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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어와 한국 문화, 네팔과 쿠바에서도 배운다. 세종학당 18곳 신규 개설
    문화체육관광부는 오늘 24일, 올해 열다섯 나라에 세종학당 18곳을 신규 개설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개설로 인해 세종학당은 전 세계 88개국 256곳으로 확대된다. 특히 네팔과 쿠바에 처음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이 마련된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와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세종학당이 새로이 문을 연다. 네팔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많은 노동자가 한국으로 향하고 있어 한국어 학습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학습 여건이 미흡한 상황이었다. 문체부는 카트만두에 세종학당이 지정됨에 따라 한국어 교육과 한국 문화 확산이 더욱 체계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쿠바 역시 한국과 지난 2월 수교를 맺어 다양한 문화와 인적 교류가 예상된다. 중남미 지역은 한국어 학습 열기가 높은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학당이 한국어를 통한 문화교류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문체부 관계자는 "중남미는 한국어 학습 열기가 높은 권역"이라며 "세종학당이 한국어를 통한 문화교류의 거점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세종학당의 확장은 네팔과 쿠바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독일의 베를린과 뷔르츠부르크,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스웨덴의 스톡홀름,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와 지자흐, 이탈리아의 팔레르모, 인도의 벵갈루루, 중국의 청두, 카자흐스탄의 코스타나이,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 태국의 방콕, 폴란드의 카토비체, 필리핀의 일로일로와 케손시티, 호주의 퍼스에 세종학당이 신규 개설된다. 이번 개설로 세종학당은 전 세계 88개국에 256곳이다. 지난해 온·오프라인을 통해 한국어를 공부한 수강생은 21만 6,226명으로 전년 대비 20.8% 증가했다. 2020년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의 성장을 기록한 셈이다. 이러한 성과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종학당재단 관계자는 "올해 세종학당 공모 경쟁률이 5.4대 1에 달할 만큼 각 나라의 한국어 학습 열기가 뜨겁다"라며 "내실 있게 운영되도록 관리·감독을 한층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세종학당은 앞으로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세종학당의 확장은 단순히 한국어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 문화의 세계적인 확산과 교류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각 나라의 세종학당은 한국어 교육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 현대 문화, 예술 등을 소개하며 한국과 해당 국가 간의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 세종학당의 신규 개설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네팔과 쿠바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세종학당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많은 사람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 뉴스
    • 교육
    2024-06-24

칼럼 검색결과

  • 나토, 러시아와의 전쟁 준비에 돌입, 가장 유력한 지정학적 전략의 요충지는 폴란드
    폴란드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켜보고는 러시아의 위협에 큰 위기감을 느끼고는, 만일의 위협에 대비해 군의 규모를 기존보다 크게 키우기로 결정했다. 2024년까지 국방비를 GDP의 2.5% 수준까지 증액하고 2035년까지 5,240억 즈워티(한화 약 151조 4720억 원)를 투입해 군대를 현대화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15만 명이었던 정규군은 25만 명으로, 2만 명이었던 향토방위군은 5만 명으로 대폭 확대해 폴란드군을 현재의 2배 정도 규모로 키워서 나토 중에서도 매우 규모가 큰 군대로 만들 것이라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국방비도 GDP의 5%까지 증액했다. 팔레스타인이나 아랍 세력과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아야 하는 이스라엘이 GDP 대비 국방비가 5.2%이고 역시 북한과 언제든지 군사적 마찰을 상정해야 하는 대한민국은 2.43%가량이나 되니 국방비를 5%나 지출하겠다는 것은 거의 전쟁 발발이 임박한 위기 상황에서나 생각할 만한 수준이기에 폴란드가 대단한 위협을 느끼고 있는 것은 맞다. 그러나 러시아는 자국과 자국 국민에게 심각한 위협을 끼치지 않는 한, 남의 나라를 침공하지 않으며 미국처럼 전 세계에 대부분의 분쟁에 참견하여 그들의 피로 돈을 벌진 않는다. 다만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삼국분할, 독, 소의 침략 등의 역사가 중근세사에서부터 현대사까지 몰려 있기에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폴란드의 1인당 GDP는 18,000불 정도다. 서유럽에 비해서는 한참 뒤떨어지고 체코 (GDP 27,000불), 슬로베니아 (GDP 29,000불)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고 크로아티아 (GDP 17.600불)와 비슷하며 헝가리 (GDP 19,000불)보다 떨어진다. 게다가 쉥겐 협약에 가입이 되어 있고 쉥겐 협약 국가들 왠만하면 유로 화폐를 쓰고 있지만 폴란드는 자국 통화인 즈워티가 유로 통화를 감당할 수 없기에 체코 통화인 코루나가 사라지고 크로아티아도 자국 통화인 쿠나를 버리고 유로를 쓰고 있는 상황에서 북반구 동유럽 국가들 중 유일하게 자국 통화인 즈워티를 쓰고 있다. 이는 여전히 폴란드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얘기다. 경제력이 후달리는 것과는 별도로 강한 군대 육성을 위한 폴란드의 병기 조달 방안 중 하나로 2022년 7월 27일 대한민국과 맺은 K-2 흑표·K-9 자주곡사포·FA-50 구매에 대한 기본 협정의 큰 틀에서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대한민국 방산계약까지 체결하고 군비 확충을 서두르고 있는 것은 우크라이나가 러시아군에게 속절없이 패하고 있음을 반증한다. 우크라이나가 붕괴되면 다음 차례는 폴란드가 될 것이라는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일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방산 계약으로 무기를 사들인 것과 별개로 나토와 폴란드에 핵무기 배치하는 것도 따로 논의하고 있다. 얀제이 두다 대통령은 지난 4월 22일 폴란드 팍트(Fakt)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동맹국들이 나토의 동쪽 측면을 강화하기 위해 핵무기 공유의 일환으로 폴란드에 핵무기 배치를 결정한다면 이를 수용할 준비가 돼 있다 (Jesteśmy gotowi zaakceptować decyzję naszych sojuszników o rozmieszczeniu broni jądrowej w Polsce w ramach porozumienia o współużytkowaniu broni jądrowej w celu wzmocnienia wschodniej flanki NATO).”고 밝혔다. 두다의 이와 같은 강경 발언은 최근 러시아가 벨라루스와 칼리닌그라드에 군비를 강화하며 나토의 돌발 상황에 대응하는 차원에서 이에 대한 불안감을 느끼고 발언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해 드미트리 페스코프 대변인은 다음 날, 23일의 성명에서 러시아군이 폴란드 내 핵 배치와 관련한 상황들을 분석하고 모니터링 할 것이라면서, 폴란드에 핵무기가 배치될 경우 러시아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조치들이 취할 것이라 경고했다. 라브로프 외무장관 또한 이날 성명에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 3개 국을 지목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이들의 지원이 세계 최대 핵 보유국들 간의 직접적인 대결 위험을 높이는 심각한 전략적 위험을 야기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나토는 공식적으로 러시아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 다른 지역보다 발트 3국 및 폴란드는 이제 서서히 나토와 러시아 간의 대립에서 지정학적 요충지 및 충돌 가능한 유력 지역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렇기에 폴란드는 앞으로도 계속 우리와 방산 거래를 통해 추가 무기들을 계속 확보할 가능성이 커졌다. 폴란드 부총리 겸 국방부 장관인 브와슈차크가 밝힌 바에 따르면 계약의 세부 사항으로는 K-2 및 K-9A1의 120mm, 155mm 포탄 및 기관총 탄약, 폴란드군 병사를 위한 훈련 프로그램을 포함한 K-2 흑표 전차 패키지가 33억 7천만 달러, K-9A1 자주곡사포 패키지 24억 달러에 이른다. 그러나 폴란드가 이 대금을 완납했다는 이야기가 아직까지 없다. 국제 신용 평가 기관인 S&P는 폴란드의 통화 등급을 A/A-1로 유지하고 있으며 안정적이라 봤지만 폴란드와 EU 사이의 정치적 긴장으로 인해 기금 이전이 지연될 경우, 등급이 하락할 수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S&P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폴란드 경제의 중기 성장 전망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여러 리스크가 큰 곳에 계약을 했다면 철저한 감독과 리스크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이 그와 같은 감독과 리스크에 대한 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폴란드와 방산계약부터 현재 어떤 상황인지에 대해서도 전면 재검토 할 의지조차도 있는지 모르겠다. 그저 폴란드를 무조건 믿는 것으로 퉁친다면 변동이 심한 동유럽의 상황으로 볼 때 우리는 호구가 될 가능성이 높고 러시아와의 관계는 지금보다 더 최악으로 치달아 우리가 잃는게 더 많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그래서 현재 우리는 매우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 줄 아래 시퍼런 칼날들이 무수히 박혀 있는 상태에서 매우 아슬아슬한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이럴 때 우리는 매우 현명한 판단을 해야 한다. 단순히 방산 계약 성공에 환호하면 안 되는 이유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07
  • 민족주의, 전쟁, 학살 등 보스니아 - 크로아티아 전쟁의 전범,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이 법정에서 음독 자결한 이유
    2017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 법정에서는 모스타르 학살을 주도한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이 11월 29일 최종 판결을 위해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당시 이 재판은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보스니아 무슬림에게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그에게 20년 형을 선고했다. 판사는 프랄략에게 죄를 인정하는지를 묻자 “Bull shit (헛소리)! 나 프랄략은 전범이 아니다. 당신의 판결을 경멸하며, 거부한다(Ja, Praljak, nisam ratni zločinac. Prezirem i odbacujem tvoj sud).”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병에 든 액체를 마셨다. 이 액체를 모두 마신 뒤 “방금 내가 마신 것은 독약이다(Ono što sam upravo popio bio je otrov)”라고 소리쳤다. 이는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희대의 자살극이었다. 그러자 재판은 중단되었으며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현대적인 국제전범재판이 시작된 이후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희대의 사건이었다. 무엇이 프랄략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그 죽음에 대한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정에서 자살로 사망한 프랄략은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꽤나 유명한 연극인이었다. 그는 희곡작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각국 언론들이 프랄략이 독약을 마시기 전후 그의 외침 자체가 연극 대사와 같았다고 판단한 이유가 그의 본 직업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살아 있다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연극계 원로로 평온한 노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바뀐 것 역시 보스니아 전쟁 때문이었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공화국 대통령이 이끌고 있던 크로아티아 민주동맹의 창당 인사 중 한명인 프랄략은 크로아티아 방위협의회(HVO,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의 사령관을 맡으면서 군인으로 변모했다. 전쟁 초기인 1992년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은 상호 협력적인 관계였다.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및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민병대가 포위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부의 도시인 모스타르를 보스니아 무슬림들과 함께 지켜냈다. 하지만 1993년 초,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카톨릭 세력 간에 전쟁이 발생했고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 간의 전쟁에서 모스타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것은 이 프랄략의 군대였다. 이 전쟁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인 거주지역을 병합하여 완전한 크로아티아의 영토로 만드려는 투지만 대통령이 기획한 전쟁이었다. HVO 크로아티아 민병대는 모스타르 내, 외부의 무슬림 거주민들을 집단 추방했다. 당시 수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약 1만여 명이 수감됐다. 수감자 중 노인과 여성은 학대를 받았고 상당수가 학살되었다. 피해자들에는 세르비아계사람들과 집시도 포함되었다. 프랄략이 사망하기 1주일 전, 역시 ICTY에서 민족학살과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라트코 믈라디치 세르비아계 스르브스카 군 사령관 또한 모두가 거짓말이라 외치면서 판결에 승복하지 않은 것과 같이 프랄략도 이 판결을 거부했다. 종신형을 받은 믈라디치와 다르게 프랄략은 고작 20년 형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하지 않았더라면 가석방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는 ICTY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13년을 복역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형기의 3분의 2을 마친 죄수는 석방시키는 것이 관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머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 자살을 한 이유로 볼 때 스스로 전쟁 때부터 만든 원칙인 크로아티아 독립과 통합이라는 하나의 대의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날 10~25년 형을 받은 6명의 전범들은 모두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로 모스타르 학살과 관련이 있었다. 물론 세르비아계에 비해 전쟁 범죄에 대한 규모는 적었던 것으로 판단했지만 크로아티아계 역시 민족청소,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 것이 이 날 재판 판결의 핵심이었다. ICTY는 투지만이 스스로 녹음해 두었던 방대한 대화와 통화 녹음 테이프를 통해 투지만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의 HVO 군에 돈과 차량, 무기 및 군지휘관을 지원한 배후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는 보스니아 전쟁 범죄의 주체는 세르비아계라는 국제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크로티아계 역시 투지만으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 기획 범죄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밝혔다는 것에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ICTY는 프랄략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이날 판결 내용을 거듭 확인했다. 전쟁 범죄를 저질렀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을 포함해 범죄집단(Joint Criminal Enterprise)이라는 용어를 새로이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세르비아계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민족 청소의 주범으로 세계의 지탄을 받았었다. 그러나 당시의 판결로 인해 크로아티아계까지 민족 청소의 주범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ICTY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재판 중 옥사한 것과 다르게 투지만은 ICTY가 기소를 완성하기 전인 1999년 자연사했다. 물론 그가 살아 있었다면 크로아티아인들이 국부로 모시는 투지만 역시 ICTY 법정에 섰어야 했다. 믈라디치와 마찬가지로 프랄략은 투옥되면서 복역 중에 양심수였고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했었다. 믈라디치가 판결 이후, 자신은 이미 늙은 사람이라서 이와 같은 판결은 중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족들에게 앞으로 남길 유산이라고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랄략이 법원에서 한 절규는 자신의 무죄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크로아티아계가 전후 누려온 면책이 끝나고, 또 다른 악마화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죽음으로 항변하려 했던 듯 싶다. 믈라디치가 현재 세르비아인들의 영웅인 것과 같이 프랄략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있어 영웅이자 순교자로 여기고 있다. 보스니아 내, 외부의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았고 그를 카톨릭의 성인으로 받드는 분위기까지 감지되었다. 당시 11월 29일 당일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지역에서는 프랄략에 대한 추모 미사와 촛불 추념회가 열렸다. 당시 안드레이 플렌코비치 크로아티아 총리는 프랄략의 자살이 ICTY의 부당한 판결 결과에 대해 저항하라는 메시지였다고 말했다. 당시 보고를 받은 콜린다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급거 귀국했고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대통령은 지난 주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열렸던 공식행사에서 세르비아계의 공격으로부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방위한 프랄략 장군의 위업을 평가하는 책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해자인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반응은 달랐다. 전쟁 중 크로아티아계에 구금됐던 한 무슬림 퇴역 군인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슬픈 일이다. 하지만 프랄략은 형량을 다 채웠어야 했다(Žalosno, ali Praljak je trebao odslužiti kaznu).”고 언급했다고 한다. 보스니아 내전 이후, 사망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의 아들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프랄략씨는 훌륭한 영화감독이었다. 모스타르를 파괴하는 대신 모스타르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Gospodin Praljak je bio veliki filmaš. Umjesto što je rušio Mostar, trebao je snimiti film o Mostar).”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을 끝으로 ICTY는 껄끄러운 상태에서 끝을 보게 됐다. 당시 선고는 1993년에 설립된 ICTY가 문을 닫기 전에 열었던 마지막 공판이었다. 이는 희대의 자살사건 때문에 명예롭지 못한 퇴장을 하게 되었다. 프랄략의 자살은 국제 사회가 주장해 온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보스니아 전쟁 이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무슬림 사회에서는 극우적인 민족주의가 더욱 견고해졌다. ICTY가 막으려고 했던 악의 근원이 바로 이와 같은 비뚤어진 심리의 민족주의 이념이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가장 중요한 전범 재판이었다는 ICTV가 과연 정의를 구현했을지는 알 수 없다. 무슬림과 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 카톨릭계가 연방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하게 종결된 전쟁, 보스니아의 평화는 아직도 위험한 줄타기를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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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 동유럽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 살고 있는 루신인에 대하여
    루신인은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동슬라브어파 루신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루신이라는 명칭은 중세 시대 루스 슬라브어의 라틴어 명칭인 루테니아(Ruthenia)에서 기원했다. 오늘날 루신인 인구는 60만여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이 중 루신어 구사가 가능한 인구는 소수에 불과하다. 루마니아 카르파티아 산맥은 중세 초기에 크로아티아인의 조상이 되는 남슬라브계 부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오늘날 크로아티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그 빈 자리를 흑해 근방에 거주하고 있던 동슬라브계 부족인 울리치 족이 투르크계 유목국가인 페체네그의 침입을 피해 이주하게 된다. 루신인들의 조상인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인들은 과거에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아 정교회를 믿었으나 중세 루테니아 왕국이 멸망하고 이후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 지역이 카톨릭을 믿는 폴란드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지배층은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리고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로 알려진 자카르파탸(Jacarpatia)의 농노와 비잔틴 정교회 성직자들이 루신인들의 직계 기원이 되었다. 과학적 하플로그룹 조사에 의하면 자카르파탸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와 다른 지역 주민들과 다르게 타타르 계통이나, 바쉬키르 계통등의 몽골 및 투르크계와 유사성은 적었고 대신에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과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자카르파탸 지역은 루테니아 왕국으로부터 헝가리 왕국에 복속된 이래 약 1,000년동안 헝가리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현재까지 러시아계 국가들의 통치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근세 1646년부터 이들은 로마 교황의 권위는 인정하지만 정교회의 전례를 유지하는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 교회로 개종했다. 그러나 여전히 헝가리인, 독일인 지주들에게 카톨릭 봉헌금을 빙자한 과도한 교회세를 납부해야 했다. 이들은 빈곤한 생활과 더불어 타 국가의 차별에 시달렸으며 한 때 루신인을 대표했던 정교회 성직자들은 1649년 우주호로드에서 동방 카톨릭 교회로의 개종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652년에는 로마 교황청에 이와 같은 결정을 전달하여 교황으로부터 승인받고 인준까지 받았다. 루신인 농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정교회에서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 교회로 반강제적인 개종을 당한 셈이 되었는데, 이는 성직자들이 일반 농민들의 소요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교파가 변경된 것을 일반인들에게 비밀로 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직자들이 공식적으로 개종한 지 100여 년이 지난 1760년대까지도 루테니아 농민들은 개종된 실상을 모르고 자신들이 정교회에 소속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한다. 루테니아 농민들 중에서 글을 배우거나 외부에 나가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주 외부인들과 접촉한 결과 그 동안 자신들은 정교회를 믿는 줄 알고 살았으나, 실제로는 동방 카톨릭 교회 성직자와 함께 동방 카톨릭 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종교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소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던 루신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여러 도시로 이민하여 루신어를 버리고 도시 현지 주민들과 동화되다시피 했다. 일례로 루신인의 한 갈래로 알려져 있는 보이코인(Boykos)의 경우 과거에는 폴란드, 헝가리,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에 40만여 명이 분포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정체성이 상실되어 이웃 민족에게 동화되었고 이들은 겨우 수백여 명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범슬라브주의에 경도된 루신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비해 생활수준이 낮은 편이었고, 이와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경제적 걱정이 없는 미국으로 이주한 루신인 인구 상당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스트리아계 미국인이 아닌 러시아계 미국인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1899년에서 1931년 사이에 268,669명의 루신인 인구가 미국에 이민 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대개 러시아계 미국인 정체성을 가지고 미국 내 러시아계 디아스포라 사회에 동화되어 미국 내에서 러시아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다. 그러면서 일부 루신인들은 미국으로의 이민 간 이후에도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오늘날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은 유럽에서 거의 사멸한 상황이다. 그러나 대신 미국에서는 40만여 명에 달하는 교세를 지니고 있어 미국을 중심으로 그 명맥 또한 유지되고 있다. 물론 미국 내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 교회 소속 신도들이 모두 루신인이거나 루마니아 계는 아니었다. 이는 2010년 자가 응답에 기반을 둔 미국 인구 조사에서 자신이 루신계 미국인이라고 응답한 인구는 7,583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다양한 인종들을 상대로 선교를 벌인 결과 교세가 확장되었고 공산주의가 붕괴되어 삶이 어려워진 동구권 주민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민하여 이 종교를 믿었던 결과이기도 하다. 현재 루마니아 카르파티아 지역에 거주하는 루신인들은 대부분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으며 일부 남아있는 지역은 우크라이나의 자카르파탸 주로 알려져 있다. 이 자카르파탸 주는 다른 우크라이나의 주와 비교했을 때 매우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1945년 전후 소련에 병합되기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였던 적이 없었다. 카르파티아 루신인들은 오랫동안 헝가리 왕국의 일원이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헌법은 당시 유럽 기준으로도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에 있어서 대단히 진보적이었다고 평가를 받았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정부는 이 루테니아 지역에 기반 시설 투자를 해주었고 이 때 여러 인프라가 생겨났다. 이 루신인들은 전간기 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속해있던 시기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여 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의 소련은 이 지역을 편입하면서 굉장히 억압적인 정책을 피게 되었고 당연히 많은 루신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기도 했다. 특히 소련이 헝가리를 장악하면서 주로 보이보디나 자치주 및 바나트 자치주 산악 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판노니아 루신인들을 학대했는데 다량의 루신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떠나 절멸했다. 판노니아 루신인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 도중에 감소한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 18세기 중반 카르파티아 지역의 루신인 농부들을 이주시킨 것이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스탈린이 사망한 후, 10년이 지나 다시 판노니아, 오늘날의 헝가리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현재에도 약 6만여 명이 살고 있다. 렘코(Lemkos) 루신인의 경우, 오늘날 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5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슬로바키아 일부 영토가 과거 폴란드의 영토였던 시절에 이주하였던 루신인들이 기원이다. 1939년을 기준으로 하여 인구가 14만여 명 정도였지만 슬로바키아인과의 동화되는 상황에 있기에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의 화가인 앤디 워홀(Andrew Warhola, 1928~1987)의 부모가 슬로바키아에서 피츠버그의 탄광 노동자로 이민 왔던 렘코 루신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의 유명 재즈 뮤지션 빌 에반스(Bill Evans, 1929~1980)의 어머니가 루신인 중에서도 렘코인 혈통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물론 에반스의 아버지는 웨일스 출신이다. 후츨(Hutsuls) 루신인의 경우, 주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국경 지대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남슬라브계 크로아트(Croat) 족이 이주한 지역에 울리치 족이 정착하고 여기에 일부 루마니아인이 동화되어 동슬라브어 계통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을 그 기원으로 보고 있다. 루마니아 출신 역사가 니콜라에 로르가(Nicolae Lorga)는 이들이 트란실바니아 일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 우크라이나 근방으로 이주하여 슬라브화한 왈라키아인(Vlachs)의 원(原)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풍속은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주목을 받아 많은 기록과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후츨 루신인들의 전통 문화가 목가적인 생활 양식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목공예가 뛰어났으며 이 외에도 카르파티아에서 키운 조랑말은 후츨 루신인들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보이코(Boykos) 루신인의 경우,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국경 지대에서 거주하고 있는 루신인들로 정확히 말하자면 갈리치아 남부와 폴란드 남동부 국경지대에 걸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폴란드 제2 공화국 시절에는 폴란드 정부에 의해 민족 동화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서 이들을 소수민족으로 분류하지 않고 일반 우크라이나인으로 분류하면서 따로 민족언어가 보존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인으로 완전히 동화되었다.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 조사를 기준으로 131명, 2011년 폴란드 통계 기준으로 볼 때 258명이 자신을 보이코 루신인이라고 응답하면서 아직까지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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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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