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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민국 축구, 국민인식과 축구인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좋은 성적 기대하기 어렵다
    2026 국제축구연맹(FIFA)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조 편성이 확정됐다. 그런데 죽음의 조를 피했다고 한다. 우선 전망으로 볼 때 한국은 월드컵 티켓을 차지할 것으로 생각이 된다. 북중미 월드컵에 출전 티켓이 아시아는 8.5장이라 각 A조부터 C조까지 조 2위만 하면 무난히 티켓을 손에 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머지 2장은 A조부터 C조 3위끼리 아시아 플레이오프를 거쳐서 승자가 2장 가져가고 마지막 한 장은 북중미 팀들 중에 플레이오프 티켓을 확보한 팀과 자웅을 겨뤄 승자가 가져가는 방식이다. 무난히 조 2위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문제는 아시아의 축구강호라는 자존심이 문제다. 한국은 매번 "아시아의 호랑이" 라며 아시아의 최강이라는 것을 항상 자부해왔다. 그러나 64년 동안 아시안 컵 우승 하나 없는 팀이 "아시아의 최강"이라는 별호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는가? 현재 아시아의 최강은 냉정하게 말해 카타르다. 그 다음이 일본, 이란, 한국 순이다. 그런데 한국이 "아시아의 최강"이라니... 정말로 한국이 잘나갔을 때가 있었다. 그것도 8~90년대는 정말 그러했다. 그러나 그 때도 아시안 컵 우승과 인연은 없었지만 대개 한국을 아시아의 최강 중 한 팀으로 인정했다. 차범근, 이회택, 허정무, 조광래 같은 선수들은 명실상부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었다. 그리고 그 바톤을 김주성, 황선홍, 홍명보, 하석주, 서정원이 물려받았고 최용수, 김도훈, 이임생, 이을룡, 고종수 등으로 이어지고 박지성, 안정환, 송종국, 김남일, 이영표로 이어졌다. 이 때까지가 한국이 진정한 "아시아의 호랑이"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 다른 중동 팀들이 무섭게 성장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 팀들도 과거처럼 더 이상 한국의 승점자판기나 골 자판기 팀들이 아니다. 이들도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리고 그 증거가 아시안컵에서 김판곤 감독의 말레이시아, 신태용 감독의 인도네시아라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 축구인들이나 한국 국민들은 이들이 여전히 8~90년대 수준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대다수 한국인들의 인식 변화 아주 느리게 진척되거나 고정관념처럼 박혀서 변하지 않는다. 축구만 그런게 아니라 국제 정세도 마찬가지다. 대개 한국인들은 중동이 여전히 4~50년대 무기를 쓰며 다 같이 덤벼도 이스라엘에게 패배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여전히 러시아를 공산주의 국가로 생각하고 빨갱이라 생각한다. 러시아에서 공산주의가 30년 전에 이미 붕괴됐는데 여전히 푸틴 1당 독재에 야당도 없고 국민의 자유를 탄압하는 공산 국가로 본다. 나같은 사람이 러시아를 백날 자유롭게 왔다갔다 해도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는 한번 공산당이나 빨갱이면 영원한 공산당이자 빨갱이, 심지어 나는 쏘오련 공산당의 선전물로 자유롭게 다니는 쏘련의 특권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한다. 이게 현재 한국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 안 바뀌는 이유가 뭘까?. 그것은 옛날 시스템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인식의 갈라파고스 심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여기도록 정치꾼들과 언론들이 야합해 몰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국민들은 이들의 노예가 된다. 진실이 어떤지는 관심이 없고 찾아보는 것도 귀찮아 한다. 한국인들은 언론과 정치꾼들을 욕하지만 이율배반적으로 이들을 오히려 너무 잘 믿는다. 욕하면서도 잘 속아주고, 유튜브 같은데서 선동해대며 진실이 어쩌구 저쩌구하면 검증할 생각 없이 자기 생각과 맞아 떨어지면 박수 쳐주고 훌륭한 분석이라 떠 받들어주며 슈퍼쳇이나 돈을 투자한다. 나처럼 현지를 돌아다니며 전해주는 사람에 대해서는 투자에 매우 인색하지만 한국의 집구석이나 방구석에 앉아서 검증되지도 않은 인터넷 자료 뒤져가며 선동해대는 프로파간다 유튜버에게는 비싼 슈퍼쳇과 후원을 아끼지 않는다. 이게 대다수 한국인들의 특성이다. 내 말이 틀렸는가? 축구 얘기하다가 여기까지 와서 할 말을 다한 셈이 됐지만 축구로 보자면 한국 사람들 대부분 중동 국가 쯤이야, 동남아시아 쯤이야 5-0 이상 이겨줘야 기본이라 생각한다. 그들이 성장했으면 얼마나 했겠어. 손흥민, 이강인, 황희찬 같은 선수도 없는데, 그들이 잘해봐야 얼마나 잘해. 우린 월드컵 10회 연속 진출했고 저들 중에 누가 그 정도 했지? 이게 한국인들의 보편적인 시각이다. 그들의 노력은 헛짓이고 오일머니로 쌓은 노력이며 동남아시아 선수들은 피지컬이 작고 후진국이라 해봤자 옛날과 똑같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는 그렇게 평가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국가들, 월드컵 2차 예선 때 홈에서 태국과 비겼고, 아시아컵에서 말레이시아에 고전하다 3-3으로 비겼으며, U-23 아시아 대회에서 인도네시아에게 패배해 파리 올림픽도 나가지 못하게 됐다. 이제는 "동남아시아 쯤이야 5-0 이상 이겨줘야 기본" 이라는 이 따위 후진적 발상은 버려야 한다. 축구인이나 국민들도 동남아시아 축구가 많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인정 안하는 국민들, 축구인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그들과 못 이기면 감독 탓을 한다. 동남아시아 축구 얕보고 방심했다가 졌는데 무슨 변명이 필요하나? 그리고 그런 마음으로 경기하다가 그렇게 됐는데 그 또한 실력임을 왜 인정 못하지? 중동도 마찬가지.. 중동 축구를 굉장히 얕보고 "침대축구"니 뭐니 하면서 후진적이라 하는데 "침대축구"도 하나의 전술이고 중동 팀 나름대로 강팀을 이기는 전략이다. 근데 그걸 왜 비난하지? 실점한 팀 잘못이지 득점하고 드러눕는 팀을 왜 비난해? 실력있으면 먼저 골을 넣고 "침대축구"를 할 수 없게 만드는게 진정한 강팀이다. 그리고 귀화 선수들도 많아지고 있으며 이들에 의해 피지컬 싸움에도 이제는 뒤지지 않는다. 그것도 전략이고 투자다. 그 자체가 실력이며 이게 실전에서 발휘됐을 때 성공한 것이다. 즉, 중동도 예전과 같이 쉽게 무너지는 그런 팀이 아니다. 우리는 중동의 요르단에 패배해서 아시안 컵 결승에도 가지 못했다. 유효슈팅 0개의 처참한 완패, 옛날 우리한테 밥먹듯 깨지는 그 요르단이 아니다. 그러면 중동 팀들이 성장했고 우리보다 잘했음을 인정해야지, 모두 감독 탓으로만 몰아가더라. 요르단이 우리보다 더 잘한거고 실력이 있었던거다. 왜 인정못하는 것일까? 그런 인식이니 아시안 컵에서 우승을 못하는 것이다. 상대의 성장을 우습게 보고 얕보고 방심하면서 여전히 한국이 "아시아의 호랑이"이며, "아시아 최강"으로 인식하고 떠받들어주기 때문이다. 아시안컵 64년 동안 우승 못하는 것도 팩트고, 올림픽 못나가는 것도 팩트이며, 동남아시아에게 고전한 팩트다. 손흥민, 이강인, 황희찬 등 호화 스쿼드에 당연히 아시안 컵을 우승할 줄 알았겠지. 상대팀은 한국 호화 스쿼드들을 철저히 분석했고 거기에 맞춤 전략으로 나왔으며 실력으로 부딪쳤고 호화 맴버 있다고 피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국은 아시안 컵에 나올 때마다 고전했다. 2000년대 들어 아시안 컵 본선에서 3-0 이상으로 깔끔하게 이긴 경기가 몇 개가 될까? 토너먼트 들어갔을 때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중동 국가 중 이란(3승 1무 3패), 사우디아라비아 (4무 1패), 쿠웨이트 (3승 1무 4패), 카타르 (2승 2패), 시리아 (1패), 요르만 (2무 1패)로 열세 및 동률이고 UAE나 바레인, 이라크 아니었으면 우리는 중동 팀에게 밀리는 것이다. 그리고 중동 팀 상대로 아시안 컵 전적이 15승 8무 13패, 거의 간당간당한다. 이게 실전이고 팩트인데 뭘 그리 쉽게 우승하며 진출한다 자신만만해 할까? 이번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B조, 이라크(8승 12무 2패 58위), 요르단(3승 3무 1패, 70위), 오만(4승 1패, 76위), 팔레스타인(상대전적 없음, 95위), 쿠웨이트(12승 4무 8패, 137위)와 한 조로 모두 상대가 중동 팀이다. 모두 상대전적에서 우위에 있지만 그래도 방심하거나, 옛날 생각하면 또 몰릴 수 있다. 그 중에 요르단은 최근에 우리에게 승리한 팀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조 편성이 무난하다 하고 있다. 우리가 최근 들어 중동 팀을 시원하게 이긴게 몇이나 있다고 무난하다고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가짐과 자세, 어딘지 참 불안해 보인다. 게다가 우린 국가대표 감독이 없다. 최종 예선이 3개월도 채 안 남았는데 이제는 정해성 전력강화위원장이 사의를 표했다. 아시안 컵 이후, 클린스만 감독을 해임했고 월드컵을 대비해 새로운 빌드업을 쌓고 구상해야 하는데 도대체 뭐하고 있는건지 모르겠다. 우리에게는 시간이 없다. 클린스만은 갔고 언론 보도대로 귀네슈 감독에게 맡기고 밀고 갔으면 이러한 없을 것 아닌가. 이래서 클린스만 감독을 함부로 해임하면 안 되는거다. 우리 한국 대표팀은 귀네슈 외에는 답이 없다. 귀네슈 감독 선임해서 빨리 대표팀 정비하고 최종 예선에 임해야 한다. 이런 판국에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에서 우리가 무난하다? 무난하긴 뭐가 무난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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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30
  • 국제관계는 철저히 실익, 국제 간의 실익보다 감정이 우선인 일부 한국인들
    새벽 단상으로 불편한 비판을 할까 한다. 나는 한국 사람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국제관계는 철저히 실익으로 따지는 것인데 한국 사람들은 국제 간의 실익보다 감정이 우선이고 익숙하던 것들만 하려고 한다. 공연히 모험하다가 실패하는 것을 두려워하고 했던 것, 익숙한 것만 할려고 하니 거기에서 이미 바닥을 보이고 있는데도 다른 것을 찾을 생각 자체를 안 한다. 그러니 각종 근거와 지표를 갖다 줘도 무시하거나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그러면서 친중, 친미에만 무게를 두고 앵무새처럼 주장하며 그들이 마치 우리의 모든 면을 풍성하게 해줄 것처럼 믿는다. 나라가 잘 살고 실질적인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데 그걸 그렇게 싫다고 하는 나라와 사람들을 한국에서 처음 봤다. 오히려 실익적인 부분을 배격하고 이익을 얻고 있는 나라를 밀어내고 그들을 욕하기까지 한다. 다른 나라들은 하나라도 얻을려고 난리를 치는데 한국 사람들은 뭘 얻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정말 특이하다고 느끼고 있다. 그 이유를 유추해 본다면 중근세 역사에서 한국은 실리외교 및 국가 간의 이해득실을 따지며 실익을 챙기는 역사적 경험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고려 시대까지만 해도 벽란도에 공관을 두고 동북아시아로 들어오는 물목들을 중국 송나라 및 금나라, 원나라와 일본 등으로 가볍게 중개해주고 그로 인한 실익까지 계산했었다. 나는 한국사에 있어 진정한 "동북아시아의 팍스 코리아나"를 실현한 나라를 고려로 본다. 북방의 패권을 두고 다투는 거란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두고 북방의 패권을 쥐다시피 했다. 고려와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발해를 무너뜨리고 북방의 패자를 자처했던 거란 요나라는 서서히 북방에서 힘을 잃어갔다. 승자인 고려는 송나라로부터 막대한 물목을 벌어들였고 여진과 일본에게서 조공을 받았으며 동남아, 멀리 중동의 상인들도 고려까지와서 진정한 해상 실크로드를 실현하여 동북아시아 해상 교역을 완전히 장악했다. 1010년부터 여진이 세력을 확장한 1110년에 이르는 약 100년의 기간동안 고려는 동북아시아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우리가 동북아시아 해상 교역 및 세력을 잃게 된 때는 조선 시대 부터다. 이성계가 위화도 반란에 이은 불법 쿠데타로 고려를 뒤엎고 중국 명나라에 사대하는 동안 우리는 고려가 갖고 있던 해상 패권을 고스란히 명나라에게 넘겼다. 이 때부터 조선은 국가 간의 국제 정치에서의 실리 및 이해득실을 따지는 부분에서 멀어졌던 것이고 상공업을 천시하면서 오로지 중국을 섬기는 사대주의를 대의(大義)로 여겼다.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농업과 상공업자들을 개차반으로 생각하니 국가의 근간이 약해지기 시작했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어도 이와 같은 행태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세상은 변화했고 서양이 대항해시대를 열면서 식민지를 확보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면서 동북아시아에도 위기가 찾아왔다. 그런 가운데 가장 빨리 그와 같은 변화를 감지한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은 비록 미국에 의해 1853년에 강제 개항을 했지만 이를 수치로 받아들이지 않고 서양의 문물을 흡수해 빠르게 낙후된 것을 개선해 나갔다. 상공업의 발달이 부국강병을 갖고 온다는 이치를 일본이 먼저 깨달은 것이다. 그렇게 세상이 변했는데도 조선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상공업을 천시했기에 실리와 국익을 따지는 것도 천한 장사치가 하는 행위라 생각하여 배격했고 국가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도 천하게 여겼다. 조선은 오로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와 공자님의 나라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한심한 체제였던 것이다. 그 결과 먼저 깨달아 열강의 위치에 올라선 일본의 목표가 되었고 결국 우리는 일제 치하에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모험심은 줄어들고 실패하면 남탓만 하고 있다. 최근에는 국익이 밥먹여 주냐는 한심한 자들도 보았다. 상공업을 천시하며 실리와 국익을 따지는 것이 천한 장사치가 한다 생각했던 조선과 작금 대한민국은 하나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과 중공, 러시아, 일본 사이에서 고도의 국제정치적 계산으로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실리를 찾아야 하는데 이 얘기는 여전히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있다. 오로지 감정에만 취해서 기분 좋으면 우방이고 기분 나쁘면 적국이라 욕 쳐대고 있는 꼴들을 보면 딱 그러하다. 한국 사람들은 개개인적으로 실익을 따지고 이해득실 따지는 것을 월등히 좋아하지만 국익을 따지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국익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익이라는 것은 국가를 부강하게 만드는 것이고 국가가 힘을 갖는 것이다. 국가가 힘을 가지면 개인의 이익을 적극적으로 보호할 수 있다. 국가가 없는 국민은 존재할 수 없고 국가가 힘이 없으면 개인의 이익을 남에게 털리더라도 보호를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국가의 이익은 곧 국민 개인의 이익을 서로 악어와 악어새처럼 공존할 수 있는 역할을 하게 해준다. 우리 기업이 러시아에게 외화를 많이 벌고 있고 러시아 또한 자국의 이익되니까 한국의 투자를 받아들이는건데 이번 전쟁이 아니면 어디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나라인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를 대체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물어보면 생각없이 우크라이나에 투자하면 되지라는 사람도 셀 수 없이 많다. 어떠한 실익과 이유 때문에 투자하냐 물어보면 거의 99.99%가 강대국 러시아의 침공을 받아 불쌍하니까라고 대답한다. 러시아는 우리와 비행기 타면 2시간 거리고, 우크라이나는 9,000km나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투자관계 설립 및 국제 관계상으로 가까이 지내는게 쉽지 않다고 얘기해도 귀를 막고 고집을 부린다. 왜 이런 근성이 나오는지 참 이해불가에 알 수 없는 노릇이라 이제는 기이하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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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28
  • 오늘은 6.25, 한국전쟁 74주년을 기념하여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下편은 내일로 미루고 중요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나는 여태까지 누누히 주장해왔다.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게 되면 러시아는 북한을 지렛대 삼아 우리를 압박할 것이고 우크라이나에 살상무기를 보낸다면 러시아 또한 북한에 살상무기를 보내 우리의 안보를 위협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여러 고민을 해봐야 한다. 지금은 74년전의 6.25 전쟁 때와 입장이 다르다. 군의 전술과 전략, 국가 간의 정책 및 국제 정세는 시기에 따라 바뀔 수가 있다. 따라서 우리의 동맹국들과 미국 또한 기조 전략이 바뀌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미국은 오바마 시기부터 주한미군을 축소해오고 있는데 이는 미국의 국제 정세와 정책, 대 동북아 전략이 바뀌고 있음 의미한다. 주한미군을 뺀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때, 우리는 이를 빠르게 감지하고 대책을 마련하고 있었어야 한다. 한국은 늘 안전불감증과 오랜 평화에 맛들여 전혀 긴장하지 않고 대책 또한 세우지 않고 있는데 지금부터 착실히 대책을 만들어 나가지 않으면 우리의 안보는 앞으로 보장할 수가 없다. 미국은 대 동북아 전략을 상황에 따라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는 미국이 영원히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기 바란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이 끝난게 아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 상태이고 사실상 전시나 다름없다. 휴전 협정을 조인한 지 71년째인 현재이고 그동안에 우리는 거의 긴장을 놓다시피 살고 있지만 사실 세계사에서 가장 기록적인 휴전 기간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인들은 74년 전, 6.25 때와 지금이 국제 정세적으로 같을 것이라 착각을 하고 있다. 한국인들 대다수 사람들의 특징은 세계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고 그대로 일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어 러시아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처럼 무장이 허접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고 중동 국가들도 과거 6~70년대처럼 무장이 허접해 이스라엘이 상대해도 모두 이길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변했지만 그들은 변하지 않고 그대로일 것이라는 인식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상식이라 착각하고 있다. 일본과 유럽은 여전히 선진국이고 미국은 세계 최강이며, 러시아와 중국은 가난하고 여전히 후진국이며 공산국가에 소달구지 끌고 다니는 나라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착각과 안전불감, 그리고 변하지 않은 인식이 상식으로 굳어지는 현상은 매우 위 험한 적신호라 볼 수 있다. 74년 전 그 때는 냉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불과 5년 밖에 안됐던 때였다. 그때는 미국이 우리를 도와 줄 여력이 있었고 냉전 사상 첫 지상전이 6.25라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74년 전과 지금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냉전 시대는 끝났고 미군도 예전 같지 않다. 미군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했고 한 때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을 제압했지만 결국 패퇴하여 도망나왔다. 이를 패배로 인정하지 않고 미국의 전략적 철수라고 하는데 전략적 철수가 아니라 패배해서 도망나온 것이다. 미군의 첨단무기를 카불 공항에 그대로 두고 떠난 것을 보면 그만큼 미군이 급했다는 것을 시사해주는 것이다. 그 후로 미국이 지원하여 대리전을 수행하는 나라들은 상대들이 녹록치 않아 고전하고 있다. 우크라이나도 그러하고 이스라엘도 가자를 쉽게 점령하고 하마스를 전멸시킬 줄 알았지만 개전한지 9개월이 넘어가는데 꽤 고전하고 있다. 게다가 레바논에서 헤즈볼라를 상대로 쉽지 않다는 보도들이 여기저기서 흘러 나온다. 이어 한 줌도 안 되는 예멘 후티군마저 이기지 못하고 있다. 이게 지금까지 냉철하게 판단한 미국의 현 주소다. 더불어 미국은 장기적인 지상전을 수행할 여력이 없고 우크라이나, 이스라엘, 대만을 지원하고 있는 판국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지면 미국은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주한미군도 이전에 비해 계속되는 축소로 인해 몇 없으며 이들조차도 침공해오는 적을 6.25 때처럼 목숨 걸고 상대할 수 있을지의 여부도 불투명하다. 이들은 여의치 않으면 부산에서 사이공의 프리퀀드 윈드 작전,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처럼, 그리고 중화민국이 중국 공산세력에 밀릴 때처럼 철수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그럴 확률이 굉장히 높아지고 있다.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한국인들이 있지만 그들과 우리가 구체적으로 뭐가 다른가? 남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민주정부도 미국의 동맹이었고 장개석의 국민당도 미국의 동맹이었다. 우리는 남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민정, 중화민국과 다르게 미국에게 있어 특별한 존재인가? 우리는 스스로 지킬 능력이 없는 채로 미국에 의지하면 결국 미국에게 배신을 당하게 될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남베트남, 아프가니스탄 민정, 중화민국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전의 역사들을 상기하여 앞으로 미국을 대비해 러시아를 보험용으로 생각해 잘 지내야 한다. 그게 우리가 살 길이다. 러시아는 중국, 북한을 설득하거나 이들을 중재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미국에 대한 과도한 의존과 믿음보다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대안을 찾고, 외교적으로 중국, 러시아, 미국, 일본과 동등한 입장에서 잘 지낼 수 있는 묘안을 내놓아야 할 때다. 러북 정상회담에서 북한이 러시아를 안보의 보험용으로 들여놨듯이 우리도 우리 안보를 보험용으로 러시아를 설정해놓고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며 일본,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6:4 정도로만 맞춰 놓는게 현 시점에 있어 최상의 전략이다. 우리는 다른 때보다 매우 중대한 기로에 서있다. 말 그대로 위기라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이전과 같이 안전불감에 이전과 같겠지라는 방심을 하고 긴장의 끈을 놓는다면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 그 때 되면 후회해봤자 늦는다. 아직까지는 골든타임이 남아 있지만 얼마 되지 않는다. 이에 대한 경각심을 모두가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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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25
  • 중동 사막의 자유로운 영혼, 아랍인과 같지만 다른 의미의 이름인 베두인 이야기
    베두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아랍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으며, 베두인이 오래전부터 아랍이라고도 불린 것은 많은 비문과 사료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꾸란에 나오는〈아랍〉도 사실상 베두인을 정의하는 단어이다. 베두인의 언어는 꾸란의 언어로도, 도시 주민의 언어로도 사용된다는 내용은 대부분의 사료에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베두인의 것이라는 학술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한편 예언자 마호메트는 베두인들이 좀처럼 이슬람 화 되지 않는 종족이라고 비난했다. 사실 메카라는 상업도시에서 태어난 이슬람이 사막에서 이동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들에게까지 침투하기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베두인들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평등주의나 민주주의는 이슬람의 근본사상인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는 구절과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메카라는 도시의 정착 문화도 사막의 베두인들과의 연계 선상에서 처음으로 성립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발생과 그 성격으로 인해 베두인 문화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는 베두인의 부족사회와 관련해서 혈연관계를 중요시하는 사회였다. 그러한 부족주의를 배제하고 유일신인 알라와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지향하는 것이 이슬람이었다. 그 이념은 현재에도 변함없지만, 베두인 사회의 부족주의와 혈연주의가 한 번에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앞에 서술한 평등주의 등과 함께 병존하고 있는 것이 그 실정이다. 그러나 베두인의 이동 생활은 최근에 급속하게 변화해 오고 있다. 중앙정부가 확립한 토지 제도의 변화와 철도, 자동차, 비행기 등 근대 교통 기관의 도입, 그리고 사회 경제의 진전에 따라 정착 생활자에 대한 노동 수요의 증가 등의 요인들이 겹쳐, 정착 생활에 들어가는 베두인이 증가하고 있다. 이동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도 차가 낙타를 대신하며 근대적 상품이 사막 깊숙이 전해져 들어가자 현재는 이에 대한 영향을 받아 큰 폭으로 변화해 오고 있다. 베두인들이 유목을 하면서 방목되는 동물은 양, 염소, 소, 당나귀, 낙타, 말, 물소 등으로 분류된다. 유목이라는 경제 환경은 원시적이라는 선입견을 주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는 18~19세기 이후, 농업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달성한 이후부터 농경민으로 변하면서 현재와 같은 현대 문명을 받아들여 유목에 대한 경시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유목은 수렵 채집 경제의 연속이 아니라, 농경 다음으로 생겨난 생활 경제 양식이라는 것이 여러 인류학적 자료를 토대로 실증되었으며, 경작이 불가능한 토지를 이용하기 위해서 나타난 새로운 세련된 생계 경제 방법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의 남단에는 급속한 사막화로 인해 농경 지대가 한계에 달해, 상당한 양의 유목 잉여 인구들이 생겨나면서 농경 민중에서 용감한 사람들이 경작이 불가능한 바디야에(Badiyaye)의 가축을 데리고 북상하여 목초지들을 찾아 갔다. 그러한 부분이 베두인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있다. 베두인이라는 호칭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높이 자랑할 만한 생활을 하는 용기 있는 사막 민족이라는 의미와 도시의 문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따라서 반(半) 정착 생활을 하면서, 목축과 농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바드우(Badu)라고 지칭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싫어하기도 했다. 아라비아 반도는 국가 성립 시기가 매우 늦고 비잔틴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사이의 완충지대로써 국가가 없는 시기가 매우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베두인의 씨족 사회끼리 서로 전쟁이나 상업적인 거래를 하곤 했다. 간혹 어떤 씨족이 강성하게 되어 짧게 왕국이나 제국을 세우는 일은 있었지만 모두 빠른 시기 안에 붕괴되어 버렸다. 그렇게 이슬람이 탄생하기 전까지 씨족 사회가 변함없이 지속되다가 이슬람의 성립과 함께 하나의 종교와 국가 아래 통합되고 베두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강해지게 된다. 원래는 부족 제도의 특성에서 오는 분열성이 심하고 그 중심에는 씨족 간 정쟁이 그치지 않아 좀처럼 연합하지 못하는 부족체였다. 이를 두고 이슬람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이러한 분열 상태의 베두인들을 하나의 지도자 아래 결집시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유목민족으로써 성격이 사납고 전투에 있어서는 매우 무자비했기 때문에 초기 이슬람의 세력 전파에 가장 중추적인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 이슬람의 세력 전파 이후 군영 도시의 주요 구성원들이 베두인들이고 외지인들 중 누군가가 찾아와서 의탁하더라도 하루에 차 한 잔씩 주며 3일은 무조건 보호해주는 규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국가 이전의 부족 사회에서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개인이나 개성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며 씨족과 가족 등 혈연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아직도 많은 베두인들이 옛 삶의 방식을 고수해오고 있기 때문에, 씨족 개개인에게 나타난 모독 현상을 씨족 전체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다. 이는 씨족 개개인이 모여 이룬 씨족의 부족화 현상으로 씨족 구성원 중에 한 명이 모독으로 받아들이면 전체 구성원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요르단, 이스라엘, 레바논 등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계통의 부족들은 자신의 조상이 베두인이라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베두인의 후손들은 확실하게 가족 소개를 들어보면 적어도 자기 6~7대 조부 이름까지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 전통이 강한 씨족들도 자기 기준으로 4대까지만 외우고 있는데 이 또한 베두인의 영향이라 볼 수 있겠다. 베두인들은 유목민이지만 모두 유목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상인이 되어 중개 무역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도시나 마을로 가서 정착하여 농사짓고 장사를 하여 정주민족들과 어울려 살기도 했다. 또한 어업에도 종사하여 어부로 사는 베두인들도 있다. 현재는 현대 문명이 들어옴에 따라 베두인들의 생활도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도시와 마을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다. 아직도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인들은 전체 인구에서 고작 5%에 불과하며 반(反) 유목 생활하는 베두인들조차 10%에 불과하다. 특히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사막화로 인해 유목이 갈수록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이상 유목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에서도 베두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시나이 지역을 지배할 당시에 이들에게 막대한 지원과 혜택을 부여하면서 팔레스타인과 기타 지역에 거주한 베두인-아라비아 인에 비해 매우 우대했다. 사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도 신생 국가였었고 인구가 적은데 본토 땅에서 3배에 달하는 시나이 지역에는 추정으로만 해도 100~20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인구와 비슷하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사로 자라나는 전투민족인 시나이 지역의 베두인들에 대해 대우가 좋지 못하면 게릴라전 등의 반군이 되거나 본토에 있는 군대를 더 많이 동원하여 전투를 벌여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사막 기후이면서 사람이 거주할 만한 도시나 오아시스 마을이 적었기 때문에 군대 및 민간인 거주지로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두인들을 적으로 돌려 대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거의 자치주와 같이 치안을 맡기고 돈이나 생필품까지 지원해면서 최대한의 갈등은 자제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지원에 한계를 느낀 이스라엘이 결국 시나이 지역을 포기하고 이집트에게 시나이 지역을 돌려주면서 이제는 이집트에게 큰 장애물로 남아버렸다. 2012년 시나이 반도 지역 베두인과 이집트의 충돌이 더욱 심해져 중국인들을 납치하여 수감된 동료 석방을 요구하는 등 2012년 2월에는 한국인 관광객 3명이 베두인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29시간 만에 석방되었는데 납치에 대한 사건에 대해 사과도 하고 먹을 것을 잘 주는 등, 대우는 매우 좋았다고 한다. 외국인 납치를 자주 벌이긴 하지만 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모두 무사히 석방시켜 탈레반과 같은 근본주의적 테러 단체와 차원이 다름을 보여주었다. 그러다보니 서구권에서도 베두인들을 테러집단으로 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요르단에서는 베두인들이 국가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인구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이주해온 팔레스타인 베두인들이 더 많지만, 원래 요르단은 건국 자체가 베두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요르단 정계에는 베두인이 많으며 베두인 족장들의 경우 요르단 내에서 고위직이 많기 때문에 국왕과 왕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난다. 베두인으로 이루어진 요르단 군은 아랍권에서 최정예 군대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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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15
  • 2013년 불가리아 공기업 민영화로 인해 전기 요금 인상에 반대 시위 촉발, 총리와 내각 사퇴로 이어진 사건
    보이코 보리소프(Бойко Борисов)는 2005년 11월 8일부터 선거 전까지 소피아의 시장으로 재임했었던 인물이다. 그의 정당이었던 "유럽 발전을 위한 불가리아 시민(GERB)"당이 7월 초에 실시한 2009년 불가리아 의회 선거에서 승리한 후, 2009년 7월 27일에 불가리아의 50번째 총리가 되었다. 이들 GERB는 당시 집권당인 사회당(BSP)을 누르고 승리했다. 불가리아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GERB가 39.7%의 지지를 얻어 17.72%를 얻은 사회당을 눌렀다. 당시 불가리아는 국제투명성기구에서 EU 회원국들 중 가장 부패한 나라로 꼽힐 정도로 악명 높은 나라였다. 족벌주의가 만연한 데다 기득권 세력의 범죄에 대한 사법처리도 전무한 국가였다. GERB의 성공은 현 정권의 부정부패를 집중적으로 추궁했으며 부패로부터 깨끗한 정부를 만들겠다고 공언한 것에 크게 주효했다. 세르게이 스타니세프(Сергей Станишев) 사회당 총재이자 당시 총리의 긴축정책으로 인한 경기 침체도 사회당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당시 개혁을 주제로 당선되었던 보이코 보리소프는 여러 직업을 두루 경험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1959년 소방관 아버지와 유치원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공인 9단의 태권도 선수로도 활동했고 태권도 불가리아 대표팀 코치도 지냈다. 20대에는 소방관, 경찰을 거쳐 1991년 사설 경호회사를 차리면서 불가리아의 지프코프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보리소프에게 부패와 불가리아 마피아 등 지하 세계 대해 단호하게 대응할 것이란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에 그를 당선시킨 것이었다. 이후 소피아 세르디카 경찰서장을 거쳐 2001년 내무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내무부 장관 당시 마약밀매와 범죄 현장을 직접 기습하는 등 대범한 추진력으로 ‘배트맨’이란 별명을 얻기도 했는데 그의 정당이 야당에 비해 세력이 약하기 때문에 연정을 구성해 총리로써 직위를 수행했다. 그는 친서방주의자였고 누구보다 부패척결에 앞장 섰던 인물이지만 침체된 경기를 살리는데 실패했다. 보리소프의 나라 치안과 내정, 그리고 부패 척결에 지대한 공이 있지만 역시 부정부패를 완전히 척결하지 못했고 더불어 서민 경제를 살리지 못했다는 것은 그의 정치력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자리 잡았다.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2013년 2월 15일, 국가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해 전기 요금을 인상하기로 결정한다. 이와 같은 정책을 결정한 이유는 기존의 도나우 강을 중심으로 5개 수력발전소에서 전력을 뽑아내고 있었지만 대개 시설이 지프코프 시절인 1960년대 후반에 지어진 것이라 시설의 노후화가 심각했다. 이를 보수하기 위해 지프코프 정권 이후, 불가리아 정부는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문제는 불가리아의 재정이 이를 감당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시 시메온 총리가 2003년에 민영화 정책을 감행하여 체코국영전력공사(CEZ)와 오스트리아계 전력회사 등 외국자본을 끌어들였다. 이는 시메온 본인이 차르에서 퇴임한 후, 이집트로 망명하면서 유럽 각국을 전전했었고 특히 미국이나 영국의 민영화 정책에서 영감을 받아 도입한 서구식 민영화 정책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2012년 유로 내 경제 관련 조사에서 EU 국가 중 가장 먼저 파산할 위험의 국가로 불가리아가 지목되었던 것처럼 불가리아 내 심각한 재정난은 체코국영전력공사(CEZ)와 오스트리아계 전력회사의 전기 요금 인상으로 이어졌다. 이들 회사들은 지난해 7월 전기요금을 13% 포인트 올렸는데, 겨울철 난방비로 전기료가 급증하자 시민들이 분노한 것이다. 17일부터 수도 소피아를 비롯해 전국 5개 도시에서 수만 명이 모여 전기요금 인상과 정부의 부정부패, 경제난을 비판하며 시위를 벌였다. 19일 밤에는 소피아 거리 한 가운데서 유혈충돌까지 발생했다. 당시 시위는 1997년 은행의 파산, 물가 상승 등으로 인해 고통받던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당시 집권당인 사회당 내각을 총사퇴하게 했던 사건 이래로 가장 규모가 컸다. 당시 로이터 통신은 이 시위를 취재하면서 불가리아 일반인들을 상대로 인터뷰한 결과, 자신들이 구하는 일자리는 급료가 200~350달러 정도에 불과한데 전기료는 135달러 넘게 내야 한다고 말하며 분노를 터뜨렸다고 한다. 이 시위는 필자도 목격한 바 있으며 필자는 2013년 1월부터 소피아 대학에 소속되어 연구교수로 있어 소피아에 거주했다. 이 때 필자 또한 불가리아 사람들의 평균 월급이 약 250달러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기세가 인상되어 외국인인 필자도 생활이 쉽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보리소프 총리는 시위가 확산되자 2월 18일 긴축 재정을 이끌어온 시메온 잔코프 재무장관을 해임한 데 이어 19일엔 불가리아 서부 지역 190만가구에 전력을 공급해온 체코국영전력공사와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밝혔으나 국민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러자 보리소프 총리는 국회에서 더 이상 국회가 국민들의 공격을 막기 위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없다며 사임 뜻을 밝히고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2월 20일 전격 사퇴했다. 단순한 전기세 인상으로 왜 총리가 사퇴까지 해야 하는지 의아해 하는 한국인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무엇이든 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한다. 물가가 오르고 월급은 그대로이며 받은 월급의 65%가 전기세로 나간다면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게 이상한 것이다. 결국 당시 보리소프 총리의 사퇴로 본래 7월 실시될 예정이었던 총선은 4~5월 열렸고 경제 위기 타개를 공약으로 내건 사회당의 플라멘 올레샤르스끼(Пламен Орешарски)가 총리에 당선되어 불가리아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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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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