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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알렉세이 나발니의 일생과 죽음이 미치는 영향 - 1부
    푸틴 대통령과 대적한 러시아의 반 체제 인사이자 횡령 사기범인 알렉세이 나발니(Алексей Навальный)가 지난 16일 야말-네네츠 제 3교도소에서 사망했다. 푸틴과 맞서온 그의 인생을 함 조망해본다. 그는 1976년 생으로 모스크바 주 부틴이란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나발니(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Навальный)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이고 어머니 류드밀라 이바노브나 나발나야(Людмила Ивановна Навальная)는 러시아 출신으로 그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인 셈이다. 나발니가 우크라이나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의 부친이 우크라이나인이기도 했고 본인도 우크라이나계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2010년대 타스통신에서 한 나발니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자신은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지만 한켠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신의 가계의 대한 내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친우크라이나계 인사였던 보리스 넴초프와 가깝게 지냈고 크림 합병에 대해 찬성하긴 했지만 당시 정치인으로써 나발니의 세력이 미미했기에 우선 자신의 인지도에 상처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전 시위 선동에서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때도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즉, 그는 대놓고 러시아인이면서 반러시아 행세를 했던 것이다. 나발니는 모스크바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오브닌스크에서 자랐으나, 어릴 때 여름에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그의 할머니와 지냈다고 한다. 나발니는 본인 스스로 어린 시절을 회상했을 때, 키예프의 생활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례적으로 쉬꼴라를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옮겨 키예프에서 쉬꼴라를 졸업했다. 그는 몸과 국적만 러시아인이지 속 전체는 우크라이나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1993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러시아 민족 우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98년 법학학사학위를 취득했고 연방 지원 금융 대학에서 증권과 투자, 환전, 그리고 금융 경제를 공부했다. 당시 러시아의 입장에서 1998년 모라토리움 선언하는 등,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금융 경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존의 법학에서 금융경제학으로 잠깐 외유를 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원래의 나발니의 성향은 좌파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계에 입문했고 2000년 진보주의와 사회, 녹색자유주의, 친유럽 성향이면서 대표적인 친서방 리버럴 정당인 야블로코(Яблоко)에 입당한다. 이 정당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 경제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지지하는 정당으로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의 유럽 연합 가입과 미국과의 우호관계 수립 등 서방과의 관계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정당이다. 여기서 활동한 나발니는 친서방 인사 및 미국의 정계권 인사들과도 접촉을 가지며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발니의 영어 실력은 러시아어 억양이 강하기는 하지만 단어 및 어휘선택이 탁월할 정도 유창했던게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 2004년 나발니는 피부색이 다른 카프카스계 군인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사람은 총으로 죽여야 하지만 바퀴벌레는 슬리퍼로 밟아 죽여야 한다.”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카프카스계 민족들을 매우 경멸했는데 카프카스 지역의 민족들이 러시아 경제권에 진입해 러시아인들의 취업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서 이민족들을 매우 싫어한 것이다. 그는 2006년 반 외국인 성향을 띈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을 승인해 줄 것을 모스크바 연방 특별시 시청에 청원하고 참관인 자격으로 이 시위에 참여했다. 말 그대로 성향 자체가 인종차별적인 면과 과격한 전체주의 나치의 성향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보면 된다. 나발니는 카프카스,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양인을 혐오했는데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자체가 그와 같은 성향을 띄고 있다. 즉, 유색인종 차별, 과도한 폭력성 자체의 광기 어린 모습을 갖고 있었더 것인데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당시 갖고 있던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및 무시, 차별, 폭력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도 당시 모스크바 마야꼽스까야에서 푸쉬낀스까야까지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시위 행렬에서 목소리 구호를 외치고 연설하며 독려하는 나발니를 본적이 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지만 연설하며 독려하는 표정과 그 제스처가 어딘가 많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 선동하는 그의 제스쳐와 참 많이 닮았다. 물론 그가 나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네오나치는 아닌듯 싶다. 나치 표식을 몸에 새기지 않았고 나치라 할만한 어떠한 물건도 발견된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발니는 2007년 야블로코로부터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적 활동 등으로 당의 규정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렀다며 제명 되어 버렸다. 야블로코 당에서 제명당한 이후에도 나발니는 '러시아인의 행진'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면서 "러시아 인민해방운동(Национального Русского Освободительного Движения, НАРОД)" 정당을 창설했다. 그리고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이 발발하자 나발니는 극우로 돌아서 당시 대통령인 메드베제프와 푸틴 총리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루지야(현 조지아)에 대한 적극적 봉쇄조치가 필요하며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그루지야 참모 본부를 공격해야 하고 남오세티야 공화국 상공을 지나는 모든 항공기들을 격추시켜야 한다고 적어 논란을 일으킨다. 또한 나발니는 러시아 내에 있는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들(грызуны)"이라 비하하며 그들을 전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전쟁 이후에는 남오세티야 공화국과 압하지야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언급해 조지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남오세티아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그동안 공부한 금융경제학과 투자에 관한 전문성을 내세워 2008년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루크오일, 그리고 수르구트네프트 가스, 이렇게 5개의 가스 회사 주식을 30만 루블 어치를 사들여 주주행동주의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회사들이 소유한 금융 재산의 투명성을 강조했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금융 관련 부패가 심각했었고 이 부분이 정치권과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특히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등에는 상위 직원들이 횡령과 회사 투명성을 차단하는 행위를 자행했고 이를 파악한 나발니는 주 정부의 부적절한 예산 지출과 부실한 주 정부 서비스 등을 지적하면서 연방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친서방 리버럴에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 서방 리버럴 인사들과 교류가 두텁고 반골 기질까지 있는 나발니를 주목한 것은 미국 정가였다. 그는 2010년 미국으로 들어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일 대학에서 World Fellows 프로그렘을 수행했다. 최근 미국 대통령 여섯 명 중 네 명이 예일 출신일 정도로 미국 정가와 뿌리 깊은 관계를 갖고 있던 예일 대학에서 나발니 수많은 리버럴 정가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푸틴을 비판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어떠한 권유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때를 계기로 그는 철저히 반 체제, 반 푸틴 인사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딥스테이트의 개가 되어 러시아로 돌아와 체제 전복을 꾀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그가 가까워진 인물이 바로 보리스 넴초프다. 그는 넴초프의 지지를 받아 트랜스네프트 가스 회사의 비밀 회계 감사 자료를 공개한다. 이 때부터 그는 반 부패 활동을 시작한다. 행정상 필요한 물자 조달 등을 모든 러시아 정부가 온라인에 게시 및 공고하여 입찰을 하도록 하는 로스필 프로젝트를 촉구했다. 일반 개인이 도로에 있는 구멍들을 러시아 정부에 보고하고, 러시아 연방 정부가 불만사항들에 응답하게 한 로스야마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러한 행위는 러시아 우파 정당들의 공격을 불러왔고 결국 나발니는 러시아 인민해방운동 해산했다. 2011년 6월 로이터와 영어로 능숙하게 인터뷰 했는데 "푸틴의 정치 체제는 부패에 의해 매우 약화되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에서도 5년 이내에 아랍의 봄과 같은 반정부 데모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며 러시아 내 반 정부 시위를 벌일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체제 개혁을 진행 중에 있던 푸틴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며 이를 규탄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시위를 야기했다. 그로 인해 2018년까지 10차례나 행정구류(Административный арест)를 당해 총 192일 간 구금되기도 했다. 처음에 러시아 국민들은 그의 반 부패 조사 행위를 응원했다. 소련 해체 이후, 경제적 침체와 공무원들의 부패에 시달리고 있던 시민들의 지지는 갈수록 올라갔다. 여기에 힘을 받은 나발니는 여러 곳에서 후원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것의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발니는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은 그대로 갖고 있었는데 치과 의사로 변장해 외국인들을 '러시아 민족의 뿌리를 뒤흔드는' 충치에 비유하며 추방을 요구하는 영상을 올려 논란을 빚게 된다. 그런데 이 영상에 환호하는 지지자도 있었지만 반 부패 척결에 적극 찬성하는 시민들은 이 영상을 보고 나발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를 토대로 보리스 넴초프가 있는 인민자유당(Партия народной свободы, PARNAS)에 입당했고 넴초프의 후원을 받아 2013년 나발니는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선거 유세 과정에서 그의 인종차별적 발언 등이 도마에 오르자 블로그를 통해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라 비하한 것을 사과한다'고 말했으나 전쟁에 찬성했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조지아인들은 시장 선거가 아니면 그가 사과했을까?, 혹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지아계 러시아인들의 표가 급했을 것이라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즉, 아무도 그의 사과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남오세티아 전쟁에 찬성했던 것에 대해 해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다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와중에도 중앙아시아 이민자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코카서스 급식 중단' 캠페인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런 그를 카프카스 민족들 중 누가 진정성 있는 사과라 볼 수 있겠는가? 당시만 해도 이러한 인종차별이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선거가 시작되고 27.24%, 632,697표를 얻어 선전했지만 세르게이 소뱌닌에게 밀려 결국 큰 차이로 낙선했다. 물론 선전은 했지만 타 민족 러시아계 시민들이 소뱌닌에게 몰표를 던졌기 때문에 낙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거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이끌고 시위를 조장해 또 다시 구류 조치를 당했고 2014년 12월 30일, 그는 프랑스 화장품 회사 이브 로셰의 러시아 연방 지사 등으로부터 3,100만 루블 (약 5억 9천만 원)을 횡령하여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징역 3년 6개월 실형에 3년 6개월 집행유예까지 추가하여 7년 형을 받는다. 재판이 끝난 후, 러시아 연방 법원 건물 밖에 모여 있던 지지자들을 향해 "현 정권은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붕괴돼야 한다. 오늘 모두가 가두 시위에 나서 달라"고 촉구하며 내란을 조장했다. 그리고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사기꾼들과 도둑놈들의 정당' 이라 비판했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보였으나, 2017년 12월 25일 러시아 연방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의 횡령죄 판결에 따라 나발니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게 된다. 이에 나발니는 지지자들에게 대선 보이콧을 촉구하며 2018년 1월 28일 대대적인 시위를 예고했다. 그러나 해당 시위는 결국 불법으로 규정되어 그의 지지자들 상당수가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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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12
  • EU 의회 선거 결과에 따라 국제정치의 다변화 가능성
    지난 6일부터 시작된 EU 의회 선거가 어제 9일에 끝나고 현재 개표 중에 있다. 지난 5년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브렉시트로 인해 탈퇴한 영국을 제외하고 EU에 속한 모든 국가가 치르게 된다. 이번 선거에는 영국의 탈퇴 이후, 처음 치뤄지는 선거라 EU 의회 내 회원국들의 할당 의석이 재조정되어 27석이 프랑스를 포함한 회원국들에 추가적으로 할당되었으며, 46석이 줄어들어 총 705석으로 줄어들었다. 일부 국가 출구 조사와 선거 전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1차 예측 결과를 발표한 것에 따르면 예상대로 극우 세력의 정당들이 크게 약진했다. 프랑스 EU 의회 선거 출구 조사 결과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약 32%의 득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으며 독일은 보수 성향 기독민주당(CDU), 기독사회당(CSU) 연합이 29.5%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독일대안당(AfD)이 상당한 선전을 보였다는 것에 있다. 이 정당은 EU 의회 선거를 앞두고 뇌물 스캔들과 나치 옹호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어 EU 의회 ID에서도 퇴출당했었지만 그래도 독일 국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유럽 내에서 우익 세력이 득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 극우파들은 타 지역들과 비교했을 때 보통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적 반공주의 좌익보다는 세속적인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나타난다. 물론 세속적 서양 극우파들도 기독교를 내세우는 경우도 많은데 대게 교리에 기반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세속적 기독교 정체성주의이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기민당이나 기사당이다. 다만 동유럽 지역과 일부 서유럽, 남유럽 나라들도 예외로 종교적 근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합쳐진 혼종 극우도 존재하지만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데도 유럽 내에서 이같은 극우세력들이 다시 환대 받는 이유는 정세 불안으로 인한 경제 악화, 그리고 이를 만회하지 못하는 기성 정권에 대한 불신과 이들의 무능에 대한 규탄, 그리고 책임 지지 못할 각종 포퓰리즘 정책과 더불어 리버럴리티들과 좌파 세력의 공조로 이루어진 무분별한 난민 입국, 그리고 최악의 물가 상승 등이 한꺼번에 겹쳐서 그렇다. 이러한 반(反) 이민주의는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고취로 이어지며 그로 인한 변형적인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이어진다. 물론 모든 정체성 정치가 극단주의와 결부되는 것 또한 아니지만 현재 같은 상황에서 충분히 극단주의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통해 여러 정체성의 특수성이 부각되면서 여론은 수많은 갈래로 분열한다. 이렇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각 집단은 극단주의화 될수록 유리하다. 특히 유럽에서 고조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극우 특유의 선민의식(Elitism)과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을 한꺼번에 주입시켜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Exclusion) 및 공격성(Aggression)을 발동시키고 선동하는 것에 특화된 방향으로 진화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의 일례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을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독일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당하며 막대상 배상금까지 떠 안게 된 독일은 모든 국민들이 좌절한 상태였고, 무능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나타나 자신들이 좌절하게 된 것에는 무능한 정부와 유태인들 때문이라는 인종적 배타성(Racial Exclusion)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피해의식들이 모여 또 다른 군중심리(Herd mentality)가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이는 강한 공격성(Aggression)을 띄게 되어 결국 유태인, 로마인(집시) 등의 타 인종, 민족 말살로 이어진다. 그 다음 상대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자신들, 독일인들에게 잊지 못할 좌절감을 안겨 준 영국, 프랑스 등의 외부세력이었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게 된 것은 좁게 보면 전범들인 나치와 히틀러의 광기이지만 그 광기를 불러 일으킨 것은 패전국인 독일을 아예 빈사 상태까지 압박하고 몰아갔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승전국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으로 볼 때, 자국민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이들은 좌익과 우익의 리버럴리티들, 현재 집권하고 있는 EU의 인사들이었다. 거기에 자국민들은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그들끼리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EU 각 국의 국민들은 우선 자국민들에 대한 복지와 복리, 그리고 자국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원하고 있다. 더 이상의 난민을 거부하며 자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빠른 종식과 더 이상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중단까지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유럽의 어려움에 대한 타개 책에서 이 모든 상황이 러시아 때문이라 상정하고 국민들에게 이를 설득시켜 러시아에 대한 적대 및 히틀러 때처럼 전쟁을 획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히틀러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부가 나치당에 의해 안정되자마자 불만의 화살을 영국과 프랑스에 겨누었던 것처럼 모든 원인의 그 다음이 원흉이 러시아라며 러시아에게 겨눌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우려하고 있던 제3차 세계대전의 트리거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U 의회에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저들의 극우 정당들이 이기고 있다해서 마냥 좋아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反) 이민과 그린딜(Green Deal, 탄소중립목표 달성을 위한 EU 정책) 반대를 내세우는 극우 정당들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그 동안 러시아에 대해 강경 노선들을 취해 왔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집행위원장이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이탈리아 총리에게 연정 및 협력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집행위원장 재선을 위해서는 EU 의회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안정적이기 때문에 멜로니 총리가 속한 EU 의회 정당 보수 개혁 연합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EU는 히틀러가 행했던 인류사의 잔인한 폭력성을 되돌아봐야 한다. 지난 6일, EU 의회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을 맞아 행사를 치뤘다. 이 행사에서 세계 대전을 종식시키는데 최대 공을 세운 러시아 (당시 소련)을 배제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참석시켰다.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나치고 뭐고 따지기 전에, 소련의 역사를 지우고 소비에트의 일원이었음을 부정하는 젤렌스키를 초정한 것은 큰 행사의 의미를 퇴색시킨 셈이다. 그 또한 서유럽은 히틀러와 나치가 행했던 교훈을 잊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번 EU 선거를 특별하게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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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발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 1900~1980)의 독재 통치기
    불가리아 인민공화국은 발칸반도에서 가장 러시아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 국가였으며,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무역총액 중 소련과의 무역이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유일한 국가였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소련과 불가리아의 우애를 주제로 한 군가도 나왔을 정도였으며 이웃 나라인 그리스나 터키에서는 때로는 민주정부, 때로는 군사 독재 정부가 들어섰다. 루마니아나 유고슬라비아는 개인의 통치 하에 소련과는 독립적인 정치를 했지만, 불가리아는 소련에 거의 종속되다시피 했으며 역설적으로 이는 불가리아가 알바니아에 이어서 유럽에서 두 번째로 후진적인 국가에서 발칸에서 조금이나마 잘 사는 국가가 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이는 원자재나 소비재를 소련으로부터 저렴한 가격에 공급받았기 때문이다. 한편 소련의 지원을 받은 지도자들이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와 발코 체르벤코프(Вълко Червенков), 이후에 나타난 토도르 지프코프(Тодор Живков)에 이르기까지 역대 공산당릐 수뇌부들은 매우 억압적이며 보수적이고 안정된 통치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불가리아 인들은 중앙 유럽의 공산주의 위성국가들인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폴란드 인들이 소련에 대항하여 자유화 운동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도 그런 움직임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공산 정권에 순응하고 있었다. 더불어 그러한 구조는 전형적인 현실 사회주의 국가가 아닌 전통적인 봉건국가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렇기 때문에 정권도 공산당 내 반대파들의 쿠데타로 무너진 셈이 되었다. 특히 체르벤코프 시대 때는 그러한 독재 통치가 더욱 강화되었고 따라서 그의 시대는 후술할 지프코프의 시대만큼이나 암울한 시대였다. 불가리아 디미트로프의 뒤를 승계한 사회주의자 체르벤코프는 1900년 9월 6일 불가리아 공국 소피아 인근의 즐라티차(Златица)에서 탄생했다. 1919년 공산당원이 되어 공산주의 청년단 활동과 신문 편집에 참여했으며 1923년 불가리아의 쿠데타에 가담해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이내 석방되어 소련으로 이민 갈 수 있었다. 1925년 체르벤코프는 소련으로 이주했다. 모스크바에서는 마르크스 레닌 학교에 다니면서 공산사상에 심취했으며, 이후에는 학교장이 되면서 교수를 겸직하기도 했다. 체르벤코프는 스탈린의 통치 방식을 지지했으며, 박식한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대한 지식과 수준급 입담과 재치로 유명세를 탔다. 이를 두고 소련의 내무인민위원회에서 "스파르타크"라는 별명을 지어줬으며 그는 이 필명을 평생동안 사용했다고 한다. 1941년, 불가리아로 귀국해 반(反) 나치와 친(親) 공산주의에 대한 메시지를 보내는 라디오 방송국의 국장이 되어 선전선동을 주로 맡게 되었다. 1944년 체르벤코프는 다시 소련으로 들어가 소련군을 돕다가 전황이 소련군에게 유리해지자 자신의 처남이었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과업을 돕기 위해 불가리아로 돌아오게 된다. 체르벤코프는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막내 여동생 엘레나와 결혼하여 처남매부 지간이 됐으며 디미트로프와 가족이었기 때문에 그의 권좌를 고스란히 승계받을 수 있었다. 체르벤코프는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공산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정부의 일원이 되었다. 체르벤코프는 1947년 문화부 장관 자리에 올라 공산주의를 찬양하는 프로파간다 작업을 하다가 1949년에 부총리가 되었다. 부총리가 된 직후, 불가리아의 지도자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가 사망했는데 이 때 불가리아는 임시로 집단적 리더가 되어 혼란을 최대한 방지했다. 체르벤코프는 디미트로프의 뒤를 이어 당 총서기가 되었고, 바실 콜라로프(Васил Коларов)는 디미트로프의 뒤를 승계하여 총리직을 수행하였다. 이 상황은 1950년 콜라로프가 1년 만에 갑자기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당시 콜라로프의 사망은 체르벤코프와 노선을 달리했기에 자신의 권좌에 굴복하지 않은 콜라로프를 제거하기 위해 독살한 것 아니냐는 의문이 재기되었다. 1950년 체르벤코프는 소련의 완전한 승인을 받아 불가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총리와 국가 수반의 직위를 결합해 통합 총리가 되었다. 체르벤코프의 정책은 당시 소련의 정책과 매우 흡사하였고 스탈린주의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작은 스탈린"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체르벤코프의 통치 시기에는 당 노선에서 벗어난 모든 일탈에 대해 가혹하게 탄압했다. 더불어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에 의한 문화 예술에 대한 독단적 탄압과 고립주의적인 외교 정책이 실행되었다. 이 시기에 체르벤코프는 디미트로프는 소련의 스탈린과 유사한 개인 숭배 대상으로 추대했고 스스로도 숭배 대상이 되어 각종 선전선동들을 감행했다. 같은 시기에는 불가리아의 집단화 운동도 함께 시작되면서 농업과 공업의 집단화로 스탈린식 사회집약화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체르벤코프는 1951년 초까지 완전한 당 내 규율을 위한 선전 활동을 벌여 많은 고위 관리를 포함하여 5명 가운데 1명을 숙청하고 적극적으로 제명했다. 그는 1953년까지 당원 460,000명 가운데 100,000명을 당에서 제명시켰으며 숙청하여 살해했다. 이러한 체르벤코프의 인격 숭배 대상의 모델은 스탈린 양식의 모델과 유사했으며, 소피아의 의과 대학교를 포함해 소피아의 다양한 장소에서 체르벤코프의 이름을 차용한 장소가 대거 생겨났다. 체르벤코프는 개인적으로 현 정세에서 개인숭배를 필연적인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그 어떤 극단적인 형태들을 강력히 반대했다. 1953년까지 불가리아는 서방과 관계를 단절했고,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 수출입의 90%는 소련과의 연대 및 파트너십과 관련이 있었다. 체르벤코프 내각은 농, 공업의 집단화 비율을 높이려고 협박과 공급 차별을 활용하게 되었고 이는 불가리아가 민주화 되었을 때 국가 전체가 빈곤에 벗어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선 체르벤코프 때 이와 같은 집단화로 인해 1950년부터 1953년까지 국유 경작지가 12%에서 61%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1949-1953년 사이의 5개년 계획은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으며, 그 기간 동안 불가리아는 농업 부문에선 -0.9% 성장을 기록했다. 반면, 같은 시기 산업 부문에선 20.7% 성장을 기록했으며, 경제성장률은 8.4%에 이르게 된다. 스탈린이 사망하기 전, 체르벤코프는 이미 스탈린주의 노선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디미타르 디모프의 소설 담배를 출판 허용한 일은 문화 활동에 향한 당의 통제가 약간 완화되었음을 보여주었던 사례로 남아있다. 1953년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관계를 재수립하였고, 일부 정치인에 대한 사면이 이루어졌으며, 기획자들은 소비재 생산 증가 및 상품 가격 인하를 논의했다. 그러자 스탈린주의자들의 방해로 인해 1953년 이후 체르벤코프는 불안정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고, 자신을 향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몇 가지의 조치를 취했다. 특히 1954년에는 당 지도부를 포기하고 불가리아의 경제 및 정계에 대한 소련의 개입을 줄였으며, 집단화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1955년까지 정치범 약 10,000명을 석방하여 자신의 노선을 완전히 탈바꿈했다. 1956년 4월, 흐루시초프의 탈스탈린화 이후 불가리아 공산당은 체르벤코프의 권위주의, 불가리아만이 갖고 있는 스탈린주의를 비난했다. 체르벤코프는 같은 해 직위에서 물러나 지프코프에게 직위를 양보하고 정계에서 은퇴함으로써 그의 시대는 끝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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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6
  • 세속적인 이슬람, 타타르스탄 러시아 연방 자치공화국
    구소련 지역 이슬람권이 거의 그렇지만 타타르스탄도 세속주의적 경향이 짙다. 그렇기 때문에 술은 할랄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며 음주하는 무슬림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는 세속주의 성향은 약화되고 있는 편이다. 볼가-우랄의 이슬람 맹주로 자처하는 타타르스탄의 이슬람, 즉 유로 이슬람(Euro-Islam)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타타르스탄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 강력히 전파된 이슬람 개혁 운동인 자디드 운동(Jadidism)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자디드 운동은 일종의 문화 개혁 운동적인 성격을 가지며 미신 타파와 구습 탈피를 통한 현대 이슬람 정착과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한 교육의 장려가 목적이었다. 이는 실제적으로는 이슬람 정통성에 대해 자유주의 색체를 가지는 것으로서 극단적인 이슬람 혁명이나 지하드를 통한 이슬람 제국 건설을 추구하기보다는 품위 있는 훌률항 지성인으로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좋은 이미지의 이슬람을 추구하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 이와 같은 양상이 이슬람을 기반으로 다른 종교도 공존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현재 타타르스탄에 건설된 모스크 갯수는 1990년 100개 남짓이던 모스크는 꾸준히 증가하여 2008년 통계에는 1,055개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서 무슬림화가 되는 비율은 계속적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결국 타타르 민족이 역사적인 배경이나 관용적으로 보이는 이슬람의 색채에 따라 모든 종교를 다 수용하지만, 어떠한 것도 이슬람보다는 우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정체성으로부터 오는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라 본다. 유로 이슬람의 진정한 본질은 유럽적인 정체성을 지향하며, 폭력보다는 평화적 공존을 주장한다는 부분에 주목하면서 대체적으로 유로 이슬람의 역사적 기원, 현재적 특성 등을 고찰하고 있다. 유로 이슬람의 기본적인 특성은 현대적이고 개혁적이며, 평화 공존적이며, 친서구적 이상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유로 이슬람은 유럽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구 사회의 문화적 이념과 서유럽과의 공존의 의식을 추구한다. 이는 남녀의 양성 평등, 인간의 태생적 존귀성과 더불어 이슬람의 본래적 관용성의 가치를 추구한다. 유로 이슬람은 기존의 이슬람 관념의 가치에서 벗어나 있다. 유로 이슬람은 좀 더 세속적인 방향의 이념으로 발전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 무슬림들은 세계화 및 정보와 혁명에 의해 제공된 기회의 이점을 활용하면서 자신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이념으로 조정해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슬람 세계의 국가들이 지역 및 글로벌 의제에 관한 많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세계 질서를 수립하는 것에 있어 러시아의 전통적인 파트너라며 젊은이들이 이러한 건설적인 다면적 상호 협력에 보다 많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 장관도 러시아와 OIC(이슬람 협력 기구) 회원국 간의 관계가 상승하고 있다면서 러시아는 평등과 상호 이익, 문화 및 문명적 정체성에 대한 존중, 발전 방향을 독립적으로 결정한 권리를 기반으로 협력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서방이 널리 분파시킨 잘못된 가치, 주권을 수호하는 국가를 고립시키려는 시도를 러시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언급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청소년 정책 포럼의 개최지로 러시아의 카잔시를 선택한 것은 러시아와 OIC 회원국 간의 관계가 다면적이며 국제 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하여 OIC는 카잔을 이슬람 청소년 정책 도시로 선정하고 글로벌 청년 서밋을 개최했다. 카잔의 서밋에는 OIC 국가 총영사, 기업가 및 국제단체대표 등이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 이란, 리비아,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50여개국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관계자가 참석했다. 대다수 현지 언론들은 러시아 연방국이지만 전통적으로 인구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는 타타르스탄에서 이슬람 국제 행사를 개최한 것을 매우 전략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분석했다. 서밋 개최지인 카잔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이기는 하지만 백인 국가인 러시아에서 이슬람 국제 행사를 개최한다는 것은 이슬람 특유의 배타적인 문화에 빗대어 보았을 때 매우 이례적이며 최근 이슬람 국가들과 러시아와의 관계 변화를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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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 프랑스 대통령의 발언, 유럽 전체의 파국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도박
    최근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매우 위험한 발언을 표명하면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왔다. 이것은 프랑스 핵무기가 유럽 방위의 일부분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언급한 발언이다. 즉 프랑스의 핵무기가 자국 방어를 위한 목적을 넘어서서, 유럽의 핵 억지력 강화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프랑스의 핵 교리에도 분명히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핵 강국인 러시아에 대한 자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프랑스가 핵보유국이 된 까닭은 적은 핵무기로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외부의 실질적 위협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독자적으로 방어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또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프랑스로서는 이 점이 특히 중요했다. 사실 프랑스는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핵실험을 남태평양에서 실시했으며, 지하 핵실험도 감행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 해외령이 남아 있는 프랑스로서는 세계에 어디서든지 자국의 영토에 대해 위협이 된다면, 이에 대한 핵 반격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이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샤를 드골 대통령이 프랑스의 핵무장을 추진했던 것은 미국의 핵우산 정책에 대한 신뢰성 때문이다. 거기에는 유럽이 당시 소련의 재래식 공격을 받았을 때에, 미국이 과연 핵 보복을 선제적으로 할 것인지, 그리고 이때 어떤 사용조건인지에 관해 드골 대통령의 합리적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핵 보복을 감행할 때 내세웠던 전제조건은 소련의 재래식 공격이 나토를 압도했을 때, 혹은 유럽이나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핵 공격이 임박했을 때이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언제든 그러한 조짐이 보인다면, 미국은 핵무기를 통한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뜻도 된다. 실로 무시무시한 얘기다! 드골 대통령은 아마도 이러한 미국의 선제공격이 소련의 맞대응으로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것인데, 이를 감수하고라도 과연 그렇게 선제공격을 감행할 군사적 능력이 미국에게 있느냐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보면, 프랑스의 핵무장이 이 두 가지 조건을 상쇄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프랑스의 핵무장이 소련의 재래식 무기에 대한 나토의 열세를 만회하고, 대소 핵전략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도 이러한 조건이라면, 프랑스의 핵무장을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외교적 협상에 따른 결과이다. 프랑스는 약 3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거리가 300-500 킬로미터 정도인 공대지 순항미사일과 사거리가 약 10,000 킬로미터 정도인 잠수함 탑재 탄도미사일, 사거리가 약 3,500 킬로미터 정도인 지상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등등이 있다. 또 프랑스는 핵추진 항공모함을 통해 핵무기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프랑스의 핵무기는 그 사용에 있어서 분명히 외부로부터의 명확한 위협을 전제한다. 사실 프랑스는 핵무장 이후로 핵무기를 사용할 만큼 외부로부터의 명확한 위협이 없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는 핵보유국이지만, 이를 실제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외교를 통해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유지하곤 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긴장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프랑스의 핵무기를 유럽 방위에 활용하려는 시도는 타당하지 않다. 프랑스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약 2,100 킬로미터, 러시아로부터 6,200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사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적 영향도 없다. 특히 프랑스 자체의 영토에 아무런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데, 핵무기로 유럽의 억지력을 강화하는 것은 오히려 프랑스 자체의 방어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당장 러시아의 거친 비난을 받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매우 현실적이지도 않고, 아무런 실익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프랑스의 핵무기를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유럽 쪽에 전진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관해 가장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는 국가는 독일이다. 전범국인 독일은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배치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핵무기를 활용하면서, 그 비용을 어느 정도 부담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나쁘진 않다. 그런데 독일의 이러한 태도에는 차후 재무장이 진전되면, 핵무장도 배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 프랑스가 말하는 외부 위협이라고 것도 현재 시점에서 보면 러시아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프랑스의 위협이라고 말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노력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 유럽연합의 핵심축인 프랑스가 핵무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의도는 이해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오히려 자신의 조급함을 노출하는 것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러시아의 핵전쟁 위협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갖고 왔다. 실로 무모한 정략적 발언이다! 프랑스의 핵전력이 러시아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무모한 발언은 러시아를 자극함으로써, 자칫 유럽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 올 수도 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전으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수세에 몰리고 있는데, 이 전쟁이 유럽 전체로 확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토와 러시아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고, 이는 실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누구도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핵무기를 직접 사용한 국가는 미국이 유일한데, 이를 통해 한 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즉 핵무기의 가공할만한 위력이 전쟁을 빨리 끝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때는 일본이 핵무기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서로 핵보유국이라면, 이 유용성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아무리 정치적이라고 해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오히려 그 발언이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핵무기가 언제든 어디서든 프랑스를 겨누고 있음을 공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핵무기가 프랑스를 겨누면, 사실상 유럽 전체를 언제든 핵 전쟁터로 만들 수 있다. 거기에는 러시아가 지금까지 한 번도 핵무기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별로 현실적 이득이 없기 때문이라는 명확한 명분도 있다. 요즘 러시아가 핵전쟁 연습을 벨라루스와 공동으로 벌이는 것도,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과 신형 무기를 실전 배치하고, 러시아 군대를 현대화하는 것도 이를 유럽에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그와 같은 명분은 러시아의 인내심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를 누구든 자극하면 언제든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유럽 안보에서 러시아와 등을 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이와 정반대로 진행되니까, 유럽연합 스스로가 국제적 지도력을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국가의 책임 있는 지도자가 핵무기를 섣불리 언급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에 동조하는 지도자도 유럽 전체를 자칫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이를 계기로 군비경쟁에 가세하는 것도 과연 과거의 악몽을 실로 망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부에서는 프랑스 대통령의 돌출발언에 가까운 언급이 자국 원전 수출을 동유럽에 확장하고, 또 유럽산 무기의 판매와 취득을 강화하려는 마크롱 대통령의 포석이 깔려 있다고 보기도 한다. 또 프랑스가 핵무기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연합과 나토에서 프랑스의 지도적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영국이나 독일을 은근히 견제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유럽의 안보에서 주도권을 프랑스 쪽으로 갖고 오는 방법이 핵무기 보유를 통해 러시아와 껄끄러움을 어느 정도 감안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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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03
  • 동유럽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에 살고 있는 루신인에 대하여
    루신인은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를 중심으로 동슬라브어파 루신어를 사용하던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루신이라는 명칭은 중세 시대 루스 슬라브어의 라틴어 명칭인 루테니아(Ruthenia)에서 기원했다. 오늘날 루신인 인구는 60만여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이 중 루신어 구사가 가능한 인구는 소수에 불과하다. 루마니아 카르파티아 산맥은 중세 초기에 크로아티아인의 조상이 되는 남슬라브계 부족들이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오늘날 크로아티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대거 이주하면서 그 빈 자리를 흑해 근방에 거주하고 있던 동슬라브계 부족인 울리치 족이 투르크계 유목국가인 페체네그의 침입을 피해 이주하게 된다. 루신인들의 조상인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인들은 과거에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아 정교회를 믿었으나 중세 루테니아 왕국이 멸망하고 이후 카르파티아 산맥 일대 지역이 카톨릭을 믿는 폴란드와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지배층은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그리고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로 알려진 자카르파탸(Jacarpatia)의 농노와 비잔틴 정교회 성직자들이 루신인들의 직계 기원이 되었다. 과학적 하플로그룹 조사에 의하면 자카르파탸 주민들은 우크라이나와 다른 지역 주민들과 다르게 타타르 계통이나, 바쉬키르 계통등의 몽골 및 투르크계와 유사성은 적었고 대신에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과 공통점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자카르파탸 지역은 루테니아 왕국으로부터 헝가리 왕국에 복속된 이래 약 1,000년동안 헝가리인들의 지배를 받았고 현재까지 러시아계 국가들의 통치를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근세 1646년부터 이들은 로마 교황의 권위는 인정하지만 정교회의 전례를 유지하는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 교회로 개종했다. 그러나 여전히 헝가리인, 독일인 지주들에게 카톨릭 봉헌금을 빙자한 과도한 교회세를 납부해야 했다. 이들은 빈곤한 생활과 더불어 타 국가의 차별에 시달렸으며 한 때 루신인을 대표했던 정교회 성직자들은 1649년 우주호로드에서 동방 카톨릭 교회로의 개종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그리고 1652년에는 로마 교황청에 이와 같은 결정을 전달하여 교황으로부터 승인받고 인준까지 받았다. 루신인 농민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정교회에서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 교회로 반강제적인 개종을 당한 셈이 되었는데, 이는 성직자들이 일반 농민들의 소요가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자신들의 교파가 변경된 것을 일반인들에게 비밀로 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성직자들이 공식적으로 개종한 지 100여 년이 지난 1760년대까지도 루테니아 농민들은 개종된 실상을 모르고 자신들이 정교회에 소속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한다. 루테니아 농민들 중에서 글을 배우거나 외부에 나가서 장사를 하는 사람들 중에서 자주 외부인들과 접촉한 결과 그 동안 자신들은 정교회를 믿는 줄 알고 살았으나, 실제로는 동방 카톨릭 교회 성직자와 함께 동방 카톨릭 성당에서 미사를 보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이 자신들이 믿는 종교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고 소동을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일어났다고 한다. 가난과 차별에 시달리던 루신인들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 여러 도시로 이민하여 루신어를 버리고 도시 현지 주민들과 동화되다시피 했다. 일례로 루신인의 한 갈래로 알려져 있는 보이코인(Boykos)의 경우 과거에는 폴란드, 헝가리, 우크라이나, 슬로바키아에 40만여 명이 분포해 있었으나 오늘날에는 대부분 정체성이 상실되어 이웃 민족에게 동화되었고 이들은 겨우 수백여 명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범슬라브주의에 경도된 루신인들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물론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비해 생활수준이 낮은 편이었고, 이와 같은 선택을 하는 사람들은 일부에 불과했다. 다른 한편으로 이와 같은 경제적 걱정이 없는 미국으로 이주한 루신인 인구 상당수는 자신의 정체성을 오스트리아계 미국인이 아닌 러시아계 미국인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1899년에서 1931년 사이에 268,669명의 루신인 인구가 미국에 이민 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들은 대개 러시아계 미국인 정체성을 가지고 미국 내 러시아계 디아스포라 사회에 동화되어 미국 내에서 러시아 사회의 일원이 되어 있다. 그러면서 일부 루신인들은 미국으로의 이민 간 이후에도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오늘날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은 유럽에서 거의 사멸한 상황이다. 그러나 대신 미국에서는 40만여 명에 달하는 교세를 지니고 있어 미국을 중심으로 그 명맥 또한 유지되고 있다. 물론 미국 내 루테니아 그리스 카톨릭 교회 소속 신도들이 모두 루신인이거나 루마니아 계는 아니었다. 이는 2010년 자가 응답에 기반을 둔 미국 인구 조사에서 자신이 루신계 미국인이라고 응답한 인구는 7,583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조사 결과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다양한 인종들을 상대로 선교를 벌인 결과 교세가 확장되었고 공산주의가 붕괴되어 삶이 어려워진 동구권 주민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민하여 이 종교를 믿었던 결과이기도 하다. 현재 루마니아 카르파티아 지역에 거주하는 루신인들은 대부분 루마니아에 거주하고 있으며 일부 남아있는 지역은 우크라이나의 자카르파탸 주로 알려져 있다. 이 자카르파탸 주는 다른 우크라이나의 주와 비교했을 때 매우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데, 1945년 전후 소련에 병합되기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러시아-우크라이나 영토의 일부였던 적이 없었다. 카르파티아 루신인들은 오랫동안 헝가리 왕국의 일원이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이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헌법은 당시 유럽 기준으로도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에 있어서 대단히 진보적이었다고 평가를 받았었다.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정부는 이 루테니아 지역에 기반 시설 투자를 해주었고 이 때 여러 인프라가 생겨났다. 이 루신인들은 전간기 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속해있던 시기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보여 진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스탈린의 소련은 이 지역을 편입하면서 굉장히 억압적인 정책을 피게 되었고 당연히 많은 루신인들이 스탈린에 의해 숙청되기도 했다. 특히 소련이 헝가리를 장악하면서 주로 보이보디나 자치주 및 바나트 자치주 산악 지대에 거주하고 있는 판노니아 루신인들을 학대했는데 다량의 루신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떠나 절멸했다. 판노니아 루신인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 도중에 감소한 인구를 보충하기 위해 18세기 중반 카르파티아 지역의 루신인 농부들을 이주시킨 것이 그 기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스탈린이 사망한 후, 10년이 지나 다시 판노니아, 오늘날의 헝가리로 돌아올 수 있었으며 현재에도 약 6만여 명이 살고 있다. 렘코(Lemkos) 루신인의 경우, 오늘날 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5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슬로바키아 일부 영토가 과거 폴란드의 영토였던 시절에 이주하였던 루신인들이 기원이다. 1939년을 기준으로 하여 인구가 14만여 명 정도였지만 슬로바키아인과의 동화되는 상황에 있기에 인구가 계속 감소하고 있는 실정이다. 미국의 화가인 앤디 워홀(Andrew Warhola, 1928~1987)의 부모가 슬로바키아에서 피츠버그의 탄광 노동자로 이민 왔던 렘코 루신인으로 알려져 있으며 미국의 유명 재즈 뮤지션 빌 에반스(Bill Evans, 1929~1980)의 어머니가 루신인 중에서도 렘코인 혈통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물론 에반스의 아버지는 웨일스 출신이다. 후츨(Hutsuls) 루신인의 경우, 주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와 루마니아 국경 지대에 해당하는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남슬라브계 크로아트(Croat) 족이 이주한 지역에 울리치 족이 정착하고 여기에 일부 루마니아인이 동화되어 동슬라브어 계통 언어를 사용하게 된 것을 그 기원으로 보고 있다. 루마니아 출신 역사가 니콜라에 로르가(Nicolae Lorga)는 이들이 트란실바니아 일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 우크라이나 근방으로 이주하여 슬라브화한 왈라키아인(Vlachs)의 원(原) 조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풍속은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의 주목을 받아 많은 기록과 연구가 이루어졌으며 후츨 루신인들의 전통 문화가 목가적인 생활 양식으로 미화되기도 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목공예가 뛰어났으며 이 외에도 카르파티아에서 키운 조랑말은 후츨 루신인들의 특산품으로 유명하다. 보이코(Boykos) 루신인의 경우, 우크라이나와 폴란드의 국경 지대에서 거주하고 있는 루신인들로 정확히 말하자면 갈리치아 남부와 폴란드 남동부 국경지대에 걸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여 진다. 폴란드 제2 공화국 시절에는 폴란드 정부에 의해 민족 동화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에서 이들을 소수민족으로 분류하지 않고 일반 우크라이나인으로 분류하면서 따로 민족언어가 보존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인으로 완전히 동화되었다. 2001년 우크라이나 인구 조사를 기준으로 131명, 2011년 폴란드 통계 기준으로 볼 때 258명이 자신을 보이코 루신인이라고 응답하면서 아직까지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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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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