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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아, 아르메니아의 유태인 아스그나스(Ashkenaz)
    노아의 장손이자 야벳의 장남인 고멜이 시메리안(Simerian)이라는 이름과 큰 영향력을 성경 및 토라와 역사에 남겼다. 야벳의 후예들이 노아의 축복을 받아 이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노아의 증손이자 고멜의 장남인 아스그나스(Ashkenaz)는 카프카스 지역으로 진출한 가문의 조상이 된다. 성경 및 토라와 카프카스 고대 역사에 등장하는 아스그나스의 흔적들은 많지 않으나 아직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으며 신화적인 부분에 있어서 무궁무진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스그나스(Ashkenaz)는 터키 땅 전역과 카프카스 일대를 지배했으며 야벳 계통 후예들의 대표자들처럼 인식되었다.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Ham), 함의 막내인 가나안(Cannan), 가나안의 둘째 아들인 헷(The Hittites) 종족의 세력들이 후일 큰 제국을 건국한 히타이트 제국과 견줄 정도로 강성해졌다. 그들은 히타이트 제국 이후에 등장한 아시리아 제국과 신바빌로니아 제국 등과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경쟁하게 된다. 물론 이들 제국들이 워낙 강대하고 파죽지세로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며 그들의 영토는 축소된다. 그러나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했던 제국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다가 고대 근동을 호령하던 강대국들의 틈새를 헤집고 들어가 대제국을 건설키도 하였다. 후일 로마 제국의 확장과 신생 페르시아 제국의 대립 속에서 지금의 카프카스 지역과 아르메니아 하이랜드라 불리는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경계가 정해지면서 끝없는 고중세 시대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했다. 중세 시대 중반부인 서기 1200년을 전후하여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통치했던 바그라티드 왕조가 상당 기간 동안 카프카스를 통과하는 실크로드를 장악했고 카프카스 일대의 중계 무역으로 인한 부와 명예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매우 용맹했으며 유럽 러시아와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로 연결되는 지역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그 명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정학적 영토가 이전보다 위축되었기 때문에 아스그나스라는 이름이 잊혀지는 듯했다. 이 당시 아스그나스라는 이름보다 아르메니아나 조지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열국들의 뇌리에서 자취를 감춘 듯 보였던 아스그나스(Ashkenaz)가 어느새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 정교회가 자리 잡았고, 산악 유태인들이 자리 잡으면서 야벳의 자손들을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이 유럽의 각 지역들에 흔적을 남겼던 기록들이 적지 않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 정교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에 의해 유럽의 주요 지역들을 망라한 유럽 자체를 가르키는 명칭으로 ‘아스그나스’가 재등장한 것이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대명사처럼 불렸던 아스그나스(Ashkenaz)는 유럽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던 이유는 노아가 야벳에게 베풀었던 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예언적인 축복을 이루어가는 상황에서 점차적으로 동유럽과 러시아를 거쳐서 유럽의 곳곳으로 지경을 넓혀 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중세 당대의 역사가들도 아스그나스의 확장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중세 시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유럽에서 성지를 탈환하려고 몰려드는 십자군들을 가르켜 아스그나스(Ashkenaz)라고 불렀던 기록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두고 어느 정도아스그나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는 유태교의 역사와 관련 지을 수 있는데 중세 시대의 중반 이후로 아스그나스 유대인(Ashkenazi Jews)들이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유태교 추종자들로 알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유태인은 대개 아스그나스 유태인일 정도로 이들은 전체 유태교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아스그나스 유태인 그룹과 더불어 가장 많은 계파를 이루고 있는 세파라드 유태인(Sepharadic Jews)들은 전체 유태인의 20% 전후를 차지하는데, 이들 세파라드는 스페인을 지칭하는 단어로써 스페인 지역에서 유래한 유태인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경이나 토라에서도 스페인이 세라파드로 불렸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스페인에서도 세라파드 내지는 아스그나스(Ashkenaz)로 나라 이름을 지칭했다는 것이다. 1939년경 유럽에는 약 1,200만 명 정도의 아스그나스 유태인(Ashkenazi Jews)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아스그나스 유태인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유태인이라 지칭하면 모두 아스그나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아스그나스라는 명칭을 유태인들이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고대 시기 이스라엘의 북왕조를 구성했던 10개 지파들이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 중 상당수가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아스그나스로 유입되었다. 남왕조 유태 왕국의 2개 지파에 속한 유태인들 중 다수도 아스그나스로 속하여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로 이동해 토착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과 여건에 따라 유럽의 각 지역으로 분파, 이동했다고 본다. 아스그나스의 본 고장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 중에 12 사도들의 선교로 인해 기독교인으로 개종된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아스그나스 유태인들의 숫자만큼이나 아스그나스 기독교인(Ashkenazi Christians)들도 적지 않은 숫자로 존재했을 것이다. 비록 많은 수의 아스그나스 유태인이나 세파라드 유태인들이 유럽 곳곳에 계속 남아 있지만, 아스그나스의 본토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남은 유태인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후예들이 주축이 되었고 각각 세계 최초 및 역사상 두 번째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유럽의 다른 이름인 아스그나스(Ashkenaz)도 대륙 전체가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16세기 종교 개혁을 통해 그들의 후예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가 그 지경을 넓혔다고 본다. 조지아나 아르메니아로부터 시작된 아스그나스 유태인 중심의 선민사상은 아스그나스로 불리는 유럽 등에서 백인 우월주의, 혹은 백인 보수 우성향, 백인 리버럴(The White Liberals), 그리고 근본주의적인 백인 기독교인들의 성경적, 사상적 근거로 악용되고 왜곡되어 왔다. 따라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유태인들은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이 로마에 정복된 이후까지 가장 먼저 해외에 진출해 뿌리 박은 자들이고 이들로 인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된 근원적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과 아쉬케나지 유태인은 조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악마적인 유태인 조합으로 재탄생했다. 만약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소멸되면 유태인들이 자리 잡을 곳은 조지아, 아르메니아로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1
  • 이슬람 문화권에서 베두인의 정의와 민족적 실체
    이스라엘 군에도 베두인들로 구성된 경보병 특수부대가 4차 중동전쟁 때까지도 존재하고 있었으며 해당 부대의 지휘관 또한 당연히 베두인이었다. 이스라엘의 베두인들은 2차와 3차 중동전쟁에서의 공훈으로 인해 이스라엘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적도 있을 정도이나 현재는 폐지되고 없는 상태이다. 그래도 베두인 병사의 지원 복무는 계속되고 있어서 수백 명 단위의 베두인들이 이스라엘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군에는 베두인들로 구성된 BDRB (Bedouin Desert Recon Battalion) 부대가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 베두인들에게서 배신자 취급을 당하지만 이스라엘 외에도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거주하는 베두인들도 있다. 시리아에도 베두인이 62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자 시리아의 베두인들도 주변 국가인 요르단, 레바논, 터키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두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편이다. 베두인들은 예루살렘과 가자 지구에서 유태인 정착촌 등에 섞여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의해 많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가까운 촌락에도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귀중한 재산인 당나귀를 사살당해도 이에 대한 손해 배상을 못하며,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도 유태인 아이들에게 온갖 구타와 학대를 당해 학교도 못가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베두인이 자주 나타난다. 더구나 베두인들은 대부분이 가난에 시달리며 이스라엘의 빈곤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극우 유대인들은 이들도 팔레스타인, 베두인-아라비아 인, 흑인들과 동급의 야만적인 종족으로 간주해 그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베두인 거주지를 파괴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베두인들에게서 반(反)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다. 2013년에는 베두인 주민 수천 명이 거주지 파괴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여 여기에 놀란 이스라엘 정부가 이를 달래려고 베두인 강제 이주 계획을 취소한다고 발표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시 베두인들의 거주지를 파괴하고 그들을 강제 이주시키며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나서면서 베두인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베두인-아라비아 인들과 한편이 되어 그들 무장단체에 들어가 이스라엘 타도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다. 유목민들에서는 부계(父系) 출생을 엄격하게 지키며 확대 가족과 씨족을 사회생활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흑염소의 털로 만든 유르트와 가축, 가재(家財) 등은 가족 전체의 소유물이다. 하나의 유르트에는 아흘 알 바이트(Ahl Al-Bait)가 한 사람 있어 주부의 일을 한다. 우물은 씨족에게 소속되고 이동 및 숙영(宿營)지 확보도 씨족 전원이 협력하여 한다.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형성하고, 부족과 지족(支族)의 수장은 세습제로 일정한 가계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낙타는 부족들의 공유물이었고, 부족 전원이 세력을 연합해 적들과 전투를 벌인다. 보통 베두인들은 일부다처제이며, 6종의 카스트 계층들이 있다. 귀족과 평민들은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이고,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 아라비아 제족들과 베르베르 제족은 종속 민들이며, 사하라 사막 남부나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흑인의 농노(農奴)가 존재하고 있고, 노예와 천민(賤民)이 있다. 노예는 남부 유럽에서 데려온 지중해 코카소이드형 백인도 있었으나, 나중에는 동아프리카 수단의 흑인들에만 국한되었다. 이들은 아라비아의 노예사냥에서 체포된 사람들인데 그들의 자손은 혼인 등에서 차별화된다. 카스트 제도로 구분되는 계급 사회는 잦은 정복 전쟁에서 생긴 것으로, 같은 카스트의 남녀 이외에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베두인들은 기마(騎馬)에도 능숙하여, 창을 사용하고 유럽 중세 기사와 같은 우월감을 가지며, 고귀한 존재라고 자부했다. 이교도인 베르베르 인과 흑인을 이슬람 화 시킨 것도 그들인데, 베두인 제족은 농경의 종속 민들과 오아시스 통상로의 상인으로부터 약탈과 재물에 대한 보호의 대가로 공납금을 취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중앙 정부의 세력 증대로 약탈과 공납에 의한 수입이 감퇴하였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경을 왕래하는 유목 경제가 곤란하게 되어 목축을 포기하고 농경을 생활 수단으로 하는 베두인 족도 증가하였다. 대부분 베두인 유목민 출신인 요르단 인들은 타인에게 지극한 환대를 보이고 혈족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러한 생활 태도로 볼 때 고대 베두인들 삶의 방식이다. 유목민에 기반을 둔 근대의 촌락 생활 방식은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지만 그러한 기반이 되는 요소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촌락의 나이 많은 여성, 때로는 젊은 여성들은 전통 의상인 길고 검은 토부(Thobe)를 입는데 어깨와 소매 등에 복잡하고 화려한 색의 작은 수를 놓아 입기도 한다. 도시 역시 전통적인 가치관이 존속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요르단 인들은 관대함과 따뜻함, 친절함 등을 배워왔으며 요르단 사회 핵심에는 부족 간의 조화와 가족을 존중하는 사상이 많이 남아 있다. 요르단은 높은 수준의 공예로 유명하다.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들이 요르단 수도 암만의 상점과 수도에서 떨어진 근교의 작은 마을 시장을 채우고 있다. 이러한 공예품으로는 그릇, 장신구, 수예품, 카페트와 전통 의상 등이 있다. 암만에서는 지역적 특성의 예술을 지닌 유리 제품을 만드는 유리를 깔때기로 부는 장인을 만날 수 있다. 유목 경제적으로 볼 때 베두인이 기르는 양은 모직의 중요한 공급원이다. 이러한 양털로 작은 베틀에서 여러 종류의 모직제품을 만드는데 관광객 및 외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판매되는 것은 아라비아 융단이나 카페트이다. 각각의 카페트에는 독창적인 특징과 독특하고 섬세한 디자인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아랍 문학 작품인 <천일야화 : 아리비안나이트>는 요르단 인의 작품이며 20세기의 작가로 뛰어난 문체와 사상을 표현한 시인 무스타파 와바 앗 탈은 아랍의 주요한 시인으로 나타나며 이들 모두 베두인 출신이다.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인(Bedouin : 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두 민족 모두 부족 단위로 공동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부족에는 부족장(shaykh 또는 sayyid), 신관(神官, Kāhin), 전시 군사 지도자(Qā’ìd) 및 중재자(Ḥakam) 등의 요직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구성원 총회(Majlis)에서 선임되었다. 부족장은 특별한 권한을 누렸다기보다 동등한 구성원 가운데 제1인자의 역할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면서 다른 부족들과의 교섭에서 부족을 대표하는 정도였다. 그는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구성원 중에서 주로 선출되었다. 베두인의 신관은 부족의 제사와 축제 및 장례 등의 의식을 관장하였으며, 전쟁 시 군사 지도자로는 다른 부족과의 전쟁, 기상이변 등 위기 시에는 연로한 부족장보다는 군사적 식견과 활동력이 좋은 중년의 구성원이 더 적격으로 여겨져 선임되기도 했다. 중재자들은 부족 구성원들 간의 분규를 조정하여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부족 구성원 총회에서 토의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부족 내부의 관행(Sunnah)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베두인들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이어 나갔으나, 도시의 정착민들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 메카와 메디나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와 에티오피아를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상업 도시로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또한 이 도시들은 토질이 척박하여 주민들과 가장 큰 부족인 쿠라이쉬(Quraysh) 부족은 주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도시의 중심에는 카바(Ka‘bāh)라는 성역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쿠라이쉬 족의 신상(神像) 뿐만 아니라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의 신상도 존재하기 때문에 메카는 종교적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메카는 예멘에서 실어 온 향료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및 이집트 등 각처에 공급하였고, 보다 개화되어진 지역들의 문물을 가져와 아라비아 반도에 보급한 문명의 중개도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메카 북방 약 300㎞에 위치한 메디나는 단순히 농업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쿠라이쉬 부족은 교역 활동을 통하여 협동력, 조직력 및 자제력을 함양하였으며, 베두인의 용맹성과 결합하여 후에 이슬람 제국 창건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베두인-아라비아 인이라는 개념은 인종과 혈통적인 성격보다는 셈어라는 아랍어 계통을 모국어로 공유하는 민족들의 집단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나타난다. 6세기까지 아라비아 인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들에 한정되었지만, 이슬람교의 전파로 이집트인, 메소포타미아인, 혹은 이라크인, 시리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중동 지역의 많은 주민들이 언어적으로 동화되면서 베두인-아라비아 인으로 통칭되었다. 이러한 아라비아 인들은 한때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시아까지 진출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초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유럽 열강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 중에서 범아라비아주의가 발흥하였고, 아랍어 화자들 사이에 베두인-아라비아 인이라는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 7세기 이전의 아라비아 지역은 아라비아 반도 지역을 지칭했으나, 이슬람 문화권이 확장되면서 중동과 그 인근의 이슬람 문화권을 통칭하여 지칭하는 단어로 변화되었다.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역사적인 세력들로 볼 때 아라비아 제국을 뜻하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아랍 연맹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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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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