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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中편
    오스만투르크는 발칸 전쟁, 리비아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1914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게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신성한 전쟁에 참여하여 외세와 함께 싸우자고 독려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공격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는 즉시 이에 대응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오스만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면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아르메니아인 대표와 오스만 대표의 회담이 에르주룸에서 열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과 러시아 어느 측에도 참가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력으로 독립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행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 아니냐는 오스만 제국의 합리적 의심으로 돌아왔다. 오스만 제국은 1915년 카프카스에서 오스만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충돌하자 수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할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시리아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 반면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오스만 제국 내부의 아르메니아인도 회유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무능한 정치에 실망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에 회유되거나 독립을 요구하는 자들이 늘어만 갔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발족된 청년 투르크당은 개혁파 군사집단으로, 자유주의적, 국가주의적, 법치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청년 투르크당은 초창기에는 민족주의적인 색체가 거의 없었기에 불가리아인, 아르메니아인, 투르크인, 그리스인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헌법을 제정하고 오스만 제국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던 조직이었다. 그런데 청년 투르크당은 결국 반기를 들었는데 수도인 코스탄티니예에서 벌어진 반쿠데타에 의해 주춤하자 현지의 무슬림들은 청년 투르크당 지지 세력 중 하나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압둘하미트 2세에 대한 청년 투르크당의 반기는 고작 11일 만에 제압되고 탄지마트 법이 부활했지만, 이미 아다나에서는 15,000명에서 30,000명 사이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이후에 발생한 정책이었다. 터키에서는 이 "아다나 시위 진압 사건"이 아르메니아인들이 먼저 벌인 폭동으로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아다나의 소요 사태는 시리아를 식민지로 삼고 있던 프랑스가 획책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아다나는 시리아와 가까운 지역이고 프랑스령 가지안테프와 인척 지역이었으며 이 시위에 시리아 프랑스 식민 정부가 상당한 양의 지원금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프랑스 측은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보복을 자신들에게 책임을 돌리고자 외세의 탓을 하면서 터키를 비판했다. 그러나 터키를 비판했을 뿐이지 이 사건에 아르메니아와 관련이 없다는 증거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터키 동부 각 지역의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을 이용해 오스만투르크를 분할해 역사에 지워 버리려고 했던 것이 전후 1920년 세르브 조약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근거로 작용하곤 한다. 프랑스는 오스만 정부를 인종주의적 성향의 학살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더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계가 시위를 벌이며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터키의 편을 드는 행위를 처벌하라는 주장이 프랑스 의회에서 통과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15년부터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온 터키에 대한 규탄, 프랑스와 연관된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라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은 반(Van)에서도 발생하였으며 반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동남쪽으로 강제 이주시키게 되는데 하필이면 해당 지역이 프랑스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프랑스보다 카프카스를 넘어 남하를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가 더 큰 적이었다.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는데 오스만 군은 병력도 부족하고 물자도 충분하지 못해 사기가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점점 청년 투르크당이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오스만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그렇다고 피지배민족의 권리와 인도주의 같은 사상을 갖춘 세력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이유는 서구 열강의 오스만 제국을 침탈하는 과정들을 보고 겪으며 서구의 제국주의 관념들에 매우 냉소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년 투르크당에 속해 있던 오스만 제국의 재상인 탈라트 파샤(Talat Pasya)나 해군 장관 제말 파샤(Zemal Pasya), 오스만 제국의 첩보 부대인 테슈킬렛 마흐수사(Teshukilet Mahsusa)의 수장이었던 베하에딘 샤키르(Behaedin Shakir) 등은 무슬림이지만 세속주의자였고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은 복속과 지배의 대상이지, 박멸과 절멸의 대상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청년 투르크당은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철저하게 지배의 대상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인 문제로 보있다.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에 붙어 투르크 민족의 안보를 해치려고 하는 정치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그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박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 몰리고 있는 오스만의 입장이라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의 영토 안에서 이적행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탈라트 파샤와 제말 파샤의 회고록과 이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적행위와 행동을 보고 한 발언들과 행동, 이러한 형세를 보고 전술했던 유럽의 저널리스트들도 이를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기술했다. 더불어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 혁명위원회가 러시아 편에 서서 조직적으로 공격하면서 터키 동부 각 지역에는 약탈과 방화, 학살은 꾸준히 벌어지게 된다. 그러자 오스만 정부에서는 이들을 테러 분자로 규정하고 1915년 4월 24일 이 위원회를 폐쇄하면서 235명의 지도자를 반역죄로 구속했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현재 4월 24일을 대학살 추모일로 정하고 지금도 추모하고 있다. 장군인 엔베르 파샤의 처남이자 반 일대 총독으로 부임해온 정치인이자 제브뎃 베이 벨베즈(Cevdet bey Belbez, 1878 ~ 1955)는 반 일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촌락을 수색하여 수상한 무기들을 발견했다고 보고를 올리면서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돌아선다. 오스만 군이 자신들의 무기를 사진 찍어 놓고 증거라고 주장했다는 증언이 나오긴 했지만 이 또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브뎃 베이가 반 일대의 촌락에서 수색과 학살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살의 대부분은 쿠르드족과 체르케스계 보조병들이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군인들도 학살에 참여한 정황이 많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황이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제브뎃 베이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문서가 있기에 이를 근거로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5월 30일에는 탈라트 파샤가 러시아와 내통하는 적을 격리시키기 위해 70만 명의 아르메니아 인들을 시리아ㆍ팔레스타인ㆍ이라크 등지로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이주에 따른 기아와 질병,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막의 혹독한 기후 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재 아르메니아는 조직적인 학살을 지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탈라트 파샤의 이주 명령서를 학살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주 명령서에는 학살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터키 측은 오스만 제국의 공문서 양식과 전혀 다른 서류이고 이는 조작되었다고 맞서고 있는 상태다. 더불어 이를 아르메니아와 함께 규탄하고 있는 집단 서방은 발칸반도 터키인 및 다른 무슬림 민족들에 대한 학살과 인종청소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을 감으며 철저히 이중잣대로 나서고 있다. 이는 진심으로 피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터키를 정치적으로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 때처럼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대표적인 것이 사망자 숫자와 희생자 성격을 둘러싼 논란이다. 이는 피해자를 위한 정의를 표방하여 나서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이해관계로,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한 측면이다. 아르메니아는 15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터키는 70만 명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30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자료들에 따르면 희생자는 60만~15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라나 학살자 숫자는 조직적인 학살이 이루어졌느냐 혹은 불가항력이었는지는 지금도 큰 논란이다. 당시 아르메니아 전체 인구는 오스만 제국의 통계에 의하면 129만 5,000명이었다. 서구의 다른 자료들은 105만~150만 명으로 집계했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180만~256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의 통계대로라면 그 근거를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아르메니아 측의 통계에 대한 근거는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 시민들의 상당수가 학살, 기아,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숫자가 무려 300만~400만 명에 이른다는 점에 있다. 당시 이들 중 아르메니아인들을 구분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아르메니아 측의 통계는 전혀 맞지 않다. 그리고 서구의 자료들인 105만~15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하면 지금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강대국들 이해관계의 목적에 의해 이 문제가 다루어졌다는 것에 있다.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를 경험했던 유럽 각국은 선거나 주요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아르메니아 출신 유권자들을 의식해 이 문제를 재기해 터키 정부를 악인으로 만들어 "투르크포비아"에 일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핵심적인 부분은 '전쟁 중 일어났던 우발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비극이었는지, 혹은 계획된 조직적인 인종청소였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어느 문제와도 닮아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재기된 소련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홀로도모르"이다. 스탈린의 정책으로 인한 운이 없는 불가항력적인 비극인지, 계획적인 스탈린의 학살인지, 이 부분에 대한 것도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강대국들 이해관계의 목적으로 해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나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학자들이 머리를 마주하고 공동연구를 통해 역사적인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명확히 밝혀진 연후,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사죄와 배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인류의 비극이 사이비 어용학자들에 의해 근거없이 해석되고 악용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터키-아르메니아, 러시아-우크라이나 모두 양측의 민족적 앙금과 역사적 적개심을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5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영웅이자 대부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 명(明)과 암(暗)
    볼리바르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스페인 세력을 격퇴한 호세 데 산 마르틴과 과야킬 회담을 한 이후, 부장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1795~1830) 를 보내 아야쿠초와 후닌 전투에서 스페인의 부왕(副王, Viceroy)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원래 스페인의 부왕은 본국 군주를 대신하여 한 지역을 통치하는 직책으로 다른 나라의 총독에 해당하고 직책이다. 참고로 19세기 독립하기 전 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 령(領)으로 총독 직할지였으며 페루에는 페루 부왕령이 설치되어 있었다. 페루를 해방시킨 볼리바르는 남미 대륙에서 스페인 세력들을 영구히 일소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볼리바르는 지금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에 해당하는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의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몰락은 이러한 정점에 오른 이후부터 시작된다. 연이은 반란이 발생했고 권력 투쟁이 빈번했다. 그러는 사이 페루 남부가 볼리비아 공화국으로 떨어져 나갔고 1830년에는 결정적으로 정치권에서 실각한 뒤, 콜롬비아에 들어가 여생을 살았다. 정계에서 반강제적으로 은퇴한 이후 볼리바르는 지지자인 호아킨 미에르(Joaquín Mier)의 별장에서 지병인 결핵을 앓으며 요양하고 있다가 콜롬비아 북부의 산타 마르타 근처인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San Pedro Alejandrino) 농장에서 폐결핵으로 인해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러한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는 명과 암이 뚜렷하게 나타난 인물이자 장, 단점이 명확한 인물로, 인간적인 면이나, 그의 정치 철학과 성향에 대해서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자(El Libertador)로써 군인과 군에서 리더로는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1813년 10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카라카스 시에 입성한 볼리바르에게 수여된 칭호인 "엘 리베르타도르(해방자)"는 아무에게나 찬사받으며 수여되는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볼리바르에게 늘 따라다니는 악평은 그가 진정으로 해방하고자 했던 것인 스페인 혼혈 백인인 크리오요였고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인종주의자의 틀을 벗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코뮤니즘 이론을 창설한 카를 마르크스가 185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볼리바르를 언급하며 "가장 비겁하고, 횡포하며, 비참한 악당"이라 평가절하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인도에서는 영웅일지 모르지만 인류적으로 볼 때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심했던 마하트마 간디와 놀랍도록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볼리바르에 대해 변명이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당시 남미에는 유럽계 백인과 백인의 형질이 강한 메스티소 인종들의 인구가 더 많았고 개국 이후, 지배층들이 차루아, 테우엘체, 카웨스카르, 오나, 마푸체, 아파치와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토벌 및 학살하고 무력으로 원주민 땅을 합병했던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등과는 달랐다. 이는 현재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페루 등이 속해있던 옛 그란 콜롬비아 지역은 백인, 메스티소, 흑인, 원주민 등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독립국가 수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골수 왕당파 성향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그란 콜롬비아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피흘려 건설한 자유 민주주의 정부가 원주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무너질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에 있었다. 볼리바르가 유년기 때 그를 보살펴주고 키워줬던 흑인 노예 이폴리타에 대한 호의적인 기억으로 인해 흑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부분은 간디와의 차별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배경으로 볼 때 볼리바르의 원주민을 배제하는 정책이 반드시 인종차별의 의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현재 스페인-라틴 아메리카 학계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볼리바르가 딱히 백인 우월주의자인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들도 많다. 볼리바르는 어릴적에 자기 또래의 노예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친하게 지냈고 아이티에 망명했을적에 백인과 흑인이 뒤섞인 혼성 군인 아이티 군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적어도 흑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차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볼리바르가 다른 독재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독재의 패턴이 다르고 다른 자유 민주주의자들에게 인정 받는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독재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보통 독재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초심을 잃고 변해갔던 자들이 많았다. 이와는 달리 볼리바르는 이제 막 독립한 남미가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큰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지배가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권력으로 부정축재를 벌이거나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의 독재자로써 흔히 나타나는 전횡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했으면 그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켰으며,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인물들도 주동자만 국외로 추방하고 나머지는 석방시켜주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평생 재산에 대한 욕심도 없었는데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고 물러났을 때, 의회에서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물론 원래부터 볼리바르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독립 운동을 하면서 가산을 거의 탕진했고,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퇴임 후, 자신이 돌아갈 집조차도 없어 호아킨 미에르의 집에 머물렀으며 모아 놓은 재산도 없었기 때문에 퇴임 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47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을때, 의사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낡고 해진 셔츠를 보고 놀랐을 정도로 그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통일 라틴 아메리카 건설이란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혔던 안타까운 실패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민지 독립의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아르헨티나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지만,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식민지는 미국이나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합된 단일 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국력을 키우지 못해 이후에도 큰 혼란을 겪었다. 이는 지리적인 요인이 컸는데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칠레와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아르헨티나의 경우 지정학적으로 안데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과 대서양 연안의 해안 저지대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 후 단일국가를 건설하기 수월했다. 그에 비해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남미 식민지들인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페루, 에콰도르는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밀림, 소택지 등 고립되고 험준한 지리 지형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국가들을 통합시켜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일 국가를 남미 대륙에 수립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도 악조건이 적지 않았다. 워싱턴이나 산 마르틴, 오이긴스보다 더 훨씬 악조건을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시킨 미국의 13개 식민지는 거대한 연방으로서 세계 패권을 장악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했고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식민지 칠레,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식민지 아르헨티나는 통합에도 성공했으며 독립 이후 한 동안 라틴 아메리카 역내에서 세계 5위의 선진국이자 강대국의 위세를 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옛 그란 콜롬비아는 안타까운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이들 국가들이 볼리바르의 이상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볼리바르의 개인적인 문제도 있는데, 일단 볼리바르부터 독재자가 되어 종신 대통령을 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이 새로 건국한 공화국을 다른 인물에게 물려주었다. 정치적인 독재가 가능했음에도 악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면서 두 번 재임 후 은퇴한 조지 워싱턴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또한 볼리바르는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영향 받기는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흑인과 다르게 잠재되어 있는 적으로까지 여겼다. 볼리바르는 흑인을 제외한 유색 인종을 멸시했는데 이는 원주민 공동체 토지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그의 기여로 남미가 독립한 이후 원주민들의 처우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 있어 볼리바르는 새로운 식민지 독재자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다수 민족인 원주민들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볼리바르를 국부로 인정하지 않고 존경조차하지 않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페루와 볼리비아가 지금처럼 독립국가로 존재하며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볼리바르가 주도한 독립운동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애증의 대상 중 하나로 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원주민들만이 아니라 중국인 등 황인종 및 노예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란 콜롬비아 건설 이후, 아이티의 '흑인 혁명'에 대해 여타 크리오요들과 같이 매우 급진적이고 위험하다 생각했으며 이후 1812년 제1 공화정 실패 이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이는 본인의 군대에 가담하는 노예에 한해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 후 1816년 1월 아이티의 흑인 대통령 페티옹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로 약속했고, 아이티의 도움이 그가 식민지 독립을 성취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이후 독립 투쟁에 가담한 노예 농장주들에게 지위를 보장하기로 약속했고 1821년 그란 콜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미루어 노예 농장주들과 약속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흑인에 대해서는 그나마 나았지만 시종일관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으며 아이티 방식의 혁명을 경계했다. 볼리바르는 흑인 반란에 대해 스페인의 침입보다 1,000배 더 나쁘다는 발언을 하면서 흑인들의 반발을 샀다. 동시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던 물라토 지지자들에 대해 정치적인 탄압을 자행하면서 흑인 혁명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였다. 이는 그가 혼혈이었지만 백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크리오요라는 특권계층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큰 논란이 되었고 치명적인 결점으로 비판받았으며 지금에도 자주 회자되는 사건이 구아이라 항구에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 대한 배신이었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볼리바르와 다른 라틴 아메리카 통합론자들의 사상적인 스승었고 독립 투쟁의 선구자(Precurser)로 불리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계의 거물이었던 인물이다. 또한 미란다는 볼리바르를 매우 총애했는데 그를 세계적인 베네수엘라인, 혹은 나폴레옹에게 미치지 않은 돈키호테라고 불렸고,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기도 했으며 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차르,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과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던 명사였다. 그러나 미란다와 볼리바르가 세운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이 잇다른 악재에 시달리게 되면서 스페인 왕당파의 군세에 의해 수세에 몰리는 등 상황은 악화되자 볼리바르 자신이 지키던 독립파의 중요 거점이었던 푸에르토 카베요의 산 펠리페 성이 함락되면서 미란다는 이대로라면 독립이 좌절될 것이 우려되었다. 우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816년 7월, 왕당파와 휴전 협정을 맺고 영국으로 가서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자신을 따르는 장교들을 이끌고 구아이라 항구로 간 미란다를 체포해서 왕당파에 넘겼다. 그 대가로 자기 자신은 왕당파에게서 풀려나 미란다와 자신이 헌신했던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을 떠나 자메이카로 도주하는 역대급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 볼리바르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게 내린 죄목은 황당하게도 반역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볼리바르에게 있어 두고두고 흑역사로 남았다. 후일 본인이 실각된 후, 가장 후회되는 사건이라 회고한 것도 "구이아라 배신 사건"이었고 이는 볼리바르의 어두운 부분을 두고 두고 규탄당하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볼리바르는 정치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실패한 인물이지만 라틴 아메리카를 독립시킨 영웅으로써 가치는 아직도 살아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호불호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국부로써 존경도 받고 미움도 함께 받는 애증의 인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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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세속적인 이슬람, 타타르스탄 러시아 연방 자치공화국
    구소련 지역 이슬람권이 거의 그렇지만 타타르스탄도 세속주의적 경향이 짙다. 그렇기 때문에 술은 할랄이라는 기적의 논리를 펼치며 음주하는 무슬림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소련 붕괴 이후에는 세속주의 성향은 약화되고 있는 편이다. 볼가-우랄의 이슬람 맹주로 자처하는 타타르스탄의 이슬람, 즉 유로 이슬람(Euro-Islam)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에 타타르스탄에서부터 중앙아시아까지 강력히 전파된 이슬람 개혁 운동인 자디드 운동(Jadidism)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 자디드 운동은 일종의 문화 개혁 운동적인 성격을 가지며 미신 타파와 구습 탈피를 통한 현대 이슬람 정착과 과학 기술 발전을 위한 교육의 장려가 목적이었다. 이는 실제적으로는 이슬람 정통성에 대해 자유주의 색체를 가지는 것으로서 극단적인 이슬람 혁명이나 지하드를 통한 이슬람 제국 건설을 추구하기보다는 품위 있는 훌률항 지성인으로서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좋은 이미지의 이슬람을 추구하는 태도가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결국 이와 같은 양상이 이슬람을 기반으로 다른 종교도 공존하게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현재 타타르스탄에 건설된 모스크 갯수는 1990년 100개 남짓이던 모스크는 꾸준히 증가하여 2008년 통계에는 1,055개에 이르고 있다. 그러면서 무슬림화가 되는 비율은 계속적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결국 타타르 민족이 역사적인 배경이나 관용적으로 보이는 이슬람의 색채에 따라 모든 종교를 다 수용하지만, 어떠한 것도 이슬람보다는 우선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들의 정체성으로부터 오는 한계를 극복하게 하는 것이라 본다. 유로 이슬람의 진정한 본질은 유럽적인 정체성을 지향하며, 폭력보다는 평화적 공존을 주장한다는 부분에 주목하면서 대체적으로 유로 이슬람의 역사적 기원, 현재적 특성 등을 고찰하고 있다. 유로 이슬람의 기본적인 특성은 현대적이고 개혁적이며, 평화 공존적이며, 친서구적 이상을 추구한다고 할 수 있다. 유로 이슬람은 유럽적 지향성을 가지고 있으며, 서구 사회의 문화적 이념과 서유럽과의 공존의 의식을 추구한다. 이는 남녀의 양성 평등, 인간의 태생적 존귀성과 더불어 이슬람의 본래적 관용성의 가치를 추구한다. 유로 이슬람은 기존의 이슬람 관념의 가치에서 벗어나 있다. 유로 이슬람은 좀 더 세속적인 방향의 이념으로 발전되는 경향이 있다. 러시아 무슬림들은 세계화 및 정보와 혁명에 의해 제공된 기회의 이점을 활용하면서 자신을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이념으로 조정해나갈 것을 강조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이슬람 세계의 국가들이 지역 및 글로벌 의제에 관한 많은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고 보다 공정하고 민주적인 세계 질서를 수립하는 것에 있어 러시아의 전통적인 파트너라며 젊은이들이 이러한 건설적인 다면적 상호 협력에 보다 많은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부 장관도 러시아와 OIC(이슬람 협력 기구) 회원국 간의 관계가 상승하고 있다면서 러시아는 평등과 상호 이익, 문화 및 문명적 정체성에 대한 존중, 발전 방향을 독립적으로 결정한 권리를 기반으로 협력을 확대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한다. 서방이 널리 분파시킨 잘못된 가치, 주권을 수호하는 국가를 고립시키려는 시도를 러시아는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언급하면서 이슬람 세계의 청소년 정책 포럼의 개최지로 러시아의 카잔시를 선택한 것은 러시아와 OIC 회원국 간의 관계가 다면적이며 국제 사회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와 관련하여 OIC는 카잔을 이슬람 청소년 정책 도시로 선정하고 글로벌 청년 서밋을 개최했다. 카잔의 서밋에는 OIC 국가 총영사, 기업가 및 국제단체대표 등이 인도네시아, 카자흐스탄, 이란, 리비아, 모로코,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50여개국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관계자가 참석했다. 대다수 현지 언론들은 러시아 연방국이지만 전통적으로 인구 대다수가 이슬람을 믿는 타타르스탄에서 이슬람 국제 행사를 개최한 것을 매우 전략적이고 상징적이라고 분석했다. 서밋 개최지인 카잔 인구의 대다수가 무슬림이기는 하지만 백인 국가인 러시아에서 이슬람 국제 행사를 개최한다는 것은 이슬람 특유의 배타적인 문화에 빗대어 보았을 때 매우 이례적이며 최근 이슬람 국가들과 러시아와의 관계 변화를 상징한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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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4
  • "아랍의 봄" 사건으로 유럽이 받은 영향, 아랍계 민족들의 유럽 정착 및 난민화
    "아랍의 봄"이 유행할 때 과거 북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을 식민 지배했고 현재도 가장 지분이 많은 프랑스는 아랍의 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불안은 옛 종주국으로써 북아프리카 각 지역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게도 이와 같은 사태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끝없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들이 아랍의 봄 혁명에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프랑스 내부도 시끄러워질 수 있는 요지가 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극우파가 득세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자국 국민들의 이권을 먼저 보호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민군들과 함께 카다피의 독재 정권을 끝내고 민주화의 첫 단계에성공을 거두었으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1차 투표에서는 28.6% 대 27.1%로 패배했으며, 2차 투표에서도 48.3%로 51.7%의 올랑드에게 3.4%, 110만표차로 패배했다. 사르코지는 임기 중에 사망한 조르쥐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 4년 10개월, 1969~1974)와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에게 패배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7년 재임)에 이어 30년 만의 단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퇴임했다. 게다가 전임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까지 프랑수아 올랑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르코지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여기에 카다피 사건에 대한 몇몇 불편한 진실까지 드러난 부분이 결정적으로 사임한 원인이 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올랑드 역시 유럽의 경제위기인 유로화 사태가 계속 되는 상태에서 말리 내전에 개입한 것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크게 작용했으며, 정권의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는 등 제대로 된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국가들도 큰 영향을 받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도 영향을 받아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이탈리아의 경우,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더불어 계속되어 발생하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정계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베틀루스코니는 사생활 보호법을 개정해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예를 들어 사법당국이 녹취한 내용을 신문이나 웹사이트에 올려 사익에 반하거나 편견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면 48시간 이내에 수정해야 하고 여기에 불응하면 구금 또는 벌금형에 처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쏟아낸 막말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모든 이탈리아 시민들이 이를 페러디하여 수많은 조롱이 섞인 광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이탈리아 내에서 경제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던데다 베를루스코니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채 수익률은 7일 연 6.77%까지 치솟았다. 이어 정부 부채는 2조 6000억 달러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아 파산 위기에 놓이자 로마에 1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폭동 직전까지 가게 된다. 결국 2011년 11월 1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하야하여 마리오 몬티(Mario Monti) 총리의 중도 내각이 들어섰고, 뒤이은 선거에서 이탈리아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비록 상원 과반에 실패하여 옛 집권당과의 연정은 불가피했지만 베를루스코니는 그 동안 스스로 저지른 불법행위로 확실하게 제명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후에 튀니지에서 150km 떨어져 있는 람페두사 섬에 소요 사태를 피해 들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이들에 대한 처우에 상당한 고민에 빠졌다. 특히 2011년 리비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보트 피플들을 강제 송환시키던 리비아 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아프리카 난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영국과 독일은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아랍의 봄 여파로 인해 시리아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면서 대량의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고 이는 브렉시트에 이어서 유럽 연합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유로 경제권의 불균형으로 위태로운 상황이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EU의 붕괴론까지 부상하며 아랍의 봄 여파가 유럽에서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랍의 봄은 러시아와 CIS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00년대 혁명이 있었던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및 인근 국가들도 전면적으로 국가 내부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러시아에서도 브콘탁테를 통하여 반정부 시위들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비리 등이 심했다. 그러나 이 아랍의 봄의 영향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2014년 유로 마이단 사태를 일으켜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중앙아시아 건너 카스피 해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반 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며 남부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아르메니아에서도 2008년부터 부정선거로 의혹받았던 샤르키샨 전 총리에 대한 불만과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총리의 독재를 끝내는데 실패했다. 처음에는 민주화를 기치로 중동의 독재자들이 붕괴되어 가는 민주주의의 승리에 응원을 보내던 서구권은 이후 생각보다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가 독재를 대신하고 이들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신(新)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충격과 공포로 난민들과 중동의 민중들을 차별하게 되고, 과거 동구권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을 지지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었던 것과 다르게, 독재 타도를 외치는 반군에 대해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반군을 지원하는 물자와 무력 개입, 정치적인 압력을 동원하여 지원해준 다음 민주주의 선거로 수장이 뽑힐 정부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친(親) 서방 정권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반대로 샤리아를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의 성격을 띄고 있다면 세속주의 친(親) 서방 정권인 독재자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성립되었다. 이 아랍의 봄 사태는 유럽이 갖고 있던 냉전 시대부터 이어온 민주주의의 우월성이라는 믿음에 크게 생체기를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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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선봉에 나섰던 바그너 그룹
    소지섭, 김동준, 곽도원 주연의 한국 영화 <회사원>을 보면 겉으로는 평범한 금속 제조 회사로 등록되어 있지만 알고 보면 "청부 살인"을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회사를 소재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말 그대로 살인청부회사인데 이곳에는 일반 회사처럼 각종 부서들이 존재한다. 회계부, 영업부 등등, 겉으로 보면 그냥 일반 회사나 다를게 없다.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회사가 물론 영화 <회사원>과 같은 청부살인 회사는 아니지만 그와 궤를 같이 하는 회사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 그 회사는 러시아의 <바그너 그룹>이다. 흔히 "바그너 그룹"을 두고 러시아 군인으로 혼동하는 경우가 많고 이들이 러시아군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그너 그룹은 러시아군이 아니다. 엄밀히 말해 "개인 사설 군사 조직"이며 러시아 경제에도 참여하고 증권 거래에 등록되어 있어 주식 투자도 가능한 "기업(Enterprise)"이다. 그것도 러시아 내 "대기업(Major Company)"이라 볼 수 있다. 바그너 그룹은 "민간 군사 대기업"이고 일반 회사처럼 회계부, 영업부 등이 모두 갖춰져 있다. 흔히 바그너 그룹 소속으로 전선에 투입되는 군인들은 영업부 소속의 사원들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라 보면 된다. 이들은 당연히 전쟁터에 나오면 군인이지만 회사 소속의 회사원들이기 때문에 월급과 연봉, 성과급까지 모두 책정되어 있다. 그리고 일반 회사처럼 상사의 지시도 받고 회장의 명령도 받는다. 게다가 전쟁에 참여하여 전사라도 하게 되면 보험금도 책정이 되고 퇴직금도 받는다. 부상을 입으면 전액을 회사에서 지원하고 보험금도 지급된다. 원하는 기간에 따라 본인이 퇴사하고 싶으면 퇴사도 가능한데 퇴사해도 퇴직금도 나온다. 즉, 바그너 그룹은 군사 용병 그룹이고 출전하기 전, 고용한 자들과 계약서를 교환하고 계약에 따라 싸운다. 자본주의 체제의 러시아이기 때문에 자본주의에 입각해 당당히 계약하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러시아 정부와 계약하고 출전한 것이며 러시아 군부의 지휘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총수는 푸틴 대통령이나 세르게이 쇼이구가 아니라 지휘자이자 총수는 회장인 예프게니 프리고진(Евгений Пригожин)과 드미트리 우트킨(Дмитрий Уткин)이며 지휘권도 이들이 갖고 있다. 따라서 바그너 그룹에 속해 있는 회사원(군인)들은 푸틴이나 쇼이구, 게라시모프 같은 군부의 명령을 듣지 않는다. 그렇다면 바그너 그룹은 어떻게, 어떤 의미로 탄생되었을까? 바그너 그룹은 예프게니 프리고진(Евгений Пригожин)과 드미트리 우트킨(Дмитрий Уткин)이 공동으로 창업했다. 프리고진은 본래 요식업 사업가이면서 푸틴과 크레믈린에 요리를 제공하는 요리사 출신이었고 우트킨은 러시아 공수부대인 스페츠나츠 출신이자 퇴역 후, 러시아 마피아 생활을 했고 스킨헤드라 불리는 네오나치 조직에도 몸 담았건 인물이다. 프리고진의 경우, 사기, 절도, 매춘 알선, 조직 범죄 등 중범죄로 감옥에서 9년간 복역했었으며 긴 감옥 생활 동안 범죄를 후회하고 갱생하여 출소하자마자 핫도그 가게를 연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레스토랑 CEO까지 역임해 다양한 사업의 노하우를 가진 인물이다. 우트킨도 마찬가지로 마피아와 스킨헤드 생활로 인해 옥고를 치른 바 있다. 둘의 만남은 정확하진 않지만 우트킨이 프리고진의 레스토랑을 찾아와 리하르트 바그너의 음악을 듣고 감명을 받아 프리고진을 만나 공동사업을 제안했다고 한다. '바그너'란 명칭은 히틀러가 좋아했던 음악가 리하르트 바그너에서 유래했고 네오나치 출신이던 우트킨의 성향을 반영했다고 인터넷에서는 적혀져 있지만 여러 러시아 증언자들과 현지인들의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 프리고진의 레스토랑에서 들은 바그너의 음악이 모티브가 되어 회사명을 지었을 것으로 추측돤다. 둘은 바그너 그룹을 창업하면서 사설 군사 기업으로 성장했다. 프리고진의 CEO 마인드를 갖춘 사업 노하우와 우트킨의 스페츠나츠 시절 겪었던 군사 관련 노하우가 적절히 잘 조화되어 전 세계 각 분쟁 지역마다 뛰어들었다. 특히 우트킨은 네오나치였지만 러시아 민족주의자로 갱생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프리고진과 더불어 범죄자로 감옥 생활하여 갱생했던 경험들을 긍정적인 요소에 투여하고 있다. 러시아의 교도소마다 돌면서 범죄자들에게 자신들의 경험을 들려주며 사회인으로 다시 기회를 주고 전쟁터에서 조국인 러시아를 위해 봉사하여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주겠다고 죄수들을 설득했다. 특히 범죄 전과가 있는 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설득하여 바그너 그룹의 회사원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바그너 그룹은 2013년에 창립되었으며, 금전적인 빚이 있는 전직 군인 및 특수부대 출신들까지 고용하여 러시아군의 사상자 수를 줄이거나, 혹은 군 병력을 투입하려는 상대 국가에 주권 침해에 대한 우려로 인해 국제적인 여론이 부담되는 지역에 주로 고용주들과 계약하여 군을 투입하였다. 바그너 그룹이 최초로 모습을 드러낸 때는 2014년 러시아의 크림 반도 합병으로 인해 러시아의 군사정보 기관이자 첩보부대인 GRU와 함께 크림반도 합병 작전에 참가했고, 이듬해 봄에는 우크라이나 동부를 주 활동 무대를 이동하여 루한스크, 도네츠크 지방의 반군들을 지원하며 우크라이나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이후 시리아 내전, 사헬 내전, 모잠비크, 리비아,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 아프리카 3세계 국가와 동유럽의 우크라이나에서 돈바스 전쟁,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하며 러시아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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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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