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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中편
    오스만투르크는 발칸 전쟁, 리비아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1914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게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신성한 전쟁에 참여하여 외세와 함께 싸우자고 독려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공격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는 즉시 이에 대응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오스만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면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아르메니아인 대표와 오스만 대표의 회담이 에르주룸에서 열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과 러시아 어느 측에도 참가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력으로 독립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행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 아니냐는 오스만 제국의 합리적 의심으로 돌아왔다. 오스만 제국은 1915년 카프카스에서 오스만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충돌하자 수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할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시리아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 반면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오스만 제국 내부의 아르메니아인도 회유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무능한 정치에 실망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에 회유되거나 독립을 요구하는 자들이 늘어만 갔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발족된 청년 투르크당은 개혁파 군사집단으로, 자유주의적, 국가주의적, 법치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청년 투르크당은 초창기에는 민족주의적인 색체가 거의 없었기에 불가리아인, 아르메니아인, 투르크인, 그리스인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헌법을 제정하고 오스만 제국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던 조직이었다. 그런데 청년 투르크당은 결국 반기를 들었는데 수도인 코스탄티니예에서 벌어진 반쿠데타에 의해 주춤하자 현지의 무슬림들은 청년 투르크당 지지 세력 중 하나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압둘하미트 2세에 대한 청년 투르크당의 반기는 고작 11일 만에 제압되고 탄지마트 법이 부활했지만, 이미 아다나에서는 15,000명에서 30,000명 사이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이후에 발생한 정책이었다. 터키에서는 이 "아다나 시위 진압 사건"이 아르메니아인들이 먼저 벌인 폭동으로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아다나의 소요 사태는 시리아를 식민지로 삼고 있던 프랑스가 획책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아다나는 시리아와 가까운 지역이고 프랑스령 가지안테프와 인척 지역이었으며 이 시위에 시리아 프랑스 식민 정부가 상당한 양의 지원금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프랑스 측은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보복을 자신들에게 책임을 돌리고자 외세의 탓을 하면서 터키를 비판했다. 그러나 터키를 비판했을 뿐이지 이 사건에 아르메니아와 관련이 없다는 증거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터키 동부 각 지역의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을 이용해 오스만투르크를 분할해 역사에 지워 버리려고 했던 것이 전후 1920년 세르브 조약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근거로 작용하곤 한다. 프랑스는 오스만 정부를 인종주의적 성향의 학살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더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계가 시위를 벌이며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터키의 편을 드는 행위를 처벌하라는 주장이 프랑스 의회에서 통과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15년부터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온 터키에 대한 규탄, 프랑스와 연관된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라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은 반(Van)에서도 발생하였으며 반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동남쪽으로 강제 이주시키게 되는데 하필이면 해당 지역이 프랑스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프랑스보다 카프카스를 넘어 남하를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가 더 큰 적이었다.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는데 오스만 군은 병력도 부족하고 물자도 충분하지 못해 사기가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점점 청년 투르크당이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오스만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그렇다고 피지배민족의 권리와 인도주의 같은 사상을 갖춘 세력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이유는 서구 열강의 오스만 제국을 침탈하는 과정들을 보고 겪으며 서구의 제국주의 관념들에 매우 냉소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년 투르크당에 속해 있던 오스만 제국의 재상인 탈라트 파샤(Talat Pasya)나 해군 장관 제말 파샤(Zemal Pasya), 오스만 제국의 첩보 부대인 테슈킬렛 마흐수사(Teshukilet Mahsusa)의 수장이었던 베하에딘 샤키르(Behaedin Shakir) 등은 무슬림이지만 세속주의자였고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은 복속과 지배의 대상이지, 박멸과 절멸의 대상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청년 투르크당은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철저하게 지배의 대상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인 문제로 보있다.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에 붙어 투르크 민족의 안보를 해치려고 하는 정치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그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박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 몰리고 있는 오스만의 입장이라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의 영토 안에서 이적행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탈라트 파샤와 제말 파샤의 회고록과 이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적행위와 행동을 보고 한 발언들과 행동, 이러한 형세를 보고 전술했던 유럽의 저널리스트들도 이를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기술했다. 더불어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 혁명위원회가 러시아 편에 서서 조직적으로 공격하면서 터키 동부 각 지역에는 약탈과 방화, 학살은 꾸준히 벌어지게 된다. 그러자 오스만 정부에서는 이들을 테러 분자로 규정하고 1915년 4월 24일 이 위원회를 폐쇄하면서 235명의 지도자를 반역죄로 구속했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현재 4월 24일을 대학살 추모일로 정하고 지금도 추모하고 있다. 장군인 엔베르 파샤의 처남이자 반 일대 총독으로 부임해온 정치인이자 제브뎃 베이 벨베즈(Cevdet bey Belbez, 1878 ~ 1955)는 반 일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촌락을 수색하여 수상한 무기들을 발견했다고 보고를 올리면서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돌아선다. 오스만 군이 자신들의 무기를 사진 찍어 놓고 증거라고 주장했다는 증언이 나오긴 했지만 이 또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브뎃 베이가 반 일대의 촌락에서 수색과 학살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살의 대부분은 쿠르드족과 체르케스계 보조병들이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군인들도 학살에 참여한 정황이 많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황이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제브뎃 베이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문서가 있기에 이를 근거로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5월 30일에는 탈라트 파샤가 러시아와 내통하는 적을 격리시키기 위해 70만 명의 아르메니아 인들을 시리아ㆍ팔레스타인ㆍ이라크 등지로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이주에 따른 기아와 질병,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막의 혹독한 기후 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재 아르메니아는 조직적인 학살을 지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탈라트 파샤의 이주 명령서를 학살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주 명령서에는 학살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터키 측은 오스만 제국의 공문서 양식과 전혀 다른 서류이고 이는 조작되었다고 맞서고 있는 상태다. 더불어 이를 아르메니아와 함께 규탄하고 있는 집단 서방은 발칸반도 터키인 및 다른 무슬림 민족들에 대한 학살과 인종청소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을 감으며 철저히 이중잣대로 나서고 있다. 이는 진심으로 피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터키를 정치적으로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 때처럼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대표적인 것이 사망자 숫자와 희생자 성격을 둘러싼 논란이다. 이는 피해자를 위한 정의를 표방하여 나서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이해관계로,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한 측면이다. 아르메니아는 15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터키는 70만 명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30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자료들에 따르면 희생자는 60만~15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라나 학살자 숫자는 조직적인 학살이 이루어졌느냐 혹은 불가항력이었는지는 지금도 큰 논란이다. 당시 아르메니아 전체 인구는 오스만 제국의 통계에 의하면 129만 5,000명이었다. 서구의 다른 자료들은 105만~150만 명으로 집계했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180만~256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의 통계대로라면 그 근거를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아르메니아 측의 통계에 대한 근거는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 시민들의 상당수가 학살, 기아,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숫자가 무려 300만~400만 명에 이른다는 점에 있다. 당시 이들 중 아르메니아인들을 구분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아르메니아 측의 통계는 전혀 맞지 않다. 그리고 서구의 자료들인 105만~15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하면 지금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강대국들 이해관계의 목적에 의해 이 문제가 다루어졌다는 것에 있다.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를 경험했던 유럽 각국은 선거나 주요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아르메니아 출신 유권자들을 의식해 이 문제를 재기해 터키 정부를 악인으로 만들어 "투르크포비아"에 일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핵심적인 부분은 '전쟁 중 일어났던 우발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비극이었는지, 혹은 계획된 조직적인 인종청소였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어느 문제와도 닮아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재기된 소련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홀로도모르"이다. 스탈린의 정책으로 인한 운이 없는 불가항력적인 비극인지, 계획적인 스탈린의 학살인지, 이 부분에 대한 것도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강대국들 이해관계의 목적으로 해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나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학자들이 머리를 마주하고 공동연구를 통해 역사적인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명확히 밝혀진 연후,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사죄와 배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인류의 비극이 사이비 어용학자들에 의해 근거없이 해석되고 악용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터키-아르메니아, 러시아-우크라이나 모두 양측의 민족적 앙금과 역사적 적개심을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5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上편
    오스만투르크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장시간 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이슈였다. 특히 19세기 말,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기부터 터키 공화국이 탄생한 1923년까지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은 조직적인 학살을 당하거나 강제로 추방되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약탈로 인해 굶어 죽거나 고문 및 납치 등의 방식으로 조직적인 인종청소를 당했다는 주장이 대학살 관련 문제의 핵심이라 볼 수 있겠다. 세계 각국의 아르메니아 관련 단체들은 우크라아나 홀로도모르 단체보다 더 숫자가 많고 매우 조직적이다. 이들은 국제사회를 움직여 제노사이드 인정과 더불어 터키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아르메니아인들을 약탈한 재산을 반환해달라는 내용의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도 걸었고 그로 인한 보상 등을 요구하여 터키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최근에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단체들과 연합하여 러시아도 주적으로 몰아가며 러시아 정부에도 터키에 걸고 있는 내용과 같은 내용으로 러시아에 우크라이나에 대해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던 홀로도모르는 내용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기에 이는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반면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에 사과를 전혀 하지 않은게 아니다. 그동안 터키인과 자국 내 아르메니아인 간에 발생했던 유혈 충돌과 대규모 희생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거듭 사과했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자행되었던 계획적, 혹은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시민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적국이었던 러시아에 동조하고 오스만 제국을 배신하여 독립하려던 반란으로 인한 불가피했던 조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근거로 아르메니아인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터키인 희생자도 40만 명에 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직접적인 연결이 아니라 이를 정치적으로 쟁점화하는 것으로 끌고 간다는 것에서 이는 순수한 의미의 사과와 보상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터키를 고립시키고 악화시키려는 타 국가들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EU 국가들이고 특히 프랑스의 반발이 매우 심했다. 그 이유 프랑스에 아르메니아계 집단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의 요구로 인해 프랑스 의회는 2012년 1월,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 형사 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학살을 부정하면 처벌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에서 오랜 투쟁으로 인한 승리를 자축하고 이를 만끽했지만, 반면 터키와 프랑스 관계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 법의 발효로 인해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발언이나 표현을 할 경우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터키 전역에선 반(反) 프랑스 시위가 벌어졌으며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등을 식민 통치하면서 수백 년 동안 아랍인들을 박해하고 학살을 저질렀던 프랑스의 위선과 이들의 역사적인 과오를 규탄했다. 2015년에는 터키-아르메니아 학살의 100주기가 되던 해였다. 당시 터키에게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전 세계 곳곳에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었고 이는 유럽 의회가 공식적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도 러시아의 학살로 규정하고 이를 비난하는 결의 안까지 통과시키려 한다. 그렇게 따지면 영국의 아일랜드 대기근, 인도 뱅골 대기근 등으로 인한 아사 또한 학살로 규정해야 하며 프랑스가 저지른 알제리 대학살, 베트남 대기근도 학살로 규정하여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학살에는 EU 자체에서 언급이 금기어회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불어 EU의 위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따라서 23개 국가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국제 사회는 아르메니아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국제 사회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해 EU와 영국, 이스라엘이 들어간 23개국이다. 그리고 미국은 나토의 동맹국이자 중동에서 자국 이익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는 터키를 자극시키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국제 지정학, 전략적인 압박으로 이용하기 위해 법안 통과를 미루고 있다. 만약 터키가 미국의 말을 듣지 않거나 미국의 이익에 벗어나게 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 법안을 미 하원에 주제로 내놓으면서 터키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은 터키에게 당근 및 채찍을 주면서 지랫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략적 무기인 셈이다. 그런데 그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에 대해 격렬하게 투쟁을 해왔다. 당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럽 주요 도시에 부임하고 있는 터키 외교관들은 축하 대신 위로 전화를 받았다 한다. 당시 터키 외교관들에게 유럽은 매우 위험한 근무지였다. 특히 아르메니아의 극우단체인 아살라(ASALA)는 유럽 각국에 암약하여 포진하면서 표적 테러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놓고 표적 테러를 저지르는데도 유럽 각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 유럽은 "러소포비아" 못지 않게 "투르크포비아"를 갖고 있다. 지금은 "러소포비아"에 묻혀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지만 당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 내에서 "투르크포비아"는 엄청났다. 게다가 7~80년대에 중동에서 잇달아 전쟁이 벌어지고 오일쇼크까지 터지면서 중동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그러한 반감은 엉뚱하게도 터키에도 옮겨 붙었다. 무슬림들이 많고 중동하고의 관계 또한 깊다는 것에서 나타난 일종의 기피현상인 것이다. 이 때 아르메니아 극우단체 아살라에게 희생된 터키 외교관만 해도 46명에 달했다. 그만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있어 터키는 학살 주범으로 마땅히 응징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면서 터키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최종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이처럼 테러를 통해 아르메니아의 슬픈 과거사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오히려 악수를 갖고 왔다. 이들 극우주의자들은 테러리스트들로 국제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자 아르메니아 정부가 나서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향으로 전략을 선회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 전략도 이전에 펼친 테러 문제 때문에 상당수의 국가들이 아르메니아를 기피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에 대해 파악해보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에서 아르메니아 정교도들은 밀레트(Millet)라는 투르크식 소수민족 공동체 내 총대주교가 관할권을 행사했고 이는 종교적 자유와 민족적 자치를 함께 누렸었다. 애초부터 무슬림이 아니라고 이들은 탄압 받지 않았던 것이다. 1876년 9월 주 이스탄불 영국 대사 엘리어트 경이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에 의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히려 일반 터키인들보다 부유하며, 월등히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 국가 건설을 원했다. 오스만 제국과 무장 투쟁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독립을 추구했다. 특히 1877~1878년 사이에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점령하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를 지원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배신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아르메니아 독립 국가 건설을 노리는 민족주의 단체들이 등장했고, 훈체크라던지, 다시나크파 같은 극우 정당들도 결성되어 터키인들을 약탈하고 강간하며 학살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들이 했던 참혹한 행위는 유럽 내 아르메니아계와 리버럴 세력들에 의해 철저히 묻혀졌다. 이들은 터키 내 에르주룸, 비트리스, 반, 엘라지으, 디야르바크르, 시바스 등 동부 지역 6개 주를 아르메니아 민족국가의 영토로 규정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같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쿠르드족이 아르메니아에 반발했다. 해당 지역들은 아르메니아보다 쿠르드족이 이미 먼저 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들은 쿠르디스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최초의 무장 투쟁은 1890년 에르주룸에서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의 주요 시설과 시민들을 향해 테러를 저질렀고 이 같은 행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쿠르드족과도 대립형세를 띄게 되었으며 쿠르드족들은 그 사이에 민병대를 조직해 아르메니아와 맞서 싸웠다. 당시 이 6개 주의 인구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5% 정도였고 상당수가 쿠르드족이었기에 숫적에서 열세를 보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오스만 정부가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풍족한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투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터키인들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로 인해 러시아-오스만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대한 불신은 크게 확산되면서 불행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주제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는 上, 中, 下편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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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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