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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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이 유행할 때 과거 북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을 식민 지배했고 현재도 가장 지분이 많은 프랑스는 아랍의 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불안은 옛 종주국으로써 북아프리카 각 지역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게도 이와 같은 사태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끝없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들이 아랍의 봄 혁명에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프랑스 내부도 시끄러워질 수 있는 요지가 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극우파가 득세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자국 국민들의 이권을 먼저 보호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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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아랍의 봄 시위, 출처 : HISTORY CHRIS HONDROS / GETTY IMAGES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민군들과 함께 카다피의 독재 정권을 끝내고 민주화의 첫 단계에성공을 거두었으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1차 투표에서는 28.6% 대 27.1%로 패배했으며, 2차 투표에서도 48.3%로 51.7%의 올랑드에게 3.4%, 110만표차로 패배했다. 사르코지는 임기 중에 사망한 조르쥐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 4년 10개월, 1969~1974)와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에게 패배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7년 재임)에 이어 30년 만의 단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퇴임했다. 게다가 전임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까지 프랑수아 올랑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르코지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여기에 카다피 사건에 대한 몇몇 불편한 진실까지 드러난 부분이 결정적으로 사임한 원인이 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올랑드 역시 유럽의 경제위기인 유로화 사태가 계속 되는 상태에서 말리 내전에 개입한 것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크게 작용했으며, 정권의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는 등 제대로 된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국가들도 큰 영향을 받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도 영향을 받아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이탈리아의 경우,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더불어 계속되어 발생하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정계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베틀루스코니는 사생활 보호법을 개정해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예를 들어 사법당국이 녹취한 내용을 신문이나 웹사이트에 올려 사익에 반하거나 편견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면 48시간 이내에 수정해야 하고 여기에 불응하면 구금 또는 벌금형에 처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쏟아낸 막말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모든 이탈리아 시민들이 이를 페러디하여 수많은 조롱이 섞인 광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이탈리아 내에서 경제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던데다 베를루스코니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채 수익률은 7일 연 6.77%까지 치솟았다. 이어 정부 부채는 2조 6000억 달러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아 파산 위기에 놓이자 로마에 1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폭동 직전까지 가게 된다. 결국 2011년 11월 1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하야하여 마리오 몬티(Mario Monti) 총리의 중도 내각이 들어섰고, 뒤이은 선거에서 이탈리아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비록 상원 과반에 실패하여 옛 집권당과의 연정은 불가피했지만 베를루스코니는 그 동안 스스로 저지른 불법행위로 확실하게 제명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후에 튀니지에서 150km 떨어져 있는 람페두사 섬에 소요 사태를 피해 들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이들에 대한 처우에 상당한 고민에 빠졌다. 


특히 2011년 리비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보트 피플들을 강제 송환시키던 리비아 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아프리카 난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영국과 독일은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아랍의 봄 여파로 인해 시리아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면서 대량의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고 이는 브렉시트에 이어서 유럽 연합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유로 경제권의 불균형으로 위태로운 상황이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EU의 붕괴론까지 부상하며 아랍의 봄 여파가 유럽에서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랍의 봄은 러시아와 CIS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00년대 혁명이 있었던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및 인근 국가들도 전면적으로 국가 내부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러시아에서도 브콘탁테를 통하여 반정부 시위들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비리 등이 심했다. 그러나 이 아랍의 봄의 영향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2014년 유로 마이단 사태를 일으켜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중앙아시아 건너 카스피 해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반 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며 남부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아르메니아에서도 2008년부터 부정선거로 의혹받았던 샤르키샨 전 총리에 대한 불만과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총리의 독재를 끝내는데 실패했다. 


처음에는 민주화를 기치로 중동의 독재자들이 붕괴되어 가는 민주주의의 승리에 응원을 보내던 서구권은 이후 생각보다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가 독재를 대신하고 이들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신(新)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충격과 공포로 난민들과 중동의 민중들을 차별하게 되고, 과거 동구권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을 지지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었던 것과 다르게, 독재 타도를 외치는 반군에 대해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반군을 지원하는 물자와 무력 개입, 정치적인 압력을 동원하여 지원해준 다음 민주주의 선거로 수장이 뽑힐 정부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친(親) 서방 정권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반대로 샤리아를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의 성격을 띄고 있다면 세속주의 친(親) 서방 정권인 독재자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성립되었다. 이 아랍의 봄 사태는 유럽이 갖고 있던 냉전 시대부터 이어온 민주주의의 우월성이라는 믿음에 크게 생체기를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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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의 봄" 사건으로 유럽이 받은 영향, 아랍계 민족들의 유럽 정착 및 난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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