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0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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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코 다 가마는 대항해시대 포르투갈의 탐험가로 유럽인 최초로 유럽-인도 직항로를 발견한 사람이자, 이후 유럽의 아시아에 대한 식민 정책의 시작점을 주도한 인물이다. 바스코 다 가마와 아메리카로의 신항로를 개척한 콜럼버스 두 사람으로 인해 세계의 흐름은 완전히 변화하기에 이르렀다. 유럽, 특히 포르투갈의 영웅이지만 도중에 만난 아라비아 선박의 비 무장 선원들을 몰살시키고, 교역을 거부하는 인도의 도시들은 무차별적으로 폭격했으며 시민들의 손과 발, 귀를 자르는 등 잔혹한 면모도 보였다. 행적을 살펴보면 인도인이나 아라비아 인의 입장에서는 잔혹하고 탐욕스러운 해적이자 약탈자였으며 사악한 살인마였다. 특히 미리(Miri) 학살 사건과 커리(Curry) 학살 사건과 같은 학살 행적으로 보면 기독교인을 빙자해 패악을 저지르는 적그리스도에 가까운 인성을 가진 인물이었다. 돈이나 패권 같은 목적을 위해 사람을 살해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는 가학적인 학대를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했다. 따라서 유럽인으로서 아시아를 공격한 최초의 식민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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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희망봉 무역 선단 우회 경로,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일찍이 고대 로마 시대부터 르네상스 시대까지 후추를 필두로 한 향신료들은 유럽 최고의 인기 상품이었다. 향신료들은 인도와 동남아시아에서 생산된 후 아라비아, 이집트나 레반트, 그리고 지중해를 거쳐 베네치아, 피렌체, 제노바 등의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의해 유럽으로 수입되어 다른 유럽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관심과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향신료가 워낙 값이 비싸 부유한 귀족들만이 이를 즐길 수 있었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동지중해 지방을 통일한 뒤 그렇지 않아도 비쌌던 향신료의 가격은 더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유럽인들은 직접 향신료 산지로 가서 직거래를 하면 엄청난 이윤을 남을 것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콜럼버스가 항해하게 된 계기와 비슷하다. 그러나 서쪽으로 가면 인도가 나타날  것이라는 생각을 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와는 달리 포르투갈은 잘 알고 있던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를 가려고 했다. 인도를 찾아 이탈리아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통하지 않고 직접 교역하려 한 것이다. 이는 엔리케 왕자 이래 수십 년간 추진되던 중요한 국책사업이기도 했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를 제독으로 삼아 4척의 범선과 170여 명의 선원으로 구성된 함대가 리스본을 출발하였다. 이 함대는 8년 전에 발견된 아프리카 대륙 남쪽의 희망봉을 돌아, 1498년 5월 드디어 인도 캘리컷 항구에 도착하면서 유럽에서 인도로 가는 동쪽 항로를 개척하게 된다. 당시 바스코 다 가마는 여행기를 서술했는데, 인도에 도착할 무렵에 그들을 처음 반겨준 것은 현장에 있던 튀니지 출신 아라비아 인 상인 2명이었다. 이들이 아라비아 상인들이 유럽인이 온 것을 보고 어떻게 인도까지 왔는지 의아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첫 번째 항해 때는 인도에서 3개월가량 머물렀지만, 코지코드 왕국의 군주이자 지금의 캘리컷 항의 통치자 자모린(Jamorin)은 유럽인들과 그들의 상품에 대해서 크게 관심이 없었다. 인도인이나 아라비아 상인들이 보기에는 탐험대의 무역 상품들이 한심해 할 정도로 저 품질이었고 큰 이익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모린은 바스코 다 가마가 진상한 외투나 모자, 설탕을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는 이와 같은 것을 버리고 향신료를 사고 싶으면 황금을 가져오라 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도는 풍부한 면화 공급에 더해 기원전부터 이어 내려져온 유서 깊은 방직, 염색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인도는 세계 최고의 면직물을 생산하는 지역이었다. 특히나 캘리컷은 영국과 유럽에 인기가 많은 캘리코 면직물의 본 고장이니 더욱 말할 것도 없다. 면직물 이 외에도 당시의 유럽 문명은 선박과 화약 무기 등을 제외하고는 중동이나 인도에 비해 기술력이 압도적이지 못했다. 그러한 연유로 인해 포르투갈이 가져온 상품을 본 자모린 입장에서는 이것이 무역이라기보다는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던 것이다. 게다가 이미 지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아라비아 상인들이 탐험대가 보이면 격렬한 증오심을 보이며 탐험대를 견제하며 방해 공작을 펼쳤다. 그로 인해 통상 교역을  하는데 실패했고 함대들은 어쩔 수 없이 소량의 상품만을 싣고 8월경에 귀국에 나서 1499년 9월, 마침내 리스본으로 귀국했다.


최근 예멘 후티 군대에 의해 홍해가 차단당하고 있다. 후티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공격을 이유로 홍해 인근을 지나는 상선을 잇따라 공격하면서 글로벌 해상 물류가 큰 차질을 빚을 우려가 커지고 있다. 후티의 군대가 상선을 공격하는 예멘 앞 바다의 바브 알 만다브 해협은 중동과 유럽을 잇고 수에즈 운하와 연결된 주요 해상 수송로이다. 세계 해상 컨테이너 물동량의 약 30%가 홍해를 지나고 있다. 덴마크 국적 세계 최대 해운사 머스크는 “수에즈 운하를 지나 예멘 앞 바다(바브 알 만다브 해협)를 통과할 예정이던 모든 선박에 이 지역 운항을 일시 중단하라는 지침을 내렸다”고 밝혔다. 독일 최대 컨테이너 선사인 하파크-로이트도 최소 18일 동안 이 회사 선박의 홍해 통과를 중단키로 했고, 스위스 MSC와 프랑스 CMA-CGM 등도 비슷한 결정을 내렸다. 이들은 물동량 기준 세계에서 유명한 글로벌 해운사로, 전 세계 컨테이너 해상 물동량의 약 53%를 차지하고 있다.


후티의 군대가 지난 15일 머스크의 화물선 ‘머스크 지브롤터’와 MSC의 ‘팔라티움 3′ 화물선, 하파크-로이트의 컨테이너 함선 ‘알 자스라’ 호를 미사일과 무인기로 공격한 것에 따른 조치다. 후티 군대는 지난 10월 7일 하마스-이스라엘 전쟁 발발 이후 홍해 인근을 지나는 상선을 10여 차례 공격했다. 하루 동안 상선 3척을 공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국이나 중국, 일본 등 아시아에서 만든 상품을 실은 컨테이너 함선과 중동 걸프만에서 나온 원유를 나르는 유조선들은 유럽이나 미국으로 갈 때 주로 뱃길이 짧은 수에즈 운하를 지나왔다. 하지만 후티의 상선 공격이 격화되면서 주요 해운사들은 자사 선박들을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 앞을 통과하는 우회로로 보내기로 했다. 이에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뱃길이 5,000㎞ 이상 길어지고, 화물 도착일도 7~10일 가량 늦어질 수 있다고 해운 업계는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그 해운로는 일찍이 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한 항로와 유사하다. 집단 서방은 21세기에 15~16세기 대항해시대 때로 회귀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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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15~16세기 대항해시대 때로 회귀하고 있는 집단 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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