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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발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 1900~1980)의 독재 통치기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은 발칸반도에서 가장 러시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국가였으며,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무역총액 중 소련과의 무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소련과 불가리아의 우애를 주제로 한 군가도 나왔을 정도였으며 이웃 나라인 그리스나 터키에서는 때로는 민주정부, 때로는 군사 독재 정부가 들어섰다. 루마니아나 유고슬라비아는 개인의 통치 하에 소련과는 독립적인 정치를 했지만, 불가리아는 소련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으며 역설적으로 이는 불가리아가 알바니아에 이어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후진적인 국가에서 발칸에서 조금이나마 잘 사는 국가가 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는 원자재나 소비재를 소련으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의 지원을 받은 지도자들이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발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 이후에 나타난 토도르 지프코프(Тодор Живков)에 이르기까지 역대 공산당릐 수뇌부들은 매우 억압적이며 보수적이고 안정된 통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가리아 인들은 중앙 유럽의 공산주의 위성국가들인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인들이 소련에 대항하여 자유화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도 그런 움직임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공산 정권에 순응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러한 구조는 전형적인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전통적인 봉건국가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도 공산당 내 반대파들의 쿠데타로 무너진 셈이 되었다. 특히 체르벤코프 시대 때는 그러한 독재 통치가 더욱 강화되었고 따라서 그의 시대는 후술할 지프코프의 시대만큼이나 암울한 시대였다. 불가리아 디미트로프의 뒤를 승계한 사회주의자 체르벤코프는 1900년 9월 6일 불가리아 공국 소피아 인근의 즐라티차(Златица)에서 탄생했다. 1919년 공산당원이 되어 공산주의 청년단 활동과 신문 편집에 참여했으며 1923년 불가리아의 쿠데타에 가담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이내 석방되어 소련으로 이민 갈 수 있었다. 1925년 체르벤코프는 소련으로 이주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마르크스 레닌 학교에 다니면서 공산사상에 심취했으며, 이후에는 학교장이 되면서 교수를 겸직하기도 했다. 체르벤코프는 스탈린의 통치 방식을 지지했으며, 박식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지식과 수준급 입담과 재치로 유명세를 탔다. 이를 두고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에서 "스파르타크"라는 별명을 지어줬으며 그는 이 필명을 평생동안 사용했다고 한다. 1941년, 불가리아로 귀국해 반(反) 나치와 친(親) 공산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보내는 라디오 방송국의 국장이 되어 선전선동을 주로 맡게 되었다. 1944년 체르벤코프는 다시 소련으로 들어가 소련군을 돕다가 전황이 소련군에게 유리해지자 자신의 처남이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과업을 돕기 위해 불가리아로 돌아오게 된다. 체르벤코프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막내 여동생 엘레나와 결혼하여 처남매부 지간이 됐으며 디미트로프와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의 권좌를 고스란히 승계받을 수 있었다. 체르벤코프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공산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체르벤코프는 1947년 문화부 장관 자리에 올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프로파간다 작업을 하다가 1949년에 부총리가 되었다. 부총리가 된 직후, 불가리아의 지도자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사망했는데 이 때 불가리아는 임시로 집단적 리더가 되어 혼란을 최대한 방지했다. 체르벤코프는 디미트로프의 뒤를 이어 당 총서기가 되었고, 바실 콜라로프(Васил Коларов)는 디미트로프의 뒤를 승계하여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이 상황은 1950년 콜라로프가 1년 만에 갑자기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콜라로프의 사망은 체르벤코프와 노선을 달리했기에 자신의 권좌에 굴복하지 않은 콜라로프를 제거하기 위해 독살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재기되었다. 1950년 체르벤코프는 소련의 완전한 승인을 받아 불가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총리와 국가 수반의 직위를 결합해 통합 총리가 되었다. 체르벤코프의 정책은 당시 소련의 정책과 매우 흡사하였고 스탈린주의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작은 스탈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체르벤코프의 통치 시기에는 당 노선에서 벗어난 모든 일탈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더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에 의한 문화 예술에 대한 독단적 탄압과 고립주의적인 외교 정책이 실행되었다. 이 시기에 체르벤코프는 디미트로프는 소련의 스탈린과 유사한 개인 숭배 대상으로 추대했고 스스로도 숭배 대상이 되어 각종 선전선동들을 감행했다. 같은 시기에는 불가리아의 집단화 운동도 함께 시작되면서 농업과 공업의 집단화로 스탈린식 사회집약화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체르벤코프는 1951년 초까지 완전한 당 내 규율을 위한 선전 활동을 벌여 많은 고위 관리를 포함하여 5명 가운데 1명을 숙청하고 적극적으로 제명했다. 그는 1953년까지 당원 460,000명 가운데 100,000명을 당에서 제명시켰으며 숙청하여 살해했다. 이러한 체르벤코프의 인격 숭배 대상의 모델은 스탈린 양식의 모델과 유사했으며, 소피아의 의과 대학교를 포함해 소피아의 다양한 장소에서 체르벤코프의 이름을 차용한 장소가 대거 생겨났다. 체르벤코프는 개인적으로 현 정세에서 개인숭배를 필연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어떤 극단적인 형태들을 강력히 반대했다. 1953년까지 불가리아는 서방과 관계를 단절했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수출입의 90%는 소련과의 연대 및 파트너십과 관련이 있었다. 체르벤코프 내각은 농, 공업의 집단화 비율을 높이려고 협박과 공급 차별을 활용하게 되었고 이는 불가리아가 민주화 되었을 때 국가 전체가 빈곤에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체르벤코프 때 이와 같은 집단화로 인해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국유 경작지가 12%에서 61%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9-1953년 사이의 5개년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며, 그 기간 동안 불가리아는 농업 부문에선 -0.9% 성장을 기록했다. 반면, 같은 시기 산업 부문에선 20.7% 성장을 기록했으며, 경제성장률은 8.4%에 이르게 된다. 스탈린이 사망하기 전, 체르벤코프는 이미 스탈린주의 노선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디미타르 디모프의 소설 담배를 출판 허용한 일은 문화 활동에 향한 당의 통제가 약간 완화되었음을 보여주었던 사례로 남아있다. 1953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관계를 재수립하였고, 일부 정치인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졌으며, 기획자들은 소비재 생산 증가 및 상품 가격 인하를 논의했다. 그러자 스탈린주의자들의 방해로 인해 1953년 이후 체르벤코프는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자신을 향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몇 가지의 조치를 취했다. 특히 1954년에는 당 지도부를 포기하고 불가리아의 경제 및 정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줄였으며, 집단화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1955년까지 정치범 약 10,000명을 석방하여 자신의 노선을 완전히 탈바꿈했다. 1956년 4월, 흐루시초프의 탈스탈린화 이후 불가리아 공산당은 체르벤코프의 권위주의, 불가리아만이 갖고 있는 스탈린주의를 비난했다. 체르벤코프는 같은 해 직위에서 물러나 지프코프에게 직위를 양보하고 정계에서 은퇴함으로써 그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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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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