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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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유럽 사람들은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지은 <동방견문록>을 읽고 놀라게 된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원나라는 고도로 발달된 선진 문명국이었다. 당시 유럽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중국의 생활 문화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미지의 동방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경이와 선망의 대상이던 중국의 위상은 18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유럽이 18세기 중반부터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근대적인 변혁을 이루었다면, 중국은 전통적인 경제 체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기술 혁신과 산업화에서 뒤처졌던 것이다. 유럽과 중국의 서로 다른 경제 체제는 결국 번영과 몰락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갖게 된다. 두 세계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업 경제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은 기업이라는 조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부와 번영을 이루었다. 반면 중국은 관료제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민간의 상업성을 억제하였고 결국 유럽에 추월당했다. 16세기는 유럽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며 무역 범위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된 시기다.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인해 신항로 개척과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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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 의 페이스북

 

무역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향신료와 차 등의 기호품을 취하여 유럽 지역에 되팔며 이득을 얻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량의 은을 조달해 부를 일구게 된다. 17세기에 접어들며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밀리며 동아시아 무역 지배권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동아시아 무역에 진출한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는 1602년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노렸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왕실이나 특정 귀족의 지원이 아니라 일반인에게서 동아시아 무역을 위한 투자 자본을 모으면서, 무역 이익을 투자 금액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 투자 자금의 권리를 증명하는 증서를 발급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주식이라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에 최초로 주식과 투자의 개념을 도입하여 왕실의 재정 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무역을 가능하게 함으로 인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곧 영국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최고의 무역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성공할 수 있는 기반에는 경영과 투자가 분리된 분업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규모 무역은 성공했을 때 수익이 큰 만큼 실패했을 때 위험도 컸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죽을 뻔했던 이유도 그의 전 재산을 실은 선박이 폭풍우를 만나 제 때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처럼 주식회사에서는 많은 주주에게서 예산을 나누어 출자를 받기 때문에 위험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고, 그만큼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해진다. 또한 이와 같은 공격적인 투자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확률을 높인다. 

 

이와 같이 위험 분산과 위협 대비 고수익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주식회사의 성공 요인인 셈이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승승장구하며 유럽 전역에 주식 투자를 활성화시켰고 경제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주식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장소로 증권거래소가 생겨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성공에 자극받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이어 동인도회사가 설립됐다. 이에 기업 경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원양 회사들이 수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나자 지나친 경쟁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선단 이익이 상당수 줄어들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영국 등 열강과 경쟁하려면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공업이 가장 발달한 홀란트 주와 제일란트 주 총독인 오라녜 공 마우리츠(Maurits van Orange)와 네덜란드 연합 전국 회의 의장 요한 반 올덴바르네벌트(Johan Van Oldenvarnebert)가 나서서 상인들과 협상하며 회사 통합을 유도했다. 한 회사로 합치면 후추 무역 독점권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의회 역시 외적을 격파하고 나라를 지키자며 상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시 공화정을 표방한 네덜란드에서는 전국 회의가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전국 회의와 주 정부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대부분 상인 가문 사람이었다. 그 무렵 주요 상인 가문 200여 곳이 북부 저지대를 다스렸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탄생했다. VOC는 네덜란드어로 ‘하나로 통합된 동인도회사’라는 뜻의 단어의 앞자리를 글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은 영국보다 2년 늦은 1602년이었다. 그 무렵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물론 이러한 탐험에는 한 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에 거주한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은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냈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6개 항구 도시 무역 상인들과 시민들의 투자로 충당했다. 선주나 상인 뿐 아니라 중산층도 아시아 무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이에 약 650만 길더가 모였다. 당시 총 1,143명이 투자했는데, 그 중 해상 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81명이 투자 자본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태인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다. 

 

중세 베네치아에서도 상인들이 합자 회사 형태를 만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베네치아와 다른 점은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를 정식으로 했다는 점에 있다. 기업의 전반적인 경영 내용을 알리는 기업공개(IPO)와 주식회사를 통해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여러 사람에게서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이들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상상이 모태가 되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가 넘는 대규모의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가 이 때 탄생한 것이다. 


당시 투자자 81명의 반 이상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특히 1585년 이후 앤트워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온 아쉬케나지 유태인 무역상과 금융인들이 주축이었다. 동인도회사는 투자 지분이 많은 81명 가운데 일부와 기존 원양 상사 14곳의 이사 60인으로 첫 ‘주주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다가 그 수를 점점 줄여 나중에는 ‘17인 주주 위원회’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을 내렸다. 

 

지역별로는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자본이 57.4%를 차지하여 17인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배정 받아야 했으나 다른 도시 5곳의 견제로 8인 자리 만을 배정 받았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회사를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 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많은 4인 자리를 배정받은 로테르담에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상당하여 지분이 많은 유태인들의 발언권이 가장 강력했다. 

 

동인도회사가 주력으로 진출했던 인도네시아 유태인 공동체 서류에 적혀져 있던 글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자금 조달자는 유태인 ‘이사크 르메르(Isaac le Maire)’이고 경영진의 대다수는 유태인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동인도회사에서 아쉬케나지 유태인의 비중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급격히 성장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장세에 따른 경영진들의 인센티브 제도가 법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 동인도회사 이사들은 주주로써의 수익 뿐 아니라, 경영자 인센티브로 총 수익의 1%을 추가로 받게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VOC의 설립을 승인하면서 면허장에 경영진에 대한 보상 제도를 만들어 선박의 운항 횟수를 늘리도록 유도했다. 

 

운항 횟수가 늘면 세입이 많아져 정부로서도 무역 증가와 세수 확보라는 최고의 효과를 얻는 셈이었다. 향후 또 생길지 모를 출혈 경쟁을 방지하려 동인도회사에 동양 무역 독점권과 식민지 개척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동양으로 떠난 배와 교신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리는 점을 고려해, 현지에서 판단해 조치할 수 있도록 ‘조약 체결 및 협상권, 식민 정착지 건설, 화폐 주조권, 사법권, 전쟁 발동권’을 주어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하게 해주었다.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는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국가가 부여하는 이러한 각종 특권의 조건으로 25,000길더를 지불했다. 의회는 이 돈을 유용하지 않고 다시 동인도회사에 재투자했다. 이는 곧 네덜란드 의회가 동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된 셈이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처음 동인도회사에 21년 동안 영업이 가능한 특허장을 발급했는데, 그 뒤 10년마다 1번씩 자산 평가를 해 투자 기간을 연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한 것은 첫째, 상선들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함이 호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먼 거리 항해에 필요한 중간 보급 항구를 지키기 위한 요새에도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무역을 금지하는 나라에 함포 위협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하는 데 필요했다. 넷째,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면 통치하는데 군대는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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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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