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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틴아메리카에서 포클랜드 섬만큼 영토 분쟁이 치열한 섬 사우스조지아(South Georgia) & 사우스샌드위치(South Sandwich) 제도
    라틴아메리카에서 유럽과 영토 분쟁 지역은 영국과 아르헨티나 가 맞서고 있는 포클랜드 제도이다. 그러나 포클랜드 제도 못지 않게 대립이 첨예한 곳이 있다. 그곳은 남대서양에 위치한 사우스조지아 섬과 사우스조지아 동쪽의 작은 섬들인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이다. 이 섬들은 현재 영국의 해외 영토이자 속령으로 이 섬들은 남대서양 본 바다와 스코샤 해의 경계가 되고 사우스샌드위치 제도 남쪽은 웨델 해가 된다. 사우스조지아 섬의 면적은 3,756㎢ 정도고 섬의 최고봉인 파제 산의 높이는 거의 3,000m에 가까울 정도로 높다. 사우스조지아 섬의 산악 지대는 빙하로 덮여 있고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는 활화산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는 무인도이지만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현재 주민이 살고 있다. 이 섬들은 영국이 실효 지배되고 있는 섬들 중 가장 남쪽에 위치해 있다. 남극을 제외하면 지구상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지역이라 볼 수 있다. 이 섬들은 모두 남극 수렴선 남쪽에 위치해 있다. 수렴선 남쪽이 일반적으로는 남극 권역으로 간주되고 있다. 남극의 차가운 바닷물과 북쪽의 따뜻한 바닷물이 경계를 이루는 선이 바로 수렴선인데 한 때 같은 행정 구역으로 묶여졌던 근처의 포클랜드 제도의 경우, 위도는 비슷하나 지형의 영향으로 남극 수렴선 북쪽에 있다. 특히 사우스조지아 섬은 수렴선 남쪽에 위치한 육지들 가운데는 가장 먼저 발견된 섬으로 알려졌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1502년 남대서양을 항해하던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Amerigo Vespucci)가 목격했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베스푸치의 항해일지 등을 분석한 결과 베스푸치가 이 섬을 목격했을 가능성은 부정되었다. 1675년에 런던의 상인 안토니오 라 데 로치(Antonio La De Rochi)가 항해 중에 이 섬을 발견한 것으로 여겨지고 1775년 영국의 제임스 쿡 탐험대가 남극을 탐사하는 도중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여 영국령임을 선언하고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3세의 이름을 차용하여 조지아 섬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사우스조지아 남동쪽에 위치한 사우스샌드위치 열도 가운데 남쪽 8개의 섬들은 역시 1775년에 제임스 쿡이 발견했고 북쪽 3개의 섬들은 러시아의 탐험가 파비안 고틀리프 폰 벨링스하우젠(Фаддей Фаддеевич Беллинсгаузен)이 1819년에 발견했다. 그러다가 1904년 카를 안톤 라르센(Carl Anton Larsen, 1860~1924)이라는 탐험가 겸 포경업자가 이곳에 포경을 위한 시설을 만들고 첫 정착이 시작되면서 그리트비켄(Gritvican)이 만들어졌다. 참고로 1913년 10월 8일에 남극에서 최초로 탄생한 인물로 알려진 솔베이 군비에르그 야콥센(Solveig Gunbjørg Jacobsen, 1913~1996)이라는 인물이 이 섬에서 태어났다. 야콥센은 노르웨이와 영국 이민자들을 위한 교회도 세웠는데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인 어니스트 섀클턴(Ernest Shackleton, 1874~1922)도 이곳 교회에 묻혀 있다. 섀클턴은 남극을 탐험하는 도중 사우스조지아 섬에 상륙하고 곧바로 구조선을 수배했지만, 세 차례나 이어진 시도에도 불구하고 엘리펀트 섬에 상륙하지는 못했다. 남반구는 이 시기가 한겨울이었고, 남빙양의 얼음과 풍랑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첫 번째 구조선은 얼음에 막혀 되돌아왔고, 두 번째 구조선은 심하게 망가졌으며, 세 번째 구조선은 침몰 직전까지 가고 말았다. 영국 역시 전쟁 중이라 배를 구하기가 힘들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4개월의 시간이 흘러가고 말았고, 극한의 상황에서도 침착했던 섀클턴은 건강이 매우 나빠졌다. 결국 섀클턴은 심근경색으로 사망했고 사우스조지아 섬에 묻혔다. 이후 두 제도는 영국이 장악하게 되었고 포클랜드 제도와 하나로 묶여 관리되어 왔지만, 1985년에 별도의 속령(Dependent Territory)이 되었다. 현재는 용어가 바뀌어 영국의 해외 영토(Overseas Territory)로 구분되어 있다. 한 때는 고래 잡는 계절이면 인구가 1,000명을 넘어가기도 했지만 포경 산업이 쇠퇴하면서 인구가 크게 줄어들었고 현재는 공무원이나 남극 관련 연구원 등만이 남아 인구수는 30여명 정도 존재한다. 이곳은 현재 영국의 해외 영토지만, 지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나라는 아르헨티나이다. 영국과 아르헨티나는 20세기 초부터 지금까지 이 제도를 두고 영유권 다툼을 벌여왔다.1908년 영국 정부는 사우스조지아와 사우스샌드위치 제도를 합병해 근방 포클랜드 제도로 편입시켰으며 당시 영국은 아르헨티나와 칠레 정부에 서한을 보내 이와 같은 사실을 알렸으나 두 정부는 별다른 항의를 표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1927년 사우스조지아 섬, 1938년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1904년 노르웨이 포경업자들이 아르헨티나 본토에 포경회사 ’콤파베라 아르헨티나 데 페스카(CAP)’를 세운 뒤 사우스조지아에 처음으로 정착지를 설립하고 영업을 한 전력, 그리고 1905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기상 관측소를 세운 사실이 그 근거로 제시되었다. 섬을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영국인이지만, 이 섬에 최초로 거주한 사람은 아르헨티나인이라는 주장인 것이다. 하지만 아르헨티나는 영국과 법적 분쟁으로까지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1940~50년대에 들어 이 섬을 둘러싼 분쟁은 네 차례나 국제사법재판소(ICJ) 문턱까지 갔지만 재판 회부에는 실패했다. 아르헨티나의 반대 때문이었다. 양국이 분쟁을 벌이는 이유는 결국 해양 자원 때문이었다. 인근 해상에 매장되어 있는 석유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 제도가 남극 대륙으로 향하는 전진 기지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도 분쟁의 또 다른 이유이다. 현재 사우스조지아 섬에는 영국의 남극 해양 기지가 세워져 있다. 물론 양국의 영유권 분쟁은 1980년대 포클랜드 전쟁에 휘말리며 무력 충돌로까지 이어졌다. 1976년 아르헨티나 정부가 사우스샌드위치 제도에 군대를 파견한 데 이어 1982년 4월 아르헨티나가 영국령 포클랜드를 무력으로 점령하자 양국은 교전을 개시했다. 75일간의 전쟁 끝에 6월 14일 아르헨티나의 항복으로 전쟁은 종결되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아직도 영국에게 패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양국의 분쟁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현재까지 합의를 보지 못한 상황이다. 다만 국제사회에서는 이 제도들을 영국의 영유권으로 더 인정하는 분위기에 있다. 2009년 4월 두 나라는 사우스조지아 & 사우스샌드위치 인근 해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자료를 유엔 대륙붕한계위원회(CLCS)에 제출했다. 그러나 2016년 CLCS는 영국의 영유권을 인정하면서 아르헨티나가 다시 항소하고 있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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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영웅이자 대부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 명(明)과 암(暗)
    볼리바르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스페인 세력을 격퇴한 호세 데 산 마르틴과 과야킬 회담을 한 이후, 부장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1795~1830) 를 보내 아야쿠초와 후닌 전투에서 스페인의 부왕(副王, Viceroy)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원래 스페인의 부왕은 본국 군주를 대신하여 한 지역을 통치하는 직책으로 다른 나라의 총독에 해당하고 직책이다. 참고로 19세기 독립하기 전 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 령(領)으로 총독 직할지였으며 페루에는 페루 부왕령이 설치되어 있었다. 페루를 해방시킨 볼리바르는 남미 대륙에서 스페인 세력들을 영구히 일소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볼리바르는 지금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에 해당하는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의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몰락은 이러한 정점에 오른 이후부터 시작된다. 연이은 반란이 발생했고 권력 투쟁이 빈번했다. 그러는 사이 페루 남부가 볼리비아 공화국으로 떨어져 나갔고 1830년에는 결정적으로 정치권에서 실각한 뒤, 콜롬비아에 들어가 여생을 살았다. 정계에서 반강제적으로 은퇴한 이후 볼리바르는 지지자인 호아킨 미에르(Joaquín Mier)의 별장에서 지병인 결핵을 앓으며 요양하고 있다가 콜롬비아 북부의 산타 마르타 근처인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San Pedro Alejandrino) 농장에서 폐결핵으로 인해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러한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는 명과 암이 뚜렷하게 나타난 인물이자 장, 단점이 명확한 인물로, 인간적인 면이나, 그의 정치 철학과 성향에 대해서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자(El Libertador)로써 군인과 군에서 리더로는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1813년 10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카라카스 시에 입성한 볼리바르에게 수여된 칭호인 "엘 리베르타도르(해방자)"는 아무에게나 찬사받으며 수여되는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볼리바르에게 늘 따라다니는 악평은 그가 진정으로 해방하고자 했던 것인 스페인 혼혈 백인인 크리오요였고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인종주의자의 틀을 벗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코뮤니즘 이론을 창설한 카를 마르크스가 185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볼리바르를 언급하며 "가장 비겁하고, 횡포하며, 비참한 악당"이라 평가절하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인도에서는 영웅일지 모르지만 인류적으로 볼 때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심했던 마하트마 간디와 놀랍도록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볼리바르에 대해 변명이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당시 남미에는 유럽계 백인과 백인의 형질이 강한 메스티소 인종들의 인구가 더 많았고 개국 이후, 지배층들이 차루아, 테우엘체, 카웨스카르, 오나, 마푸체, 아파치와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토벌 및 학살하고 무력으로 원주민 땅을 합병했던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등과는 달랐다. 이는 현재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페루 등이 속해있던 옛 그란 콜롬비아 지역은 백인, 메스티소, 흑인, 원주민 등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독립국가 수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골수 왕당파 성향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그란 콜롬비아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피흘려 건설한 자유 민주주의 정부가 원주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무너질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에 있었다. 볼리바르가 유년기 때 그를 보살펴주고 키워줬던 흑인 노예 이폴리타에 대한 호의적인 기억으로 인해 흑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부분은 간디와의 차별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배경으로 볼 때 볼리바르의 원주민을 배제하는 정책이 반드시 인종차별의 의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현재 스페인-라틴 아메리카 학계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볼리바르가 딱히 백인 우월주의자인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들도 많다. 볼리바르는 어릴적에 자기 또래의 노예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친하게 지냈고 아이티에 망명했을적에 백인과 흑인이 뒤섞인 혼성 군인 아이티 군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적어도 흑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차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볼리바르가 다른 독재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독재의 패턴이 다르고 다른 자유 민주주의자들에게 인정 받는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독재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보통 독재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초심을 잃고 변해갔던 자들이 많았다. 이와는 달리 볼리바르는 이제 막 독립한 남미가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큰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지배가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권력으로 부정축재를 벌이거나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의 독재자로써 흔히 나타나는 전횡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했으면 그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켰으며,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인물들도 주동자만 국외로 추방하고 나머지는 석방시켜주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평생 재산에 대한 욕심도 없었는데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고 물러났을 때, 의회에서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물론 원래부터 볼리바르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독립 운동을 하면서 가산을 거의 탕진했고,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퇴임 후, 자신이 돌아갈 집조차도 없어 호아킨 미에르의 집에 머물렀으며 모아 놓은 재산도 없었기 때문에 퇴임 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47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을때, 의사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낡고 해진 셔츠를 보고 놀랐을 정도로 그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통일 라틴 아메리카 건설이란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혔던 안타까운 실패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민지 독립의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아르헨티나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지만,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식민지는 미국이나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합된 단일 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국력을 키우지 못해 이후에도 큰 혼란을 겪었다. 이는 지리적인 요인이 컸는데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칠레와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아르헨티나의 경우 지정학적으로 안데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과 대서양 연안의 해안 저지대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 후 단일국가를 건설하기 수월했다. 그에 비해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남미 식민지들인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페루, 에콰도르는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밀림, 소택지 등 고립되고 험준한 지리 지형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국가들을 통합시켜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일 국가를 남미 대륙에 수립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도 악조건이 적지 않았다. 워싱턴이나 산 마르틴, 오이긴스보다 더 훨씬 악조건을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시킨 미국의 13개 식민지는 거대한 연방으로서 세계 패권을 장악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했고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식민지 칠레,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식민지 아르헨티나는 통합에도 성공했으며 독립 이후 한 동안 라틴 아메리카 역내에서 세계 5위의 선진국이자 강대국의 위세를 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옛 그란 콜롬비아는 안타까운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이들 국가들이 볼리바르의 이상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볼리바르의 개인적인 문제도 있는데, 일단 볼리바르부터 독재자가 되어 종신 대통령을 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이 새로 건국한 공화국을 다른 인물에게 물려주었다. 정치적인 독재가 가능했음에도 악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면서 두 번 재임 후 은퇴한 조지 워싱턴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또한 볼리바르는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영향 받기는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흑인과 다르게 잠재되어 있는 적으로까지 여겼다. 볼리바르는 흑인을 제외한 유색 인종을 멸시했는데 이는 원주민 공동체 토지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그의 기여로 남미가 독립한 이후 원주민들의 처우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 있어 볼리바르는 새로운 식민지 독재자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다수 민족인 원주민들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볼리바르를 국부로 인정하지 않고 존경조차하지 않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페루와 볼리비아가 지금처럼 독립국가로 존재하며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볼리바르가 주도한 독립운동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애증의 대상 중 하나로 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원주민들만이 아니라 중국인 등 황인종 및 노예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란 콜롬비아 건설 이후, 아이티의 '흑인 혁명'에 대해 여타 크리오요들과 같이 매우 급진적이고 위험하다 생각했으며 이후 1812년 제1 공화정 실패 이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이는 본인의 군대에 가담하는 노예에 한해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 후 1816년 1월 아이티의 흑인 대통령 페티옹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로 약속했고, 아이티의 도움이 그가 식민지 독립을 성취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이후 독립 투쟁에 가담한 노예 농장주들에게 지위를 보장하기로 약속했고 1821년 그란 콜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미루어 노예 농장주들과 약속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흑인에 대해서는 그나마 나았지만 시종일관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으며 아이티 방식의 혁명을 경계했다. 볼리바르는 흑인 반란에 대해 스페인의 침입보다 1,000배 더 나쁘다는 발언을 하면서 흑인들의 반발을 샀다. 동시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던 물라토 지지자들에 대해 정치적인 탄압을 자행하면서 흑인 혁명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였다. 이는 그가 혼혈이었지만 백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크리오요라는 특권계층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큰 논란이 되었고 치명적인 결점으로 비판받았으며 지금에도 자주 회자되는 사건이 구아이라 항구에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 대한 배신이었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볼리바르와 다른 라틴 아메리카 통합론자들의 사상적인 스승었고 독립 투쟁의 선구자(Precurser)로 불리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계의 거물이었던 인물이다. 또한 미란다는 볼리바르를 매우 총애했는데 그를 세계적인 베네수엘라인, 혹은 나폴레옹에게 미치지 않은 돈키호테라고 불렸고,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기도 했으며 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차르,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과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던 명사였다. 그러나 미란다와 볼리바르가 세운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이 잇다른 악재에 시달리게 되면서 스페인 왕당파의 군세에 의해 수세에 몰리는 등 상황은 악화되자 볼리바르 자신이 지키던 독립파의 중요 거점이었던 푸에르토 카베요의 산 펠리페 성이 함락되면서 미란다는 이대로라면 독립이 좌절될 것이 우려되었다. 우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816년 7월, 왕당파와 휴전 협정을 맺고 영국으로 가서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자신을 따르는 장교들을 이끌고 구아이라 항구로 간 미란다를 체포해서 왕당파에 넘겼다. 그 대가로 자기 자신은 왕당파에게서 풀려나 미란다와 자신이 헌신했던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을 떠나 자메이카로 도주하는 역대급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 볼리바르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게 내린 죄목은 황당하게도 반역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볼리바르에게 있어 두고두고 흑역사로 남았다. 후일 본인이 실각된 후, 가장 후회되는 사건이라 회고한 것도 "구이아라 배신 사건"이었고 이는 볼리바르의 어두운 부분을 두고 두고 규탄당하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볼리바르는 정치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실패한 인물이지만 라틴 아메리카를 독립시킨 영웅으로써 가치는 아직도 살아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호불호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국부로써 존경도 받고 미움도 함께 받는 애증의 인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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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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