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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와 스페인이 맺은 세기의 로맨스
    18세기 초인 1724년, 러시아인들은 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바다로 갈라놓는 베링 해협까지 탐험했으며 1741년에는 러시아인 선장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상륙했다. 알래스카의 원주민인 틀링깃족들이 종종 러시아인들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러시아의 군사력에 의해 모두 진압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알래스카 남부에 시트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러시아령 알래스카 식민지의 수도로 삼았다. 러시아인들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드넓은 시베리아를 정복해 나갔던 이유는 바로 여우와 수달과 담비 같은 동물들의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겨울이 길어 추운 날이 많았던 러시아에서 담비나 여우 가죽으로 만든 모피는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고급 상품으로 여겨졌다. 한 예로 1582년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의 코사크 군이 시비르 칸국을 정복했고 수많은 모피들을 노획하여 당시 차르였던 이반 4세에게 담비와 여우의 모피들 수만 장을 바쳤다. 수많은 모피들을 보고 감탄한 이반 4세는 시비르 칸국을 정복한 러시아군 사령관인 예르마크가 예전에 저질렀던 약탈죄를 비롯해 코사크 군 전원를 사면했다. 이렇게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정복해가면서 얻은 모피들은 러시아의 국가 경제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623년 시베리아의 러시아 인 관리들이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검은 여우 모피 두 장의 가격은 110루블인데, 그 돈으로는 말 10마리와 암소 20마리 및 100에이커의 땅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650년대에 이르면 러시아는 국가 수익의 최대 30% 가량을 모피 무역으로 충당할 정도였으니 그 가치는 실로 막대했다. 그래서 시베리아 정복에 나섰던 러시아 인들은 모피를 가리켜, “털이 달린 황금”이라고 불렀다. 1598년에서 1613년 동안, 러시아는 제위 계승을 놓고 러시아 동란 시대라는 최악의 내전을 맞이할 때 시베리아에서 얻은 모피로 인한 막대한 수익으로 인해 정부가 파산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모피는 러시아와 그 외의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선물이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1595년 러시아는 신성로마제국에 다람쥐 모피 33만 장과 담비 모피 6만 장을 선물로 보냈고, 1635년 오스만투르크에는 1만 루블의 모피를 휴전 협상에 사용할 용도의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의 과도한 모피 확보를 위해 야생동물들의 개체수가 줄어들자 알래스카와 북미 대륙에까지 진출했는데 그러한 이유는 바로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알래스카가 아시아가 아닌 북미 대륙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러시아 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799년 러시아의 무역 상인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Nikolay Petrovich Rezanov : 1764~1807)는 북미 대륙에 러시아의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한 사업체인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설립했다. 같은 해, 레자노프는 러시아 차르인 파벨 1세로부터 앞으로 20년 동안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북미 대륙에 진출하는 모든 거점에서 운영과 사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승인을 담은 면허장을 받았다. 이로써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러시아 정부를 대신하여 알래스카를 포함한 북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자격을 얻은 셈이 되었다. 레자노프와 그의 심복인 알렉산드르 안드레이비치 바라노프(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 1746~1819) 등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고위급 간부들은 알래스카를 식민지로 삼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북미 대륙의 더 남쪽까지 진출하려 하였다. 우선 모피 상인들이 탐내던 모피를 더 많이 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야 했다. 또한 알래스카 식민지에 차츰 러시아에서 유입한 인구들이 늘어나면서 사냥이나 고기잡이만으로는 식량을 충분히 공급하기가 어려워지자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지닌 따뜻한 남쪽의 땅이 필요했다. 레자노프는 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한 끝에 1806년 4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를 다스리는 스페인 장관인 호세 다리오 아르게우엘로를 만나서, 캘리포니아에서 알래스카의 러시아 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면, 그 대가로 모피를 주겠다는 무역을 제안했다. 당시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에서는 외부로 식량을 유출하는 일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세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레자노프는 고민을 하다가 호세 장관이 주선하는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호세 장관의 딸인 마리아 콘셉시온 아르게우엘로(Maria Concepcion Arguello: 1791~1857)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호세 장관의 외동딸로 당시 캘리포니아 제일의 미녀로 칭송받던 여인이었다. 15세의 소녀였던 마리아는 42세의 중년 남성인 레자노프와 만나자 사랑에 빠졌고, 이윽고 그와의 결혼까지 결심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호세는 크게 놀랐다. 당시 스페인 인들이 그렇듯이 호세 장관과 마리아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레자노프는 러시아 인이었기에 러시아 정교회를 믿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카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키톨릭 신자끼리만 결혼하도록 허용하는데, 다른 종파인 러시아 정교회 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세는 마리아에게 교회법상 레자노프와의 혼인은 허락할 수 없다고 여러차례 설득했으나, 사랑에 빠진 마리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레자노프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결국은 호세는 딸에게 굴복하게 된다. 6주일 후, 레자노프는 마리아와 일단 약혼식을 올렸다. 딸을 아끼던 호세는 사위가 된 레자노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빵과 말린 고기 등 식량이 가득 실린 수송선을 알래스카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이리하여 약혼식이 이루어졌지만,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에게, 앞으로 북미 대륙에서의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지원을 더 많이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북미 대륙에 정착할 대규모의 러시아 이민자들을 보내달라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자노프는 마리아에게 2년만 기다리면 꼭 돌아와서 정식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알래스카를 거쳐 캄차카 반도에 상륙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시베리아 대륙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던 도중인 1807년 3월 8일, 레자노프는 시베리아 중부 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사망했다. 대륙과 대양을 넘나들며 정신없이 사업을 벌이느라 피로해진 레자노프의 사인은 과로사였다. 지금도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남아 있는 레자노프의 무덤에는 마리아를 그리워하며 남긴 유언인 “나는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다오. 하지만 나는 결코 당신을 잊을 수 없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 하염없이 레자노프를 기다리고 있던 마리아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무척 상심하여 몬테레이에 수녀원을 만들고 수녀원에 들어가 평생 동안 수녀가 되어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1857년에 죽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이었지만, 마리아는 레자노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것 같다. 2개 대륙과 대륙, 종교와 나이를 초월한 사랑은 현재까지도 세기를 초월한 로맨스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9
  • 많은 시사점을 준 유로 2020의 프랑스 국가대표팀
    지난 2020년 유로대회에서 개개인적인 기량은 최상이지만 조직력이 모래알 같던 프랑스 축구는 마침내 한꺼번에 무너졌다. 프랑스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 우승팀이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2020년 유로에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했다. <레키프>와 같은 프랑스 언론은 대회 전에 음바페와 올리비에 지루 간에 은근한 신경전부터 시작하여, 앙투안 그리즈만의 롤을 시기질투한 음바페, 숙소 선정 문제 등, 프랑스 대표팀의 모래알과 같은 조직이 조기탈락을 야기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레키프>는 이번 프랑스 대표팀을 선수들이 레옹 도메네크 감독 항명 스캔들을 일으켰던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의 프랑스 대표팀에 비유하기도 했다. 이게 축구 뿐이겠는가? 역사적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다. 훈족의 유럽 침공은 게르만 계통의 민족들을 일거에 서진시켰다. 이들 게르만 계통의 민족들은 로마제국 영내에서 불법 이주하여 살게 되었지만 로마에서는 이들을 책망하기 보다는 어떻게 이용할지 골몰하게 된다. 당시 로마의 경제력을 최악을 달리고 있었는데 원로원의 승인을 받지 않은 독자적인 지역과 사산 왕조의 침입을 많이 받은 오리엔트 지역에서 개별적인 화폐를 발행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지역과 그리스 지역에서는 엄청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산 왕조와의 전쟁은 끝이 없었고 로마 제국은 노예 수급이 차단됨에 따라 적잖은 곤란을 겪고 있었던 판국이었다. 따라서 로마 제국은 게르만 인들의 자치를 허용하는 대신에 로마인의 노예가 될 것을 강요했고 이러한 노예들은 군대에서 용병으로도 이용되었다. 그러나 훈족의 침입이 심해지면서 게르만의 수용 인원이 많아짐에 따라 이들이 로마인보다 오히려 숫자적으로 우위를 보이자 이들은 로마인과 결혼을 통하여 혼혈민들을 로마 미래의 주역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점차 게르만 인들은 로마군의 용병으로 이용되면서 군에서 게르만 인들의 수요가 많아짐에 따라 그들의 군에서의 세력이 막강해졌다. 즉, 로마 군 내에서도 게르만 인들을 함부로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다. 게르만 계통의 민족 중에서 정말 뛰어난 자들은 로마의 군 내에서 장교가 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오히려 로마의 순혈인보다 수효가 늘어남에 따라 순혈인인 로마인들을 복종시키게 되면서 군이 거의 게르만 인의 손에 장악된다.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로마는 게르만 인들을 학대하면서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힘으로 누르자 게르만 인들은 로마인들에게 반기를 들어 각 도시들을 제압했고 심지어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가 전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훈족이 로마 영내를 침입하자 이들은 훈족에 대한 위협으로 인하여 일시적으로 서로 화해하게 되었고 공동의 적인 훈족과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 화해와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고 결국 군의 실권자인 서고트 족 오도아케르에 의하여 서로마 제국이 476년에 멸망하게 된다. 게르만 인들에 대한 무조건 적인 관용과 그들을 노예로 활용하려는 인권 유린, 그리고 정부 내의 부정부패와 비리, 게르만인들에 대한 무시와 야만족이라는 멸시, 그로 인한 안일한 대처 등은 현재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이제는 민족이나 순혈이라는 것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시대, 전 세계적으로 다문화가 대세인 현 시대에서 앞으로 두고두고 문제점으로 야기될 수 있는 부분이 축구도 그렇지만 역사적인 문제들이다. 고작 축구나 과거의 역사로만 여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현 시점과 앞으로 다가오는 점점 희미해지는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를 어떻게 대체하느냐, 혹은 어떻게 더 강화시키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이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나타나는 다문화로 이루어진 사회와 가정 내부를 보면 서로 마음에 안 들게 되었을 때 그 집단과 집단 안에 소속된 개인을 음해하거나 갈등을 표면에 노출시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비단 국제적인 문제가 아니라 우리 대한민국에도 가장 현실적인 문제점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우리 대한민국으로 보면 가장 먼저 희석될 부분이 문화적인 부분도 있지만 국가주의 원칙적으로 볼 때 충(忠, Loyalty)이라는 부분이다. 다문화로 구성된 사람들이 국가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무도 없고 반드시 국가를 위해 뭘 해야 한다는 의무나 강박관념 또한 없다. 이들에게 있어 국가는 큰 테두리에 소속된 씨족 단체들의 모임이라는 성격에 불과하다. 나라의 역사도 배워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 한국사가 어찌되든 자기들이 알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4대 의무 중 자신들이 필요한 의무만을 수행하며 국가에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다. 그리고 4대 의무 중, 병역의 의무는 점점 그 의미가 퇴색 되어질 것이다. 다만 병역의 의무는 지킨다 하지만 자신들 목숨 바쳐 싸워야 할 조국이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서 싸울 것이다. 그 말은 자신의 자신의 가족들이 위협을 받으면 언제든지 외국으로 도망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대한민국 뿐 아니라 전 세계가 구석기 시대처럼 가족 단위의 삶을 영위하면서 자기의 가족만을 위하는 시대가 되어갈 것이다. 이는 즉, 국가주의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힘든 일 하기 싫다고 노역을 거부하며 화이트칼라를 노리는 젊은이들로 인해 결국의 국가의 근간 산업이 동남아시아 젊은이들에게 넘어가게 될 것이고 앞서 이자스민처럼 정치에도 관여하게 될 것이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민들보다는 오로지 동남아시아 인들의 편의만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이처럼 원칙이 없는 다문화 제도는 로마라는 거대 제국이 무식하고 야만적이라고 무시한 게르만 인들에게 한순간에 무너진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 없다. 최근에 한동훈씨가 이민청을 만들려고 혈안이 되고 있다. 역사라는 것은 반복되기 마련이고 그 반복되는 부분에서 어떠한 실책이 있었다면 반성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부분인데 한동훈씨는 그러한 심각성과 역사의 무서움을 여전히 모르고 있고 깨닫지 못하고 있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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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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