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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민주당, 바이든 대체론 대두… 해리스와 미셸 오바마 주목
    미국 대선 첫 TV 토론 이후 민주당 내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교체론이 제기되고 있다. CNN과 여론조사기관 SSRS가 실시한 조사 결과, 바이든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양자 대결에서 43% 대 49%로 뒤졌다. 반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와의 가상 대결에서 45% 대 47%로 박빙을 보였다. 해리스는 특히 여성과 무당층에서 강세를 나타냈다. 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결할 경우 여성 응답자의 44%만이 바이든을 지지했지만, 해리스 부통령에게는 절반인 50%가 지지를 보냈다. 무당층에서도 바이든은 34%의 지지를 얻은 반면, 해리스는 43%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해리스 부통령이 일부 유권자층에서 바이든보다 더 경쟁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가상 대결에서는 43% 대 48%로, 피트 부티지지 교통부 장관과의 대결에서는 43% 대 47%로 나타났다. 민주당의 또 다른 유력 후보인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와의 대결에서는 42% 대 47%로 집계됐다. 한편, 로이터와 입소스가 실시한 조사에서는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각각 40%의 지지율로 동률을 기록했다. 해리스 부통령과 트럼프의 가상 대결에서는 해리스가 42%, 트럼프가 43%로 오차 범위 내에서 1%포인트 차이를 보였다. 일각에서 꾸준히 민주당의 대안 후보로 거론되는 미셸 오바마 여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가상 대결에서 50% 대 39%로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했다. 오바마 여사는 백악관을 떠난 이후에도 저서 집필 등을 통해 대중과 꾸준히 소통하며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에는 참여할 뜻이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바이든 대통령의 '고령 리스크'가 드러난 첫 토론 이후, 바이든 측은 여론 조사 결과에 주목하며 위기론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질 바이든 여사를 비롯해 아들 헌터 바이든 등 가족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완주를 강하게 설득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CNN을 포함한 여러 여론 조사 결과는 바이든 대통령의 '토론 후폭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CNN 조사에서 민주당 및 민주당 지지자의 56%는 바이든 대통령 이외의 후보를 내세울 경우 대선 승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답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이 승리 확률이 높다는 답변은 43%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 1월 조사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이 경쟁력이 높다는 답변이 53%였던 것과 대비된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36%로 CNN 자체 조사 기준 최저치를 기록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강력하게 지지하지 않는다는 답변도 4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는 34%에 불과했으며, 비호감을 품은 비율은 58%에 달했다. 로이터 조사에서도 민주당 지지자의 32%는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밝혔다. 응답자의 59%는 바이든 대통령이 공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답변했다. 이와 같은 조사 결과는 민주당 내부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교체론이 더욱 힘을 얻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이러한 위기론을 잠재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론의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 뉴스
    • 지구촌
    2024-07-03

과학 검색결과

  • 애플, 새로운 AI 전략 발표: '시리'의 진화와 오픈AI 협업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WWDC 2024에서 애플은 자사의 최신 AI 시스템 '애플 인텔리전스'를 선보였다. 이 시스템은 이메일, 메시지, 지도 앱을 스스로 검색하여 사용자 질문에 답하는 능력을 보여줬다. 특히 시리가 대화의 맥락을 파악해 '거기'와 같이 모호한 표현의 의미를 자동으로 해석하는 진보된 기능을 갖췄다. 이번 전략의 핵심은 오픈AI와의 협력해 GPT-4o 기술을 시리에 통합했다. 또 필요시 챗GPT의 도움을 받아 사용자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애플은 통화 녹음과 대화 내용 요약 등 이전에는 제공하지 않았던 서비스를 새롭게 도입했다. 그러나 이러한 발표에도 불구하고 애플 주가는 발표 직후 1.9% 하락하는 등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일부 평가에서는 애플의 새로운 서비스가 삼성전자,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등 경쟁사에서 이미 선보인 서비스와 크게 차별화되지 않는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X 계정을 통해 애플의 이번 협력 전략을 강하게 비판했다. 머스크는 "애플이 자체적인 AI를 개발하지 못한 채 오픈AI에 의존하는 것은 보안과 사생활 보호를 보장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애플 제품의 회사 내 반입 금지를 언급했다. 반면 삼성은 애플의 발표 전날 새로운 광고 클립을 공개하며 자사의 갤럭시 S24 울트라의 AI 성능을 강조했다. 이 광고는 '애플보다 더 많은 것을 사과로 한다'는 테마로, 애플을 상징하는 '사과'를 이용한 창의적인 접근으로 주목받았다. 애플의 새로운 AI 전략과 관련하여 시장의 기대와 우려가 교차한다. 하지만 애플은 앞으로도 기술 혁신을 계속해서 추진할 계획이다. WWDC에서 공개된 기능들이 사용자 경험을 어떻게 변화시킬지 주목되며 경쟁사들과 기술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
    • 과학
    • 정보통신
    2024-06-11

칼럼 검색결과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30
  • 러시아와 스페인이 맺은 세기의 로맨스
    18세기 초인 1724년, 러시아인들은 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바다로 갈라놓는 베링 해협까지 탐험했으며 1741년에는 러시아인 선장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상륙했다. 알래스카의 원주민인 틀링깃족들이 종종 러시아인들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러시아의 군사력에 의해 모두 진압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알래스카 남부에 시트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러시아령 알래스카 식민지의 수도로 삼았다. 러시아인들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드넓은 시베리아를 정복해 나갔던 이유는 바로 여우와 수달과 담비 같은 동물들의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겨울이 길어 추운 날이 많았던 러시아에서 담비나 여우 가죽으로 만든 모피는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고급 상품으로 여겨졌다. 한 예로 1582년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의 코사크 군이 시비르 칸국을 정복했고 수많은 모피들을 노획하여 당시 차르였던 이반 4세에게 담비와 여우의 모피들 수만 장을 바쳤다. 수많은 모피들을 보고 감탄한 이반 4세는 시비르 칸국을 정복한 러시아군 사령관인 예르마크가 예전에 저질렀던 약탈죄를 비롯해 코사크 군 전원를 사면했다. 이렇게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정복해가면서 얻은 모피들은 러시아의 국가 경제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623년 시베리아의 러시아 인 관리들이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검은 여우 모피 두 장의 가격은 110루블인데, 그 돈으로는 말 10마리와 암소 20마리 및 100에이커의 땅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650년대에 이르면 러시아는 국가 수익의 최대 30% 가량을 모피 무역으로 충당할 정도였으니 그 가치는 실로 막대했다. 그래서 시베리아 정복에 나섰던 러시아 인들은 모피를 가리켜, “털이 달린 황금”이라고 불렀다. 1598년에서 1613년 동안, 러시아는 제위 계승을 놓고 러시아 동란 시대라는 최악의 내전을 맞이할 때 시베리아에서 얻은 모피로 인한 막대한 수익으로 인해 정부가 파산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모피는 러시아와 그 외의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선물이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1595년 러시아는 신성로마제국에 다람쥐 모피 33만 장과 담비 모피 6만 장을 선물로 보냈고, 1635년 오스만투르크에는 1만 루블의 모피를 휴전 협상에 사용할 용도의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의 과도한 모피 확보를 위해 야생동물들의 개체수가 줄어들자 알래스카와 북미 대륙에까지 진출했는데 그러한 이유는 바로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알래스카가 아시아가 아닌 북미 대륙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러시아 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799년 러시아의 무역 상인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Nikolay Petrovich Rezanov : 1764~1807)는 북미 대륙에 러시아의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한 사업체인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설립했다. 같은 해, 레자노프는 러시아 차르인 파벨 1세로부터 앞으로 20년 동안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북미 대륙에 진출하는 모든 거점에서 운영과 사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승인을 담은 면허장을 받았다. 이로써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러시아 정부를 대신하여 알래스카를 포함한 북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자격을 얻은 셈이 되었다. 레자노프와 그의 심복인 알렉산드르 안드레이비치 바라노프(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 1746~1819) 등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고위급 간부들은 알래스카를 식민지로 삼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북미 대륙의 더 남쪽까지 진출하려 하였다. 우선 모피 상인들이 탐내던 모피를 더 많이 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야 했다. 또한 알래스카 식민지에 차츰 러시아에서 유입한 인구들이 늘어나면서 사냥이나 고기잡이만으로는 식량을 충분히 공급하기가 어려워지자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지닌 따뜻한 남쪽의 땅이 필요했다. 레자노프는 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한 끝에 1806년 4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를 다스리는 스페인 장관인 호세 다리오 아르게우엘로를 만나서, 캘리포니아에서 알래스카의 러시아 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면, 그 대가로 모피를 주겠다는 무역을 제안했다. 당시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에서는 외부로 식량을 유출하는 일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세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레자노프는 고민을 하다가 호세 장관이 주선하는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호세 장관의 딸인 마리아 콘셉시온 아르게우엘로(Maria Concepcion Arguello: 1791~1857)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호세 장관의 외동딸로 당시 캘리포니아 제일의 미녀로 칭송받던 여인이었다. 15세의 소녀였던 마리아는 42세의 중년 남성인 레자노프와 만나자 사랑에 빠졌고, 이윽고 그와의 결혼까지 결심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호세는 크게 놀랐다. 당시 스페인 인들이 그렇듯이 호세 장관과 마리아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레자노프는 러시아 인이었기에 러시아 정교회를 믿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카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키톨릭 신자끼리만 결혼하도록 허용하는데, 다른 종파인 러시아 정교회 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세는 마리아에게 교회법상 레자노프와의 혼인은 허락할 수 없다고 여러차례 설득했으나, 사랑에 빠진 마리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레자노프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결국은 호세는 딸에게 굴복하게 된다. 6주일 후, 레자노프는 마리아와 일단 약혼식을 올렸다. 딸을 아끼던 호세는 사위가 된 레자노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빵과 말린 고기 등 식량이 가득 실린 수송선을 알래스카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이리하여 약혼식이 이루어졌지만,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에게, 앞으로 북미 대륙에서의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지원을 더 많이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북미 대륙에 정착할 대규모의 러시아 이민자들을 보내달라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자노프는 마리아에게 2년만 기다리면 꼭 돌아와서 정식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알래스카를 거쳐 캄차카 반도에 상륙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시베리아 대륙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던 도중인 1807년 3월 8일, 레자노프는 시베리아 중부 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사망했다. 대륙과 대양을 넘나들며 정신없이 사업을 벌이느라 피로해진 레자노프의 사인은 과로사였다. 지금도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남아 있는 레자노프의 무덤에는 마리아를 그리워하며 남긴 유언인 “나는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다오. 하지만 나는 결코 당신을 잊을 수 없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 하염없이 레자노프를 기다리고 있던 마리아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무척 상심하여 몬테레이에 수녀원을 만들고 수녀원에 들어가 평생 동안 수녀가 되어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1857년에 죽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이었지만, 마리아는 레자노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것 같다. 2개 대륙과 대륙, 종교와 나이를 초월한 사랑은 현재까지도 세기를 초월한 로맨스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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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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