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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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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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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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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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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 지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동쪽으로 이란 북서부에서 카스피 해에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쿠르디스탄, 아르메니아, 터키에 이르며, 북쪽으로 조지아와 러시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략적인 입지는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이들 국가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영토의 일부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류된다. 두 개의 부분은 19세기 초 이래 분할되었는데, 아라즈(Araz) 강을 그 경계로 한다. 아라즈 강 양쪽에 거주하는 아제르-투르크인이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또한 아제르바이잔에는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레즈긴 인, 탈레쉬 인, 유대인, 기독교인과 바하 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국가로서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800만 명의 인구 중 90%가 투르크 민족으로 세속화 된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 화를 받아들이면서 복합적인 역사적 유산을 가진 국가로 존재한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정체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지난한 역사와 소련으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석유 자원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1991년 독립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대외 환경적 측면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은 정체성 형성에 특별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부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해명하려 할 경우 다음의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적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인데, 이러한 요소는 페르시아의 유산이다.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는 투르크 어족에 속하는데, 이는 터키의 영향에 따른 귀결이다. 셋째, 러시아식 교육이 아제르바이잔과 유럽 대륙을 연결시켰는데, 이와 같은 점은 러시아 유산의 중요한 측면이다. 넷째, 고유한 역사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이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에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적 딜레마는 복잡다기한 문화적 유산을 안고 있다는 사실과 독립 이후에 민족의식의 재건과 민족주의운동의 고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은 아제르바이잔의 탈 소비에트 정체성을 재건하는 과정을 극히 미묘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정부는 새로 획득한 독립과 민감한 지정학적인 입지를 고려해 대내외 정책과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과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종족적 연원이라는 요소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고려라는 요소였다. 탈 소비에트 신생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입지라는 요소를 다루는 데서도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여기에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은 그 과제의 해결을 더욱 복잡하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1991년에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다시 획득한 이래, 학자와 관료, 일반 대중들 간에는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여타 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진행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논쟁은 특히 격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대외정책의 방향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대해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 대중전선(Popular Front of Azerbaijan, PFA)의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국경을 접하는 역내 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첫째, 과도하게 친 터키적인 대외 정책의 접근은 러시아와 이란을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제르바이잔 국가 이념의 많은 측면을 조화시킬 하나의 국가 이념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키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소수민족집단을 자극해 이들 집단이 역내 인접국에 의해 쉽게 조종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의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접근적인 형태’로 아제르바이잔의 소수 민족 집단을 조종했으며, 더욱 불안정한 정세를 조성해 러시아와 이란의 요구에 더욱 순응하는 정부가 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인 대다수의 언어는 ‘아제리어’이며, 지배적인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전체 아제리 인구 중 2,000~3,000만 명은 남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이란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800만 명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200만 명 가까이가 터키에, 약 200만 명이 러시아, 나머지 인구는 주로 조지아, 이라크,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에 이주한 아제리 인의 민족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이란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아제리 인의 역사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 시대(1501~1722)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그들의 지배권은 오늘날 터키의 카르스(Kars)와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란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1813년 굴리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제리 인들이 터키로 이주하여 동부 지역, 특히 에르주룸(Erzurum)과 아그리(Agri)에 정착했다. 아제리인의 터키로의 이주는 1920년대, 1940년대 말,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터키의 아제리 인구는 주로 아제리와 아나톨리아 투르크 간의 문화적 · 언어적인 친근성으로 인해 터키 사회에 잘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아제리 인은 주로 시아파인 반면, 아나톨리아 투르크인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으로 다르다. 방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종족적 · 민족적 의식이라는 면에서의 자아 인식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M. T. 제흐타비(M. T. Zehtabi)는『이란 투르크 인의 고대 역사(The Ancient History of Iranian Turks)』라는 책에서, 현재의 아제리 인의 기원을 5,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수메르(Sumerian)와 일라미트(Ilamite) 문명에서 찾았다. 제흐타비는 고고학적, 언어학적인 근거를 통해 오늘날의 아제리 인은 고대의 일라미트 인, 메데 인(Medes)과 종족적 · 민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카시 인(Kassies), 구티 인(Gutties), 룰루비 인(Lullubies), 후라이 인(Hurraies)과 같은 교착어 민족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전거(典據)에 의하면, 3개의 다른 종족적 구성 요소들이 아제리 의 형성과 전개에 관련되었다. 첫째는 주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집중되어 있었던 메데인, 둘째는 북부 아제르바이잔에 살았던 아란-알바니인(Aran-Albanese), 그리고 셋째는 고대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부분에 거주했으며 특히 같은 지역의 이슬람 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민족이 이주해옴에 따라 그 수가 끊임없이 증가했던 투르크인이다. B.C 6세기경에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로부터 229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다. 그 후 3세기가 지나 아제르바이잔은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그 이래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카프카스 지방의 투르크 연합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A.D.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약 3만 명의 무슬림 아라비아 인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 정복했으며, 쇠퇴해가고 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51)를 전복시켰다. 북부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9세기 내내 지속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새로운 무슬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837년 아라비아 인들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강력한 저항 운동의 본거지였던 바박 성(Castle of Babak)을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 전체에 걸쳐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인해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7세기 말 무렵인 668년에는 시르반(Shirvan shahs)이라 알려진 토착 왕조가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는데, 1539년에 사파비 왕조에 병합되어 다시 한 번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통합될 때까지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재통일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로서 또 다시 경제적 · 문화적 · 언어적 자치권을 누렸다. 19세기 초에 이란, 특히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두 차례의 걸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독립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위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광대한 영토가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이 병합은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려는 아제리 인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10월 혁명의 혼란스런 분위기에서, 1918년 3월 28일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중순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로운 직접선거, 비례대표, 보편적 참정권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학교 제도에서 모국어 수업과 학습이 의무화되었으며, 아제리 어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어가 되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소련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제리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이에 따라 독립 국가로서의 짧은 경험은 끝나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남부 지역은 특히 문화와 언어를 비롯한 무역과 상업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위를 계속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1년에 레자 칸(Reza Khan)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절대 군주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적,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자치권은 종결되었다. 레자 칸의 가혹한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지금까지 독립된 지역으로서의 아제르바이잔은 이제 여러 개의 종속된 ‘오스탄(Ostans)’ 혹은 지방으로 분할되었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는 반세기에 걸쳐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강제적인 동화 정책은 파시 어를 사용하는 동질적인 국가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이에 따른 귀결로서, 아제리어로 된 신문, 잡지, 서적의 출판은 금지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인은 자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1979년 팔레비 정권이 전복되었으며, 뒤이어 이슬람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샤(shah)가 실시한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레비의 몰락과 함께 새로 출현한 ‘반 민족주의’ 이슬람 이념에 의해 일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당시의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다양한 종족적 요구와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권은 문화적 · 언어적 권리를 위한 다양한 민족의 요구를 억압했다. 자체적인 헌법은 비(非) 파시어 수업과 학습을 허용했지만, 새 정권은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제2 언어’로 확인함으로써 팔레비 시기 동안 비(非) 페르시아 언어에 부과된 금지령을 강력하게 계속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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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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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 아리아계는 인도유럽어족 중에 인도이란어파의 한 분파인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종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중앙아시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에서 기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넘고 인도 대륙에 정착한 또 다른 사카 계통 민족들의 후손으로, 청동기 시대 때 반농반목, 반유목민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다가 비옥한 장소를 찾으면 곡물을 파종하고 정착했으며,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수레를 타며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후손들로 여겨지는 오늘날 국가들은 주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몰디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도 대륙에 정착한 민족을 설명할 때 주로 아리아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여기에 누리스탄 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현 인도인과 인도-아리아인의 차이점에 견지한다면 전자는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인도 문화권 사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계 민족들은 피부가 밝고 코가 높으며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피부가 어둡고 비교적 코가 뭉툭하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밝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어두워진다. 실제로 아리아계 민족 중에 동쪽에 거주하는 오리야인, 벵골인, 로힝야 족은 드라비다 인처럼 피부색이 어두우며 서쪽에 거주하는 카슈미르 인, 펀자브인 은 이란인처럼 피부색이 밝은 편이다. 그리고 인도 동북부의 아삼 족이나 벵골 인들은 티베트 버마어파계 제 민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문다 족 같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유라시아 인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주로 인도 공화국에 대략 9억 1,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며 파키스탄엔 1억 7,000만 명, 방글라데시엔 1억 6,000만 명이 거주한다. 그 중에서 힌두스탄 인이 대략 3억 2,900명으로 중국 한족 다음으로 2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노동자는 보기 쉬워도 인도인들은 보기 좀 어려운데, 인도인들이 주로 진출하는 곳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언어적으로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유럽, 특히 영어가 공용어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 영국, 미국 권, 중남미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편이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인도 문화권과는 접점이 없고, 거리도 가깝지 않으니 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힌두교인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면 카스트를 잃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타난 선민사상의 일종일 뿐이다. 인도인들은 웬만한 브라만 카스트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힌두교의 가르침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동아시아로 잘 오지 않을 뿐이지, 애초에 해외에 진출한 인도인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규모로는 5,000만 명에 달하는 화교 다음으로 많다. 오늘날 이란계 민족은 이란어군 언어 모어 화자들을 보면 2022년 기준 파슈토어 구사자 약 6,000만 명, 페르시아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쿠르드어 구사자 약 3,600만~4,500만 명, 다리어 구사자 약 900~1,200만 명, 타지크어 구사자 약 800만 명, 루르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발루치어 구사자 약 3~500만 명, 길라크어 및 마잔데란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자자어 구사자 약 130만 명, 오세트어구사자 약 60만 명, 탈리시어 구사자 약 수십만 명, 타트어 구사자 약 수만 명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공용어, 파슈토어와 다리어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타지크어는 타지키스탄의 공용어이다. 인구수는 모어 화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좀 더 많아진다. 크게 파슈토어가 속해있는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동부 이란계 민족과 페르시아어가 속해있는 서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각 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인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가 동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이란인 중 북쪽에 있었던 분파가 스키타이계인 동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남쪽에 있었던 분파가 페르시아계인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원래 북쪽에 분포하던 동부 이란계 민족은 중세 이후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의 거주민이 이란계에서 투르크계로 대체되어 소멸하여 오늘날에는 동부 이란어계 민족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민족이 파슈툰 인이 된 것이다. 이란계 민족이란 표현은 학술적인 분류일 뿐 당사자들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인이나 발루치인 다수는 이란 계열이라는 표현이나 이란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이란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인들은 타지크 인들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않으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와 같은 반감들이 이란의 쿠르디스탄, 발루치스탄 분리주의 투쟁, 타지키스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혈사태와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란계 민족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범이란주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란 내에 이를 주장하는 쇼비니즘 정당인 Pan-Iranist Party가 있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는 시아파 신정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인도 뭄바이에 대규모로 살고 있는 파르시라는 이란계 인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구자라트 문자를 사용한다.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표적인 파르시 계통의 영국인인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많은 파르시들이 인도를 떠나 홍콩, 영국 등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섬에는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도 이주민 집단으로 정착했다.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의 페르시아 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프(남성형) / 바(여성형)라는 돌림 성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중 이란계 민족들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인이 아닌 파슈툰 계통 사리콜 인과 와키 인을 일컫는 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파키스탄 접경지경 타슈쿠르간 자치 현에 거주한다. 이란계 민족들은 고대에 유라시아 스텝 지대 서부와 중부에 걸쳐 널리 분포했으나, 서부 스텝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은 대부분 인구수가 적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계통 민족들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발칸반도에 살던 이란계 민족들은 B.C 4세기에 켈트족들에게 학살당하고 동화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훈족이 대두할 때 일부는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 시대에 게르만 족과 함께 이동하다 동화되었으며, 스텝 지대에 남은 인구는 6세기 이후 대부분 슬라브족이나 투르크족에 흡수되었다. 중앙아시아 스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과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계 민족들은 서기 6세기~15세기 투르크 민족들의 대 이주를 거치며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원래 이란계 인구가 많았던 데다 투르크화 되는 동안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페르시아는 이란계 고대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로써 이란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되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영어로는 Medes / 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Madai)였으며, 중심지는 엑바타나였다. <개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메대(Mede)라 불렸으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이란에서 현재 메디아 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지명으로 보면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진 국가였다. 메디아 인들은 이란 고원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원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 때 스키타이인의 침공을 당했지만, 퀴악사레스(Qiwaksares)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퀴악사레스는 국력을 일신하여 영토를 이란 고원 건너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일대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신(新) 바빌로니아와 함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정적으로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 일대에 있었던 서방의 강국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삼아 휴전했다. 이후 퀴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Astuiages)는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리디아와는 휴전 이후 점차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신(新) 바빌로니아는 신(新) 아시리아 멸망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방이었기 때문에 아스튀아게스 시대의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Pars)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Harpagos)까지 가담하면서 아스튀아게스는 패배하고 키루스 2세에게 직접 처형을 당한 뒤 공식적으로 메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 인과 파르스 인은 언어, 문화, 인종,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냥 메디아-페르시아 인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에 널리 퍼진 것도 메디아 왕국 시대의 일이다. 다만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물이나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실체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메디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한 것은 메디아의 수도로 여겨지는 엑바타나에 현대 도시인 하마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며 연구된 메디아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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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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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선제 공습으로 시작된 두 나라간 의 전쟁은 미국이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등 이란의 3개 핵 시설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다. B-2 폭격기로 벙커버스터 GBU-57을 투하했다 하는데 B-2 폭격기 여러 대가 괌 기지에서 출발했고 이들이 벙커버스터를 투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가 이번 한 방으로 이란의 핵 시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중동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천명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트럼프의 "거대한 착각"이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이란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강화할 것이고, 이로써 전쟁은 이란과 미국의 전쟁으로 표어가 바뀔 것이다. 그런데 이란의 핵 시설에 있던 농축된 우라늄들이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미국이 벙커버스터로 때린 곳은 빈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이란은 자국에 대한 미국의 공격으로 인식하고 미군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란과 미국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며 앞으로의 귀추는 미 지상군이 언제 이란 영토에 투입되느냐, 미 함대가 언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여부에 달려 있다. 미국의 여태 전쟁에 있어 주요 전략은 지난 걸프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걸프전 때 미국은 엄청난 양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폭격으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한 뒤, 해병대들이 들어가 지상군이 상륙할 곳의 적군들을 제거하고, 함대에 탑승한 지상군들이 걸프만에 진입해 바그다드의 남은 이라크군들을 진압하고 바그다드 함락을 선포했다. 아마 이란도 그러할 것이다.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약 1~2주 동안의 폭격이 이어지고 그와 더불어 지상군을 실은 미 함대가 호르무즈 해협의 통과를 시도하여 걸프만에 진입하려 할 것이다. 걸프전 때는 이라크 후세인에 대한 원한이 많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그저 관망만 했다면 이제는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호르무즈를 통과하기 위해 미군과 이란군의 격전 또한 무시 못하고 이에 맞춰 예멘에서 호르무즈로 배후 타격을 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이 때문에 예멘을 상대로는 이스라엘이 나설 공산이 크다. 만약 미국이 호르무즈를 통과하거나 미국이 해협을 봉쇄하더라도 땅덩이가 이라크와 비교도 안 될 정도 크기의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이란 고원의 특징을 이용해 특유의 게릴라 전을 행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파키스탄의 움직임이다. 파키스탄 또한 미군의 행보들을 주시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미군의 배후를 노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배후에는 인도가 있지만 인도가 미국을 돕기 위해 나설지는 미지수다.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이 나섰다 하면 러시아나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내의 유태인들 때문에 중동 문제 참전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는 미국이 참전한다 하면 얘기가 다르다. 미국이 참전하는 순간, 러시아 또한 참전 가능성이 있지만 러시아가 참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과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트럼프와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나설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또한 변수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확실히 마무리 짓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군을 차출한다는 것은 유럽 쪽의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군을 투입한다거나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줄 것이다. 이런 위험성들 때문에 잔불 제거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이란에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지원이 줄어들 것을 최대한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항복시켜야 한다. 어쩌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호재이자 최고의 기회다. 우크라이나도 항복시키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가들에게 원유와 천연가스를 저렴한 값에 열어준다. 그러면 유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원하는 고객 국가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게 된다. 자연히 러시아의 경제는 호황을 맞을 것이다. 반면 중국은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자국의 군사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은 이란에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여차하면 참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이란을 지원한다고 볼 때, 이란은 계속 버틸 가능성이 높다. 하메네이가 설사 미국의 정밀 타격으로 죽을 수 있다 해도, 이미 이란은 이슬람 저항군들의 특정상, 대체 수장을 이미 선정해 놓았을 것이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이란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지 않다. 우선 이란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국가적인 하드웨어는 타 중동 국가들을 압도한다. 이란의 면적은 무려 1,648,000km²로 라이벌 국가인 터키 면적 783,562km² 보다 훨씬 넓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의 2,150,000km²보다 작지만 지형이 사우디보다 험준하고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매우 유사한 지형이다. 게다가 미국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면적652,230km²보다 2.5배 이상 더 넓고 이라크의 면적인 438,317km²보다 4배 가까이 넓은 나라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나라 면적을 합친 것보다도 1.5배 정도 더 넓은 영토를 갖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못지 않게 사막, 험준한 산지, 추운 기후 등이 어우러져 군사 작전을 벌이기 쉽지 않다. 또한, 이라크 인구4,100만의 2배가 넘는 9,200만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이 인력을 바탕으로 약 54만의 상비군과 40만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고, 여러 민족들의 군대까지 본다면 거의 100만을 상회한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21년에 미국의 패전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도 이기지 못한 미국이 그보다 더 강하고 험준한 지형을 가진 이란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란은 무장 세력들이 활개치고 다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국가가 잘 통합되어 있는 편이다. 더불어 국가 행정력도 좋은 편이기 때문에 반군 무장 정파 세력들이 거의 없는 국가로 꼽힌다. 이란의 경우, 타 중동 국가들에 비해 내정이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후티, 터키는 쿠르드족 때문에 몸살을 앓아왔던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이란에는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같이 정부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는 소수민족, 반정부 세력이 많지 않다. 그나마 이들 소수민족 세력도 서로 분산되어 있어 하나로 통합되기 어렵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처럼 군벌이 서로 난립하는 국가도 아니며 종교적으로도 시아파 외 종교는 약 9%로 소수다. 이들 소수 종교 또한 아르메니아 정교회 및 유태교, 조로아스터 등이 존재하며 이란 의회 의원석 자체도 이들 종교에 따라 쿼터로 지정되고 있다. 최소한 이슬람교 말고 타 종교도 믿을 권리는 보장되기 때문에 이들 타 종교 신도들도 미국이 공격한다고 해도 미국을 굳이 편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미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크다. 이란 내에서 현대 이슬람 공화국 하메네이 정권에 확실하게 반발하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서부 이란 국경 지방에 있는 쿠르디스탄의 이란계 쿠르드인들, 그리고 서부 아제르바이잔 독립 세력, 역시 이라크 국경인 후제스탄 지방의 수니파 아랍인들과 발루치스탄 지역의 발루치인들, 그리고 지정학적 중심을 가지지 않는 바하이 교도들과 지하에 몇 명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공산주의 계열 인민 무자헤딘 정도 뿐이다. 이들 분리주의, 반정부 세력의 현황으로 본다면 쿠르디스탄, 서부 아제르바이잔 세력들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소강 상태에 있는 편이다. 공산주의 인민 무자헤딘 세력은 이슬람 혁명 당시에 나름 큰 세력으로 현대 이슬람 공화국의 주축이 된 이맘들과 경쟁했을 벌였었다. 이후 지도부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완전히 분열되면서 상당수가 사담 후세인이 다스리는 이라크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거의 행적이 묘연하여 존재 자체도 찾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또한 왕정인 팔레비 왕가의 복고를 주장하는 이란인도 이란 국내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미국이나 서방에는 꽤 많은 편인데 이들이 바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이다. 현재 미국 등 외국에 거주하는 일부 세속 성향의 이란계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은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서 팔레비 왕조 망명 정부를 세우고 팔라비 왕조의 왕정 복고와 군주제 부활을 주장하며 서방 세력과 이스라엘에 협조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미 이란을 떠난지 오래됐기 때문에 이란 내 기반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설령 이들이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쟁취한다 해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후제스탄 아랍인 분리주의는 최근 다시 불 붙고 있다. 이들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투자를 해주었다. 이들이 이란 정부에 저항할수록 이란 내부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제스탄 아랍인들은 아직까지 규모가 많지 않은데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이란계 쿠르디스탄보다 약하다. 발루치스탄 독립 운동만이 만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각종 테러나 봉기 등 활동이 과거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면서 이들도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 게다가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도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은 매우 위협적이다. 게다가 인구 1,500만이 넘는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가 이 지역에 속해 있기에 필사적으로 이들 반군 세력들을 제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이란과 협조 및 공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군이 발루치인들을 끌어들여 이란 정부에 저항을 유도하고 있지만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지역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데다 파키스탄은 공식적인 핵 보유 국가라 처리도 어렵다. 이란군 견제한다면서 이란 발루치인들을 돕게 되면 파키스탄에서도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니 미국 입장에서는 이를 움직이기 사실상 어렵다 보면 된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 같이 미국이 현지에서 협조할 정도로 하메네이 정권에 불만이 쌓인 집단이 많지도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세가 약하다. 강력한 현지 동맹을 구하지 못한 채 미군과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미군 입장에서 피해 최소화는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예멘 후티에 대해 막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예멘의 미사일 자산은 미국 함정도 어찌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었기 때문이다. 결국 후티와 파키스탄이 이 전쟁의 중요한 열쇠가 될 공산이 크다 본다. 따라서 이란은 최근 미국이 전쟁을 벌인 적들과 차원이 다르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설사 승리하더라도 완전한 승리는 불가하며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게릴라 전에 나서게 된다면 미국이 일으킨 이 전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재탕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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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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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 이란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의 수니파 국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이란을 제재하고 견제하려는 집단 서방과 미국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은 시아파의 수장국이고, 시아파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란은 이와 같은 고립화를 경계하여 다방면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벌여왔다. 이란은 수니파 국가들과 종파만 같을 뿐, 이해관계가 다른 중앙아시아의 5개국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혈통적으로 비슷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여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북한, 예멘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에서 이란한테는 강력한 뒷배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작 알아봤자 군사 협력 정도이고, 이란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수 사들인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 칼럼은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이란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이란에 영향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사크나 노가이족 위주로 소규모 접전을 벌이던 방식 대신 본격적으로 대군을 투입하여 카프카스 동부를 공략하면서 이란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어 이란의 카자르 왕국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양국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러시아-이란 전쟁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 간섭을 벌였으며 러시아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이란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이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러감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이 발발해 카자르 왕국이 붕괴되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점령한 바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으나, 소련군은 이란 북부에서 철수하지 않고 여러 괴뢰 국가들을 세우며 이란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3년 친소적 인사인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ed Mosadek)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영국 주도의 중앙조약기구에 가담하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저울질하며 양국 정상들을 연이어 만났으며 팔라비 2세는 크레믈린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에 이란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슬람 신정 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신론의 소련을 더욱 증오하게 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이란은 시아파 계통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은 소련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초창기 당시 이란군의 무기는 대부분 미국제였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가 친미에서 반미로 변화하면서 미국이 이란 측에 군수물자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당시 미국이나 집단서방은 이라크에 모든 지원을 했었다. 당시 이란은 프랑스나 중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와의 맞대결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부터 러시아와 이란은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은 매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는 팔레비 왕조 시절 당시 구입한 미국산 F-4 팬텀 전투기 등에 대해 부품 구입이 어려워 수리를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에 이 전투를 증여하고, 그 대신 막대한 군수물자를 받았다. 이후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겹치게 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경제적으로 서로 가스 공급 계약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으며 이란에도 수천 여 명 규모의 이란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긴장상태가 높아지고 2015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해당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 건너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내 옛 카자르 왕조 영토 지역의 잔류한 이란인 후손들의 경우는 이란계 러시아인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 인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냉전 시절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이란인의 후손들과 푸틴 대통령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한 이후 러시아로 생계형 이민을 떠난 이란인으로 나뉘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는 점차 전략적 다극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집단서방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중국 간의 다자간 전략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중동 또한 다극 세계 질서에 편입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다. 중동 지역에서 4개국이 보이는 행보를 보자면 이란과의 직, 간접적 협력 심화를 타진하는 러시아와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여를 늘리는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집단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중국이 중동에서의 다극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란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나타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전 대통령은 8년 동안의 재임기에 걸쳐 미국 및 EU와 핵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18년 5월 9일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 합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탈퇴를 선언하면서 양국 간의 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란은 대미 강경 기조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한 이래, 이란과 러시아는 자국에게 부과된 경제 제재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에 있어 한 축을 이루는 강대국들 간의 영향권 확대 경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적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 종파 갈등의 대상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도 마찰을 빚었었지만 최근에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경계하면서 자국의 안보에 대한 불안정성을 타개하려는 일환으로 핵 개발이라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인한 안보 우려는 미국의 안보 지원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들은 충분히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도 언론 비즈니스 스탠다드(Business Standard)의 보도에 의하면 이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전임 이란 대통령은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원자력 산업과 역량 개발은 이란 국가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며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2022년 1월에 집권한 이래 최초로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이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방러 일정을 하루 앞두고 이번 방문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독립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가 앞으로도 긴밀한 양자 대화를 바탕으로 안보와 무역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니서 6개월 후인 2022년 7월 19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란 및 터키와의 3자 정상회담을 위해 테헤란(Teheran)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이란 종교 최고지도자와도 면담했다. 해당 방문과 모임의 주체는 이란과 러시아의 협력으로 보여졌으며 터키의 역할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에 관해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논의하는 정도로만 여겨졌다. 비록 이란 내부에서도 정부의 친러 노선이 오히려 이란을 러시아의 식민지와 유사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 또한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를 감안하면 러시아 이 외에 밀착할 만한 잠재적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러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이란 내부의 움직임은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을 토해내게 되었다. 서방의 오랜 제재로 인한 한계성은 이란 내의 불만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번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해당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규탄을 촉구하는 등, 오히려 이란 국내의 단결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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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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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 이스라엘이 마침내 이란의 수도 테헤란을 선제 공격에 나섰다. 이스라엘은 수십 개 목표에 대한 선제 타격을 실시했으며 테헤란 시내 곳곳에 거대한 불길이 솟고 있다고 밝혔다. 이스라엘은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작전명을 사자들의 나라’(Nation of Lions)라고 명명했다. 이에 맞춰 이란도 이스라엘에 보복을 천명했으며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미사일과 드론 공격이 예상된다며 이스라엘 영공을 폐쇄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미국과 이란이 핵 협상 과정에서 지지부진하니 이스라엘이 먼저 선제 공격을 감행한 것인데 이와 같은 상황은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결렬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공습이 있을 경우 이스라엘 내 미국 시설에 대한 공격을 가하겠다고 경고를 했었기 때문에 미국도 같이 이 사태에 휘말려 들어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란과 이스라엘은 국외에서 치열하게 분쟁을 벌였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영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은 자제해 왔는데, 이번 사태는 암묵적으로 설정되어 있던 레드라인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이 모든 것은 이란의 핵과 관련이 있다. 이란의 핵 개발 시초는 1978~1979년에 발생한 호메이니 혁명 때부터이다. 그 이전에 팔라비 왕조는 친서방 정책을 펼치면서 평화적인 원자력 에너지 사용을 위한 개발에 대해 미국 및 주요 서방 국가들과 시설 건축을 논의 중이었다. 그래서 1970년에는 NPT에도 가입했을 정도로 당시 이란은 원자력 발전 수준의 발전소와 기술을 갖길 원했다. 그러나 이란에 호메이니 혁명이 발생함으로 인해 호메니이의 반서방 정부가 들어서게 되자 원자력 관련 모든 협력이 중단되었다. 이란의 지도자들은 원자력 개발을 단독으로 이어가기로 했으며 2000년대 IAEA의 사찰로 이란 곳곳의 비밀 시설에서 우라늄 농축을 행하고 있었던 사실이 드러났다. 이로써 이란이 전술 무기로써의 핵 개발을 한다는 우려가 퍼지기 시작했다. 이란은 이슬람의 종교적 분파 중 하나인 시아파를 국교로 삼고 있기에 기본적으로 수니파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경우, 수니파의 수장 국가라는 인식보다는 친미, 친서방 국가라는 부분에서 더더욱 좋게 보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또한 그리 좋지 않았었지만 지금 같이 악화일로를 걸을 정도는 아니었다. 특히 이란-이라크 전쟁 때는 이란과 이스라엘 양국이 서로 협력하기도 했다. 이란이 이스라엘의 무기 지원으로 이라크를 어느 정도 막아낼 수 있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이란보다 이라크를 더 위협적으로 보았고 원래 이스라엘이 가장 경계하던 대상은 국경을 접한 인구 대국이자 아랍권 최강의 군사 강국인 이집트였기 때문에 가능했다. 특히 제4차 중동전쟁 이후 미국이 이집트를 이스라엘과 화해시키고 그 대가로 이집트 군부에게 막대한 보조금과 군사 원조를 약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집트를 더 이상 적대할 이유가 없었다. 반면 이란의 경우 호메니아 혁명 이래, 친미에서 반미로 전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호관계를 맺는다 해도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없었다. 요르단의 하심 왕가 역시 이스라엘과 화해했으며, 이스라엘 입장에서볼 때, 이집트보다 훨씬 대하기 쉬운 시리아나 레바논 측 군부 인사들만 상대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유리하게 정세가 변화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란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를 지원하고 있는 입장이다. 이는 이스라엘과 그 주변국 사이의 국경 분쟁으로 볼 때 이란의 지원을 받는 세력과 이스라엘이 분쟁을 벌이는 차원으로 이란과 이스라엘의 대리전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자동적으로 이어오고 있었던 셈이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라엘 측에서는 자국 국방 안보에 가장 큰 위험 국가로 이란을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이란이 이와 같은 대리전 양식으로 지원을 해오고 있었기 때문에 자국 안보를 위해 타 종교인 이슬람 수니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즉, 이스라엘이 무너지면 이란의 다음 목표는 수니파 국가들이라는 주장을 하게 됐는데 시아파와 1,500년 이상 뿌리 깊은 다툼을 벌여온 수니파 국가들 입장에서는 이에 반론을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꽤나 설득력을 있었다. 이에 따라 이란의 급격하게 발달된 영향력에 반발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오히려 과거처럼 이스라엘에 적대적으로 나오지 않고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는 이란을 견제하면서 때떼로 이스라엘과 협력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걸프 지역에 자리 잡은 바레인, 카타르, UAE 등 아랍 왕정 국가들에게 이스라엘 자신들이 시아파와 대신 최전선에서 이란과 싸우면서 당신들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는데 만약 이스라엘이 시아파의 공세에 무너지면 다음 목표는 당신들이다는 방식으로 곳곳에서 로비를 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터키나 아제르바이잔과 같은 세속화 된 이슬람 국가들과의 관계도 매우 중시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아제르바이잔의 경우 2020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 때, 유럽과 미국이 모두 독재 국가이며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침공했다 여긴 아제르바이잔을 비판했지만 이스라엘과 터키만큼은 공개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고 미국 정계에 로비까지 해주는 등, 각종 공을 들였다. 이와 같은 로비와 터키 및 아제르바이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투르크계 국가들까지 비밀리에 관계 개선을 해왔고 이것이 터키에서 육성한 HTS가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을 뒤엎고 헤즈볼라와 하마스를 고립시키는 등, 한 때 이스라엘에게 매우 유리하게 해준 계기가 된다. 이란과 이스라엘 사이에는 시리아와 이라크, 요르단이 존재한다. 그러나 시리아와 이라크의 내전을 두고 이란은 시리아와 이라크 내에 잔존하는 시아파들을 지원해주며 시리아와 이라크 자체를 이란에 종속시켜려 시도했다. 만약 이라크에 헤즈볼라의 레바논 수준의 친 이란 계열의 정권이 들어서면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직접적으로 안보 위협 가해지는 것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레바논이 시아파화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종종 레바논이나 시리아 남부 지역의 군사 기지들을 폭격하는 것은 이와 같은 안보 문제 때문이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 무기 개발 프로그램이 존재한다 생각하여 이를 자국 내 큰 안보 위협이라 느끼고 있는 실정이다. 이란은 핵 무기 개발 시설들을 이란 전역 곳곳에 가짜 핵 시설도 만들어 두고 혹시라도 모를 핵 시설에 대한 공습이 자행될까 우려하여 모두 지하화 시키는데 성공한다. 핵 관련 시설을 지하화 된 부분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는 도저히 구별이 가지 않아 미국과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이를 찾아내는데 애를 먹고 있다. 이스라엘이 주기적으로 이란의 핵 시설 사진을 공개하면서 이란이 비밀리에 핵 개발한다고 공공연히 밝히고 있지만 그 핵 시설이 진짜인지 가짜로 만들어진 위장 시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 거기에다 이란은 이스라엘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으며, 이라크의 5배가 넘는 넓은 국토 각지에 핵시설을 숨겨 둔 상황이라 공습을 감행한다고 해도 상당한 준비를 갖춰야 하며, 성공 가능성도 높지 않은 편이다. 반면 이란이 핵을 보유하려 한 이유 또한 자국의 안보 위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란의 국외 정세를 보면 주변이 모두 수니파 적대국이다. 게다가 중동의 군사력을 양분라는 라이벌인 터키가 중동 최강의 지상군과 드론 부대를 가지고 버티고 있다. 제작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화해했지만 그렇게 썩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가장 강력한 적대국이고, 미국과 서방이 이란을 제재하고 있다. 전체적인 지정학적 형태로 볼 때, 이란은 중동에서 고립되어 있다. 이란과 혈맹으로 후티가 있다 하지만 예멘과 이란의 지리적인 거리 차이도 상당하다. 따라서 이란 입장에서 핵 보유는 당면 과제일 수밖에 없다. 이라크는 미국-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현재 미국이 철수했어도 여전히 큰 혼란에 직면해 있다. 이라크의 또 다른 이웃 국가이자 이란과도 가까운 알 아사드 정권은 이미 전복되었다. 이러한 국가들의 전쟁과 외세의 개입으로 인해 초토화 되고 있는 상황을 하메네이 현 최고지도자를 비롯한 이란의 정치인들과 이란 정규군 및 이슬람 혁명 수비대의 이란군 고위 장성들도 모두 제대로 목도하고 있었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핵 개발도 이란의 핵 개발을 가속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이스라엘의 핵 개발은 1948년 이스라엘의 건국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초 이스라엘의 핵 무기는 1966년 말 또는 1967년 초에 완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늘날까지도 이스라엘은 핵무기 보유에 대해 부인하지도, 시인하지도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다. 그렇지만 전세계는 사실상 이스라엘을 80~300여 개 정도의 핵탄두를 가진 핵 보유국으로 보고 있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08년 이스라엘이 150개의 핵폭탄을 보유하였다고 폭로했는데 이스라엘이 핵을 갖고 있는 것은 중동 내에서도 굉장히 큰 위협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이스라엘의 전세가 불리해지자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보유하고 있던 핵탄두의 조립을 명령했다. 만약 이 핵탄두가 사용되었다면 중동 전쟁은 벌써 핵 전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한편 이번 테헤란 공습으로 인해 이란의 보복으로 인한 확전을 우려하고 있다. 그리고 문제는 이란이 핵 개발이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 핵실험에 어느 정도 성공했으며 핵탄두가 얼만큼 만들어졌는지, 자세히 모를 뿐 아니라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이란이 공개되지 않은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고, 이스라엘 또한 공인된 핵탄두를 사용할 수 있다. 이대로 확전이 되면 제5차 중동전쟁에 핵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다. 지금 중동은 최악의 위기로 치닫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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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핵 전쟁 점화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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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 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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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 Nova Top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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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200년 악연의 시작과 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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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 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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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정체성과 카프카스의 지정학적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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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 지리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은 동쪽으로 이란 북서부에서 카스피 해에 면해 있으며, 서쪽으로는 쿠르디스탄, 아르메니아, 터키에 이르며, 북쪽으로 조지아와 러시아로 이어진다. 이러한 전략적인 입지는 러시아와 터키, 그리고 이들 국가를 통해 서유럽으로 이어지는 관문으로서 아제르바이잔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부각시키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은 두 개의 부분으로 나뉘는데, 1991년 소련의 해체 이후 독립국가가 된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영토의 일부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으로 분류된다. 두 개의 부분은 19세기 초 이래 분할되었는데, 아라즈(Araz) 강을 그 경계로 한다. 아라즈 강 양쪽에 거주하는 아제르-투르크인이 아제르바이잔 인구의 80% 이상을 차지하며, 또한 아제르바이잔에는 쿠르드인, 아르메니아인, 레즈긴 인, 탈레쉬 인, 유대인, 기독교인과 바하 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독립국가로서의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800만 명의 인구 중 90%가 투르크 민족으로 세속화 된 시아파 이슬람교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러시아 화를 받아들이면서 복합적인 역사적 유산을 가진 국가로 존재한다.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정체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지난한 역사와 소련으로 짧지 않은 기간을 보내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풍부한 석유 자원으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지만, 1991년 독립 이후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수많은 좌절을 경험했다. 이러한 역사적, 지리적, 대외 환경적 측면이 분명하고도 지속적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인이 가진 여러 가지 특징은 정체성 형성에 특별하고도 복합적인 성격을 부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해명하려 할 경우 다음의 몇 가지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첫째, 아제르바이잔의 지배적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인데, 이러한 요소는 페르시아의 유산이다. 둘째, 아제르바이잔의 언어는 투르크 어족에 속하는데, 이는 터키의 영향에 따른 귀결이다. 셋째, 러시아식 교육이 아제르바이잔과 유럽 대륙을 연결시켰는데, 이와 같은 점은 러시아 유산의 중요한 측면이다. 넷째, 고유한 역사에 속하는 아제르바이잔적인 요소가 존재하며, 이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에 독자적인 성격을 부여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적 딜레마는 복잡다기한 문화적 유산을 안고 있다는 사실과 독립 이후에 민족의식의 재건과 민족주의운동의 고양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 두 가지 요소의 결합은 아제르바이잔의 탈 소비에트 정체성을 재건하는 과정을 극히 미묘하게 만들었다. 소련의 붕괴 이후, 아제르바이잔의 정부는 새로 획득한 독립과 민감한 지정학적인 입지를 고려해 대내외 정책과 전략을 수립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다. 이러한 전략은 두 가지 요소를 통합해야 했다. 한편에서는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과 아제르바이잔 민족의 종족적 연원이라는 요소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고려라는 요소였다. 탈 소비에트 신생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지정학적, 지 전략적 입지라는 요소를 다루는 데서도 많은 곤란을 겪었지만, 여기에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적 · 종교적 · 문화적 유산은 그 과제의 해결을 더욱 복잡하고 곤란하게 만들었다. 1991년에 아제르바이잔이 독립을 다시 획득한 이래, 학자와 관료, 일반 대중들 간에는 자신의 나라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논쟁은 여타 구 소비에트 공화국에서도 진행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에서의 논쟁은 특히 격렬했는데, 아제르바이잔을 어떻게 규정하는지가 대외정책의 방향 선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는 데 대해 광범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 대중전선(Popular Front of Azerbaijan, PFA)의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국경을 접하는 역내 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은 두 가지 부정적인 결과로 나타났다. 첫째, 과도하게 친 터키적인 대외 정책의 접근은 러시아와 이란을 적대적으로 만들었다. 둘째, 아제르바이잔 국가 이념의 많은 측면을 조화시킬 하나의 국가 이념 자체가 부재한 상황에서, 터키에 대한 과도한 강조는 아제르바이잔의 일부 소수민족집단을 자극해 이들 집단이 역내 인접국에 의해 쉽게 조종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 따라서 러시아와 이란은 자국의 영향력이 배제될 수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자, 아제르바이잔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 위한 ‘접근적인 형태’로 아제르바이잔의 소수 민족 집단을 조종했으며, 더욱 불안정한 정세를 조성해 러시아와 이란의 요구에 더욱 순응하는 정부가 집권하도록 만들었다. 아제르바이잔인 대다수의 언어는 ‘아제리어’이며, 지배적인 종교는 시아파 이슬람이다. 전체 아제리 인구 중 2,000~3,000만 명은 남부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이란 영토에 거주하는 것으로 여겨지며, 800만 명이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200만 명 가까이가 터키에, 약 200만 명이 러시아, 나머지 인구는 주로 조지아, 이라크,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다. 터키에 이주한 아제리 인의 민족정체성을 둘러싼 문제는 이란에서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정치적이고 민감한 상황으로 자리 잡는다. 오늘날 터키에 거주하는 아제리 인의 역사는 이란의 사파비 왕조 시대(1501~1722)의 초기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그들의 지배권은 오늘날 터키의 카르스(Kars)와 인근 지역에까지 이르렀다. 또한 이란과 러시아 간에 체결된 1813년 굴리스탄 조약과 1828년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체결되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제리 인들이 터키로 이주하여 동부 지역, 특히 에르주룸(Erzurum)과 아그리(Agri)에 정착했다. 아제리인의 터키로의 이주는 1920년대, 1940년대 말, 1980년대, 그리고 1990년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일반적으로 터키의 아제리 인구는 주로 아제리와 아나톨리아 투르크 간의 문화적 · 언어적인 친근성으로 인해 터키 사회에 잘 통합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지만 종교적으로 아제리 인은 주로 시아파인 반면, 아나톨리아 투르크인은 대부분 수니파 무슬림으로 다르다. 방언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역사적 기억과 종족적 · 민족적 의식이라는 면에서의 자아 인식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큰 차이가 존재한다. M. T. 제흐타비(M. T. Zehtabi)는『이란 투르크 인의 고대 역사(The Ancient History of Iranian Turks)』라는 책에서, 현재의 아제리 인의 기원을 5,000년 넘게 거슬러 올라가는 고대 수메르(Sumerian)와 일라미트(Ilamite) 문명에서 찾았다. 제흐타비는 고고학적, 언어학적인 근거를 통해 오늘날의 아제리 인은 고대의 일라미트 인, 메데 인(Medes)과 종족적 · 민족적 기원을 공유하고 있으며, 또한 카시 인(Kassies), 구티 인(Gutties), 룰루비 인(Lullubies), 후라이 인(Hurraies)과 같은 교착어 민족과도 일정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보였다. 다른 전거(典據)에 의하면, 3개의 다른 종족적 구성 요소들이 아제리 의 형성과 전개에 관련되었다. 첫째는 주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집중되어 있었던 메데인, 둘째는 북부 아제르바이잔에 살았던 아란-알바니인(Aran-Albanese), 그리고 셋째는 고대부터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부분에 거주했으며 특히 같은 지역의 이슬람 화 이후 중앙아시아에서 투르크 민족이 이주해옴에 따라 그 수가 끊임없이 증가했던 투르크인이다. B.C 6세기경에 아제르바이잔은 페르시아 제국의 키루스 대제에 의해 정복되었다. 그로부터 229년 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격파하고 아제르바이잔을 정복했다. 그 후 3세기가 지나 아제르바이잔은 로마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은 그 이래 로마 제국, 페르시아 제국, 카프카스 지방의 투르크 연합 세력에 의해 지배되었다. A.D. 632년 무함마드의 사망 이후, 10년이 지나지 않아 약 3만 명의 무슬림 아라비아 인들이 페르시아를 공격해 정복했으며, 쇠퇴해가고 있던 사산 왕조 페르시아(226~651)를 전복시켰다. 북부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대한 저항이 9세기 내내 지속되었지만, 아제르바이잔은 새로운 무슬림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837년 아라비아 인들은 중부 아제르바이잔에서 강력한 저항 운동의 본거지였던 바박 성(Castle of Babak)을 정복하고 아제르바이잔 전체에 걸쳐 지배력을 확보했다. 이를 계기로 인해 이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루어졌다. 7세기 말 무렵인 668년에는 시르반(Shirvan shahs)이라 알려진 토착 왕조가 북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했는데, 1539년에 사파비 왕조에 병합되어 다시 한 번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통합될 때까지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와 같은 재통일을 통해 아제르바이잔은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통합된 전체로서 또 다시 경제적 · 문화적 · 언어적 자치권을 누렸다. 19세기 초에 이란, 특히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두 차례의 걸쳐 러시아의 침략을 받았다. 그 결과, 현재의 독립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이 위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광대한 영토가 굴리스탄 조약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에 의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이 병합은 독립국가의 국민이 되려는 아제리 인들의 열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에 따라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붕괴를 가져온 10월 혁명의 혼란스런 분위기에서, 1918년 3월 28일 아제르바이잔은 독립을 선언했다. 1918년 중순에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은 민주주의를 위한 자유로운 직접선거, 비례대표, 보편적 참정권을 제공하는 법률을 통과시키면서 이슬람 국가 중 최초로 여성에게 선거권을 부여했다. 학교 제도에서 모국어 수업과 학습이 의무화되었으며, 아제리 어는 아제르바이잔의 국어가 되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한 소련은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제리 정부를 전복시켰으며, 이에 따라 독립 국가로서의 짧은 경험은 끝나게 되었다. 러시아에 의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병합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의 남부 지역은 특히 문화와 언어를 비롯한 무역과 상업에서 여전히 상대적으로 자치적인 지위를 계속 향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1년에 레자 칸(Reza Khan)이 권력을 장악하고 이후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절대 군주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의 지역적, 경제적, 언어적, 문화적 자치권은 종결되었다. 레자 칸의 가혹한 중앙집권 정책을 통해 지금까지 독립된 지역으로서의 아제르바이잔은 이제 여러 개의 종속된 ‘오스탄(Ostans)’ 혹은 지방으로 분할되었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는 반세기에 걸쳐 지배력을 유지했다. 이 시기에 실시된 강제적인 동화 정책은 파시 어를 사용하는 동질적인 국가의 창조를 목표로 했다. 이에 따른 귀결로서, 아제리어로 된 신문, 잡지, 서적의 출판은 금지되었으며 아제르바이잔인은 자국어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하게 된다. 1979년 팔레비 정권이 전복되었으며, 뒤이어 이슬람 공화국이 형성되었다. 샤(shah)가 실시한 페르시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팔레비의 몰락과 함께 새로 출현한 ‘반 민족주의’ 이슬람 이념에 의해 일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당시의 혁명적인 분위기에서 다양한 종족적 요구와 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권력 기반을 공고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권은 문화적 · 언어적 권리를 위한 다양한 민족의 요구를 억압했다. 자체적인 헌법은 비(非) 파시어 수업과 학습을 허용했지만, 새 정권은 페르시아어를 ‘이슬람의 제2 언어’로 확인함으로써 팔레비 시기 동안 비(非) 페르시아 언어에 부과된 금지령을 강력하게 계속 시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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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제르바이잔의 민족 형성과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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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 아리아계는 인도유럽어족 중에 인도이란어파의 한 분파인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 종족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본래 중앙아시아, 오늘날 투르크메니스탄 메르브에서 기원하여 아프가니스탄을 넘고 인도 대륙에 정착한 또 다른 사카 계통 민족들의 후손으로, 청동기 시대 때 반농반목, 반유목민이었던 이들이었다. 아리아인들은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이동하다가 비옥한 장소를 찾으면 곡물을 파종하고 정착했으며, 인구가 늘어나면 다시 무리를 이끌고 수레를 타며 이동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거주 영역을 넓혀나갔다. 이들의 후손들로 여겨지는 오늘날 국가들은 주로 인도, 파키스탄, 네팔, 스리랑카, 방글라데시, 몰디브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인도 대륙에 정착한 민족을 설명할 때 주로 아리아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아리아인은 이란계 민족으로 여기에 누리스탄 족도 포함되기 때문에 정확한 설명이라 보기에는 어렵다. 현 인도인과 인도-아리아인의 차이점에 견지한다면 전자는 인도에 거주하는 사람이나 인도 문화권 사람을 의미한다면 후자는 인도아리아어군 언어를 모어로 구사하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아계 민족들은 피부가 밝고 코가 높으며 아리아인에게 정복당한 인더스 문명의 원주민인 드라비다 계통의 민족은 피부가 어둡고 비교적 코가 뭉툭하다. 서북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밝고 동남쪽으로 갈수록 피부가 어두워진다. 실제로 아리아계 민족 중에 동쪽에 거주하는 오리야인, 벵골인, 로힝야 족은 드라비다 인처럼 피부색이 어두우며 서쪽에 거주하는 카슈미르 인, 펀자브인 은 이란인처럼 피부색이 밝은 편이다. 그리고 인도 동북부의 아삼 족이나 벵골 인들은 티베트 버마어파계 제 민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인 문다 족 같은 동아시아인과의 혼혈로 인해 유라시아 인으로서의 특징이 있다. 아리아인들은 현재 주로 인도 공화국에 대략 9억 1,100만 명 정도가 거주하며 파키스탄엔 1억 7,000만 명, 방글라데시엔 1억 6,000만 명이 거주한다. 그 중에서 힌두스탄 인이 대략 3억 2,900명으로 중국 한족 다음으로 2위이다. 대한민국에서는 파키스탄인, 방글라데시인, 스리랑카인, 네팔인 노동자는 보기 쉬워도 인도인들은 보기 좀 어려운데, 인도인들이 주로 진출하는 곳은 문화적으로 비슷한 중동이나 동남아시아, 언어적으로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유럽, 특히 영어가 공용어인 영국과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미국, 캐나다 등 영국, 미국 권, 중남미이기 때문에 보기 어려운 편이다. 처음부터 동아시아권은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동, 유럽과 달리 문화적으로나 언어적으로나 인도 문화권과는 접점이 없고, 거리도 가깝지 않으니 오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힌두교인들은 바다 밖으로 나가면 카스트를 잃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종교적 이유를 거론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나타난 선민사상의 일종일 뿐이다. 인도인들은 웬만한 브라만 카스트 힌두교 원리주의자가 아닌 바에야 힌두교의 가르침을 모두 지키고 사는 것 또한 당연히 아니다. 동아시아로 잘 오지 않을 뿐이지, 애초에 해외에 진출한 인도인만 해도 3,000만 명이 넘는다. 규모로는 5,000만 명에 달하는 화교 다음으로 많다. 오늘날 이란계 민족은 이란어군 언어 모어 화자들을 보면 2022년 기준 파슈토어 구사자 약 6,000만 명, 페르시아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쿠르드어 구사자 약 3,600만~4,500만 명, 다리어 구사자 약 900~1,200만 명, 타지크어 구사자 약 800만 명, 루르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발루치어 구사자 약 3~500만 명, 길라크어 및 마잔데란어 구사자 약 4~500만 명, 자자어 구사자 약 130만 명, 오세트어구사자 약 60만 명, 탈리시어 구사자 약 수십만 명, 타트어 구사자 약 수만 명 등이 있다. 이 중에서 페르시아어는 이란의 공용어, 파슈토어와 다리어는 아프가니스탄의 공용어, 타지크어는 타지키스탄의 공용어이다. 인구수는 모어 화자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공용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좀 더 많아진다. 크게 파슈토어가 속해있는 동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동부 이란계 민족과 페르시아어가 속해있는 서부 이란어군을 사용하는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각 어군의 대표적인 언어인 파슈토어와 페르시아어가 동쪽, 서쪽에 위치해 있어 이와 같은 명칭이 붙여졌다. 역사적으로 볼 때, 원시 이란인 중 북쪽에 있었던 분파가 스키타이계인 동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고 남쪽에 있었던 분파가 페르시아계인 서부 이란계 민족으로 분화되었다. 그러나 원래 북쪽에 분포하던 동부 이란계 민족은 중세 이후 유라시아 대초원 일대의 거주민이 이란계에서 투르크계로 대체되어 소멸하여 오늘날에는 동부 이란어계 민족 중 가장 큰 규모를 차지하는 민족이 파슈툰 인이 된 것이다. 이란계 민족이란 표현은 학술적인 분류일 뿐 당사자들로서 동질감을 느끼는 개념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란 내의 소수민족인 쿠르드 인이나 발루치인 다수는 이란 계열이라는 표현이나 이란과의 관계를 철저하게 부정하며 이란인과는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의 파슈툰 인들은 타지크 인들과 서로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같은 민족이라는 동질감은 느끼지 않으며 사이도 좋지 않다. 이와 같은 반감들이 이란의 쿠르디스탄, 발루치스탄 분리주의 투쟁, 타지키스탄 내전,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유혈사태와 전쟁으로 비화하기도 했다. 이란계 민족들이 단합해야 한다는 범이란주의 사상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란 내에 이를 주장하는 쇼비니즘 정당인 Pan-Iranist Party가 있지만 국내외에서 큰 반향을 얻지는 못했다. 현재는 시아파 신정 정부에 의해 불법화되어 정식 정당은 아니지만 활동은 계속 하고 있다. 현재 인도 뭄바이에 대규모로 살고 있는 파르시라는 이란계 인도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믿고 구자라트 문자를 사용한다. 가수였던 프레디 머큐리가 대표적인 파르시 계통의 영국인인데 영국이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후 많은 파르시들이 인도를 떠나 홍콩, 영국 등으로 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콩 섬에는 조로아스터교 공동체도 있다. 페르시아 인들은 이란 뿐 아니라 러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도 이주민 집단으로 정착했다. 러시아 등 구소련 국가의 페르시아 인들은 러시아식 이름으로 ~프(남성형) / 바(여성형)라는 돌림 성씨를 쓰는 경우가 많다. 중국에서도 소수민족 중 이란계 민족들이 있는데, 정확히 말하자면 페르시아 인이 아닌 파슈툰 계통 사리콜 인과 와키 인을 일컫는 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 서부 파키스탄 접경지경 타슈쿠르간 자치 현에 거주한다. 이란계 민족들은 고대에 유라시아 스텝 지대 서부와 중부에 걸쳐 널리 분포했으나, 서부 스텝이라 불리는 오늘날의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 우크라이나, 러시아 서부 지역의 이란계 민족들은 대부분 인구수가 적은 유목민이었기 때문에 다른 유럽 계통 민족들에 흡수되어 완전히 사라졌다. 우선 발칸반도에 살던 이란계 민족들은 B.C 4세기에 켈트족들에게 학살당하고 동화되었으며 서기 4세기에 훈족이 대두할 때 일부는 훈족에 흡수되고, 일부는 게르만 족의 대이동 시대에 게르만 족과 함께 이동하다 동화되었으며, 스텝 지대에 남은 인구는 6세기 이후 대부분 슬라브족이나 투르크족에 흡수되었다. 중앙아시아 스텝,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과 아제르바이잔의 이란계 민족들은 서기 6세기~15세기 투르크 민족들의 대 이주를 거치며 점차 투르크화 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원래 이란계 인구가 많았던 데다 투르크화 되는 동안에도 지리적으로 가까운 페르시아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페르시아어와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페르시아는 이란계 고대 민족과 그들이 세운 국가로써 이란 북서부 고원에서 건국되었으며, 당대 세계의 중심이었던 서아시아의 강대국이었다. 영어로는 Medes / Media, 고대 페르시아어로는 마다이(Madai)였으며, 중심지는 엑바타나였다. <개역 성경>에서의 표기는 메대(Mede)라 불렸으며 청동기 말기에 이란 고원으로 이주해 온 초기 이란계 부족들로 추측되며, 이란에서 현재 메디아 인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동기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다. 고대 메디아 왕국의 멸망 이후에는 이란 북서부 일대를 가리키는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현대 지명으로 보면 동으로는 테헤란, 서로는 케르만샤, 북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 이르는 지역이다. 그리고 아케메네스 왕조가 이란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면, 메디아는 이란 역사의 기초를 다진 국가였다. 메디아 인들은 이란 고원에 거주하면서 뛰어난 말을 사육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들은 원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의 속국이었으며 한 때 스키타이인의 침공을 당했지만, 퀴악사레스(Qiwaksares) 왕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퀴악사레스는 국력을 일신하여 영토를 이란 고원 건너편인 트란스옥시아나 일대까지 확장하고, 서쪽으로는 신(新) 바빌로니아와 함께 신(新) 아시리아 제국을 공격했으며 결정적으로 수도 니네베를 함락시켜 멸망시켰다. 이에 그치지 않고 동쪽으로는 인더스 강 유역까지 점령했고, 아나톨리아 일대에 있었던 서방의 강국 리디아까지 침공했으나 우열을 가리지 못하고 카파도키아를 경계로 삼아 휴전했다. 이후 퀴악사레스의 아들 아스튀아게스(Astuiages)는 카파도키아에서 이란 동부까지 펼쳐진 광대한 제국을 물려받았다. 리디아와는 휴전 이후 점차 우호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신(新) 바빌로니아는 신(新) 아시리아 멸망 때부터 지속적으로 우방이었기 때문에 아스튀아게스 시대의 메디아는 별 문제 없이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남쪽의 속령 파르스(Pars)에서 키루스 2세가 반란을 일으키고, 여기에 중신 하르파고스(Harpagos)까지 가담하면서 아스튀아게스는 패배하고 키루스 2세에게 직접 처형을 당한 뒤 공식적으로 메디아 왕국은 멸망했다. 그러나 키루스 2세가 세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는 사실상 메디아 왕국의 패권과 왕통을 계승한 국가였으며, 메디아 인과 파르스 인은 언어, 문화, 인종, 습속이 같았으므로 자연스럽게 그냥 메디아-페르시아 인으로 묶이게 되었다. 조로아스터교가 이란에 널리 퍼진 것도 메디아 왕국 시대의 일이다. 다만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유물이나 기록과의 교차 검증이 되지 않는 부분을 중심으로 그 실체에 관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이렇게 메디아 당대의 자료가 부족한 것은 메디아의 수도로 여겨지는 엑바타나에 현대 도시인 하마단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유적을 발굴하기도 어려운 상태이며 연구된 메디아의 고고학적 자료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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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계 민족의 분파, 이란의 조상인 페르시아인들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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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 이스라엘의 이란에 대한 선제 공습으로 시작된 두 나라간 의 전쟁은 미국이 포르도와 나탄즈, 이스파한 등 이란의 3개 핵 시설에 대해 폭격을 감행했다. B-2 폭격기로 벙커버스터 GBU-57을 투하했다 하는데 B-2 폭격기 여러 대가 괌 기지에서 출발했고 이들이 벙커버스터를 투하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트럼프가 이번 한 방으로 이란의 핵 시설을 모두 제거함으로써 중동의 평화가 찾아왔다고 천명할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것은 트럼프의 "거대한 착각"이다. 이번 한 번으로 모든 것이 종결된다는 것은 망상에 가깝다. 이란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 기지에 대한 공습을 강화할 것이고, 이로써 전쟁은 이란과 미국의 전쟁으로 표어가 바뀔 것이다. 그런데 이란의 핵 시설에 있던 농축된 우라늄들이 다른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기 때문에 미국이 벙커버스터로 때린 곳은 빈 곳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있다. 이렇게 되면 이란은 자국에 대한 미국의 공격으로 인식하고 미군 기지에 대한 대대적인 공습을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되면 이란과 미국은 본격적인 전쟁에 돌입하게 되며 앞으로의 귀추는 미 지상군이 언제 이란 영토에 투입되느냐, 미 함대가 언제 페르시아만과 아라비아해로 들어올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여부에 달려 있다. 미국의 여태 전쟁에 있어 주요 전략은 지난 걸프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걸프전 때 미국은 엄청난 양의 폭격을 감행했다. 이러한 폭격으로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한 뒤, 해병대들이 들어가 지상군이 상륙할 곳의 적군들을 제거하고, 함대에 탑승한 지상군들이 걸프만에 진입해 바그다드의 남은 이라크군들을 진압하고 바그다드 함락을 선포했다. 아마 이란도 그러할 것이다. 테헤란을 비롯한 주요 도시들에 약 1~2주 동안의 폭격이 이어지고 그와 더불어 지상군을 실은 미 함대가 호르무즈 해협의 통과를 시도하여 걸프만에 진입하려 할 것이다. 걸프전 때는 이라크 후세인에 대한 원한이 많은 이란이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그저 관망만 했다면 이제는 그 양상이 달라질 것이다. 호르무즈를 통과하기 위해 미군과 이란군의 격전 또한 무시 못하고 이에 맞춰 예멘에서 호르무즈로 배후 타격을 할 가능성도 무시 못한다. 이 때문에 예멘을 상대로는 이스라엘이 나설 공산이 크다. 만약 미국이 호르무즈를 통과하거나 미국이 해협을 봉쇄하더라도 땅덩이가 이라크와 비교도 안 될 정도 크기의 이란은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처럼 이란 고원의 특징을 이용해 특유의 게릴라 전을 행할 가능성이 크다. 가장 큰 변수 중 하나는 파키스탄의 움직임이다. 파키스탄 또한 미군의 행보들을 주시하고 있다. 파키스탄이 미군의 배후를 노릴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의 배후에는 인도가 있지만 인도가 미국을 돕기 위해 나설지는 미지수다. 이스라엘이 아닌 미국이 나섰다 하면 러시아나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국내의 유태인들 때문에 중동 문제 참전에 소극적이었던 러시아는 미국이 참전한다 하면 얘기가 다르다. 미국이 참전하는 순간, 러시아 또한 참전 가능성이 있지만 러시아가 참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미국과의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가 트럼프와 관계를 해치면서까지 나설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또한 변수다.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을 확실히 마무리 짓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군을 차출한다는 것은 유럽 쪽의 나토 국가들이 우크라이나에 군을 투입한다거나 아니면 우크라이나의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줄 것이다. 이런 위험성들 때문에 잔불 제거를 하지 않고 다른 곳에 신경을 쓰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미국과 유럽이 이란에 관심이 쏠려 있는 동안 지원이 줄어들 것을 최대한 활용해 우크라이나를 항복시켜야 한다. 어쩌면 러시아 입장에서는 호재이자 최고의 기회다. 우크라이나도 항복시키고 어려움에 처해있는 국가들에게 원유와 천연가스를 저렴한 값에 열어준다. 그러면 유가가 높아지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원유와 천연가스를 원하는 고객 국가들은 이전보다 훨씬 많아지게 된다. 자연히 러시아의 경제는 호황을 맞을 것이다. 반면 중국은 그동안 갈고 닦아왔던 자국의 군사력을 시험할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은 이란에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여차하면 참전 가능성이 있다. 중국이 이란을 지원한다고 볼 때, 이란은 계속 버틸 가능성이 높다. 하메네이가 설사 미국의 정밀 타격으로 죽을 수 있다 해도, 이미 이란은 이슬람 저항군들의 특정상, 대체 수장을 이미 선정해 놓았을 것이다. 다만 그게 누구인지, 알려지지 않고 있을 뿐이다. 미국이 이란을 무력으로 제압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쉽지 않다. 우선 이란은 땅이 넓고 인구가 많아 국가적인 하드웨어는 타 중동 국가들을 압도한다. 이란의 면적은 무려 1,648,000km²로 라이벌 국가인 터키 면적 783,562km² 보다 훨씬 넓다. 비록 사우디아라비아의 2,150,000km²보다 작지만 지형이 사우디보다 험준하고 고원 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아프가니스탄과 매우 유사한 지형이다. 게다가 미국이 이전에 전쟁을 벌였던 아프가니스탄 면적652,230km²보다 2.5배 이상 더 넓고 이라크의 면적인 438,317km²보다 4배 가까이 넓은 나라다. 심지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두 나라 면적을 합친 것보다도 1.5배 정도 더 넓은 영토를 갖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아프가니스탄 못지 않게 사막, 험준한 산지, 추운 기후 등이 어우러져 군사 작전을 벌이기 쉽지 않다. 또한, 이라크 인구4,100만의 2배가 넘는 9,200만의 인구를 갖고 있으며, 이 인력을 바탕으로 약 54만의 상비군과 40만의 예비군을 보유하고 있고, 여러 민족들의 군대까지 본다면 거의 100만을 상회한다. 무엇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2021년에 미국의 패전으로 종결되었기 때문에 아프가니스탄도 이기지 못한 미국이 그보다 더 강하고 험준한 지형을 가진 이란을 굴복시킨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또한 이란은 무장 세력들이 활개치고 다닌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 비해 국가가 잘 통합되어 있는 편이다. 더불어 국가 행정력도 좋은 편이기 때문에 반군 무장 정파 세력들이 거의 없는 국가로 꼽힌다. 이란의 경우, 타 중동 국가들에 비해 내정이 매우 안정되어 있는 것이다. 참고로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 후티, 터키는 쿠르드족 때문에 몸살을 앓아왔던 것과 완전히 대치된다. 이란에는 이라크의 쿠르드족과 같이 정부 통치에 반대하고 독립을 강하게 주장하는 소수민족, 반정부 세력이 많지 않다. 그나마 이들 소수민족 세력도 서로 분산되어 있어 하나로 통합되기 어렵다. 또한 아프가니스탄처럼 군벌이 서로 난립하는 국가도 아니며 종교적으로도 시아파 외 종교는 약 9%로 소수다. 이들 소수 종교 또한 아르메니아 정교회 및 유태교, 조로아스터 등이 존재하며 이란 의회 의원석 자체도 이들 종교에 따라 쿼터로 지정되고 있다. 최소한 이슬람교 말고 타 종교도 믿을 권리는 보장되기 때문에 이들 타 종교 신도들도 미국이 공격한다고 해도 미국을 굳이 편들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오히려 미국에 저항할 가능성이 크다. 이란 내에서 현대 이슬람 공화국 하메네이 정권에 확실하게 반발하는 세력들은 분명 존재한다. 이들은 서부 이란 국경 지방에 있는 쿠르디스탄의 이란계 쿠르드인들, 그리고 서부 아제르바이잔 독립 세력, 역시 이라크 국경인 후제스탄 지방의 수니파 아랍인들과 발루치스탄 지역의 발루치인들, 그리고 지정학적 중심을 가지지 않는 바하이 교도들과 지하에 몇 명 남아 있다고 추정되는 공산주의 계열 인민 무자헤딘 정도 뿐이다. 이들 분리주의, 반정부 세력의 현황으로 본다면 쿠르디스탄, 서부 아제르바이잔 세력들의 독립 문제에 대해서는 실질적으로 소강 상태에 있는 편이다. 공산주의 인민 무자헤딘 세력은 이슬람 혁명 당시에 나름 큰 세력으로 현대 이슬람 공화국의 주축이 된 이맘들과 경쟁했을 벌였었다. 이후 지도부가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완전히 분열되면서 상당수가 사담 후세인이 다스리는 이라크로 망명했는데, 이들은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거의 행적이 묘연하여 존재 자체도 찾기 어려운 상태에 있다. 또한 왕정인 팔레비 왕가의 복고를 주장하는 이란인도 이란 국내에는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다. 물론 미국이나 서방에는 꽤 많은 편인데 이들이 바로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이다. 현재 미국 등 외국에 거주하는 일부 세속 성향의 이란계 팔레비 디아스포라들은 현재 미국과 유럽 등 서방에서 팔레비 왕조 망명 정부를 세우고 팔라비 왕조의 왕정 복고와 군주제 부활을 주장하며 서방 세력과 이스라엘에 협조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미 이란을 떠난지 오래됐기 때문에 이란 내 기반들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다. 설령 이들이 미국의 도움으로 다시 권력을 쟁취한다 해도 오래 유지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후제스탄 아랍인 분리주의는 최근 다시 불 붙고 있다. 이들에 대해 미국과 이스라엘은 막대한 투자를 해주었다. 이들이 이란 정부에 저항할수록 이란 내부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제스탄 아랍인들은 아직까지 규모가 많지 않은데다 세력이 상대적으로 이란계 쿠르디스탄보다 약하다. 발루치스탄 독립 운동만이 만성적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각종 테러나 봉기 등 활동이 과거에 비하면 많이 줄어들면서 이들도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 게다가 이웃 국가인 파키스탄에서도 발루치스탄 독립운동은 매우 위협적이다. 게다가 인구 1,500만이 넘는 파키스탄 최대 도시 카라치가 이 지역에 속해 있기에 필사적으로 이들 반군 세력들을 제압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이란과 협조 및 공조하고 있는 상황이다. 물론 미군이 발루치인들을 끌어들여 이란 정부에 저항을 유도하고 있지만 파키스탄 발루치스탄 지역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데다 파키스탄은 공식적인 핵 보유 국가라 처리도 어렵다. 이란군 견제한다면서 이란 발루치인들을 돕게 되면 파키스탄에서도 심각한 반발이 일어나게 되니 미국 입장에서는 이를 움직이기 사실상 어렵다 보면 된다. 이처럼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와 같이 미국이 현지에서 협조할 정도로 하메네이 정권에 불만이 쌓인 집단이 많지도 않으며 있다 하더라도 세가 약하다. 강력한 현지 동맹을 구하지 못한 채 미군과 이스라엘과 동맹하여 전쟁을 벌이게 된다면, 미군 입장에서 피해 최소화는 대단히 어렵다. 게다가 이스라엘은 예멘 후티에 대해 막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다. 예멘의 미사일 자산은 미국 함정도 어찌할 수 없음이 이미 입증되었었기 때문이다. 결국 후티와 파키스탄이 이 전쟁의 중요한 열쇠가 될 공산이 크다 본다. 따라서 이란은 최근 미국이 전쟁을 벌인 적들과 차원이 다르기에 미국 입장에서는 설사 승리하더라도 완전한 승리는 불가하며 베트남이나 아프가니스탄처럼 게릴라 전에 나서게 된다면 미국이 일으킨 이 전쟁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의 재탕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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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스라엘 전쟁에서 이제는 이란-미국 : 이스라엘 전쟁으로 바뀐 것으로 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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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
- 이란은 표면적으로 볼 때, 절대 다수의 수니파 국가와, 적대국인 이스라엘, 이란을 제재하고 견제하려는 집단 서방과 미국에게 둘러싸여 고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란은 시아파의 수장국이고, 시아파들을 규합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이란은 이와 같은 고립화를 경계하여 다방면으로 고립을 피하기 위한 외교를 벌여왔다. 이란은 수니파 국가들과 종파만 같을 뿐, 이해관계가 다른 중앙아시아의 5개국과 협력을 시도하고 있으며 혈통적으로 비슷한 타지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을 통해 중국 및 러시아를 끌어들여 고립을 탈피하고자 하고 있다. 그리고 멀리 북한, 예멘과도 유대 관계를 맺고 있다. 이 중에서 이란한테는 강력한 뒷배가 러시아와 중국이다. 대개 사람들은 이란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고작 알아봤자 군사 협력 정도이고, 이란이 러시아제 무기를 다수 사들인 것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본 칼럼은 이란과 러시아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원래 이란과 러시아는 사이가 좋은 국가는 아니었다. 러시아 제국은 그레이트 게임을 통해 중앙아시아를 장악했고, 이란에 영향력을 뻗어오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코사크나 노가이족 위주로 소규모 접전을 벌이던 방식 대신 본격적으로 대군을 투입하여 카프카스 동부를 공략하면서 이란과 마주하게 되었고, 이어 이란의 카자르 왕국과 투르크멘차이 조약이 맺어졌지만 이 또한 오래가지 못하고 양국은 전쟁을 벌이게 되는데 이를 러시아-이란 전쟁이라 부른다. 러시아 제국은 20세기 들어 이란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고, 아제르바이잔 남부 일대에 세력을 확대하는 등의 내정 간섭을 벌였으며 러시아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던 영국이 이란을 지원했다. 러시아의 지나친 간섭에 분노한 테헤란의 군중들이 러시아 은행을 파괴하기도 하였으며 반러감정은 깊어져 갔다. 그러한 상황에서 1908년 이란 입헌 혁명이 발발해 카자르 왕국이 붕괴되었다. 1941년 소련과 영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점령한 바 있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군은 철수했으나, 소련군은 이란 북부에서 철수하지 않고 여러 괴뢰 국가들을 세우며 이란을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만들려고 했다. 1953년 친소적 인사인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ed Mosadek) 총리가 체포되었으며, 영국 주도의 중앙조약기구에 가담하며 소련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지만 팔라비 2세는 미국과 소련 사이를 저울질하며 양국 정상들을 연이어 만났으며 팔라비 2세는 크레믈린에 초청되기도 했다. 1979년에 이란 호메이니 혁명으로 이슬람 신정 정권이 수립되면서 무신론의 소련을 더욱 증오하게 된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때 이란은 시아파 계통의 무자헤딘을 지원했다. 이후 이란-이라크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이란은 소련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이란-이라크 전쟁 초창기 당시 이란군의 무기는 대부분 미국제였다. 이란 호메이니 혁명 이후, 이란의 외교가 친미에서 반미로 변화하면서 미국이 이란 측에 군수물자 수출을 완전히 금지했다. 당시 미국이나 집단서방은 이라크에 모든 지원을 했었다. 당시 이란은 프랑스나 중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했으나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이라크와의 맞대결에서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1989년부터 러시아와 이란은 관계 개선을 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양국은 매우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란 정부는 팔레비 왕조 시절 당시 구입한 미국산 F-4 팬텀 전투기 등에 대해 부품 구입이 어려워 수리를 못하는 상황에서 소련에 이 전투를 증여하고, 그 대신 막대한 군수물자를 받았다. 이후 2010년대 시리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이란은 바샤르 알 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면서 미국을 견제하는 것과 관련한 이해 관계가 겹치게 되면서 양국의 우호관계가 증진되었다. 러시아와 이란이 경제적으로 서로 가스 공급 계약을 합의했다. 그리고 이란 유학생들이 러시아에서 유학하는 경우도 자주 발생했으며 이란에도 수천 여 명 규모의 이란계 러시아인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개 이들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긴장상태가 높아지고 2015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하자 해당 지역 러시아인들이 이란으로 건너와 난민이 되었다. 그리고 구소련 내 옛 카자르 왕조 영토 지역의 잔류한 이란인 후손들의 경우는 이란계 러시아인으로 분류되기보다는 아제르바이잔 인으로 편입되었다. 이들은 냉전 시절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 성향이란인의 후손들과 푸틴 대통령의 정책으로 러시아의 경제가 성장한 이후 러시아로 생계형 이민을 떠난 이란인으로 나뉘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는 점차 전략적 다극화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리고 중동에서 영향권을 확대하려는 집단서방과 미국, 그리고 러시아, 중국 간의 다자간 전략적 관계가 형성되면서 중동 또한 다극 세계 질서에 편입될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로에 서있다. 중동 지역에서 4개국이 보이는 행보를 보자면 이란과의 직, 간접적 협력 심화를 타진하는 러시아와 중동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관여를 늘리는 미국과 EU로 대표되는 집단서방,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걸프 국가들을 자국의 영향권으로 포섭하고자 하는 중국이 중동에서의 다극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특히 이란은 오랫동안 중동에서 나타나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최근에는 미국과 유럽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핵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란의 하산 로하니(Hassan Rouhani) 전 대통령은 8년 동안의 재임기에 걸쳐 미국 및 EU와 핵 협상을 추진하면서 미국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2018년 5월 9일에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당시 미국 대통령이 이란과의 핵 합의 내용을 담은 포괄적 공동 행동 계획(JCPOA, Joint Comprehensive Plan of Action) 탈퇴를 선언하면서 양국 간의 협상은 파국을 맞게 되었다. 이후 이란은 대미 강경 기조를 강화하면서 핵 개발 의지를 불태우게 되었고,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대이란 제재를 재개하는 방식으로 응수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미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부과한 이래, 이란과 러시아는 자국에게 부과된 경제 제재를 공동으로 대응하기 위해 더욱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러한 국제 정치에 있어 한 축을 이루는 강대국들 간의 영향권 확대 경쟁은 세계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중대 요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란은 이스라엘을 공개적으로 적대함과 동시에 이슬람교 종파 갈등의 대상인 사우디아라비아 왕실과도 마찰을 빚었었지만 최근에 화해 분위기로 가고 있다. 이란은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배경으로 군사력을 강화해 나가는 이스라엘을 경계하면서 자국의 안보에 대한 불안정성을 타개하려는 일환으로 핵 개발이라는 강수를 두게 되었다. 이스라엘로 인한 안보 우려는 미국의 안보 지원 하에 있는 이스라엘의 입장으로 볼 때 자신들은 충분히 핵 억지력(Nuclear deterrence)를 갖고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인도 언론 비즈니스 스탠다드(Business Standard)의 보도에 의하면 이브라힘 라이시(Ebrahim Raisi) 전임 이란 대통령은 몇 년 전, 기자회견에서 민간 부문에서의 원자력 산업과 역량 개발은 이란 국가와 국민의 정당한 권리라고 주장하며 핵 개발에 대한 의혹을 전면 부정했다. 2022년 1월에 집권한 이래 최초로 이틀 동안 러시아를 방문한 이브라힘 라이시 대통령은 방러 일정을 하루 앞두고 이번 방문이 양국 관계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중동과 중앙아사아 내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독립 국가인 이란과 러시아가 앞으로도 긴밀한 양자 대화를 바탕으로 안보와 무역 협력을 강화해 나가기를 기대한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니서 6개월 후인 2022년 7월 19일에는 푸틴 대통령이 이란 및 터키와의 3자 정상회담을 위해 테헤란(Teheran)을 방문했고, 이를 계기로 알리 하메네이(Ali Khamenei) 이란 종교 최고지도자와도 면담했다. 해당 방문과 모임의 주체는 이란과 러시아의 협력으로 보여졌으며 터키의 역할은 내전으로 피폐해진 시리아에 관해 새로운 군사적 전략을 논의하는 정도로만 여겨졌다. 비록 이란 내부에서도 정부의 친러 노선이 오히려 이란을 러시아의 식민지와 유사한 상태로 전락시키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 또한 나오고 있다. 현재 세계 정세를 감안하면 러시아 이 외에 밀착할 만한 잠재적 동맹국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란 정부는 러시아와의 연계 강화를 포기하지 않고 있으며 이런 이란 내부의 움직임은 하메네이 정권에 대한 공공연한 불만을 토해내게 되었다. 서방의 오랜 제재로 인한 한계성은 이란 내의 불만을 심어주는 요인이 되었고 이번 이스라엘이 이란을 공격하자 해당 불만을 품었던 자들도 이스라엘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규탄을 촉구하는 등, 오히려 이란 국내의 단결력이 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하메네이 입장에서는 매우 긍정적인 부분으로 평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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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고립되어 있는 국가? 이란의 배경에는 러시아와 중국이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