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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검색결과

  • 삼성전자 갤럭시S25, 전작과 큰 차이 없는 카메라 사양 공개
    삼성전자의 차세대 플래그십 스마트폰 '갤럭시 S25'의 카메라 사양이 공개되었다. 네덜란드 정보기술(IT) 매체 갤럭시클럽은 19일(현지시각) 소식통을 인용해 내년 초 출시될 갤럭시 S25의 카메라 사양 정보를 전했다. 보도에 따르면, 갤럭시 S25 후면 카메라에는 5,000만 화소 메인 카메라가 탑재되며, 전면 카메라도 전작과 동일 1,200만 화소 카메라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전작인 갤럭시 S24와 비교해 큰 차이가 없는 사양이다. 갤럭시 S25 플러스 모델 역시 동일 5,000만 화소 메인 카메라와 1,200만 화소 전면 카메라를 장착할 예정이다. 초광각 카메라나 망원 카메라 사양은 아직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해당 사양에 변화가 있을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삼성전자가 추가적인 카메라 성능 향상을 통해 소비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지 주목된다. 갤럭시클럽은 갤럭시 S25 기본 모델의 배터리 용량이 전작과 동일 4,000밀리암페어시(mAh)가 될 것으로 전망했다. IT매체 샘모바일은 다른 모델의 배터리 용량에 대한 정보는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표준 모델이 전작과 같다면 갤럭시 S25 플러스와 갤럭시 S25 울트라 모델 역시 각각 4900mAh 배터리와 5000mAh 배터리를 적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예상했다. 갤럭시 S25의 카메라 사양이 전작과 큰 차이가 없다는 소식에 일부 소비자들은 실망감을 표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플래그십 모델로 혁신적인 변화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아쉬운 소식일 수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가 카메라 외에 다른 부분에서 혁신적인 기능을 추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삼성전자는 플래그십 스마트폰에서 항상 최신 기술과 혁신적인 기능을 선보여왔다. 갤럭시 S25에서도 카메라 사양 외에 다른 부분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AI 기술을 활용한 카메라 기능 개선이나 새로운 소프트웨어 기능 도입을 통해 소비자들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갤럭시 S25의 카메라 사양이 전작과 큰 차이가 없다는 소식은 일부 소비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수 있지만, 삼성전자가 다른 부분에서 혁신적인 변화를 통해 이를 만회할 가능성도 크다. 앞으로 갤럭시 S25가 어떤 추가 기능과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일지 주목된다.
    • 과학
    • 정보통신
    2024-06-21

칼럼 검색결과

  • 우크라이나의 조상 코사크인들, 과거 우크라이나인들이 우리 역사와의 인연이 있을까?
    정답은 Yes 이다. 그럼 어떤 인연이었을까? 오늘은 서울에서의 약속이 있어 저녁에 늦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현 상황의 논평, 그리고 관계성, 역사에 관해서 등등을 포스팅하고 지금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진 분들을 위해 하나 장만했다. 때는 시베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개척 시대에서부터 시작된다. 시베리아에 대한 본격적인 개척은 1581년에 코사크의 수장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코사크라는 어원도 원래 이주민, 혹은 일당 노동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거운 세금과 노역을 피해 변경 지방으로 도주한 농노들 또는 그들의 자손들이 품팔이와 수렵 또는 약탈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기에 그러한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예르마크는 이러한 코사크들의 수장으로 볼가 강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다가 정부의 단속을 받아 수감되었지만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구제 요청으로 인해 석방되었고 그는 러시아 황실에 약간의 지원을 받고 시베리아 개척에 나선다. 그리고 오늘날 노보시비르스크에 자리잡고 있던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고 세묜 볼호프스키(Семен Волховский)의 지원을 받아 쿠춤 칸국도 정복하면서 바이칼에 이르렀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초로 바이칼에 다다른 인물이 된다. 그래서 지금도 이르쿠츠크에 가면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의 동상이 있다. 그러나 예르마크와 볼호프스키는 승리 속에 방심하고 있다가 타타르의 복수 부대에 역습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예르마크의 원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러시아인들은 우랄산맥을 건너가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도 본국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만치 않은 강적인 타타르족을 만난 셈이라, 신중하게 움직였다. 1643년, 모스크비친(Moskvicin)이 거느리는 시베리아 탐험대가 오호츠크 해를 탐사했으며,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무르 강 유역과 사할린 섬을 조사하게 되면서 중국 청나라의 영토까지 불법으로 넘나들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이자성에 의해 붕괴된 북경을 청나라가 다시 차지하여 제3대 순치제가 청나라 황제로 등극한 상황이었다. 이에 러시아에서는 또 다른 탐험대를 파견했다. 파견된 포야르코프 탐험대는 아무르 강이 오호츠크 해로 흘러들어가는 하구 일대를 답사한 다음, 그 곳 부족들의 동향에 대해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오호츠크 일대의 부족들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지 않고 있고 이들을 잘 공략하면 러시아에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민족으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 이듬해 파견된 하바로프 탐험대는 포야르코프의 보고를 재확인했고, 오호츠크 연해는 매우 비옥하여 농산물 소출이 좋다는 점, 이를 배경으로 오호츠크 연해와 사할린 섬까지 점령하면 군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이어 보고하게 된다. 1651년 하바로프는 본국에서 증원된 병력을 이끌고 아무르 강 유역의 다구르 족을 공격했다. 이 때 증원된 병력이 바로 그 유명한 코사크 기병대와 소총수 부대다. 이들의 용맹성은 폴란드의 후사르 윙도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유럽 최강의 군대로 알려져 있다. 이에 소수의 청나라 군사가 지원했으나 다구르 족과 소수의 청나라 지원군으로는 코사크 기병대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결국 패배한 청나라는 물러났고 하바로프는 한 동안 러시아 군의 제1 전진 기지가 될 알바진(Albazin) 요새를 건설했다. 1652년에는 네르친스크에 요새가 세워졌으며, 시베리아 중부에서 새 영토들을 개척하기 위해 정착민들과 죄수들이 속속 도착했는데 이들 또한 우크라이나 땅인 드네프르 강 일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켰던 자포로제 코사크 족이었다. 결국 이들이 연해주와 극동 지역의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온 최초의 정착민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청나라도 러시아의 갑작스러운 진입에 경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0여 명의 병력으로 알바진을 공략하게 했는데, 이에 맞선 코사크 군은 200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우수한 무기 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잘 방어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투는 서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러시아-코사크 기병대를 축출하지 못한 청나라의 패배에 가까웠다. 러시아가 만만하지 않은데다 코사크 기병대와 소총수들의 활약에 그 위험성 깨달은 청나라는 무기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조선에 조총수들을 파병해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조선의 조총수 파병 요구의 배경은 당시 청나라가 남쪽에서 발생한 "삼번의 난"으로 인해 주력군들이 죄다 남쪽으로 파병되어 있었고 북방을 지키거나 러시아-코사크군을 공격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의 왕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 1649~1659)이 즉위하던 때였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여 비밀리에 군대를 훈련시키고 성지(城池)를 개수했다. 또한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 등에게 신무기를 만들게 하고,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하여 군비를 확충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효종실록>12권, 5년 (1654 갑오 / 청 순치(順治) 11년) 2월 2일(계해) 1번째 기사에 의하면 청나라에 다녀온 차사 한거원(韓巨源)이 서울에 돌아와 “조창(鳥槍)을 잘 쓰는 사람 1백여 명을 뽑아 보내라”는 청나라 예부의 요구를 전달하자 효종이 ‘나선’이 어떤 나라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한거원은 “영고탑 근처에 사는 별종들”이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침내 영의정 정태화가 북우후(北虞候) 변급을 군사 인솔자로 추천하였고 변급은 회령에서 8일만에 영고탑에 도착했다. 이어 영고탑에서 다시 14일 가서 왈합에 도착하여 코사크 소총수들과 조우하게 된다. 이 때 러시아-코사크 군은 큰 배가 13척, 작은 배가 26척이었다. 청나라 장수가 조선군을 선봉에 세우려 하자 변급은 “이 작은 자피선으로 어떻게 큰 서양 배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거부하자 이를 타당하게 여긴 청나라 군은 왈합 원주민 300여 명과 청군 300여 명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하고 조선군에게는 포병으로 지원사격을 맡겼다. 청나라는 당시 조선 조총수의 위력에 새삼 놀랐다고 한다. 한편 조선 조총수의 위력에 그 유명한 코사크 인들은 장교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은 모두 패퇴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군의 뛰어난 조총 사격에 러시아인들과 코사크 군들은 모두 뱃속에 숨어 있었고 조선군과 청군은 러시아 군함에 불을 질렀으나 러시아 군함에 실린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가 배의 불을 진화하고 전리품을 얻을 것을 명령하면서 조선 병사들은 황급히 불을 끄고 다시 배로 돌아가는 헛수고를 해야 했다. 그 때 숨어있던 러시아인들이 사격을 가하면서 조선군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전사자가 났고 기습공격에 분노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해 러시아인들을 모두 섬멸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쟁이 바로 나선정벌로 이어서 1655년의 코마르(Komar) 공방전, 1657년의 사르호디(Sarhodi) 전투, 1658년의 제2차 나선정벌 등에서 양측은 다시 공방전을 벌였으나 1660년 이후로는 청나라 측이 명나라의 잔적들을 섬멸함에 따라 러시아의 남진에 집중할 수 있어 우세를 잡게 되었다. 이에 더 이상 조선의 조총수들을 요청하지 않게 됨에 따라 결국은 우크라이나의 조상인 코사크인들과의 짧은 만남은 이렇게 끝나게 된다. 당시 나선정벌 때 러시아군의 주력은 코사크인들이었기 때문에 현재 우크라이나와는 크게 상관은 없지만 우크라이나의 조상들과 우리 한국사는 굵고 짧은 전쟁으로 인해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3
  • 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역사
    1595년 네덜란드가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여기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 기업 제도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1656년의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 조례 개정 이후 있은 뒤에 찰스 2세 시대에 근대식 주식회사로서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동인도 회사의 활동 범위는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주요 사업은 향료 무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에 패배하여 17세기말까지는 인도로 후퇴하게 되었다. 영국은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서부 인도의 해안선을 지배하에 두었다. 물론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국의 작가 가일스 밀턴(Gails Milton)의 저서인 <향료전쟁>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 또는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EIC)는 17세기 영국에서 동양 무역의 독점과 인도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설립된 회사로, 당대 영국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이었으며 영국이 장기적으로 인도를 지배, 중국에 진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일명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대영제국을 존재하게 한 회사라 볼 수 있다. 물론 경칭으로 위대한 동인도 회사(Honourable East India Company, HEIC)라 불리기도 했다. 가장 처음 설립된 동인도 사는 일명 동인도 제도에서 무역하는 정부와 런던 상인의 회사(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가 1600년에 설립 허가를 내주었다. 이후 이에 대항하는 동인도 제도에서 무역하는 잉글랜드 상인의 연합 회사(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가 1708년 설립되었다. 보통 전자를 런던 회사, 후자를 영국 회사라고 부르며 모두 영국 동인도회사라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원주민 생산자에게 경제 이 외 강제적인 행위를 가하였다. 회사는 단순한 기업에 그치지 않고, 내륙 지방에 대한 토지와 주민의 지배를 확대하였으며 1765년 토지세로 대표되는 벵골 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양도받으면서 벵골의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정치 권력자 및 영토 지배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초창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전쟁보다 무역 자체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1600년 설립된 이후 1세기 동안 이사회는 동인도회사의 사업은 전쟁이 아닌 무역임을 강조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도와의 무역에 주력했는데, 특히 인도에서 가장 세력이 약하고 유럽의 경쟁국들이 가장 적었던 벵골과 마드라스가 주요한 활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근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그들은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한창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도 무력으로 충돌했다. 프랑스는 세포이로 알려진 인도 병사들을 정규군으로 수용하여 전투 능력을 증대하면서 영국보다 우위를 점했다. 1750년대 영국 동인도회사도 세포이를 수용했고 7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 두 나라는 각각 10,000명에 달하는 무장한 병력들 중 대부분 인도인들을 인도 해안에 배치했다. 청나라에 관심을 가지던 영국은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1759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직원을 북경으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건륭제(乾隆帝, 재위 : 1735~1796)는 이를 허가하였으나 갑자기 이를 거절하고 대외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산(舟山)과 하문(아모이)의 항을 폐항 하고 광주항만 개항을 허락하였다. 추가로 건륭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인들은 반드시 공행(公行)과만 매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그 시기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1780년대부터 청나라와 영국 동인도회사는 본격적인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광동 무역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 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 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양행 상인들의 조직인 공행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였고 외국 상인들의 무역을 제한했다. 또한 무역 기간이나 물품도 통제하여 유럽 상인들이 별다른 수입을 올리지 못하였다. 1680년대 찰스 2세가 회사에 대하여 징병 권, 사관임명권, 교전 권(交戰權) 등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이 보강되었다. 경쟁 상대인 신(新) 동인도회사를 합병하고,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1757년에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승리하면서 18세기 중엽에는 인도에 대한 독자적인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인도의 행정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 하에 들어갔다. 1814년의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차(茶)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會社領)의 국왕에 이양 등으로 그 사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832년 2월 26일, 동인도회사는 광주(廣州)에 와 있던 영국인 간첩 휴 해밀튼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에게 염탐을 시켰다. 그는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 호의 선주를 사칭하고, 카를 귀츨라프(Karl Gützlaff)와 함께 광동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남오(南澳), 하문(廈門), 복주(福州), 영파(寧波), 상해(上海), 위해(威海) 등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 경제, 군사 정보를 수집하여 영국의 외무대신 헨리 존 템플(Henry John Temple)에게 넘겨주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17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활동
    14세기, 유럽 사람들은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지은 <동방견문록>을 읽고 놀라게 된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원나라는 고도로 발달된 선진 문명국이었다. 당시 유럽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중국의 생활 문화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미지의 동방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경이와 선망의 대상이던 중국의 위상은 18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유럽이 18세기 중반부터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근대적인 변혁을 이루었다면, 중국은 전통적인 경제 체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기술 혁신과 산업화에서 뒤처졌던 것이다. 유럽과 중국의 서로 다른 경제 체제는 결국 번영과 몰락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갖게 된다. 두 세계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업 경제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은 기업이라는 조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부와 번영을 이루었다. 반면 중국은 관료제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민간의 상업성을 억제하였고 결국 유럽에 추월당했다. 16세기는 유럽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며 무역 범위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된 시기다.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인해 신항로 개척과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무역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향신료와 차 등의 기호품을 취하여 유럽 지역에 되팔며 이득을 얻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량의 은을 조달해 부를 일구게 된다. 17세기에 접어들며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밀리며 동아시아 무역 지배권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동아시아 무역에 진출한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는 1602년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노렸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왕실이나 특정 귀족의 지원이 아니라 일반인에게서 동아시아 무역을 위한 투자 자본을 모으면서, 무역 이익을 투자 금액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 투자 자금의 권리를 증명하는 증서를 발급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주식이라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에 최초로 주식과 투자의 개념을 도입하여 왕실의 재정 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무역을 가능하게 함으로 인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곧 영국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최고의 무역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성공할 수 있는 기반에는 경영과 투자가 분리된 분업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규모 무역은 성공했을 때 수익이 큰 만큼 실패했을 때 위험도 컸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죽을 뻔했던 이유도 그의 전 재산을 실은 선박이 폭풍우를 만나 제 때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처럼 주식회사에서는 많은 주주에게서 예산을 나누어 출자를 받기 때문에 위험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고, 그만큼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해진다. 또한 이와 같은 공격적인 투자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확률을 높인다. 이와 같이 위험 분산과 위협 대비 고수익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주식회사의 성공 요인인 셈이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승승장구하며 유럽 전역에 주식 투자를 활성화시켰고 경제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주식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장소로 증권거래소가 생겨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성공에 자극받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이어 동인도회사가 설립됐다. 이에 기업 경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원양 회사들이 수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나자 지나친 경쟁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선단 이익이 상당수 줄어들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영국 등 열강과 경쟁하려면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공업이 가장 발달한 홀란트 주와 제일란트 주 총독인 오라녜 공 마우리츠(Maurits van Orange)와 네덜란드 연합 전국 회의 의장 요한 반 올덴바르네벌트(Johan Van Oldenvarnebert)가 나서서 상인들과 협상하며 회사 통합을 유도했다. 한 회사로 합치면 후추 무역 독점권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의회 역시 외적을 격파하고 나라를 지키자며 상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시 공화정을 표방한 네덜란드에서는 전국 회의가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전국 회의와 주 정부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대부분 상인 가문 사람이었다. 그 무렵 주요 상인 가문 200여 곳이 북부 저지대를 다스렸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탄생했다. VOC는 네덜란드어로 ‘하나로 통합된 동인도회사’라는 뜻의 단어의 앞자리를 글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은 영국보다 2년 늦은 1602년이었다. 그 무렵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물론 이러한 탐험에는 한 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에 거주한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은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냈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6개 항구 도시 무역 상인들과 시민들의 투자로 충당했다. 선주나 상인 뿐 아니라 중산층도 아시아 무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이에 약 650만 길더가 모였다. 당시 총 1,143명이 투자했는데, 그 중 해상 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81명이 투자 자본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태인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다. 중세 베네치아에서도 상인들이 합자 회사 형태를 만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베네치아와 다른 점은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를 정식으로 했다는 점에 있다. 기업의 전반적인 경영 내용을 알리는 기업공개(IPO)와 주식회사를 통해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여러 사람에게서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이들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상상이 모태가 되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가 넘는 대규모의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가 이 때 탄생한 것이다. 당시 투자자 81명의 반 이상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특히 1585년 이후 앤트워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온 아쉬케나지 유태인 무역상과 금융인들이 주축이었다. 동인도회사는 투자 지분이 많은 81명 가운데 일부와 기존 원양 상사 14곳의 이사 60인으로 첫 ‘주주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다가 그 수를 점점 줄여 나중에는 ‘17인 주주 위원회’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을 내렸다. 지역별로는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자본이 57.4%를 차지하여 17인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배정 받아야 했으나 다른 도시 5곳의 견제로 8인 자리 만을 배정 받았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회사를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 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많은 4인 자리를 배정받은 로테르담에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상당하여 지분이 많은 유태인들의 발언권이 가장 강력했다. 동인도회사가 주력으로 진출했던 인도네시아 유태인 공동체 서류에 적혀져 있던 글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자금 조달자는 유태인 ‘이사크 르메르(Isaac le Maire)’이고 경영진의 대다수는 유태인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동인도회사에서 아쉬케나지 유태인의 비중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급격히 성장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장세에 따른 경영진들의 인센티브 제도가 법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 동인도회사 이사들은 주주로써의 수익 뿐 아니라, 경영자 인센티브로 총 수익의 1%을 추가로 받게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VOC의 설립을 승인하면서 면허장에 경영진에 대한 보상 제도를 만들어 선박의 운항 횟수를 늘리도록 유도했다. 운항 횟수가 늘면 세입이 많아져 정부로서도 무역 증가와 세수 확보라는 최고의 효과를 얻는 셈이었다. 향후 또 생길지 모를 출혈 경쟁을 방지하려 동인도회사에 동양 무역 독점권과 식민지 개척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동양으로 떠난 배와 교신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리는 점을 고려해, 현지에서 판단해 조치할 수 있도록 ‘조약 체결 및 협상권, 식민 정착지 건설, 화폐 주조권, 사법권, 전쟁 발동권’을 주어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하게 해주었다.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는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국가가 부여하는 이러한 각종 특권의 조건으로 25,000길더를 지불했다. 의회는 이 돈을 유용하지 않고 다시 동인도회사에 재투자했다. 이는 곧 네덜란드 의회가 동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된 셈이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처음 동인도회사에 21년 동안 영업이 가능한 특허장을 발급했는데, 그 뒤 10년마다 1번씩 자산 평가를 해 투자 기간을 연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한 것은 첫째, 상선들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함이 호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먼 거리 항해에 필요한 중간 보급 항구를 지키기 위한 요새에도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무역을 금지하는 나라에 함포 위협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하는 데 필요했다. 넷째,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면 통치하는데 군대는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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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3
  • 중세 유럽의 신기원을 이루었던 프랑크 족의 기원
    중세 유럽의 신기원을 이루었던 프랑크 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최근 200년 동안 학자들마다 견해가 달랐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문화나 민족학 연구 결과 최근에는 이 민족이 전통적인 게르만 계통 민족 국가이며, 켈트의 후예라는 점이 명확해지고 있다. 이들 은 단일한 부족 체계가 아니라 라인 강 동부 지역, 중, 하류 일대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 살리(Sali) 족, 리부아리(Livuari)족과 오늘날 네덜란드, 벨기에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카티(Cati) 족을 포함한 다 종족 공동체의 통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여러 소부족의 부족 집단에 대한 호칭이면서도 통칭적인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카이사르가 게르마니아를 원정할 때 프랑크 족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다가 후일 토이토부르크(Teutoburg) 전투에서 최초로 언급되어졌다. 이들 프랑크 족은 살리 족이 지도적 지위에 있었으며, 후일 민족 이동 시기에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 지방으로 들어와 정착하게 된다. 이에 나도 프랑크 족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연구를 진행했었지만 그 기원에 대하여 밝히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본 연구자가 프랑크 족의 기원에 대하여 문헌적으로 밝힌 것이 현재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2세기 로마 비석에 새겨진 명문으로 추적한 결과 본래 켈트 인의 분파라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켈트 인의 분파인 전체 게르만 계통 민족들, 그들의 분파들을 정리해 본 결과 라인 강 일대의 분파, 폴란드, 체코 지역의 동유럽 일대의 분파, 그리고 발트 지역과 스칸디나비아의 고트 분파로 분류할 수 있는 가운데 프랑크 족과 수에비 족, 부르군트 족은 라인 강 분파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들의 현실적인 기원은 오늘날 오스트리아 할슈타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이사르의 정복 이후 갈리아-게르마니아 속주는 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 로마 영내에서 이주해온 귀족들과 게르마니아 부족장들의 권한은 미증유로 강화되었다. 로마 귀족들과 게르마니아 부족장들은 공지를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여 거대한 영지를 구축했다. 그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이용하여 제정 로마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 대지주들의 압제적인 태도와 횡포로 인하여 화폐의 인플레, 물가 상승 등 여러 가지 사회 악재가 초래되었고, 가난한 부족민들의 재정 부담은 날로 배가되었다. 게다가 권위적인 경제 정책은 군인들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갔고, 이 모든 현상이 시골의 사회적 위기를 가중시켰다. 초기에 소규모의 약탈로 시작된 반란은 3세기 후반부에 몰락한 농민들의 폭동인 자크리(Jacquerie)의 난으로 크게 번지게 된다. 자크(Jacques)는 프랑스에 거주한 농민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이들의 반란을 자크리의 난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특히 1358년 흑사병의 창궐과 백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북부 프랑스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때부터 자크리(Jacques)의 난은 전체적으로 농민 반란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들은 대지주 귀족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옹호한 로마 제국의 낡은 지배 체제에 대해서도 강하게 저항했다. 연이은 농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갈리아-게르마니아 속주에는 불안과 무질서가 창궐했고,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알라만 족과 프랑크 족과 같은 게르만 계통 민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233~234년에 최초로 서부 게르만계 혼성 부족인 알라만 족이 원주지였던 엘베 강 유역으로부터 이동하여 라인 강을 건너 플랑드르의 로마 속주까지 진출했다. 이에 진노한 로마 황제 막시미누스(Maxininus, 재위 : 235~238)는 알라만 족들을 다시 엘베 강까지 밀어냈지만 게르만 계통 민족들의 로마로의 영내 이주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로마 제국의 갈리아-게르마니아 무정부 상태를 이용해서 게르만 계통 민족의 이동은 계속 이어졌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있던 4세기 중반에 아시아 기마유목민족인 훈족이 동유럽에 침입했다. 이에 고트족이 발칸 로마 속주로 이주함에 따라 이것을 계기로 게르만 계통 민족들의 이동이 시작되어, 그 후 약 200년간 유럽은 민족 대이동의 암혹 시대가 지속되었다. 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훈족에 의해 촉발된 게르만 계통 민족의 대이동은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프랑스 사가들에게 이 사건은 이민족의 대 침입으로 규정되었으며, 독일사가에게는 민족 대이동으로 규정됨에 따라 서유럽 사가들의 서술 또한 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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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 스페인 바스크족 이야기
    바스크족은 중세 시대 때는 소수 민족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결혼 동맹 등으로 외교적으로 자주성을 지켜내면서도 스페인 왕국 성립에 참여해 스페인 시민이 되어 동화되는 등 유연한 면모도 가지고 있는 민족이었다. 통합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아라곤 왕국, 카스티야 왕국, 나바라 왕국의 왕가들은 모두 바스크 민족의 왕이었던 산초 3세의 후손들이다. 결국 스페인의 중세 왕조들은 바스크족의 후예들, 그리고 바스크족이라는 이렇게 스페인 제국 출발의 핵심에는 바스크 민족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페인계와 독일계 합스부르크 가문에도 이들 바스크족의 혈통이 들어간다. 게다가 프랑스에 여왕을 결혼시킴으로써 결혼 동맹으로 동군연합이 되었고 위그노 전쟁에서 부르봉 왕가의 외가로써 참전해 부르봉 왕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바스크족들이 유럽 강대국들과의 결혼 동맹과 군사적인 지원에 성공한 결과 많은 유럽 강대국들의 왕가에 바스크족의 혈통들이 존재하며 그러한 이유로 인해 현재까지도 바스크족을 소수 민족이라 낮추어 보는 국가는 없고 스페인 내에서도 매우 위상이 높다. 중세 시대 바스크족은 다른 유럽인들과 다르게 바이킹들과 평화적으로 교류했는데 이들로부터 조선술, 항해술을 전수받았고 바이킹 몰락 이후에는 대서양의 주인으로 불렸던 만큼 조선술과 항해술에 매우 뛰어났다.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 이사벨 1세의 후원으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할 때도 이미 아메리카 대륙을 다녀왔던 바스크족이 콜럼버스의 모험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당시 어획, 고래잡이, 선박, 철광석 수출 등의 사업을 했고 영국, 북유럽, 아메리카 대륙을 오가며 무역 흑자로 막대한 수입을 올려서 당시부터 매우 부유한 민족들이었다. 바스크 지방은 원래 나바라 왕국의 영토였지만 1512년 스페인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다만 통일 스페인이라는 국가는 기본적으로 연합체로 구성된 국가 체제였기 때문에 지방 분권의 특성이 강했고 다른 지방들이 그러하듯이 바스크 지방 또한 폭 넓은 자치를 누렸다. 특히 스페인의 군주들은 카탈루냐 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는 것에 바스크 지방의 지원을 받았고 그 대가로 바스크 지방에는 더 많은 자유가 허락되었다. 19세기 말 산업 혁명 시기 영국 자본이 많이 유입되면서 공업과 금융업이 발달했고 금융 쪽에 강하다는 점은 지금도 남아 BBVA 은행(라리가 공식 스폰서인)과 이베드롤라(Ibedrola) 은행의 본사가 빌바오에 위치하고 있다. 바스크인들이 경영하는 몬드라곤 협동 조합은 독특한 운영 방식으로 대부분의 근무처와 다른 장점을 내세워 웬만한 대기업 이상의 경제적인 가치를 창출하고 있고 일자리 창출 또한 우수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스페인 내전 당시에 원래 바스크 지역은 자치권 확대 약속 때문에 공화 진영에 가담했지만 공화 진영 중 가장 보수적 색채가 짙은 지역이었다. 바스크 지역은 전쟁 전부터 중앙 정부와 멀리 떨어져 나머지 유럽, 아메리카와의 각종 비즈니스로 인해 벌어들인 돈을 지역 사회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현지 산업 노동자들과 소위 '민족 자본가'의 갈등이 심하지 않은 편이었고 바스크 가톨릭 사제들 또한 스페인 전국 규모의 극우 정치판과 거리를 두어 바스크 지방 자체가 전반적으로 스페인 다른 지방보다 좌우 계급 및 이념 갈등, 세속주의와 카톨릭 교권 사이의 갈등이 확연하게 적었던 지역이었다. 이러니 대외적으로 자치권 확대를 위해 군인들이 밀어주는 스페인 중앙 집권적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공화국 정부와 전략적인 동맹을 맺었지만 내부적으로는 나머지 스페인 공화파 진영을 장악했던 아나키스트들이 주도한 사회 혁명과 무관하게 돌아가게 된다. 바스크족은 가부장적인 문화를 가졌던 로마에 동화되면서도 특유의 전통적인 남녀 평등 상속 문화를 중세 시대를 거쳐 현대까지도 고수해 낸 것으로 유명하다. 스페인에서 전통적으로 살리카 법이 적용되지 않았었고 이것이 유래와 전통이 되었던 민족이다. 1937년에 바스크 지역이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국민 진영에게 항복했을 때 바스크 지역 정부는 국민 진영에게 평화적인 대우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항복을 조건으로 맺어진 그 약속은 결국에는 지켜지지 않았다. 그 유명한 게르니카가 바스크 지방의 도시로 알려져 있는데 프랑코 정권 수립 후에는 중앙 집권화 정책으로 인해 심한 탄압을 받았다. 그래서 바스크족의 무장 투쟁 단체인 ETA가 등장했고 2018년에 공식적으로 해체될 때까지 분리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벌이기까지 했다. ETA는 평화적으로 독립을 요구했던 카탈루냐와는 달리 행동에 더욱 적극적이었는데 이들은 스페인 중앙 정부 인사를 납치해서 죽이거나 정부 건물에 폭탄 테러를 하는 등 무력 투쟁이 주류였다. 한때는 20세기 유럽의 대표적인 분리주의 테러리스트 중 가장 악명 높았던 지역 중 하나가 바스크족이었다. 이에 대한 일례로 1992년은 바르셀로나 올림픽 및 세비야 엑스포,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이었다는 역사의 기념비적인 날들이 이어지며 ETA가 테러 공격을 감행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정작 ETA는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 이후, 민주화가 진전되고, 주민들 중에 스페인과 화해하며 무장투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급속도로 확산되면서 1980년대 중후반부터 신입 ETA 전사가 거의 입단하지 않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독립 투쟁을 주장하는 혁명세도 걷히지 않아 거의 쇠퇴해갔다. 이로 인해 무장 폭력투쟁은 완전히 사라졌고 스페인 정부의 통치에 순응하고 있지만 카탈루냐 독립운동과 더불어 바스크는 스페인 정부에서 면밀히 주시하고 있는 지역이다. 한 때, 대한민국의 외교부 사이트에서조차 바스크 지역은 스페인 내에서 여행금지지역으로 지정되었을 정도였다. 스페인의 락그룹 라 오레하 데 반 고흐(La Oreja de Van Gogh)의 멤버이자 작사 담당인 파블로 베네하스(Pablo Benegas)의 아버지인 호세 마리아 베네하스(José María Benegas, 1948~2015)가 스페인 사회노동당(Partido Socialista Obrero Español)의 국회의원을 역임했을 정도로 최근 바스크족의 스페인 정치에 참여 비중이 높아지고 있으며 2004년 스페인 총선거에서는 예상을 뒤엎고 인민당에 압승을 거두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당시에 마드리드 지하철 테러사건이 터지면서 상황이 반전되어 원내 1당을 차지했던게 컸고 그로 인해 집권에 성공했지만 2008년 총선 이후, 이후로 인민당 정부로부터 이어졌던 부동산 호황이 금융위기가 일어나면서 자금줄이 막히다시피하며 처절하게 붕괴되었다. 부동산 시장이 급속히 붕괴되자, 많은 기업들이 파산의 길로 접어들면서 전체 실업률이 금융위기 이전의 3배 이상으로 뛰어오르고 청년실업률은 40%-50%를 넘나들기에 이르렀다. 경제위기 이전에 30%대였던 GDP 대비 국가 채무 비중도 은행 구제에 대량의 재정을 소모하면서 100%를 넘기기에 이르면서 국가 경제 파탄에 일조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스크주 지역은 스페인에서 경제 수준이 월등히 높은 지역이고 부자 동네임을 자처하며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카탈루냐보다도 1인당 GDP가 훨씬 높다. 카탈루냐의 경우 프랑코가 카탈루냐인들의 불만을 억제하기 위해 공업 단지 조성을 해주는 등 경제적 지원을 해 주었지만 바스크는 전혀 그러지도 않았기에 바스크족 스스로가 일구어낸 쾌거라 보는게 맞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스페인 내에서 실업률이 가장 낮은 주(州)에 속했다. 2007-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도 스페인에서 가장 경제 사정이 나은 지역이기도 하다. 그 일례로 2010년 기준 안달루시아의 1인당 GDP가 22,000$인 데 비해 바스크는 41,000$다. 바스크의 경제력은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수준이다. 실업률의 경우 2012년 바스크의 실업률이 14%였다면 안달루시아 지방의 실업률은 35%였다. 그렇지만 급여 수준으로 볼 때 그렇게까지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스페인 국립 통계청(INE)에서 발간한 연간 임금 구조 조사 (Encuesta anual de estructura salarial)을 보면 빠이스 바스코(País Vasco)의 평균 임금은 26,535유로, 스페인 전체 평균은 22,726유로다. 앞서 언급한 안달루시아 지방은 20,891유로이며 가장 적은 소득의 임금은 19,278유로의 카나리아 제도로 나타난다. 스페인에서 가장 소득이 높고 전체 평균보다 20% 가까이 높으니 바스크 지역의 경제력은 스페인 여타 지역보다 우월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스크는 고래 잡이 산업으로도 유명했다. 9세기부터 시작된 바스크 지방의 포경 산업은 주 본거지인 비스케이 만의 고래가 줄어들자 아이슬란드나 심지어 북아메리카의 뉴펀들랜드 섬까지 진출했다. 나중에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뒤쳐지기는 했지만 이들도 바스크 출신 포경 선원들을 상당히 많이 고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슬란드로 진출한 선원들 사이에서 아이슬란드어와 바스크어의 피진어(Basque-Icelandic pidgin)가 생겨나기도 했고 북아메리카에 남은 유일한 프랑스 영토인 생피에르 미클롱(Saint-Pierre et Miquelon)의 국기에 바스크 지방 깃발이 삽입되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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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9
  • 민족주의, 전쟁, 학살 등 보스니아 - 크로아티아 전쟁의 전범,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이 법정에서 음독 자결한 이유
    2017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 법정에서는 모스타르 학살을 주도한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이 11월 29일 최종 판결을 위해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당시 이 재판은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보스니아 무슬림에게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그에게 20년 형을 선고했다. 판사는 프랄략에게 죄를 인정하는지를 묻자 “Bull shit (헛소리)! 나 프랄략은 전범이 아니다. 당신의 판결을 경멸하며, 거부한다(Ja, Praljak, nisam ratni zločinac. Prezirem i odbacujem tvoj sud).”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병에 든 액체를 마셨다. 이 액체를 모두 마신 뒤 “방금 내가 마신 것은 독약이다(Ono što sam upravo popio bio je otrov)”라고 소리쳤다. 이는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희대의 자살극이었다. 그러자 재판은 중단되었으며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현대적인 국제전범재판이 시작된 이후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희대의 사건이었다. 무엇이 프랄략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그 죽음에 대한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정에서 자살로 사망한 프랄략은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꽤나 유명한 연극인이었다. 그는 희곡작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각국 언론들이 프랄략이 독약을 마시기 전후 그의 외침 자체가 연극 대사와 같았다고 판단한 이유가 그의 본 직업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살아 있다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연극계 원로로 평온한 노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바뀐 것 역시 보스니아 전쟁 때문이었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공화국 대통령이 이끌고 있던 크로아티아 민주동맹의 창당 인사 중 한명인 프랄략은 크로아티아 방위협의회(HVO,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의 사령관을 맡으면서 군인으로 변모했다. 전쟁 초기인 1992년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은 상호 협력적인 관계였다.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및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민병대가 포위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부의 도시인 모스타르를 보스니아 무슬림들과 함께 지켜냈다. 하지만 1993년 초,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카톨릭 세력 간에 전쟁이 발생했고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 간의 전쟁에서 모스타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것은 이 프랄략의 군대였다. 이 전쟁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인 거주지역을 병합하여 완전한 크로아티아의 영토로 만드려는 투지만 대통령이 기획한 전쟁이었다. HVO 크로아티아 민병대는 모스타르 내, 외부의 무슬림 거주민들을 집단 추방했다. 당시 수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약 1만여 명이 수감됐다. 수감자 중 노인과 여성은 학대를 받았고 상당수가 학살되었다. 피해자들에는 세르비아계사람들과 집시도 포함되었다. 프랄략이 사망하기 1주일 전, 역시 ICTY에서 민족학살과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라트코 믈라디치 세르비아계 스르브스카 군 사령관 또한 모두가 거짓말이라 외치면서 판결에 승복하지 않은 것과 같이 프랄략도 이 판결을 거부했다. 종신형을 받은 믈라디치와 다르게 프랄략은 고작 20년 형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하지 않았더라면 가석방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는 ICTY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13년을 복역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형기의 3분의 2을 마친 죄수는 석방시키는 것이 관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머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 자살을 한 이유로 볼 때 스스로 전쟁 때부터 만든 원칙인 크로아티아 독립과 통합이라는 하나의 대의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날 10~25년 형을 받은 6명의 전범들은 모두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로 모스타르 학살과 관련이 있었다. 물론 세르비아계에 비해 전쟁 범죄에 대한 규모는 적었던 것으로 판단했지만 크로아티아계 역시 민족청소,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 것이 이 날 재판 판결의 핵심이었다. ICTY는 투지만이 스스로 녹음해 두었던 방대한 대화와 통화 녹음 테이프를 통해 투지만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의 HVO 군에 돈과 차량, 무기 및 군지휘관을 지원한 배후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는 보스니아 전쟁 범죄의 주체는 세르비아계라는 국제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크로티아계 역시 투지만으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 기획 범죄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밝혔다는 것에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ICTY는 프랄략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이날 판결 내용을 거듭 확인했다. 전쟁 범죄를 저질렀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을 포함해 범죄집단(Joint Criminal Enterprise)이라는 용어를 새로이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세르비아계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민족 청소의 주범으로 세계의 지탄을 받았었다. 그러나 당시의 판결로 인해 크로아티아계까지 민족 청소의 주범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ICTY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재판 중 옥사한 것과 다르게 투지만은 ICTY가 기소를 완성하기 전인 1999년 자연사했다. 물론 그가 살아 있었다면 크로아티아인들이 국부로 모시는 투지만 역시 ICTY 법정에 섰어야 했다. 믈라디치와 마찬가지로 프랄략은 투옥되면서 복역 중에 양심수였고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했었다. 믈라디치가 판결 이후, 자신은 이미 늙은 사람이라서 이와 같은 판결은 중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족들에게 앞으로 남길 유산이라고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랄략이 법원에서 한 절규는 자신의 무죄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크로아티아계가 전후 누려온 면책이 끝나고, 또 다른 악마화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죽음으로 항변하려 했던 듯 싶다. 믈라디치가 현재 세르비아인들의 영웅인 것과 같이 프랄략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있어 영웅이자 순교자로 여기고 있다. 보스니아 내, 외부의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았고 그를 카톨릭의 성인으로 받드는 분위기까지 감지되었다. 당시 11월 29일 당일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지역에서는 프랄략에 대한 추모 미사와 촛불 추념회가 열렸다. 당시 안드레이 플렌코비치 크로아티아 총리는 프랄략의 자살이 ICTY의 부당한 판결 결과에 대해 저항하라는 메시지였다고 말했다. 당시 보고를 받은 콜린다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급거 귀국했고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대통령은 지난 주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열렸던 공식행사에서 세르비아계의 공격으로부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방위한 프랄략 장군의 위업을 평가하는 책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해자인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반응은 달랐다. 전쟁 중 크로아티아계에 구금됐던 한 무슬림 퇴역 군인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슬픈 일이다. 하지만 프랄략은 형량을 다 채웠어야 했다(Žalosno, ali Praljak je trebao odslužiti kaznu).”고 언급했다고 한다. 보스니아 내전 이후, 사망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의 아들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프랄략씨는 훌륭한 영화감독이었다. 모스타르를 파괴하는 대신 모스타르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Gospodin Praljak je bio veliki filmaš. Umjesto što je rušio Mostar, trebao je snimiti film o Mostar).”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을 끝으로 ICTY는 껄끄러운 상태에서 끝을 보게 됐다. 당시 선고는 1993년에 설립된 ICTY가 문을 닫기 전에 열었던 마지막 공판이었다. 이는 희대의 자살사건 때문에 명예롭지 못한 퇴장을 하게 되었다. 프랄략의 자살은 국제 사회가 주장해 온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보스니아 전쟁 이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무슬림 사회에서는 극우적인 민족주의가 더욱 견고해졌다. ICTY가 막으려고 했던 악의 근원이 바로 이와 같은 비뚤어진 심리의 민족주의 이념이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가장 중요한 전범 재판이었다는 ICTV가 과연 정의를 구현했을지는 알 수 없다. 무슬림과 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 카톨릭계가 연방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하게 종결된 전쟁, 보스니아의 평화는 아직도 위험한 줄타기를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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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 최근에 제기된 차범근 논란을 보며
    역대 한국이 진출한 월드컵에서 1954년 초창기 스위스 월드컵을 제외하고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이후 현재까지 최악의 월드컵이 차범근 감독이 지휘했던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었다. 그 때 내 기억으론 한국은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와 같은 조였고 첫 경기 때, 언론에서 멕시코는 해볼만 하다며 피지컬도 비슷하다며 유럽 팀들보다 훨씬 더 수월하다고 1승 상대라며 온갖 설레발을 쳤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당시 우리는 멕시코를 A매치에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1승 상대라며 설레발을 떨었는지 알 수 없었다. 당시에 한국은 세계 축구를 월드컵만 보았던 우물 안의 개구리였고 유럽 리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모르던 때였다. 지금하고 참 닮은게 언론은 변한게 없다. 현재 카타르 아시안컵도 한국이 62년 만에 당연히 우승할 것으로 언론들이 온갖 설레발을 벌였고 한국하고 일본이 결승에서 만날 것이다, 올해 아시안컵 우승 적기다, 등의 설레발을 떨다가 현재 성적 1승 3무로 아주 어렵게 8강까지 왔다. 나는 참고로 다음날 있을 8강 호주 전이 고비라고 보았다. 다음날 호주 전에서 이기면 결승까지는 무난히 갈 것이고 내일 지면 온갖 창피함을 느끼면서 그 후유증은 말도 못할 것이다. 1998년 당시로 돌아가자면 우리는 프랑스 월드컵에서 멕시코를 만나 하석주가 멋진 프리킥으로 선취골을 넣었지만 골 넣은지 2분도 안 되어 백태클로 퇴장당했다. 10명이서 싸우게 된 우리는 결국 멕시코에게 1:3으로 역전패 당했다. 다음 상대는 조 최강 네덜란드, 상대 감독은 거스 히딩크, 우리는 세계 최강 유럽에게 철저히 농락당하며 0:5로 졌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월드컵에서 이 정도 스코어 진 적은 없고 유일한 대패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 메시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게 1:4로 진 것이 전부다.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최고 선수였고, 누구보다 유럽을 잘 아는 차범근 감독이기에 사실 이긴다는 생각보다는 최소한 비기는 것을 생각했었지만 그 생각도 무색하게 최악의 대참패를 당했고 결국 그 경기 이후, 차범근 감독은 경질되었다. 한국 축구 역사상 최초로 월드컵 경기 도중 경질된 감독이 차범근이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월드컵 도중에 경질 당한 한국 감독 또한 그가 유일하다. 이후 감독 대행으로 조별 리그 마지막 경기 벨기에 전에서 천신만고 끝에 1:1 무승부로 끝냈다. 이후, 차범근은 승부조작 얘기를 꺼내며 논란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차범근은 근거 없는 루머로 축구계의 명예를 실추시켰다고 하여, 5년간 자격정지 징계 처분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난다. 클럽 선수로써는 최고였을지 몰라도 국대에서의 차범근은 그저 그랬다. 월드컵에서 한 골도 넣지 못했고 독일에서 "차붐"이라 불렸던 그의 월드컵 성적은 후배인 황선홍이나 홍명보, 박지성만도 못했다. 감독으로써의 차범근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고, 요즘 나오는 허정무의 자서전 등의 이야기를 보니 인성으로도 그리 좋은 인물은 아닌 것 같다. 이제는 그저 한 때 조금 했던 선수 정도로 기억해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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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5
  • 수단 내전의 반군인 신속지원군(Rapid Support Forces, RSF)과 총사령관인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Mohamed Hamdan Dagalo)
    수단에서는 72시간 휴전이 끝났다. 이제는 피의 지옥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수단의 이 지긋지긋한 내전에 대해 알 부르한 대통령이 지정한 반군인 신속지원군(Rapid Support Forces, RSF)과 총사령관인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Mohamed Hamdan Dagalo)가 어떠한 자인지 알아보도록 한다. 함단 다갈로는 1973년 차드(Chad)의 수도 은자메나에서 출생했다. 그는 유년기에는 수단과의 국경인 다르푸르에서 생활했으며 경제적으로 워낙 피폐했기 때문에 청년 시절에는 아예 수단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그럼에도 다르푸르에 거주했는데 북쪽 알 파쉬르 다르푸르에서 살면서 2003년 거대한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오마르 알 바시르에 의해 벌어진 다르푸르 대학살(Darfur massacre)로 다르푸르 분쟁(War in Darfur)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수단의 주류 아랍인들은 백인에서 흑인에 걸쳐 있다. 그들 중 상당수인 흑인 자체도 아라비아 반도 등 중동과는 달리 원래 베쟈족 등 누비아 흑인들이 칼리프 오스만의 아프리카 정복 시기에 넘어온 아랍인들의 영향을 받아 아랍화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 모국어를 아랍어로 사용하고 생활 습관 등도 달라진 엄연한 흑인종 아랍인으로 푸르족이라 불렸다. 이들은 시리아, 레바논 등의 백인 아랍인과는 다르다.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이 모두 미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 미국인인 것과 같이 아랍인은 아랍어를 쓰는 사람들에 대한 민족 개념 정도다. 수단이라는 국명 자체의 유래가 "흑인의 땅"이라는 빌라드 앗 수단에서 유래했고 북수단의 조상은 이집트 흑인 파라오 시대를 열었던 쿠시 왕조였다. 반면 남수단의 조상은 에티오피아와 연결되는 마쿠리아 왕국 및 알와 왕국이라 볼 수 있다. 이 푸르족들도 민족 고유 언어로 푸르어를 사용하지만 나라의 공용어도 아랍어이고 종교활동에 아랍어가 중요하기 때문에 링구아 프랑카로 일정 수준 이상의 아랍어를 쓰고 있어 이들이 흑인이지만 흔히 생각하는 흑백갈등과 같은 인종갈등이 아닌, 같은 흑인에 같은 무슬림, 같은 아랍어를 쓰는 사람들 중 다른 부족끼리의 토지를 두고 일어나는 갈등에 더 가까웠다. 유엔 보고서에도 다르푸르는 양자는 같은 언어(아랍어)를 쓰고 같은 종교(이슬람)을 믿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1980년대 초반, 이상 기후로 인해 사막이 확장되면서 물이 모자라게 된 아랍계 베두인 유목 부족들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와 아랍화된 누비아계 흑인 농민들과 충돌하기 시작했고, 이웃한 리비아와 차드 등지에서는 무기가 밀반입되면서 두 집단의 충돌은 유혈사태로 번지게 된다. 이에 아랍계 민병대 '잔자위드'는 수단 알 바시르 정부의 비호 아래 학살, 고문, 성폭행, 방화, 약탈 등을 저질렀고 함단 다갈로는 잔자위드 집단에 가입하여 아주 잔혹한 면을 보여주었다. 2003년 2월 잔자위드에 맞서는 반군이 조직되자 정부군은 잔자위드와 함께 소탕을 명분으로 한 조직적인 학살 행위를 벌이게 되었고 알 바시르 대통령의 눈에 들게 된다. 알 바시르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함단 다갈로는 뛰어난 리더쉽과 잔혹성을 바탕으로 군부의 실력자가 되었고 2013년 4월에는 알 바시르 대통령의 제안을 받고 민간 신속지원군(Rapid Support Forces, RSF)을 창설하게 된다. 함단 다갈로가 창설한 RSF는 수단 정부의 준군사조직으로 잔자위드 군벌이 주축를 이루고 있으며 창설 당시에는 수단 정부 산하 조직으로 시작했고 종합정부국의 소속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2010년경부터 아프리카 내 분쟁지역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오고 있었다. 러시아는 지난 수년간 어떠한 외부행위자보다도 많이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고 수단 최대 무역항인 포트수단(Port Sudan)에 러시아 해군 물자와 더불어 기술 지원 기지를 건설하려 했다. 이는 상당한 이득이 남는 것이기에 알 바시르 대통령이 본인의 비자금 유통 및 각종 비리 사업을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2017년부터 양국은 이와 관련된 협상을 진행해 왔고 이 협상을 함단 다갈로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해군 기지를 들여오는 대신, RSF에 군사 무기 지원 및 훈련을 담당할 자들을 보내달라 요구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대량의 무기를 지원하고 RSF 민간 군사들에 대한 훈련 교관까지 파견한다. 이 때 파견된 러시아 군사 집단이 예프게니 프리고진의 "바그너 그룹"이다. 함단 다갈로의 RSF는 "바그너 그룹"의 교관들의 엄격한 군사 훈련을 받아 성장했다. 그리고 최신 무기들도 러시아로부터 사들여 수단 정부군 못지 않은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수단 3차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부군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현재 RSF 군대의 무기는 대부분 러시아제 무기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러시아 정부가 이들 내전을 중재하지 않고 더욱 키운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2019년 4월, 정식군부이자 수단군 사령관인 압델 파타흐 알 부르한(Abdel Fattah al-Burhan)이 미국과 서방의 사주 및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알 바시르 대통령을 축출했을 때 함단 다갈로는 RSF를 동원해서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당시 수단의 대통령이자 본인을 키워준 주군인 오마르 알 바시르를 축출하는데 일조를 했다. 이에 알 부르한이 다시 2021년 10월 수단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도 RSF를 통해 알 부르한을 도왔으며 이 공적을 인정받아 알 부르한이 정권을 장악한 후 2인자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RSF의 강력함을 확인하고 함단 다갈로의 정치적 입김이 강해질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알 부르한은 다갈로를 견제하려 했다. 이러한 함단 다갈로에 대한 견제는 RSF의 해체와 더불어 RSF의 사병 병력들을 정규군에 편입시키겠다고 선언하게 되자 다갈로는 강력히 반발한다. 이로써 알 부르한과 다갈로는 사이는 벌어지게 되었고 이는 내전의 단초가 된다. 그런데 다갈로는 알 부르한에게 자신의 RSF 병력들을 해체, 수단 정규군에 편입시키는데 10년간의 기한을 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 부르한은 자신의 주인이었던 알 바시르를 배신한 이력을 알고 있던 다갈로를 믿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든지 다갈로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기에 알 부르한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이다. 알 부르한과 다갈로가 갈라설 수밖에 없는 것은 국제적 지원을 받는 국가도 달랐다. 다갈로는 친러성향의 인물이었던 반면 알 부르한은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친서방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그러니 서로 외교적인 입장에서 견해 차가 상당했던 것이다. 결국 2023년 4월 15일 정규군 편입을 반대하는 RSF와 수단 정부군 간의 내전이 발생한다. 양측은 무차별적으로 서로를 살상하고 있으며 내전 발발 6일째인 4월 20일에는 민간인도 300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갈로는 트위터와 알 자지라 언론의 인터뷰를 통해 알 부르한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을 공식화했다. 더불어 그는 오마르 알 바시르를 다시 집권시키려고 계획했다면서 알 바시르의 30년 독재 정권에 치를 떨었던 시민들에게 그에 대한 선전전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갈로에 견해에 따르면 자신들은 이슬람 극단주의 정권인 오마르 알 바시르의 재집권을 막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선전전에 불과한 것인지, 실제로 알 부르한 그와 같은 알 바시르의 복권을 추진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내전은 격화되었고 결국 수단 시민만 전쟁터에서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는 실정이다. RSF가 창설될 당시에는 5,000명에서 6,000명 남짓한 군대였지만 2023년 4월 기준으로는 10만 명이 넘었다고 보고가 있어 쿠데타에 이은 내전은 쉽게 종결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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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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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역사
    1595년 네덜란드가 인도 항로로 진출하여 향료 무역을 본격적으로 개시하자, 여기에 자극받은 영국 런던의 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1600년에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으로부터 특허를 얻어 동인도 지역 무역의 독점권을 얻었다. 처음에는 일항해(一航海)마다의 개별적 기업제(企業制)였는데, 점차 그 폐해가 나타나 1613년 합자(合資) 기업 제도를 채택함과 동시에 영속적인 조직이 되었다. 1656년의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 조례 개정 이후 있은 뒤에 찰스 2세 시대에 근대식 주식회사로서 확립되었다. 이와 같은 동인도 회사의 활동 범위는 17세기에는 아프리카에서 일본에까지 미쳤는데, 주요 사업은 향료 무역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와 격렬한 투쟁을 벌인 결과 이에 패배하여 17세기말까지는 인도로 후퇴하게 되었다. 영국은 봄베이로부터 캘커타에 이르는 서부 인도의 해안선을 지배하에 두었다. 물론 이와 관련된 내용은 영국의 작가 가일스 밀턴(Gails Milton)의 저서인 <향료전쟁>에 자세히 나타나고 있다. 영국 동인도 회사(British East India Company) 또는 동인도 회사(East India Company, EIC)는 17세기 영국에서 동양 무역의 독점과 인도의 식민지 경영을 위해 설립된 회사로, 당대 영국 재계를 대표하는 기업이었으며 영국이 장기적으로 인도를 지배, 중국에 진출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일명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리던 대영제국을 존재하게 한 회사라 볼 수 있다. 물론 경칭으로 위대한 동인도 회사(Honourable East India Company, HEIC)라 불리기도 했다. 가장 처음 설립된 동인도 사는 일명 동인도 제도에서 무역하는 정부와 런던 상인의 회사(Governor and Company of Merchants of London Trading into the East Indies)라는 긴 이름을 갖고 있었다. 이 회사는 엘리자베스 1세가 1600년에 설립 허가를 내주었다. 이후 이에 대항하는 동인도 제도에서 무역하는 잉글랜드 상인의 연합 회사(United Company of Merchants of England Trading to the East Indies)가 1708년 설립되었다. 보통 전자를 런던 회사, 후자를 영국 회사라고 부르며 모두 영국 동인도회사라 불리고 있다. 그로부터 회사는 인도의 면직물 수입을 주력 사업으로 삼았고, 원료를 확보하기 위하여 원주민 생산자에게 경제 이 외 강제적인 행위를 가하였다. 회사는 단순한 기업에 그치지 않고, 내륙 지방에 대한 토지와 주민의 지배를 확대하였으며 1765년 토지세로 대표되는 벵골 지방의 조세 징수권을 무굴 제국 황제로부터 양도받으면서 벵골의 토지 소유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영국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정치 권력자 및 영토 지배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초창기 영국 동인도회사는 전쟁보다 무역 자체에서 이윤을 창출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1600년 설립된 이후 1세기 동안 이사회는 동인도회사의 사업은 전쟁이 아닌 무역임을 강조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인도와의 무역에 주력했는데, 특히 인도에서 가장 세력이 약하고 유럽의 경쟁국들이 가장 적었던 벵골과 마드라스가 주요한 활동 지역이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 프랑스가 인근 지역에 요새를 구축하면서 그들은 전략을 바꾸기 시작했다. 유럽에서 한창 전쟁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인도에서도 무력으로 충돌했다. 프랑스는 세포이로 알려진 인도 병사들을 정규군으로 수용하여 전투 능력을 증대하면서 영국보다 우위를 점했다. 1750년대 영국 동인도회사도 세포이를 수용했고 7년 전쟁이 벌어지기 전날 두 나라는 각각 10,000명에 달하는 무장한 병력들 중 대부분 인도인들을 인도 해안에 배치했다. 청나라에 관심을 가지던 영국은 본격적으로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 1759년 영국 동인도회사는 직원을 북경으로 보내 개항을 요구하였고 건륭제(乾隆帝, 재위 : 1735~1796)는 이를 허가하였으나 갑자기 이를 거절하고 대외 무역 규제를 대폭 강화하였다. 또한 영국인들이 주로 활동하고 있던 주산(舟山)과 하문(아모이)의 항을 폐항 하고 광주항만 개항을 허락하였다. 추가로 건륭제는 영국을 포함한 유럽 상인들은 반드시 공행(公行)과만 매매를 하도록 규정하고 그 시기도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로 엄격하게 설정하였다. 1780년대부터 청나라와 영국 동인도회사는 본격적인 무역을 하게 된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광동 무역에서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여 중국으로부터 차, 도자기, 목면 등을 수입하고 영국의 모직물, 면직물 등을 수출했다. 그런데, 청나라 조정에서는 서양 물품을 취급하는 양행 상인들의 조직인 공행 관세를 자의적으로 부과하였고 외국 상인들의 무역을 제한했다. 또한 무역 기간이나 물품도 통제하여 유럽 상인들이 별다른 수입을 올리지 못하였다. 1680년대 찰스 2세가 회사에 대하여 징병 권, 사관임명권, 교전 권(交戰權) 등을 부여함으로써 권력이 보강되었다. 경쟁 상대인 신(新) 동인도회사를 합병하고,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가 1757년에 플라시 전투에서 프랑스 동인도회사에 승리하면서 18세기 중엽에는 인도에 대한 독자적인 지위가 확립되었다. 그러나 본국에서는 회사의 전제와 독점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 인도의 행정은 점차 본국 의회의 감독 하에 들어갔다. 1814년의 인도 무역의 독점 폐지, 차(茶) 무역의 독점 폐지, 인도 회사령(會社領)의 국왕에 이양 등으로 그 사명은 사실상 종결되었다. 1832년 2월 26일, 동인도회사는 광주(廣州)에 와 있던 영국인 간첩 휴 해밀튼 린제이(Hugh Hamilton Lindsay)에게 염탐을 시켰다. 그는 로드 애머스트(Lord Amherst) 호의 선주를 사칭하고, 카를 귀츨라프(Karl Gützlaff)와 함께 광동 이북에서의 무역 확장을 타진하기 위해서라는 구실로, 남오(南澳), 하문(廈門), 복주(福州), 영파(寧波), 상해(上海), 위해(威海) 등 항구를 돌아다니며 지형을 측량 및 제도하고, 정치, 경제, 군사 정보를 수집하여 영국의 외무대신 헨리 존 템플(Henry John Temple)에게 넘겨주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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