, 또는 친한, 반한 이런 것들과 결별했으면 한다"라며 "제가 지금껏 걸어온 정치에는 친(親)도 반(反)도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는 당내 갈등을 줄이고 통합을 이루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한편, 국민의힘 전당대회는 한동훈 전 위원장과 나경원 의원을 비롯해 원희룡 전 국토교통부 장관, 윤상현 의원의 4파전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윤상현 의원은 이날 출마를 선언했으며, 한동훈 전 위원장과 원희룡 전 장관은 오는 23일 출마 선언할 전망이다. 이번 전당대회는 당내 다양한 세력 간의 경쟁과 갈등이 어떻게 표출될지, 그리고 누가 당 대표로 선출될지에 따라 국민의힘의 향후 방향이 결정될 중요한 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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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1
  • 윤석열 대통령, 인구 국가 비상사태 선언하고 저출생 극복 위한 총체적 대응 방안 제시
    윤석열 대통령이 19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의 HD현대 R&D센터 아산홀에서 열린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 회의에서 '인구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저출생 문제 극복을 위한 범국가적 총력 대응 체계의 가동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윤 대통령은 지금까지의 저출생 정책을 재평가하고 국내외 성공 및 실패 사례를 꼼꼼히 분석한 결과, 정부는 저출생 극복을 위해 양립, 양육, 주거 등 3대 핵심 분야에 정책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회의에서 윤 대통령은 일과 가정의 양립을 위한 구체적인 지원 방안을 제시했다. 현재 6.8%인 남성 육아휴직 사용률을 임기 내에 50%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여성 육아휴직 사용률도 70%에서 80%로 상승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육아휴직 급여를 인상하고 특히 첫 3개월 동안의 급여를 월 250만 원으로 대폭 상향 조정함으로써 휴직 초기의 경제적 부담을 줄이겠다고 발표했다. 이 외에도 출산 휴가를 10일에서 20일로 확대하고,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을 현행 8세에서 12세로 확대하는 등의 제도적 지원을 강화할 계획이다. 양육 분야에서는 국가 책임주의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전환한다. 윤 대통령은 0세부터 11세 아동의 양육에 대해 국가가 책임을 지며, 특히 3세부터 5세 아동에 대한 무상 교육과 돌봄을 임기 내에 실현할 것임을 명시했다. 또한, 늘봄학교 운영을 전국의 모든 초등학교로 확대하고 2026년부터는 모든 학년이 늘봄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할 예정이다. 주거 문제 해결을 위한 파격적인 정책도 도입된다. 윤 대통령은 출산 가구가 원하는 주택을 우선으로 분양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신생아 특별공급 비율을 대폭 늘리는 방안을 제시했다. 신혼부부를 위한 저리 주택 매입 및 전세자금 대출 지원, 그리고 출산 시 추가 우대금리 적용 등이 포함된다. 또한 결혼과 관련된 비용에 대해 세액공제를 추가로 도입할 계획이다. 윤 대통령은 저출생 문제가 단순히 양립, 양육, 주거 문제에 국한되지 않음을 지적하며, 수도권 집중, 사회 구조적 요인, 경쟁 압력, 높은 불안 등 사회·문화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음을 언급했다. 이에 따라 과도한 경쟁 문화를 개선하고 더 여유롭고 성숙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도 병행할 것임을 강조했다. 저출생 극복을 위한 컨트롤타워로서 저출생 대응기획부의 신설과 대통령실 저출생 수석실 설치도 지시된 바 있다. 이는 장기적인 인구 전략 수립을 목표로 하며, 인구전략기획부로 명칭을 확정하고, 장관이 사회부총리를 맡아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회의는 지난해 3월에 이어 두 번째로 개최된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의 회의로, 저출생의 원인 진단과 추세 반전을 위한 특단의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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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0
  • 24년 만에 평양 방문. 푸틴이 쏘아올린 '북러 관계 강화' 신호탄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24년 만에 평양을 방문하며 북러 관계 강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푸틴 대통령을 포함한 수행단을 태운 항공기는 18일 오전 평양에 도착했다. 푸틴 대통령은 북러 공동개발이 추진되는 극동지역을 둘러보기 위해 사하(야쿠티야) 공화국 야쿠츠크를 방문했다. 항공기 경로 추적 웹사이트 '플라이트레이더24'는 러시아 항공 특수 비행대의 일류신(IL) 96-300(RSD655)가 현지시각으로 전날 오후 7시 39분 모스크바 브누코보 국제공항을 이륙해 이날 오전 7시 45분 야쿠츠크에 착륙했다. 이후 푸틴 대통령은 야쿠츠크 일정 뒤 저녁에 평양으로 출발할 것으로 알려졌다. 야쿠츠크와 평양 간 비행시간은 약 3시간이다. 러시아에서 생산하는 IL 96-300기종의 개량형(IL 96-300-PU)은 푸틴 대통령의 전용기다. 푸틴 대통령은 이 항공기를 총 4대 보유하고 있으며, 전용기 내부에는 대통령 집무실과 회의실, 샤워실 등이 갖추어져 있다. 웹사이트에 따르면 러시아 항공 특수 비행대 항공기 1대는 전날 오후 6시 18분 브누코보 국제공항을 이륙해 이날 오전 8시쯤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이 공항은 평양 도심에서 약 25㎞ 북쪽에 위치의 평양 국제비행장으로도 불린다. 이 비행기에는 푸틴 대통령의 방북을 수행하는 고위 당국자들이 탑승했을 것으로 보인다. 크렘린궁은 국방·에너지·우주 분야 수장들도 동행한다고 밝혔다. 이어 이날 오전 11시 24분쯤 평양 국제비행장에도 전날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출발한 비행기가 도착했다. 항공기 에어버스 A319-115(RSD808)는 전날 모스크바에서 현지시간 오후 9시 41분에 이륙해 이날 오전 평양에 도착했다. 이 비행기에도 다수 수행자가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러시아 항공사 '레드윙스'가 운영하는 WZ1113편도 이날 오후 3시 러시아 아바칸 공항을 이륙해 오후 9시 15분께 평양 순안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다. 북한과 러시아는 푸틴 대통령이 18~19일 북한을 '국빈 방문'한다고 공식 발표했으나 정상회담 등 구체적인 일정은 공개하지 않았다. 1박 2일의 짧은 일정인 만큼 첫날인 18일에는 환영 행사와 함께 정상회담 및 환영 만찬을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 광장에서는 대규모 환영 이벤트도 준비 중인 동향이 포착됐다. 두 정상이 만나는 것은 지난해 9월 러시아 극동 보스토치니 우주기지에서 개최된 정상회담 이후 9개월 만이다. 푸틴 대통령의 방북은 지난 2000년 7월 이후 24년 만이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과 러시아가 '전략적 동반자 관계' 선언으로 우호 관계를 격상할 것이란 예상이 나오고 있다. 특히 군사·안보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유사시 자동 군사 개입'이 포함된 군사 협력을 맺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또한, 우주기술을 포함한 첨단 군사기술 이전이나 노동자 파견, 식량 지원 등 경제 협력 부문에서 푸틴 대통령이 '선물'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전망이 있다. 푸틴 대통령의 이번 방북은 북러 관계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최근 국제 정세 속에서 양국은 더욱 긴밀한 협력 관계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러시아는 서방 제재 속에서 북한과의 경제적 협력을 강화하는 의도가 있다. 북한은 러시아와의 군사적 협력을 통해 안보를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다.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북러 양국은 새로운 협력 방안을 모색하고, 이를 통해 양국 간의 전략적 이익을 도모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군사·안보 분야에서의 협력 강화는 양국 간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으로 예상된다. 푸틴 대통령의 방북은 국제 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북러 간의 긴밀한 협력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에 새로운 도전과제를 제시할 것이다. 또한, 한반도 정세에도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북러 간의 협력 강화가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이번 푸틴 대통령의 방북과 정상회담은 향후 북러 관계의 향방을 가늠할 중요한 지표가 될 것이다. 두 정상이 어떤 협력 방안을 도출할지, 그리고 이를 통해 북러 간의 관계가 어떻게 발전할지 관심이 집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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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8

과학 검색결과

  • 전주 중학교에서 발생한 딥페이크 음란물 사건, 경찰 조사 중
    전북 전주의 한 중학교에서 남학생들이 교사와 동급생의 얼굴을 나체 사진과 합성한 사건이 발생해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들 학생은 인공지능(AI)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음란물을 제작하고 유포했으며,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딥페이크는 AI 기술을 활용해 생성된 가짜 이미지나 오디오, 비디오를 말한다. 이 사건은 딥페이크 범죄가 점점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딥페이크를 악용한 가짜 동영상 및 뉴스 유포 사례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를 근절할 명확한 대책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가해자를 특정하고 혐의를 입증해 처벌하기 어려운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서울대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에서 보듯, 해외 서버를 이용한 딥페이크 음란물 유포 시 가해자 추적이 어렵고, 혐의 입증 역시 까다로운 상황이다. 심지어 유포 목적이 없이 개인 보관용이라고 주장할 경우 실질적인 처벌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성형 AI의 발전은 딥페이크 범죄 외에도 지식재산권 분야에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AI가 인간의 최소한 개입만으로 창작물을 생성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서, 저작권 침해와 같은 이슈가 발생하고 있다. 생성형 AI 기술은 2022년 11월 Open AI에 의해 개발된 챗GPT의 등장으로 급부상했다. 현재 주요국에서는 AI 규제 법령을 시행 중이다. 유럽의회는 3월에 AI 기술의 안전성과 기본권 준수를 보장하는 인공지능 법(AI Act)을 승인했다. 미국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안전성·보안성·신뢰성을 갖는 AI의 개발과 활용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AI 규제를 강화했다. 중국도 생성형 AI 서비스 관련 법률을 제정해 시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생성형 AI 기술의 부작용이 증가함에 따라, 서비스 제공자의 책임 한계를 명확히 하고,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통해 AI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문제 해결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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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칼럼 검색결과

  • 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 사망 1주기 되는 오늘
    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이탈리아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가 오늘 오전 밀라노의 산 라파엘레 병원에 별세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만성 골수 백혈병(CML)에 따른 폐 감염으로 지난 4월 5일부터 45일간 이곳 병원에 입원했었다. 약간의 차도가 생겨 지난 달 5월 19일에 퇴원했다가, 최근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지병인 백혈병 악화에 따른 합병증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정치적인 행적으로보나 사생활적인 부분을 보면 그리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1994년부터 2011년까지 3기에 걸쳐 총리로 장기간 집권하며 이탈리아 현대사와 유럽 현대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그의 기행이 무엇이든, 부정부패를 많이 저질렀고 이탈리아의 경제를 파탄나게 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이탈리아 국민들에 있어 애증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던 마테오 렌치 전 총리도 그를 추모하며 트위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고, 또 미워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의 업적으로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스포츠, 텔레비전 등 이탈리아인의 삶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 이탈리아의 집권당인 FdI는 “우리는 그를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단력 있으며 높이 평가받는 인물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라며 “그의 가족에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현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또한 베를루스코니를 “투사”라고 칭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용기와 결단력이 그를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우리는 그와 함께 싸워 이기고, 패배하는 등 많은 전투를 치러왔고 그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함께 세운 목표를 지킬 것”이라며 작별을 고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끌었던 전진 이탈리아당은 “우리는 당신을 절대 보낼 수 없다”며 “안녕히 가세요 총리, 당신의 정치 공동체로부터”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귀도 크로세토 이탈리아 국방장관 또한 트위터를 통해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죽음은 “큰 빈자리를 남겼다”며 “한 시대가 지나가고,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나는 그를 매우 사랑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오랜 정치적 동지인 안토니오 타야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외교장관은 “슬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감사했다”고 애도했다. 베를루스코니와 경쟁했던 중도 좌파 민주당의 엘리 슐레인은 “모든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그의 정치적 비전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인간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한 사람에 대한 존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민주당을 대표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교통장관은 “오늘 위대한 이탈리아인이 우리에게 작별을 고했다”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 모든 분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오늘 위대한 친구를 잃었다”며 망연자실한 심정을 덧붙였다. 그가 행한 비행이나 기행에 비해 이런 정도를 평가와 애도를 받는다면 베를루스코니가 얼마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애증의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평생 욕 먹어도 모자랐을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베를루스코니는 악행도 무수히 남겼지만 업적도 그만큼 남겼던 유럽 현대사에 있어 "살아있는 고목이자 거물"이었다. 파올로 젠틸로니 유럽 집행위원회(EC) 재무장관 겸 전 총리는 “최근 수십 년간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별세했다”라고 애도했으며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에 대해 유럽의 위대한 정치인이고 정치의 '마지막 모히칸족' 중 한 명이었다"며 "베를루스코니가 권좌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탈리아에 좋은 일이었으며, 이탈리아 내정을 안정시키는 요인이었다." 라며 그를 추모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밀라노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병역기피를 한 것과 크루즈 함선에서 가수를 한 것을 제외하면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건설업 사장이 되어 밀라노 교외에 밀라노2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분양을 했는데 이게 대박나면서 건설 재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고, 당시 밀라노 시장인 베티노 크락시와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베티노 크락시는 그의 정치 스승이 된다. 이후 자유 라디오 운동에 큰 영감을 받아 방송 진출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1973년 텔레밀라노라는 케이블 방송사를 열어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1977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판결로 민영방송 금지조항이 폐지되자 방송사업을 더욱 확장해 지상파 방송사를 차리면서 언론계 재벌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해 시칠리아 마피아와의 연루설과 정경유착설 등 여러 구설수들이 있었지만 지주 회사 핀인베스트의 복잡한 지분관계로 인해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넘어갔다. 당시 이탈리아는 베를루스코니가 정계에 있기 전부터 이미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언론통제가 만연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에 타 군소 민영방송사(Rete4, Italia 1)들의 지분을 구입하여 최종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자신의 방송이 송출되는 광활한 방송망을 가지게 되면서 본격적인 언론계 재벌이 된다. 1983년 베를루스코니의 자금 지원을 받은 그의 정치적 스승인 베티노 크락시가 총리가 되자 베를루스코니는 이러한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방송 규제의 완화를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돈을 벌게 되었다. 방송 규제 완화 규정 중 일부가 로마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세의 확장이 주춤했었지만, 기민당과 사회당에 정치자금을 적절하게 제공했고 1990년 생방송 뉴스 프로그램 방영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거머쥐게 되는, 이른바 거물로써 출발이 이루어졌다. 1992년 마니 풀리테, 불법 정치 자금 사건으로 인해 베티노 크락시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몰락하게 되면서, 1994년 총선에서 좌익민주당의 집권이 유력해졌다. 이 때 베를루스코니는 전진 이탈리아당(Forza Italia)을 창당하고 직접 정치에 뛰어 들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비디오 민주주의라는 평이 나왔을 정도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방송망과 신문들을 총동원하여 기존의 사회당과 기민당 지지층을 대거 확보했고, 성공한 기업가 겸 A.C 밀란 축구 구단주로서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총선에서 승리했으며 우파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집권 이후에는 북부 동맹과의 불화가 있어 결국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고 1996년 총선에서 참패해버렸다. 그러나 자신의 주특기인 미디어를 이용해 좌익 민주당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끝에 2001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였다. 2기 집권 당시에는 이라크 전에 참전하는 문제와 RAI 장악 등으로 여러모로 평이 좋지 않았고, 경제 정책도 생각보다 큰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하여 이전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평을 받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1당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하였는데 2006년 총선에서 아깝게 패배해버렸지만 득표율이 1% 차이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2008년 총선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며 3선 총리가 되었다. 세 번째로 총리가 되자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의 인민을 창당해서 2개 당의 당 대표까지 역임했다. 3기 집권 내내 이탈리아 경제는 악화된 상태로 떨어졌고 청년 실업률은 30~40%대까지 치솟아 결국 2년 만에 총리직에서 퇴진했다. 2013년 의원 임기가 종료되자 자유의 인민당을 정리했다. 2017년 지방선거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의외로 선전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2018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는 극우파 북부동맹을 포함하는 중도-우파 연합을 맺어 선거에 임했다. 때마침 집권 중이었던 중도좌파 민주당이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의 집권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선거법을 개정하여 원내 1당에게 다수의석을 부여하는 방식의 선거법을 철폐하고 정당 연합도 표를 받을수있도록 선거법을 통과시켜 놓았다. 그러자 베를루스코니를 싫어하는 유권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루스코니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부활하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이나 많은 국민들에게 무능한 정치인을 넘어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다. 특히 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인 난니 모레티는 거의 마이클 무어가 조지 W. 부시를 싫어하는 수준으로 베를루스코니를 극혐하여 베를루스코니를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움배르토 에코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이 언론과 결합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예로 들기도 했다. 바티칸과 한 때의 동맹이었던 우파 정치인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여성편력 또한 대단하고 갖가지 망언을 아무렇지도 쏟아냈다. 그래도 그가 이탈리아 내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감성과 문화를 자극하는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 가(家)와 그의 친인척들이 이탈리아 민영 언론을 독과점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더불어 2013년 이후부터 시민결합을 지지해왔고 동성결혼에 있어서도 적극적 반대가 아닌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는 결국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갖은 기행과 비행을 저질렀지만 유럽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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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 알렉세이 나발니의 일생과 죽음이 미치는 영향 - 1부
    푸틴 대통령과 대적한 러시아의 반 체제 인사이자 횡령 사기범인 알렉세이 나발니(Алексей Навальный)가 지난 16일 야말-네네츠 제 3교도소에서 사망했다. 푸틴과 맞서온 그의 인생을 함 조망해본다. 그는 1976년 생으로 모스크바 주 부틴이란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나발니(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Навальный)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이고 어머니 류드밀라 이바노브나 나발나야(Людмила Ивановна Навальная)는 러시아 출신으로 그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인 셈이다. 나발니가 우크라이나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의 부친이 우크라이나인이기도 했고 본인도 우크라이나계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2010년대 타스통신에서 한 나발니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자신은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지만 한켠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신의 가계의 대한 내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친우크라이나계 인사였던 보리스 넴초프와 가깝게 지냈고 크림 합병에 대해 찬성하긴 했지만 당시 정치인으로써 나발니의 세력이 미미했기에 우선 자신의 인지도에 상처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전 시위 선동에서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때도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즉, 그는 대놓고 러시아인이면서 반러시아 행세를 했던 것이다. 나발니는 모스크바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오브닌스크에서 자랐으나, 어릴 때 여름에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그의 할머니와 지냈다고 한다. 나발니는 본인 스스로 어린 시절을 회상했을 때, 키예프의 생활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례적으로 쉬꼴라를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옮겨 키예프에서 쉬꼴라를 졸업했다. 그는 몸과 국적만 러시아인이지 속 전체는 우크라이나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1993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러시아 민족 우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98년 법학학사학위를 취득했고 연방 지원 금융 대학에서 증권과 투자, 환전, 그리고 금융 경제를 공부했다. 당시 러시아의 입장에서 1998년 모라토리움 선언하는 등,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금융 경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존의 법학에서 금융경제학으로 잠깐 외유를 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원래의 나발니의 성향은 좌파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계에 입문했고 2000년 진보주의와 사회, 녹색자유주의, 친유럽 성향이면서 대표적인 친서방 리버럴 정당인 야블로코(Яблоко)에 입당한다. 이 정당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 경제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지지하는 정당으로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의 유럽 연합 가입과 미국과의 우호관계 수립 등 서방과의 관계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정당이다. 여기서 활동한 나발니는 친서방 인사 및 미국의 정계권 인사들과도 접촉을 가지며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발니의 영어 실력은 러시아어 억양이 강하기는 하지만 단어 및 어휘선택이 탁월할 정도 유창했던게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 2004년 나발니는 피부색이 다른 카프카스계 군인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사람은 총으로 죽여야 하지만 바퀴벌레는 슬리퍼로 밟아 죽여야 한다.”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카프카스계 민족들을 매우 경멸했는데 카프카스 지역의 민족들이 러시아 경제권에 진입해 러시아인들의 취업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서 이민족들을 매우 싫어한 것이다. 그는 2006년 반 외국인 성향을 띈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을 승인해 줄 것을 모스크바 연방 특별시 시청에 청원하고 참관인 자격으로 이 시위에 참여했다. 말 그대로 성향 자체가 인종차별적인 면과 과격한 전체주의 나치의 성향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보면 된다. 나발니는 카프카스,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양인을 혐오했는데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자체가 그와 같은 성향을 띄고 있다. 즉, 유색인종 차별, 과도한 폭력성 자체의 광기 어린 모습을 갖고 있었더 것인데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당시 갖고 있던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및 무시, 차별, 폭력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도 당시 모스크바 마야꼽스까야에서 푸쉬낀스까야까지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시위 행렬에서 목소리 구호를 외치고 연설하며 독려하는 나발니를 본적이 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지만 연설하며 독려하는 표정과 그 제스처가 어딘가 많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 선동하는 그의 제스쳐와 참 많이 닮았다. 물론 그가 나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네오나치는 아닌듯 싶다. 나치 표식을 몸에 새기지 않았고 나치라 할만한 어떠한 물건도 발견된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발니는 2007년 야블로코로부터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적 활동 등으로 당의 규정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렀다며 제명 되어 버렸다. 야블로코 당에서 제명당한 이후에도 나발니는 '러시아인의 행진'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면서 "러시아 인민해방운동(Национального Русского Освободительного Движения, НАРОД)" 정당을 창설했다. 그리고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이 발발하자 나발니는 극우로 돌아서 당시 대통령인 메드베제프와 푸틴 총리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루지야(현 조지아)에 대한 적극적 봉쇄조치가 필요하며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그루지야 참모 본부를 공격해야 하고 남오세티야 공화국 상공을 지나는 모든 항공기들을 격추시켜야 한다고 적어 논란을 일으킨다. 또한 나발니는 러시아 내에 있는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들(грызуны)"이라 비하하며 그들을 전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전쟁 이후에는 남오세티야 공화국과 압하지야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언급해 조지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남오세티아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그동안 공부한 금융경제학과 투자에 관한 전문성을 내세워 2008년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루크오일, 그리고 수르구트네프트 가스, 이렇게 5개의 가스 회사 주식을 30만 루블 어치를 사들여 주주행동주의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회사들이 소유한 금융 재산의 투명성을 강조했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금융 관련 부패가 심각했었고 이 부분이 정치권과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특히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등에는 상위 직원들이 횡령과 회사 투명성을 차단하는 행위를 자행했고 이를 파악한 나발니는 주 정부의 부적절한 예산 지출과 부실한 주 정부 서비스 등을 지적하면서 연방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친서방 리버럴에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 서방 리버럴 인사들과 교류가 두텁고 반골 기질까지 있는 나발니를 주목한 것은 미국 정가였다. 그는 2010년 미국으로 들어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일 대학에서 World Fellows 프로그렘을 수행했다. 최근 미국 대통령 여섯 명 중 네 명이 예일 출신일 정도로 미국 정가와 뿌리 깊은 관계를 갖고 있던 예일 대학에서 나발니 수많은 리버럴 정가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푸틴을 비판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어떠한 권유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때를 계기로 그는 철저히 반 체제, 반 푸틴 인사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딥스테이트의 개가 되어 러시아로 돌아와 체제 전복을 꾀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그가 가까워진 인물이 바로 보리스 넴초프다. 그는 넴초프의 지지를 받아 트랜스네프트 가스 회사의 비밀 회계 감사 자료를 공개한다. 이 때부터 그는 반 부패 활동을 시작한다. 행정상 필요한 물자 조달 등을 모든 러시아 정부가 온라인에 게시 및 공고하여 입찰을 하도록 하는 로스필 프로젝트를 촉구했다. 일반 개인이 도로에 있는 구멍들을 러시아 정부에 보고하고, 러시아 연방 정부가 불만사항들에 응답하게 한 로스야마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러한 행위는 러시아 우파 정당들의 공격을 불러왔고 결국 나발니는 러시아 인민해방운동 해산했다. 2011년 6월 로이터와 영어로 능숙하게 인터뷰 했는데 "푸틴의 정치 체제는 부패에 의해 매우 약화되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에서도 5년 이내에 아랍의 봄과 같은 반정부 데모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며 러시아 내 반 정부 시위를 벌일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체제 개혁을 진행 중에 있던 푸틴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며 이를 규탄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시위를 야기했다. 그로 인해 2018년까지 10차례나 행정구류(Административный арест)를 당해 총 192일 간 구금되기도 했다. 처음에 러시아 국민들은 그의 반 부패 조사 행위를 응원했다. 소련 해체 이후, 경제적 침체와 공무원들의 부패에 시달리고 있던 시민들의 지지는 갈수록 올라갔다. 여기에 힘을 받은 나발니는 여러 곳에서 후원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것의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발니는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은 그대로 갖고 있었는데 치과 의사로 변장해 외국인들을 '러시아 민족의 뿌리를 뒤흔드는' 충치에 비유하며 추방을 요구하는 영상을 올려 논란을 빚게 된다. 그런데 이 영상에 환호하는 지지자도 있었지만 반 부패 척결에 적극 찬성하는 시민들은 이 영상을 보고 나발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를 토대로 보리스 넴초프가 있는 인민자유당(Партия народной свободы, PARNAS)에 입당했고 넴초프의 후원을 받아 2013년 나발니는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선거 유세 과정에서 그의 인종차별적 발언 등이 도마에 오르자 블로그를 통해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라 비하한 것을 사과한다'고 말했으나 전쟁에 찬성했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조지아인들은 시장 선거가 아니면 그가 사과했을까?, 혹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지아계 러시아인들의 표가 급했을 것이라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즉, 아무도 그의 사과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남오세티아 전쟁에 찬성했던 것에 대해 해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다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와중에도 중앙아시아 이민자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코카서스 급식 중단' 캠페인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런 그를 카프카스 민족들 중 누가 진정성 있는 사과라 볼 수 있겠는가? 당시만 해도 이러한 인종차별이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선거가 시작되고 27.24%, 632,697표를 얻어 선전했지만 세르게이 소뱌닌에게 밀려 결국 큰 차이로 낙선했다. 물론 선전은 했지만 타 민족 러시아계 시민들이 소뱌닌에게 몰표를 던졌기 때문에 낙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거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이끌고 시위를 조장해 또 다시 구류 조치를 당했고 2014년 12월 30일, 그는 프랑스 화장품 회사 이브 로셰의 러시아 연방 지사 등으로부터 3,100만 루블 (약 5억 9천만 원)을 횡령하여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징역 3년 6개월 실형에 3년 6개월 집행유예까지 추가하여 7년 형을 받는다. 재판이 끝난 후, 러시아 연방 법원 건물 밖에 모여 있던 지지자들을 향해 "현 정권은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붕괴돼야 한다. 오늘 모두가 가두 시위에 나서 달라"고 촉구하며 내란을 조장했다. 그리고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사기꾼들과 도둑놈들의 정당' 이라 비판했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보였으나, 2017년 12월 25일 러시아 연방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의 횡령죄 판결에 따라 나발니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게 된다. 이에 나발니는 지지자들에게 대선 보이콧을 촉구하며 2018년 1월 28일 대대적인 시위를 예고했다. 그러나 해당 시위는 결국 불법으로 규정되어 그의 지지자들 상당수가 투옥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12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영웅이자 대부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 명(明)과 암(暗)
    볼리바르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스페인 세력을 격퇴한 호세 데 산 마르틴과 과야킬 회담을 한 이후, 부장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1795~1830) 를 보내 아야쿠초와 후닌 전투에서 스페인의 부왕(副王, Viceroy)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원래 스페인의 부왕은 본국 군주를 대신하여 한 지역을 통치하는 직책으로 다른 나라의 총독에 해당하고 직책이다. 참고로 19세기 독립하기 전 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 령(領)으로 총독 직할지였으며 페루에는 페루 부왕령이 설치되어 있었다. 페루를 해방시킨 볼리바르는 남미 대륙에서 스페인 세력들을 영구히 일소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볼리바르는 지금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에 해당하는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의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몰락은 이러한 정점에 오른 이후부터 시작된다. 연이은 반란이 발생했고 권력 투쟁이 빈번했다. 그러는 사이 페루 남부가 볼리비아 공화국으로 떨어져 나갔고 1830년에는 결정적으로 정치권에서 실각한 뒤, 콜롬비아에 들어가 여생을 살았다. 정계에서 반강제적으로 은퇴한 이후 볼리바르는 지지자인 호아킨 미에르(Joaquín Mier)의 별장에서 지병인 결핵을 앓으며 요양하고 있다가 콜롬비아 북부의 산타 마르타 근처인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San Pedro Alejandrino) 농장에서 폐결핵으로 인해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러한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는 명과 암이 뚜렷하게 나타난 인물이자 장, 단점이 명확한 인물로, 인간적인 면이나, 그의 정치 철학과 성향에 대해서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자(El Libertador)로써 군인과 군에서 리더로는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1813년 10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카라카스 시에 입성한 볼리바르에게 수여된 칭호인 "엘 리베르타도르(해방자)"는 아무에게나 찬사받으며 수여되는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볼리바르에게 늘 따라다니는 악평은 그가 진정으로 해방하고자 했던 것인 스페인 혼혈 백인인 크리오요였고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인종주의자의 틀을 벗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코뮤니즘 이론을 창설한 카를 마르크스가 185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볼리바르를 언급하며 "가장 비겁하고, 횡포하며, 비참한 악당"이라 평가절하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인도에서는 영웅일지 모르지만 인류적으로 볼 때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심했던 마하트마 간디와 놀랍도록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볼리바르에 대해 변명이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당시 남미에는 유럽계 백인과 백인의 형질이 강한 메스티소 인종들의 인구가 더 많았고 개국 이후, 지배층들이 차루아, 테우엘체, 카웨스카르, 오나, 마푸체, 아파치와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토벌 및 학살하고 무력으로 원주민 땅을 합병했던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등과는 달랐다. 이는 현재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페루 등이 속해있던 옛 그란 콜롬비아 지역은 백인, 메스티소, 흑인, 원주민 등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독립국가 수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골수 왕당파 성향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그란 콜롬비아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피흘려 건설한 자유 민주주의 정부가 원주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무너질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에 있었다. 볼리바르가 유년기 때 그를 보살펴주고 키워줬던 흑인 노예 이폴리타에 대한 호의적인 기억으로 인해 흑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부분은 간디와의 차별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배경으로 볼 때 볼리바르의 원주민을 배제하는 정책이 반드시 인종차별의 의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현재 스페인-라틴 아메리카 학계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볼리바르가 딱히 백인 우월주의자인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들도 많다. 볼리바르는 어릴적에 자기 또래의 노예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친하게 지냈고 아이티에 망명했을적에 백인과 흑인이 뒤섞인 혼성 군인 아이티 군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적어도 흑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차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볼리바르가 다른 독재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독재의 패턴이 다르고 다른 자유 민주주의자들에게 인정 받는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독재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보통 독재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초심을 잃고 변해갔던 자들이 많았다. 이와는 달리 볼리바르는 이제 막 독립한 남미가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큰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지배가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권력으로 부정축재를 벌이거나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의 독재자로써 흔히 나타나는 전횡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했으면 그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켰으며,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인물들도 주동자만 국외로 추방하고 나머지는 석방시켜주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평생 재산에 대한 욕심도 없었는데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고 물러났을 때, 의회에서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물론 원래부터 볼리바르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독립 운동을 하면서 가산을 거의 탕진했고,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퇴임 후, 자신이 돌아갈 집조차도 없어 호아킨 미에르의 집에 머물렀으며 모아 놓은 재산도 없었기 때문에 퇴임 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47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을때, 의사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낡고 해진 셔츠를 보고 놀랐을 정도로 그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통일 라틴 아메리카 건설이란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혔던 안타까운 실패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민지 독립의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아르헨티나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지만,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식민지는 미국이나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합된 단일 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국력을 키우지 못해 이후에도 큰 혼란을 겪었다. 이는 지리적인 요인이 컸는데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칠레와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아르헨티나의 경우 지정학적으로 안데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과 대서양 연안의 해안 저지대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 후 단일국가를 건설하기 수월했다. 그에 비해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남미 식민지들인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페루, 에콰도르는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밀림, 소택지 등 고립되고 험준한 지리 지형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국가들을 통합시켜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일 국가를 남미 대륙에 수립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도 악조건이 적지 않았다. 워싱턴이나 산 마르틴, 오이긴스보다 더 훨씬 악조건을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시킨 미국의 13개 식민지는 거대한 연방으로서 세계 패권을 장악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했고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식민지 칠레,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식민지 아르헨티나는 통합에도 성공했으며 독립 이후 한 동안 라틴 아메리카 역내에서 세계 5위의 선진국이자 강대국의 위세를 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옛 그란 콜롬비아는 안타까운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이들 국가들이 볼리바르의 이상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볼리바르의 개인적인 문제도 있는데, 일단 볼리바르부터 독재자가 되어 종신 대통령을 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이 새로 건국한 공화국을 다른 인물에게 물려주었다. 정치적인 독재가 가능했음에도 악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면서 두 번 재임 후 은퇴한 조지 워싱턴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또한 볼리바르는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영향 받기는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흑인과 다르게 잠재되어 있는 적으로까지 여겼다. 볼리바르는 흑인을 제외한 유색 인종을 멸시했는데 이는 원주민 공동체 토지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그의 기여로 남미가 독립한 이후 원주민들의 처우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 있어 볼리바르는 새로운 식민지 독재자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다수 민족인 원주민들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볼리바르를 국부로 인정하지 않고 존경조차하지 않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페루와 볼리비아가 지금처럼 독립국가로 존재하며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볼리바르가 주도한 독립운동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애증의 대상 중 하나로 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원주민들만이 아니라 중국인 등 황인종 및 노예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란 콜롬비아 건설 이후, 아이티의 '흑인 혁명'에 대해 여타 크리오요들과 같이 매우 급진적이고 위험하다 생각했으며 이후 1812년 제1 공화정 실패 이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이는 본인의 군대에 가담하는 노예에 한해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 후 1816년 1월 아이티의 흑인 대통령 페티옹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로 약속했고, 아이티의 도움이 그가 식민지 독립을 성취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이후 독립 투쟁에 가담한 노예 농장주들에게 지위를 보장하기로 약속했고 1821년 그란 콜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미루어 노예 농장주들과 약속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흑인에 대해서는 그나마 나았지만 시종일관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으며 아이티 방식의 혁명을 경계했다. 볼리바르는 흑인 반란에 대해 스페인의 침입보다 1,000배 더 나쁘다는 발언을 하면서 흑인들의 반발을 샀다. 동시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던 물라토 지지자들에 대해 정치적인 탄압을 자행하면서 흑인 혁명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였다. 이는 그가 혼혈이었지만 백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크리오요라는 특권계층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큰 논란이 되었고 치명적인 결점으로 비판받았으며 지금에도 자주 회자되는 사건이 구아이라 항구에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 대한 배신이었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볼리바르와 다른 라틴 아메리카 통합론자들의 사상적인 스승었고 독립 투쟁의 선구자(Precurser)로 불리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계의 거물이었던 인물이다. 또한 미란다는 볼리바르를 매우 총애했는데 그를 세계적인 베네수엘라인, 혹은 나폴레옹에게 미치지 않은 돈키호테라고 불렸고,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기도 했으며 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차르,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과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던 명사였다. 그러나 미란다와 볼리바르가 세운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이 잇다른 악재에 시달리게 되면서 스페인 왕당파의 군세에 의해 수세에 몰리는 등 상황은 악화되자 볼리바르 자신이 지키던 독립파의 중요 거점이었던 푸에르토 카베요의 산 펠리페 성이 함락되면서 미란다는 이대로라면 독립이 좌절될 것이 우려되었다. 우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816년 7월, 왕당파와 휴전 협정을 맺고 영국으로 가서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자신을 따르는 장교들을 이끌고 구아이라 항구로 간 미란다를 체포해서 왕당파에 넘겼다. 그 대가로 자기 자신은 왕당파에게서 풀려나 미란다와 자신이 헌신했던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을 떠나 자메이카로 도주하는 역대급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 볼리바르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게 내린 죄목은 황당하게도 반역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볼리바르에게 있어 두고두고 흑역사로 남았다. 후일 본인이 실각된 후, 가장 후회되는 사건이라 회고한 것도 "구이아라 배신 사건"이었고 이는 볼리바르의 어두운 부분을 두고 두고 규탄당하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볼리바르는 정치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실패한 인물이지만 라틴 아메리카를 독립시킨 영웅으로써 가치는 아직도 살아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호불호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국부로써 존경도 받고 미움도 함께 받는 애증의 인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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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쿠르디스탄과 이스라엘의 관계, 마냥 우호적인가?
    나는 늘 그렇듯이 터키 디야르바크르에서 쿠르드족과 쿠르디스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디야르바크르의 분위기는 반(反) 터키 정서가 여전하다. 쿠르디스탄의 수도는 디야르바크르이고 쿠르디스탄의 영토는 북쿠르디스탄, 이라크 쿠르디스탄, 로자바 쿠르디스탄으로 나뉘어 있다. 디야르바크르는 북쿠르디스탄에 속해 있다. 디야르바크르를 걸어보면 중심대로인 가지대로에 이스라엘 국기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보통 국기라면 어딘가에 내걸거나 하는 것이 원칙인데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는 밟고 가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한 나라의 상징인 국기 모형이 이렇게 일반인들에게 지저분하게 밟히는 것은 해당 국가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 없다. 그 대신 팔레스타인 국기는 도처에 팔고 있는데 이스라엘 국기처럼 바닥에 새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대한 쿠르드인의 감정이 어떤지 물어보니 10명에서 7명은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스라엘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은 "배신자(Betrayer)" 라는 것이고 팔레스타인 문제가 그 다음이다. 모두들 쿠르드족이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 쿠르드족은 현재 이스라엘을 증오하고 있다. 왜 그러는 것일까? 1931년 유태인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의 한 인물이 쿠르디스탄에 잠입했다. 그는 현 팔레스타인 땅에 유태인들을 들어가게 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디야르바크르를 방문해 쿠르드인들을 비롯한 그곳의 비 아랍권 세력들, 이란 및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인들과 접촉하여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장기적 비전을 구축하려 했다. 그는 쿠르드인에게 미국과 영국 및 서방 국가들이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한 국가를 건국할 것이니 이 건국을 지지해주고 또한 지원해준다면 쿠르드인이 터키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적극 지지하며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라크와 아르메니아 일대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달라 요청했고 이런 그의 제안에 쿠르드인들은 이 모사드 요원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모사드 요원이 바로 모사드 정보기관의 창립 국장인 레우벤 실로아흐(ראובן שילוח)이다.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이 만들어지는데 쿠르드인들이 이를 적극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을 당시 이라크의 유태인들은 이란 왕정과 이스라엘 정부, 쿠르드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쿠르디스탄 지역을 통과하는 조건으로 이라크를 탈출했다. 한편 쿠르드인들은 이 기간 동안 터키 내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켜 터키의 관심을 소요 사태로 향하게끔 하고는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큰 관심을 쏟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돕기도 했다. 쿠르드인은 17년이 지난 상황에도 이스라엘의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따라서 비 아랍권 국가 중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또 다른 비 아랍권인 쿠르드인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1958년부터 이스라엘은 이라크의 쿠르드인 무장단체 페쉬메르가를 1970년대까지 지원하기도 했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이스라엘군은 쿠르디스탄 지역으로 파병하여 병원을 지어주기도 했고 식량과 무기도 지원하면서 그들의 무장 독립 투쟁을 도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끝내 돕지 않았다. 무장 독립 투쟁에 식량과 무기 지원하며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서 쿠르드는 터키와 이라크를 대신 싸워주면서 이들 국가들의 국력을 낭비하게끔 하는 존재로 이용했던 것이다. 1975년에는 이란(팔라비 왕조)-이스라엘-쿠르드가 삼각 동맹을 맺어 이라크를 견제하여 중동 국가들을 상호 간 혼란에 빠지도록 했다. 이후 이란에서는 이란 혁명이 나타나 제정이 폐지되고 새로운 신정 정부는 반미와 반 서방, 반 이스라엘주의를 내세우며 이들 동맹에서 이란은 제외되었고 이스라엘과 쿠르드의 동맹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 때 호메이니의 탄압을 받던 일부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과 다수의 쿠르드인들은 서로 협력적인 관계가 되었고,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체적인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라크 쿠르디스탄에서는 반이스라엘 보이콧이 적었으며 북쿠르디스탄에는 이스라엘을 더욱 응원하는 등 오히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만든 제품들을 적극 사용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쿠르드인들이 훨씬 이득이었다. 적대국에서 소요사태를 일으켜 이스라엘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그와 같은 혼란 기간 동안 중동과의 잇달은 전쟁에서 소모된 국력을 그 사이에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쿠르디스탄의 독립 국가 승인에는 매우 미온적으로 나왔다. 이스라엘이 약속을 지키진 않지만 주변 중동 국가들에게 있어 미운 털이 박혀온 쿠르드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에 독립을 승인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했다. 이미 이스라엘과 공동 운명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2000년대에는 이스라엘 군과 정보기관 요원 수백명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지역과 이란, 시리아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쿠르드 특수부대원들을 훈련시키며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 능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국-이라크 전쟁에서 결국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이 타도되고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시아파 민병대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쿠르드인 특수부대를 활용하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란 영토내에 이스라엘 첩보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려 했다. 이 또한 쿠르드인들이 적극 도왔고 사담 후세인이 타도 되었을 때, 최소한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기대했지만 미국 측에서 이를 거부해 이들 또한 독립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런 미국을 전혀 설득하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이 미국에게 쿠르디스탄 독립을 반대했다는 설도 나돌고 있다. 게다가 쿠르드족 독립의 운을 띄워주면서 이라크 내 수니ㆍ시아파와의 갈등 및 이란을 견제하는 효과까지 한꺼번에 노리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전략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2017년 이라크 쿠르디스탄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이었다. 그리고 2019년 터키가 본격적으로 쿠르디스탄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네타냐후 총리는 본인의 트위터에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쿠르드 지역에 대한 터키의 침략을 규탄하고 터키와 그 대리인들의 쿠르드족 인종청소에 경고한다(Israel condemns Turkish aggression against Kurdish areas in Syria and warns of ethnic cleansing of Kurds by Turkey and its proxies)."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용감한 쿠르드인들에게 인도주의적 도움을 줄 준비가 됐다(Israel is ready to provide humanitarian assistance to brave Kurds)고 했다. 이건 쿠르드인 입장에서는 웃기는 일이다. 쿠르드인이 원하는 것은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으로부터 완전한 쿠르디스탄 공화국을 설립하고 독립하는 일이다. "인도적 지원(Humanitarian assistance)"이라는 단순한 사탕발림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립과 정부 수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쿠르드 독립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쿠르디스탄으로 인해 중동에서 새로운 소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경계했다. 따라서 터키군이 쿠르드군을 공격한 것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묵인 아래 진행되었던 것이라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고민이 컸던 것이다. 당시 쿠르드인은 시리아에서 미군을 도와 IS 격파에 나서서 실제 이들 토벌에 공을 세우고 막대한 인원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이 시리아 철군을 결정하면서 터키군 군사작전에 불개입을 선언했다. 쿠르드인들은 미국과 서방국가, 이스라엘 등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셈이 되었다. 당시 AFP통신은 "미국 지도자의 쿠르드인 포기는 이스라엘에 깊은 우려를 초래했다"고 분석했을 정도니 이스라엘의 고충 또한 알만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미국의 손을 들어주며 또 다시 쿠르드를 배신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2019년 하반기에 유태인들은 2000년 동안 박해와 추방으로 고통받았다며 이스라엘에는 쿠르드 출신 유태인들이 많고 중동에서 온건하며 서방 친화적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쿠르드인들은 이 때 이스라엘에게 자치독립을 추구하는 쿠르드인과 군사 · 경제 등에서 우호 관계를 유지하명서 정작 팔레스타인의 자치독립은 인정하지 않아 그 모순점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작년 10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벌어지자 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응원했다. 이제는 쿠르드 노동자당인 피케이케이조차도 이스라엘을 돕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 쿠르드인들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이스라엘은 이 모든게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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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8
  • 나토,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에 돌입, 가장 유력한 지정학적 전략의 요충지는 폴란드
    폴란드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고는 러시아의 위협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는, 만일의 위협에 대비해 군의 규모를 기존보다 크게 키우기로 결정했다. 2024년까지 국방비를 GDP의 2.5% 수준까지 증액하고 2035년까지 5,240억 즈워티(한화 약 151조 4720억 원)를 투입해 군대를 현대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15만 명이었던 정규군은 25만 명으로, 2만 명이었던 향토방위군은 5만 명으로 대폭 확대해 폴란드군을 현재의 2배 정도 규모로 키워서 나토 중에서도 매우 규모가 큰 군대로 만들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국방비도 GDP의 5%까지 증액했다. 팔레스타인이나 아랍 세력과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GDP 대비 국방비가 5.2%이고 역시 북한과 언제든지 군사적 마찰을 상정해야 하는 대한민국은 2.43%가량이나 되니 국방비를 5%나 지출하겠다는 것은 거의 전쟁 발발이 임박한 위기 상황에서나 생각할 만한 수준이기에 폴란드가 대단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국과 자국 국민에게 심각한 위협을 끼치지 않는 한, 남의 나라를 침공하지 않으며 미국처럼 전 세계에 대부분의 분쟁에 참견하여 그들의 피로 돈을 벌진 않는다. 다만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삼국분할, 독, 소의 침략 등의 역사가 중근세사에서부터 현대사까지 몰려 있기에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의 1인당 GDP는 18,000불 정도다. 서유럽에 비해서는 한참 뒤떨어지고 체코 (GDP 27,000불), 슬로베니아 (GDP 29,000불)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고 크로아티아 (GDP 17.600불)와 비슷하며 헝가리 (GDP 19,000불)보다 떨어진다. 게다가 쉥겐 협약에 가입이 되어 있고 쉥겐 협약 국가들 왠만하면 유로 화폐를 쓰고 있지만 폴란드는 자국 통화인 즈워티가 유로 통화를 감당할 수 없기에 체코 통화인 코루나가 사라지고 크로아티아도 자국 통화인 쿠나를 버리고 유로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북반구 동유럽 국가들 중 유일하게 자국 통화인 즈워티를 쓰고 있다. 이는 여전히 폴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경제력이 후달리는 것과는 별도로 강한 군대 육성을 위한 폴란드의 병기 조달 방안 중 하나로 2022년 7월 27일 대한민국과 맺은 K-2 흑표·K-9 자주곡사포·FA-50 구매에 대한 기본 협정의 큰 틀에서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 방산계약까지 체결하고 군비 확충을 서두르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에게 속절없이 패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우크라이나가 붕괴되면 다음 차례는 폴란드가 될 것이라는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방산 계약으로 무기를 사들인 것과 별개로 나토와 폴란드에 핵무기 배치하는 것도 따로 논의하고 있다. 얀제이 두다 대통령은 지난 4월 22일 폴란드 팍트(Fakt)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동맹국들이 나토의 동쪽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핵무기 공유의 일환으로 폴란드에 핵무기 배치를 결정한다면 이를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 (Jesteśmy gotowi zaakceptować decyzję naszych sojuszników o rozmieszczeniu broni jądrowej w Polsce w ramach porozumienia o współużytkowaniu broni jądrowej w celu wzmocnienia wschodniej flanki NATO).”고 밝혔다. 두다의 이와 같은 강경 발언은 최근 러시아가 벨라루스와 칼리닌그라드에 군비를 강화하며 나토의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이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발언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다음 날, 23일의 성명에서 러시아군이 폴란드 내 핵 배치와 관련한 상황들을 분석하고 모니터링 할 것이라면서, 폴란드에 핵무기가 배치될 경우 러시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들이 취할 것이라 경고했다. 라브로프 외무장관 또한 이날 성명에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3개 국을 지목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들의 지원이 세계 최대 핵 보유국들 간의 직접적인 대결 위험을 높이는 심각한 전략적 위험을 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토는 공식적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지역보다 발트 3국 및 폴란드는 이제 서서히 나토와 러시아 간의 대립에서 지정학적 요충지 및 충돌 가능한 유력 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렇기에 폴란드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방산 거래를 통해 추가 무기들을 계속 확보할 가능성이 커졌다.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부 장관인 브와슈차크가 밝힌 바에 따르면 계약의 세부 사항으로는 K-2 및 K-9A1의 120mm, 155mm 포탄 및 기관총 탄약, 폴란드군 병사를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포함한 K-2 흑표 전차 패키지가 33억 7천만 달러, K-9A1 자주곡사포 패키지 24억 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폴란드가 이 대금을 완납했다는 이야기가 아직까지 없다. 국제 신용 평가 기관인 S&P는 폴란드의 통화 등급을 A/A-1로 유지하고 있으며 안정적이라 봤지만 폴란드와 EU 사이의 정치적 긴장으로 인해 기금 이전이 지연될 경우, 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S&P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폴란드 경제의 중기 성장 전망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러 리스크가 큰 곳에 계약을 했다면 철저한 감독과 리스크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그와 같은 감독과 리스크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폴란드와 방산계약부터 현재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도 전면 재검토 할 의지조차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폴란드를 무조건 믿는 것으로 퉁친다면 변동이 심한 동유럽의 상황으로 볼 때 우리는 호구가 될 가능성이 높고 러시아와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 최악으로 치달아 우리가 잃는게 더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매우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줄 아래 시퍼런 칼날들이 무수히 박혀 있는 상태에서 매우 아슬아슬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이럴 때 우리는 매우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단순히 방산 계약 성공에 환호하면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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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 민족주의, 전쟁, 학살 등 보스니아 - 크로아티아 전쟁의 전범,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이 법정에서 음독 자결한 이유
    2017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 법정에서는 모스타르 학살을 주도한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이 11월 29일 최종 판결을 위해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당시 이 재판은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보스니아 무슬림에게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그에게 20년 형을 선고했다. 판사는 프랄략에게 죄를 인정하는지를 묻자 “Bull shit (헛소리)! 나 프랄략은 전범이 아니다. 당신의 판결을 경멸하며, 거부한다(Ja, Praljak, nisam ratni zločinac. Prezirem i odbacujem tvoj sud).”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병에 든 액체를 마셨다. 이 액체를 모두 마신 뒤 “방금 내가 마신 것은 독약이다(Ono što sam upravo popio bio je otrov)”라고 소리쳤다. 이는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희대의 자살극이었다. 그러자 재판은 중단되었으며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현대적인 국제전범재판이 시작된 이후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희대의 사건이었다. 무엇이 프랄략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그 죽음에 대한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정에서 자살로 사망한 프랄략은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꽤나 유명한 연극인이었다. 그는 희곡작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각국 언론들이 프랄략이 독약을 마시기 전후 그의 외침 자체가 연극 대사와 같았다고 판단한 이유가 그의 본 직업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살아 있다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연극계 원로로 평온한 노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바뀐 것 역시 보스니아 전쟁 때문이었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공화국 대통령이 이끌고 있던 크로아티아 민주동맹의 창당 인사 중 한명인 프랄략은 크로아티아 방위협의회(HVO,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의 사령관을 맡으면서 군인으로 변모했다. 전쟁 초기인 1992년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은 상호 협력적인 관계였다.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및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민병대가 포위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부의 도시인 모스타르를 보스니아 무슬림들과 함께 지켜냈다. 하지만 1993년 초,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카톨릭 세력 간에 전쟁이 발생했고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 간의 전쟁에서 모스타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것은 이 프랄략의 군대였다. 이 전쟁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인 거주지역을 병합하여 완전한 크로아티아의 영토로 만드려는 투지만 대통령이 기획한 전쟁이었다. HVO 크로아티아 민병대는 모스타르 내, 외부의 무슬림 거주민들을 집단 추방했다. 당시 수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약 1만여 명이 수감됐다. 수감자 중 노인과 여성은 학대를 받았고 상당수가 학살되었다. 피해자들에는 세르비아계사람들과 집시도 포함되었다. 프랄략이 사망하기 1주일 전, 역시 ICTY에서 민족학살과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라트코 믈라디치 세르비아계 스르브스카 군 사령관 또한 모두가 거짓말이라 외치면서 판결에 승복하지 않은 것과 같이 프랄략도 이 판결을 거부했다. 종신형을 받은 믈라디치와 다르게 프랄략은 고작 20년 형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하지 않았더라면 가석방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는 ICTY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13년을 복역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형기의 3분의 2을 마친 죄수는 석방시키는 것이 관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머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 자살을 한 이유로 볼 때 스스로 전쟁 때부터 만든 원칙인 크로아티아 독립과 통합이라는 하나의 대의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날 10~25년 형을 받은 6명의 전범들은 모두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로 모스타르 학살과 관련이 있었다. 물론 세르비아계에 비해 전쟁 범죄에 대한 규모는 적었던 것으로 판단했지만 크로아티아계 역시 민족청소,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 것이 이 날 재판 판결의 핵심이었다. ICTY는 투지만이 스스로 녹음해 두었던 방대한 대화와 통화 녹음 테이프를 통해 투지만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의 HVO 군에 돈과 차량, 무기 및 군지휘관을 지원한 배후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는 보스니아 전쟁 범죄의 주체는 세르비아계라는 국제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크로티아계 역시 투지만으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 기획 범죄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밝혔다는 것에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ICTY는 프랄략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이날 판결 내용을 거듭 확인했다. 전쟁 범죄를 저질렀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을 포함해 범죄집단(Joint Criminal Enterprise)이라는 용어를 새로이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세르비아계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민족 청소의 주범으로 세계의 지탄을 받았었다. 그러나 당시의 판결로 인해 크로아티아계까지 민족 청소의 주범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ICTY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재판 중 옥사한 것과 다르게 투지만은 ICTY가 기소를 완성하기 전인 1999년 자연사했다. 물론 그가 살아 있었다면 크로아티아인들이 국부로 모시는 투지만 역시 ICTY 법정에 섰어야 했다. 믈라디치와 마찬가지로 프랄략은 투옥되면서 복역 중에 양심수였고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했었다. 믈라디치가 판결 이후, 자신은 이미 늙은 사람이라서 이와 같은 판결은 중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족들에게 앞으로 남길 유산이라고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랄략이 법원에서 한 절규는 자신의 무죄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크로아티아계가 전후 누려온 면책이 끝나고, 또 다른 악마화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죽음으로 항변하려 했던 듯 싶다. 믈라디치가 현재 세르비아인들의 영웅인 것과 같이 프랄략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있어 영웅이자 순교자로 여기고 있다. 보스니아 내, 외부의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았고 그를 카톨릭의 성인으로 받드는 분위기까지 감지되었다. 당시 11월 29일 당일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지역에서는 프랄략에 대한 추모 미사와 촛불 추념회가 열렸다. 당시 안드레이 플렌코비치 크로아티아 총리는 프랄략의 자살이 ICTY의 부당한 판결 결과에 대해 저항하라는 메시지였다고 말했다. 당시 보고를 받은 콜린다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급거 귀국했고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대통령은 지난 주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열렸던 공식행사에서 세르비아계의 공격으로부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방위한 프랄략 장군의 위업을 평가하는 책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해자인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반응은 달랐다. 전쟁 중 크로아티아계에 구금됐던 한 무슬림 퇴역 군인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슬픈 일이다. 하지만 프랄략은 형량을 다 채웠어야 했다(Žalosno, ali Praljak je trebao odslužiti kaznu).”고 언급했다고 한다. 보스니아 내전 이후, 사망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의 아들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프랄략씨는 훌륭한 영화감독이었다. 모스타르를 파괴하는 대신 모스타르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Gospodin Praljak je bio veliki filmaš. Umjesto što je rušio Mostar, trebao je snimiti film o Mostar).”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을 끝으로 ICTY는 껄끄러운 상태에서 끝을 보게 됐다. 당시 선고는 1993년에 설립된 ICTY가 문을 닫기 전에 열었던 마지막 공판이었다. 이는 희대의 자살사건 때문에 명예롭지 못한 퇴장을 하게 되었다. 프랄략의 자살은 국제 사회가 주장해 온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보스니아 전쟁 이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무슬림 사회에서는 극우적인 민족주의가 더욱 견고해졌다. ICTY가 막으려고 했던 악의 근원이 바로 이와 같은 비뚤어진 심리의 민족주의 이념이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가장 중요한 전범 재판이었다는 ICTV가 과연 정의를 구현했을지는 알 수 없다. 무슬림과 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 카톨릭계가 연방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하게 종결된 전쟁, 보스니아의 평화는 아직도 위험한 줄타기를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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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 독일과 폴란드의 무역전쟁 이야기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립한 폴란드는 20세기 초, 독일과의 북부 실레지아 분쟁이 터지면서 심각해졌다. 북부 실레지아 영토 분쟁이 쉽게 해결되지 않으면서 결국 주민투표를 통해 북부 실레지아의 73%를 독일에 귀속시켰으며 25%를 폴란드에 넘겨주고 나머지 2%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넘겨주어 분할된다. 이러한 실레지아 분할 사건은 독일과 폴란드, 양 국민들의 애국심을 자극했다. 이는 독일 입장에서 볼 때 당시 폴란드에게 넘어간 25% 지역이 인구의 40%가 넘는 비교적 높은 비율이 거주하면서 북부 실레지아 전체 산업시설의 80%가 위치한 핵심 지역이었기에 독일 측의 불만은 대단했다. 그 중에서 카토비체와 쾨니히스휘테, 루블리니츠 등의 주(州)들은 독일 측의 표가 더 많이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로 넘어간 지역이 있었다는 점에서 더욱 억울했다. 폴란드 입장에서는 독일계가 더 많이 거주하는 대도시들은 독일 표가 더 많이 나오긴 했지만 그 도시들을 둘러싸고 있는 농촌 지역은 폴란드 표가 더 많이 나왔음에도 대다수가 독일에 잔류하게 된 것 또한 불만이었다. 이처럼 애매한 주민투표의 결과 때문에 주민투표를 주도한 협상국가들도 양국 국민들과 정부의 강한 비판에 직면했다. 결국 국제 연맹이 중재에 나섰고 이를 통해 1922년 제네바에서 독일과 폴란드, 양자 간의 합의로 겨우 실레지아에 대한 재분할이 이루어졌지만 이 또한 양국이 모두 만족할 해결책은 아니었다. 1924년 10월 26일, 독일 신문 프랑크푸르터 자이퉁(Frankfurter Zeitung)에서 처음으로 폴란드에 대한 무역 공격을 시사하는 사설이 게재되었다. 해당 사설에 의하면 '폴란드의 무례함을 공격하여 분쇄하기 위해' 폴란드의 모든 수입품에 대한 관세를 매기고 이를 통해 폴란드에게 매우 "결정적인(Entscheidend)" 타격을 입힐 수 있다고 서술했다. 그리고 당시 독일 수상 빌헬름 마르크스(Wilhelm Marx)는 1924년 11월 비밀리에 폴란드산 물건에 대한 수입 거부 조치 준비를 지시했다. 우선 북부 실레지아의 73%만 차지하게 된 독일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의 조항들을 무시하고 1925년 1월 6일부터 폴란드의 석탄, 철광석과 강철에 대해 무관세를 철폐하고 수입을 거부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폴란드의 국민들이 독일에 대해 크게 반발하며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고, 브와디스와프 그랍스키 (Władysław Grabski) 폴란드 수상이 독일에 강하게 항의했지만 독일의 한스 루터(Hans Luther) 수상도 더 이상 물러서지 않겠다면서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 실레지아 전체를 폴란드가 독일에게 돌려줄 때까지 수입거부와 관세를 유지한다고 발표했다. 당시 포즈난의 경우, 이미 독일 제국 시절에도 폴란드인이 더 많이 살았기 때문에 독일에서도 포즈난 만큼은 예외로 두었다. 실레지아 땅이자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가 가져간 카토비체 지역은 오버 슐레지엔의 주도로 독일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이 지역이 폴란드에 넘어간 이후 독일은 오버 슐레지엔의 주도를 오펠른으로 옮겼으니 자신들의 영토의 주도를 침탈한 폴란드에 대한 악감정이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당시 폴란드에서는 단 한 치의 영토도 내줄 수 없다며 버텼다. 특히 독일이 무역 전쟁을 철회할 의사가 없는 것이 명백해지자 폴란드 역시 1925년 5월 독일산 공산품에 대해 대대적인 보복관세를 매겼다. 그러자 독일은 이와 같은 폴란드의 보복을 예상했었다. 1925년 6월 폴란드의 모든 제품에 대해서 최소 50%~최대 200%에 달하는 수입 관세를 매기기로 결정했다. 당시 국가 무역의 40%를 독일에 의존하던 제2 폴란드 공화국은 독일에 반발했으나 독일의 이와 같은 보복 조치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심지어 독일은 폴란드가 영국의 차관을 얻는 것까지 막고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1925년 7월이 되자 오히려 수세에 몰린 폴란드는 독일에게 영토 문제에 대한 협상을 할 것이니 무역 전쟁을 철회하자고 제안했지만 독일은 단치히, 폴란드 회랑, 실레지아의 즉각적인 전체 반환 없이는 일체의 협상도 없다며 이를 완전히 거절했다. 1925년 8월 당시 독일 중앙은행인 라이히스방크(Reichsbank, 제국은행)의 총재인 얄마르 샤흐트(Hjalmar Schacht)는 폴란드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약간이라도 늦춘다면, 독일이 영토를 회복하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며 당시 파울 폰 힌덴부르크(Paul von Hindenburg) 대통령에게 진언했다. 그리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폴란드와의 협상 자체를 중단할 것이며 앞으로 재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내각에 밝혔으며 이는 그대로 승인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폴란드는 국제연맹에 도움을 요청했다. 마침 1926년에 독일이 국제연맹에 가입했기 때문에 기타 국제 연맹 국가들을 통해 호소하려 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베르사유 조약이 독일에 지나치게 혹독했다는 이유로 독일에 동정적이었던 흐름이 생기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국제연맹은 독일과 폴란드의 평화적 해결을 주문한다며 시간만 끌게 된다. 국제연맹에서는 대공황 때까지 무역 전쟁의 결론을 내지 못했다. 1929년 9월, 미국에서 대공황이 터지면서 결국 무역 전쟁은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 독일, 폴란드 둘 다 대공황으로 인한 후폭풍이 상당했기 때문이며 특히 독일과 폴란드는 서로에게 보호무역 조치를 더더욱 강화했고, 이 때문에 양국의 무역량은 바닥을 치게 됐다. 결국 독일과 폴란드는 미국, 영국, 프랑스보다 더욱 큰 GDP의 하락을 보이게 된다. 특히 독일보다 폴란드가 심각졌기 때문에 1929년부터 1933년까지 폴란드의 총액 GDP는 20.7% 감소했고 실업률은 47%까지 증가했다.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독일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과 독일 공산당의 세력이 급격히 커졌다. 이에 독일 사회민주당과 독일 카톨릭 중앙당은 정치력을 상실하게 된다. 결국 독일 내부에서는 폴란드와의 협상 분위기는 더더욱 어렵게 되어 버렸다. 이후 1933년에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에 비해 폴란드에 유화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는 당시 독일이 재군비도 안 한 상황에서 폴란드와 무역 전쟁을 지속하는 것은 당시 열강인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한테도 이미지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틀러가 먼저 당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Józef Piłsudski) 폴란드 국가원수 앞으로 독일-폴란드 간의 무역 전쟁을 해결하자는 전보를 보내고, 이를 받은 피우수트스키가 즉시 폴란드 정부에 독일과의 협상을 시작할 것을 요청하면서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은 거의 마무리 단계에 들어가게 된다. 1933년 10월 먼저 독일이 최고 200%까지 매겼던 폴란드 제품에 대한 관세를 20%로 낮추고, 폴란드 역시 11월 독일 제품에 대한 관세를 20%로 낮추었다. 그러한 상태에서 독일과 폴란드는 상호간의 독일-폴란드 불가침조약을 맺었고, 부속 조약으로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이 조약은 1934년 3월 2일부로 효력을 발휘했고, 독일-폴란드 무역 전쟁은 무려 9년 2개월만에 해결되었다. 독일-폴란드 자유무역협정에서 독일과 폴란드의 공산품에 대해서는 상호 무관세, 농산물에 대해서는 상호 5%의 관세를 매기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독일과 폴란드 모두 무역 전쟁으로 심한 타격을 받았다. 일단 독일은 끝내 폴란드에게서 요구한 영토를 돌려받지 못했다. 무역 전쟁을 9년이나 지속했기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도 독일 제국 시절 폴란드 땅에서 사업을 하던 수많은 기업들이 파산할 수 밖에 없었다. 폴란드도 무역 전쟁으로 인해 외화 수입이 끊겼기 때문에 큰 타격을 입어 1920년대에 시작하려 했던 공업화를 한참 이후로 미루어야 했다. 결국 폴란드는 1933년까지 농업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1939년 히틀러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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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5
  • 세속적인 이슬람, 타타르스탄 러시아 연방 자치공화국
    구소련 지역 이슬람권이 거의 그렇지만 타타르스탄도 세속주의적 경향이 짙다. 그렇기 때문에 술은 할랄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며 음주하는 무슬림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는 세속주의 성향은 약화되고 있는 편이다. 볼가-우랄의 이슬람 맹주로 자처하는 타타르스탄의 이슬람, 즉 유로 이슬람(Euro-Islam)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타타르스탄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 강력히 전파된 이슬람 개혁 운동인 자디드 운동(Jadidism)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자디드 운동은 일종의 문화 개혁 운동적인 성격을 가지며 미신 타파와 구습 탈피를 통한 현대 이슬람 정착과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한 교육의 장려가 목적이었다. 이는 실제적으로는 이슬람 정통성에 대해 자유주의 색체를 가지는 것으로서 극단적인 이슬람 혁명이나 지하드를 통한 이슬람 제국 건설을 추구하기보다는 품위 있는 훌률항 지성인으로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좋은 이미지의 이슬람을 추구하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 이와 같은 양상이 이슬람을 기반으로 다른 종교도 공존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현재 타타르스탄에 건설된 모스크 갯수는 1990년 100개 남짓이던 모스크는 꾸준히 증가하여 2008년 통계에는 1,055개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서 무슬림화가 되는 비율은 계속적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결국 타타르 민족이 역사적인 배경이나 관용적으로 보이는 이슬람의 색채에 따라 모든 종교를 다 수용하지만, 어떠한 것도 이슬람보다는 우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정체성으로부터 오는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라 본다. 유로 이슬람의 진정한 본질은 유럽적인 정체성을 지향하며, 폭력보다는 평화적 공존을 주장한다는 부분에 주목하면서 대체적으로 유로 이슬람의 역사적 기원, 현재적 특성 등을 고찰하고 있다. 유로 이슬람의 기본적인 특성은 현대적이고 개혁적이며, 평화 공존적이며, 친서구적 이상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유로 이슬람은 유럽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구 사회의 문화적 이념과 서유럽과의 공존의 의식을 추구한다. 이는 남녀의 양성 평등, 인간의 태생적 존귀성과 더불어 이슬람의 본래적 관용성의 가치를 추구한다. 유로 이슬람은 기존의 이슬람 관념의 가치에서 벗어나 있다. 유로 이슬람은 좀 더 세속적인 방향의 이념으로 발전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 무슬림들은 세계화 및 정보와 혁명에 의해 제공된 기회의 이점을 활용하면서 자신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이념으로 조정해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슬람 세계의 국가들이 지역 및 글로벌 의제에 관한 많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세계 질서를 수립하는 것에 있어 러시아의 전통적인 파트너라며 젊은이들이 이러한 건설적인 다면적 상호 협력에 보다 많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 장관도 러시아와 OIC(이슬람 협력 기구) 회원국 간의 관계가 상승하고 있다면서 러시아는 평등과 상호 이익, 문화 및 문명적 정체성에 대한 존중, 발전 방향을 독립적으로 결정한 권리를 기반으로 협력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서방이 널리 분파시킨 잘못된 가치, 주권을 수호하는 국가를 고립시키려는 시도를 러시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언급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청소년 정책 포럼의 개최지로 러시아의 카잔시를 선택한 것은 러시아와 OIC 회원국 간의 관계가 다면적이며 국제 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하여 OIC는 카잔을 이슬람 청소년 정책 도시로 선정하고 글로벌 청년 서밋을 개최했다. 카잔의 서밋에는 OIC 국가 총영사, 기업가 및 국제단체대표 등이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 이란, 리비아,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50여개국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관계자가 참석했다. 대다수 현지 언론들은 러시아 연방국이지만 전통적으로 인구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는 타타르스탄에서 이슬람 국제 행사를 개최한 것을 매우 전략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분석했다. 서밋 개최지인 카잔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이기는 하지만 백인 국가인 러시아에서 이슬람 국제 행사를 개최한다는 것은 이슬람 특유의 배타적인 문화에 빗대어 보았을 때 매우 이례적이며 최근 이슬람 국가들과 러시아와의 관계 변화를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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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 프랑스 대통령의 발언, 유럽 전체의 파국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도박
    최근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매우 위험한 발언을 표명하면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왔다. 이것은 프랑스 핵무기가 유럽 방위의 일부분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언급한 발언이다. 즉 프랑스의 핵무기가 자국 방어를 위한 목적을 넘어서서, 유럽의 핵 억지력 강화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프랑스의 핵 교리에도 분명히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핵 강국인 러시아에 대한 자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프랑스가 핵보유국이 된 까닭은 적은 핵무기로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외부의 실질적 위협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독자적으로 방어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또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프랑스로서는 이 점이 특히 중요했다. 사실 프랑스는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핵실험을 남태평양에서 실시했으며, 지하 핵실험도 감행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 해외령이 남아 있는 프랑스로서는 세계에 어디서든지 자국의 영토에 대해 위협이 된다면, 이에 대한 핵 반격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이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샤를 드골 대통령이 프랑스의 핵무장을 추진했던 것은 미국의 핵우산 정책에 대한 신뢰성 때문이다. 거기에는 유럽이 당시 소련의 재래식 공격을 받았을 때에, 미국이 과연 핵 보복을 선제적으로 할 것인지, 그리고 이때 어떤 사용조건인지에 관해 드골 대통령의 합리적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핵 보복을 감행할 때 내세웠던 전제조건은 소련의 재래식 공격이 나토를 압도했을 때, 혹은 유럽이나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핵 공격이 임박했을 때이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언제든 그러한 조짐이 보인다면, 미국은 핵무기를 통한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뜻도 된다. 실로 무시무시한 얘기다! 드골 대통령은 아마도 이러한 미국의 선제공격이 소련의 맞대응으로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것인데, 이를 감수하고라도 과연 그렇게 선제공격을 감행할 군사적 능력이 미국에게 있느냐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보면, 프랑스의 핵무장이 이 두 가지 조건을 상쇄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프랑스의 핵무장이 소련의 재래식 무기에 대한 나토의 열세를 만회하고, 대소 핵전략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도 이러한 조건이라면, 프랑스의 핵무장을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외교적 협상에 따른 결과이다. 프랑스는 약 3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거리가 300-500 킬로미터 정도인 공대지 순항미사일과 사거리가 약 10,000 킬로미터 정도인 잠수함 탑재 탄도미사일, 사거리가 약 3,500 킬로미터 정도인 지상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등등이 있다. 또 프랑스는 핵추진 항공모함을 통해 핵무기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프랑스의 핵무기는 그 사용에 있어서 분명히 외부로부터의 명확한 위협을 전제한다. 사실 프랑스는 핵무장 이후로 핵무기를 사용할 만큼 외부로부터의 명확한 위협이 없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는 핵보유국이지만, 이를 실제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외교를 통해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유지하곤 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긴장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프랑스의 핵무기를 유럽 방위에 활용하려는 시도는 타당하지 않다. 프랑스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약 2,100 킬로미터, 러시아로부터 6,200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사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적 영향도 없다. 특히 프랑스 자체의 영토에 아무런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데, 핵무기로 유럽의 억지력을 강화하는 것은 오히려 프랑스 자체의 방어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당장 러시아의 거친 비난을 받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매우 현실적이지도 않고, 아무런 실익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프랑스의 핵무기를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유럽 쪽에 전진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관해 가장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는 국가는 독일이다. 전범국인 독일은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배치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핵무기를 활용하면서, 그 비용을 어느 정도 부담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나쁘진 않다. 그런데 독일의 이러한 태도에는 차후 재무장이 진전되면, 핵무장도 배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 프랑스가 말하는 외부 위협이라고 것도 현재 시점에서 보면 러시아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프랑스의 위협이라고 말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노력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 유럽연합의 핵심축인 프랑스가 핵무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의도는 이해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오히려 자신의 조급함을 노출하는 것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러시아의 핵전쟁 위협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갖고 왔다. 실로 무모한 정략적 발언이다! 프랑스의 핵전력이 러시아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무모한 발언은 러시아를 자극함으로써, 자칫 유럽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 올 수도 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전으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수세에 몰리고 있는데, 이 전쟁이 유럽 전체로 확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토와 러시아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고, 이는 실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누구도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핵무기를 직접 사용한 국가는 미국이 유일한데, 이를 통해 한 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즉 핵무기의 가공할만한 위력이 전쟁을 빨리 끝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때는 일본이 핵무기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서로 핵보유국이라면, 이 유용성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아무리 정치적이라고 해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오히려 그 발언이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핵무기가 언제든 어디서든 프랑스를 겨누고 있음을 공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핵무기가 프랑스를 겨누면, 사실상 유럽 전체를 언제든 핵 전쟁터로 만들 수 있다. 거기에는 러시아가 지금까지 한 번도 핵무기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별로 현실적 이득이 없기 때문이라는 명확한 명분도 있다. 요즘 러시아가 핵전쟁 연습을 벨라루스와 공동으로 벌이는 것도,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과 신형 무기를 실전 배치하고, 러시아 군대를 현대화하는 것도 이를 유럽에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그와 같은 명분은 러시아의 인내심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를 누구든 자극하면 언제든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유럽 안보에서 러시아와 등을 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이와 정반대로 진행되니까, 유럽연합 스스로가 국제적 지도력을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국가의 책임 있는 지도자가 핵무기를 섣불리 언급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에 동조하는 지도자도 유럽 전체를 자칫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이를 계기로 군비경쟁에 가세하는 것도 과연 과거의 악몽을 실로 망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부에서는 프랑스 대통령의 돌출발언에 가까운 언급이 자국 원전 수출을 동유럽에 확장하고, 또 유럽산 무기의 판매와 취득을 강화하려는 마크롱 대통령의 포석이 깔려 있다고 보기도 한다. 또 프랑스가 핵무기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연합과 나토에서 프랑스의 지도적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영국이나 독일을 은근히 견제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유럽의 안보에서 주도권을 프랑스 쪽으로 갖고 오는 방법이 핵무기 보유를 통해 러시아와 껄끄러움을 어느 정도 감안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03
  • "아랍의 봄" 사건으로 유럽이 받은 영향, 아랍계 민족들의 유럽 정착 및 난민화
    "아랍의 봄"이 유행할 때 과거 북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을 식민 지배했고 현재도 가장 지분이 많은 프랑스는 아랍의 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불안은 옛 종주국으로써 북아프리카 각 지역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게도 이와 같은 사태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끝없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들이 아랍의 봄 혁명에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프랑스 내부도 시끄러워질 수 있는 요지가 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극우파가 득세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자국 국민들의 이권을 먼저 보호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민군들과 함께 카다피의 독재 정권을 끝내고 민주화의 첫 단계에성공을 거두었으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1차 투표에서는 28.6% 대 27.1%로 패배했으며, 2차 투표에서도 48.3%로 51.7%의 올랑드에게 3.4%, 110만표차로 패배했다. 사르코지는 임기 중에 사망한 조르쥐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 4년 10개월, 1969~1974)와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에게 패배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7년 재임)에 이어 30년 만의 단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퇴임했다. 게다가 전임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까지 프랑수아 올랑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르코지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여기에 카다피 사건에 대한 몇몇 불편한 진실까지 드러난 부분이 결정적으로 사임한 원인이 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올랑드 역시 유럽의 경제위기인 유로화 사태가 계속 되는 상태에서 말리 내전에 개입한 것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크게 작용했으며, 정권의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는 등 제대로 된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국가들도 큰 영향을 받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도 영향을 받아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이탈리아의 경우,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더불어 계속되어 발생하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정계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베틀루스코니는 사생활 보호법을 개정해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예를 들어 사법당국이 녹취한 내용을 신문이나 웹사이트에 올려 사익에 반하거나 편견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면 48시간 이내에 수정해야 하고 여기에 불응하면 구금 또는 벌금형에 처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쏟아낸 막말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모든 이탈리아 시민들이 이를 페러디하여 수많은 조롱이 섞인 광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이탈리아 내에서 경제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던데다 베를루스코니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채 수익률은 7일 연 6.77%까지 치솟았다. 이어 정부 부채는 2조 6000억 달러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아 파산 위기에 놓이자 로마에 1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폭동 직전까지 가게 된다. 결국 2011년 11월 1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하야하여 마리오 몬티(Mario Monti) 총리의 중도 내각이 들어섰고, 뒤이은 선거에서 이탈리아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비록 상원 과반에 실패하여 옛 집권당과의 연정은 불가피했지만 베를루스코니는 그 동안 스스로 저지른 불법행위로 확실하게 제명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후에 튀니지에서 150km 떨어져 있는 람페두사 섬에 소요 사태를 피해 들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이들에 대한 처우에 상당한 고민에 빠졌다. 특히 2011년 리비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보트 피플들을 강제 송환시키던 리비아 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아프리카 난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영국과 독일은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아랍의 봄 여파로 인해 시리아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면서 대량의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고 이는 브렉시트에 이어서 유럽 연합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유로 경제권의 불균형으로 위태로운 상황이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EU의 붕괴론까지 부상하며 아랍의 봄 여파가 유럽에서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랍의 봄은 러시아와 CIS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00년대 혁명이 있었던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및 인근 국가들도 전면적으로 국가 내부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러시아에서도 브콘탁테를 통하여 반정부 시위들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비리 등이 심했다. 그러나 이 아랍의 봄의 영향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2014년 유로 마이단 사태를 일으켜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중앙아시아 건너 카스피 해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반 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며 남부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아르메니아에서도 2008년부터 부정선거로 의혹받았던 샤르키샨 전 총리에 대한 불만과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총리의 독재를 끝내는데 실패했다. 처음에는 민주화를 기치로 중동의 독재자들이 붕괴되어 가는 민주주의의 승리에 응원을 보내던 서구권은 이후 생각보다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가 독재를 대신하고 이들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신(新)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충격과 공포로 난민들과 중동의 민중들을 차별하게 되고, 과거 동구권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을 지지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었던 것과 다르게, 독재 타도를 외치는 반군에 대해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반군을 지원하는 물자와 무력 개입, 정치적인 압력을 동원하여 지원해준 다음 민주주의 선거로 수장이 뽑힐 정부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친(親) 서방 정권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반대로 샤리아를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의 성격을 띄고 있다면 세속주의 친(親) 서방 정권인 독재자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성립되었다. 이 아랍의 봄 사태는 유럽이 갖고 있던 냉전 시대부터 이어온 민주주의의 우월성이라는 믿음에 크게 생체기를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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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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