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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 사막의 자유로운 영혼, 아랍인과 같지만 다른 의미의 이름인 베두인 이야기
    베두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아랍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으며, 베두인이 오래전부터 아랍이라고도 불린 것은 많은 비문과 사료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꾸란에 나오는〈아랍〉도 사실상 베두인을 정의하는 단어이다. 베두인의 언어는 꾸란의 언어로도, 도시 주민의 언어로도 사용된다는 내용은 대부분의 사료에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베두인의 것이라는 학술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한편 예언자 마호메트는 베두인들이 좀처럼 이슬람 화 되지 않는 종족이라고 비난했다. 사실 메카라는 상업도시에서 태어난 이슬람이 사막에서 이동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들에게까지 침투하기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베두인들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평등주의나 민주주의는 이슬람의 근본사상인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는 구절과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메카라는 도시의 정착 문화도 사막의 베두인들과의 연계 선상에서 처음으로 성립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발생과 그 성격으로 인해 베두인 문화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는 베두인의 부족사회와 관련해서 혈연관계를 중요시하는 사회였다. 그러한 부족주의를 배제하고 유일신인 알라와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지향하는 것이 이슬람이었다. 그 이념은 현재에도 변함없지만, 베두인 사회의 부족주의와 혈연주의가 한 번에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앞에 서술한 평등주의 등과 함께 병존하고 있는 것이 그 실정이다. 그러나 베두인의 이동 생활은 최근에 급속하게 변화해 오고 있다. 중앙정부가 확립한 토지 제도의 변화와 철도, 자동차, 비행기 등 근대 교통 기관의 도입, 그리고 사회 경제의 진전에 따라 정착 생활자에 대한 노동 수요의 증가 등의 요인들이 겹쳐, 정착 생활에 들어가는 베두인이 증가하고 있다. 이동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도 차가 낙타를 대신하며 근대적 상품이 사막 깊숙이 전해져 들어가자 현재는 이에 대한 영향을 받아 큰 폭으로 변화해 오고 있다. 베두인들이 유목을 하면서 방목되는 동물은 양, 염소, 소, 당나귀, 낙타, 말, 물소 등으로 분류된다. 유목이라는 경제 환경은 원시적이라는 선입견을 주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는 18~19세기 이후, 농업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달성한 이후부터 농경민으로 변하면서 현재와 같은 현대 문명을 받아들여 유목에 대한 경시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유목은 수렵 채집 경제의 연속이 아니라, 농경 다음으로 생겨난 생활 경제 양식이라는 것이 여러 인류학적 자료를 토대로 실증되었으며, 경작이 불가능한 토지를 이용하기 위해서 나타난 새로운 세련된 생계 경제 방법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의 남단에는 급속한 사막화로 인해 농경 지대가 한계에 달해, 상당한 양의 유목 잉여 인구들이 생겨나면서 농경 민중에서 용감한 사람들이 경작이 불가능한 바디야에(Badiyaye)의 가축을 데리고 북상하여 목초지들을 찾아 갔다. 그러한 부분이 베두인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있다. 베두인이라는 호칭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높이 자랑할 만한 생활을 하는 용기 있는 사막 민족이라는 의미와 도시의 문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따라서 반(半) 정착 생활을 하면서, 목축과 농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바드우(Badu)라고 지칭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싫어하기도 했다. 아라비아 반도는 국가 성립 시기가 매우 늦고 비잔틴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사이의 완충지대로써 국가가 없는 시기가 매우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베두인의 씨족 사회끼리 서로 전쟁이나 상업적인 거래를 하곤 했다. 간혹 어떤 씨족이 강성하게 되어 짧게 왕국이나 제국을 세우는 일은 있었지만 모두 빠른 시기 안에 붕괴되어 버렸다. 그렇게 이슬람이 탄생하기 전까지 씨족 사회가 변함없이 지속되다가 이슬람의 성립과 함께 하나의 종교와 국가 아래 통합되고 베두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강해지게 된다. 원래는 부족 제도의 특성에서 오는 분열성이 심하고 그 중심에는 씨족 간 정쟁이 그치지 않아 좀처럼 연합하지 못하는 부족체였다. 이를 두고 이슬람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이러한 분열 상태의 베두인들을 하나의 지도자 아래 결집시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유목민족으로써 성격이 사납고 전투에 있어서는 매우 무자비했기 때문에 초기 이슬람의 세력 전파에 가장 중추적인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 이슬람의 세력 전파 이후 군영 도시의 주요 구성원들이 베두인들이고 외지인들 중 누군가가 찾아와서 의탁하더라도 하루에 차 한 잔씩 주며 3일은 무조건 보호해주는 규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국가 이전의 부족 사회에서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개인이나 개성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며 씨족과 가족 등 혈연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아직도 많은 베두인들이 옛 삶의 방식을 고수해오고 있기 때문에, 씨족 개개인에게 나타난 모독 현상을 씨족 전체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다. 이는 씨족 개개인이 모여 이룬 씨족의 부족화 현상으로 씨족 구성원 중에 한 명이 모독으로 받아들이면 전체 구성원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요르단, 이스라엘, 레바논 등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계통의 부족들은 자신의 조상이 베두인이라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베두인의 후손들은 확실하게 가족 소개를 들어보면 적어도 자기 6~7대 조부 이름까지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 전통이 강한 씨족들도 자기 기준으로 4대까지만 외우고 있는데 이 또한 베두인의 영향이라 볼 수 있겠다. 베두인들은 유목민이지만 모두 유목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상인이 되어 중개 무역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도시나 마을로 가서 정착하여 농사짓고 장사를 하여 정주민족들과 어울려 살기도 했다. 또한 어업에도 종사하여 어부로 사는 베두인들도 있다. 현재는 현대 문명이 들어옴에 따라 베두인들의 생활도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도시와 마을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다. 아직도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인들은 전체 인구에서 고작 5%에 불과하며 반(反) 유목 생활하는 베두인들조차 10%에 불과하다. 특히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사막화로 인해 유목이 갈수록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이상 유목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에서도 베두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시나이 지역을 지배할 당시에 이들에게 막대한 지원과 혜택을 부여하면서 팔레스타인과 기타 지역에 거주한 베두인-아라비아 인에 비해 매우 우대했다. 사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도 신생 국가였었고 인구가 적은데 본토 땅에서 3배에 달하는 시나이 지역에는 추정으로만 해도 100~20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인구와 비슷하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사로 자라나는 전투민족인 시나이 지역의 베두인들에 대해 대우가 좋지 못하면 게릴라전 등의 반군이 되거나 본토에 있는 군대를 더 많이 동원하여 전투를 벌여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사막 기후이면서 사람이 거주할 만한 도시나 오아시스 마을이 적었기 때문에 군대 및 민간인 거주지로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두인들을 적으로 돌려 대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거의 자치주와 같이 치안을 맡기고 돈이나 생필품까지 지원해면서 최대한의 갈등은 자제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지원에 한계를 느낀 이스라엘이 결국 시나이 지역을 포기하고 이집트에게 시나이 지역을 돌려주면서 이제는 이집트에게 큰 장애물로 남아버렸다. 2012년 시나이 반도 지역 베두인과 이집트의 충돌이 더욱 심해져 중국인들을 납치하여 수감된 동료 석방을 요구하는 등 2012년 2월에는 한국인 관광객 3명이 베두인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29시간 만에 석방되었는데 납치에 대한 사건에 대해 사과도 하고 먹을 것을 잘 주는 등, 대우는 매우 좋았다고 한다. 외국인 납치를 자주 벌이긴 하지만 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모두 무사히 석방시켜 탈레반과 같은 근본주의적 테러 단체와 차원이 다름을 보여주었다. 그러다보니 서구권에서도 베두인들을 테러집단으로 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요르단에서는 베두인들이 국가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인구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이주해온 팔레스타인 베두인들이 더 많지만, 원래 요르단은 건국 자체가 베두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요르단 정계에는 베두인이 많으며 베두인 족장들의 경우 요르단 내에서 고위직이 많기 때문에 국왕과 왕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난다. 베두인으로 이루어진 요르단 군은 아랍권에서 최정예 군대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15
  • "아랍의 봄" 사건으로 유럽이 받은 영향, 아랍계 민족들의 유럽 정착 및 난민화
    "아랍의 봄"이 유행할 때 과거 북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을 식민 지배했고 현재도 가장 지분이 많은 프랑스는 아랍의 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불안은 옛 종주국으로써 북아프리카 각 지역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게도 이와 같은 사태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끝없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들이 아랍의 봄 혁명에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프랑스 내부도 시끄러워질 수 있는 요지가 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극우파가 득세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자국 국민들의 이권을 먼저 보호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민군들과 함께 카다피의 독재 정권을 끝내고 민주화의 첫 단계에성공을 거두었으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1차 투표에서는 28.6% 대 27.1%로 패배했으며, 2차 투표에서도 48.3%로 51.7%의 올랑드에게 3.4%, 110만표차로 패배했다. 사르코지는 임기 중에 사망한 조르쥐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 4년 10개월, 1969~1974)와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에게 패배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7년 재임)에 이어 30년 만의 단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퇴임했다. 게다가 전임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까지 프랑수아 올랑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르코지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여기에 카다피 사건에 대한 몇몇 불편한 진실까지 드러난 부분이 결정적으로 사임한 원인이 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올랑드 역시 유럽의 경제위기인 유로화 사태가 계속 되는 상태에서 말리 내전에 개입한 것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크게 작용했으며, 정권의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는 등 제대로 된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국가들도 큰 영향을 받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도 영향을 받아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이탈리아의 경우,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더불어 계속되어 발생하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정계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베틀루스코니는 사생활 보호법을 개정해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예를 들어 사법당국이 녹취한 내용을 신문이나 웹사이트에 올려 사익에 반하거나 편견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면 48시간 이내에 수정해야 하고 여기에 불응하면 구금 또는 벌금형에 처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쏟아낸 막말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모든 이탈리아 시민들이 이를 페러디하여 수많은 조롱이 섞인 광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이탈리아 내에서 경제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던데다 베를루스코니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채 수익률은 7일 연 6.77%까지 치솟았다. 이어 정부 부채는 2조 6000억 달러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아 파산 위기에 놓이자 로마에 1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폭동 직전까지 가게 된다. 결국 2011년 11월 1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하야하여 마리오 몬티(Mario Monti) 총리의 중도 내각이 들어섰고, 뒤이은 선거에서 이탈리아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비록 상원 과반에 실패하여 옛 집권당과의 연정은 불가피했지만 베를루스코니는 그 동안 스스로 저지른 불법행위로 확실하게 제명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후에 튀니지에서 150km 떨어져 있는 람페두사 섬에 소요 사태를 피해 들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이들에 대한 처우에 상당한 고민에 빠졌다. 특히 2011년 리비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보트 피플들을 강제 송환시키던 리비아 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아프리카 난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영국과 독일은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아랍의 봄 여파로 인해 시리아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면서 대량의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고 이는 브렉시트에 이어서 유럽 연합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유로 경제권의 불균형으로 위태로운 상황이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EU의 붕괴론까지 부상하며 아랍의 봄 여파가 유럽에서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랍의 봄은 러시아와 CIS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00년대 혁명이 있었던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및 인근 국가들도 전면적으로 국가 내부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러시아에서도 브콘탁테를 통하여 반정부 시위들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비리 등이 심했다. 그러나 이 아랍의 봄의 영향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2014년 유로 마이단 사태를 일으켜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중앙아시아 건너 카스피 해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반 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며 남부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아르메니아에서도 2008년부터 부정선거로 의혹받았던 샤르키샨 전 총리에 대한 불만과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총리의 독재를 끝내는데 실패했다. 처음에는 민주화를 기치로 중동의 독재자들이 붕괴되어 가는 민주주의의 승리에 응원을 보내던 서구권은 이후 생각보다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가 독재를 대신하고 이들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신(新)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충격과 공포로 난민들과 중동의 민중들을 차별하게 되고, 과거 동구권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을 지지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었던 것과 다르게, 독재 타도를 외치는 반군에 대해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반군을 지원하는 물자와 무력 개입, 정치적인 압력을 동원하여 지원해준 다음 민주주의 선거로 수장이 뽑힐 정부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친(親) 서방 정권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반대로 샤리아를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의 성격을 띄고 있다면 세속주의 친(親) 서방 정권인 독재자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성립되었다. 이 아랍의 봄 사태는 유럽이 갖고 있던 냉전 시대부터 이어온 민주주의의 우월성이라는 믿음에 크게 생체기를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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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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