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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上편
    오스만투르크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장시간 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이슈였다. 특히 19세기 말,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기부터 터키 공화국이 탄생한 1923년까지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은 조직적인 학살을 당하거나 강제로 추방되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약탈로 인해 굶어 죽거나 고문 및 납치 등의 방식으로 조직적인 인종청소를 당했다는 주장이 대학살 관련 문제의 핵심이라 볼 수 있겠다. 세계 각국의 아르메니아 관련 단체들은 우크라아나 홀로도모르 단체보다 더 숫자가 많고 매우 조직적이다. 이들은 국제사회를 움직여 제노사이드 인정과 더불어 터키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아르메니아인들을 약탈한 재산을 반환해달라는 내용의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도 걸었고 그로 인한 보상 등을 요구하여 터키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최근에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단체들과 연합하여 러시아도 주적으로 몰아가며 러시아 정부에도 터키에 걸고 있는 내용과 같은 내용으로 러시아에 우크라이나에 대해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던 홀로도모르는 내용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기에 이는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반면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에 사과를 전혀 하지 않은게 아니다. 그동안 터키인과 자국 내 아르메니아인 간에 발생했던 유혈 충돌과 대규모 희생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거듭 사과했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자행되었던 계획적, 혹은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시민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적국이었던 러시아에 동조하고 오스만 제국을 배신하여 독립하려던 반란으로 인한 불가피했던 조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근거로 아르메니아인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터키인 희생자도 40만 명에 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직접적인 연결이 아니라 이를 정치적으로 쟁점화하는 것으로 끌고 간다는 것에서 이는 순수한 의미의 사과와 보상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터키를 고립시키고 악화시키려는 타 국가들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EU 국가들이고 특히 프랑스의 반발이 매우 심했다. 그 이유 프랑스에 아르메니아계 집단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의 요구로 인해 프랑스 의회는 2012년 1월,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 형사 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학살을 부정하면 처벌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에서 오랜 투쟁으로 인한 승리를 자축하고 이를 만끽했지만, 반면 터키와 프랑스 관계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 법의 발효로 인해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발언이나 표현을 할 경우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터키 전역에선 반(反) 프랑스 시위가 벌어졌으며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등을 식민 통치하면서 수백 년 동안 아랍인들을 박해하고 학살을 저질렀던 프랑스의 위선과 이들의 역사적인 과오를 규탄했다. 2015년에는 터키-아르메니아 학살의 100주기가 되던 해였다. 당시 터키에게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전 세계 곳곳에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었고 이는 유럽 의회가 공식적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도 러시아의 학살로 규정하고 이를 비난하는 결의 안까지 통과시키려 한다. 그렇게 따지면 영국의 아일랜드 대기근, 인도 뱅골 대기근 등으로 인한 아사 또한 학살로 규정해야 하며 프랑스가 저지른 알제리 대학살, 베트남 대기근도 학살로 규정하여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학살에는 EU 자체에서 언급이 금기어회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불어 EU의 위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따라서 23개 국가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국제 사회는 아르메니아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국제 사회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해 EU와 영국, 이스라엘이 들어간 23개국이다. 그리고 미국은 나토의 동맹국이자 중동에서 자국 이익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는 터키를 자극시키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국제 지정학, 전략적인 압박으로 이용하기 위해 법안 통과를 미루고 있다. 만약 터키가 미국의 말을 듣지 않거나 미국의 이익에 벗어나게 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 법안을 미 하원에 주제로 내놓으면서 터키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은 터키에게 당근 및 채찍을 주면서 지랫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략적 무기인 셈이다. 그런데 그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에 대해 격렬하게 투쟁을 해왔다. 당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럽 주요 도시에 부임하고 있는 터키 외교관들은 축하 대신 위로 전화를 받았다 한다. 당시 터키 외교관들에게 유럽은 매우 위험한 근무지였다. 특히 아르메니아의 극우단체인 아살라(ASALA)는 유럽 각국에 암약하여 포진하면서 표적 테러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놓고 표적 테러를 저지르는데도 유럽 각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 유럽은 "러소포비아" 못지 않게 "투르크포비아"를 갖고 있다. 지금은 "러소포비아"에 묻혀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지만 당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 내에서 "투르크포비아"는 엄청났다. 게다가 7~80년대에 중동에서 잇달아 전쟁이 벌어지고 오일쇼크까지 터지면서 중동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그러한 반감은 엉뚱하게도 터키에도 옮겨 붙었다. 무슬림들이 많고 중동하고의 관계 또한 깊다는 것에서 나타난 일종의 기피현상인 것이다. 이 때 아르메니아 극우단체 아살라에게 희생된 터키 외교관만 해도 46명에 달했다. 그만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있어 터키는 학살 주범으로 마땅히 응징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면서 터키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최종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이처럼 테러를 통해 아르메니아의 슬픈 과거사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오히려 악수를 갖고 왔다. 이들 극우주의자들은 테러리스트들로 국제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자 아르메니아 정부가 나서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향으로 전략을 선회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 전략도 이전에 펼친 테러 문제 때문에 상당수의 국가들이 아르메니아를 기피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에 대해 파악해보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에서 아르메니아 정교도들은 밀레트(Millet)라는 투르크식 소수민족 공동체 내 총대주교가 관할권을 행사했고 이는 종교적 자유와 민족적 자치를 함께 누렸었다. 애초부터 무슬림이 아니라고 이들은 탄압 받지 않았던 것이다. 1876년 9월 주 이스탄불 영국 대사 엘리어트 경이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에 의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히려 일반 터키인들보다 부유하며, 월등히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 국가 건설을 원했다. 오스만 제국과 무장 투쟁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독립을 추구했다. 특히 1877~1878년 사이에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점령하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를 지원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배신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아르메니아 독립 국가 건설을 노리는 민족주의 단체들이 등장했고, 훈체크라던지, 다시나크파 같은 극우 정당들도 결성되어 터키인들을 약탈하고 강간하며 학살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들이 했던 참혹한 행위는 유럽 내 아르메니아계와 리버럴 세력들에 의해 철저히 묻혀졌다. 이들은 터키 내 에르주룸, 비트리스, 반, 엘라지으, 디야르바크르, 시바스 등 동부 지역 6개 주를 아르메니아 민족국가의 영토로 규정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같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쿠르드족이 아르메니아에 반발했다. 해당 지역들은 아르메니아보다 쿠르드족이 이미 먼저 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들은 쿠르디스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최초의 무장 투쟁은 1890년 에르주룸에서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의 주요 시설과 시민들을 향해 테러를 저질렀고 이 같은 행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쿠르드족과도 대립형세를 띄게 되었으며 쿠르드족들은 그 사이에 민병대를 조직해 아르메니아와 맞서 싸웠다. 당시 이 6개 주의 인구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5% 정도였고 상당수가 쿠르드족이었기에 숫적에서 열세를 보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오스만 정부가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풍족한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투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터키인들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로 인해 러시아-오스만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대한 불신은 크게 확산되면서 불행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주제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는 上, 中, 下편으로 연재됩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4
  • 21세기에 15~16세기 대항해시대 때로 회귀하고 있는 집단 서방
    바스코 다 가마는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탐험가로 유럽인 최초로 유럽-인도 직항로를 발견한 사람이자, 이후 유럽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 정책의 시작점을 주도한 인물이다. 바스코 다 가마와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 두 사람으로 인해 세계의 흐름은 완전히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특히 포르투갈의 영웅이지만 도중에 만난 아라비아 선박의 비 무장 선원들을 몰살시키고, 교역을 거부하는 인도의 도시들은 무차별적으로 폭격했으며 시민들의 손과 발, 귀를 자르는 등 잔혹한 면모도 보였다. 행적을 살펴보면 인도인이나 아라비아 인의 입장에서는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해적이자 약탈자였으며 사악한 살인마였다. 특히 미리(Miri) 학살 사건과 커리(Curry) 학살 사건과 같은 학살 행적으로 보면 기독교인을 빙자해 패악을 저지르는 적그리스도에 가까운 인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돈이나 패권 같은 목적을 위해 사람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가학적인 학대를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유럽인으로서 아시아를 공격한 최초의 식민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로도 불린다. 일찍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후추를 필두로 한 향신료들은 유럽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향신료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후 아라비아, 이집트나 레반트, 그리고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의해 유럽으로 수입되어 다른 유럽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향신료가 워낙 값이 비싸 부유한 귀족들만이 이를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동지중해 지방을 통일한 뒤 그렇지 않아도 비쌌던 향신료의 가격은 더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직접 향신료 산지로 가서 직거래를 하면 엄청난 이윤을 남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콜럼버스가 항해하게 된 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을 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는 달리 포르투갈은 잘 알고 있던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를 가려고 했다. 인도를 찾아 이탈리아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교역하려 한 것이다. 이는 엔리케 왕자 이래 수십 년간 추진되던 중요한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를 제독으로 삼아 4척의 범선과 170여 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하였다. 이 함대는 8년 전에 발견된 아프리카 대륙 남쪽의 희망봉을 돌아, 1498년 5월 드디어 인도 캘리컷 항구에 도착하면서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동쪽 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당시 바스코 다 가마는 여행기를 서술했는데, 인도에 도착할 무렵에 그들을 처음 반겨준 것은 현장에 있던 튀니지 출신 아라비아 인 상인 2명이었다. 이들이 아라비아 상인들이 유럽인이 온 것을 보고 어떻게 인도까지 왔는지 의아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항해 때는 인도에서 3개월가량 머물렀지만, 코지코드 왕국의 군주이자 지금의 캘리컷 항의 통치자 자모린(Jamorin)은 유럽인들과 그들의 상품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인도인이나 아라비아 상인들이 보기에는 탐험대의 무역 상품들이 한심해 할 정도로 저 품질이었고 큰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모린은 바스코 다 가마가 진상한 외투나 모자, 설탕을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이와 같은 것을 버리고 향신료를 사고 싶으면 황금을 가져오라 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도는 풍부한 면화 공급에 더해 기원전부터 이어 내려져온 유서 깊은 방직, 염색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인도는 세계 최고의 면직물을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특히나 캘리컷은 영국과 유럽에 인기가 많은 캘리코 면직물의 본 고장이니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면직물 이 외에도 당시의 유럽 문명은 선박과 화약 무기 등을 제외하고는 중동이나 인도에 비해 기술력이 압도적이지 못했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 포르투갈이 가져온 상품을 본 자모린 입장에서는 이것이 무역이라기보다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탐험대가 보이면 격렬한 증오심을 보이며 탐험대를 견제하며 방해 공작을 펼쳤다. 그로 인해 통상 교역을 하는데 실패했고 함대들은 어쩔 수 없이 소량의 상품만을 싣고 8월경에 귀국에 나서 1499년 9월, 마침내 리스본으로 귀국했다. 최근 예멘 후티 군대에 의해 홍해가 차단당하고 있다. 후티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을 이유로 홍해 인근을 지나는 상선을 잇따라 공격하면서 글로벌 해상 물류가 큰 차질을 빚을 우려가 커지고 있다. 후티의 군대가 상선을 공격하는 예멘 앞 바다의 바브 알 만다브 해협은 중동과 유럽을 잇고 수에즈 운하와 연결된 주요 해상 수송로이다. 세계 해상 컨테이너 물동량의 약 30%가 홍해를 지나고 있다. 덴마크 국적 세계 최대 해운사 머스크는 “수에즈 운하를 지나 예멘 앞 바다(바브 알 만다브 해협)를 통과할 예정이던 모든 선박에 이 지역 운항을 일시 중단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밝혔다. 독일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하파크-로이트도 최소 18일 동안 이 회사 선박의 홍해 통과를 중단키로 했고, 스위스 MSC와 프랑스 CMA-CGM 등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물동량 기준 세계에서 유명한 글로벌 해운사로, 전 세계 컨테이너 해상 물동량의 약 53%를 차지하고 있다. 후티의 군대가 지난 15일 머스크의 화물선 ‘머스크 지브롤터’와 MSC의 ‘팔라티움 3′ 화물선, 하파크-로이트의 컨테이너 함선 ‘알 자스라’ 호를 미사일과 무인기로 공격한 것에 따른 조치다. 후티 군대는 지난 10월 7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발발 이후 홍해 인근을 지나는 상선을 10여 차례 공격했다. 하루 동안 상선 3척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 아시아에서 만든 상품을 실은 컨테이너 함선과 중동 걸프만에서 나온 원유를 나르는 유조선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갈 때 주로 뱃길이 짧은 수에즈 운하를 지나왔다. 하지만 후티의 상선 공격이 격화되면서 주요 해운사들은 자사 선박들을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앞을 통과하는 우회로로 보내기로 했다. 이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뱃길이 5,000㎞ 이상 길어지고, 화물 도착일도 7~10일 가량 늦어질 수 있다고 해운 업계는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해운로는 일찍이 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한 항로와 유사하다. 집단 서방은 21세기에 15~16세기 대항해시대 때로 회귀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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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09
  • "아랍의 봄" 사건으로 유럽이 받은 영향, 아랍계 민족들의 유럽 정착 및 난민화
    "아랍의 봄"이 유행할 때 과거 북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을 식민 지배했고 현재도 가장 지분이 많은 프랑스는 아랍의 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불안은 옛 종주국으로써 북아프리카 각 지역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게도 이와 같은 사태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끝없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들이 아랍의 봄 혁명에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프랑스 내부도 시끄러워질 수 있는 요지가 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극우파가 득세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자국 국민들의 이권을 먼저 보호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민군들과 함께 카다피의 독재 정권을 끝내고 민주화의 첫 단계에성공을 거두었으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1차 투표에서는 28.6% 대 27.1%로 패배했으며, 2차 투표에서도 48.3%로 51.7%의 올랑드에게 3.4%, 110만표차로 패배했다. 사르코지는 임기 중에 사망한 조르쥐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 4년 10개월, 1969~1974)와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에게 패배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7년 재임)에 이어 30년 만의 단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퇴임했다. 게다가 전임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까지 프랑수아 올랑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르코지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여기에 카다피 사건에 대한 몇몇 불편한 진실까지 드러난 부분이 결정적으로 사임한 원인이 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올랑드 역시 유럽의 경제위기인 유로화 사태가 계속 되는 상태에서 말리 내전에 개입한 것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크게 작용했으며, 정권의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는 등 제대로 된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국가들도 큰 영향을 받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도 영향을 받아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이탈리아의 경우,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더불어 계속되어 발생하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정계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베틀루스코니는 사생활 보호법을 개정해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예를 들어 사법당국이 녹취한 내용을 신문이나 웹사이트에 올려 사익에 반하거나 편견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면 48시간 이내에 수정해야 하고 여기에 불응하면 구금 또는 벌금형에 처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쏟아낸 막말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모든 이탈리아 시민들이 이를 페러디하여 수많은 조롱이 섞인 광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이탈리아 내에서 경제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던데다 베를루스코니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채 수익률은 7일 연 6.77%까지 치솟았다. 이어 정부 부채는 2조 6000억 달러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아 파산 위기에 놓이자 로마에 1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폭동 직전까지 가게 된다. 결국 2011년 11월 1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하야하여 마리오 몬티(Mario Monti) 총리의 중도 내각이 들어섰고, 뒤이은 선거에서 이탈리아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비록 상원 과반에 실패하여 옛 집권당과의 연정은 불가피했지만 베를루스코니는 그 동안 스스로 저지른 불법행위로 확실하게 제명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후에 튀니지에서 150km 떨어져 있는 람페두사 섬에 소요 사태를 피해 들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이들에 대한 처우에 상당한 고민에 빠졌다. 특히 2011년 리비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보트 피플들을 강제 송환시키던 리비아 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아프리카 난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영국과 독일은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아랍의 봄 여파로 인해 시리아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면서 대량의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고 이는 브렉시트에 이어서 유럽 연합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유로 경제권의 불균형으로 위태로운 상황이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EU의 붕괴론까지 부상하며 아랍의 봄 여파가 유럽에서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랍의 봄은 러시아와 CIS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00년대 혁명이 있었던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및 인근 국가들도 전면적으로 국가 내부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러시아에서도 브콘탁테를 통하여 반정부 시위들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비리 등이 심했다. 그러나 이 아랍의 봄의 영향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2014년 유로 마이단 사태를 일으켜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중앙아시아 건너 카스피 해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반 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며 남부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아르메니아에서도 2008년부터 부정선거로 의혹받았던 샤르키샨 전 총리에 대한 불만과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총리의 독재를 끝내는데 실패했다. 처음에는 민주화를 기치로 중동의 독재자들이 붕괴되어 가는 민주주의의 승리에 응원을 보내던 서구권은 이후 생각보다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가 독재를 대신하고 이들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신(新)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충격과 공포로 난민들과 중동의 민중들을 차별하게 되고, 과거 동구권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을 지지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었던 것과 다르게, 독재 타도를 외치는 반군에 대해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반군을 지원하는 물자와 무력 개입, 정치적인 압력을 동원하여 지원해준 다음 민주주의 선거로 수장이 뽑힐 정부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친(親) 서방 정권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반대로 샤리아를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의 성격을 띄고 있다면 세속주의 친(親) 서방 정권인 독재자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성립되었다. 이 아랍의 봄 사태는 유럽이 갖고 있던 냉전 시대부터 이어온 민주주의의 우월성이라는 믿음에 크게 생체기를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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