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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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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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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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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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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들, 루마니아 로얄 패밀리들의 집단 정체성
-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에 대해서는 루마니아 학계에서 많은 의견들과 각종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바사라브 왕가의 기원이 트란실바니아에 정착한 슬라브 계통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부 학자는 아시아에서 건너온 쿠만 종족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족주의 학자들은 고대 다키아 지배층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2012년에는 루마니아 문화부에서 바사라브 왕가의 인종적 기원을 찾기 위해 쿠르테아 데 아르제쉬(Curtea de Argeș)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블라디슬라브 1세(Vladislav I) 왕의 시신에서 DNA를 추출하여 검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바사라브 왕가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바사라브 왕가의 왕들 중 많은 수의 왕은 생을 마감한 후에 쿠르테아 데 아르제쉬의 수도원이나 코지아의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시조는 지금의 루마니아 남동부 지역 문테니아(Muntania)와 남서부 지역 올테니아(Oltenia)를 다스렸다. 바사라브 1세(재위 : 1310~1352)는 발라히아(Balahia, 영어로는 왈라키아) 또는 짜라 로므네아스커라고 불리는 공국을 건설한 후, 당시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루마니아 남동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다가 점차 헝가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를 독립된 공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다. 바사라브 1세는 1330년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포사다(Posada) 지역에서 헝가리의 왕 카를로 로베르트 1세의 침략군을 대파하고, 발라히아를 독립된 공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바사라브 1세의 지략이 크게 각광받았던 포사다 전투 이후에 루마니아 남부의 발라히아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동북쪽의 형제 공국인 몰도바도 헝가리의 간섭에서 점차 벗어나 독립된 공국의 기틀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는 바사라브 1세의 뒤를 이어 1600년대까지 발라히아 공국의 수많은 왕들을 배출했다. 몰도바 공국의 무샤트(Mushat) 왕가와는 잦은 정략 결혼을 통해 혈연 관계를 맺어 왔으며, 이를 통해 두 공국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서로 협력하면서 국난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바사라브 1세의 딸 테오도라(Theodora)는 불가리아의 이반 알렉산데르 왕과 결혼하여 제2 불가리아 제국의 외척 혈통이 되었다. 바사라브 1세의 아들인 니콜라에 알렉산드루(Nicolae Alexandru)의 장녀 엘리자베타(Elizabeta) 공주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오폴레(Opole)의 블라디슬라우스(Vladislaus) 왕과 결혼하였고, 작은 딸 안카(Anka)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쉬 5세 왕과 결혼하였다. 이후에도 발라히아의 바사라브 왕가는 유럽의 여러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현재 유럽 주요 왕실의 혈통에는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방식은 장자 상속이 아니라 국가 평의회 귀족들의 합의에 의한 선출 방식이었다. 왕이 낳은 모든 아들들은 적자이든 서자이든 상관없이 모두 왕실 혈통으로 받아들여졌고, 언제든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잠재적인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사실 발라히아 공국의 왕위 계승은 상황에 따라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어떤 때에는 군사력으로 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외국 강대국에게 조공을 약속하고 재가를 얻어 왕위를 보장받기도 하였다. 특히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한 1500년대 이후에 등극한 바사라브 왕가의 발라히아 왕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스만투르크 황제의 허가를 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대다수 왕들은 왕권 투쟁 과정에서 왕위 등극과 하야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추방되었던 왕이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등극하는 일도 있었고, 잠시 왕좌를 아들이나 형제에게 맡겨 놓았다가 얼마 뒤에 다시 찾아가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사라브 왕가의 왕들은 가계 도상에서 재위 순서로 나열하면 비슷한 왕의 이름이 적게는 두세 차례, 많게는 여섯 차례까지 반복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바사라브 왕가는 1400년대 중반 이후에 도네쉬티(Doneshiti) 왕가와 드라쿨레쉬티(Draculeshiti) 왕가로 분류되어 져서 서로 오랜 기간 동안 권력 투쟁을 벌였다. 두 왕가는 서로 상대방을 암살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는 헝가리, 오스만투르크, 폴란드, 러시아 등을 상대로 때로는 전쟁을 치르거나 화친을 하면서 중세 유럽 변방의 작은 공국인 발라히아를 수성해냈고, 지금의 루마니아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르체아 첼 버트른(Mircea cel Bătrân), 블라드 체페슈(Vlad Țepeș), 미하이 비테아줄(Mihai Viteazul) 등이 바사라브 왕가의 가장 대표적인 왕들이다. 바사라브 왕가의 마지막 왕은 미흐네아 3세(Mihnea III, 재위 : 1658~1659)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바사라브 왕가는 발라히아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유럽 여러 왕실과 혈통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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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들, 루마니아 로얄 패밀리들의 집단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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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우크라이나의 충돌 가능성이 높은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어떤 곳인가?
-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루마니아 중부와 북부, 헝가리 서부 지역의 척박한 산지로 나타나지만 비옥한 우크라이나 쩨르노젬 지대와 헝가리의 푸스타 초원을 연결하는 천혜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고고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자카르파티야 지역 주민들이 트라키아인과 켈트인의 영향을 받았고 스키타이계 유목민족들의 유골들이 출토되었으며, 빠르면 B.C 2세기 이후, 슬라브족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고트족, 훈족, 아바르 제국 등의 세력이 이 지역을 통과하여 로마 제국을 침공하면서 아시아계 기마유목민족들의 유럽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었다. 9세기 말엽에는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푸스타 초원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헝가리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푸스타 초원의 원주민들이 헝가리인과 서로 급속히 동화되었던 것과 달리 척박한 변방 지대였던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슬라브계와 라틴계 토착민, 그리고 이주해온 헝가리인 사이의 동화가 매우 늦었다. 게다가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 이후로는 쿠만족까지 정착하면서 자카르파티야는 다민족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인해 헝가리 왕국의 지배 하에서 헝가리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이 서로 뒤섞여 거주하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지역이 되었다. 헝가리 왕국은 이 지역을 1,000여 년 가까이 지배했으나 실질적인 지배력이 점차 약해져 15세기에는 슬라브계 토착 귀족들이 주로 통치했다. 중세 헝가리 왕국의 영토가 꽤 거대한 편이었고 몽골 제국의 침공 이후, 헝가리 자체가 쇠락하면서 힘의 공백이 생겨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헝가리로부터 독립된 지역이 되었다. 이후 헝가리 왕국이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패전함으로 인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 실질적으로 멸망했으며 헝가리인의 자치공화국인 에르데이 공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1699년에는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제국에 귀속된 이후에 헝가리인보다는 루신인과 현지 러시아인을 위시한 슬라브계 인종이 훨씬 더 많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분리주의자 사이에 맺어진 대타협이 성사된 이후, 운그바르(Ungvár)를 중심으로 하는 운그 주(Ung vármegye), 베레그사스(Beregszász)를 중심으로 하는 베레그 주(Bereg vármegye), 나지쇨뢰시(Nagyszőlős)를 중심으로 하는 우고차 주(Ugocsa vármegye), 마라마로시시게트(Máramarossziget)를 중심으로 하는 마라마로시 주(Máramaros vármegye)로 분리되어졌다. 하지만 이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 왕국은 공중 분해 당했다. 헝가리는 당시 패전으로 인해 72%의 영토를 잃어 전쟁 전 325,441km2에 달하던 헝가리의 영토는 93,073km2가 되었다. 헝가리는 64%의 인구를 잃어 2,090만 명에서 760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국경의 변화로 인해 1,070만 명의 헝가리인 중 31%인 330만 명이 헝가리 국경 외부에서 살게 되었는데, 헝가리 고유의 영토라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 민족 구성을 핑계로 루마니아 왕국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왕국 등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 지역 인구의 다수를 이루었던 루신인과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닌 체코슬로바키아와 협력하여 자치주를 구성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산하 자치주는 낙후되었던 자카르파티야에 급수 시설과 철도를 확충하였다. 지주들에게 몰려있던 토지를 소(小)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여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시절 자카르파티야에는 724개의 학교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는 소수 민족의 자치에 대해 매우 관대하였고, 그 중에서 540개는 우크라이나어(루신어), 130개는 헝가리어, 32개는 슬로바키아어로 교육을 진행했다. 이 외에도 소수의 루마니아어 및 독일어 학교와 1개의 유태인 학교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한적인 민족어 교육에 비해 크게 진일보한 정책으로 나타난다. 과거의 헝가리 왕국은 대타협으로 주권 대부분을 회복한 이후 급진적인 마자르화 정책을 시행하여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세르비아인 등의 소수민족들을 억압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이 훨씬 자유로웠다. 헝가리 왕국의 마자르화 정책에 크게 위협을 받은 크로아티아인들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요청하여 헝가리 왕국과의 타협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결성하여 헝가리인의 탄압으로부터 탈출하려 했을 정도였다. 이후 루신인의 자치구, 그리고 1일 동안의 존속한 독립 국가를 거쳐 1938년에 헝가리 왕국이 재점령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이 자카르파티야 지역을 재점령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이 지역에 러시아어로 카르파티아 산맥 건너편이라는 쟈까르빠티예(Закарпатье)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이 시기로 나타난다. 소련의 스탈린은 중부 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확장과 유사 시에 판노니아 평원으로 진격을 쉽게 하기 위해 카르파티아 산맥이라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경 및 장벽에도 불구하고 카르파티야 지역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이 지역은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면서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게 된다.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우크라이나인이 주류로 나타나고 있으나 오랜 기간 동안 헝가리 영토였던 만큼 헝가리인이나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이 거주 중에 있다. 약 15만 명 정도 되고 있다. 그 외에는 루신인, 슬로바키아인,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독일인, 집시, 루마니아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어가 공용어로 나타나지만, 소수민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헝가리어, 루신어, 슬로바키아어, 루마니아어 등의 언어도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대체적으로 우크라이나어의 비중이 높으나 베레호베(Берегово)와 같은 도시는 헝가리인이 다수를 점하고 있기에 헝가리어가 통하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베레호베 지역에는 우크라이나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 과거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영향력 하에 있던 지역이라 대부분의 도시들이 헝가리어, 독일어, 슬로바키아어 지명을 갖고 있는 실정이다.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헝가리와 우크라니아의 외교 갈등 원인이 되고 있는 지역이다.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 또는 헝가리인들의 거주 지역인만큼 대부분 주민들이 헝가리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있는데 2017년 우크라이나에서 시행된 ‘우크라이나 국어교육 강화법’으로 인해 중등교육기관에선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할 수 있도록 법령을 강화했기 때문에 헝가리 정부에서 이에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이 조치가 취소될 때까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 않겠다며 매우 강경하게 나오고 있는 입장이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공공연하게 트란스 카르파티아가 헝가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우크라이나는 이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최후방이 되어 우크라이나에서 유일하게 가장 안전한 주가 되었다. 전쟁 피해도 거의 없고 공습경보조차 울리지 않았을 정도로 러시아의 공습이 전무한 지역이다. 그러나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낙후된 농촌 지역이기 때문에 타격할 만한 곳이 거의 없고 우주호로드(Ужгород) 공항 정도에 불과한데, 이 공항의 활주로 끝이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슬로바키아와의 국경선에 면해 있기 때문에 폭격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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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우크라이나의 충돌 가능성이 높은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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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는 프랑스에 깊은 앙심을 품고 있다. 두로프는 프랑스 정보기관이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루마니아에 가서 프랑스의 대선 개입에 대해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2024년 11월 치러진 루마니아 대선은 미국 J. D. 밴스 부통령이 분명히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 루마니아 우파 세력을 대표하는 칼린 조르제스쿠(Călin Georgescu)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하자 헌법재판소가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을 이유로 선거 자체를 무효화했다. 당시 루마니아 정보국(SRI)은 약 25,000개의 텔레그램 계정이 투표일이 있기 15일 전부터 조르제스쿠 후보와 관련된 게시물을 폭발적으로 올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SRI은 이를 두고 러시아의 적극적인 하이브리드 공격으로 규정했으며 러시아가 결선 투표에도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EU 자신들이 원하지 않으면 뭐든 러시아 탓으로 돌릴 예정인듯 싶다. 칼린 조르제스쿠 후보를 낙마시키고 다시 치러진 1차 투표의 결과, 역시 루마니아 우파 세력 후보인 조르제 시미온(George Simion)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프랑스 등 전 EU는 비상이 걸렸다. 그의 상대는 친 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Nicușor Dan) 부쿠레슈티 시장이었다. 두로프가 프랑스의 선거 개입을 폭로한 것은 결선 투표 당일인 5월 18일이었다. 그는 그 날 텔레그램 채널에서 유럽 국가 중 한 나라가 루마니아 대선을 앞두고 시미온 후보를 지지하는 보수 성향 여론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텔레그램은 루마니아 사용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정치 채널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두로프는 국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바게트 이모티콘을 첨부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바게트는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로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민주주의 수호는 있을 수 없고, 선거에 개입하면서 타 국가의 선거 개입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표현의 자유와 공정한 선거는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으며 루마니아 국민들은 둘 다 누릴 자격이 있다고 적시했다. 그러자 프랑스 당국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외무부는 프랑스가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이 텔레그램과 X에 유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이러한 의혹을 단호히 부인하며 의혹을 재기한 사람이 넷상에서 책임있게 행동하고 루마니아 민주주의를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 또한 두로프를 여러 차례 만나 테러와 아동 포르노 위협을 예방하는 그의 책임을 강조했다며 루마니아 선거와 관련된 주장을 부인했다. 물론 루마니아 외무부도 두로프의 게시물을 캡처한 뒤 "Fake"라고 적었다. 그러나 두로프는 지난 5월 20일 SNS에서 프랑스 정보기관이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그들은 테러와 아동 포르노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아동 포르노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요 목적은 항상 지정학적인 문제를 두고 언급했었고,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 주 내용들이었다고 반박했다. 두로프는 2025년 봄, 니콜라 레르네르(Nicolas Lerner)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크리용 호텔에서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전에 보수 세력의 움직임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엄연히 국제 개입에 위한 선거 공작이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벨라루스, 이란에서 시위대를 차단한 적이 없으며, 유럽에서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하면서 시민들의 정치 발언에 대한 자유를 지키겠다 했ㄷ다. 결선 투표 결과, 친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 후보가 53.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론조사에서 앞섰던 시미온 후보는 46.40%의 득표에 그쳤다. 이에 시미온 후보는 당연히 반발했다. 결선 투표 이틀 뒤인 5월 20일 X를 통해 루마니아 헌법재판소에 선거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2024년 12월 선거가 취소된 것과 같은 이유로, 외부 개입이 입증됐으니 선거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두로프는 시미온의 성명을 공유하며 "루마니아 민주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증언하러 갈 준비가 되어 있다(I'm ready to go and testify if it helps Romanian democracy)."고 밝혔다. 그러나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5월 22일에 열린 시미온의 제소를 기각했다. 뒤이어 루마니아에서는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결선 결선 투표 며칠 전인 5월 14일에 루마니아를 방문해 정보국 관계자들과 만났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에 두로프는 다시 X에 다시 글을 올려 루마니아 선거 전에 텔레그램에서 보수적인 목소리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한 레르네르 대외정보총국 국장이 루마니아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일찌기 자신을 체포한 프랑스를 겨냥한 그의 폭로전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대해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러시아 정보국의 정보 제공 압력에 자신이 처음 만든 SNS 브콘닥테(VK)를 과감하게 버리고 조국인 러시아를 떠난 그의 반골 기질을 감안한다면, 프랑스 정보당국도 이에 대처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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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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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 아리아계는 인도유럽어족 중에 인도이란어파의 한 분파인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종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중앙아시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에서 기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넘고 인도 대륙에 정착한 또 다른 사카 계통 민족들의 후손으로, 청동기 시대 때 반농반목, 반유목민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다가 비옥한 장소를 찾으면 곡물을 파종하고 정착했으며,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수레를 타며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후손들로 여겨지는 오늘날 국가들은 주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몰디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도 대륙에 정착한 민족을 설명할 때 주로 아리아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여기에 누리스탄 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현 인도인과 인도-아리아인의 차이점에 견지한다면 전자는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인도 문화권 사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계 민족들은 피부가 밝고 코가 높으며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피부가 어둡고 비교적 코가 뭉툭하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밝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어두워진다. 실제로 아리아계 민족 중에 동쪽에 거주하는 오리야인, 벵골인, 로힝야 족은 드라비다 인처럼 피부색이 어두우며 서쪽에 거주하는 카슈미르 인, 펀자브인 은 이란인처럼 피부색이 밝은 편이다. 그리고 인도 동북부의 아삼 족이나 벵골 인들은 티베트 버마어파계 제 민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문다 족 같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유라시아 인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주로 인도 공화국에 대략 9억 1,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며 파키스탄엔 1억 7,000만 명, 방글라데시엔 1억 6,000만 명이 거주한다. 그 중에서 힌두스탄 인이 대략 3억 2,900명으로 중국 한족 다음으로 2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노동자는 보기 쉬워도 인도인들은 보기 좀 어려운데, 인도인들이 주로 진출하는 곳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언어적으로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유럽, 특히 영어가 공용어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 영국, 미국 권, 중남미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편이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인도 문화권과는 접점이 없고, 거리도 가깝지 않으니 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힌두교인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면 카스트를 잃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타난 선민사상의 일종일 뿐이다. 인도인들은 웬만한 브라만 카스트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힌두교의 가르침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동아시아로 잘 오지 않을 뿐이지, 애초에 해외에 진출한 인도인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규모로는 5,000만 명에 달하는 화교 다음으로 많다. 오늘날 이란계 민족은 이란어군 언어 모어 화자들을 보면 2022년 기준 파슈토어 구사자 약 6,000만 명, 페르시아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쿠르드어 구사자 약 3,600만~4,500만 명, 다리어 구사자 약 900~1,200만 명, 타지크어 구사자 약 800만 명, 루르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발루치어 구사자 약 3~500만 명, 길라크어 및 마잔데란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자자어 구사자 약 130만 명, 오세트어구사자 약 60만 명, 탈리시어 구사자 약 수십만 명, 타트어 구사자 약 수만 명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공용어, 파슈토어와 다리어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타지크어는 타지키스탄의 공용어이다. 인구수는 모어 화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좀 더 많아진다. 크게 파슈토어가 속해있는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동부 이란계 민족과 페르시아어가 속해있는 서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각 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인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가 동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이란인 중 북쪽에 있었던 분파가 스키타이계인 동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남쪽에 있었던 분파가 페르시아계인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원래 북쪽에 분포하던 동부 이란계 민족은 중세 이후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의 거주민이 이란계에서 투르크계로 대체되어 소멸하여 오늘날에는 동부 이란어계 민족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민족이 파슈툰 인이 된 것이다. 이란계 민족이란 표현은 학술적인 분류일 뿐 당사자들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인이나 발루치인 다수는 이란 계열이라는 표현이나 이란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이란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인들은 타지크 인들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않으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와 같은 반감들이 이란의 쿠르디스탄, 발루치스탄 분리주의 투쟁, 타지키스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혈사태와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란계 민족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범이란주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란 내에 이를 주장하는 쇼비니즘 정당인 Pan-Iranist Party가 있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는 시아파 신정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인도 뭄바이에 대규모로 살고 있는 파르시라는 이란계 인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구자라트 문자를 사용한다.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표적인 파르시 계통의 영국인인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많은 파르시들이 인도를 떠나 홍콩, 영국 등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섬에는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도 이주민 집단으로 정착했다.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의 페르시아 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프(남성형) / 바(여성형)라는 돌림 성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중 이란계 민족들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인이 아닌 파슈툰 계통 사리콜 인과 와키 인을 일컫는 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파키스탄 접경지경 타슈쿠르간 자치 현에 거주한다. 이란계 민족들은 고대에 유라시아 스텝 지대 서부와 중부에 걸쳐 널리 분포했으나, 서부 스텝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은 대부분 인구수가 적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계통 민족들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발칸반도에 살던 이란계 민족들은 B.C 4세기에 켈트족들에게 학살당하고 동화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훈족이 대두할 때 일부는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 시대에 게르만 족과 함께 이동하다 동화되었으며, 스텝 지대에 남은 인구는 6세기 이후 대부분 슬라브족이나 투르크족에 흡수되었다. 중앙아시아 스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과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계 민족들은 서기 6세기~15세기 투르크 민족들의 대 이주를 거치며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원래 이란계 인구가 많았던 데다 투르크화 되는 동안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페르시아는 이란계 고대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로써 이란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되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영어로는 Medes / 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Madai)였으며, 중심지는 엑바타나였다. <개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메대(Mede)라 불렸으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이란에서 현재 메디아 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지명으로 보면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진 국가였다. 메디아 인들은 이란 고원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원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 때 스키타이인의 침공을 당했지만, 퀴악사레스(Qiwaksares)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퀴악사레스는 국력을 일신하여 영토를 이란 고원 건너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일대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신(新) 바빌로니아와 함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정적으로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 일대에 있었던 서방의 강국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삼아 휴전했다. 이후 퀴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Astuiages)는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리디아와는 휴전 이후 점차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신(新) 바빌로니아는 신(新) 아시리아 멸망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방이었기 때문에 아스튀아게스 시대의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Pars)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Harpagos)까지 가담하면서 아스튀아게스는 패배하고 키루스 2세에게 직접 처형을 당한 뒤 공식적으로 메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 인과 파르스 인은 언어, 문화, 인종,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냥 메디아-페르시아 인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에 널리 퍼진 것도 메디아 왕국 시대의 일이다. 다만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물이나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실체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메디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한 것은 메디아의 수도로 여겨지는 엑바타나에 현대 도시인 하마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며 연구된 메디아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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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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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 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성사된 이후, 남은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이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끝낸 방법을 다시 사용하기에는 위험부담도 크고 이란-이스라엘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중동 전쟁에서 우선 우방인 이스라엘이 있고 확전을 원치 않는 걸프만의 수니파 왕정 국가들도 있으니 미국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이란에 대해서는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지만 핵 시설이 파괴됐는지는 미지수고 목적이었던 우라늄 고농축물이 파괴되었다는 확인 또한 하지 못했다. 사실 트럼프식 "보여주기 위한 쇼"로 마무리 된 미국의 작전은 생각보다 그 성과가 미미했다. 만약 핵 시설의 복구가 완료 된다면 트럼프의 이 작전은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키예프에 압력을 가해 전면 휴전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까지 무조건적인 휴전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이란처럼 폭격 전략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미국이 위험해질 공산이 크다. 그것은 바로 '핵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핵탄두 수는 러시아가 미국을 압도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트럼프에게 대(對)러시아에 대한 강경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미 바이든 정권 때 대러 강경책은 실패로 돌아간 바 있어 이는 쉽지 않는 선택이다. 그렇다고 모스크바가 정한 휴전 조건을 모두 들어줄 수도 없다. 이럴 경우, 동맹국들의 신뢰를 모두 잃고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만 하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트럼프가 중동 위기를 최단 시간 안에 종결지었다는 것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란 핵 협상에서 러시아가 어느 정도 역할에 참여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모스크바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는 점은 무시하기 힘들다. 푸틴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이끌어 내려는 트럼프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보다는 러시아의 입장을 최대한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매우 유력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이제 자신들에게 지원을 올인하게 됐다고 마냥 좋아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중동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것이 행운으로 여길만 하다.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12일 동안의 중동 전쟁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큰 내상을 안긴 셈이다. 미국이 앞으로 이스라엘과 중동 내 군사기지들의 방공망 강화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이란의 드론과 미사일 반격으로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최강의 방공시스템들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를 복구하고 새로운 방공시스템들을 강화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돈을 주고 미제 무기를 산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에 방공시스템 등 군사 장비를 제공할 여유가 없기 때문애 우크라이나의 향후 선택은 중동의 포화가 조기에 그쳤지만,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는 가운데 나토 정상회의가 24, 25일 양일간 열리고 있다. 가장 큰 안건은 방위비 분담이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릴 회의의 내용을 이미 결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방위비 분담" 이야기는 확정된 사항이다. 나토 회원국들은 방위비를 증액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이는 트럼프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이번 회의를 통해 이를 확정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타협안과 임시 방편적인 부분들이 불가피하게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번 정상회의는 무역과 러시아, 그리고 중동에서 심화하는 분쟁 문제를 둘러싼 여러 안건들로 인해 많은 나토 동맹국들 간의 의견 충돌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나토 회원국 중, 대러 강경책을 좋아하지 않는 헝가리, 슬로바키아, 터키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트럼프의 입장에 변수다. 여태까지 국제 문제에서 속 시원하게 해결된 일이 없는 상황이 트럼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란-이스라엘의 휴전을 성사시켰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휴전 약속을 깨고 가자지구를 선제 공격한 것처럼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먼저 깨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재 부패 혐의 등으로 핀치에 몰려 있는 네타냐후 입장에서는 어쩌면 전쟁을 통한 내부 문제를 외부로 환기시키는 것 때문에 어떤 행위를 벌일 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심지어 나토의 집단방위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첫 임기 중 처음으로 참석한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 동맹국들이 나토군에 대해 충분한 지출을 하지 않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며 질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 매우 일관된 입장을 고수해왔다.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은 트럼프와 절친인 인사다. 그는 나토에서 트럼프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조율하고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뤼터는 나토 정상회의는 3시간 동안만 진행되며, 트럼프의 요구로 인해 정상회의 공동성명은 5개 문단으로 축소시키는 등 왠만하면 짧고 간결한 측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이번 정상회의 시간이 짧아진 이유는 장시간의 긴 회의를 싫어하는 트럼프의 성향에 맞추고 그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뤼터가 일부러 스캐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논의 주제가 적은데다가 짧은 정상회의가 오히려 나토 회원국들 간의 의견 분열을 숨기는 것에 도움이 된다. 나토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커트 폴커는 일부 유럽 국가들이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비로 지출하라고 요구하는 트럼프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왜냐면 서유럽에 비해 경제력이 약한 동유럽 국가들에게 있어 그와 같은 비용들은 국가 예산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경우, 더더욱 쉽지 않다. 참고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나토 회원국 중 가장 1인당 GDP가 낮은 국가로 EU에서도 가장 가난한 국가로 꼽힌다. 현재 유럽은 여전히 나토 전체 군사비 지출의 30%만을 부담하고 있다. 커트 폴커는 유럽 회원국들 중, 가난한 회원국들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강요를 받은 것은 유감이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이미 국방비를 GDP의 5%까지 늘리고 있다. 대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러시아와 인접한 국가들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많은 나토 회원국들이 새로운 국방비를 목표치까지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발트 3국 중,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경우, 10년 전에 설정한 목표치의 2%도 채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설정한 뤼터의 타협 안은 동맹국들이 핵심 나토 국방비를 GDP의 3.5%까지 늘리고, 국방 관련 지출에 1.5%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방 관련 지출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런 타협 안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뤼터는 여기에 교량과 도로, 철도 건설과 같은 인프라 산업 비용도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정도 금액 가지고 인프라 구축까지 담당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새로운 지출 목표가 승인되더라도 일부 국가들, 아까 언급했던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의 경우, 2032년 또는 2035년까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의지가 거의 없을 수 있다. 물론 목표 달성 시기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대개 그동안 나토 회의에서 정해졌듯이 10년 단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는 이미 새로운 목표치가 불합리하고 비생산적이라고 언급하면서 불가하다는 입장을 비췄다.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는 영국이 언제까지 GDP의 3%를 국방비로 지출할지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말로는 언젠가 의회에서 이를 논할 것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토를 영국 국방 정책의 중심에 두겠다는 영국 정부 방침으로 볼 때, 스타머는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을 지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은 러시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나토 자체 방위 계획의 일환이다. 뤼터는 러시아가 나토 회원국을 5년 이내에 공격할 수 있다고 발언한 적 있다. 그런데 나토의 방위 계획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내일 26일이면 그 또한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뤼터 는 이미 나토에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밝힌 바 있는데 나토가 현재 방공 및 미사일 방어 체계를 400% 이상 증강하기 위해 수천 대의 장갑차와 탱크, 그리고 수백만 발의 포탄을 더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무기를 우크라이나에게 퍼줬기 때문이다.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회원국은 아직 나토에서 약속한 역량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스웨덴은 군대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 독일은 병력을 6만 명 이상 증원할 계획이다. 그런데 나토는 러시아가 침공할 경우 동맹이 동쪽 측면 지역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인 크리스 도나휴(Chris Donahue)는 최근 연설에서 러시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 인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영토를 방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도나휴는 동맹의 기존 역량을 살펴본 결과 동맹들의 역량이 러시아를 상대로 지역 방어로 맡기는 것은 허상이었음을 빨리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 전략대로 해야 하는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군 능력이 해당 지역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인 것이다. 그렇다고 미군을 투입할 수는 없다. 미군 투입은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시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기서도 자제될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가 참여했지만 대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유럽 측의 소득만 있을 뿐, 미국의 지원은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특히 트럼프가 이미 푸틴 대통령과 대화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에 나토의 직접적인 지원보다 EU 차원의 개별적인 지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현재 유럽과 미국을 분열시키는 가장 큰 쟁점이다. 커트 폴커는 트럼프 정권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 안보를 유럽 안보에 필수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럽 동맹국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한편 뤼터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슈는 제외됐다고 하였다. 이는 트럼프와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다. 나토 정상들은 새로운 대러시아 전략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이번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다. 젤렌스키는 정상들의 만찬에 초대됐지만, 북대서양 이사회(North Atlantic Council) 주요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을 예정에 있다. G7에 이어 이번에도 젤렌스키는 뭐 하나 성과를 얻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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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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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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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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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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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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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 1956년 2월, 모스크바 크레믈린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출석한 바 있던 당 정치국원인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Iosif Chișinevschi)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Miron Constantinescu)는 3월에 루마니아 노동자당 중앙 위원회에서 급격한 공업화와 집단 농업화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게오르기우데지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어 부쿠레슈티와 클루지나포카에서는 지식인 작가와 학생들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는 헝가리 봉기가 터진 직후였기 때문에 그 영향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게오르기우데지의 정책에 대한 반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부쿠레슈티와 많은 헝가리 인이 거주하는 트란실바니아의 주도(州都) 클루지나포카, 티미쇼아라 등지에서 헝가리에서 발생한 민주화 운동에서 사망한 봉기자들을 동정하며, 생활 수준 향상, 러시아어의 필수 교육 폐지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게 된다. 루마니아 공산 정부는 한편에서는 시위 지도자를 엄격하게 탄압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최저 임금을 인상시켰다. 그리고 시위대의 요구에 따라 콘스탄티네스쿠를 교육장관으로 임명하는 등, 민주화 시위에 대한 무마 정책을 실시했다. 루마니아에서 헝가리 봉기의 영향력이 크게 확대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은 부분적인 양보 정책 이 외에도 전통적으로 좌익 지식인층이 소수였다는 점, 과거의 숙청 규모가 헝가리에서만큼 크지 않았다는 점, 경제 면에서의 완화 정책이 부분적으로 지속되었다는 점, 그리고 정치적인 면에서 당의 통제망이 보다 철저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이상의 동요 가능성으로부터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을 구해낸 것은 당시 동유럽 전체에 강하게 묶여 있던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입된 국가들이 자국의 정권이 붕괴되지 않기 위해 서로 연대를 취하고 있었던 분위기 때문이었다. 1956년 6월, 공산당 중앙 위원회에서는 이나 파우케르와 바실레 루카가 루마니아의 개인을 숭배하는 풍조를 만들었다는 비판이 나왔으며, 그와 같은 비판을 조장했다고 하는 이유에서 이오시프 키시네브스키와 미론 콘스탄티네스쿠가 해임되었기 때문에 극단적인 자유화 운동은 결국 일어나지 않았다. 1958년 11월의 당 중앙 위원회는 제2차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의 최종 연한을 마무리 하고, 1960년부터 새로운 6개년 계획에 착수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 이후 1960년 6월의 제6차 당 대회에서 계획을 채택했다. 이와 같은 새로운 6개년 계획은 도나우 강 삼각주와 연결되는 갈라치 지역에 제철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면서 연간 성장 목표 13%, 도나우 일대에서 가장 생산성이 극대화 된 철강이라는 대규모의 공업화를 노렸다. 당시만 해도 동유럽에서 자원 부국이었던 루마니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야심적인 부분이 되었으며 동유럽에서 비교적 넓은 국토를 가졌기에 경제를 이와 같이 급속도로 신장시키는 것이 가능했다 본 것이다. 역시 1958년 5월에는 루마니아에서 소련군이 철수하는 계획들이 발표되면서 어느 정도 소련으로 부터 자유화 된 현상을 맞이하게 된다. 원래 소련군은 헝가리와 루마니아에 관해서 1947년 파리 강화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소련군의 병참선 확보를 위해서 주둔을 인정받은 것이었다. 그렇기에 이들은 루마니아에 대한 점령군으로써 행사하기 위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헝가리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자 루마니아의 소련군은 루마니아 내 민주화 운동 발생을 염려하여 진압군으로 그 목적이 변경되어 있었다. 더불어 1955년 오스트리아와 국가 조약을 체결한 후 그 주둔의 구실은 소멸되었기에 이들은 오스트리아를 떠나 헝가리와 루마니아로 철군을 완료한 상태였었다. 헝가리 민주화 봉기 후 소련은 1956년 12월의 폴란드, 1957년 3월의 동독, 1957년 4월의 루마니아, 1957년 5월의 헝가리와 주둔군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루마니아만이 크레믈린 당 중앙회의 때마다 이 문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언급한 끝에 대대적인 교섭이 시작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철수를 실현시켰고, 그 이후 루마니아의 대외 관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즉, 루마니아는 동유럽에서 유고슬라비아 다음으로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소련으로부터 벗어났던 독자적인 외교, 경제적 노선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1958년 이후 루마니아의 독자적 공업화 노선은 앞서 언급한 대로 1960년대에 들어 코메콘(COMECON)의 통합 계획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된다. 코메콘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국은 서유럽 국가들에 대한 재건과 원조 기획인 마셜 플랜을 발표하였는데 소련은 여기에 자극을 받아 같은 해에 동구권 국가들의 경제 협력 강화를 도모하는 몰로토프 플랜을 입안하였고, 이것이 1949년 코메콘 창설로 이어졌다. 코메콘은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상호원조회의를 의미하며 국제경제협력기구로 알려졌다. 이에 대한 통합 논의는 1961년 소련의 제22차 볼셰비키 당 대회 후에 논의되어 조금씩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다. 당 대회 이후, 게오르기우데지 정권은 흐루시초프 노선으로 갈아타면서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대해 비판을 행하고, 모든 도로, 공원에서 스탈린의 이름을 철폐했다. 1962년 3월에 부쿠레슈티에 있던 거대한 스탈린 상을 철거하면서 개인숭배 자체가 반동이라는 사상을 주입시켰다. 동시에 게오르기우데지는 1963년에 러시아어 필수 교육을 폐지했으며 러시아 언어 · 문학 대학을 격하시키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소련에게 조금씩 벗어나기 위한 정책들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루마니아가 나치 독일에게 해방되는 것에 있어 소련군의 역할을 강조한 역사서를 수정했으며 루마니아 공산당이 소련 볼셰비키를 도와 어떻게 나치 독일을 격파했는지 그 역할에 대해 강조하는 등 교묘하게 탈소련화를 실시했다. 이와 같은 활동들을 배경으로 하여 1963년 3월의 당 확대 중앙 위원회는 코메콘의 공동 경제 국가 기관을 창설하는 계획에 대해 반대하는 결정을 했고, 각지에서는 이 결정을 지지하는 당 집회가 소집되었다. 1964년 4월에는 공산당에 의해 국제 공산주의 운동 및 노동 운동의 문제에 관한 루마니아 노동자당의 입장에 관한 성명이 발표되자, 루마니아인들은 각국의 주권을 초국가적 기관에 이양하려는 것에 크게 반발하였는데, 결국 이는 사회주의 국가 간의 관계를 기초하는 제원칙에 따르면 완전한 평등된, 국가적 주권과 이익의 존중, 상호 이익 및 동지적 협조라는 루마니아 만의 정치, 사회적 입장이단독으로 표명되었다. 루마니아 지도부는 야심적인 공업화를 수행하는 무기로써 과거의 전통에서 민족주의를 이용하는 방법을 선택하면서 소련을 점차 멀리하는 양상을 띄게 된다. 1963년에는 유명한 공개 논쟁에서 새로이 나타난 중국과 소련의 대립에 대해서도 1964년 3월에 대표단을 중국에 파견시키는 등 중국과 소련 간의 화해와 논쟁 중지를 위해 적극 중재했다. 1963년 4월에 중국과 통상 협정을 맺음으로써 루마니아는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유럽의 공산권 국가들 중 그 해에 대 중국 무역이 증가한 유일한 국가가 되었다. 이후에 알바니아와 관계가 개선되어, 1962년 초에 소련을 모방해 한 때 철수한 주 티라나 루마니아 대사가 1963년 3월에 다시 부임하게 됨에 따라 루마니아와 알바니아의 양국 간에 통상 협정이 맺어지게 된다. 한편 1964년 5월에 게오르게 가스톤마린(Gheorghe Gaston-Marin)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의 루마니아 사절단이 최초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고, 7월에 이온 게오르게 마우레르(Ion Gheorghe Maurer) 총리가 프랑스를 방문했다. 이후 외교 통상면에서 서방과 단절했던 루마니아는 무려 30년 만에 서방 자유 진영 국가들과의 관계도 급속히 긴밀화되었다. 이를 통하여 서서히 루마니아의 다각 외교가 개시되었고 이는 차우셰스쿠라는 세기적 독재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선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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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헝가리 민주화 운동을 계기로 탈스탈린주의를 실행하는 루마니아와 공산정권 치하에서의 국제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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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들, 루마니아 로얄 패밀리들의 집단 정체성
-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에 대해서는 루마니아 학계에서 많은 의견들과 각종 견해들이 나타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바사라브 왕가의 기원이 트란실바니아에 정착한 슬라브 계통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부 학자는 아시아에서 건너온 쿠만 종족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민족주의 학자들은 고대 다키아 지배층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강하다. 2012년에는 루마니아 문화부에서 바사라브 왕가의 인종적 기원을 찾기 위해 쿠르테아 데 아르제쉬(Curtea de Argeș) 수도원에 안치되었던 블라디슬라브 1세(Vladislav I) 왕의 시신에서 DNA를 추출하여 검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바사라브 왕가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바사라브 왕가의 왕들 중 많은 수의 왕은 생을 마감한 후에 쿠르테아 데 아르제쉬의 수도원이나 코지아의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시조는 지금의 루마니아 남동부 지역 문테니아(Muntania)와 남서부 지역 올테니아(Oltenia)를 다스렸다. 바사라브 1세(재위 : 1310~1352)는 발라히아(Balahia, 영어로는 왈라키아) 또는 짜라 로므네아스커라고 불리는 공국을 건설한 후, 당시 헝가리의 지배하에 있던 루마니아 남동부 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다가 점차 헝가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자신이 다스리는 영토를 독립된 공국의 지위로 올려 놓았다. 바사라브 1세는 1330년 정확한 위치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포사다(Posada) 지역에서 헝가리의 왕 카를로 로베르트 1세의 침략군을 대파하고, 발라히아를 독립된 공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바사라브 1세의 지략이 크게 각광받았던 포사다 전투 이후에 루마니아 남부의 발라히아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동북쪽의 형제 공국인 몰도바도 헝가리의 간섭에서 점차 벗어나 독립된 공국의 기틀을 닦을 수 있게 되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는 바사라브 1세의 뒤를 이어 1600년대까지 발라히아 공국의 수많은 왕들을 배출했다. 몰도바 공국의 무샤트(Mushat) 왕가와는 잦은 정략 결혼을 통해 혈연 관계를 맺어 왔으며, 이를 통해 두 공국은 국가의 위기 때마다 서로 협력하면서 국난을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바사라브 1세의 딸 테오도라(Theodora)는 불가리아의 이반 알렉산데르 왕과 결혼하여 제2 불가리아 제국의 외척 혈통이 되었다. 바사라브 1세의 아들인 니콜라에 알렉산드루(Nicolae Alexandru)의 장녀 엘리자베타(Elizabeta) 공주는 폴란드 야기에우워 왕조의 오폴레(Opole)의 블라디슬라우스(Vladislaus) 왕과 결혼하였고, 작은 딸 안카(Anka)는 세르비아의 스테판 우로쉬 5세 왕과 결혼하였다. 이후에도 발라히아의 바사라브 왕가는 유럽의 여러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어 왔기 때문에, 현재 유럽 주요 왕실의 혈통에는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이 섞여 있다고 할 수 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전통적인 왕위 계승 방식은 장자 상속이 아니라 국가 평의회 귀족들의 합의에 의한 선출 방식이었다. 왕이 낳은 모든 아들들은 적자이든 서자이든 상관없이 모두 왕실 혈통으로 받아들여졌고, 언제든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잠재적인 자격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사실 발라히아 공국의 왕위 계승은 상황에 따라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이게 된다. 어떤 때에는 군사력으로 왕권을 장악하기도 하였고, 어떤 때에는 외국 강대국에게 조공을 약속하고 재가를 얻어 왕위를 보장받기도 하였다. 특히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반도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한 1500년대 이후에 등극한 바사라브 왕가의 발라히아 왕들 중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모두 오스만투르크 황제의 허가를 받고 난 후에야 비로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대다수 왕들은 왕권 투쟁 과정에서 왕위 등극과 하야를 여러 차례 반복하기도 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추방되었던 왕이 불과 몇 달 만에 다시 등극하는 일도 있었고, 잠시 왕좌를 아들이나 형제에게 맡겨 놓았다가 얼마 뒤에 다시 찾아가는 일도 빈번하게 발생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사라브 왕가의 왕들은 가계 도상에서 재위 순서로 나열하면 비슷한 왕의 이름이 적게는 두세 차례, 많게는 여섯 차례까지 반복되어 등장하기도 한다. 바사라브 왕가는 1400년대 중반 이후에 도네쉬티(Doneshiti) 왕가와 드라쿨레쉬티(Draculeshiti) 왕가로 분류되어 져서 서로 오랜 기간 동안 권력 투쟁을 벌였다. 두 왕가는 서로 상대방을 암살하거나 상해를 입히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하면서까지 서로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였다. 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는 헝가리, 오스만투르크, 폴란드, 러시아 등을 상대로 때로는 전쟁을 치르거나 화친을 하면서 중세 유럽 변방의 작은 공국인 발라히아를 수성해냈고, 지금의 루마니아가 탄생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게 된다. 루마니아 국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미르체아 첼 버트른(Mircea cel Bătrân), 블라드 체페슈(Vlad Țepeș), 미하이 비테아줄(Mihai Viteazul) 등이 바사라브 왕가의 가장 대표적인 왕들이다. 바사라브 왕가의 마지막 왕은 미흐네아 3세(Mihnea III, 재위 : 1658~1659)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바사라브 왕가는 발라히아의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유럽 여러 왕실과 혈통을 나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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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바사라브 왕가의 혈통들, 루마니아 로얄 패밀리들의 집단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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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우크라이나의 충돌 가능성이 높은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어떤 곳인가?
-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루마니아 중부와 북부, 헝가리 서부 지역의 척박한 산지로 나타나지만 비옥한 우크라이나 쩨르노젬 지대와 헝가리의 푸스타 초원을 연결하는 천혜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고고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자카르파티야 지역 주민들이 트라키아인과 켈트인의 영향을 받았고 스키타이계 유목민족들의 유골들이 출토되었으며, 빠르면 B.C 2세기 이후, 슬라브족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고트족, 훈족, 아바르 제국 등의 세력이 이 지역을 통과하여 로마 제국을 침공하면서 아시아계 기마유목민족들의 유럽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었다. 9세기 말엽에는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푸스타 초원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헝가리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푸스타 초원의 원주민들이 헝가리인과 서로 급속히 동화되었던 것과 달리 척박한 변방 지대였던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슬라브계와 라틴계 토착민, 그리고 이주해온 헝가리인 사이의 동화가 매우 늦었다. 게다가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 이후로는 쿠만족까지 정착하면서 자카르파티야는 다민족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그 결과로 인해 헝가리 왕국의 지배 하에서 헝가리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이 서로 뒤섞여 거주하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지역이 되었다. 헝가리 왕국은 이 지역을 1,000여 년 가까이 지배했으나 실질적인 지배력이 점차 약해져 15세기에는 슬라브계 토착 귀족들이 주로 통치했다. 중세 헝가리 왕국의 영토가 꽤 거대한 편이었고 몽골 제국의 침공 이후, 헝가리 자체가 쇠락하면서 힘의 공백이 생겨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헝가리로부터 독립된 지역이 되었다. 이후 헝가리 왕국이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패전함으로 인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 실질적으로 멸망했으며 헝가리인의 자치공화국인 에르데이 공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1699년에는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제국에 귀속된 이후에 헝가리인보다는 루신인과 현지 러시아인을 위시한 슬라브계 인종이 훨씬 더 많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분리주의자 사이에 맺어진 대타협이 성사된 이후, 운그바르(Ungvár)를 중심으로 하는 운그 주(Ung vármegye), 베레그사스(Beregszász)를 중심으로 하는 베레그 주(Bereg vármegye), 나지쇨뢰시(Nagyszőlős)를 중심으로 하는 우고차 주(Ugocsa vármegye), 마라마로시시게트(Máramarossziget)를 중심으로 하는 마라마로시 주(Máramaros vármegye)로 분리되어졌다. 하지만 이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 왕국은 공중 분해 당했다. 헝가리는 당시 패전으로 인해 72%의 영토를 잃어 전쟁 전 325,441km2에 달하던 헝가리의 영토는 93,073km2가 되었다. 헝가리는 64%의 인구를 잃어 2,090만 명에서 760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국경의 변화로 인해 1,070만 명의 헝가리인 중 31%인 330만 명이 헝가리 국경 외부에서 살게 되었는데, 헝가리 고유의 영토라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 민족 구성을 핑계로 루마니아 왕국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왕국 등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 지역 인구의 다수를 이루었던 루신인과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닌 체코슬로바키아와 협력하여 자치주를 구성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산하 자치주는 낙후되었던 자카르파티야에 급수 시설과 철도를 확충하였다. 지주들에게 몰려있던 토지를 소(小)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여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시절 자카르파티야에는 724개의 학교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는 소수 민족의 자치에 대해 매우 관대하였고, 그 중에서 540개는 우크라이나어(루신어), 130개는 헝가리어, 32개는 슬로바키아어로 교육을 진행했다. 이 외에도 소수의 루마니아어 및 독일어 학교와 1개의 유태인 학교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한적인 민족어 교육에 비해 크게 진일보한 정책으로 나타난다. 과거의 헝가리 왕국은 대타협으로 주권 대부분을 회복한 이후 급진적인 마자르화 정책을 시행하여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세르비아인 등의 소수민족들을 억압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이 훨씬 자유로웠다. 헝가리 왕국의 마자르화 정책에 크게 위협을 받은 크로아티아인들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요청하여 헝가리 왕국과의 타협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결성하여 헝가리인의 탄압으로부터 탈출하려 했을 정도였다. 이후 루신인의 자치구, 그리고 1일 동안의 존속한 독립 국가를 거쳐 1938년에 헝가리 왕국이 재점령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이 자카르파티야 지역을 재점령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이 지역에 러시아어로 카르파티아 산맥 건너편이라는 쟈까르빠티예(Закарпатье)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이 시기로 나타난다. 소련의 스탈린은 중부 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확장과 유사 시에 판노니아 평원으로 진격을 쉽게 하기 위해 카르파티아 산맥이라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경 및 장벽에도 불구하고 카르파티야 지역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이 지역은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면서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게 된다.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우크라이나인이 주류로 나타나고 있으나 오랜 기간 동안 헝가리 영토였던 만큼 헝가리인이나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이 거주 중에 있다. 약 15만 명 정도 되고 있다. 그 외에는 루신인, 슬로바키아인,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독일인, 집시, 루마니아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어가 공용어로 나타나지만, 소수민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헝가리어, 루신어, 슬로바키아어, 루마니아어 등의 언어도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대체적으로 우크라이나어의 비중이 높으나 베레호베(Берегово)와 같은 도시는 헝가리인이 다수를 점하고 있기에 헝가리어가 통하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베레호베 지역에는 우크라이나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 과거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영향력 하에 있던 지역이라 대부분의 도시들이 헝가리어, 독일어, 슬로바키아어 지명을 갖고 있는 실정이다.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헝가리와 우크라니아의 외교 갈등 원인이 되고 있는 지역이다.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 또는 헝가리인들의 거주 지역인만큼 대부분 주민들이 헝가리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있는데 2017년 우크라이나에서 시행된 ‘우크라이나 국어교육 강화법’으로 인해 중등교육기관에선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할 수 있도록 법령을 강화했기 때문에 헝가리 정부에서 이에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이 조치가 취소될 때까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 않겠다며 매우 강경하게 나오고 있는 입장이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공공연하게 트란스 카르파티아가 헝가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우크라이나는 이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최후방이 되어 우크라이나에서 유일하게 가장 안전한 주가 되었다. 전쟁 피해도 거의 없고 공습경보조차 울리지 않았을 정도로 러시아의 공습이 전무한 지역이다. 그러나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낙후된 농촌 지역이기 때문에 타격할 만한 곳이 거의 없고 우주호로드(Ужгород) 공항 정도에 불과한데, 이 공항의 활주로 끝이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슬로바키아와의 국경선에 면해 있기 때문에 폭격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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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우크라이나의 충돌 가능성이 높은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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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 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는 프랑스에 깊은 앙심을 품고 있다. 두로프는 프랑스 정보기관이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루마니아에 가서 프랑스의 대선 개입에 대해 증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2024년 11월 치러진 루마니아 대선은 미국 J. D. 밴스 부통령이 분명히 문제가 있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현재 루마니아 우파 세력을 대표하는 칼린 조르제스쿠(Călin Georgescu)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승리하자 헌법재판소가 러시아의 선거 개입 의혹을 이유로 선거 자체를 무효화했다. 당시 루마니아 정보국(SRI)은 약 25,000개의 텔레그램 계정이 투표일이 있기 15일 전부터 조르제스쿠 후보와 관련된 게시물을 폭발적으로 올렸다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SRI은 이를 두고 러시아의 적극적인 하이브리드 공격으로 규정했으며 러시아가 결선 투표에도 개입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제 EU 자신들이 원하지 않으면 뭐든 러시아 탓으로 돌릴 예정인듯 싶다. 칼린 조르제스쿠 후보를 낙마시키고 다시 치러진 1차 투표의 결과, 역시 루마니아 우파 세력 후보인 조르제 시미온(George Simion)이 1위로 결선투표에 진출하자, 프랑스 등 전 EU는 비상이 걸렸다. 그의 상대는 친 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Nicușor Dan) 부쿠레슈티 시장이었다. 두로프가 프랑스의 선거 개입을 폭로한 것은 결선 투표 당일인 5월 18일이었다. 그는 그 날 텔레그램 채널에서 유럽 국가 중 한 나라가 루마니아 대선을 앞두고 시미온 후보를 지지하는 보수 성향 여론을 제압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이러한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텔레그램은 루마니아 사용자의 자유를 제한하거나 정치 채널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밝히기도 했다. 두로프는 국가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바게트 이모티콘을 첨부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바게트는 프랑스를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로프는 민주주의를 파괴하면서 민주주의 수호는 있을 수 없고, 선거에 개입하면서 타 국가의 선거 개입을 막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 표현의 자유와 공정한 선거는 하나만 선택할 수는 없으며 루마니아 국민들은 둘 다 누릴 자격이 있다고 적시했다. 그러자 프랑스 당국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프랑스 외무부는 프랑스가 루마니아 대선에 개입했다는 근거 없는 의혹이 텔레그램과 X에 유포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프랑스는 이러한 의혹을 단호히 부인하며 의혹을 재기한 사람이 넷상에서 책임있게 행동하고 루마니아 민주주의를 존중할 것을 촉구한다고 했다. 프랑스 대외안보총국(DGSE) 또한 두로프를 여러 차례 만나 테러와 아동 포르노 위협을 예방하는 그의 책임을 강조했다며 루마니아 선거와 관련된 주장을 부인했다. 물론 루마니아 외무부도 두로프의 게시물을 캡처한 뒤 "Fake"라고 적었다. 그러나 두로프는 지난 5월 20일 SNS에서 프랑스 정보기관이 자신을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며 그들은 테러와 아동 포르노에 맞서기 위한 것이었다고 했지만, 아동 포르노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이야기의 주요 목적은 항상 지정학적인 문제를 두고 언급했었고,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같은 나라들이 주 내용들이었다고 반박했다. 두로프는 2025년 봄, 니콜라 레르네르(Nicolas Lerner)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크리용 호텔에서 루마니아 대통령 선거 전에 보수 세력의 움직임을 차단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이는 엄연히 국제 개입에 위한 선거 공작이다. 텔레그램은 러시아, 벨라루스, 이란에서 시위대를 차단한 적이 없으며, 유럽에서도 차단하지 않을 것이라 강조하면서 시민들의 정치 발언에 대한 자유를 지키겠다 했ㄷ다. 결선 투표 결과, 친유럽 성향의 니쿠쇼르 단 후보가 53.6%의 득표로 대통령에 당선됐다. 여론조사에서 앞섰던 시미온 후보는 46.40%의 득표에 그쳤다. 이에 시미온 후보는 당연히 반발했다. 결선 투표 이틀 뒤인 5월 20일 X를 통해 루마니아 헌법재판소에 선거를 무효화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 2024년 12월 선거가 취소된 것과 같은 이유로, 외부 개입이 입증됐으니 선거를 취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전 세계의 보수주의자들과 연합해 투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두로프는 시미온의 성명을 공유하며 "루마니아 민주주의에 도움이 된다면 증언하러 갈 준비가 되어 있다(I'm ready to go and testify if it helps Romanian democracy)."고 밝혔다. 그러나 루마니아 헌법재판소는 5월 22일에 열린 시미온의 제소를 기각했다. 뒤이어 루마니아에서는 프랑스 대외안보총국 국장이 결선 결선 투표 며칠 전인 5월 14일에 루마니아를 방문해 정보국 관계자들과 만났다는 폭로가 나왔다. 이에 두로프는 다시 X에 다시 글을 올려 루마니아 선거 전에 텔레그램에서 보수적인 목소리를 제거해달라고 요청한 레르네르 대외정보총국 국장이 루마니아를 방문한 것으로 확인됐다고 했다. 일찌기 자신을 체포한 프랑스를 겨냥한 그의 폭로전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에 대해 짐작하기 어렵다. 다만, 러시아 정보국의 정보 제공 압력에 자신이 처음 만든 SNS 브콘닥테(VK)를 과감하게 버리고 조국인 러시아를 떠난 그의 반골 기질을 감안한다면, 프랑스 정보당국도 이에 대처하기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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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그램 창업자 파벨 두로프(Павел Дуров), 루마니아 대선에 프랑스 정보국의 개입으로 인한 부정선거를 폭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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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 아리아계는 인도유럽어족 중에 인도이란어파의 한 분파인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종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중앙아시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에서 기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넘고 인도 대륙에 정착한 또 다른 사카 계통 민족들의 후손으로, 청동기 시대 때 반농반목, 반유목민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다가 비옥한 장소를 찾으면 곡물을 파종하고 정착했으며,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수레를 타며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후손들로 여겨지는 오늘날 국가들은 주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몰디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도 대륙에 정착한 민족을 설명할 때 주로 아리아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여기에 누리스탄 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현 인도인과 인도-아리아인의 차이점에 견지한다면 전자는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인도 문화권 사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계 민족들은 피부가 밝고 코가 높으며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피부가 어둡고 비교적 코가 뭉툭하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밝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어두워진다. 실제로 아리아계 민족 중에 동쪽에 거주하는 오리야인, 벵골인, 로힝야 족은 드라비다 인처럼 피부색이 어두우며 서쪽에 거주하는 카슈미르 인, 펀자브인 은 이란인처럼 피부색이 밝은 편이다. 그리고 인도 동북부의 아삼 족이나 벵골 인들은 티베트 버마어파계 제 민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문다 족 같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유라시아 인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주로 인도 공화국에 대략 9억 1,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며 파키스탄엔 1억 7,000만 명, 방글라데시엔 1억 6,000만 명이 거주한다. 그 중에서 힌두스탄 인이 대략 3억 2,900명으로 중국 한족 다음으로 2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노동자는 보기 쉬워도 인도인들은 보기 좀 어려운데, 인도인들이 주로 진출하는 곳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언어적으로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유럽, 특히 영어가 공용어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 영국, 미국 권, 중남미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편이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인도 문화권과는 접점이 없고, 거리도 가깝지 않으니 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힌두교인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면 카스트를 잃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타난 선민사상의 일종일 뿐이다. 인도인들은 웬만한 브라만 카스트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힌두교의 가르침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동아시아로 잘 오지 않을 뿐이지, 애초에 해외에 진출한 인도인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규모로는 5,000만 명에 달하는 화교 다음으로 많다. 오늘날 이란계 민족은 이란어군 언어 모어 화자들을 보면 2022년 기준 파슈토어 구사자 약 6,000만 명, 페르시아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쿠르드어 구사자 약 3,600만~4,500만 명, 다리어 구사자 약 900~1,200만 명, 타지크어 구사자 약 800만 명, 루르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발루치어 구사자 약 3~500만 명, 길라크어 및 마잔데란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자자어 구사자 약 130만 명, 오세트어구사자 약 60만 명, 탈리시어 구사자 약 수십만 명, 타트어 구사자 약 수만 명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공용어, 파슈토어와 다리어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타지크어는 타지키스탄의 공용어이다. 인구수는 모어 화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좀 더 많아진다. 크게 파슈토어가 속해있는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동부 이란계 민족과 페르시아어가 속해있는 서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각 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인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가 동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이란인 중 북쪽에 있었던 분파가 스키타이계인 동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남쪽에 있었던 분파가 페르시아계인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원래 북쪽에 분포하던 동부 이란계 민족은 중세 이후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의 거주민이 이란계에서 투르크계로 대체되어 소멸하여 오늘날에는 동부 이란어계 민족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민족이 파슈툰 인이 된 것이다. 이란계 민족이란 표현은 학술적인 분류일 뿐 당사자들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인이나 발루치인 다수는 이란 계열이라는 표현이나 이란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이란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인들은 타지크 인들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않으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와 같은 반감들이 이란의 쿠르디스탄, 발루치스탄 분리주의 투쟁, 타지키스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혈사태와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란계 민족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범이란주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란 내에 이를 주장하는 쇼비니즘 정당인 Pan-Iranist Party가 있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는 시아파 신정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인도 뭄바이에 대규모로 살고 있는 파르시라는 이란계 인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구자라트 문자를 사용한다.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표적인 파르시 계통의 영국인인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많은 파르시들이 인도를 떠나 홍콩, 영국 등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섬에는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도 이주민 집단으로 정착했다.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의 페르시아 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프(남성형) / 바(여성형)라는 돌림 성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중 이란계 민족들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인이 아닌 파슈툰 계통 사리콜 인과 와키 인을 일컫는 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파키스탄 접경지경 타슈쿠르간 자치 현에 거주한다. 이란계 민족들은 고대에 유라시아 스텝 지대 서부와 중부에 걸쳐 널리 분포했으나, 서부 스텝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은 대부분 인구수가 적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계통 민족들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발칸반도에 살던 이란계 민족들은 B.C 4세기에 켈트족들에게 학살당하고 동화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훈족이 대두할 때 일부는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 시대에 게르만 족과 함께 이동하다 동화되었으며, 스텝 지대에 남은 인구는 6세기 이후 대부분 슬라브족이나 투르크족에 흡수되었다. 중앙아시아 스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과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계 민족들은 서기 6세기~15세기 투르크 민족들의 대 이주를 거치며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원래 이란계 인구가 많았던 데다 투르크화 되는 동안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페르시아는 이란계 고대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로써 이란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되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영어로는 Medes / 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Madai)였으며, 중심지는 엑바타나였다. <개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메대(Mede)라 불렸으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이란에서 현재 메디아 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지명으로 보면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진 국가였다. 메디아 인들은 이란 고원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원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 때 스키타이인의 침공을 당했지만, 퀴악사레스(Qiwaksares)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퀴악사레스는 국력을 일신하여 영토를 이란 고원 건너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일대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신(新) 바빌로니아와 함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정적으로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 일대에 있었던 서방의 강국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삼아 휴전했다. 이후 퀴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Astuiages)는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리디아와는 휴전 이후 점차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신(新) 바빌로니아는 신(新) 아시리아 멸망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방이었기 때문에 아스튀아게스 시대의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Pars)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Harpagos)까지 가담하면서 아스튀아게스는 패배하고 키루스 2세에게 직접 처형을 당한 뒤 공식적으로 메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 인과 파르스 인은 언어, 문화, 인종,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냥 메디아-페르시아 인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에 널리 퍼진 것도 메디아 왕국 시대의 일이다. 다만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물이나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실체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메디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한 것은 메디아의 수도로 여겨지는 엑바타나에 현대 도시인 하마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며 연구된 메디아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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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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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 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성사된 이후, 남은 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선이다. 이란-이스라엘 전쟁을 끝낸 방법을 다시 사용하기에는 위험부담도 크고 이란-이스라엘과는 상황이 크게 다르다. 중동 전쟁에서 우선 우방인 이스라엘이 있고 확전을 원치 않는 걸프만의 수니파 왕정 국가들도 있으니 미국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우선 이란에 대해서는 무차별 폭격을 감행했지만 핵 시설이 파괴됐는지는 미지수고 목적이었던 우라늄 고농축물이 파괴되었다는 확인 또한 하지 못했다. 사실 트럼프식 "보여주기 위한 쇼"로 마무리 된 미국의 작전은 생각보다 그 성과가 미미했다. 만약 핵 시설의 복구가 완료 된다면 트럼프의 이 작전은 실패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미국은 키예프에 압력을 가해 전면 휴전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아직까지 무조건적인 휴전에 동의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이란처럼 폭격 전략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미국이 위험해질 공산이 크다. 그것은 바로 '핵 전쟁'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핵탄두 수는 러시아가 미국을 압도하는 것이 현실이다. 미국의 네오콘들은 트럼프에게 대(對)러시아에 대한 강경책을 요구하고 있지만, 이미 바이든 정권 때 대러 강경책은 실패로 돌아간 바 있어 이는 쉽지 않는 선택이다. 그렇다고 모스크바가 정한 휴전 조건을 모두 들어줄 수도 없다. 이럴 경우, 동맹국들의 신뢰를 모두 잃고 비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트럼프 입장에서는 고민에 빠질만 하다. 그나마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다행스러운 것은 트럼프가 중동 위기를 최단 시간 안에 종결지었다는 것이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집중할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는 사실에 있다. 이란 핵 협상에서 러시아가 어느 정도 역할에 참여할 경우를 생각한다면 모스크바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어렵다는 점은 무시하기 힘들다. 푸틴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으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이끌어 내려는 트럼프로서는 러시아에 대한 강경책보다는 러시아의 입장을 최대한 들어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 현재로서는 매우 유력한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이제 자신들에게 지원을 올인하게 됐다고 마냥 좋아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그래도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중동 전쟁이 예상보다 빨리 끝난 것이 행운으로 여길만 하다. 하지만 군사적인 측면으로 볼 때 12일 동안의 중동 전쟁은 이미 우크라이나에 큰 내상을 안긴 셈이다. 미국이 앞으로 이스라엘과 중동 내 군사기지들의 방공망 강화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는 이란의 드론과 미사일 반격으로 이스라엘이 자랑하던 최강의 방공시스템들이 붕괴되어 버렸다. 이를 복구하고 새로운 방공시스템들을 강화하는 것도 만만한 일이 아니다. 비록 우크라이나가 돈을 주고 미제 무기를 산다고 해도, 우크라이나에 방공시스템 등 군사 장비를 제공할 여유가 없기 때문애 우크라이나의 향후 선택은 중동의 포화가 조기에 그쳤지만,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그러는 가운데 나토 정상회의가 24, 25일 양일간 열리고 있다. 가장 큰 안건은 방위비 분담이다. 마르크 뤼터 나토 사무총장은 미국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헤이그에서 열릴 회의의 내용을 이미 결정한 상태이기 때문에 "방위비 분담" 이야기는 확정된 사항이다. 나토 회원국들은 방위비를 증액하겠다고 약속을 했으며 이는 트럼프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이번 회의를 통해 이를 확정지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 타협안과 임시 방편적인 부분들이 불가피하게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이번 정상회의는 무역과 러시아, 그리고 중동에서 심화하는 분쟁 문제를 둘러싼 여러 안건들로 인해 많은 나토 동맹국들 간의 의견 충돌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왜냐면 나토 회원국 중, 대러 강경책을 좋아하지 않는 헝가리, 슬로바키아, 터키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트럼프의 입장에 변수다. 여태까지 국제 문제에서 속 시원하게 해결된 일이 없는 상황이 트럼프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다. 이란-이스라엘의 휴전을 성사시켰지만 이 또한 일시적인 미봉책일 뿐이다. 이스라엘이 휴전 약속을 깨고 가자지구를 선제 공격한 것처럼 이번에도 이스라엘이 먼저 깨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현재 부패 혐의 등으로 핀치에 몰려 있는 네타냐후 입장에서는 어쩌면 전쟁을 통한 내부 문제를 외부로 환기시키는 것 때문에 어떤 행위를 벌일 지는 알 수 없다. 게다가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서도 매우 비판적이었다. 심지어 나토의 집단방위체제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트럼프가 첫 임기 중 처음으로 참석한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 동맹국들이 나토군에 대해 충분한 지출을 하지 않고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며 질책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트럼프는 나토에 대해 매우 일관된 입장을 고수해왔다.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은 트럼프와 절친인 인사다. 그는 나토에서 트럼프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조율하고 있는 인물이다. 따라서 뤼터는 나토 정상회의는 3시간 동안만 진행되며, 트럼프의 요구로 인해 정상회의 공동성명은 5개 문단으로 축소시키는 등 왠만하면 짧고 간결한 측으로 초점이 맞춰졌다. 이번 정상회의 시간이 짧아진 이유는 장시간의 긴 회의를 싫어하는 트럼프의 성향에 맞추고 그의 주의를 집중시키기 위해 뤼터가 일부러 스캐줄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논의 주제가 적은데다가 짧은 정상회의가 오히려 나토 회원국들 간의 의견 분열을 숨기는 것에 도움이 된다. 나토 주재 미국 대사를 지낸 커트 폴커는 일부 유럽 국가들이 국내총생산(GDP)의 5%를 국방비로 지출하라고 요구하는 트럼프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왜냐면 서유럽에 비해 경제력이 약한 동유럽 국가들에게 있어 그와 같은 비용들은 국가 예산에 큰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루마니아, 불가리아의 경우, 더더욱 쉽지 않다. 참고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는 나토 회원국 중 가장 1인당 GDP가 낮은 국가로 EU에서도 가장 가난한 국가로 꼽힌다. 현재 유럽은 여전히 나토 전체 군사비 지출의 30%만을 부담하고 있다. 커트 폴커는 유럽 회원국들 중, 가난한 회원국들이 이처럼 노골적으로 강요를 받은 것은 유감이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일부 유럽 국가들은 이미 국방비를 GDP의 5%까지 늘리고 있다. 대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등 러시아와 인접한 국가들이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많은 나토 회원국들이 새로운 국방비를 목표치까지 달성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발트 3국 중,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의 경우, 10년 전에 설정한 목표치의 2%도 채 달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설정한 뤼터의 타협 안은 동맹국들이 핵심 나토 국방비를 GDP의 3.5%까지 늘리고, 국방 관련 지출에 1.5%를 추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국방 관련 지출의 개념이 모호하기 때문에 이런 타협 안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뤼터는 여기에 교량과 도로, 철도 건설과 같은 인프라 산업 비용도 포함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그 정도 금액 가지고 인프라 구축까지 담당하는 것은 무리다. 물론 새로운 지출 목표가 승인되더라도 일부 국가들, 아까 언급했던 루마니아나 불가리아의 경우, 2032년 또는 2035년까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의지가 거의 없을 수 있다. 물론 목표 달성 시기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대개 그동안 나토 회의에서 정해졌듯이 10년 단위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스페인 총리 페드로 산체스(Pedro Sánchez)는 이미 새로운 목표치가 불합리하고 비생산적이라고 언급하면서 불가하다는 입장을 비췄다. 영국 총리 키어 스타머는 영국이 언제까지 GDP의 3%를 국방비로 지출할지조차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물론 말로는 언젠가 의회에서 이를 논할 것이라고 언급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토를 영국 국방 정책의 중심에 두겠다는 영국 정부 방침으로 볼 때, 스타머는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을 지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새로운 계획은 러시아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한 나토 자체 방위 계획의 일환이다. 뤼터는 러시아가 나토 회원국을 5년 이내에 공격할 수 있다고 발언한 적 있다. 그런데 나토의 방위 계획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지만 내일 26일이면 그 또한 밝혀질 것으로 보인다. 뤼터 는 이미 나토에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밝힌 바 있는데 나토가 현재 방공 및 미사일 방어 체계를 400% 이상 증강하기 위해 수천 대의 장갑차와 탱크, 그리고 수백만 발의 포탄을 더 확보해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무기를 우크라이나에게 퍼줬기 때문이다. 영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회원국은 아직 나토에서 약속한 역량을 충족하지 못하고 있다. 이 때문에 스웨덴은 군대 규모를 두 배로 늘리고, 독일은 병력을 6만 명 이상 증원할 계획이다. 그런데 나토는 러시아가 침공할 경우 동맹이 동쪽 측면 지역을 어떻게 방어할 것인지에 대해 상당한 딜레마에 빠져 있다. 유럽 주둔 미군 사령관인 크리스 도나휴(Chris Donahue)는 최근 연설에서 러시아 영토인 칼리닌그라드 인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영토를 방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도나휴는 동맹의 기존 역량을 살펴본 결과 동맹들의 역량이 러시아를 상대로 지역 방어로 맡기는 것은 허상이었음을 빨리 깨달았다고 밝혔다. 그 전략대로 해야 하는데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군 능력이 해당 지역 방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인 것이다. 그렇다고 미군을 투입할 수는 없다. 미군 투입은 오히려 러시아를 자극시켜 러시아군의 대규모 공격이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여기서도 자제될 것으로 보인다. 젤렌스키가 참여했지만 대 우크라이나 지원에 대한 유럽 측의 소득만 있을 뿐, 미국의 지원은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특히 트럼프가 이미 푸틴 대통령과 대화하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보류하고 있기 때문에 나토의 직접적인 지원보다 EU 차원의 개별적인 지원으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현재 유럽과 미국을 분열시키는 가장 큰 쟁점이다. 커트 폴커는 트럼프 정권에서 미국이 우크라이나 안보를 유럽 안보에 필수적으로 보지 않고 있다. 그러나 유럽 동맹국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한편 뤼터는 이번 정상회담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는 이슈는 제외됐다고 하였다. 이는 트럼프와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서다. 나토 정상들은 새로운 대러시아 전략을 논의할 예정이었지만 이번 의제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했다. 젤렌스키는 정상들의 만찬에 초대됐지만, 북대서양 이사회(North Atlantic Council) 주요 논의에는 참여하지 않을 예정에 있다. G7에 이어 이번에도 젤렌스키는 뭐 하나 성과를 얻어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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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미국 : 이스라엘의 12일 전쟁 휴전이 우크라이나에게 미칠 영향과 나토 정상회의의 주 논제들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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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
- 1980년대 초, 불가리아의 컴퓨터 산업은 세계적으로 선두를 달렸다. 특히 개인용 컴퓨터 프라베츠(Pravetz)는 애플컴퓨터와 경쟁할 정도로 우수했고, 공산권 시장을 석권했을 정도였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동유럽의 실리콘밸리”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독재자인 지프코프의 명령으로 인해 불가리아는 본격적으로 컴퓨터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 나라이면서 많은 수의 해커들도 키워냈다. 특히 산업과 군사 관련 스파이들이 많았는데 이런 해커들은 대거 소련에 진출해 KGB 정보 담당의 일원들이 되었다. 그래서 과거 KGB 정보 담당 부서에는 불가리아 출신 제법 많았다고 한다. 불가리아의 해커들은 바이러스가 자신의 프로그램을 숨기는 '은폐형 기법'이라는 것을 최초로 도입하여 폭포 바이러스(Cascade)를 제작했다. 불가리아의 폭포 바이러스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는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영화 <매트릭스>에서도 전뇌를 표현하기 위해 쓰인 '글자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 장면이 있다. 감독이자 폴란드계 미국인 출신인 래리 워쇼스키(Larry Wachowski)가 폭포 바이러스를 겪어보고 작품의 영감을 얻어 영화에 사용했으며 이는 할리우드 영화계에서 가장 혁명적 발상의 기법에 들어갈 정도로 이 바이러스의 위력은 대단했다. 이 폭포 바이러스는 1987년 경, 독일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이 바이러스는 사상 최초로 자신을 은폐하는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도입한 바이러스이기도 하다. 그래서 처음 이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백신을 만드는데 많은 난항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등장하는 모든 바이러스들은 이 프로그램 암호화 기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게 되니 바이러스의 역사에서 선구자의 위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바이러스의 증상은 감염된 파일을 실행하면 램에 올라가며, 램에 올라간 후 5분이 지나면 화면에 있는 글자가 하나씩 화면 아래로 떨어진다. 그냥 놔두면 글자가 전부 아래로 추락한다. 서양 쪽에서는 이 모양이 폭포 같다는 이유로 "Cascade"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포 바이러스 다음으로 파일에 감염되는 바이러스에서 발전하여 디스크의 부트 섹터에 감염되는 부트 바이러스가 최초로 제작된 곳도 불가리아였으며 이 또한 지프코프가 정적들의 컴퓨터를 공격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불가리아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가 아주 극강일 때는 바로 도스(Dos) 시기이다. 이 때는 바이러스의 최강자라 불렸던 복합 감염형 바이러스인 DIR-II 바이러스와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있었다. 그로 인해 불가리아는 한 때 '바이러스 제작소'라는 악명이 붙어지기도 했다. 그 중 DIR-II 바이러스의 경우, 버그가 있는데, 바로 도스 5.0 이상에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 버그가 증상을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어 원래는 별로 파괴적이지 않았던 증상이 이후에는 점차 치명적인 증상으로 변했다. 자신을 복제해 감염 파일에 써넣는 다른 바이러스들과는 달리 특이한 방법의 감염을 사용했던 것도 특징이다. 자기 자신을 디스크의 맨 뒤 클러스터에 저장해 두었고, 디렉토리에 저장되어 있는 프로그램의 시작 위치를 바이러스가 위치하는 클러스터로 바꾸어 파일을 실행할 때마다 바이러스가 먼저 실행되도록 하는 방식이다. 이는 자기 자신을 복제하는 다른 바이러스와 달리 디스크 내에 바이러스 프로그램은 하나 뿐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이 때문에 바이러스 탐지 자체가 굉장히 어려웠고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쉽지 않았기다. 심지어 MBR(마스터 부트 레코드)에 감염되기 때문에 포맷을 해도 완전히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이 굉장히 악질적인 바이러스로 기억된다. 이 바이러스는 도스 시절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와 더불어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1, 2위를 다투던 그야말로 사용자들과 프로그레머들의 숱한 애를 먹였던 악명 높은 바이러스였다.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의 영어 명칭은 Dark_Avenger이며 1989년에 만들어졌다. 혹은 바이러스 제작자의 이름을 Dark avenger라고 칭하고 그 바이러스의 이름을 Eddie라고 칭하기도 한다. 이 바이러스에 감염된 파일 내부에는 This program was written in the city of Sofia (C) 1988-89 Dark Avenger라는 문구가 숨어 있다고 한다. 이 바이러스의 경우, 감염 속도와 증상이 매우 빠른데다 심지어 안티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삭제하는 등의 역공격까지 가하는 등, 20세기 최강 바이러스 중에 하나였다. 다크 어벤저의 증상은 일단 자신을 복제해 실행 프로그램을 감염시킨다. 이어 1,800바이트를 늘리고, 감염된 프로그램이 16번째로 실행되면 다른 파일을 지우거나 시스템을 완전히 파괴시킨다. 정확 말하자면 16번째로 실행될 경우 디스크의 아무 위치에나 자신을 복제해서 덮어 씌우는데, 그게 OS의 중요한 부분이라면 쓸모없이 파괴되어 버린다. 파일의 경우에도 덮어 씌워지면 복구가 불가능하게 된다. 여기까지만 해도 비교적 단순하게 나타나지만, 이 바이러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변형이 만들어지기 굉장히 쉬웠다는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여러 가지의 바리에이션들이 금방 만들어져 퍼지게 되었고, 이것을 잡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한 가지 유형의 다크 어벤저가 탐지되었다고 해도 곧 다른 유형의 다크 어벤저 변형이 만들어지며 그게 탐지되어도 또 다른 변형이 만들어지는 현상이 수없이 진행되는 것이다. 잘못하면 하드디스크를 날려 먹을 수 있는 아주 위험한 바이러스인데 변형까지 수십 가지가 되어 탐지가 쉽지 않았기 때문에 당당히 도스 시절 최악의 바이러스에 랭크되었다. 물론 이 바이러스가 유행하던 시기에 알려진 의외의 사실이 있었다. 이 바이러스는 DIR-II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DIR-II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유형의 바이러스였던데다 V3 등 당시 의존할 수밖에 없던 백신류 프로그램들의 대응이 늦어서 상당한 피해를 입었고 대단한 악명을 떨쳤었는데, DIR-II에 감염된 PC에 다크 어벤저 바이러스가 감염되면 먼저 있던 DIR-II가 없어진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여기에 다크 어벤저 자체는 백신 프로그램의 대응도 비교적 빨랐고, 치료 자체도 별다른 후유증 없이 백신 한번 돌리면 깔끔하게 끝났기에 PC통신이나 컴퓨터 잡지 등에서 DIR-II의 치료법으로 다크 어벤저를 일부러 감염시킨다는 방법까지 소개되기도 했다. 그래서 미국의 만화 작가인 브라이언 마이클 벤디스(Brian Michael Bendis)가 이 다크 어벤저에 영감을 받아 슈퍼히어로 팀인 어벤저스의 대체 버전으로 다크 어벤저스(Dark Avengers)를 만들기도 했다. 이와 같은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생산에 자극을 받은 타 동유럽 국가들도 연구와 생산에 들어갔는데 자국을 통제하고 서방에 공산주의 프로파간다를 날리며 민주주의 진영을 공격하는 것도 이만한 것이 없었다. 불가리아의 이웃나라 루마니아는 안티 바이러스 백신 소프트웨어인 비트디펜더를 개발하여 혹시나 모를 불가리아의 바이러스 공격을 대비하기도 했다. 현재는 시대가 바뀌면서 치료 백신도 발달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거의 사멸했고 초창기 컴퓨터의 어둠 속 제왕이었던 불가리아제 바이러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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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계 20세기의 악마라 불리는 불가리아 컴퓨터 바이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