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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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걸프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라크가 철저히 다국적군에 의해 폭격을 받아 파괴되면서 이라크의 패배가 확실시 되는 결과를 보고 쿠르드족은 이에 고무되어 다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봉기를 일으키게 된 계기는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중심지인 아르빌에 미군 고위급 장성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빌 공군 비행장에서 내린 뒤, 당시 이라크 쿠르드족의 수장인 마수드 바르자니(Masoud Barzani)를 만나 1시간여 동안 회담을 하고 악수를 한 뒤, 다시 미군 기지로 돌아갔다. 

 

당시 마수드 바르자니와 회동했던 그 미군 장성은 콜린 파월(Colin Powell, 1937~2021), 미국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파월과 바르자니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다. 당시는 비밀 회동이었기 때문에 여러 추측만이 난무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과 쿠르디스탄과 사이가 어떠했으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파월이 쿠르드족을 방문했다는 얘기 또한 미국 내에서도 사실상 군사기밀이었고 이를 아는 것은 쿠르드족 고위 인사들 몇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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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쿠르디스탄 내전 당시 이라크 쿠르디스탄 수도 아르빌,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나는 오래 전, 쿠르디스탄 고위 인사들과 만나 몇 차례 얘기 나누고 걸프전 당시, 어떤 교섭이 있었는지 몇몇 자료들을 훑어 보면서 알게 된 일이다. 나는 쿠르드어를 모르지만 몇몇 쿠르드인 지인들이 통번역을 통해 도와주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나는 미국과 쿠르드족과의 관계 및 교섭의 역사를 가지고 450페이지 분량의 책 한 권을 집필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런데 과연 파월과 바르자니가 당시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이라크 내에서의 소요 사태를 일으켜 이라크 내 분쟁을 야기하는 것이고 이라크 내 군사력이 분산되어 스스로 소모시키는 것이다. 당시 다국적군은 F-16과 F-18, F-15E 등의 막강한 전폭기와 미국제 M1A1 ,영국제 챌린저 1 전차 등의 당시 기준 화려한 무기들을 보유하고 이를 쏟아 부었지만 전쟁에서의 핵심은 국가 내 분란을 일으켜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에 있다. 걸프전이 42일 만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무기와 더불어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봉기로 인해 전력이 분산되어 약화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국이 쿠르드족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쿠르디스탄 장악하는 것을 승인했으며 세 번째,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약속했다. 


결론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단 한 개의 약속도 지켜지지 못했다. 미국은 쿠르디스탄을 지원하긴 했지만 사담 후세인의 손에서 결국 보호하지 못했으며 독립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1994년부터 쿠르디스탄의 내전이 시작되는 원인이 된다. 당시 쿠르드족은 이라크 쿠르디스탄 민주당(الحزب الديمقراطي الكردستاني)이 큰 계파를 차지했고 마수드 바르자니가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대표였다. 그 외에도 잘랄 탈라바니(Jalal Talabani,  1933~2017)의 애국 동맹(ایەکێتیی نیشتمانیی کوردستان)이 있었지만 민주당에 비해서는 당시에 세력이 약했다. 

 

그러나 본래 이들은 어느 정도 쿠르디스탄 지역에 양대 산맥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화해와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다. 바르자니가 쿠르디스탄 민족주의를 표방했다면 탈라바니는 좌익, 공산주의를 추종했다. 서로 사상적인 문제 때문에 탈라바니는 본래 민주당이었지만 1975년에 탈당하여 애국 동맹을 만들었다. 애국 동맹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을 표방한 5개의 정당 연합체로 시작했고 그 때문에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탈라바니는 본인이 민주당에 입당했던 1960년대에 줄곧 소련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다. 


탈라바니는 키르쿠크와 실레마니 전선을 지휘하고 마와트, 레잔, 카라다그 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었을 때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실제로 흐루시초프와 타슈켄트에서 만나 이같은 문제를 논의한 적도 있었고 그로 인해 바르자니와 충돌을 빚었다. 1962년 3월, 탈라바니는 소련제를 무기를 지원받아 이라크 정부군으로부터 샤르바제르 지구를 탈환하게 된다. 바르자니의 허락도 없이 소련제 무기를 가지고 공세를 펼쳤다는 것에서 그는 심한 질책을 받았다. 바르자니와의 이러한 대립에서 탈라바니는 이 때부터 탈당해 새로운 사회주의 동맹 정당을 만들려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탈라바니는 1964년 민주당과 결별하고 이라크를 떠나 이란에 들어가 팔레비 왕가의 보호를 받는다. 그럼에도 탈라바니는 꾸준히 바르자니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쿠르디스탄에 있는 자신이 거느리는 군대에게 소련제 무기를 수입해 보냈다. 결국 그는 바르자니의 진노를 사 쿠르디스탄 민주당과 쿠르디스탄 주민 자격을 박탈당했다. 1970년에 이라크 정부와 쿠르디스탄이 협상 분위기에 돌입하고 이 때 탈라바니는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때 바르자니는 대쿠르디스탄 민족주의의 일환으로 탈라바니를 다시 민주당에 받아들였고 이 때부터 약 5년 간 민주당에서 활약하게 된다. 


그런데 1975년 알제 협정에서 이란이 이라크와의 국경 협정을 조건으로 쿠르디스탄과의 지원 안을 파기했다. 이 협정은 이라크가 샤트 알 아랍 수로와 후제스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불거진 사건인데 이 사건은 후일 이란-이라크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이란을 통로로 계속 소련제 무기를 들여오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려한 탈라바니와 바르자니의 사이에서 격한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탈라바니는 자신을 추종하는 지도층과 갈라서 애국 동맹(ایەکێتیی نیشتمانیی کوردستان)을 창단했다. 

 

1976년 탈라바니는 이라크 쿠르디스탄 내에서 쿠르드족 독립을 위한 무장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탈라바니는 이란의 사회주의 집단인 MEK와 만나면서 상호 협력했고 1979년 이란 혁명 때는 다수의 쿠르드 애국동맹 집단 요원들이 MEK와 함께 팔레비 왕가를 뒤엎는데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이슬람주의 성향이 강한 호메이니와 사회주의 성향의 MEK가 갈라서게 되면서 탈라바니의 쿠르드 애국동맹 집단은 호메이니의 탄압으로 이란에서 축출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면서 쿠르드 애국동맹은 호메이니의 편을 들게 되고 바르자니 또한 이란에게 붙어 애국 동맹과 함깨 사담 후세인에 저항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상황은 걸프전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1992년에 첫 쿠르디스탄 자치구 선거가 치뤄지고 이 때 민주당은 애국 동맹과 2석 차이로 제1당을 차지하면서 승리한다. 이 때 탈라바니의 애국 동맹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인 키르쿠크로 돌아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자치구를 따로 인정받고자 후세인을 만나게 된다.

 

후세인 입장에서는 둘의 통합보다는 분열을 노렸다. 둘의 통합은 걸프전에서 패배하면서 많은 힘을 소진한 상황에서 후세인에게 분명 정치적으로 위협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 때 두 세력의 분열을 조장하여 소요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면 같은 쿠르드족끼리 죽고 죽이면서 그 힘이 약화될 것이고 이라크 정부는 이들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세인은 탈라바니와 애국 동맹을 키르쿠크 쿠르드 자치주로 인정해버렸다. 여기에서 바르자니는 크게 반발한다. 


마침내 1994년 바르자니는 군을 움직여 키르쿠크를 기습하면서 4년 동안의 내전이 발발한다. 그러나 이미 여러 전쟁에서 경험이 많은 애국 동맹을 이기기에는 쉽지가 않았다. 이 4년 간의 내전으로 쿠르드인 약 10만 명이 죽고 180만 명의 난민을 낳았다. 후세인은 이 내전을 지켜보다가 1997년부터 뒤늦게 군사 작전을 지시한다. 이 내전의 여파가 이라크 본국에까지 퍼질 가능성이 있었고 난민이 늘어나면서 이 내전이 서구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집단 서방은 이를 고의적인 분열로 인한 인종청소를 용인했다며 후세인을 맹렬히 비난했다. 

 

결국 국제적 비난과 이라크 본국에 내전의 영향이 미칠까 두려워 후세인이 진압을 지시한 셈이다.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쿠르디스탄 지역 남쪽, 키르쿠크 쿠르드 자치주의 봉기를 상당수 진압했으나 북부로 밀고 들어가 전장을 확장하면서 바르자니의 쿠르드족과도 전투를 벌였는데 아르빌 자치주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오히려 진압군인 이라크군이 고전하는 양상으로 펼쳐진다. 빠른 시간 내에 진압에 성공할 줄 알았던 후세인은 장기전으로 갈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이는 걸프전 패배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결국 후세인은 바르자니와 탈라바니를 초청하여 이라크 북부 도시인 모술에서 3자 회담을 벌였다. 후세인은 쿠르디스탄 통합 자치구를 세우는데 합의했으며 당시 지도자인 바르자니의 4년 임기의 통합지도자로 인정하고 4년 후, 탈라바니가 통합지도자가 되는 조건으로 내전을 마무리했다. 이 내전을 보고 집단서방은 이라크 위도 36도 이북, 32도선 이남으로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하고 현재까지도 이 구역을 비행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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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의 통합을 방해한 쿠르디스탄 내전(1994~1998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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