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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동 사막의 자유로운 영혼, 아랍인과 같지만 다른 의미의 이름인 베두인 이야기
    베두인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에서 아랍이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학설도 존재하고 있으며, 베두인이 오래전부터 아랍이라고도 불린 것은 많은 비문과 사료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꾸란에 나오는〈아랍〉도 사실상 베두인을 정의하는 단어이다. 베두인의 언어는 꾸란의 언어로도, 도시 주민의 언어로도 사용된다는 내용은 대부분의 사료에 기술되어 있는데, 이는 아랍어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베두인의 것이라는 학술적인 근거가 되고 있다. 한편 예언자 마호메트는 베두인들이 좀처럼 이슬람 화 되지 않는 종족이라고 비난했다. 사실 메카라는 상업도시에서 태어난 이슬람이 사막에서 이동 생활을 하고 있는 부족들에게까지 침투하기까지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베두인들은 전통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평등주의나 민주주의는 이슬람의 근본사상인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고 하는 구절과 연결된다고 생각된다. 메카라는 도시의 정착 문화도 사막의 베두인들과의 연계 선상에서 처음으로 성립해 있었기 때문에 이슬람의 발생과 그 성격으로 인해 베두인 문화의 영향이 없었다고는 단언하기는 어렵다. 이슬람 이전의 아라비아 사회는 베두인의 부족사회와 관련해서 혈연관계를 중요시하는 사회였다. 그러한 부족주의를 배제하고 유일신인 알라와의 관계를 중요시 하는 공동체인 움마를 지향하는 것이 이슬람이었다. 그 이념은 현재에도 변함없지만, 베두인 사회의 부족주의와 혈연주의가 한 번에 제거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앞에 서술한 평등주의 등과 함께 병존하고 있는 것이 그 실정이다. 그러나 베두인의 이동 생활은 최근에 급속하게 변화해 오고 있다. 중앙정부가 확립한 토지 제도의 변화와 철도, 자동차, 비행기 등 근대 교통 기관의 도입, 그리고 사회 경제의 진전에 따라 정착 생활자에 대한 노동 수요의 증가 등의 요인들이 겹쳐, 정착 생활에 들어가는 베두인이 증가하고 있다. 이동을 계속하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그 자체도 차가 낙타를 대신하며 근대적 상품이 사막 깊숙이 전해져 들어가자 현재는 이에 대한 영향을 받아 큰 폭으로 변화해 오고 있다. 베두인들이 유목을 하면서 방목되는 동물은 양, 염소, 소, 당나귀, 낙타, 말, 물소 등으로 분류된다. 유목이라는 경제 환경은 원시적이라는 선입견을 주게 되는데, 이러한 이유는 18~19세기 이후, 농업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달성한 이후부터 농경민으로 변하면서 현재와 같은 현대 문명을 받아들여 유목에 대한 경시현상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유목은 수렵 채집 경제의 연속이 아니라, 농경 다음으로 생겨난 생활 경제 양식이라는 것이 여러 인류학적 자료를 토대로 실증되었으며, 경작이 불가능한 토지를 이용하기 위해서 나타난 새로운 세련된 생계 경제 방법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라비아 반도의 남단에는 급속한 사막화로 인해 농경 지대가 한계에 달해, 상당한 양의 유목 잉여 인구들이 생겨나면서 농경 민중에서 용감한 사람들이 경작이 불가능한 바디야에(Badiyaye)의 가축을 데리고 북상하여 목초지들을 찾아 갔다. 그러한 부분이 베두인의 시작으로 간주하고 있다. 베두인이라는 호칭에 의하면 전통적으로 높이 자랑할 만한 생활을 하는 용기 있는 사막 민족이라는 의미와 도시의 문명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멸시의 의미가 함께 들어 있다. 따라서 반(半) 정착 생활을 하면서, 목축과 농경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상황에 따라 바드우(Badu)라고 지칭되는 것을 좋아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 싫어하기도 했다. 아라비아 반도는 국가 성립 시기가 매우 늦고 비잔틴 제국과 사산 왕조 페르시아 사이의 완충지대로써 국가가 없는 시기가 매우 오래 지속되었기 때문에 베두인의 씨족 사회끼리 서로 전쟁이나 상업적인 거래를 하곤 했다. 간혹 어떤 씨족이 강성하게 되어 짧게 왕국이나 제국을 세우는 일은 있었지만 모두 빠른 시기 안에 붕괴되어 버렸다. 그렇게 이슬람이 탄생하기 전까지 씨족 사회가 변함없이 지속되다가 이슬람의 성립과 함께 하나의 종교와 국가 아래 통합되고 베두인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매우 강해지게 된다. 원래는 부족 제도의 특성에서 오는 분열성이 심하고 그 중심에는 씨족 간 정쟁이 그치지 않아 좀처럼 연합하지 못하는 부족체였다. 이를 두고 이슬람의 위대함이라는 것은 이러한 분열 상태의 베두인들을 하나의 지도자 아래 결집시켜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라고 할 정도였다. 유목민족으로써 성격이 사납고 전투에 있어서는 매우 무자비했기 때문에 초기 이슬람의 세력 전파에 가장 중추적인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다. 초기 이슬람의 세력 전파 이후 군영 도시의 주요 구성원들이 베두인들이고 외지인들 중 누군가가 찾아와서 의탁하더라도 하루에 차 한 잔씩 주며 3일은 무조건 보호해주는 규칙이 존재하고 있었다. 국가 이전의 부족 사회에서는 동, 서양을 막론하고 개인이나 개성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며 씨족과 가족 등 혈연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아직도 많은 베두인들이 옛 삶의 방식을 고수해오고 있기 때문에, 씨족 개개인에게 나타난 모독 현상을 씨족 전체에 대한 모독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크다. 이는 씨족 개개인이 모여 이룬 씨족의 부족화 현상으로 씨족 구성원 중에 한 명이 모독으로 받아들이면 전체 구성원에 대한 모독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요르단, 이스라엘, 레바논 등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계통의 부족들은 자신의 조상이 베두인이라는 것을 무척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리고 베두인의 후손들은 확실하게 가족 소개를 들어보면 적어도 자기 6~7대 조부 이름까지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이슬람 전통이 강한 씨족들도 자기 기준으로 4대까지만 외우고 있는데 이 또한 베두인의 영향이라 볼 수 있겠다. 베두인들은 유목민이지만 모두 유목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전부터 상인이 되어 중개 무역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도시나 마을로 가서 정착하여 농사짓고 장사를 하여 정주민족들과 어울려 살기도 했다. 또한 어업에도 종사하여 어부로 사는 베두인들도 있다. 현재는 현대 문명이 들어옴에 따라 베두인들의 생활도 많이 변화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이 도시와 마을로 이주하여 생활하고 있다. 아직도 유목 생활을 하는 베두인들은 전체 인구에서 고작 5%에 불과하며 반(反) 유목 생활하는 베두인들조차 10%에 불과하다. 특히 중동과 북아프리카는 사막화로 인해 유목이 갈수록 어려워졌기 때문에 더 이상 유목 생활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스라엘에서도 베두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시나이 지역을 지배할 당시에 이들에게 막대한 지원과 혜택을 부여하면서 팔레스타인과 기타 지역에 거주한 베두인-아라비아 인에 비해 매우 우대했다. 사실 이스라엘의 입장에서도 신생 국가였었고 인구가 적은데 본토 땅에서 3배에 달하는 시나이 지역에는 추정으로만 해도 100~200만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인구와 비슷하다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전쟁이었기 때문에 전사로 자라나는 전투민족인 시나이 지역의 베두인들에 대해 대우가 좋지 못하면 게릴라전 등의 반군이 되거나 본토에 있는 군대를 더 많이 동원하여 전투를 벌여야 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게다가 사막 기후이면서 사람이 거주할 만한 도시나 오아시스 마을이 적었기 때문에 군대 및 민간인 거주지로서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베두인들을 적으로 돌려 대립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들에게 거의 자치주와 같이 치안을 맡기고 돈이나 생필품까지 지원해면서 최대한의 갈등은 자제했다. 그러나 지속적인 지원에 한계를 느낀 이스라엘이 결국 시나이 지역을 포기하고 이집트에게 시나이 지역을 돌려주면서 이제는 이집트에게 큰 장애물로 남아버렸다. 2012년 시나이 반도 지역 베두인과 이집트의 충돌이 더욱 심해져 중국인들을 납치하여 수감된 동료 석방을 요구하는 등 2012년 2월에는 한국인 관광객 3명이 베두인들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29시간 만에 석방되었는데 납치에 대한 사건에 대해 사과도 하고 먹을 것을 잘 주는 등, 대우는 매우 좋았다고 한다. 외국인 납치를 자주 벌이긴 하지만 이들을 학대하지 않고 모두 무사히 석방시켜 탈레반과 같은 근본주의적 테러 단체와 차원이 다름을 보여주었다. 그러다보니 서구권에서도 베두인들을 테러집단으로 정하지 않고 있다. 한편 요르단에서는 베두인들이 국가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 인구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스라엘에 이주해온 팔레스타인 베두인들이 더 많지만, 원래 요르단은 건국 자체가 베두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다. 특히 요르단 정계에는 베두인이 많으며 베두인 족장들의 경우 요르단 내에서 고위직이 많기 때문에 국왕과 왕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나타난다. 베두인으로 이루어진 요르단 군은 아랍권에서 최정예 군대라고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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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 EU 의회 선거 결과에 따라 국제정치의 다변화 가능성
    지난 6일부터 시작된 EU 의회 선거가 어제 9일에 끝나고 현재 개표 중에 있다. 지난 5년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브렉시트로 인해 탈퇴한 영국을 제외하고 EU에 속한 모든 국가가 치르게 된다. 이번 선거에는 영국의 탈퇴 이후, 처음 치뤄지는 선거라 EU 의회 내 회원국들의 할당 의석이 재조정되어 27석이 프랑스를 포함한 회원국들에 추가적으로 할당되었으며, 46석이 줄어들어 총 705석으로 줄어들었다. 일부 국가 출구 조사와 선거 전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1차 예측 결과를 발표한 것에 따르면 예상대로 극우 세력의 정당들이 크게 약진했다. 프랑스 EU 의회 선거 출구 조사 결과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약 32%의 득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으며 독일은 보수 성향 기독민주당(CDU), 기독사회당(CSU) 연합이 29.5%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독일대안당(AfD)이 상당한 선전을 보였다는 것에 있다. 이 정당은 EU 의회 선거를 앞두고 뇌물 스캔들과 나치 옹호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어 EU 의회 ID에서도 퇴출당했었지만 그래도 독일 국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유럽 내에서 우익 세력이 득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 극우파들은 타 지역들과 비교했을 때 보통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적 반공주의 좌익보다는 세속적인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나타난다. 물론 세속적 서양 극우파들도 기독교를 내세우는 경우도 많은데 대게 교리에 기반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세속적 기독교 정체성주의이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기민당이나 기사당이다. 다만 동유럽 지역과 일부 서유럽, 남유럽 나라들도 예외로 종교적 근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합쳐진 혼종 극우도 존재하지만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데도 유럽 내에서 이같은 극우세력들이 다시 환대 받는 이유는 정세 불안으로 인한 경제 악화, 그리고 이를 만회하지 못하는 기성 정권에 대한 불신과 이들의 무능에 대한 규탄, 그리고 책임 지지 못할 각종 포퓰리즘 정책과 더불어 리버럴리티들과 좌파 세력의 공조로 이루어진 무분별한 난민 입국, 그리고 최악의 물가 상승 등이 한꺼번에 겹쳐서 그렇다. 이러한 반(反) 이민주의는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고취로 이어지며 그로 인한 변형적인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이어진다. 물론 모든 정체성 정치가 극단주의와 결부되는 것 또한 아니지만 현재 같은 상황에서 충분히 극단주의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통해 여러 정체성의 특수성이 부각되면서 여론은 수많은 갈래로 분열한다. 이렇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각 집단은 극단주의화 될수록 유리하다. 특히 유럽에서 고조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극우 특유의 선민의식(Elitism)과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을 한꺼번에 주입시켜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Exclusion) 및 공격성(Aggression)을 발동시키고 선동하는 것에 특화된 방향으로 진화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의 일례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을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독일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당하며 막대상 배상금까지 떠 안게 된 독일은 모든 국민들이 좌절한 상태였고, 무능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나타나 자신들이 좌절하게 된 것에는 무능한 정부와 유태인들 때문이라는 인종적 배타성(Racial Exclusion)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피해의식들이 모여 또 다른 군중심리(Herd mentality)가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이는 강한 공격성(Aggression)을 띄게 되어 결국 유태인, 로마인(집시) 등의 타 인종, 민족 말살로 이어진다. 그 다음 상대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자신들, 독일인들에게 잊지 못할 좌절감을 안겨 준 영국, 프랑스 등의 외부세력이었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게 된 것은 좁게 보면 전범들인 나치와 히틀러의 광기이지만 그 광기를 불러 일으킨 것은 패전국인 독일을 아예 빈사 상태까지 압박하고 몰아갔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승전국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으로 볼 때, 자국민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이들은 좌익과 우익의 리버럴리티들, 현재 집권하고 있는 EU의 인사들이었다. 거기에 자국민들은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그들끼리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EU 각 국의 국민들은 우선 자국민들에 대한 복지와 복리, 그리고 자국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원하고 있다. 더 이상의 난민을 거부하며 자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빠른 종식과 더 이상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중단까지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유럽의 어려움에 대한 타개 책에서 이 모든 상황이 러시아 때문이라 상정하고 국민들에게 이를 설득시켜 러시아에 대한 적대 및 히틀러 때처럼 전쟁을 획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히틀러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부가 나치당에 의해 안정되자마자 불만의 화살을 영국과 프랑스에 겨누었던 것처럼 모든 원인의 그 다음이 원흉이 러시아라며 러시아에게 겨눌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우려하고 있던 제3차 세계대전의 트리거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U 의회에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저들의 극우 정당들이 이기고 있다해서 마냥 좋아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反) 이민과 그린딜(Green Deal, 탄소중립목표 달성을 위한 EU 정책) 반대를 내세우는 극우 정당들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그 동안 러시아에 대해 강경 노선들을 취해 왔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집행위원장이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이탈리아 총리에게 연정 및 협력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집행위원장 재선을 위해서는 EU 의회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안정적이기 때문에 멜로니 총리가 속한 EU 의회 정당 보수 개혁 연합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EU는 히틀러가 행했던 인류사의 잔인한 폭력성을 되돌아봐야 한다. 지난 6일, EU 의회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을 맞아 행사를 치뤘다. 이 행사에서 세계 대전을 종식시키는데 최대 공을 세운 러시아 (당시 소련)을 배제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참석시켰다.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나치고 뭐고 따지기 전에, 소련의 역사를 지우고 소비에트의 일원이었음을 부정하는 젤렌스키를 초정한 것은 큰 행사의 의미를 퇴색시킨 셈이다. 그 또한 서유럽은 히틀러와 나치가 행했던 교훈을 잊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번 EU 선거를 특별하게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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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민족주의, 전쟁, 학살 등 보스니아 - 크로아티아 전쟁의 전범,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이 법정에서 음독 자결한 이유
    2017년 네덜란드 헤이그의 국제유고전범재판소 법정에서는 모스타르 학살을 주도한 슬로보단 프랄략(Slobodan Praljak)이 11월 29일 최종 판결을 위해 재판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 당시 이 재판은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있었으며 최종적으로 보스니아 무슬림에게 반인도적 범죄를 저지른 그에게 20년 형을 선고했다. 판사는 프랄략에게 죄를 인정하는지를 묻자 “Bull shit (헛소리)! 나 프랄략은 전범이 아니다. 당신의 판결을 경멸하며, 거부한다(Ja, Praljak, nisam ratni zločinac. Prezirem i odbacujem tvoj sud).”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작은 병에 든 액체를 마셨다. 이 액체를 모두 마신 뒤 “방금 내가 마신 것은 독약이다(Ono što sam upravo popio bio je otrov)”라고 소리쳤다. 이는 전 세계에 생중계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희대의 자살극이었다. 그러자 재판은 중단되었으며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사망했다. 현대적인 국제전범재판이 시작된 이후 사상 처음으로 벌어진 희대의 사건이었다. 무엇이 프랄략을 죽음으로 몰고 갔으며, 그 죽음에 대한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정에서 자살로 사망한 프랄략은 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꽤나 유명한 연극인이었다. 그는 희곡작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각국 언론들이 프랄략이 독약을 마시기 전후 그의 외침 자체가 연극 대사와 같았다고 판단한 이유가 그의 본 직업에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 살아 있다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연극계 원로로 평온한 노년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생이 바뀐 것 역시 보스니아 전쟁 때문이었다.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공화국 대통령이 이끌고 있던 크로아티아 민주동맹의 창당 인사 중 한명인 프랄략은 크로아티아 방위협의회(HVO,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민병대)의 사령관을 맡으면서 군인으로 변모했다. 전쟁 초기인 1992년 보스니아 내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은 상호 협력적인 관계였다. 유고슬라비아 연방군 및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민병대가 포위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남부의 도시인 모스타르를 보스니아 무슬림들과 함께 지켜냈다. 하지만 1993년 초,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 카톨릭 세력 간에 전쟁이 발생했고 크로아티아계와 무슬림 간의 전쟁에서 모스타르를 파괴하고 주민들을 학살한 것은 이 프랄략의 군대였다. 이 전쟁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크로아티아인 거주지역을 병합하여 완전한 크로아티아의 영토로 만드려는 투지만 대통령이 기획한 전쟁이었다. HVO 크로아티아 민병대는 모스타르 내, 외부의 무슬림 거주민들을 집단 추방했다. 당시 수만 명이 추방되었으며, 약 1만여 명이 수감됐다. 수감자 중 노인과 여성은 학대를 받았고 상당수가 학살되었다. 피해자들에는 세르비아계사람들과 집시도 포함되었다. 프랄략이 사망하기 1주일 전, 역시 ICTY에서 민족학살과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은 라트코 믈라디치 세르비아계 스르브스카 군 사령관 또한 모두가 거짓말이라 외치면서 판결에 승복하지 않은 것과 같이 프랄략도 이 판결을 거부했다. 종신형을 받은 믈라디치와 다르게 프랄략은 고작 20년 형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자살을 하지 않았더라면 가석방 될 가능성도 있었다. 이는 ICTY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미 13년을 복역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미 형기의 3분의 2을 마친 죄수는 석방시키는 것이 관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는 머지 않아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획 자살을 한 이유로 볼 때 스스로 전쟁 때부터 만든 원칙인 크로아티아 독립과 통합이라는 하나의 대의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같은 날 10~25년 형을 받은 6명의 전범들은 모두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로 모스타르 학살과 관련이 있었다. 물론 세르비아계에 비해 전쟁 범죄에 대한 규모는 적었던 것으로 판단했지만 크로아티아계 역시 민족청소, 전쟁범죄,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음을 공식적으로 인정을 한 것이 이 날 재판 판결의 핵심이었다. ICTY는 투지만이 스스로 녹음해 두었던 방대한 대화와 통화 녹음 테이프를 통해 투지만이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의 HVO 군에 돈과 차량, 무기 및 군지휘관을 지원한 배후였다는 것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는 보스니아 전쟁 범죄의 주체는 세르비아계라는 국제 사회의 통념에서 벗어나 크로티아계 역시 투지만으로부터 수직적으로 내려온 기획 범죄의 일원이었다는 점을 밝혔다는 것에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갖는다. ICTY는 프랄략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이날 판결 내용을 거듭 확인했다. 전쟁 범죄를 저질렀던 정치 및 군사 지도자들을 포함해 범죄집단(Joint Criminal Enterprise)이라는 용어를 새로이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한편 세르비아계는 이미 1990년대 초부터 민족 청소의 주범으로 세계의 지탄을 받았었다. 그러나 당시의 판결로 인해 크로아티아계까지 민족 청소의 주범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다. ICTY에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재판 중 옥사한 것과 다르게 투지만은 ICTY가 기소를 완성하기 전인 1999년 자연사했다. 물론 그가 살아 있었다면 크로아티아인들이 국부로 모시는 투지만 역시 ICTY 법정에 섰어야 했다. 믈라디치와 마찬가지로 프랄략은 투옥되면서 복역 중에 양심수였고 자신의 억울함을 피력했었다. 믈라디치가 판결 이후, 자신은 이미 늙은 사람이라서 이와 같은 판결은 중요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족들에게 앞으로 남길 유산이라고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프랄략이 법원에서 한 절규는 자신의 무죄만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크로아티아계가 전후 누려온 면책이 끝나고, 또 다른 악마화의 대상이 되는 것을 죽음으로 항변하려 했던 듯 싶다. 믈라디치가 현재 세르비아인들의 영웅인 것과 같이 프랄략은 크로아티아인들에게 있어 영웅이자 순교자로 여기고 있다. 보스니아 내, 외부의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에 그의 죽음을 순교로 보았고 그를 카톨릭의 성인으로 받드는 분위기까지 감지되었다. 당시 11월 29일 당일 보스니아 크로아티아계 지역에서는 프랄략에 대한 추모 미사와 촛불 추념회가 열렸다. 당시 안드레이 플렌코비치 크로아티아 총리는 프랄략의 자살이 ICTY의 부당한 판결 결과에 대해 저항하라는 메시지였다고 말했다. 당시 보고를 받은 콜린다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급거 귀국했고 그라바르 키타로비치 대통령은 지난 주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서 열렸던 공식행사에서 세르비아계의 공격으로부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를 방위한 프랄략 장군의 위업을 평가하는 책을 낭독하기도 했다. 그러나 피해자인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반응은 달랐다. 전쟁 중 크로아티아계에 구금됐던 한 무슬림 퇴역 군인은 AF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슬픈 일이다. 하지만 프랄략은 형량을 다 채웠어야 했다(Žalosno, ali Praljak je trebao odslužiti kaznu).”고 언급했다고 한다. 보스니아 내전 이후, 사망한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의 아들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는 AP통신과의 인터뷰에서 “프랄략씨는 훌륭한 영화감독이었다. 모스타르를 파괴하는 대신 모스타르에 대한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Gospodin Praljak je bio veliki filmaš. Umjesto što je rušio Mostar, trebao je snimiti film o Mostar).”고 말하기도 했다. 이날을 끝으로 ICTY는 껄끄러운 상태에서 끝을 보게 됐다. 당시 선고는 1993년에 설립된 ICTY가 문을 닫기 전에 열었던 마지막 공판이었다. 이는 희대의 자살사건 때문에 명예롭지 못한 퇴장을 하게 되었다. 프랄략의 자살은 국제 사회가 주장해 온 정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보스니아 전쟁 이후,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무슬림 사회에서는 극우적인 민족주의가 더욱 견고해졌다. ICTY가 막으려고 했던 악의 근원이 바로 이와 같은 비뚤어진 심리의 민족주의 이념이다.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가장 중요한 전범 재판이었다는 ICTV가 과연 정의를 구현했을지는 알 수 없다. 무슬림과 세르비아 정교, 크로아티아 카톨릭계가 연방을 이루고 있는 상황에서 이상하게 종결된 전쟁, 보스니아의 평화는 아직도 위험한 줄타기를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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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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