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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세 유럽의 신기원을 이루었던 프랑크 족의 기원
    중세 유럽의 신기원을 이루었던 프랑크 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최근 200년 동안 학자들마다 견해가 달랐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문화나 민족학 연구 결과 최근에는 이 민족이 전통적인 게르만 계통 민족 국가이며, 켈트의 후예라는 점이 명확해지고 있다. 이들 은 단일한 부족 체계가 아니라 라인 강 동부 지역, 중, 하류 일대를 중심으로 거주하고 있는 살리(Sali) 족, 리부아리(Livuari)족과 오늘날 네덜란드, 벨기에 일대에 거주하고 있는 카티(Cati) 족을 포함한 다 종족 공동체의 통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여러 소부족의 부족 집단에 대한 호칭이면서도 통칭적인 부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카이사르가 게르마니아를 원정할 때 프랑크 족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다가 후일 토이토부르크(Teutoburg) 전투에서 최초로 언급되어졌다. 이들 프랑크 족은 살리 족이 지도적 지위에 있었으며, 후일 민족 이동 시기에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 지방으로 들어와 정착하게 된다. 이에 나도 프랑크 족의 기원에 대하여 여러 연구를 진행했었지만 그 기원에 대하여 밝히는 것이 쉽지 않았다. 본 연구자가 프랑크 족의 기원에 대하여 문헌적으로 밝힌 것이 현재 독일 슈투트가르트에 있는 2세기 로마 비석에 새겨진 명문으로 추적한 결과 본래 켈트 인의 분파라는 것뿐이었다. 따라서 켈트 인의 분파인 전체 게르만 계통 민족들, 그들의 분파들을 정리해 본 결과 라인 강 일대의 분파, 폴란드, 체코 지역의 동유럽 일대의 분파, 그리고 발트 지역과 스칸디나비아의 고트 분파로 분류할 수 있는 가운데 프랑크 족과 수에비 족, 부르군트 족은 라인 강 분파로 나누었다. 그리고 이들의 현실적인 기원은 오늘날 오스트리아 할슈타트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이사르의 정복 이후 갈리아-게르마니아 속주는 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 로마 영내에서 이주해온 귀족들과 게르마니아 부족장들의 권한은 미증유로 강화되었다. 로마 귀족들과 게르마니아 부족장들은 공지를 거의 독식하다시피 하여 거대한 영지를 구축했다. 그들은 막강한 경제력을 이용하여 제정 로마에 대해서도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러나 이러한 로마 대지주들의 압제적인 태도와 횡포로 인하여 화폐의 인플레, 물가 상승 등 여러 가지 사회 악재가 초래되었고, 가난한 부족민들의 재정 부담은 날로 배가되었다. 게다가 권위적인 경제 정책은 군인들에게만 유리하게 돌아갔고, 이 모든 현상이 시골의 사회적 위기를 가중시켰다. 초기에 소규모의 약탈로 시작된 반란은 3세기 후반부에 몰락한 농민들의 폭동인 자크리(Jacquerie)의 난으로 크게 번지게 된다. 자크(Jacques)는 프랑스에 거주한 농민들을 지칭하는 용어이며, 이들의 반란을 자크리의 난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특히 1358년 흑사병의 창궐과 백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북부 프랑스에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 때부터 자크리(Jacques)의 난은 전체적으로 농민 반란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로 정착되었다. 그들은 대지주 귀족들의 기득권과 이익을 옹호한 로마 제국의 낡은 지배 체제에 대해서도 강하게 저항했다. 연이은 농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갈리아-게르마니아 속주에는 불안과 무질서가 창궐했고, 이러한 사회적 혼란은 알라만 족과 프랑크 족과 같은 게르만 계통 민족들의 반란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었다. 233~234년에 최초로 서부 게르만계 혼성 부족인 알라만 족이 원주지였던 엘베 강 유역으로부터 이동하여 라인 강을 건너 플랑드르의 로마 속주까지 진출했다. 이에 진노한 로마 황제 막시미누스(Maxininus, 재위 : 235~238)는 알라만 족들을 다시 엘베 강까지 밀어냈지만 게르만 계통 민족들의 로마로의 영내 이주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도 로마 제국의 갈리아-게르마니아 무정부 상태를 이용해서 게르만 계통 민족의 이동은 계속 이어졌다. 로마 제국이 쇠퇴하고 있던 4세기 중반에 아시아 기마유목민족인 훈족이 동유럽에 침입했다. 이에 고트족이 발칸 로마 속주로 이주함에 따라 이것을 계기로 게르만 계통 민족들의 이동이 시작되어, 그 후 약 200년간 유럽은 민족 대이동의 암혹 시대가 지속되었다. 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훈족에 의해 촉발된 게르만 계통 민족의 대이동은 고대와 중세를 구분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프랑스 사가들에게 이 사건은 이민족의 대 침입으로 규정되었으며, 독일사가에게는 민족 대이동으로 규정됨에 따라 서유럽 사가들의 서술 또한 달라지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12
  • 많은 시사점을 준 유로 2020의 프랑스 국가대표팀
    지난 2020년 유로대회에서 개개인적인 기량은 최상이지만 조직력이 모래알 같던 프랑스 축구는 마침내 한꺼번에 무너졌다. 프랑스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우승팀이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2020년 유로에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 <레키프>와 같은 프랑스 언론은 대회 전에 음바페와 올리비에 지루 간에 은근한 신경전부터 시작하여, 앙투안 그리즈만의 롤을 시기질투한 음바페, 숙소 선정 문제 등, 프랑스 대표팀의 모래알과 같은 조직이 조기탈락을 야기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레키프>는 이번 프랑스 대표팀을 선수들이 레옹 도메네크 감독 항명 스캔들을 일으켰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의 프랑스 대표팀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게 축구 뿐이겠는가? 역사적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다. 훈족의 유럽 침공은 게르만 계통의 민족들을 일거에 서진시켰다. 이들 게르만 계통의 민족들은 로마제국 영내에서 불법 이주하여 살게 되었지만 로마에서는 이들을 책망하기 보다는 어떻게 이용할지 골몰하게 된다. 당시 로마의 경제력을 최악을 달리고 있었는데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지역과 사산 왕조의 침입을 많이 받은 오리엔트 지역에서 개별적인 화폐를 발행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지역과 그리스 지역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산 왕조와의 전쟁은 끝이 없었고 로마 제국은 노예 수급이 차단됨에 따라 적잖은 곤란을 겪고 있었던 판국이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인들의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에 로마인의 노예가 될 것을 강요했고 이러한 노예들은 군대에서 용병으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훈족의 침입이 심해지면서 게르만의 수용 인원이 많아짐에 따라 이들이 로마인보다 오히려 숫자적으로 우위를 보이자 이들은 로마인과 결혼을 통하여 혼혈민들을 로마 미래의 주역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점차 게르만 인들은 로마군의 용병으로 이용되면서 군에서 게르만 인들의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그들의 군에서의 세력이 막강해졌다. 즉, 로마 군 내에서도 게르만 인들을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르만 계통의 민족 중에서 정말 뛰어난 자들은 로마의 군 내에서 장교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오히려 로마의 순혈인보다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순혈인인 로마인들을 복종시키게 되면서 군이 거의 게르만 인의 손에 장악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로마는 게르만 인들을 학대하면서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힘으로 누르자 게르만 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반기를 들어 각 도시들을 제압했고 심지어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훈족이 로마 영내를 침입하자 이들은 훈족에 대한 위협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서로 화해하게 되었고 공동의 적인 훈족과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 화해와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 군의 실권자인 서고트 족 오도아케르에 의하여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게 된다. 게르만 인들에 대한 무조건 적인 관용과 그들을 노예로 활용하려는 인권 유린, 그리고 정부 내의 부정부패와 비리, 게르만인들에 대한 무시와 야만족이라는 멸시, 그로 인한 안일한 대처 등은 현재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제는 민족이나 순혈이라는 것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대, 전 세계적으로 다문화가 대세인 현 시대에서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점으로 야기될 수 있는 부분이 축구도 그렇지만 역사적인 문제들이다. 고작 축구나 과거의 역사로만 여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현 시점과 앞으로 다가오는 점점 희미해지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어떻게 대체하느냐, 혹은 어떻게 더 강화시키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다문화로 이루어진 사회와 가정 내부를 보면 서로 마음에 안 들게 되었을 때 그 집단과 집단 안에 소속된 개인을 음해하거나 갈등을 표면에 노출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비단 국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에도 가장 현실적인 문제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대한민국으로 보면 가장 먼저 희석될 부분이 문화적인 부분도 있지만 국가주의 원칙적으로 볼 때 충(忠, Loyalty)이라는 부분이다. 다문화로 구성된 사람들이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반드시 국가를 위해 뭘 해야 한다는 의무나 강박관념 또한 없다. 이들에게 있어 국가는 큰 테두리에 소속된 씨족 단체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에 불과하다. 나라의 역사도 배워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한국사가 어찌되든 자기들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4대 의무 중 자신들이 필요한 의무만을 수행하며 국가에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4대 의무 중, 병역의 의무는 점점 그 의미가 퇴색 되어질 것이다. 다만 병역의 의무는 지킨다 하지만 자신들 목숨 바쳐 싸워야 할 조국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싸울 것이다. 그 말은 자신의 자신의 가족들이 위협을 받으면 언제든지 외국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구석기 시대처럼 가족 단위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기의 가족만을 위하는 시대가 되어갈 것이다. 이는 즉, 국가주의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힘든 일 하기 싫다고 노역을 거부하며 화이트칼라를 노리는 젊은이들로 인해 결국의 국가의 근간 산업이 동남아시아 젊은이들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고 앞서 이자스민처럼 정치에도 관여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들보다는 오로지 동남아시아 인들의 편의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원칙이 없는 다문화 제도는 로마라는 거대 제국이 무식하고 야만적이라고 무시한 게르만 인들에게 한순간에 무너진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없다. 최근에 한동훈씨가 이민청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반복되기 마련이고 그 반복되는 부분에서 어떠한 실책이 있었다면 반성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부분인데 한동훈씨는 그러한 심각성과 역사의 무서움을 여전히 모르고 있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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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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