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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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남 왕국의 출현 이전에도 이곳에서는 고도의 문화가 존재했던 것이 확실하며, 그것은 다량의 정교한 출토 유물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호치민 시 서쪽 껀저(Can Gio)라고 하는 곳에서 발견된 옥 귀걸이와 금귀걸이, 팔찌 등은 B.C 6세기로부터 B.C 1세기 정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모양새가 매우 세련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곳은 참족의 영토로 부남과의 연계성이 나타나고 있음이 확실히 밝혀지고 있다. 


화면 캡처 2024-06-05 040436.png
사진 : 부남왕국이 있었던 현 캄보디아, 출처 : 越歷史, https://www.qulishi.com/mingxing/a430272.html

 

그리하여 설화에서 언급되는 소마가 지배하던 곳은 단순히 원시적 단계의 미개 지역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남은 이후기 5세기 초를 전후하여 카운딘야 혈통 계열로 내려오던 왕권을 장군 판시만(Phan Shih Man)이 쿠데타로 차지한 후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그 영토들이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지배 영역은 동쪽으로 현 베트남 남부의 거의 모든 지역, 서쪽으로 현재의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반도, 미얀마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대륙부 동남아시아 해안 지역 대부분을 그 지배 영역하에 둔 것이다. 그러나 부남이 동남아시아 남쪽 해안 지역을 모두 장악했다고 하여 로마나 아니면 진나라 시대(秦代) 이래 중원 왕조와 같이 넓은 영토의 대제국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지배의 영역은 부남 왕에게 복종하는 종속국들로 연결되는 범위였을 뿐이지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족들과 토착 지도자들의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되는 형태였고 이들은 부남의 중앙 정부에 조공을 바치고 있는 정도였다. 


단지『南齊書』에서 언급한 것 같이 복종하지 않는 국가들은 공격하여 그 백성들을 노예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료적인 부분을 분석해 볼 때 부남의 권력 중심과 주변부의 지배, 복종 관계를 참조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삼국 시대에 해당되는 시기라 부남은 삼국 가운데 가장 남부에 위치했던 오(吳)와 국교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삼국의 항쟁 기간에 교역을 통한 부(富)의 증대 및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오나라도 부남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양국의 인적 물적 교류는 활발했다.


오나라에서 파견된 주응(朱應)과 강태(康泰)는 부남을 거쳐 말레이반도의 몇 개 국가들까지 방문하고 돌아오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주응(朱應)은『扶南異物志』, 강태(康泰)는『扶南土俗』과『吳時外國傳』같은 기행문을 책으로 남겼다. 아쉽게도 현재 이 책들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그들의 관찰은 중국의 사료 곳곳에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초기 부남에 대한 중국 사서『南齊書』와『梁書』등의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고 정확하게 그들에 대한 풍습과 문물을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응(朱應)과 강태(康泰)의 기록을 참조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부남에서는 재화를 유통하는 수단으로 금과 은이 사용되었다. 남자는 빈부에 따라 비단 천이나 무명천으로 치마처럼 옆으로 감싸 몸을 가리고, 여성은 머리로부터 입는 단벌의 의상을 착용했다고 중국 사서들은 전하고 있다. 각종 금은 그릇을 즐겨 사용했다는 것으로 보아 매우 풍족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고, 왕은 수 개 층으로 이루어진 궁에 살며, 백성들은 주상 가옥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다. 현재도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인기 있는 닭싸움이 성했고 돼지싸움도 중요한 유희였다고 한다. 왕은 행차할 때 치장한 코끼리를 타고 왕비를 비롯한 부녀자들도 능히 코끼리를 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물을 파지 않고 한 연못물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하며 여러 가지 장례 풍습도 소개되고 있다. 주로 화장을 했으나 강물에 시체를 버리든가 들판에 두어 새가 처리하게 하는 조장 풍속도 있었고 그냥 땅에 매장하는 방식도 있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중국 사료에 기재되어 있는 부남의 형벌 제도라 할 수 있는데『南齊書-蠻東南夷列傳』에는 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나라에는 감옥이 없다. 만약 송사가 생기면, 달걀만한 금가락지를 끓는 물에 넣어 그것을 꺼내게 하든가 쇳덩어리를 붉게 달구어 손 위에 올려놓고 일곱 보를 가게 하면, 죄 있는 자는 손이 타고 죄 없는 자는 상하지 아니한다. 또, 물속에 들어가게 하면 옳은 자는 가라앉지 아니하고 옳지 않은 자는 즉시 가라앉는다.”


위 사료에서 언급한 것처럼 감옥이 없는 것은 인력이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사형을 적게 판결하고 노역으로 충분히 이용하기 위해 즉각적인 대응 처벌을 하는 것으로 끝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즉결처분은 노예 제도가 적절한 처벌로 사용되기도 했을 것이다. 송사가 일어난 경우에 해결 방식은 매우 황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동남아시아의 사회 현상으로 볼 때 법 제도와 같은 확실한 중앙 집권에 의지하지 않고 신권(神權)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확실한 판단이 힘들기 마련인 경우, 종교적 신성성과 응보 관념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판결 방식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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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남 왕국과 고대 동남아시아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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