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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번외편, 아제르바이잔 대학살
    오스만투르크의 아르메니아 학살이 벌어진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는 제1, 2차 발칸 전쟁 당시에 벌어졌던 포마크(Pomaks)인 및 발칸 투르크인 학살에서 살아나온 사람들에 대한 증오심이 크게 차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나타난 포마크(Pomaks)인들은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한 불가리아계 무슬림의 후손들로 오스만 제국이 발칸과 불가리아를 떠나면서 불가리아인들에게 대량 학살을 당한 비극이 있는 민족이다. 결국 오스만 정부, 청년 투르크당이 동방에 있는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이주를 승인함으로써 시리아와 동남부 지역 이주되었고 그로 인해 다수의 사망자들이 발생했다. 이를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라고 하는데 앞에 上, 中, 下에서 언급한 것처럼 학살에 대한 조사가 전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사망자의 수를 알 수 없다. 그런데 그로 인해 터키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한다는 마음에서 이번에는 같은 투르크계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에게 옮겨갔다. 본래 현재의 아르메니아 영토는 중세 시대 이후 아제르바이잔인과 타트인, 페르시아인들이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 이후 러시아의 인위적인 이주 정책이 벌어지면서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늘어났다. 따라서 투르크를 견제하던 러시아 입장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인 인구를 의도적으로 줄였고 그러한 와중에 대략 35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예레반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이주했다. 러시아는 나라가 멸망하고 디아스포라 형태로 떠돌아 다니고 있던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살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또 다른 비극의 원인이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살던 터전에 갑자기 아르메니아인들이 들어오고 자신들은 러시아 내부로 들어가거나 이란 서부 지역, 터키 동부 지역 등으로 강제 추방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제국 같은 경우, 형제 민족이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환영했지만 오랜 기간 동안 투르크계를 극도로 혐오했던 페르시아인들은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들어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따라서 그로 인해 제5차 러시아-페르시아 전쟁(1826~1828)이 일어난다. 약 2년동안 벌어진 이 전쟁에서 페르시아는 참패하고 러시아와 투르크만차이(Treaty of Turkmenchay) 조약을 맺는다. 이 조약으로 이란은 러시아에 광대한 카프카스의 영토를 할양하고, 약 300만 파운드의 배상금을 지불했으며, 또한 러시아에 대해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등 매우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된다. 이 때부터 카프카스 지역이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카프카스 지역을 경작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들을 자신들의 고향 땅으로 이주시킨 것이고 지속적으로 러시아와 마찰을 빚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다수의 아제르바이잔인들을 강제적인 디아스포라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도 이란 서부 지역에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 시기에 러시아의 이주 정책에 쫓겨 들어온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많다고 한다. 이들을 줄여 아제리인들이라 부르기도 한다. 게다가 러시아는 이주시킨 아제르바이잔인들을 지렛대로 삼아 이란 서부 지역을 통제하고자 하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 나중에 이 아제리인들은 러시아 국적을 포기하고 이란 국적을 얻었지만 당시의 이란으로 이주한 아제리인들은 상당수가 러시아인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1878년 러시아-오스만 12차 전쟁이 발발하여 러시아가 승리함으로써 오늘날 터키 동부 지역을 식민지 삼아버렸다. 현재 필자가 머물고 있는 카르스가 당시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가 40년 넘게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야 했었다. 그리고 이 지역으로 아제리인들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와 거주하니 이 지역의 터키인들은 형제인 아제리인들을 환영할 지 몰라도 이미 터키 동부 지역에 터 잡고 살고 있던 아르메니아인 입장에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오스만투르크가 발칸 전쟁에서 패배하고 발칸 지방을 상실하면서 급격히 쇠퇴하자 러시아의 지배 하에 있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 또한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 때 터키 동부 지역은 신분계층이 4단계로 나뉘었는데 가장 위에는 러시아 지배층, 두번째 계층이 바로 아르메니아인이다. 세번째 계층이 아제리인이고 마지막 최하계층이 터키인이다. 이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 지배층들의 비호를 받으며 투르크계 민족의 재물을 강탈하고 살인을 저질러도 처벌 받지 않았다. 터키 동부 지역의 40년 러시아 식민 지배 기간 동안 러시아인들이 투르크계 민족들을 괴롭히기보다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투르크계 민족을 괴롭히는데 있어 방관했고 사실상 방치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방치는 후일 생겨난 큰 비극적인 사건들의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카르스의 러시아 총독부의 딩시 문서들을 보면 아르메니아인들의 행위들은 패악질에 가까웠고 투르크계 민족들에게 있어 뿌리 깊은 원한을 갖게 만들었다. 물론 개중에도 아르메니아인과 투르크계 민족 사이에 서로 간에 정을 쌓고 잘 지냈던 사람들도 있었다. 이는 마치 일제 시대 때, 조선인과 일본인들 사이에 정을 쌓고 잘 지냈던 일반 서민들도 있었던 것처럼 제 아무리 식민지배라도 예외는 있기 마련이다. 이후 이런 인연들은 반기를 든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토벌 작전으로 인해 곤경에 빠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터키 일반 서민들 중 몰래 숨겨주면서 참화를 면하게 하는 등의 일들도 생기곤 했었다. 1917~18년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카프카스 지방의 러시아 군이 카르스 조약을 체결하고 터키 동부 땅을 오스만 정부에 돌려주며 철수함에 따라 터키인들의 보복을 두려워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이 아르메니아 현지인들을 선동하여 아제르바이잔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같은 끔찍한 학살은 아직 오스만 정부가 터키 동부 일대를 접수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안보 공백을 틈타 벌어진 비극이었다. 특히 이와 같은 학살을 선동한 자는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 1878~1918)이라는 자였다. 샤후먄은 공산화된 러시아의 적극적인 지원을 원했고 코민테른에도 참가해 레닌으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반제국주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반동뷴자들을 처단한다는 미명 하에 1918년 3월부터 4월 사이에 아제르바이잔 땅의 바쿠를 포함, 나고르노 카라바흐, 장게주르, 나흐츠반, 예레반, 아르다한, 카르스, 반 일대에서 최소 3만 명 이상의 아제르바이잔인을 학살했다. 특히 구바 지역에서 122개, 나고르노 카라바흐에서 150개, 장게주르에서 115개, 예레반 근교에서 115개, 카르스에서 92개의 마을을 파괴하면서 약탈과 학살을 자행했는데 최소 3만이라는 희생자로 보고 되었을 뿐이지 크게는 10만에 이를 수도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한 근거로 예레반에서 아제르바이잔인들이 발행하던 1919년 11월 2일자 아슈하다보르(Aşxadavor, 노동자) 신문에 의하면 예레반 인근에서 순식간에 88개의 마을이 파괴되고, 1,920채의 집이 방화로 인해 전소되었으며, 130,970명의 아제르바이잔인이 남녀 노소 가리지 않고 잔인하게 살해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대학살을 주도했던 샤후먄은 1918년에 반볼셰비키파에게 잡혀 공개 총살로 사망하면서 일방적인 학살의 비극은 종식되었다. 물론 아제르바이잔이 주장하는 구바 학살의 경우, 수만 정도에 이르며 바쿠에서는 3,000명에서 1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예레반에서의 13만 정도의 대량학살은 영문 자료, 러시아어 자료, 아르메니아어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부분이 있는데 이는 교차검증이 되지 않고 있다는 얘기다. 즉, 아제르바이잔의 선전이거나 과장, 혹은 오보일 수 있다는 것인데 예레반 현지에서의 보도에 의한 것이기에 아제르바이잔 측의 프로파간다나 오보일 가능성은 매우 적다. 이후 이러한 사건에 분개한 오스만 제국군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은 바쿠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보복 학살로 이어졌다. 1918년 9월 누리 킬리길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군대는 바쿠 전투에서 바쿠를 함락시킨 뒤 1~3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 민간인을 아제리인에 대한 3월 학살의 보복으로 학살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시기 자행된 대규모 학살이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상호 학살이 이어졌으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간의 오래 묵은 적대관계의 원인이기도 하다. 한편 아르메니아에서는 이 학살을 지시한 스테판 샤후먄(Ստեփան Շահումյան)의 동상을 수도 예레반에 세우고 국가 영웅의 칭호까지 내렸다. 이후 아르차흐 공화국이 세워지면서 아르차흐 지역 곳곳애 샤후먄 동상을 세웠지만 2020년 아제르바이잔이 전쟁으로 회복한 아르차흐의 영토에서는 샤후먄 동상이 철거되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학살자를 영웅시하는 아르메니아를 비난하고 스스로를 아르메니아 대학살의 피해자를 주장하는 것은 매우 뻔뻔한 이중 인식이라 규탄하고 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에 대해 철저히 외면하게 됐고 아르메니아는 이같은 학살에 철저히 침묵했다. 따라서 자신들의 책임을 부정하고 서로의 학살만을 부각시키면서 비난을 이어나가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에서는 1998년 3월 31일부터 아제르바이잔인 대학살의 날(Azərbaycanlıların Soyqırımı Günü)이라 부르며 국가적인 차원에서 추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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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29
  • 쿠르디스탄과 이스라엘의 관계, 마냥 우호적인가?
    나는 늘 그렇듯이 터키 디야르바크르에서 쿠르드족과 쿠르디스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디야르바크르의 분위기는 반(反) 터키 정서가 여전하다. 쿠르디스탄의 수도는 디야르바크르이고 쿠르디스탄의 영토는 북쿠르디스탄, 이라크 쿠르디스탄, 로자바 쿠르디스탄으로 나뉘어 있다. 디야르바크르는 북쿠르디스탄에 속해 있다. 디야르바크르를 걸어보면 중심대로인 가지대로에 이스라엘 국기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보통 국기라면 어딘가에 내걸거나 하는 것이 원칙인데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는 밟고 가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한 나라의 상징인 국기 모형이 이렇게 일반인들에게 지저분하게 밟히는 것은 해당 국가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 없다. 그 대신 팔레스타인 국기는 도처에 팔고 있는데 이스라엘 국기처럼 바닥에 새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대한 쿠르드인의 감정이 어떤지 물어보니 10명에서 7명은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스라엘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은 "배신자(Betrayer)" 라는 것이고 팔레스타인 문제가 그 다음이다. 모두들 쿠르드족이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 쿠르드족은 현재 이스라엘을 증오하고 있다. 왜 그러는 것일까? 1931년 유태인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의 한 인물이 쿠르디스탄에 잠입했다. 그는 현 팔레스타인 땅에 유태인들을 들어가게 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디야르바크르를 방문해 쿠르드인들을 비롯한 그곳의 비 아랍권 세력들, 이란 및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인들과 접촉하여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장기적 비전을 구축하려 했다. 그는 쿠르드인에게 미국과 영국 및 서방 국가들이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한 국가를 건국할 것이니 이 건국을 지지해주고 또한 지원해준다면 쿠르드인이 터키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적극 지지하며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라크와 아르메니아 일대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달라 요청했고 이런 그의 제안에 쿠르드인들은 이 모사드 요원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모사드 요원이 바로 모사드 정보기관의 창립 국장인 레우벤 실로아흐(ראובן שילוח)이다.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이 만들어지는데 쿠르드인들이 이를 적극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을 당시 이라크의 유태인들은 이란 왕정과 이스라엘 정부, 쿠르드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쿠르디스탄 지역을 통과하는 조건으로 이라크를 탈출했다. 한편 쿠르드인들은 이 기간 동안 터키 내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켜 터키의 관심을 소요 사태로 향하게끔 하고는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큰 관심을 쏟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돕기도 했다. 쿠르드인은 17년이 지난 상황에도 이스라엘의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따라서 비 아랍권 국가 중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또 다른 비 아랍권인 쿠르드인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1958년부터 이스라엘은 이라크의 쿠르드인 무장단체 페쉬메르가를 1970년대까지 지원하기도 했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이스라엘군은 쿠르디스탄 지역으로 파병하여 병원을 지어주기도 했고 식량과 무기도 지원하면서 그들의 무장 독립 투쟁을 도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끝내 돕지 않았다. 무장 독립 투쟁에 식량과 무기 지원하며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서 쿠르드는 터키와 이라크를 대신 싸워주면서 이들 국가들의 국력을 낭비하게끔 하는 존재로 이용했던 것이다. 1975년에는 이란(팔라비 왕조)-이스라엘-쿠르드가 삼각 동맹을 맺어 이라크를 견제하여 중동 국가들을 상호 간 혼란에 빠지도록 했다. 이후 이란에서는 이란 혁명이 나타나 제정이 폐지되고 새로운 신정 정부는 반미와 반 서방, 반 이스라엘주의를 내세우며 이들 동맹에서 이란은 제외되었고 이스라엘과 쿠르드의 동맹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 때 호메이니의 탄압을 받던 일부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과 다수의 쿠르드인들은 서로 협력적인 관계가 되었고,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체적인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라크 쿠르디스탄에서는 반이스라엘 보이콧이 적었으며 북쿠르디스탄에는 이스라엘을 더욱 응원하는 등 오히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만든 제품들을 적극 사용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쿠르드인들이 훨씬 이득이었다. 적대국에서 소요사태를 일으켜 이스라엘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그와 같은 혼란 기간 동안 중동과의 잇달은 전쟁에서 소모된 국력을 그 사이에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쿠르디스탄의 독립 국가 승인에는 매우 미온적으로 나왔다. 이스라엘이 약속을 지키진 않지만 주변 중동 국가들에게 있어 미운 털이 박혀온 쿠르드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에 독립을 승인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했다. 이미 이스라엘과 공동 운명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2000년대에는 이스라엘 군과 정보기관 요원 수백명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지역과 이란, 시리아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쿠르드 특수부대원들을 훈련시키며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 능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국-이라크 전쟁에서 결국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이 타도되고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시아파 민병대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쿠르드인 특수부대를 활용하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란 영토내에 이스라엘 첩보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려 했다. 이 또한 쿠르드인들이 적극 도왔고 사담 후세인이 타도 되었을 때, 최소한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기대했지만 미국 측에서 이를 거부해 이들 또한 독립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런 미국을 전혀 설득하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이 미국에게 쿠르디스탄 독립을 반대했다는 설도 나돌고 있다. 게다가 쿠르드족 독립의 운을 띄워주면서 이라크 내 수니ㆍ시아파와의 갈등 및 이란을 견제하는 효과까지 한꺼번에 노리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전략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2017년 이라크 쿠르디스탄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이었다. 그리고 2019년 터키가 본격적으로 쿠르디스탄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네타냐후 총리는 본인의 트위터에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쿠르드 지역에 대한 터키의 침략을 규탄하고 터키와 그 대리인들의 쿠르드족 인종청소에 경고한다(Israel condemns Turkish aggression against Kurdish areas in Syria and warns of ethnic cleansing of Kurds by Turkey and its proxies)."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용감한 쿠르드인들에게 인도주의적 도움을 줄 준비가 됐다(Israel is ready to provide humanitarian assistance to brave Kurds)고 했다. 이건 쿠르드인 입장에서는 웃기는 일이다. 쿠르드인이 원하는 것은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으로부터 완전한 쿠르디스탄 공화국을 설립하고 독립하는 일이다. "인도적 지원(Humanitarian assistance)"이라는 단순한 사탕발림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립과 정부 수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쿠르드 독립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쿠르디스탄으로 인해 중동에서 새로운 소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경계했다. 따라서 터키군이 쿠르드군을 공격한 것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묵인 아래 진행되었던 것이라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고민이 컸던 것이다. 당시 쿠르드인은 시리아에서 미군을 도와 IS 격파에 나서서 실제 이들 토벌에 공을 세우고 막대한 인원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이 시리아 철군을 결정하면서 터키군 군사작전에 불개입을 선언했다. 쿠르드인들은 미국과 서방국가, 이스라엘 등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셈이 되었다. 당시 AFP통신은 "미국 지도자의 쿠르드인 포기는 이스라엘에 깊은 우려를 초래했다"고 분석했을 정도니 이스라엘의 고충 또한 알만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미국의 손을 들어주며 또 다시 쿠르드를 배신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2019년 하반기에 유태인들은 2000년 동안 박해와 추방으로 고통받았다며 이스라엘에는 쿠르드 출신 유태인들이 많고 중동에서 온건하며 서방 친화적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쿠르드인들은 이 때 이스라엘에게 자치독립을 추구하는 쿠르드인과 군사 · 경제 등에서 우호 관계를 유지하명서 정작 팔레스타인의 자치독립은 인정하지 않아 그 모순점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작년 10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벌어지자 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응원했다. 이제는 쿠르드 노동자당인 피케이케이조차도 이스라엘을 돕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 쿠르드인들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이스라엘은 이 모든게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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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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