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6-2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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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이라크 북동부와 이란 북서부, 터키 남동부에 걸쳐 있는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 쉬르낙(Şırnak) 지역에 경계령이 떨어지고 있다. 내가 최근에 이 지역들을 방문하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가 이 일대에서 활약하고 있는 페쉬메르가 집단이 PKK와 접선 및 연동의 가능성이 있다는 보도를 받고 나서부터다. 페쉬메르가와 PKK는 같은 쿠르드 무장단체다. 그런데 PKK는 사회주의성 이념의 목적을 지니고 있는데 반해, 페쉬메르가는 오로지 이념이 아닌 순수한 무장투쟁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 때는 IS의 격멸을 위해 함께 했었지만 그 이념적 차이 때문에 서로 결별했다. 터키 남동부에 걸쳐 있는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에서 두 단체의 접선이 이루어졌고 터키와 이라크 정부를 상대로 연합 투쟁을 이어갈 것이라 한다. 아마 터키와 이라크의 국경 도시인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은 매우 위험해질 공산이 클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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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터키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에서 PKK와 페쉬메르가의 회합,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와 터키와 이라크의 국경이면서도 남쿠르디스탄,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국경이기도 하다. 이 지역의 쿠르드인 인구는 약 1,500만 정도로 추산된다. 이 지역의 면적은 면적은 46,861㎢, 한국으로 보면 경상도와 강원도를 합친 크기다.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중심지는 아르빌(Erbil)로 과거 한국군이 이라크 파병 당시에 주둔했던 도시로 알려져 있다. 원래 이 지역은 쿠르드인들이 정착한 지역으로 터키와 이라크가 국경을 두고 갈라지기 전에 모두 쿠르디스탄으로 칭해지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곳에 영국군이 들어오면서 오늘날 터키와 이라크가 양분되는 관할 구역이 재편된다. 영국은 이라크를 식민지로 삼으며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이라크 쿠르디스탄을 떼어내 이라크 영토에 합병해버렸다. 오늘날 터키와 이라크의 국경은 영국이 강제로 만들어버린 인공적 국경이었기 때문에 터키 정부는 현재까지도 이라크 쿠르디스탄을 자국 영토로 인식하여 이라크 정부에 반환을 요구해 터키-이라크 간의 해결되지 않은 영토분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라크 쿠르디스탄에는 쿠르드족만 있는 곳이 아니라 터키인도 약 30% 이상이 살고 있는 곳이다. 영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서 이라크와 터키를 강제로 분할해 버렸으니 생긴 현상이다. 이들은 PKK나 페쉬메르가가 나타나기 전까지 터키에 귀속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라크 쿠르드족들과 터키계 이라크인들은 영국이 후원하고 있었던 당시 이라크 왕국과 사담 후세인 정부에 수없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면서 1960년에 제1차 이라크-쿠르드 전쟁이 발생하자 터키 정부는 이들을 지원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외면하기 시작하면서 이라크 쿠르디스탄과 북쿠르디스탄은 터키 정부에 대해 실망감을 느끼고 쿠르드 민족주의를 결성, 터키와 이라크로부터의 독립을 염원하게 된다. 1970년에는 시리아 바트당 정부와 쿠르드 민족주의자들 사이에서 알레포 협정이 이루어져 쿠르드족 자치권이 이루어지게 합의했으나 1974년 제2차 이라크-쿠르드 전쟁으로 이라크 정부에 크게 탄압을 받게 된다. 


이후 이라크 정부는 쿠르드 지역에 대해 강한 아랍화를 실시하면서 쿠르드 민족주의를 강하게 억누르고자 했다. 그러자 이에 대한 반발로 인해 수십년 동안 또 다른 분쟁이 이어졌고 이 분쟁에 페쉬메르가 세력이 주도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격발되었다. 이들은 PKK 조직과 연계하여 이라크 북부와 터키 동남부를 중심으로 테러와 게릴라 전을 감행했다. 특히 터키-이라크 국경 지대인 치즈레(Cizre) 인근 알 추디(Al-Cudi) 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했고 본래 공산주의 성격의 PKK와는 달리 페쉬메르가는 여기에 이슬람 근본주의까지 입혀 알 추디 산을 무슬림의 성산(聖山)으로 만들고 성역화했다. 

 

알 추디(Al-Cudi) 산은 아라랏 산과 더불어 무슬림들에 의해 노아의 방주가 한 차례 정착한 산으로 여겨져왔는데 이 산에 대한 무슬림들의 성역화는 페쉬메르가 세력이 이 산을 장악하면서부터 이루어져 왔다. 이 산을 중심으로 이란-이라크 전쟁 와중에 1983년 또 다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더불어 이 일대에서 상당량의 원유가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여기에 눈독을 들인 영국이 페쉬메르가를 지원하면서 이들의 무력은 급격히 강화되었다. 


비록 1983년 봉기는 교착상태에서 끝났지만 이를 기억하고 있던 사담 후세인은 1988년 쿠르디스탄 토벌에 나섰다. 이 때 활약한 자가 이라크 대외정보국장이며 후일 "쿠르드족의 도살자"로 알려진 알리 하산 알 마지드(Ali Hassan Al-Majid, 1941~2010)다. 그는 화학 공격의 대가로 알려졌기에 그의 별칭이 케미컬 알리(Chemical Ali)다. 그는 할라브자에 화학공격을 가해 4,000명 이상의 쿠르드족을 학살했다. 

 

그의 주도로 이라크군은1983년~1988년 시기에 안팔 작전을 개시해 50,000~180,000명 이상의 쿠르드족을 학살했다. 그리고 1991년 걸프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은 미군의 지원을 받았고 사담 후세인에 대한 봉기를 일으킨다. 한 달 간의 분쟁으로 수만 명이 사망하고 180만 명이 난민이 되어 각지를 떠돌았다.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군은 쿠르드 지역 남부의 봉기를 상당수 진압했으나 이라크 쿠르디스탄 대부분 지역에서 쿠르드족의 저항이 거세게 나타났으며, 걸프 전쟁에서 패배했기에 이들을 제압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후세인은 쿠르드족과 합의하여 쿠르드 자치구를 세우는데 합의했다. 


2003년에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자 완전한 독립을 노리고 미국 편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쿠르디스탄이 완전 독립하는 것을 반대하는 터키와 이란의 반발로 인해 미국은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았다. 결국 쿠르디스탄 자치 정부는 반발했지만 현실을 인정하고 대신 2005년 이라크 신(新) 헌법이 제정되자 헌법에 명시되어 있는 더 많은 자치권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2014년에는 IS와 맞서 싸웠고, 2017년에는 쿠르드 지역 독립투표를 강행했으나 이라크의 강력한 경고로 작은 충돌이 일어났으며 결국 독립은 철회되었다. 

 

그러나 현재에도 다시 독립투표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터키가 PKK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 이라크도 여기에 협력하여 이라크 쿠르디스탄에 대한 합동 공격까지 논의가 오고가게 되자 급해진 페쉬메르가는 PKK와 공조를 요청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라크 영내에서 터키와 이라크군의 합동 공격이 서서히 임박해짐에 따라 PKK와 페쉬메르가의 접선 및 연동, 치즈레(Cizre), 카필(Kapılı)에서의 회합은 터키와 이라크에 대해 대규모 저항이 있을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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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치 않은 이라크 쿠르드계인 페쉬메르가 집단의 최근 움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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