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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어색한 만남으로 인한 빛바랜 기념식
    1944년 6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상륙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나치 독일에 맞서 유럽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이었다. 프랑스 북서 쪽의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와이트섬에서 보면,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탕탱반도와 오른 강을 따라 캉을 중심으로 하는 바스노르망디 지역과 세느강과 외르강을 끼고 루앙을 중심으로 하는 오트 노르망디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는 두 지역이 병합되어서 캉에는 지방의회가 있고, 루앙에는 도청이 있다. 이번에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노르망디의 생 로랑 쉬르 메르(칼바도스 주의 지역 공동체)를 방문했고, 그가 연설한 곳은 이른바 프앙테 뒤 오크인데, 이곳은 약 80 킬로미터의 노르망디 해변에서 보면 30 미터 길이의 절벽이다. 그 당시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상륙작전을 위해 노르망디 해변을 5개의 해변으로 나누어서 각각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유타 해변, 오마하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스워드 해변이라고 명명했다. 프앙테 뒤 오크는 오마하 해변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6.4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나치 독일은 이른바 대서양 방벽의 일부로 콘크리트 구조물과 해안포대를 통해, 이곳을 요새화했다. 미군은 이곳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인들의 피해가 컸다. 미군 225명 중 13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까닭은 미군이 장비를 상륙정에 싣고 해변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의 저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변에 상륙한 다음에 절벽을 오르면서도,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은 자유와 민주를 위해 침략에 맞설 것과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견제를 강조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서방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40년에 전에 연설했던 장소이기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견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연합국의 상당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러시아(당시에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최종적 승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초대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크롱 대통령도 그 당시에 러시아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회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행사에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역설적이다. 우크라이나는 그 당시에 나치독일에 협력했던 국가인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초청되고, 독일 숄츠 총리와 함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이번 기념식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물론 어떤 국자의 지도자를 기념식에 초청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최국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기념식의 원래 취지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나치 독일에 맞서 약 15만 명의 군인들이 전장에 투입되어 약 1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던 지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것은 승리를 기념하는 이벤트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치 독일과 같은 침략전쟁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 협상하고 중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각국 지도자들의 발언을 보면, 그것보다는 허울 좋은 추상적인 말로 그럴듯한 외교적 수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공통점이 있다면, 각국 지도자들이 대체로 낮은 지지율로 인해 내치에서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까지 실시된 유럽 의회 선거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마크롱 대통령이 사실 위험한 도박을 한 것인데, 파리 올림픽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 고육지책으로 제시한 비장의 카드였다. 극우파의 약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피로감과 더불어 인플레이션, 에너지 가격 인상, 반이민주의 정서, 실업률 증가 등등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표심으로만 보자면, 이번 기념식에서 각국의 지도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엘리트주의자들의 자화자찬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인데, 그들의 미래에 대해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울 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일이 반쪽짜리 행사로 만든 것은 어찌 보면 유럽이 처한 냉정한 현실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는 연합국으로 나치독일에 맞서 모두 함께 싸웠지만, 지금은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거나. 우크라이나에 지상군을 직접 파병하겠다거나, 혹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서방 무기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에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과연 유럽의 평화를 위한 지도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는가! 전쟁을 끝내고 중재하기 위한 중재도 협상도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정치적 발언이라 하는 것이 과연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가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의 피해만 극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뿐이다. 더 나아가 향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시간이 우크라이나 편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번 기념식에 참석해서 각국에 지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2년 전과 비교하면 사뭇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원 결정이 우크라이나의 현실적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는 우려의 시각도 많다. 오히려 그와 같은 지원 방안이 유럽 각국에게는 극우세력들의 부상으로 나타나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획기적 돌파구도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치열한 소모전과 공방전 그리고 이로 인한 막대한 인명피해만 커지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지점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것인지에 따라 독일군의 대응도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쪽으로 상륙할 경우에, 독일군은 3개의 보병사단과 다소 남쪽에 2개의 기갑 사단으로 방어해야 했다. 그런데 이 경우에 문제는 연합군이 독일 해공군보다 월등한 공중포격전의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해병대와 공수사단과 같은 특수부대원들의 상륙을 보병 위주의 독일군이 저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는 점이다. 또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우선 파리를 입성하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파 드 칼레에 주둔했던 독일군과 교전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은 됭케르트 철수 작전과 더불어 연합군의 반격을 위해 매우 중요했다. 독일은 이를 통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은 연합국 승리의 기념일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 행사로 변질이 되어 버렸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맹도 없고, 각국의 이익을 위해 합종연횡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명분과 도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또 그 결과가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고, 긴장감을 조장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거기에 편승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익계산만 하고 있을 뿐이다. 별로 표심에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 무능하다는 사실 밖에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자국으로부터도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지도자가 국제무대에서 과연 지도자로서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동안에 유럽연합의 두 축이었던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이제 역사의 엄정한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차후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매우 불확실하고, 좋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 프랑스는 독일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독일군의 후방을 괴롭혔고, 독일군의 수송과 보급을 차단하는 역할을 상당히 수행했다. 5년마다 열리는 이 기념식에서 개최국인 프랑스는 분명히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러나 이번처럼 반쪽짜리 기념행사는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더 나아가 국제적 위상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보다 퇴락의 폐허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 칼럼
    • Nova Topos
    2024-06-16
  •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날려버린 로잔 조약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패전국인 오스만투르크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집단서방으로 구성된 연합군은 오스만투르크를 분할하기 시작했다.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최대 굴욕적 사건이었다.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국이 되었다. 터키 대국민회의군(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은 1919년 5월 19일부터 1923년 7월 24일까지 그리스 왕국,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을 주축으로 한 협상국 사이에서 독립전쟁을 벌이게 된다. 아타튀르크 케말의 대국민회의군은 앙카라 인근 사카리아 강까지 몰려온 그리스군을 상대로 장장 21일 동안 밤낮없이 백병전의 혈투를 벌인 끝에 그리스의 동진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동부전선과 남부전선의 상황이 종결되었다. 동부전선의 아르메니아군은 민병대에게 패배하여 카프카스 본토로 철수했고 남부전선의 프랑스군도 가지안테프에서의 패배로 인해 더 이상을 힘을 쓰지 못하고 시리아로 철수했다. 그리하여 터키군은 모든 전력을 서쪽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사카리아 전투에서 전 국민과 함께 그리스 침략자와 싸워 이긴 덕택에 결국 전세는 역전되어 집단 서방의 연합군이 몰리는 형세로 접어들었다. 1922년 사기가 오른 터키군이 그리스군을 몰아붙여 이스탄불을 향하여 전진하기 시작하면서 병력과 무기의 우위에 있었던 그리스군이 도리어 열세인 상황에 놓이게 된다. 터키군은 패퇴하는 그리스군의 장비와 탄약, 포탄을 넉넉하게 노획했고 이를 그리스군에 도로 공세를 퍼부으면서 오히려 그리스군이 수세가 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이스탄불에서 전세를 관망하던 영국군과 이탈리아군은 전장에서 발을 빼기 위한 작업에 돌입했다. 영국군부는 터키 의회에 전쟁을 그만 매듭짓자고 요청했고 특사로 이스메트 파샤와 협상하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영국의 요구에 따라 터키 의회는 이스메트 파샤를 보내기로 결정했으며 양측은 스위스의 로잔에서 만나 장장 1년 여에 걸친 회의를 거듭했다. 로잔에서의 회의에서 영국은 터키와 협상을 하면서 동시에 그리스군에 무기를 지원하는 등의 이중적인 행보를 보이며 그리스가 선전할 수 있게끔 시간을 질질 끌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시간을 끌기 위한 전략 중 하나가 에디르네와 동부 트라키아 일부 지역은 그리스 영토로 하고 이즈미르는 터키의 영토로 하며 아나톨리아를 보전시키겠다는 제안을 하여 결정을 어렵도록 만든 것이다. 이에 이스메트 파샤는 터키 민족의 완전한 독립이 아니면 이런 회의는 의미가 없다며 초강경 자세로 버텼다. 영국도 그리스에 대한 물자 보급에도 한계가 있었다. 물론 그리스군에 물자를 대주면서 선전을 바라며 시간을 끌었지만 현실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 계속 연전연패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영국의 지원한 물자는 터키 민병대에게 탈취당하거나 전투에서 노획당하기 일쑤였다. 거기에 적백내전이 평정되면서 국내 사정이 안정된 소련 볼셰비키는 터키 독립 전쟁에 비로소 관여하게 되면서 터키 독립군에게 각종 무기와 탄약, 물자들을 지원하게 된다. 이에 오히려 물량으로 터키가 그리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터키군은 1922년을 기점으로 터키 전국에서 그리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22년 8월 30일 퀴타히아(Kütahya) 인근의 둠루프나르(Dumlupınar)에서 케말이 이끄는 터키군이 그리스군에 완승을 거두면서 더 이상 열강들도 시간을 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둠루프나르 전투에서의 승리는 사실상 결정적이었다. 터키군은 기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해 9월 9일 그리스군의 아나톨리아 본거지였던 이즈미르를 탈환했다. 그와 동시에 수세에 몰린 그리스 본국에서는 쿠데타가 발생하게 되었다. 그리스 본국에서는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Constantinos I)와 왕당파 정권에 여론이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스군의 연전연패의 소식은 수많은 시민들이 그리스가 또 다시 터키에 정복당하는거 아니냐는 극도의 공포에 휩싸여 있었다. 이에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Νικόλαος Πλαστήρας) 대령을 위시로 한 베니젤로스 정파의 장교들이 9월 11일 쿠데타를 일으켜 왕당파 정권을 붕괴시켰고 콘스탄디노스 1세는 군부의 압박을 받아 퇴위하여 아들 요르요스 2세(Georgios II)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탈리아로 망명하게 된다. 그리스 측은 이스탄불의 메흐메트 6세 술탄에게 서한을 보내 메르츠(에브로스) 강 서쪽의 에디르네 인근, 카라아아츠(Karagac)를 포함한 트라키아 동부를 즉각 그리스로 넘기라고 협박했다. 더불어 이즈미르 본거지를 잃은 그리스 군은 부르사도 터키군에 내주고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동트라키아로 후퇴했다. 그리스군은 동트라키아를 지키기 위해 반격 준비에 나섰고 터키군 역시 마지막 목표인 이스탄불과 동트라키아로 진격하려 했다. 그러자 영국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건너오지 말라고 터키 의회에 최후 통첩을 날려 그리스를 보호하려 했으나 1차 세계 대전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다시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이탈리아, 프랑스 등의 반대와 결정적으로 미국이 영국에 반대했기에 결국 영국 정부는 한 발 물러서게 된다. 그렇게하여 10월 11일 무다니아(Mudanya)에서 터키 의회와 협상국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어 전쟁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쿠데타 이후 복귀한 그리스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Eleftherios Venizelos, 1864~1936)는 동트라키아, 특히 에디르네만큼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려 노력했으나 결국 휴전에 동의하여 동트라키아에서 그리스군은 철수하게 된다. 이로써 터키군은 동트라키아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로잔에서의 2중 조약은 끈질기게 진행되었다. 영국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게 패배해 에게 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스메트 파샤에게 이스탄불 부근의 동트라키아와 에게 해의 섬들 중 한 쪽을 선택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이에 이스메트 파샤는 세르브 조약의 전면적인 폐기를 요구했다. 기존의 세르브 조약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걸려 있었다. ① 그리스 왕국 : 스미르니를 위시로 한 이오니아 지방과 수도 코스탄티니예 (현 이스탄불)을 제외한 동트라키아 전역, 에게해의 임브로스와 테네도스 섬의 획득 ② 이탈리아 왕국 : 반도 서남부 (프리기아-콘야-안탈리야) 할양 ③ 프랑스 공화국 : 킬리키아, 카파도키아, 디야르바크르 일대 할양 ④ 영국 : 동남부 (반 호수 남쪽 일대) 할양 ⑤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 : 동부 (트라브존-에르주룸-반 호수) 할양 ⑥ 쿠르디스탄 자치령 : 아르메니아 영토와 영국령 제외 전역, 쿠르디스탄의 확실한 독립 그러나 더 이상의 시간을 끌다가 그리스마저 터키에게 점령당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다급해진 영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반발을 누르고 폐기에 합의했다. 또한 그와 같이 다급해진 것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바로 소련의 움직임이었다. 소련은 터키군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동시에 아르메니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고 터키 동부 지역에 모든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르메니아는 소련의 기습 공격을 받았던 것이다. 소련군은 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을 빠르게 장악하고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으로 빠르게 밀고 내려와 도시들을 접수하기 시작한다. 이에 놀란 아타튀르크 케말은 소련과 카르스에서 만나 협상에 돌입했고 당시에 이라크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영국군도 소련군과 맞서기 위해 출병하자 소련은 현 아르메니아 땅을 장악하고 동부 지역은 터키가 장악하는 선에서 마무리 짓고 철군하게 된다. 이로써 이라크에서 출병한 영국군은 도중에 발이 묶이게 되었고 아타튀르크 케말은 영국에 강한 경고를 날리자 영국군은 즉시 이라크로 퇴각했다. 터키 동부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이렇게 하여 터키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결국 터키는 동트라키아를 선택하고 에게 해의 섬들과 키프로스를 포기함으로써 로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과정에서 독립을 약속한 쿠르디스탄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이 로잔 조약이 체결되기까지 1년 여 동안의 과정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대한 논의는 단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이 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대표는 아예 참석조차 하지 못했다. 집단서방, 영국이 쿠르디스탄은 대표를 보낼 필요 없이 영국이 알아서 독립을 약속해주겠다고 하여 그들은 대표를 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쿠르디스탄은 영국을 절대적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러나 영국은 로잔 조약에서 쿠르디스탄 독립에 대해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결국 영국은 쿠르드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셈이다. 조약이 체결된 이후,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사실을 안 쿠르드인들은 분노했다. 그러나 이미 조약은 체결되어 끝난 상황이었고 터키군이 갑자기 쿠르디스탄 영토에 진주하면서 쿠르디스탄은 단 한 번의 저항도 제대로 못 해보고 터키에게 굴복했다. 자신들이 스스로 싸워 쟁취하지 않고 모든 것을 외세에 의존한 민족의 최후였다. 이는 세계사에서 최대의 교훈이 되었다.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나라와 민족이 어떻게 버려지는지, 그로 인한 트라우마와 민족적 후회가 어떻게 남아있는지, 그리고 강대국들에게 끊임없이 독립을 약속 받지만 결국 이용당하며 또 다시 팽해지는 안타까운 역사는 현재에도 되풀이 되고 있다. 20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 100주년을 맞이해 터키 동남부 지역의 쿠르드인들은 조약의 무효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면서 독립을 요구하였고 독립에 대한 주민들 찬반투표가 공식적으로 열려지도록 터키 의회에 강하게 요구했으나 이는 철저히 묵살되었다. 쿠르드족은 한 번의 기회를 외세에만 의존해 독립을 날려버린 비운의 민족이 되어 오늘날까지 최장기간 디아스포라 민족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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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 쿠르드족의 통합을 방해한 쿠르디스탄 내전(1994~1998년) 이야기
    1991년 걸프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라크가 철저히 다국적군에 의해 폭격을 받아 파괴되면서 이라크의 패배가 확실시 되는 결과를 보고 쿠르드족은 이에 고무되어 다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봉기를 일으키게 된 계기는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중심지인 아르빌에 미군 고위급 장성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르빌 공군 비행장에서 내린 뒤, 당시 이라크 쿠르드족의 수장인 마수드 바르자니(Masoud Barzani)를 만나 1시간여 동안 회담을 하고 악수를 한 뒤, 다시 미군 기지로 돌아갔다. 당시 마수드 바르자니와 회동했던 그 미군 장성은 콜린 파월(Colin Powell, 1937~2021), 미국 합동참모의장이었다. 파월과 바르자니 사이에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알 수 없다. 당시는 비밀 회동이었기 때문에 여러 추측만이 난무했다. 당시나 지금이나, 미국과 쿠르디스탄과 사이가 어떠했으며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지 파월이 쿠르드족을 방문했다는 얘기 또한 미국 내에서도 사실상 군사기밀이었고 이를 아는 것은 쿠르드족 고위 인사들 몇 뿐이었다. 나는 오래 전, 쿠르디스탄 고위 인사들과 만나 몇 차례 얘기 나누고 걸프전 당시, 어떤 교섭이 있었는지 몇몇 자료들을 훑어 보면서 알게 된 일이다. 나는 쿠르드어를 모르지만 몇몇 쿠르드인 지인들이 통번역을 통해 도와주었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 덕택에 나는 미국과 쿠르드족과의 관계 및 교섭의 역사를 가지고 450페이지 분량의 책 한 권을 집필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그런데 과연 파월과 바르자니가 당시에 나누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이라크 내에서의 소요 사태를 일으켜 이라크 내 분쟁을 야기하는 것이고 이라크 내 군사력이 분산되어 스스로 소모시키는 것이다. 당시 다국적군은 F-16과 F-18, F-15E 등의 막강한 전폭기와 미국제 M1A1 ,영국제 챌린저 1 전차 등의 당시 기준 화려한 무기들을 보유하고 이를 쏟아 부었지만 전쟁에서의 핵심은 국가 내 분란을 일으켜 전력을 분산시키는 것에 있다. 걸프전이 42일 만에 끝날 수 있었던 것은 막강한 무기와 더불어 이라크 내 쿠르드족의 봉기로 인해 전력이 분산되어 약화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미국이 쿠르드족을 지원하고 보호하며 쿠르디스탄 장악하는 것을 승인했으며 세 번째,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약속했다. 결론적으로 미국으로부터 단 한 개의 약속도 지켜지지 못했다. 미국은 쿠르디스탄을 지원하긴 했지만 사담 후세인의 손에서 결국 보호하지 못했으며 독립 약속도 지키지 않았다. 이러한 문제들은 결국 1994년부터 쿠르디스탄의 내전이 시작되는 원인이 된다. 당시 쿠르드족은 이라크 쿠르디스탄 민주당(الحزب الديمقراطي الكردستاني)이 큰 계파를 차지했고 마수드 바르자니가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대표였다. 그 외에도 잘랄 탈라바니(Jalal Talabani, 1933~2017)의 애국 동맹(ایەکێتیی نیشتمانیی کوردستان)이 있었지만 민주당에 비해서는 당시에 세력이 약했다. 그러나 본래 이들은 어느 정도 쿠르디스탄 지역에 양대 산맥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화해와 반목을 거듭하고 있었다. 바르자니가 쿠르디스탄 민족주의를 표방했다면 탈라바니는 좌익, 공산주의를 추종했다. 서로 사상적인 문제 때문에 탈라바니는 본래 민주당이었지만 1975년에 탈당하여 애국 동맹을 만들었다. 애국 동맹은 공산주의, 사회주의 등을 표방한 5개의 정당 연합체로 시작했고 그 때문에 세력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탈라바니는 본인이 민주당에 입당했던 1960년대에 줄곧 소련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했었다. 탈라바니는 키르쿠크와 실레마니 전선을 지휘하고 마와트, 레잔, 카라다그 지역에서 분리주의 운동을 조직하고 이끌었을 때도 비슷한 주장을 했다. 실제로 흐루시초프와 타슈켄트에서 만나 이같은 문제를 논의한 적도 있었고 그로 인해 바르자니와 충돌을 빚었다. 1962년 3월, 탈라바니는 소련제를 무기를 지원받아 이라크 정부군으로부터 샤르바제르 지구를 탈환하게 된다. 바르자니의 허락도 없이 소련제 무기를 가지고 공세를 펼쳤다는 것에서 그는 심한 질책을 받았다. 바르자니와의 이러한 대립에서 탈라바니는 이 때부터 탈당해 새로운 사회주의 동맹 정당을 만들려 했는지도 모른다. 결국 탈라바니는 1964년 민주당과 결별하고 이라크를 떠나 이란에 들어가 팔레비 왕가의 보호를 받는다. 그럼에도 탈라바니는 꾸준히 바르자니의 승인 없이 단독으로 쿠르디스탄에 있는 자신이 거느리는 군대에게 소련제 무기를 수입해 보냈다. 결국 그는 바르자니의 진노를 사 쿠르디스탄 민주당과 쿠르디스탄 주민 자격을 박탈당했다. 1970년에 이라크 정부와 쿠르디스탄이 협상 분위기에 돌입하고 이 때 탈라바니는 이라크 쿠르디스탄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때 바르자니는 대쿠르디스탄 민족주의의 일환으로 탈라바니를 다시 민주당에 받아들였고 이 때부터 약 5년 간 민주당에서 활약하게 된다. 그런데 1975년 알제 협정에서 이란이 이라크와의 국경 협정을 조건으로 쿠르디스탄과의 지원 안을 파기했다. 이 협정은 이라크가 샤트 알 아랍 수로와 후제스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불거진 사건인데 이 사건은 후일 이란-이라크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인해 이란을 통로로 계속 소련제 무기를 들여오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주입하려한 탈라바니와 바르자니의 사이에서 격한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탈라바니는 자신을 추종하는 지도층과 갈라서 애국 동맹(ایەکێتیی نیشتمانیی کوردستان)을 창단했다. 1976년 탈라바니는 이라크 쿠르디스탄 내에서 쿠르드족 독립을 위한 무장 조직을 만들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탈라바니는 이란의 사회주의 집단인 MEK와 만나면서 상호 협력했고 1979년 이란 혁명 때는 다수의 쿠르드 애국동맹 집단 요원들이 MEK와 함께 팔레비 왕가를 뒤엎는데 동참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수·이슬람주의 성향이 강한 호메이니와 사회주의 성향의 MEK가 갈라서게 되면서 탈라바니의 쿠르드 애국동맹 집단은 호메이니의 탄압으로 이란에서 축출될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생하면서 쿠르드 애국동맹은 호메이니의 편을 들게 되고 바르자니 또한 이란에게 붙어 애국 동맹과 함깨 사담 후세인에 저항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상황은 걸프전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1992년에 첫 쿠르디스탄 자치구 선거가 치뤄지고 이 때 민주당은 애국 동맹과 2석 차이로 제1당을 차지하면서 승리한다. 이 때 탈라바니의 애국 동맹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본거지인 키르쿠크로 돌아가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자신들의 자치구를 따로 인정받고자 후세인을 만나게 된다. 후세인 입장에서는 둘의 통합보다는 분열을 노렸다. 둘의 통합은 걸프전에서 패배하면서 많은 힘을 소진한 상황에서 후세인에게 분명 정치적으로 위협적으로 느꼈을 것이다. 이 때 두 세력의 분열을 조장하여 소요 사태를 일으킬 수 있다면 같은 쿠르드족끼리 죽고 죽이면서 그 힘이 약화될 것이고 이라크 정부는 이들을 손쉽게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세인은 탈라바니와 애국 동맹을 키르쿠크 쿠르드 자치주로 인정해버렸다. 여기에서 바르자니는 크게 반발한다. 마침내 1994년 바르자니는 군을 움직여 키르쿠크를 기습하면서 4년 동안의 내전이 발발한다. 그러나 이미 여러 전쟁에서 경험이 많은 애국 동맹을 이기기에는 쉽지가 않았다. 이 4년 간의 내전으로 쿠르드인 약 10만 명이 죽고 180만 명의 난민을 낳았다. 후세인은 이 내전을 지켜보다가 1997년부터 뒤늦게 군사 작전을 지시한다. 이 내전의 여파가 이라크 본국에까지 퍼질 가능성이 있었고 난민이 늘어나면서 이 내전이 서구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고 집단 서방은 이를 고의적인 분열로 인한 인종청소를 용인했다며 후세인을 맹렬히 비난했다. 결국 국제적 비난과 이라크 본국에 내전의 영향이 미칠까 두려워 후세인이 진압을 지시한 셈이다.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쿠르디스탄 지역 남쪽, 키르쿠크 쿠르드 자치주의 봉기를 상당수 진압했으나 북부로 밀고 들어가 전장을 확장하면서 바르자니의 쿠르드족과도 전투를 벌였는데 아르빌 자치주의 저항이 거세게 일어나면서 오히려 진압군인 이라크군이 고전하는 양상으로 펼쳐진다. 빠른 시간 내에 진압에 성공할 줄 알았던 후세인은 장기전으로 갈 것을 크게 우려했다. 이는 걸프전 패배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었다. 결국 후세인은 바르자니와 탈라바니를 초청하여 이라크 북부 도시인 모술에서 3자 회담을 벌였다. 후세인은 쿠르디스탄 통합 자치구를 세우는데 합의했으며 당시 지도자인 바르자니의 4년 임기의 통합지도자로 인정하고 4년 후, 탈라바니가 통합지도자가 되는 조건으로 내전을 마무리했다. 이 내전을 보고 집단서방은 이라크 위도 36도 이북, 32도선 이남으로 비행금지구역으로 설정하고 현재까지도 이 구역을 비행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14
  • 알렉세이 나발니의 일생과 죽음이 미치는 영향 - 1부
    푸틴 대통령과 대적한 러시아의 반 체제 인사이자 횡령 사기범인 알렉세이 나발니(Алексей Навальный)가 지난 16일 야말-네네츠 제 3교도소에서 사망했다. 푸틴과 맞서온 그의 인생을 함 조망해본다. 그는 1976년 생으로 모스크바 주 부틴이란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나발니(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Навальный)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이고 어머니 류드밀라 이바노브나 나발나야(Людмила Ивановна Навальная)는 러시아 출신으로 그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인 셈이다. 나발니가 우크라이나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의 부친이 우크라이나인이기도 했고 본인도 우크라이나계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2010년대 타스통신에서 한 나발니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자신은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지만 한켠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신의 가계의 대한 내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친우크라이나계 인사였던 보리스 넴초프와 가깝게 지냈고 크림 합병에 대해 찬성하긴 했지만 당시 정치인으로써 나발니의 세력이 미미했기에 우선 자신의 인지도에 상처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전 시위 선동에서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때도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즉, 그는 대놓고 러시아인이면서 반러시아 행세를 했던 것이다. 나발니는 모스크바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오브닌스크에서 자랐으나, 어릴 때 여름에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그의 할머니와 지냈다고 한다. 나발니는 본인 스스로 어린 시절을 회상했을 때, 키예프의 생활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례적으로 쉬꼴라를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옮겨 키예프에서 쉬꼴라를 졸업했다. 그는 몸과 국적만 러시아인이지 속 전체는 우크라이나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1993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러시아 민족 우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98년 법학학사학위를 취득했고 연방 지원 금융 대학에서 증권과 투자, 환전, 그리고 금융 경제를 공부했다. 당시 러시아의 입장에서 1998년 모라토리움 선언하는 등,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금융 경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존의 법학에서 금융경제학으로 잠깐 외유를 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원래의 나발니의 성향은 좌파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계에 입문했고 2000년 진보주의와 사회, 녹색자유주의, 친유럽 성향이면서 대표적인 친서방 리버럴 정당인 야블로코(Яблоко)에 입당한다. 이 정당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 경제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지지하는 정당으로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의 유럽 연합 가입과 미국과의 우호관계 수립 등 서방과의 관계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정당이다. 여기서 활동한 나발니는 친서방 인사 및 미국의 정계권 인사들과도 접촉을 가지며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발니의 영어 실력은 러시아어 억양이 강하기는 하지만 단어 및 어휘선택이 탁월할 정도 유창했던게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 2004년 나발니는 피부색이 다른 카프카스계 군인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사람은 총으로 죽여야 하지만 바퀴벌레는 슬리퍼로 밟아 죽여야 한다.”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카프카스계 민족들을 매우 경멸했는데 카프카스 지역의 민족들이 러시아 경제권에 진입해 러시아인들의 취업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서 이민족들을 매우 싫어한 것이다. 그는 2006년 반 외국인 성향을 띈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을 승인해 줄 것을 모스크바 연방 특별시 시청에 청원하고 참관인 자격으로 이 시위에 참여했다. 말 그대로 성향 자체가 인종차별적인 면과 과격한 전체주의 나치의 성향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보면 된다. 나발니는 카프카스,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양인을 혐오했는데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자체가 그와 같은 성향을 띄고 있다. 즉, 유색인종 차별, 과도한 폭력성 자체의 광기 어린 모습을 갖고 있었더 것인데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당시 갖고 있던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및 무시, 차별, 폭력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도 당시 모스크바 마야꼽스까야에서 푸쉬낀스까야까지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시위 행렬에서 목소리 구호를 외치고 연설하며 독려하는 나발니를 본적이 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지만 연설하며 독려하는 표정과 그 제스처가 어딘가 많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 선동하는 그의 제스쳐와 참 많이 닮았다. 물론 그가 나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네오나치는 아닌듯 싶다. 나치 표식을 몸에 새기지 않았고 나치라 할만한 어떠한 물건도 발견된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발니는 2007년 야블로코로부터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적 활동 등으로 당의 규정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렀다며 제명 되어 버렸다. 야블로코 당에서 제명당한 이후에도 나발니는 '러시아인의 행진'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면서 "러시아 인민해방운동(Национального Русского Освободительного Движения, НАРОД)" 정당을 창설했다. 그리고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이 발발하자 나발니는 극우로 돌아서 당시 대통령인 메드베제프와 푸틴 총리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루지야(현 조지아)에 대한 적극적 봉쇄조치가 필요하며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그루지야 참모 본부를 공격해야 하고 남오세티야 공화국 상공을 지나는 모든 항공기들을 격추시켜야 한다고 적어 논란을 일으킨다. 또한 나발니는 러시아 내에 있는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들(грызуны)"이라 비하하며 그들을 전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전쟁 이후에는 남오세티야 공화국과 압하지야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언급해 조지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남오세티아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그동안 공부한 금융경제학과 투자에 관한 전문성을 내세워 2008년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루크오일, 그리고 수르구트네프트 가스, 이렇게 5개의 가스 회사 주식을 30만 루블 어치를 사들여 주주행동주의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회사들이 소유한 금융 재산의 투명성을 강조했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금융 관련 부패가 심각했었고 이 부분이 정치권과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특히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등에는 상위 직원들이 횡령과 회사 투명성을 차단하는 행위를 자행했고 이를 파악한 나발니는 주 정부의 부적절한 예산 지출과 부실한 주 정부 서비스 등을 지적하면서 연방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친서방 리버럴에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 서방 리버럴 인사들과 교류가 두텁고 반골 기질까지 있는 나발니를 주목한 것은 미국 정가였다. 그는 2010년 미국으로 들어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일 대학에서 World Fellows 프로그렘을 수행했다. 최근 미국 대통령 여섯 명 중 네 명이 예일 출신일 정도로 미국 정가와 뿌리 깊은 관계를 갖고 있던 예일 대학에서 나발니 수많은 리버럴 정가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푸틴을 비판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어떠한 권유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때를 계기로 그는 철저히 반 체제, 반 푸틴 인사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딥스테이트의 개가 되어 러시아로 돌아와 체제 전복을 꾀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그가 가까워진 인물이 바로 보리스 넴초프다. 그는 넴초프의 지지를 받아 트랜스네프트 가스 회사의 비밀 회계 감사 자료를 공개한다. 이 때부터 그는 반 부패 활동을 시작한다. 행정상 필요한 물자 조달 등을 모든 러시아 정부가 온라인에 게시 및 공고하여 입찰을 하도록 하는 로스필 프로젝트를 촉구했다. 일반 개인이 도로에 있는 구멍들을 러시아 정부에 보고하고, 러시아 연방 정부가 불만사항들에 응답하게 한 로스야마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러한 행위는 러시아 우파 정당들의 공격을 불러왔고 결국 나발니는 러시아 인민해방운동 해산했다. 2011년 6월 로이터와 영어로 능숙하게 인터뷰 했는데 "푸틴의 정치 체제는 부패에 의해 매우 약화되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에서도 5년 이내에 아랍의 봄과 같은 반정부 데모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며 러시아 내 반 정부 시위를 벌일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체제 개혁을 진행 중에 있던 푸틴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며 이를 규탄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시위를 야기했다. 그로 인해 2018년까지 10차례나 행정구류(Административный арест)를 당해 총 192일 간 구금되기도 했다. 처음에 러시아 국민들은 그의 반 부패 조사 행위를 응원했다. 소련 해체 이후, 경제적 침체와 공무원들의 부패에 시달리고 있던 시민들의 지지는 갈수록 올라갔다. 여기에 힘을 받은 나발니는 여러 곳에서 후원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것의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발니는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은 그대로 갖고 있었는데 치과 의사로 변장해 외국인들을 '러시아 민족의 뿌리를 뒤흔드는' 충치에 비유하며 추방을 요구하는 영상을 올려 논란을 빚게 된다. 그런데 이 영상에 환호하는 지지자도 있었지만 반 부패 척결에 적극 찬성하는 시민들은 이 영상을 보고 나발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를 토대로 보리스 넴초프가 있는 인민자유당(Партия народной свободы, PARNAS)에 입당했고 넴초프의 후원을 받아 2013년 나발니는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선거 유세 과정에서 그의 인종차별적 발언 등이 도마에 오르자 블로그를 통해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라 비하한 것을 사과한다'고 말했으나 전쟁에 찬성했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조지아인들은 시장 선거가 아니면 그가 사과했을까?, 혹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지아계 러시아인들의 표가 급했을 것이라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즉, 아무도 그의 사과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남오세티아 전쟁에 찬성했던 것에 대해 해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다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와중에도 중앙아시아 이민자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코카서스 급식 중단' 캠페인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런 그를 카프카스 민족들 중 누가 진정성 있는 사과라 볼 수 있겠는가? 당시만 해도 이러한 인종차별이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선거가 시작되고 27.24%, 632,697표를 얻어 선전했지만 세르게이 소뱌닌에게 밀려 결국 큰 차이로 낙선했다. 물론 선전은 했지만 타 민족 러시아계 시민들이 소뱌닌에게 몰표를 던졌기 때문에 낙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거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이끌고 시위를 조장해 또 다시 구류 조치를 당했고 2014년 12월 30일, 그는 프랑스 화장품 회사 이브 로셰의 러시아 연방 지사 등으로부터 3,100만 루블 (약 5억 9천만 원)을 횡령하여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징역 3년 6개월 실형에 3년 6개월 집행유예까지 추가하여 7년 형을 받는다. 재판이 끝난 후, 러시아 연방 법원 건물 밖에 모여 있던 지지자들을 향해 "현 정권은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붕괴돼야 한다. 오늘 모두가 가두 시위에 나서 달라"고 촉구하며 내란을 조장했다. 그리고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사기꾼들과 도둑놈들의 정당' 이라 비판했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보였으나, 2017년 12월 25일 러시아 연방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의 횡령죄 판결에 따라 나발니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게 된다. 이에 나발니는 지지자들에게 대선 보이콧을 촉구하며 2018년 1월 28일 대대적인 시위를 예고했다. 그러나 해당 시위는 결국 불법으로 규정되어 그의 지지자들 상당수가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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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 EU 의회 선거 결과에 따라 국제정치의 다변화 가능성
    지난 6일부터 시작된 EU 의회 선거가 어제 9일에 끝나고 현재 개표 중에 있다. 지난 5년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브렉시트로 인해 탈퇴한 영국을 제외하고 EU에 속한 모든 국가가 치르게 된다. 이번 선거에는 영국의 탈퇴 이후, 처음 치뤄지는 선거라 EU 의회 내 회원국들의 할당 의석이 재조정되어 27석이 프랑스를 포함한 회원국들에 추가적으로 할당되었으며, 46석이 줄어들어 총 705석으로 줄어들었다. 일부 국가 출구 조사와 선거 전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1차 예측 결과를 발표한 것에 따르면 예상대로 극우 세력의 정당들이 크게 약진했다. 프랑스 EU 의회 선거 출구 조사 결과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약 32%의 득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으며 독일은 보수 성향 기독민주당(CDU), 기독사회당(CSU) 연합이 29.5%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독일대안당(AfD)이 상당한 선전을 보였다는 것에 있다. 이 정당은 EU 의회 선거를 앞두고 뇌물 스캔들과 나치 옹호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어 EU 의회 ID에서도 퇴출당했었지만 그래도 독일 국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유럽 내에서 우익 세력이 득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 극우파들은 타 지역들과 비교했을 때 보통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적 반공주의 좌익보다는 세속적인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나타난다. 물론 세속적 서양 극우파들도 기독교를 내세우는 경우도 많은데 대게 교리에 기반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세속적 기독교 정체성주의이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기민당이나 기사당이다. 다만 동유럽 지역과 일부 서유럽, 남유럽 나라들도 예외로 종교적 근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합쳐진 혼종 극우도 존재하지만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데도 유럽 내에서 이같은 극우세력들이 다시 환대 받는 이유는 정세 불안으로 인한 경제 악화, 그리고 이를 만회하지 못하는 기성 정권에 대한 불신과 이들의 무능에 대한 규탄, 그리고 책임 지지 못할 각종 포퓰리즘 정책과 더불어 리버럴리티들과 좌파 세력의 공조로 이루어진 무분별한 난민 입국, 그리고 최악의 물가 상승 등이 한꺼번에 겹쳐서 그렇다. 이러한 반(反) 이민주의는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고취로 이어지며 그로 인한 변형적인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이어진다. 물론 모든 정체성 정치가 극단주의와 결부되는 것 또한 아니지만 현재 같은 상황에서 충분히 극단주의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통해 여러 정체성의 특수성이 부각되면서 여론은 수많은 갈래로 분열한다. 이렇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각 집단은 극단주의화 될수록 유리하다. 특히 유럽에서 고조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극우 특유의 선민의식(Elitism)과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을 한꺼번에 주입시켜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Exclusion) 및 공격성(Aggression)을 발동시키고 선동하는 것에 특화된 방향으로 진화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의 일례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을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독일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당하며 막대상 배상금까지 떠 안게 된 독일은 모든 국민들이 좌절한 상태였고, 무능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나타나 자신들이 좌절하게 된 것에는 무능한 정부와 유태인들 때문이라는 인종적 배타성(Racial Exclusion)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피해의식들이 모여 또 다른 군중심리(Herd mentality)가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이는 강한 공격성(Aggression)을 띄게 되어 결국 유태인, 로마인(집시) 등의 타 인종, 민족 말살로 이어진다. 그 다음 상대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자신들, 독일인들에게 잊지 못할 좌절감을 안겨 준 영국, 프랑스 등의 외부세력이었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게 된 것은 좁게 보면 전범들인 나치와 히틀러의 광기이지만 그 광기를 불러 일으킨 것은 패전국인 독일을 아예 빈사 상태까지 압박하고 몰아갔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승전국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으로 볼 때, 자국민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이들은 좌익과 우익의 리버럴리티들, 현재 집권하고 있는 EU의 인사들이었다. 거기에 자국민들은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그들끼리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EU 각 국의 국민들은 우선 자국민들에 대한 복지와 복리, 그리고 자국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원하고 있다. 더 이상의 난민을 거부하며 자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빠른 종식과 더 이상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중단까지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유럽의 어려움에 대한 타개 책에서 이 모든 상황이 러시아 때문이라 상정하고 국민들에게 이를 설득시켜 러시아에 대한 적대 및 히틀러 때처럼 전쟁을 획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히틀러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부가 나치당에 의해 안정되자마자 불만의 화살을 영국과 프랑스에 겨누었던 것처럼 모든 원인의 그 다음이 원흉이 러시아라며 러시아에게 겨눌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우려하고 있던 제3차 세계대전의 트리거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U 의회에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저들의 극우 정당들이 이기고 있다해서 마냥 좋아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反) 이민과 그린딜(Green Deal, 탄소중립목표 달성을 위한 EU 정책) 반대를 내세우는 극우 정당들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그 동안 러시아에 대해 강경 노선들을 취해 왔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집행위원장이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이탈리아 총리에게 연정 및 협력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집행위원장 재선을 위해서는 EU 의회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안정적이기 때문에 멜로니 총리가 속한 EU 의회 정당 보수 개혁 연합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EU는 히틀러가 행했던 인류사의 잔인한 폭력성을 되돌아봐야 한다. 지난 6일, EU 의회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을 맞아 행사를 치뤘다. 이 행사에서 세계 대전을 종식시키는데 최대 공을 세운 러시아 (당시 소련)을 배제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참석시켰다.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나치고 뭐고 따지기 전에, 소련의 역사를 지우고 소비에트의 일원이었음을 부정하는 젤렌스키를 초정한 것은 큰 행사의 의미를 퇴색시킨 셈이다. 그 또한 서유럽은 히틀러와 나치가 행했던 교훈을 잊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번 EU 선거를 특별하게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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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발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 1900~1980)의 독재 통치기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은 발칸반도에서 가장 러시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국가였으며,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무역총액 중 소련과의 무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소련과 불가리아의 우애를 주제로 한 군가도 나왔을 정도였으며 이웃 나라인 그리스나 터키에서는 때로는 민주정부, 때로는 군사 독재 정부가 들어섰다. 루마니아나 유고슬라비아는 개인의 통치 하에 소련과는 독립적인 정치를 했지만, 불가리아는 소련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으며 역설적으로 이는 불가리아가 알바니아에 이어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후진적인 국가에서 발칸에서 조금이나마 잘 사는 국가가 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는 원자재나 소비재를 소련으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의 지원을 받은 지도자들이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발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 이후에 나타난 토도르 지프코프(Тодор Живков)에 이르기까지 역대 공산당릐 수뇌부들은 매우 억압적이며 보수적이고 안정된 통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가리아 인들은 중앙 유럽의 공산주의 위성국가들인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인들이 소련에 대항하여 자유화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도 그런 움직임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공산 정권에 순응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러한 구조는 전형적인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전통적인 봉건국가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도 공산당 내 반대파들의 쿠데타로 무너진 셈이 되었다. 특히 체르벤코프 시대 때는 그러한 독재 통치가 더욱 강화되었고 따라서 그의 시대는 후술할 지프코프의 시대만큼이나 암울한 시대였다. 불가리아 디미트로프의 뒤를 승계한 사회주의자 체르벤코프는 1900년 9월 6일 불가리아 공국 소피아 인근의 즐라티차(Златица)에서 탄생했다. 1919년 공산당원이 되어 공산주의 청년단 활동과 신문 편집에 참여했으며 1923년 불가리아의 쿠데타에 가담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이내 석방되어 소련으로 이민 갈 수 있었다. 1925년 체르벤코프는 소련으로 이주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마르크스 레닌 학교에 다니면서 공산사상에 심취했으며, 이후에는 학교장이 되면서 교수를 겸직하기도 했다. 체르벤코프는 스탈린의 통치 방식을 지지했으며, 박식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지식과 수준급 입담과 재치로 유명세를 탔다. 이를 두고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에서 "스파르타크"라는 별명을 지어줬으며 그는 이 필명을 평생동안 사용했다고 한다. 1941년, 불가리아로 귀국해 반(反) 나치와 친(親) 공산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보내는 라디오 방송국의 국장이 되어 선전선동을 주로 맡게 되었다. 1944년 체르벤코프는 다시 소련으로 들어가 소련군을 돕다가 전황이 소련군에게 유리해지자 자신의 처남이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과업을 돕기 위해 불가리아로 돌아오게 된다. 체르벤코프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막내 여동생 엘레나와 결혼하여 처남매부 지간이 됐으며 디미트로프와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의 권좌를 고스란히 승계받을 수 있었다. 체르벤코프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공산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체르벤코프는 1947년 문화부 장관 자리에 올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프로파간다 작업을 하다가 1949년에 부총리가 되었다. 부총리가 된 직후, 불가리아의 지도자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사망했는데 이 때 불가리아는 임시로 집단적 리더가 되어 혼란을 최대한 방지했다. 체르벤코프는 디미트로프의 뒤를 이어 당 총서기가 되었고, 바실 콜라로프(Васил Коларов)는 디미트로프의 뒤를 승계하여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이 상황은 1950년 콜라로프가 1년 만에 갑자기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콜라로프의 사망은 체르벤코프와 노선을 달리했기에 자신의 권좌에 굴복하지 않은 콜라로프를 제거하기 위해 독살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재기되었다. 1950년 체르벤코프는 소련의 완전한 승인을 받아 불가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총리와 국가 수반의 직위를 결합해 통합 총리가 되었다. 체르벤코프의 정책은 당시 소련의 정책과 매우 흡사하였고 스탈린주의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작은 스탈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체르벤코프의 통치 시기에는 당 노선에서 벗어난 모든 일탈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더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에 의한 문화 예술에 대한 독단적 탄압과 고립주의적인 외교 정책이 실행되었다. 이 시기에 체르벤코프는 디미트로프는 소련의 스탈린과 유사한 개인 숭배 대상으로 추대했고 스스로도 숭배 대상이 되어 각종 선전선동들을 감행했다. 같은 시기에는 불가리아의 집단화 운동도 함께 시작되면서 농업과 공업의 집단화로 스탈린식 사회집약화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체르벤코프는 1951년 초까지 완전한 당 내 규율을 위한 선전 활동을 벌여 많은 고위 관리를 포함하여 5명 가운데 1명을 숙청하고 적극적으로 제명했다. 그는 1953년까지 당원 460,000명 가운데 100,000명을 당에서 제명시켰으며 숙청하여 살해했다. 이러한 체르벤코프의 인격 숭배 대상의 모델은 스탈린 양식의 모델과 유사했으며, 소피아의 의과 대학교를 포함해 소피아의 다양한 장소에서 체르벤코프의 이름을 차용한 장소가 대거 생겨났다. 체르벤코프는 개인적으로 현 정세에서 개인숭배를 필연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어떤 극단적인 형태들을 강력히 반대했다. 1953년까지 불가리아는 서방과 관계를 단절했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수출입의 90%는 소련과의 연대 및 파트너십과 관련이 있었다. 체르벤코프 내각은 농, 공업의 집단화 비율을 높이려고 협박과 공급 차별을 활용하게 되었고 이는 불가리아가 민주화 되었을 때 국가 전체가 빈곤에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체르벤코프 때 이와 같은 집단화로 인해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국유 경작지가 12%에서 61%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9-1953년 사이의 5개년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며, 그 기간 동안 불가리아는 농업 부문에선 -0.9% 성장을 기록했다. 반면, 같은 시기 산업 부문에선 20.7% 성장을 기록했으며, 경제성장률은 8.4%에 이르게 된다. 스탈린이 사망하기 전, 체르벤코프는 이미 스탈린주의 노선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디미타르 디모프의 소설 담배를 출판 허용한 일은 문화 활동에 향한 당의 통제가 약간 완화되었음을 보여주었던 사례로 남아있다. 1953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관계를 재수립하였고, 일부 정치인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졌으며, 기획자들은 소비재 생산 증가 및 상품 가격 인하를 논의했다. 그러자 스탈린주의자들의 방해로 인해 1953년 이후 체르벤코프는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자신을 향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몇 가지의 조치를 취했다. 특히 1954년에는 당 지도부를 포기하고 불가리아의 경제 및 정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줄였으며, 집단화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1955년까지 정치범 약 10,000명을 석방하여 자신의 노선을 완전히 탈바꿈했다. 1956년 4월, 흐루시초프의 탈스탈린화 이후 불가리아 공산당은 체르벤코프의 권위주의, 불가리아만이 갖고 있는 스탈린주의를 비난했다. 체르벤코프는 같은 해 직위에서 물러나 지프코프에게 직위를 양보하고 정계에서 은퇴함으로써 그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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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 세속적인 이슬람, 타타르스탄 러시아 연방 자치공화국
    구소련 지역 이슬람권이 거의 그렇지만 타타르스탄도 세속주의적 경향이 짙다. 그렇기 때문에 술은 할랄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며 음주하는 무슬림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는 세속주의 성향은 약화되고 있는 편이다. 볼가-우랄의 이슬람 맹주로 자처하는 타타르스탄의 이슬람, 즉 유로 이슬람(Euro-Islam)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타타르스탄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 강력히 전파된 이슬람 개혁 운동인 자디드 운동(Jadidism)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자디드 운동은 일종의 문화 개혁 운동적인 성격을 가지며 미신 타파와 구습 탈피를 통한 현대 이슬람 정착과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한 교육의 장려가 목적이었다. 이는 실제적으로는 이슬람 정통성에 대해 자유주의 색체를 가지는 것으로서 극단적인 이슬람 혁명이나 지하드를 통한 이슬람 제국 건설을 추구하기보다는 품위 있는 훌률항 지성인으로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좋은 이미지의 이슬람을 추구하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 이와 같은 양상이 이슬람을 기반으로 다른 종교도 공존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현재 타타르스탄에 건설된 모스크 갯수는 1990년 100개 남짓이던 모스크는 꾸준히 증가하여 2008년 통계에는 1,055개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서 무슬림화가 되는 비율은 계속적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결국 타타르 민족이 역사적인 배경이나 관용적으로 보이는 이슬람의 색채에 따라 모든 종교를 다 수용하지만, 어떠한 것도 이슬람보다는 우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정체성으로부터 오는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라 본다. 유로 이슬람의 진정한 본질은 유럽적인 정체성을 지향하며, 폭력보다는 평화적 공존을 주장한다는 부분에 주목하면서 대체적으로 유로 이슬람의 역사적 기원, 현재적 특성 등을 고찰하고 있다. 유로 이슬람의 기본적인 특성은 현대적이고 개혁적이며, 평화 공존적이며, 친서구적 이상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유로 이슬람은 유럽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구 사회의 문화적 이념과 서유럽과의 공존의 의식을 추구한다. 이는 남녀의 양성 평등, 인간의 태생적 존귀성과 더불어 이슬람의 본래적 관용성의 가치를 추구한다. 유로 이슬람은 기존의 이슬람 관념의 가치에서 벗어나 있다. 유로 이슬람은 좀 더 세속적인 방향의 이념으로 발전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 무슬림들은 세계화 및 정보와 혁명에 의해 제공된 기회의 이점을 활용하면서 자신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이념으로 조정해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슬람 세계의 국가들이 지역 및 글로벌 의제에 관한 많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세계 질서를 수립하는 것에 있어 러시아의 전통적인 파트너라며 젊은이들이 이러한 건설적인 다면적 상호 협력에 보다 많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 장관도 러시아와 OIC(이슬람 협력 기구) 회원국 간의 관계가 상승하고 있다면서 러시아는 평등과 상호 이익, 문화 및 문명적 정체성에 대한 존중, 발전 방향을 독립적으로 결정한 권리를 기반으로 협력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서방이 널리 분파시킨 잘못된 가치, 주권을 수호하는 국가를 고립시키려는 시도를 러시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언급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청소년 정책 포럼의 개최지로 러시아의 카잔시를 선택한 것은 러시아와 OIC 회원국 간의 관계가 다면적이며 국제 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하여 OIC는 카잔을 이슬람 청소년 정책 도시로 선정하고 글로벌 청년 서밋을 개최했다. 카잔의 서밋에는 OIC 국가 총영사, 기업가 및 국제단체대표 등이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 이란, 리비아,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50여개국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관계자가 참석했다. 대다수 현지 언론들은 러시아 연방국이지만 전통적으로 인구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는 타타르스탄에서 이슬람 국제 행사를 개최한 것을 매우 전략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분석했다. 서밋 개최지인 카잔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이기는 하지만 백인 국가인 러시아에서 이슬람 국제 행사를 개최한다는 것은 이슬람 특유의 배타적인 문화에 빗대어 보았을 때 매우 이례적이며 최근 이슬람 국가들과 러시아와의 관계 변화를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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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 프랑스 대통령의 발언, 유럽 전체의 파국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도박
    최근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매우 위험한 발언을 표명하면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왔다. 이것은 프랑스 핵무기가 유럽 방위의 일부분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언급한 발언이다. 즉 프랑스의 핵무기가 자국 방어를 위한 목적을 넘어서서, 유럽의 핵 억지력 강화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프랑스의 핵 교리에도 분명히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핵 강국인 러시아에 대한 자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프랑스가 핵보유국이 된 까닭은 적은 핵무기로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외부의 실질적 위협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독자적으로 방어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또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프랑스로서는 이 점이 특히 중요했다. 사실 프랑스는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핵실험을 남태평양에서 실시했으며, 지하 핵실험도 감행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 해외령이 남아 있는 프랑스로서는 세계에 어디서든지 자국의 영토에 대해 위협이 된다면, 이에 대한 핵 반격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이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샤를 드골 대통령이 프랑스의 핵무장을 추진했던 것은 미국의 핵우산 정책에 대한 신뢰성 때문이다. 거기에는 유럽이 당시 소련의 재래식 공격을 받았을 때에, 미국이 과연 핵 보복을 선제적으로 할 것인지, 그리고 이때 어떤 사용조건인지에 관해 드골 대통령의 합리적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핵 보복을 감행할 때 내세웠던 전제조건은 소련의 재래식 공격이 나토를 압도했을 때, 혹은 유럽이나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핵 공격이 임박했을 때이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언제든 그러한 조짐이 보인다면, 미국은 핵무기를 통한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뜻도 된다. 실로 무시무시한 얘기다! 드골 대통령은 아마도 이러한 미국의 선제공격이 소련의 맞대응으로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것인데, 이를 감수하고라도 과연 그렇게 선제공격을 감행할 군사적 능력이 미국에게 있느냐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보면, 프랑스의 핵무장이 이 두 가지 조건을 상쇄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프랑스의 핵무장이 소련의 재래식 무기에 대한 나토의 열세를 만회하고, 대소 핵전략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도 이러한 조건이라면, 프랑스의 핵무장을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외교적 협상에 따른 결과이다. 프랑스는 약 3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거리가 300-500 킬로미터 정도인 공대지 순항미사일과 사거리가 약 10,000 킬로미터 정도인 잠수함 탑재 탄도미사일, 사거리가 약 3,500 킬로미터 정도인 지상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등등이 있다. 또 프랑스는 핵추진 항공모함을 통해 핵무기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프랑스의 핵무기는 그 사용에 있어서 분명히 외부로부터의 명확한 위협을 전제한다. 사실 프랑스는 핵무장 이후로 핵무기를 사용할 만큼 외부로부터의 명확한 위협이 없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는 핵보유국이지만, 이를 실제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외교를 통해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유지하곤 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긴장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프랑스의 핵무기를 유럽 방위에 활용하려는 시도는 타당하지 않다. 프랑스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약 2,100 킬로미터, 러시아로부터 6,200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사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적 영향도 없다. 특히 프랑스 자체의 영토에 아무런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데, 핵무기로 유럽의 억지력을 강화하는 것은 오히려 프랑스 자체의 방어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당장 러시아의 거친 비난을 받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매우 현실적이지도 않고, 아무런 실익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프랑스의 핵무기를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유럽 쪽에 전진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관해 가장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는 국가는 독일이다. 전범국인 독일은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배치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핵무기를 활용하면서, 그 비용을 어느 정도 부담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나쁘진 않다. 그런데 독일의 이러한 태도에는 차후 재무장이 진전되면, 핵무장도 배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 프랑스가 말하는 외부 위협이라고 것도 현재 시점에서 보면 러시아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프랑스의 위협이라고 말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노력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 유럽연합의 핵심축인 프랑스가 핵무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의도는 이해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오히려 자신의 조급함을 노출하는 것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러시아의 핵전쟁 위협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갖고 왔다. 실로 무모한 정략적 발언이다! 프랑스의 핵전력이 러시아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무모한 발언은 러시아를 자극함으로써, 자칫 유럽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 올 수도 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전으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수세에 몰리고 있는데, 이 전쟁이 유럽 전체로 확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토와 러시아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고, 이는 실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누구도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핵무기를 직접 사용한 국가는 미국이 유일한데, 이를 통해 한 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즉 핵무기의 가공할만한 위력이 전쟁을 빨리 끝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때는 일본이 핵무기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서로 핵보유국이라면, 이 유용성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아무리 정치적이라고 해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오히려 그 발언이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핵무기가 언제든 어디서든 프랑스를 겨누고 있음을 공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핵무기가 프랑스를 겨누면, 사실상 유럽 전체를 언제든 핵 전쟁터로 만들 수 있다. 거기에는 러시아가 지금까지 한 번도 핵무기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별로 현실적 이득이 없기 때문이라는 명확한 명분도 있다. 요즘 러시아가 핵전쟁 연습을 벨라루스와 공동으로 벌이는 것도,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과 신형 무기를 실전 배치하고, 러시아 군대를 현대화하는 것도 이를 유럽에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그와 같은 명분은 러시아의 인내심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를 누구든 자극하면 언제든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유럽 안보에서 러시아와 등을 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이와 정반대로 진행되니까, 유럽연합 스스로가 국제적 지도력을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국가의 책임 있는 지도자가 핵무기를 섣불리 언급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에 동조하는 지도자도 유럽 전체를 자칫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이를 계기로 군비경쟁에 가세하는 것도 과연 과거의 악몽을 실로 망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부에서는 프랑스 대통령의 돌출발언에 가까운 언급이 자국 원전 수출을 동유럽에 확장하고, 또 유럽산 무기의 판매와 취득을 강화하려는 마크롱 대통령의 포석이 깔려 있다고 보기도 한다. 또 프랑스가 핵무기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연합과 나토에서 프랑스의 지도적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영국이나 독일을 은근히 견제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유럽의 안보에서 주도권을 프랑스 쪽으로 갖고 오는 방법이 핵무기 보유를 통해 러시아와 껄끄러움을 어느 정도 감안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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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 동유럽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 살고 있는 루신인에 대하여
    루신인은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동슬라브어파 루신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루신이라는 명칭은 중세 시대 루스 슬라브어의 라틴어 명칭인 루테니아(Ruthenia)에서 기원했다. 오늘날 루신인 인구는 60만여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이 중 루신어 구사가 가능한 인구는 소수에 불과하다. 루마니아 카르파티아 산맥은 중세 초기에 크로아티아인의 조상이 되는 남슬라브계 부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오늘날 크로아티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그 빈 자리를 흑해 근방에 거주하고 있던 동슬라브계 부족인 울리치 족이 투르크계 유목국가인 페체네그의 침입을 피해 이주하게 된다. 루신인들의 조상인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인들은 과거에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아 정교회를 믿었으나 중세 루테니아 왕국이 멸망하고 이후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 지역이 카톨릭을 믿는 폴란드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지배층은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리고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로 알려진 자카르파탸(Jacarpatia)의 농노와 비잔틴 정교회 성직자들이 루신인들의 직계 기원이 되었다. 과학적 하플로그룹 조사에 의하면 자카르파탸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와 다른 지역 주민들과 다르게 타타르 계통이나, 바쉬키르 계통등의 몽골 및 투르크계와 유사성은 적었고 대신에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과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자카르파탸 지역은 루테니아 왕국으로부터 헝가리 왕국에 복속된 이래 약 1,000년동안 헝가리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현재까지 러시아계 국가들의 통치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근세 1646년부터 이들은 로마 교황의 권위는 인정하지만 정교회의 전례를 유지하는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 교회로 개종했다. 그러나 여전히 헝가리인, 독일인 지주들에게 카톨릭 봉헌금을 빙자한 과도한 교회세를 납부해야 했다. 이들은 빈곤한 생활과 더불어 타 국가의 차별에 시달렸으며 한 때 루신인을 대표했던 정교회 성직자들은 1649년 우주호로드에서 동방 카톨릭 교회로의 개종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652년에는 로마 교황청에 이와 같은 결정을 전달하여 교황으로부터 승인받고 인준까지 받았다. 루신인 농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정교회에서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 교회로 반강제적인 개종을 당한 셈이 되었는데, 이는 성직자들이 일반 농민들의 소요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교파가 변경된 것을 일반인들에게 비밀로 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직자들이 공식적으로 개종한 지 100여 년이 지난 1760년대까지도 루테니아 농민들은 개종된 실상을 모르고 자신들이 정교회에 소속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한다. 루테니아 농민들 중에서 글을 배우거나 외부에 나가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주 외부인들과 접촉한 결과 그 동안 자신들은 정교회를 믿는 줄 알고 살았으나, 실제로는 동방 카톨릭 교회 성직자와 함께 동방 카톨릭 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종교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소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던 루신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여러 도시로 이민하여 루신어를 버리고 도시 현지 주민들과 동화되다시피 했다. 일례로 루신인의 한 갈래로 알려져 있는 보이코인(Boykos)의 경우 과거에는 폴란드, 헝가리,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에 40만여 명이 분포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정체성이 상실되어 이웃 민족에게 동화되었고 이들은 겨우 수백여 명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범슬라브주의에 경도된 루신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비해 생활수준이 낮은 편이었고, 이와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경제적 걱정이 없는 미국으로 이주한 루신인 인구 상당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스트리아계 미국인이 아닌 러시아계 미국인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1899년에서 1931년 사이에 268,669명의 루신인 인구가 미국에 이민 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대개 러시아계 미국인 정체성을 가지고 미국 내 러시아계 디아스포라 사회에 동화되어 미국 내에서 러시아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다. 그러면서 일부 루신인들은 미국으로의 이민 간 이후에도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오늘날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은 유럽에서 거의 사멸한 상황이다. 그러나 대신 미국에서는 40만여 명에 달하는 교세를 지니고 있어 미국을 중심으로 그 명맥 또한 유지되고 있다. 물론 미국 내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 교회 소속 신도들이 모두 루신인이거나 루마니아 계는 아니었다. 이는 2010년 자가 응답에 기반을 둔 미국 인구 조사에서 자신이 루신계 미국인이라고 응답한 인구는 7,583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다양한 인종들을 상대로 선교를 벌인 결과 교세가 확장되었고 공산주의가 붕괴되어 삶이 어려워진 동구권 주민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민하여 이 종교를 믿었던 결과이기도 하다. 현재 루마니아 카르파티아 지역에 거주하는 루신인들은 대부분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으며 일부 남아있는 지역은 우크라이나의 자카르파탸 주로 알려져 있다. 이 자카르파탸 주는 다른 우크라이나의 주와 비교했을 때 매우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1945년 전후 소련에 병합되기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였던 적이 없었다. 카르파티아 루신인들은 오랫동안 헝가리 왕국의 일원이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헌법은 당시 유럽 기준으로도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에 있어서 대단히 진보적이었다고 평가를 받았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정부는 이 루테니아 지역에 기반 시설 투자를 해주었고 이 때 여러 인프라가 생겨났다. 이 루신인들은 전간기 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속해있던 시기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여 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의 소련은 이 지역을 편입하면서 굉장히 억압적인 정책을 피게 되었고 당연히 많은 루신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기도 했다. 특히 소련이 헝가리를 장악하면서 주로 보이보디나 자치주 및 바나트 자치주 산악 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판노니아 루신인들을 학대했는데 다량의 루신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떠나 절멸했다. 판노니아 루신인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 도중에 감소한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 18세기 중반 카르파티아 지역의 루신인 농부들을 이주시킨 것이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스탈린이 사망한 후, 10년이 지나 다시 판노니아, 오늘날의 헝가리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현재에도 약 6만여 명이 살고 있다. 렘코(Lemkos) 루신인의 경우, 오늘날 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5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슬로바키아 일부 영토가 과거 폴란드의 영토였던 시절에 이주하였던 루신인들이 기원이다. 1939년을 기준으로 하여 인구가 14만여 명 정도였지만 슬로바키아인과의 동화되는 상황에 있기에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의 화가인 앤디 워홀(Andrew Warhola, 1928~1987)의 부모가 슬로바키아에서 피츠버그의 탄광 노동자로 이민 왔던 렘코 루신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의 유명 재즈 뮤지션 빌 에반스(Bill Evans, 1929~1980)의 어머니가 루신인 중에서도 렘코인 혈통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물론 에반스의 아버지는 웨일스 출신이다. 후츨(Hutsuls) 루신인의 경우, 주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국경 지대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남슬라브계 크로아트(Croat) 족이 이주한 지역에 울리치 족이 정착하고 여기에 일부 루마니아인이 동화되어 동슬라브어 계통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을 그 기원으로 보고 있다. 루마니아 출신 역사가 니콜라에 로르가(Nicolae Lorga)는 이들이 트란실바니아 일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 우크라이나 근방으로 이주하여 슬라브화한 왈라키아인(Vlachs)의 원(原)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풍속은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주목을 받아 많은 기록과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후츨 루신인들의 전통 문화가 목가적인 생활 양식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목공예가 뛰어났으며 이 외에도 카르파티아에서 키운 조랑말은 후츨 루신인들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보이코(Boykos) 루신인의 경우,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국경 지대에서 거주하고 있는 루신인들로 정확히 말하자면 갈리치아 남부와 폴란드 남동부 국경지대에 걸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폴란드 제2 공화국 시절에는 폴란드 정부에 의해 민족 동화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서 이들을 소수민족으로 분류하지 않고 일반 우크라이나인으로 분류하면서 따로 민족언어가 보존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인으로 완전히 동화되었다.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 조사를 기준으로 131명, 2011년 폴란드 통계 기준으로 볼 때 258명이 자신을 보이코 루신인이라고 응답하면서 아직까지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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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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