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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럽의회 선거 결과, 마크롱 대통령의 조기 총선 카드는 독배인가 아니면 승부수인가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유럽의회 선거는 유럽 연합회원국들이 자국의 선거법에 따라 정당에 투표하며, 그 결과에 따라 각 회원국은 인구에 비례해서 할당된 의석수 내에서 당선인을 배분해 유럽의회 의원을 선출한다. 프랑스의 경우에 할당된 의원 수는 총 720석 중 81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당 지지율인데, 프랑스 집권 여당인 중도성향의 자유당 그룹에 속하는 ‘르네상스당’은 약 14.5% 정도를 득표했던 반면, 극우 성향의 ‘정체성과 민주주의’에 속하는 ‘국민연합’은 약 31.4% 정도를 득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준으로 총선을 생각해 보면, 집권 여당은 전체 하원 의석 577석 중 현재 249석이니까, 그 절반 정도인 125∼155석 정도가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국민연합은 현재 89석보다 150석 정도가 많은 235∼265석 정도가 될 것이다. 원래 정치 일정대로 총선이 실시된 경우에, 집권 여당은 완패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각국 집권당에 관한 중간평가의 성격이 강하다. 마크롱 대통령이 속해 있는 제3당인 중도 자유당 그룹은 현재 102석에서 79석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극우 정당인 정체성과 민주주의가 현재 49석에서 58석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여기에 이탈리아의 멜로리 총리가 속하는 극우 정당인 ‘이탈리아 형제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유럽의 보수와 개혁’이 현재 69석에서 73석으로 늘어나게 되면, 이 두 정치 그룹의 예상 의석수는 합쳐서 128석이 되기 때문에, 제3당이 자유당 그룹을 앞지르게 될 것이다. 거기에 무소속과 기타 정당의 의석수가 100석 정도로 극우에 가깝다고 하면,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극우파의 약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러한 결과를 인정하면서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카드를 제시했다. 프랑스의 의회해산권이 대통령에게 있으므로,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선택권을 돌려주면서 표심의 결과에 따르려는 것이다. 그런데 외견상으로 이것은 분명히 ‘국민연합’의 허를 찌른 것이다. 르펜은 유럽의회 선거 결과의 기세를 몰아 원래 정치 일정대로 진행하게 되면, 2027년 4월에 대통령 선거에서 2022년에 패배를 설욕하게 되고, 그해 6월에 총선이 실시될 것이니까, 총선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정치 상황으로 보아 이 시나리오는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이 원래의 정치 일정을 뒤집어서 3년이나 앞당겨서 조기 총선을 실시하게 되면, 그 결과에 따라 르펜도 대통령 선거 때까지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변수들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현재 국민연합의 대표인 바르델라도 현재는 르펜과 함께 하지만, 그 결과에 따라 다른 행보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라면, 총리가 바르델라가 되면, 르펜은 대선후보로 나갈 것이다. 이것은 극우파가 대통령도 총리도 되는 최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중도성향으로 프랑스의 정치지형으로 보면 주류 정치와 다소 거리가 멀고 이른바 제3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1차 선거 결과로 24.01% 득표율을, 2차에서는 66.10% 득표율로 당선했다. 프랑스 대통령의 임기는 과거에 7년이었지만, 시락크 대통령 재임 때 임기를 5년으로 단축했고, 1번 연임은 가능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2022년에 1차에서 27.85% 득표율을 기록했고, 2차에서는 58.54% 득표율로 재선으로 당선했다. 이러한 양상으로 보면 마크롱 대통령은 결선에서 표심을 모으는데 분명히 일가견(一家見)이 없지는 않다. 사실 그는 제3의 길을 지향하다 보니, 자신의 취약한 지지기반으로 인해 때론 좌충우돌과 돌출발언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이번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카드는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녹록하지 않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극우파가 약 29.5% 지지율을, 좌파가 약 18.5% 지지율을, 중도파가 약 18% 지지율을 보인다. 이번에 마크롱 대통령의 총선 조기 실시에 관해 프랑스의 원로정치인들도 극우파의 집권을 걱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지금과 같은 여세로 극우파에게 집권의 기회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거기에 정통 우파인 ‘공화당’의 시오티 대표가 ‘국민연합’과 동맹을 제안했다가, 제명 위기로 번졌다. 아무리 그대로 나치독일에 맞서 드골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는 정통우파 정당의 대표가 극우파인 ‘국민연합’과 손을 잡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개인적 의견이라고 해도, 극우파와 협력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금기를 깬 것은 정도(政道)를 넘어섰다는 당 안팎에서 강한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초라한 공화당의 현재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좌파 연합(‘굴복하지 않은 프랑스’,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도 공천 문제로 균열의 조짐이 벌써 나타나기도 한다. 극우파에 맞서 4개의 연합체로 이루어진 좌파 연합은 극좌 성향의 멜랑숑 대표가 온건파를 공천대상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내분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은 프랑스 현재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있어 많은 문제가 정치적으로 있지만, 그래도 극우파 집권만은 안 된다는 생각에 전국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수십만의 시위 인파가 반극우세력 연대의 물결로 가득 채우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러한 점에서 일종의 도박과 같은 정치적 승부수를 과감하게 그리고 빨리 던진 것은 직접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의 하원 선거(총선)에서 중도파를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물론 마크롱 대통령으로서는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라는 카드 이외에 다른 마땅한 카드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집권 여당의 의석수는 총 577석 중 250석으로 야당 전체가 327석보다 적다. 그러다 보니 각종 정부 정책이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중도파가 그동안에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손익계산만을 분주히 했을 뿐,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성과 성찰이 우선 필요하다.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것은 현재 집권 세력이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비전 그리고 국민의 기대에 부합하는 신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각종 개혁과제와 경제침체 등등으로 인한 국민의 실망감과 분노, 젊은 층들의 미래에 관한 절망감 때문이다. 또 거기에 편승해서 포퓰리즘적인 정책 남발로 극우파가 표심을 파고들면서, 마치 금방이라도 자신의 정책이 수행될 수 있는 것처럼, 표심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극단주의가 득세하게 되면, 그 역풍은 누구도 어떤 세력도 결코 막을 수 없게 된다. 또 극단주의가 프랑스적인 정서와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프랑스사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프랑스 국민은 마크롱 대통령과 여당을 지지해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치독일의 치욕과 악몽을 경험했기 때문에, 극우파의 집권만은 안 된다는 생각으로 거리에 나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극단주의란 결국 서로를 스스로 파멸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취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조기 총선을 앞두고 각 정파는 합종연횡을 통해 의회 권력에 서로 다가가려고 하지만, 누가 갈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프랑스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만일 ‘대이변’이 일어날 경우, 프랑스는 격동에 휩싸일 것이고, 마크롱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에 상당한 사임 압박에 더욱 시달릴 것이다. 현재의 조기 총선으로 인한 일시적 혼란보다 더 큰 혼란이 벌어진다면, 사실 극우파는 오히려 역풍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극우도 극좌도 싫다면, 이번 총선의 투표가 최선도 최악도 아니라면, 결국 프랑스 국민은 차악(遮惡)의 선택권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거기에 마크롱 대통령의 어설프지만, 현재로서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카드가 독배도 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아마도 마크롱 대통령은 독배를 마신 이후 시간이 좀 지나서 독배였음을 알게 될 수도 있지만, 이와 반대로 처음부터 독배가 아니었는데, 마크롱 자신이 독배로 먼저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든 이번 프랑스 조기 총선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볼 일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19
  •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어색한 만남으로 인한 빛바랜 기념식
    1944년 6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상륙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나치 독일에 맞서 유럽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이었다. 프랑스 북서 쪽의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와이트섬에서 보면,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탕탱반도와 오른 강을 따라 캉을 중심으로 하는 바스노르망디 지역과 세느강과 외르강을 끼고 루앙을 중심으로 하는 오트 노르망디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는 두 지역이 병합되어서 캉에는 지방의회가 있고, 루앙에는 도청이 있다. 이번에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노르망디의 생 로랑 쉬르 메르(칼바도스 주의 지역 공동체)를 방문했고, 그가 연설한 곳은 이른바 프앙테 뒤 오크인데, 이곳은 약 80 킬로미터의 노르망디 해변에서 보면 30 미터 길이의 절벽이다. 그 당시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상륙작전을 위해 노르망디 해변을 5개의 해변으로 나누어서 각각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유타 해변, 오마하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스워드 해변이라고 명명했다. 프앙테 뒤 오크는 오마하 해변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6.4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나치 독일은 이른바 대서양 방벽의 일부로 콘크리트 구조물과 해안포대를 통해, 이곳을 요새화했다. 미군은 이곳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인들의 피해가 컸다. 미군 225명 중 13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까닭은 미군이 장비를 상륙정에 싣고 해변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의 저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변에 상륙한 다음에 절벽을 오르면서도,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은 자유와 민주를 위해 침략에 맞설 것과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견제를 강조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서방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40년에 전에 연설했던 장소이기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견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연합국의 상당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러시아(당시에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최종적 승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초대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크롱 대통령도 그 당시에 러시아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회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행사에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역설적이다. 우크라이나는 그 당시에 나치독일에 협력했던 국가인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초청되고, 독일 숄츠 총리와 함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이번 기념식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물론 어떤 국자의 지도자를 기념식에 초청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최국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기념식의 원래 취지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나치 독일에 맞서 약 15만 명의 군인들이 전장에 투입되어 약 1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던 지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것은 승리를 기념하는 이벤트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치 독일과 같은 침략전쟁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 협상하고 중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각국 지도자들의 발언을 보면, 그것보다는 허울 좋은 추상적인 말로 그럴듯한 외교적 수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공통점이 있다면, 각국 지도자들이 대체로 낮은 지지율로 인해 내치에서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까지 실시된 유럽 의회 선거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마크롱 대통령이 사실 위험한 도박을 한 것인데, 파리 올림픽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 고육지책으로 제시한 비장의 카드였다. 극우파의 약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피로감과 더불어 인플레이션, 에너지 가격 인상, 반이민주의 정서, 실업률 증가 등등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표심으로만 보자면, 이번 기념식에서 각국의 지도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엘리트주의자들의 자화자찬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인데, 그들의 미래에 대해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울 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일이 반쪽짜리 행사로 만든 것은 어찌 보면 유럽이 처한 냉정한 현실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는 연합국으로 나치독일에 맞서 모두 함께 싸웠지만, 지금은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거나. 우크라이나에 지상군을 직접 파병하겠다거나, 혹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서방 무기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에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과연 유럽의 평화를 위한 지도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는가! 전쟁을 끝내고 중재하기 위한 중재도 협상도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정치적 발언이라 하는 것이 과연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가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의 피해만 극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뿐이다. 더 나아가 향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시간이 우크라이나 편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번 기념식에 참석해서 각국에 지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2년 전과 비교하면 사뭇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원 결정이 우크라이나의 현실적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는 우려의 시각도 많다. 오히려 그와 같은 지원 방안이 유럽 각국에게는 극우세력들의 부상으로 나타나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획기적 돌파구도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치열한 소모전과 공방전 그리고 이로 인한 막대한 인명피해만 커지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지점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것인지에 따라 독일군의 대응도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쪽으로 상륙할 경우에, 독일군은 3개의 보병사단과 다소 남쪽에 2개의 기갑 사단으로 방어해야 했다. 그런데 이 경우에 문제는 연합군이 독일 해공군보다 월등한 공중포격전의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해병대와 공수사단과 같은 특수부대원들의 상륙을 보병 위주의 독일군이 저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는 점이다. 또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우선 파리를 입성하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파 드 칼레에 주둔했던 독일군과 교전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은 됭케르트 철수 작전과 더불어 연합군의 반격을 위해 매우 중요했다. 독일은 이를 통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은 연합국 승리의 기념일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 행사로 변질이 되어 버렸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맹도 없고, 각국의 이익을 위해 합종연횡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명분과 도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또 그 결과가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고, 긴장감을 조장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거기에 편승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익계산만 하고 있을 뿐이다. 별로 표심에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 무능하다는 사실 밖에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자국으로부터도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지도자가 국제무대에서 과연 지도자로서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동안에 유럽연합의 두 축이었던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이제 역사의 엄정한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차후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매우 불확실하고, 좋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 프랑스는 독일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독일군의 후방을 괴롭혔고, 독일군의 수송과 보급을 차단하는 역할을 상당히 수행했다. 5년마다 열리는 이 기념식에서 개최국인 프랑스는 분명히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러나 이번처럼 반쪽짜리 기념행사는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더 나아가 국제적 위상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보다 퇴락의 폐허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 칼럼
    • Nova Topos
    2024-06-16
  • 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 사망 1주기 되는 오늘
    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이탈리아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가 오늘 오전 밀라노의 산 라파엘레 병원에 별세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만성 골수 백혈병(CML)에 따른 폐 감염으로 지난 4월 5일부터 45일간 이곳 병원에 입원했었다. 약간의 차도가 생겨 지난 달 5월 19일에 퇴원했다가, 최근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지병인 백혈병 악화에 따른 합병증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정치적인 행적으로보나 사생활적인 부분을 보면 그리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1994년부터 2011년까지 3기에 걸쳐 총리로 장기간 집권하며 이탈리아 현대사와 유럽 현대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그의 기행이 무엇이든, 부정부패를 많이 저질렀고 이탈리아의 경제를 파탄나게 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이탈리아 국민들에 있어 애증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던 마테오 렌치 전 총리도 그를 추모하며 트위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고, 또 미워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의 업적으로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스포츠, 텔레비전 등 이탈리아인의 삶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 이탈리아의 집권당인 FdI는 “우리는 그를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단력 있으며 높이 평가받는 인물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라며 “그의 가족에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현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또한 베를루스코니를 “투사”라고 칭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용기와 결단력이 그를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우리는 그와 함께 싸워 이기고, 패배하는 등 많은 전투를 치러왔고 그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함께 세운 목표를 지킬 것”이라며 작별을 고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끌었던 전진 이탈리아당은 “우리는 당신을 절대 보낼 수 없다”며 “안녕히 가세요 총리, 당신의 정치 공동체로부터”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귀도 크로세토 이탈리아 국방장관 또한 트위터를 통해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죽음은 “큰 빈자리를 남겼다”며 “한 시대가 지나가고,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나는 그를 매우 사랑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오랜 정치적 동지인 안토니오 타야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외교장관은 “슬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감사했다”고 애도했다. 베를루스코니와 경쟁했던 중도 좌파 민주당의 엘리 슐레인은 “모든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그의 정치적 비전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인간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한 사람에 대한 존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민주당을 대표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교통장관은 “오늘 위대한 이탈리아인이 우리에게 작별을 고했다”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 모든 분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오늘 위대한 친구를 잃었다”며 망연자실한 심정을 덧붙였다. 그가 행한 비행이나 기행에 비해 이런 정도를 평가와 애도를 받는다면 베를루스코니가 얼마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애증의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평생 욕 먹어도 모자랐을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베를루스코니는 악행도 무수히 남겼지만 업적도 그만큼 남겼던 유럽 현대사에 있어 "살아있는 고목이자 거물"이었다. 파올로 젠틸로니 유럽 집행위원회(EC) 재무장관 겸 전 총리는 “최근 수십 년간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별세했다”라고 애도했으며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에 대해 유럽의 위대한 정치인이고 정치의 '마지막 모히칸족' 중 한 명이었다"며 "베를루스코니가 권좌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탈리아에 좋은 일이었으며, 이탈리아 내정을 안정시키는 요인이었다." 라며 그를 추모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밀라노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병역기피를 한 것과 크루즈 함선에서 가수를 한 것을 제외하면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건설업 사장이 되어 밀라노 교외에 밀라노2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분양을 했는데 이게 대박나면서 건설 재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고, 당시 밀라노 시장인 베티노 크락시와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베티노 크락시는 그의 정치 스승이 된다. 이후 자유 라디오 운동에 큰 영감을 받아 방송 진출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1973년 텔레밀라노라는 케이블 방송사를 열어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1977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판결로 민영방송 금지조항이 폐지되자 방송사업을 더욱 확장해 지상파 방송사를 차리면서 언론계 재벌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해 시칠리아 마피아와의 연루설과 정경유착설 등 여러 구설수들이 있었지만 지주 회사 핀인베스트의 복잡한 지분관계로 인해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넘어갔다. 당시 이탈리아는 베를루스코니가 정계에 있기 전부터 이미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언론통제가 만연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에 타 군소 민영방송사(Rete4, Italia 1)들의 지분을 구입하여 최종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자신의 방송이 송출되는 광활한 방송망을 가지게 되면서 본격적인 언론계 재벌이 된다. 1983년 베를루스코니의 자금 지원을 받은 그의 정치적 스승인 베티노 크락시가 총리가 되자 베를루스코니는 이러한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방송 규제의 완화를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돈을 벌게 되었다. 방송 규제 완화 규정 중 일부가 로마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세의 확장이 주춤했었지만, 기민당과 사회당에 정치자금을 적절하게 제공했고 1990년 생방송 뉴스 프로그램 방영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거머쥐게 되는, 이른바 거물로써 출발이 이루어졌다. 1992년 마니 풀리테, 불법 정치 자금 사건으로 인해 베티노 크락시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몰락하게 되면서, 1994년 총선에서 좌익민주당의 집권이 유력해졌다. 이 때 베를루스코니는 전진 이탈리아당(Forza Italia)을 창당하고 직접 정치에 뛰어 들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비디오 민주주의라는 평이 나왔을 정도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방송망과 신문들을 총동원하여 기존의 사회당과 기민당 지지층을 대거 확보했고, 성공한 기업가 겸 A.C 밀란 축구 구단주로서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총선에서 승리했으며 우파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집권 이후에는 북부 동맹과의 불화가 있어 결국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고 1996년 총선에서 참패해버렸다. 그러나 자신의 주특기인 미디어를 이용해 좌익 민주당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끝에 2001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였다. 2기 집권 당시에는 이라크 전에 참전하는 문제와 RAI 장악 등으로 여러모로 평이 좋지 않았고, 경제 정책도 생각보다 큰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하여 이전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평을 받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1당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하였는데 2006년 총선에서 아깝게 패배해버렸지만 득표율이 1% 차이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2008년 총선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며 3선 총리가 되었다. 세 번째로 총리가 되자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의 인민을 창당해서 2개 당의 당 대표까지 역임했다. 3기 집권 내내 이탈리아 경제는 악화된 상태로 떨어졌고 청년 실업률은 30~40%대까지 치솟아 결국 2년 만에 총리직에서 퇴진했다. 2013년 의원 임기가 종료되자 자유의 인민당을 정리했다. 2017년 지방선거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의외로 선전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2018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는 극우파 북부동맹을 포함하는 중도-우파 연합을 맺어 선거에 임했다. 때마침 집권 중이었던 중도좌파 민주당이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의 집권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선거법을 개정하여 원내 1당에게 다수의석을 부여하는 방식의 선거법을 철폐하고 정당 연합도 표를 받을수있도록 선거법을 통과시켜 놓았다. 그러자 베를루스코니를 싫어하는 유권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루스코니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부활하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이나 많은 국민들에게 무능한 정치인을 넘어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다. 특히 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인 난니 모레티는 거의 마이클 무어가 조지 W. 부시를 싫어하는 수준으로 베를루스코니를 극혐하여 베를루스코니를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움배르토 에코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이 언론과 결합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예로 들기도 했다. 바티칸과 한 때의 동맹이었던 우파 정치인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여성편력 또한 대단하고 갖가지 망언을 아무렇지도 쏟아냈다. 그래도 그가 이탈리아 내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감성과 문화를 자극하는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 가(家)와 그의 친인척들이 이탈리아 민영 언론을 독과점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더불어 2013년 이후부터 시민결합을 지지해왔고 동성결혼에 있어서도 적극적 반대가 아닌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는 결국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갖은 기행과 비행을 저질렀지만 유럽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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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 EU 의회 선거 결과에 따라 국제정치의 다변화 가능성
    지난 6일부터 시작된 EU 의회 선거가 어제 9일에 끝나고 현재 개표 중에 있다. 지난 5년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브렉시트로 인해 탈퇴한 영국을 제외하고 EU에 속한 모든 국가가 치르게 된다. 이번 선거에는 영국의 탈퇴 이후, 처음 치뤄지는 선거라 EU 의회 내 회원국들의 할당 의석이 재조정되어 27석이 프랑스를 포함한 회원국들에 추가적으로 할당되었으며, 46석이 줄어들어 총 705석으로 줄어들었다. 일부 국가 출구 조사와 선거 전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1차 예측 결과를 발표한 것에 따르면 예상대로 극우 세력의 정당들이 크게 약진했다. 프랑스 EU 의회 선거 출구 조사 결과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약 32%의 득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으며 독일은 보수 성향 기독민주당(CDU), 기독사회당(CSU) 연합이 29.5%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독일대안당(AfD)이 상당한 선전을 보였다는 것에 있다. 이 정당은 EU 의회 선거를 앞두고 뇌물 스캔들과 나치 옹호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어 EU 의회 ID에서도 퇴출당했었지만 그래도 독일 국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유럽 내에서 우익 세력이 득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 극우파들은 타 지역들과 비교했을 때 보통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적 반공주의 좌익보다는 세속적인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나타난다. 물론 세속적 서양 극우파들도 기독교를 내세우는 경우도 많은데 대게 교리에 기반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세속적 기독교 정체성주의이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기민당이나 기사당이다. 다만 동유럽 지역과 일부 서유럽, 남유럽 나라들도 예외로 종교적 근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합쳐진 혼종 극우도 존재하지만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데도 유럽 내에서 이같은 극우세력들이 다시 환대 받는 이유는 정세 불안으로 인한 경제 악화, 그리고 이를 만회하지 못하는 기성 정권에 대한 불신과 이들의 무능에 대한 규탄, 그리고 책임 지지 못할 각종 포퓰리즘 정책과 더불어 리버럴리티들과 좌파 세력의 공조로 이루어진 무분별한 난민 입국, 그리고 최악의 물가 상승 등이 한꺼번에 겹쳐서 그렇다. 이러한 반(反) 이민주의는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고취로 이어지며 그로 인한 변형적인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이어진다. 물론 모든 정체성 정치가 극단주의와 결부되는 것 또한 아니지만 현재 같은 상황에서 충분히 극단주의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통해 여러 정체성의 특수성이 부각되면서 여론은 수많은 갈래로 분열한다. 이렇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각 집단은 극단주의화 될수록 유리하다. 특히 유럽에서 고조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극우 특유의 선민의식(Elitism)과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을 한꺼번에 주입시켜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Exclusion) 및 공격성(Aggression)을 발동시키고 선동하는 것에 특화된 방향으로 진화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의 일례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을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독일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당하며 막대상 배상금까지 떠 안게 된 독일은 모든 국민들이 좌절한 상태였고, 무능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나타나 자신들이 좌절하게 된 것에는 무능한 정부와 유태인들 때문이라는 인종적 배타성(Racial Exclusion)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피해의식들이 모여 또 다른 군중심리(Herd mentality)가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이는 강한 공격성(Aggression)을 띄게 되어 결국 유태인, 로마인(집시) 등의 타 인종, 민족 말살로 이어진다. 그 다음 상대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자신들, 독일인들에게 잊지 못할 좌절감을 안겨 준 영국, 프랑스 등의 외부세력이었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게 된 것은 좁게 보면 전범들인 나치와 히틀러의 광기이지만 그 광기를 불러 일으킨 것은 패전국인 독일을 아예 빈사 상태까지 압박하고 몰아갔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승전국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으로 볼 때, 자국민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이들은 좌익과 우익의 리버럴리티들, 현재 집권하고 있는 EU의 인사들이었다. 거기에 자국민들은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그들끼리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EU 각 국의 국민들은 우선 자국민들에 대한 복지와 복리, 그리고 자국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원하고 있다. 더 이상의 난민을 거부하며 자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빠른 종식과 더 이상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중단까지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유럽의 어려움에 대한 타개 책에서 이 모든 상황이 러시아 때문이라 상정하고 국민들에게 이를 설득시켜 러시아에 대한 적대 및 히틀러 때처럼 전쟁을 획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히틀러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부가 나치당에 의해 안정되자마자 불만의 화살을 영국과 프랑스에 겨누었던 것처럼 모든 원인의 그 다음이 원흉이 러시아라며 러시아에게 겨눌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우려하고 있던 제3차 세계대전의 트리거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U 의회에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저들의 극우 정당들이 이기고 있다해서 마냥 좋아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反) 이민과 그린딜(Green Deal, 탄소중립목표 달성을 위한 EU 정책) 반대를 내세우는 극우 정당들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그 동안 러시아에 대해 강경 노선들을 취해 왔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집행위원장이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이탈리아 총리에게 연정 및 협력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집행위원장 재선을 위해서는 EU 의회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안정적이기 때문에 멜로니 총리가 속한 EU 의회 정당 보수 개혁 연합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EU는 히틀러가 행했던 인류사의 잔인한 폭력성을 되돌아봐야 한다. 지난 6일, EU 의회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을 맞아 행사를 치뤘다. 이 행사에서 세계 대전을 종식시키는데 최대 공을 세운 러시아 (당시 소련)을 배제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참석시켰다.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나치고 뭐고 따지기 전에, 소련의 역사를 지우고 소비에트의 일원이었음을 부정하는 젤렌스키를 초정한 것은 큰 행사의 의미를 퇴색시킨 셈이다. 그 또한 서유럽은 히틀러와 나치가 행했던 교훈을 잊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번 EU 선거를 특별하게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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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아랍의 봄" 사건으로 유럽이 받은 영향, 아랍계 민족들의 유럽 정착 및 난민화
    "아랍의 봄"이 유행할 때 과거 북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을 식민 지배했고 현재도 가장 지분이 많은 프랑스는 아랍의 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불안은 옛 종주국으로써 북아프리카 각 지역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게도 이와 같은 사태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끝없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들이 아랍의 봄 혁명에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프랑스 내부도 시끄러워질 수 있는 요지가 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극우파가 득세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자국 국민들의 이권을 먼저 보호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민군들과 함께 카다피의 독재 정권을 끝내고 민주화의 첫 단계에성공을 거두었으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1차 투표에서는 28.6% 대 27.1%로 패배했으며, 2차 투표에서도 48.3%로 51.7%의 올랑드에게 3.4%, 110만표차로 패배했다. 사르코지는 임기 중에 사망한 조르쥐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 4년 10개월, 1969~1974)와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에게 패배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7년 재임)에 이어 30년 만의 단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퇴임했다. 게다가 전임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까지 프랑수아 올랑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르코지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여기에 카다피 사건에 대한 몇몇 불편한 진실까지 드러난 부분이 결정적으로 사임한 원인이 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올랑드 역시 유럽의 경제위기인 유로화 사태가 계속 되는 상태에서 말리 내전에 개입한 것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크게 작용했으며, 정권의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는 등 제대로 된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국가들도 큰 영향을 받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도 영향을 받아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이탈리아의 경우,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더불어 계속되어 발생하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정계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베틀루스코니는 사생활 보호법을 개정해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예를 들어 사법당국이 녹취한 내용을 신문이나 웹사이트에 올려 사익에 반하거나 편견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면 48시간 이내에 수정해야 하고 여기에 불응하면 구금 또는 벌금형에 처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쏟아낸 막말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모든 이탈리아 시민들이 이를 페러디하여 수많은 조롱이 섞인 광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이탈리아 내에서 경제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던데다 베를루스코니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채 수익률은 7일 연 6.77%까지 치솟았다. 이어 정부 부채는 2조 6000억 달러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아 파산 위기에 놓이자 로마에 1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폭동 직전까지 가게 된다. 결국 2011년 11월 1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하야하여 마리오 몬티(Mario Monti) 총리의 중도 내각이 들어섰고, 뒤이은 선거에서 이탈리아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비록 상원 과반에 실패하여 옛 집권당과의 연정은 불가피했지만 베를루스코니는 그 동안 스스로 저지른 불법행위로 확실하게 제명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후에 튀니지에서 150km 떨어져 있는 람페두사 섬에 소요 사태를 피해 들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이들에 대한 처우에 상당한 고민에 빠졌다. 특히 2011년 리비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보트 피플들을 강제 송환시키던 리비아 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아프리카 난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영국과 독일은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아랍의 봄 여파로 인해 시리아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면서 대량의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고 이는 브렉시트에 이어서 유럽 연합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유로 경제권의 불균형으로 위태로운 상황이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EU의 붕괴론까지 부상하며 아랍의 봄 여파가 유럽에서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랍의 봄은 러시아와 CIS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00년대 혁명이 있었던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및 인근 국가들도 전면적으로 국가 내부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러시아에서도 브콘탁테를 통하여 반정부 시위들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비리 등이 심했다. 그러나 이 아랍의 봄의 영향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2014년 유로 마이단 사태를 일으켜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중앙아시아 건너 카스피 해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반 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며 남부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아르메니아에서도 2008년부터 부정선거로 의혹받았던 샤르키샨 전 총리에 대한 불만과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총리의 독재를 끝내는데 실패했다. 처음에는 민주화를 기치로 중동의 독재자들이 붕괴되어 가는 민주주의의 승리에 응원을 보내던 서구권은 이후 생각보다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가 독재를 대신하고 이들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신(新)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충격과 공포로 난민들과 중동의 민중들을 차별하게 되고, 과거 동구권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을 지지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었던 것과 다르게, 독재 타도를 외치는 반군에 대해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반군을 지원하는 물자와 무력 개입, 정치적인 압력을 동원하여 지원해준 다음 민주주의 선거로 수장이 뽑힐 정부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친(親) 서방 정권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반대로 샤리아를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의 성격을 띄고 있다면 세속주의 친(親) 서방 정권인 독재자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성립되었다. 이 아랍의 봄 사태는 유럽이 갖고 있던 냉전 시대부터 이어온 민주주의의 우월성이라는 믿음에 크게 생체기를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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