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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30
  • 러시아와 중국, 표리부동의 상호관계 속에 실익 추구
    러시아와 중국은 과연 상호 협력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 이에 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는 겉보기와 달리 현안별로, 상황에 따라 의외로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도 하고, 때론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협력관계를 추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가깝게 된 것은 헤이룽(러시아명으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타라바로프(중국명 인룽) 섬, 볼쇼이우수리스키(중국명 헤이샤즈) 섬, 밍위에 섬이라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푸위안 삼각주(혹은 이 삼각주 전체를 헤이샤즈 삼각주라고 부른다)를 둘러싼 국경분쟁이 서로 타결된 이후일 것이다. 1969년 3월 2일부터 9월 11일까지 일어난 양쪽 국경분쟁은 2005년 6월 2일에 비로소 완전히 타결되었다. 이때 타결된 내용은 타라바로프 섬을 중국으로 완전히 반환하고, 볼쇼이우수리스키 삼각주를 동·서로 양분하는 것이었다. 이때 중국에 반환된 삼각주의 면적은 총 약 327제곱 킬로미터 중 약 174제곱 킬로미터로 사실상 중국영토의 가장 동쪽 끝이 되는 셈이다. 이에 러시아와 중국은 약 4354 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선을 육상 국경선과 해상 경계선으로 획정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강물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3개의 섬이라고 하지만, 작은 섬들도 그 삼각주 주변에 많이 흩어져 있어서 엄밀하게 국경선을 획정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여튼 이 타결로 인해 영토 문제로 인해 러시아와 중국은 영토분쟁에 관한 한 서로 별다른 문제가 없고, 현재 이 지역은 서로 왕래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은 영토 문제에 매우 민감한데, 러시아는 중국으로부터 할당받는 영토를 일부 돌려줌으로써, 이를 통해 대중국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중국은 러시아보다 더 많은 영토를 반환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러시아는 일종의 경제적-외교적 관계에서 거래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중국은 정치적 관계에 의한 국익에 방점을 두었을 것이다. 만일 중국이든 러시아든 전부 반환이냐 전부 보전이냐의 문제로만 협상이 진행되었더라면, 이 협상은 결코 타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협상 기간이 길었던 것은 러시아와 중국 각각의 내부 사정과 국제질서의 급변이 동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두 국가는 미국에 맞서는 국가이기는 하지만, 서로의 계산법은 현안별로 다르다. 미국에 맞선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 같은 지점에 서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은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행보를 보인다. 서로 정상회담도 했지만, 가시적 성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러시아는 유라시아 지역의 정치·문화 안전보장에 관한 국제협력 기구인 상하이협력기구(CSO)와 구소련연방에서 독립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을 통해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천연가스와 석유 그리고 군사적 협력을 지속화하는 경향이 보인다. 또 러시아는 최근 이른바 아프리카의 사헬 지대(서쪽 세네갈에서부터 동쪽의 수단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 국가들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중국은 이른바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면서 육상 실크로드인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추구하는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식 자유 경제 지대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경제침체와 미국의 대중국 제재 그리고 일대일로에 일부 참여국들이 빚더미로 몰리는 상황은 우려를 낳는다. 더욱이 중국은 최근 러시아의 천연가스관 공사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다. 중국의 터무니 없는 후려치기에 러시아가 난색을 표명하면서 이 공사가 현재 지연되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고 있어서 천연가스 수출로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중국에 관해 유럽보다 할인가격으로 천연가스를 팔았는데, 이것은 러시아가 유럽과 중국의 가격 차별화를 통해 자원을 한편으로 무기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지속적인 미래 성장시장으로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다. 러시아의 원래 계획은 천연가스의 유럽 시장이 축소되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의 시장을 돌려서 안정된 수출공급망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러시아는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중국에 공급하려고 했고, 이른바 ‘시베리아의 힘-2’는 몽골을 걸쳐 중국의 동북아 지역과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힘-1’의 수송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터무니없는 가격 인하 요구로 진전이 없고, 몽골에서도 별로 진전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이 내세운 그럴듯한 명분은 중국이 향후 그린에너지로 전환하게 되면, 천연가스의 의존도를 낮추어야 하는데, 굳이 현재 시점에서 천연가스의 공급을 수요보다 더 많이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러시아가 공급하겠다면 기존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라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러시아로는 그런 가격이면 그동안에 싼 가격으로 중국에 천연가스를 공급해 왔는데, 천연가스의 가격을 훨씬 더 낮추라고 하니, 그러면 러시아도 안 하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는 그렇지 않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중국의 소극적 태도가 불만이었다.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아무리 관계가 친밀해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발생하면 오월동주(吳越同舟)와 같은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러시아와 중국이 중앙아시아에서도 한쪽은 영향력 유지를, 다른 한쪽은 영향력 확대를 희망한다. 또 중국은 아프리카에 투자하면서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아프리카 국가들의 참여들 독려하면서 국가 영향력을 키우려고 한다. 이때 중국은 경제적 투자를 통해 아프리카의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러시아는 이른바 과거 서방의 식민지, 특히 옛 프랑스 식민국가를 중심으로 바그너그룹을 통해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것은 군사적-경제적 측면이 강한데, 과거에 서방의 식민지 각축장이었던 아프리카는 이제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리카는 서구 식민지에 해방되었고, 서방의 지원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이 별로 없으며, 오히려 정정(政情) 불안과 정변, 종족 분쟁과 영토분쟁으로 피로 얼룩져 있다. 아프리카 각국의 국민은 그동안 서구화가 일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가난과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잦은 분쟁과 전쟁의 씨앗으로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이 틈을 군벌들이 활개를 치고 들어가고, 러시아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러시아는 반서방 동맹 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서방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그 핵심은 경제적 지원이고, 각종 치안 불안과 정권 안정을 위해 이제는 서방보다 오히려 러시아가 더 낮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아프리카 각국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는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최근 행보를 보면 중국과 다소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북한과 베트남과 적극적인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핵 문제로 다소 소원하고, 베트남과는 이른바 사사(파라셀)군도와 난사(스프레틀리)군도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러시아는 이 두 국가에 관해 후원국 역할을 자처한 것처럼 보인다.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이른바 ‘대나무 외교’라는 외교술로 유연하면서도 균형 외교를 중시하면서 강대국들 사이에서 실익을 많이 챙겼다. 러시아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아마도 유라시아연합과 동남아시아연합을 하나로 묶으면서 미국- 대만-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남중국해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러시아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중국은 한편으로 베트남과의 남중국해 분쟁에서 러시아가 개입을 내심 우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영향력을 희석화시키는데 러시아와 베트남의 밀착 관계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구도는 현재 중국의 경제 상황과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전쟁으로 인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러시아와 중국이 어떤 행보로 서로의 관계를 모색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9
  • 러시아와 스페인이 맺은 세기의 로맨스
    18세기 초인 1724년, 러시아인들은 아시아와 북미 대륙을 바다로 갈라놓는 베링 해협까지 탐험했으며 1741년에는 러시아인 선장 알렉세이 치리코프가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에 상륙했다. 알래스카의 원주민인 틀링깃족들이 종종 러시아인들을 습격하기도 했으나, 러시아의 군사력에 의해 모두 진압되었다. 러시아인들은 알래스카 남부에 시트카라는 도시를 건설하고, 이곳을 러시아령 알래스카 식민지의 수도로 삼았다. 러시아인들이 이토록 빠른 속도로 드넓은 시베리아를 정복해 나갔던 이유는 바로 여우와 수달과 담비 같은 동물들의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겨울이 길어 추운 날이 많았던 러시아에서 담비나 여우 가죽으로 만든 모피는 추위를 막을 수 있는 고급 상품으로 여겨졌다. 한 예로 1582년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의 코사크 군이 시비르 칸국을 정복했고 수많은 모피들을 노획하여 당시 차르였던 이반 4세에게 담비와 여우의 모피들 수만 장을 바쳤다. 수많은 모피들을 보고 감탄한 이반 4세는 시비르 칸국을 정복한 러시아군 사령관인 예르마크가 예전에 저질렀던 약탈죄를 비롯해 코사크 군 전원를 사면했다. 이렇게 시베리아 원주민들을 정복해가면서 얻은 모피들은 러시아의 국가 경제에서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1623년 시베리아의 러시아 인 관리들이 모스크바에 보낸 보고서에 의하면 검은 여우 모피 두 장의 가격은 110루블인데, 그 돈으로는 말 10마리와 암소 20마리 및 100에이커의 땅을 살 수 있었다고 한다. 1650년대에 이르면 러시아는 국가 수익의 최대 30% 가량을 모피 무역으로 충당할 정도였으니 그 가치는 실로 막대했다. 그래서 시베리아 정복에 나섰던 러시아 인들은 모피를 가리켜, “털이 달린 황금”이라고 불렀다. 1598년에서 1613년 동안, 러시아는 제위 계승을 놓고 러시아 동란 시대라는 최악의 내전을 맞이할 때 시베리아에서 얻은 모피로 인한 막대한 수익으로 인해 정부가 파산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모피는 러시아와 그 외의 유럽 국가들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선물이 되기도 했을 정도였다. 1595년 러시아는 신성로마제국에 다람쥐 모피 33만 장과 담비 모피 6만 장을 선물로 보냈고, 1635년 오스만투르크에는 1만 루블의 모피를 휴전 협상에 사용할 용도의 선물로 보냈다. 그러나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의 과도한 모피 확보를 위해 야생동물들의 개체수가 줄어들자 알래스카와 북미 대륙에까지 진출했는데 그러한 이유는 바로 모피를 얻기 위해서였다. 알래스카가 아시아가 아닌 북미 대륙에 속한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러시아 인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1799년 러시아의 무역 상인인 니콜라이 페트로비치 레자노프(Nikolay Petrovich Rezanov : 1764~1807)는 북미 대륙에 러시아의 식민지 개척을 목적으로 한 사업체인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를 설립했다. 같은 해, 레자노프는 러시아 차르인 파벨 1세로부터 앞으로 20년 동안 러시아-아메리카 회사가 북미 대륙에 진출하는 모든 거점에서 운영과 사업을 독점적으로 할 수 있는 승인을 담은 면허장을 받았다. 이로써 러시아-아메리카 회사는 러시아 정부를 대신하여 알래스카를 포함한 북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는 모든 자격을 얻은 셈이 되었다. 레자노프와 그의 심복인 알렉산드르 안드레이비치 바라노프(Alexander Andreyevich Baranov : 1746~1819) 등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고위급 간부들은 알래스카를 식민지로 삼은 것에 만족하지 않고, 북미 대륙의 더 남쪽까지 진출하려 하였다. 우선 모피 상인들이 탐내던 모피를 더 많이 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땅을 찾아 나서야 했다. 또한 알래스카 식민지에 차츰 러시아에서 유입한 인구들이 늘어나면서 사냥이나 고기잡이만으로는 식량을 충분히 공급하기가 어려워지자 풍부한 농업 생산력을 지닌 따뜻한 남쪽의 땅이 필요했다. 레자노프는 배를 타고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한 끝에 1806년 4월,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를 다스리는 스페인 장관인 호세 다리오 아르게우엘로를 만나서, 캘리포니아에서 알래스카의 러시아 인들에게 식량을 제공하면, 그 대가로 모피를 주겠다는 무역을 제안했다. 당시 스페인령 캘리포니아에서는 외부로 식량을 유출하는 일이 법으로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호세 장관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레자노프는 고민을 하다가 호세 장관이 주선하는 연회에 참석하게 되었고 호세 장관의 딸인 마리아 콘셉시온 아르게우엘로(Maria Concepcion Arguello: 1791~1857)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녀는 호세 장관의 외동딸로 당시 캘리포니아 제일의 미녀로 칭송받던 여인이었다. 15세의 소녀였던 마리아는 42세의 중년 남성인 레자노프와 만나자 사랑에 빠졌고, 이윽고 그와의 결혼까지 결심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호세는 크게 놀랐다. 당시 스페인 인들이 그렇듯이 호세 장관과 마리아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레자노프는 러시아 인이었기에 러시아 정교회를 믿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의 카톨릭에서는 원칙적으로 키톨릭 신자끼리만 결혼하도록 허용하는데, 다른 종파인 러시아 정교회 신자와 결혼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세는 마리아에게 교회법상 레자노프와의 혼인은 허락할 수 없다고 여러차례 설득했으나, 사랑에 빠진 마리아는 무슨 일이 있어도 레자노프와 결혼을 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에 결국은 호세는 딸에게 굴복하게 된다. 6주일 후, 레자노프는 마리아와 일단 약혼식을 올렸다. 딸을 아끼던 호세는 사위가 된 레자노프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빵과 말린 고기 등 식량이 가득 실린 수송선을 알래스카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이리하여 약혼식이 이루어졌지만, 레자노프는 캘리포니아에 계속 있을 수가 없었다. 러시아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에게, 앞으로 북미 대륙에서의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지원을 더 많이 해달라고 요청하기 위해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야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북미 대륙에 정착할 대규모의 러시아 이민자들을 보내달라는 제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자노프는 마리아에게 2년만 기다리면 꼭 돌아와서 정식으로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알래스카를 거쳐 캄차카 반도에 상륙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시베리아 대륙을 통과해야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던 도중인 1807년 3월 8일, 레자노프는 시베리아 중부 도시인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사망했다. 대륙과 대양을 넘나들며 정신없이 사업을 벌이느라 피로해진 레자노프의 사인은 과로사였다. 지금도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남아 있는 레자노프의 무덤에는 마리아를 그리워하며 남긴 유언인 “나는 당신을 다시는 볼 수 없다오. 하지만 나는 결코 당신을 잊을 수 없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 하염없이 레자노프를 기다리고 있던 마리아는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무척 상심하여 몬테레이에 수녀원을 만들고 수녀원에 들어가 평생 동안 수녀가 되어 결혼하지 않고 살다가 1857년에 죽었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인이었지만, 마리아는 레자노프를 진심으로 사랑했던것 같다. 2개 대륙과 대륙, 종교와 나이를 초월한 사랑은 현재까지도 세기를 초월한 로맨스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9
  • 우크라이나의 조상 코사크인들, 과거 우크라이나인들이 우리 역사와의 인연이 있을까?
    정답은 Yes 이다. 그럼 어떤 인연이었을까? 오늘은 서울에서의 약속이 있어 저녁에 늦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현 상황의 논평, 그리고 관계성, 역사에 관해서 등등을 포스팅하고 지금은 우크라이나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가진 분들을 위해 하나 장만했다. 때는 시베리아에 대한 러시아의 개척 시대에서부터 시작된다. 시베리아에 대한 본격적인 개척은 1581년에 코사크의 수장인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Ермак Тимофеевич)에 의해 주도적으로 이루어졌다. 코사크라는 어원도 원래 이주민, 혹은 일당 노동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무거운 세금과 노역을 피해 변경 지방으로 도주한 농노들 또는 그들의 자손들이 품팔이와 수렵 또는 약탈 등으로 생계를 유지했기에 그러한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예르마크는 이러한 코사크들의 수장으로 볼가 강 일대에서 약탈을 일삼다가 정부의 단속을 받아 수감되었지만 스트로가노프 가문의 구제 요청으로 인해 석방되었고 그는 러시아 황실에 약간의 지원을 받고 시베리아 개척에 나선다. 그리고 오늘날 노보시비르스크에 자리잡고 있던 시비르 칸국을 정복하고 세묜 볼호프스키(Семен Волховский)의 지원을 받아 쿠춤 칸국도 정복하면서 바이칼에 이르렀다. 그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상 최초로 바이칼에 다다른 인물이 된다. 그래서 지금도 이르쿠츠크에 가면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의 동상이 있다. 그러나 예르마크와 볼호프스키는 승리 속에 방심하고 있다가 타타르의 복수 부대에 역습을 받아 전사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예르마크의 원정이 이루어짐에 따라 러시아인들은 우랄산맥을 건너가 시베리아로 이주하여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러시아도 본국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만만치 않은 강적인 타타르족을 만난 셈이라, 신중하게 움직였다. 1643년, 모스크비친(Moskvicin)이 거느리는 시베리아 탐험대가 오호츠크 해를 탐사했으며, 다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아무르 강 유역과 사할린 섬을 조사하게 되면서 중국 청나라의 영토까지 불법으로 넘나들게 되었다. 당시 중국은 이자성에 의해 붕괴된 북경을 청나라가 다시 차지하여 제3대 순치제가 청나라 황제로 등극한 상황이었다. 이에 러시아에서는 또 다른 탐험대를 파견했다. 파견된 포야르코프 탐험대는 아무르 강이 오호츠크 해로 흘러들어가는 하구 일대를 답사한 다음, 그 곳 부족들의 동향에 대해 모스크바에 보고했다. 오호츠크 일대의 부족들은 청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있지 않고 있고 이들을 잘 공략하면 러시아에 조공을 바칠 수 있는 민족으로 만들 수 있는 것으로 보고했다. 이듬해 파견된 하바로프 탐험대는 포야르코프의 보고를 재확인했고, 오호츠크 연해는 매우 비옥하여 농산물 소출이 좋다는 점, 이를 배경으로 오호츠크 연해와 사할린 섬까지 점령하면 군량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이어 보고하게 된다. 1651년 하바로프는 본국에서 증원된 병력을 이끌고 아무르 강 유역의 다구르 족을 공격했다. 이 때 증원된 병력이 바로 그 유명한 코사크 기병대와 소총수 부대다. 이들의 용맹성은 폴란드의 후사르 윙도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유럽 최강의 군대로 알려져 있다. 이에 소수의 청나라 군사가 지원했으나 다구르 족과 소수의 청나라 지원군으로는 코사크 기병대를 이길 재간이 없었다. 결국 패배한 청나라는 물러났고 하바로프는 한 동안 러시아 군의 제1 전진 기지가 될 알바진(Albazin) 요새를 건설했다. 1652년에는 네르친스크에 요새가 세워졌으며, 시베리아 중부에서 새 영토들을 개척하기 위해 정착민들과 죄수들이 속속 도착했는데 이들 또한 우크라이나 땅인 드네프르 강 일대에서 농민봉기를 일으켰던 자포로제 코사크 족이었다. 결국 이들이 연해주와 극동 지역의 러시아-우크라이나에서 온 최초의 정착민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이쯤 되자 청나라도 러시아의 갑작스러운 진입에 경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2,000여 명의 병력으로 알바진을 공략하게 했는데, 이에 맞선 코사크 군은 200명 정도에 불과했으나 우수한 무기 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잘 방어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전투는 서로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러시아-코사크 기병대를 축출하지 못한 청나라의 패배에 가까웠다. 러시아가 만만하지 않은데다 코사크 기병대와 소총수들의 활약에 그 위험성 깨달은 청나라는 무기의 불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 조선에 조총수들을 파병해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조선의 조총수 파병 요구의 배경은 당시 청나라가 남쪽에서 발생한 "삼번의 난"으로 인해 주력군들이 죄다 남쪽으로 파병되어 있었고 북방을 지키거나 러시아-코사크군을 공격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의 왕은 효종(孝宗, 1619~1659, 재위 : 1649~1659)이 즉위하던 때였다. 효종은 청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에 임명하여 비밀리에 군대를 훈련시키고 성지(城池)를 개수했다. 또한 제주도에 표착한 네덜란드인 하멜 등에게 신무기를 만들게 하고,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 등을 등용하여 군비를 확충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왕조실록-효종실록>12권, 5년 (1654 갑오 / 청 순치(順治) 11년) 2월 2일(계해) 1번째 기사에 의하면 청나라에 다녀온 차사 한거원(韓巨源)이 서울에 돌아와 “조창(鳥槍)을 잘 쓰는 사람 1백여 명을 뽑아 보내라”는 청나라 예부의 요구를 전달하자 효종이 ‘나선’이 어떤 나라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한거원은 “영고탑 근처에 사는 별종들”이라고 대답했다는 기록이 있다. 마침내 영의정 정태화가 북우후(北虞候) 변급을 군사 인솔자로 추천하였고 변급은 회령에서 8일만에 영고탑에 도착했다. 이어 영고탑에서 다시 14일 가서 왈합에 도착하여 코사크 소총수들과 조우하게 된다. 이 때 러시아-코사크 군은 큰 배가 13척, 작은 배가 26척이었다. 청나라 장수가 조선군을 선봉에 세우려 하자 변급은 “이 작은 자피선으로 어떻게 큰 서양 배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며 거부하자 이를 타당하게 여긴 청나라 군은 왈합 원주민 300여 명과 청군 300여 명으로 러시아군을 공격하고 조선군에게는 포병으로 지원사격을 맡겼다. 청나라는 당시 조선 조총수의 위력에 새삼 놀랐다고 한다. 한편 조선 조총수의 위력에 그 유명한 코사크 인들은 장교 스테파노프를 포함하여 270여 명이 전사하였고 잔당은 모두 패퇴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군의 뛰어난 조총 사격에 러시아인들과 코사크 군들은 모두 뱃속에 숨어 있었고 조선군과 청군은 러시아 군함에 불을 질렀으나 러시아 군함에 실린 재물을 탐한 청나라 장수가 배의 불을 진화하고 전리품을 얻을 것을 명령하면서 조선 병사들은 황급히 불을 끄고 다시 배로 돌아가는 헛수고를 해야 했다. 그 때 숨어있던 러시아인들이 사격을 가하면서 조선군 7명을 포함한 다수의 전사자가 났고 기습공격에 분노한 조선군은 반격을 가해 러시아인들을 모두 섬멸했다고 전해진다. 이 전쟁이 바로 나선정벌로 이어서 1655년의 코마르(Komar) 공방전, 1657년의 사르호디(Sarhodi) 전투, 1658년의 제2차 나선정벌 등에서 양측은 다시 공방전을 벌였으나 1660년 이후로는 청나라 측이 명나라의 잔적들을 섬멸함에 따라 러시아의 남진에 집중할 수 있어 우세를 잡게 되었다. 이에 더 이상 조선의 조총수들을 요청하지 않게 됨에 따라 결국은 우크라이나의 조상인 코사크인들과의 짧은 만남은 이렇게 끝나게 된다. 당시 나선정벌 때 러시아군의 주력은 코사크인들이었기 때문에 현재 우크라이나와는 크게 상관은 없지만 우크라이나의 조상들과 우리 한국사는 굵고 짧은 전쟁으로 인해 그 인연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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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3
  •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베트남에서 회담을 주목하며
    북한을 떠나 20일 베트남 하노이에 도착한 푸틴 대통령은 곧바로 일정을 가졌다. 야쿠츠크-평양-하노이로 이어지는 일정은 다른 국가 정상이었다면 피곤할 수도 있는 일정이다. 미국 바이든 같으면 그런 일정을 소화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각에서 푸틴이 암에 걸렸다. 혹은, 치매나 알츠하이머 등등 와병설이나 위독설이 제기되었지만 그런 설을 비웃기라도 하듯 아주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고도 암에 걸렸다. 혹은, 치매나 알츠하이머 등등 와병설이나 위독설 등은 전 세계 뉴스 찌라시들의 헛소리이자 희망 사항으로 밝혀졌다. 이번 베트남 방문 또한 북한 방문에 이어 또 다른 의미의 방문이라고 생각이 든다. 1. 지정학적 외교적인 부분 러시아와 중국의 관계는 현재까지 좋은 관계다. 그러나 상호 간에 그리 미덥지 못한 관계인 것은 맞다. 최근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가는 천연가스 공급이 지연되고 있다. 러시아는 2022년 손상된 노르드스트림1 송유관과 거의 같은 양인 연간 500억 입방미터(bcm)의 가스를 러시아 북부에서 몽골을 거쳐 중국으로 운반할 새로운 가스관을 건설하기 위해 협의해 왔다. 그런데 이 공사가 현재 지연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은 주요 세부 사항에 대해 아직 합의하지 못했다. 시베리아의-2 전력을 운영하게 될 가즈프롬은 2030년까지 가스를 공급하기 시작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하지만 가격을 포함한 주요 쟁점들에 대한 합의는 아주 요원한 상태다. 중국과 러시아 측은 여전히 계산과 추정을 하고 있고 경제적 이익에 대해 합의가 신통치 않다. 후문에는 중국이 가스값을 사정없이 후려치고 있기에 러시아 입장에서는 중국이 후려친 가격으로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겉으로 큰 부분에서는 러시아와 중국이 좋은 협력관계로 보이지만 세부적인 면으로 볼 때, 작은 부분에서부터 이미 삐걱거리는 부분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부분들도 있기에 정치, 외교적으로 겉으로는 아주 친밀한 관계에 있지만 사실상 세부적으로 볼 때 서로 아직까지 완전히 믿지 못하는듯 싶다. 그렇다고 중국이 러시아에게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완전히 지원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집단서방, 미국 등과 맞서기 위해 상호 간의 친밀감을 과시하며 견제하는 용도일 뿐이다. 이를 서로 간에 경제적으로 러시아가 먼저 들어가면 중국이 따라 들어오고 중국이 먼저 들어가면 러시아가 따라 들어오는 스텐스를 취하며 저마다 국익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상 오월동주(吳越同舟) 관계라 볼 수 있겠는데 당사자들끼리 친밀감을 과시하면서 속으로 서로 견제하는 모션을 취하고 있음이 여기저기서 보여지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언제 변할지 모르는 국제 관계의 속성상, 중국을 외교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북한과 베트남이라는 일종의 보험을 들어놓기 위해 볼 수 있겠다. 게다가 둘 다 러시아와 '포괄적 전략 동반자(договор о Всеобъемлющем стратегическом партнерстве)' 관계를 맺고 있다. 이는 여차하면 중국을 지렛대로도 삼을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과 베트남은 서로 국민 감정도 좋지 않고, 상황에 따라서 중국이 베트남의 적성 국가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북한과도 마찬가지다. 북한은 그동안 중국에 경제적으로 많이 의존하였지만 때에 따라서 서로 견제하고 갈등이 생기는 경우도 종종 있었기에 북한 입장에서는 미국과 중국도 동시에 견제하기 위해 러시아를 파트너로 맞아 들인 부분도 있다. 최근 베트남에는 화교 집단들의 세력이 커지며 당 중앙에까지 진출하려는 움직임도 있어 응우옌 푸 쫑 서기장은 이들을 정치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부정부패 사건을 터뜨려 이를 계기로 숙청을 단행하고 있다. 최근 베트남 국가 주석인 보 반 트엉이 푸 쫑 서기장에게 숙청을 당했는데 이는 명목상 부정부패였으나 실질적으로 베트남 남부 지역 화교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보 반 트엉은 호치민과 남부 지역 화교들이 경제적으로 성장세를 보이며 남부 지역의 주축으로 자리 잡아갈 때 화교에 대한 권익을 많이 보호해 주었기 때문에 친중적 성향을 갖게 된 배경이 있다. 따라서 푸 쫑은 이를 적극 견제에 나서 보 반 트엉을 실각시키고 외부적으로 러시아를 끌어들여 친중파 각료들과 화교 집단, 이들을 지렛대로 활용하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인 것도 있다. 그런 의미로 베트남은 러시아의 행동을 비난하는 UN의 결의안 투표에서 여러 번 기권을 택했다. 심지어는 러시아에 물자를 지원하기도 했다. 물론 베트남은 모두와 친구로 지내되 공식적인 동맹은 맺지 않는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베트남은 과거 전쟁으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미국과도 협력하고 러시아와도 동시에 우방관계를 유지 중에 있다. 이는 모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특히 스프래틀리 군도 분쟁과 파라셀 군도(Paracel Islands) 영토 분쟁은 베트남 홀로 중국을 상대하기 보다는 러시아를 통해 대화의 창구 및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베트남은 지정학적, 혹은 외교적인 부분에서 상호 지렛대 활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푸틴 대통령이 하노이 방문함으로써 이를 공고히 하려는 이유가 크다. 그리고 러시아는 베트남을 통해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전략을 약화시키려는 부분도 함께 가지고 있다. 생각보다 다양한 전술, 전략으로 북한과 베트남을 써먹을 수 있다는 것에서 푸틴 대통령 지정학적인 전략을 잘 구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2. 경제적인 부분 오늘날 베트남의 경제는 세계 시장에 통합되면서 변화하고 있다. 베트남의 대러 무역 규모는 중국, 아시아, 미국, 유럽에 비해 훨씬 더 적은 편이다. 이는 거리상의 문제도 있지만 90~2000년대에 러시아 경제가 파탄 상태에서 서서히 끌어 올라오는 시기였기에 양국 경제적인 부분에서 협력은 그만큼 많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베트남 또한 러시아의 원유와 가스를 받아 축적하는 것을 늘리고 남중국해 석유 탐사에서 러시아 석유 기업과의 파트너십에 합의했다. 더불어 사할린 에너지의 안드레이 오호트킨 이사가 밝히길 사할린-2에서 생산하는 LNG 수출 지역을 베트남을 거쳐 인도까지 늘린다고 했다. 게다가 응우옌 푸 쫑 서기장은 1981년 소련의 사회과학아카데미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전례가 있기에 러시아와의 관계에 있어 손수 챙겨왔었고 '베트남의 삼성'으로 불리는 빈 그룹 창업자 팜 냣 브엉(Phạm Nhật Vượng) 회장 역시 러시아 유학생 출신이다. 이러한 인연들로 인해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 강화 및 확대는 푸틴 대통령의 하노이 방문으로 인해 대폭 이루어질 전망이다. 더불어 베트남 또한 전력 사정이 좋지 않다. 전력량 사용이 급증하고 있고 최대 300% 이상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베트남의 경우, 한국과 달리 납부기한을 초과하는 즉시 얄짤없이 전기가 끊긴다. 베트남의 시골에는 이유 없이 전기가 나가 1시간 가까이 들어오지 않은 적이 있었다. 도시의 경우, 태풍을 비롯한 자연재해가 아니고는 발생하지 않는 일이긴 하지만 호치민의 경우, 간간히 끊기는 경우가 발생한다. 아마도 그것은 발전 용량의 문제라기보다는 마을 내 전기를 수급하는 과정에서 일시적인 문제가 있었기 때문으로 추측되지만 전반적으로 전기 수급이 원활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남부 지방에는 메콩델타 최대 발전사업으로 현재 베트남전력공사(EVN)와 싱가포르 회사가 협정을 맺어 발전단지를 만들고 있지만 이 또한 감당이 안 된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원전을 짓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원전 기업인 로사톰(Росатом)의 지원을 받아 베트남에 원자력 과학기술 센터를 설립하는 방안을 추진하려 하고 있다. 그리고 베트남에 원전 기술 제공을 도울 것이라 언급하기도 했다. 원전에 대해 러시아의 도움을 받는다면 고질적인 베트남의 전력난도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북극항로와의 연결점이다. 최근 러시아가 수에즈 운하의 대안으로 북극항로를 제시하면서 연해주 중심의 신항만 투자를 늘려가고 있으며 동방경제포럼 때 이러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졌다. 북극항로에 있어 동해와 동남아시아 사이를 연결해주는 대각선 정점에 부산이 위치해 있고 러시아는 이런 형식으로 동남아시아에 진출하고 싶어한다.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북극을 연결하는 신(新) 해상 실크로드가 되어 물류의 새로운 중심이자 그 종심적 역할을 베트남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베트남을 통해 인도네시아까지 나아갈 수 있다. 동남아시아와 러시아, 북극을 연결하는 신(新) 해상 실크로드가 되어 물류의 새로운 중심으로 발돋움 할 수 있는 요충지로 러시아 입장에서는 베트남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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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2

포토뉴스 검색결과

  • 러시아는 한 때 현재 미국 켈리포니아까지 정복한 적 있다
    러시아 출신의 슬라브 인의 최초의 알래스카 정착 기록은 1648년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가 콜리마 강에서 출발하여 북극해를 가로질러 아나디리 강의 하구에 도착했다는 기록이 <로마노프 연대기(Хроника Романов)>에서 전해진다. 시베리아에서 건너온 아시아-아메리카 토착민들의 혼혈과 더불어 러시아-슬라브 인들의 후손들은 러시아가 알레스카를 팔기 전까지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최초 시민이 되었다. 세묘나 데쥐뇨바(Семёна Дежнёва)의 탐험대 중 일부는 알래스카에 먼저 도착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그들이 알래스카에 정착했다는 기록은 현재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데쥐뇨바의 탐험은 러시아 중앙 정부로부터 시작되어 연결된 것이 아닌 시베리아의 끝 지역이 어디인지 확인하고자 했던 것이고 시베리아가 다른 대륙과 연결되어 있는지에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상륙만 했던 것 뿐이다. 그로 인하여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탐험을 한번 더 부탁했으나 데쥐뇨바가 1721년에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무산되었다. 1733~1743의 제2차 캄차카 지역의 탐험 일부로 1741년 6월에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이 이끄는 페트르 탐험대와 러시아인 알렉세이 치리코프(Алексей Чириков)가 이끄는 파벨 탐험대가 캄차카 반도의 항구 뻬뜨로빠블로쁘스끄 깜쨔츠끼(Петропавловск-Камчатский)에서 원정을 시작했다. 두 탐험대는 후에 따로 분리되었지만 동쪽으로 항해를 계속하면서 6월 15일에 치리코프(Чириков) 일행이 알레스카 남단의 프린스오브웨일스(Prince of Wales Island) 섬 서부 해안의 땅을 발견하고 북아메리카 북서부 해안가에서 최초로 유럽인들을 정착시키게 된다. 6월 16일경에 베링과 페트르 탐험대는 알레스카 본토의 세인트 엘리아스(Saint Elias) 산을 발견하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에 동시에 파벨 탐험대의 치리코프는 10월달에 새로운 땅인 알류산 열도 중 한 곳을 발견했다는 소식을 가지고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에 베링의 배는 러시아로 돌아오는 도중 베링 섬에 난파되었고 그곳에서 베링은 풍토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어 출항한 페트르 탐험대는 돌풍을 만나 갈라지게 되면서 각 섬 지역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이 알류산 열도에 속한 군도들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원들은 엄청난 추위가 닥치는 알류산 군도에서 겨울을 버틴 후에 1742년 8월에 난파선의 조각으로 배를 만들어 러시아로 떠나게 된다. 그 이후 시베리아와 알레스카 사이의 협수로를 덴마크 탐험가인 비투스 베링(Vitus Berin)의 이름을 붙여 베링 해협이라 불리게 되었다. 베링의 선원들은 1742년에 캄차카 반도의 해안에 도달했고 탐험에 대한 이야기들을 저술로 남겼다. 이때 그들이 가져온 고급 해달 가죽은 러시아 인들이 아메리카 정착을 본격적으로 노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때 이후로 알류산 열도와 알레스카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었고, 19세기 초에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있던 북아메리카 서부 지역 인디언들 지역들을 뚫고 오늘날의 미국 오리건주(州)와 캘리포니아 주(州), 캐나다의 브리티시 콜럼비아 주(州)까지 진출하면서 식민지로 삼았다. 19세기 초반에 러시아령 아메리카는 남쪽으로 스페인령이던 멕시코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아메리카 회사의 총책임자였던 니콜라이 레자노프(Николай Резанов)는 알렉산드르 1세의 명으로 러시아령 아메리카 총독으로 파견되어 스페인 측과 협상을 하도록 했다. 레자노프는 스페인령 지역과의 국경 지대에 러시아 인들을 진출하는 것에 대해 러시아 정부가 직접적으로 후원하려는 방편으로 요새의 건립을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본국인 이베리아 반도와 지리적으로 매우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세력도 한창 활발했던 16~17세기 같지 않았던 스페인은 역사적으로도 러시아와 인연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이러한 요구를 흔쾌히 들어주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켈리포니아 지역에 러시아 요새가 건립이 되는데 러시아 아메리카 총독인 니콜라이 레자노프는 요새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1807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가 죽은지 5년이 지난 1812년에 비로소 요새가 건립되었고, 그 요새가 바로 로스 요새(Fort Ross)이다. 만약에 러시아가 오리건이나 켈리포니아, 브리티시 콜롬비아까지 모두 장악하고 유지했었다면 그거야 말로 역사상 유래가 없었던 세계 최대 제국이자 영토였을 것이다. 아마 미국도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비슷한 예로 몽골 제국이 있지만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는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을 정복했고 우즈베키스탄의 3개의 칸국에게서 조공을 받아 정복 전 단계에 놓여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캐나다 서부와 미국 서부의 영토를 가졌다면 그만한 대제국은 전에도, 후에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캘리포니아는 러시아 본국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유지비가 너무 많이 들었고, 설상가상으로 알레스카 지역으로 미국 상인들이 진출하면서 알레스카 지역에서의 미국에 대한 경제적인 의존도가 심해지자, 결국 러시아는 러시아령 아메리카의 켈리포니아와 오리건, 브리티시 콜롬비아를 포기하고, 경제적 중심지인 알레스카 지역에 집중하기로 하면서 로스 요새는 거의 버려지다시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러시아와 영국 간에 벌어진 이른바 그레이트 게임(The Great Game) 이라고 불리는 대치전 때문에 러시아의 북아메리카 식민지 경영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영국령이던 캐나다의 산하 회사인 허드슨 만 회사에 알레스카를 통과하여 항해할 수 있는 권리를 넘겨줌으로써 알류산 열도가 영국의 위협을 받게 되자 러시아는 1867년에 알레스카를 미국에 팔아치우게 된다. 1에이커 당 2달러의 가격으로 미국이 알레스카를 거저 먹은 것이다. 따라서 로스 요새를 비롯한 미국 서부 지역은 자연히 미국 영토로 넘어가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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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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