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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병대 예비역 연대, 야권과 손잡고 국정조사 촉구
    해병대 예비역 연대가 채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 규명을 위해 국회를 찾았다. 이들은 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 개혁신당과 차례로 만나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이는 사건의 수사 외압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 특별검사 도입을 주장했다. 하지만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특검이 무산되자, 야당은 대통령의 재의요구권이 적용되지 않는 국정조사 카드를 꺼내 들어 여권을 압박하고 있다. 해병대 예비역 연대는 13일 국회의사당 소통관에서 더불어민주당과 함께 '해병대원 순직 및 수사 외압 사건 국정조사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후 조국혁신당과 개혁신당 지도부와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해병대 예비역 연대의 정원철 회장은 "우리 해병대 예비역들은 22대 국회가 해병대원 순직 사건 국정조사를 신속히 추진해 주실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라고 전했다. 그는 "수사 외압과 해병대원 순직의 책임이 있는 이종섭, 김계환, 임성근 이 자들을 심판의 증언대 국정조사에 세워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회장은 "21대 국회에서 해병대원 순직 사건 국정조사가 5만 명의 청원으로 추진되어 박주민 의원 등 168인이 국정조사를 요구했다. 그런데 김진표 전 국회의장은 여야 합의라는 관례를 내세우며 헌법과 국회법에 근거한 국정감사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을 지키지 않았다. 소수당 국민의힘의 횡포에 끌려다닌 것을 좋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비판했다. 조국혁신당의 조국 대표는 "저를 포함해서 조국혁신당은 이 문제에 대해서 특검을 포함해 국정조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가리지 않고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조 대표는 이어 "사적으로는 제가 해병대 출신은 아니다. 하지만 저의 돌아가신 선친께서 해병대 출신이시다. 어릴 때부터 저희 어르신께서 해병대 얘기하신 걸 듣고 자랐다"라며 개인적 인연도 언급했다. 그러면서 조 대표는 "이건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정파와 관계없이 진보-보수 관계없이 대부분의 정상적인 사고와 상식적인 사고를 갖고 계신 애국 시민이라면 이 문제에 대해서 분노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개혁신당 지도부와 면담에서 김규현 변호사는 "곧 채 해병 순직 1주기이다. 채 해병 어머님께서 그 전에 '신속하고 엄정하게 진상 규명해 수사를 마무리 지어달라'고 요청하셨다"라며 국회의 신속한 대응을 촉구했다. 그는 "수사 대상자인 대통령 그리고 정부 여당은 이 사건을 엄정하게 수사할 의지가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저희가 국회에 그 일을 대신해달라고 요청을 드리러 왔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김 변호사는 "7월이면 통화 내역 등이 이제 삭제가 된다.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라며 "특검이 지금 출범한다고 해도 준비 기간을 고려했을 때 통화 내역을 온전히 확보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우려했다. 그는 "또한 특검을 추진하더라도 아마 대통령 거부권에 또 한 번 가로막힐 가능성이 크다. 그렇기에 대통령이 거부할 수 없는 국정조사 등 국회가 갖은 모든 권한을 다 동원해서라도 1주기 전에 통화 내역을 다 확보하고 이 사건의 진상을 명명백백하게 국민 앞에 밝혀주십사 요청한다"라고 말했다. 개혁신당의 허은아 당 대표는 "채상병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은 흔들린 안보의 기둥을 바로 세우는 일이라고 믿는다. 해병대의 명예를 되찾는 일이라고 믿는다"리며 "정치가 해야 할 일을 정치인이 아닌 분들이 도맡아서 하고 계시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정치인으로서 염치없음을 느낀다. 죄송하다"라고 고개를 숙였다. 천하람 원내대표는 "비전투 상황에서 우리 병사들의 손실을 최소화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지휘관의 책무"라며 "어떤 지휘관도 실제 전쟁 상황도, 시급한 작전 상황도 아닌 상황에서 순직하고 희생된 우리 채상병에 대해 '군인은 언제나 마땅히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라는 식의 막말을 할 권리는 없다"라고 날을 세웠다. 개혁신당 정책연구원장을 맡은 이준석 의원도 "최근 논의되는 국정조사는 당연히 진행되어야 한다"라며 "국정조사라고 하는 것이 '교섭단체 간 협의에 합의가 필요하다'라는 관례가 지금까지 부각한다. 하지만 이미 대통령이 본인과 관계된 수사에 대해 거부권을 쓰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그는 "국회와 개혁신당이 관례나 원칙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라며 "비상한 상황 속에서는 비상한 대응으로 일을 끌고 나가는 것도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사실상 여당을 배제한 채 야권끼리 연대해 국정조사를 추진하자는 것이다. 이날 회견과 면담에서 해병대 예비역 연대와 야당들은 한목소리로 국정조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해병대 예비역 연대와 야권의 협력은 채상병 순직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관련자들을 처벌하기 위한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번 연대를 통해 해병대 예비역 연대와 야당들은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투명하고 철저한 조사를 요구했다. 연대는 채상병 순직 사건이 단순히 해병대원 한 명의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군 전체의 신뢰와 명예를 회복하기 위한 중요한 사안이라고 보고 있다. 이들은 "채상병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수사 외압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이 해병대의 명예를 지키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해병대 예비역 연대는 국정조사를 통해 이 사건의 모든 진실이 낱낱이 밝혀지고, 책임자들이 엄중히 처벌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군 내부의 부조리를 근절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수사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라며 "이를 위해서 국정조사는 반드시 필요하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해병대 예비역 연대는 국정조사를 통해 군 내 부조리를 철저히 조사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연대와 야당의 연대는 이번 사건을 단순한 군 내부 문제로만 보지 않고 있다. 이를 정치적 책임을 묻는 데까지 확대하고 있다. 이들은 "수사 외압과 관련된 정치인들과 정부 고위 관계자들에 대해서도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책임을 명확히 하고 재발 방지를 위한 강력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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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24-06-14
  • 서울 상공 방어 강화 위한 ‘블록-Ⅰ 레이저 대공무기’ 실전 배치 임박
    북한의 소형 무인기와 드론에 대응하기 위해 군 당국은 2024년 12월까지 서울 내 빌딩 GOP에 지상 고정형 ‘블록-Ⅰ 레이저 대공무기’를 우선 배치할 계획이다. 이 무기는 20㎾(킬로와트)급으로 소형 무인기와 드론을 격추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국방부는 이미 이 레이저 대공 무기를 전투용으로 적합 판정받았다고 밝혔다. 이번 배치는 최근 빈번한 북한의 도발적 행위에 대응하여 수도권 방어력을 강화를 위한 조치의 일환이다. 레이저 대공무기는 빛의 속도로 발사되어 목표를 수 킬로미터 거리에서 정밀하게 요격할 수 있다. 또한, 레이저 무기는 전기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운용할 수 있다, 발사 비용도 매우 저렴하여 경제적이고 효율적인 방어 수단으로 평가된다. 국방과학연구소(ADD)는 이미 지난해 충남 태안의 안흥 시험장에서 블록-Ⅰ 레이저 대공무기에 대한 시험평가를 마치고 이를 국방부에 보고했다. 시험평가 결과, 이 무기는 약 3km 떨어진 상공의 무인기 30대를 100% 명중률로 격추해 효과적인 방어 능력을 입증했다. 현재 우리 군이 운용 중인 20㎜ 벌컨포와 30㎜ 차륜형 대공포는 효율성과 안전성 면에서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고비용의 신궁이나 천궁 미사일을 사용하는 것은 비경제적이라는 지적이 제기되어 왔다. 레이저 대공무기는 이러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부각하고 있다. 레이저 대공무기의 장점은 여러 가지다. 레이저는 초당 30만km를 이동하는 지향성 에너지를 이용해 극초음속 미사일까지 요격 가능하고 발사 비용이 매우 저렴하다. 또한 별도의 탄약 없이도 운용할 수 있고 무기 발사로 인한 지상 피해 우려가 적다. 그러나 이 무기는 안개나 비 등의 기상 조건에 취약하고 표적과의 가시선을 유지해야 한다는 기술적 한계도 가지고 있다. 빠르게 이동하는 표적을 추적하고 파괴하는 과정에서도 한계를 보일 수 있다. 국방부는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 레이저 대공무기의 출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 개발에 힘쓰고 있다. 방사청은 2030년까지 레이저 대공무기의 출력을 30㎾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또 차량이나 함정에 장착 가능한 블록-Ⅱ 개발도 추진 중이다. 이러한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된 경우, 더욱 다양하고 작은 표적들을 효과적으로 요격할 수 있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레이저 대공무기의 실전 배치는 서울 상공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이는 우리 군의 방어력을 한층 강화할 수 있는 기술적 진보를 상징한다. 이는 국내 방어력뿐만 아니라 국방 기술력의 진보를 의미하는 동시에 미래 전장에서 한국의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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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 우원식 의장의 현장민원실 활동, 10일 본회의 개최 가능성 시
    국회의장 우원식은 국회 원 구성이 지연되고 있는 가운데 9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민심을 수렴하고 여야 간의 원 구성 협상 마무리를 촉구했다. 그는 이날 서울 노원구 경춘선 숲길에서 현장민원실을 운영하며 주민들의 애로사항을 경청하는 시간을 가졌다. 우 의장은 현장민원실에서 국민과 직접 만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며 국회의장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 민심을 직접 청취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그는 "국회의장으로 더 큰 책무를 부여받았지만, 민심을 받드는 일을 제일 우선으로 하겠다."라고 강조했다. 우 의장은 현재 국회 원 구성이 지연되고 있는 상황에 기다릴 수만은 없는 절박한 상황임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10일 본회의를 개최하여 상임위원장 선출안을 상정할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는 고물가, 전세 사기, 민생현안 및 남북관계 등 다양한 문제에 국회가 신속히 대응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했다. 그래서 여야가 조속히 원 구성을 마무리 짓고 일하는 국회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간의 원 구성 협상은 큰 이견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은 법사위, 운영위, 과방위를 사수하겠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은 이에 반발하고 있다. 협상이 진전을 보이지 않자 민주당은 원 구성 법정시한인 7일에 쟁점 상임위를 포함한 11개 상임위 배분안을 국회에 접수했다. 국민의힘은 합의 부재를 이유로 협상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현재 22대 국회에서 민주당은 171석을 확보하고 있어 국민의힘이 본회의에 불참하더라도 민주당은 독자적으로 배분안을 처리할 수 있는 여력을 갖추고 있다. 이는 국회의 신속한 원 구성을 위한 민주당의 전략적 수단으로 볼 수 있다. 우원식 국회의장은 현장에서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며 국회 원 구성의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고 있다. 국민의 일상에 밀접한 여러 민생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다. 우 의장은 국회가 효과적으로 기능할 필요가 있음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10일 예정된 본회의는 국회 원 구성을 위한 중요한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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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칼럼 검색결과

  • 러시아와 중국, 표리부동의 상호관계 속에 실익 추구
    러시아와 중국은 과연 상호 협력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가? 이에 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이 두 국가는 겉보기와 달리 현안별로, 상황에 따라 의외로 전혀 다른 행보를 보이기도 하고, 때론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협력관계를 추구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러시아와 중국이 가깝게 된 것은 헤이룽(러시아명으로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타라바로프(중국명 인룽) 섬, 볼쇼이우수리스키(중국명 헤이샤즈) 섬, 밍위에 섬이라는 3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푸위안 삼각주(혹은 이 삼각주 전체를 헤이샤즈 삼각주라고 부른다)를 둘러싼 국경분쟁이 서로 타결된 이후일 것이다. 1969년 3월 2일부터 9월 11일까지 일어난 양쪽 국경분쟁은 2005년 6월 2일에 비로소 완전히 타결되었다. 이때 타결된 내용은 타라바로프 섬을 중국으로 완전히 반환하고, 볼쇼이우수리스키 삼각주를 동·서로 양분하는 것이었다. 이때 중국에 반환된 삼각주의 면적은 총 약 327제곱 킬로미터 중 약 174제곱 킬로미터로 사실상 중국영토의 가장 동쪽 끝이 되는 셈이다. 이에 러시아와 중국은 약 4354 킬로미터에 이르는 국경선을 육상 국경선과 해상 경계선으로 획정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강물의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3개의 섬이라고 하지만, 작은 섬들도 그 삼각주 주변에 많이 흩어져 있어서 엄밀하게 국경선을 획정하기가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하여튼 이 타결로 인해 영토 문제로 인해 러시아와 중국은 영토분쟁에 관한 한 서로 별다른 문제가 없고, 현재 이 지역은 서로 왕래를 자유롭게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러시아와 중국 양국은 영토 문제에 매우 민감한데, 러시아는 중국으로부터 할당받는 영토를 일부 돌려줌으로써, 이를 통해 대중국 관계를 개선할 수 있었다. 중국은 러시아보다 더 많은 영토를 반환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러시아는 일종의 경제적-외교적 관계에서 거래에 초점을 맞추었던 반면, 중국은 정치적 관계에 의한 국익에 방점을 두었을 것이다. 만일 중국이든 러시아든 전부 반환이냐 전부 보전이냐의 문제로만 협상이 진행되었더라면, 이 협상은 결코 타결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협상 기간이 길었던 것은 러시아와 중국 각각의 내부 사정과 국제질서의 급변이 동시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금 이 두 국가는 미국에 맞서는 국가이기는 하지만, 서로의 계산법은 현안별로 다르다. 미국에 맞선다는 점에서 러시아와 중국은 서로 같은 지점에 서 있지만, 러시아와 중국은 표리부동(表裏不同)의 행보를 보인다. 서로 정상회담도 했지만, 가시적 성과는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러시아는 유라시아 지역의 정치·문화 안전보장에 관한 국제협력 기구인 상하이협력기구(CSO)와 구소련연방에서 독립된 국가들의 연합체인 독립국가연합(CIS)을 통해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러시아가 천연가스와 석유 그리고 군사적 협력을 지속화하는 경향이 보인다. 또 러시아는 최근 이른바 아프리카의 사헬 지대(서쪽 세네갈에서부터 동쪽의 수단에 이르는 사하라 사막 남쪽 지역) 국가들에도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중국은 이른바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면서 육상 실크로드인 경제벨트와 21세기 해상 실크로드를 추구하는 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중국식 자유 경제 지대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중국의 경제침체와 미국의 대중국 제재 그리고 일대일로에 일부 참여국들이 빚더미로 몰리는 상황은 우려를 낳는다. 더욱이 중국은 최근 러시아의 천연가스관 공사 문제로 마찰을 빚고 있다. 중국의 터무니 없는 후려치기에 러시아가 난색을 표명하면서 이 공사가 현재 지연되는 것이다. 사실 러시아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치르고 있어서 천연가스 수출로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중국에 관해 유럽보다 할인가격으로 천연가스를 팔았는데, 이것은 러시아가 유럽과 중국의 가격 차별화를 통해 자원을 한편으로 무기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지속적인 미래 성장시장으로 중국을 염두에 둔 것이다. 러시아의 원래 계획은 천연가스의 유럽 시장이 축소되면, 이를 만회하기 위해 중국의 시장을 돌려서 안정된 수출공급망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러시아는 천연가스를 파이프라인을 통해 중국에 공급하려고 했고, 이른바 ‘시베리아의 힘-2’는 몽골을 걸쳐 중국의 동북아 지역과 시베리아를 연결하는 ‘시베리아 힘-1’의 수송량을 늘리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중국의 터무니없는 가격 인하 요구로 진전이 없고, 몽골에서도 별로 진전된 바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이 내세운 그럴듯한 명분은 중국이 향후 그린에너지로 전환하게 되면, 천연가스의 의존도를 낮추어야 하는데, 굳이 현재 시점에서 천연가스의 공급을 수요보다 더 많이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굳이 러시아가 공급하겠다면 기존보다 훨씬 낮은 가격이라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할 필요가 없다는 느긋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러시아로는 그런 가격이면 그동안에 싼 가격으로 중국에 천연가스를 공급해 왔는데, 천연가스의 가격을 훨씬 더 낮추라고 하니, 그러면 러시아도 안 하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러시아는 그렇지 않아도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한 중국의 소극적 태도가 불만이었다. 정치적으로 외교적으로 아무리 관계가 친밀해도 경제적인 이해관계가 발생하면 오월동주(吳越同舟)와 같은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 때문에 국제관계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러시아와 중국이 중앙아시아에서도 한쪽은 영향력 유지를, 다른 한쪽은 영향력 확대를 희망한다. 또 중국은 아프리카에 투자하면서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아프리카 국가들의 참여들 독려하면서 국가 영향력을 키우려고 한다. 이때 중국은 경제적 투자를 통해 아프리카의 자원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이와 달리 러시아는 이른바 과거 서방의 식민지, 특히 옛 프랑스 식민국가를 중심으로 바그너그룹을 통해 집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이것은 군사적-경제적 측면이 강한데, 과거에 서방의 식민지 각축장이었던 아프리카는 이제 러시아가 적극적으로 관여하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하지 않을 수 없다. 아프리카는 서구 식민지에 해방되었고, 서방의 지원도 있었지만, 경제적으로 나아진 것이 별로 없으며, 오히려 정정(政情) 불안과 정변, 종족 분쟁과 영토분쟁으로 피로 얼룩져 있다. 아프리카 각국의 국민은 그동안 서구화가 일부 진행되었지만, 여전히 가난과 빈곤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에 잦은 분쟁과 전쟁의 씨앗으로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이 틈을 군벌들이 활개를 치고 들어가고, 러시아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면서 러시아는 반서방 동맹 세력을 구축하려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서방의 책임이 크다고 하겠다. 그 핵심은 경제적 지원이고, 각종 치안 불안과 정권 안정을 위해 이제는 서방보다 오히려 러시아가 더 낮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이 아프리카 각국의 정치적-경제적 상황을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지는 매우 불투명하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최근 행보를 보면 중국과 다소 껄끄러운 관계에 있는 북한과 베트남과 적극적인 관계를 모색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핵 문제로 다소 소원하고, 베트남과는 이른바 사사(파라셀)군도와 난사(스프레틀리)군도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다. 러시아는 이 두 국가에 관해 후원국 역할을 자처한 것처럼 보인다. 베트남은 전통적으로 이른바 ‘대나무 외교’라는 외교술로 유연하면서도 균형 외교를 중시하면서 강대국들 사이에서 실익을 많이 챙겼다. 러시아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강화함으로써 아마도 유라시아연합과 동남아시아연합을 하나로 묶으면서 미국- 대만-필리핀으로 이어지는 남중국해에서의 미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또 러시아는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분산시키는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중국은 한편으로 베트남과의 남중국해 분쟁에서 러시아가 개입을 내심 우려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영향력을 희석화시키는데 러시아와 베트남의 밀착 관계를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구도는 현재 중국의 경제 상황과 러시아의 우크라니아 전쟁으로 인해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에 러시아와 중국이 어떤 행보로 서로의 관계를 모색할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9
  • 개념의 미라
    어제의 일이다. 오전에 주판치치가 쓴 <정오의 그림자>를 읽고 있는데,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후에 시간이 되나? XX과 너 집 근처에서 한 게임 할 텐데, 함께 보자!” 안타깝게도 어제는 손자 유치원 하원 시키는 날이어서 시간이 허락하지 않았다. “오늘은 손자 하원시키는 날이야! 5시 이후에는 시간이 된다.” 그렇게 친구와의 통화는 끝나고 독서를 계속했다. 그런데 책의 내용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오의 그림자>는 니체와 라캉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궁금증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이었다. 니체와 라캉을 조금씩은 알고 있지만 연결고리를 찾을 수 없었다. 그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선택한 책이 나를 점점 더 미궁으로 빠져들게 만든다. 다만 말레비치와 니체의 공통점을 언급한 부분은 이해가 되었다. 살아있는 대상을 재생하기 위해 우리는 켄버스 위에 죽은 이미지를 재생한다는 말레비치의 말과 니체가 언급한 ‘개념의 미라’라고 한 부분은 정확히 이해가 되었다. ‘개념의 미라’라는 말은 쉽게 풀어보면 전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우리는 상호 의사 소통을 위해서 개념을 만들어 사용하지만, 그 개념이 가지는 한계 때문에 대상과 정확히 일치하는 개념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살아있는 대상의 한 부분을 하나의 개념이라는 틀에 옭아매는 꼴이니 결국 개념이 미라가 된다는 의미이다. 무한히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현실의 세계를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언어가 갖는 한계이다. 니체에게 있어서 이성의 언어로 포착하는 진리란 삶의 보조 수단으로 행해지는 체계화일 뿐, 자연의 변화를 전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즉 이성중심주의적 세계 인식은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니체는 우리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깨닫고, 자연에 대한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면서 몸의 언어로 자연을 읽어라고 요청하고 있다. 나는 아직 몸의 언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다만 하나의 관점만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을 모두 소중히 생각해야 하며, 삶에 대한 무한한 긍정으로 자기 자신의 내부적인 힘의 상승을 느끼라는 정도로만 이해할 뿐이다. 삶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갖는 것이 곧 개념의 미라일 것이다. 이런저런 생각으로 시간을 보낸 후에 오후에는 손자를 유아원에서 조금 일찍 하원을 시켰다. 4시 50분쯤 친구에게 다시 전화가 왔다. 나는 즉시 친구들이 술판을 벌여놓은 장소로 달려갔다. 대화의 주제는 당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최근에 벌어진 당구대회에서 16세 소년이 결승에 올라서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 중 한 명인 선수와 결승전을 벌였던 장면을 회상하면서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참으로 놀라운 사회의 변화이다. 16세이면 고등학교 다닐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프로로 활동하고 있다. 프로로 활동하는 그의 모습에서 나는 현대 사회의 가능성과 새로운 도전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결승전에서 패한 후 흘렸던 눈물은 순간적으로 밀어닥친 허무 뒤에 오는 삶에 대한 긍정이기를 바라는 마음을 친구들에게 전했다. 낮술을 한잔한 후에 우리는 다시 당구장으로 갔다. 친구들의 모임은 항상 동일하다. 일등 3만원, 2등 2만원, 3등 1만원! 내기 당구게임이었다. 나는 친구들 중에 당구를 잘 치는 편이다. 친구 중 한 명은 최근에 실력이 급증하여 나와 실력이 비슷하다. 나는 그 친구가 나의 적이자 나의 진정한 벗으로 생각한다. 그의 실력 향상이 자극이 되어 나의 실력이 향상되기 때문이다. 니체가 원하는 진정한 벗의 관계이다. 다른 친구는 지금 열심히 당구를 배우고 있다. 경기 결과는 최하수가 1등을 하였고, 나는 2등을 하였다. 그렇게 모인 돈으로 또 저녁에 술자리를 함께했다. 술좌석에서 다양한 이야기가 오고 갔다. 젊은이들의 삶에 대한 걱정부터 노년의 삶의 즐거움, 그리고 생각의 유연성 등에 관한 이야기였다. 나는 생각의 유연성에 대한 이야기에 목소리를 높였다. 생각의 유연성은 개념의 미라와도 일맥상통한 이야기였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이 친구는 이렇다”라고 말하는 순간, 그 친구는 그를 아는 주변의 친구들에게 그런 친구로 낙인이 찍혀버린다. “이런 경향이 있다”라는 이야기와 “그는 그렇다”라는 이야기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나는 MBTI라는 심리검사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의 성격은 항상 변한다는 프롬의 생각에 동조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격에 특정한 경향이 있다는 것은 공감할 수 있지만, “나는 이런 유형의 성격을 가졌다”라는 단정적인 검사 결과는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MBTI검사가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오남용되는 경향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심리검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이야기는 상식에 가깝다. 즉, 심리검사의 결과는 하나의 경향일 뿐, 그것이 하나의 고정된 틀로 작용하여 자신을 옭아매는 작용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에 부쩍 근대성 비판의 문을 연 니체를 열심히 읽고 있다. 오늘날에도 니체를 읽어야 할 이유를 그의 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20년 전에도 한국 철학회에서 논의되었다고 알고 있다. 논의가 되면 무엇하나? 사회는 변함없이 그대로인데. 니체는 자신의 온몸과 삶으로 글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니체를 전공한 한국의 철학자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개념의 미라’라는 개념은 절대적 진리가 없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구호 뒤에 오히려 개인의 독단이 판을 치고 있는 세상에 대한 니체의 경고일 것이다. 우리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비판했던 시장의 파리떼나 무리 군중을 넘어서는 위버멘쉬를 꿈꾸어야 할 것이다. 위버멘쉬는 자기 극복과 삶의 긍정을 통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존재이다. 개념의 미라는 새로운 창조를 방해할 뿐이다. 삶을 긍정하는 명랑성은 사고의 유연성에서 비롯될지도 모른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26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上편
    오스만투르크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에 대해서는 독일 나치의 홀로코스트와 더불어 장시간 동안 유럽에서 가장 큰 이슈였다. 특히 19세기 말,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기부터 터키 공화국이 탄생한 1923년까지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에 있던 아르메니아인 약 150만 명은 조직적인 학살을 당하거나 강제로 추방되었고 그 과정에서 벌어진 약탈로 인해 굶어 죽거나 고문 및 납치 등의 방식으로 조직적인 인종청소를 당했다는 주장이 대학살 관련 문제의 핵심이라 볼 수 있겠다. 세계 각국의 아르메니아 관련 단체들은 우크라아나 홀로도모르 단체보다 더 숫자가 많고 매우 조직적이다. 이들은 국제사회를 움직여 제노사이드 인정과 더불어 터키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와 아르메니아인들을 약탈한 재산을 반환해달라는 내용의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도 걸었고 그로 인한 보상 등을 요구하여 터키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최근에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 단체들과 연합하여 러시아도 주적으로 몰아가며 러시아 정부에도 터키에 걸고 있는 내용과 같은 내용으로 러시아에 우크라이나에 대해 공식 사과와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과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던 홀로도모르는 내용 자체가 판이하게 다르기에 이는 러시아 입장에서 볼 때 전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반면 터키 정부는 아르메니아에 사과를 전혀 하지 않은게 아니다. 그동안 터키인과 자국 내 아르메니아인 간에 발생했던 유혈 충돌과 대규모 희생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거듭 사과했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자행되었던 계획적, 혹은 조직적으로 학살했다는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당시 아르메니아인이 희생되었다는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시민이었던 아르메니아인들이 터키의 적국이었던 러시아에 동조하고 오스만 제국을 배신하여 독립하려던 반란으로 인한 불가피했던 조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한 근거로 아르메니아인들과의 충돌 과정에서 터키인 희생자도 40만 명에 달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을 가해자와 피해자라는 직접적인 연결이 아니라 이를 정치적으로 쟁점화하는 것으로 끌고 간다는 것에서 이는 순수한 의미의 사과와 보상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터키를 고립시키고 악화시키려는 타 국가들의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EU 국가들이고 특히 프랑스의 반발이 매우 심했다. 그 이유 프랑스에 아르메니아계 집단들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는데 이들의 요구로 인해 프랑스 의회는 2012년 1월,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 형사 처벌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고 학살을 부정하면 처벌하는 것으로 정해졌기 때문이다. 반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유럽에서 오랜 투쟁으로 인한 승리를 자축하고 이를 만끽했지만, 반면 터키와 프랑스 관계는 역사상 최악의 위기를 맞게 된다. 이 법의 발효로 인해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공개적으로 부인하는 발언이나 표현을 할 경우 법적인 처벌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한 반발로 터키 전역에선 반(反) 프랑스 시위가 벌어졌으며 튀니지, 모로코, 알제리 등을 식민 통치하면서 수백 년 동안 아랍인들을 박해하고 학살을 저질렀던 프랑스의 위선과 이들의 역사적인 과오를 규탄했다. 2015년에는 터키-아르메니아 학살의 100주기가 되던 해였다. 당시 터키에게 매우 불리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전 세계 곳곳에서 아르메니아에 대한 추모 행사가 열리고 있었고 이는 유럽 의회가 공식적으로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까지 채택했다. 그런데 그와 똑같은 방식으로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도 러시아의 학살로 규정하고 이를 비난하는 결의 안까지 통과시키려 한다. 그렇게 따지면 영국의 아일랜드 대기근, 인도 뱅골 대기근 등으로 인한 아사 또한 학살로 규정해야 하며 프랑스가 저지른 알제리 대학살, 베트남 대기근도 학살로 규정하여 비판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학살에는 EU 자체에서 언급이 금기어회 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더불어 EU의 위선은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르메니아인 대학살을 공식적으로 언급했다. 따라서 23개 국가가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채택하면서 국제 사회는 아르메니아 측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형편이다. 그런데 국제 사회라기보다는 정확히 말해 EU와 영국, 이스라엘이 들어간 23개국이다. 그리고 미국은 나토의 동맹국이자 중동에서 자국 이익의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는 터키를 자극시키는 것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따라서 이를 국제 지정학, 전략적인 압박으로 이용하기 위해 법안 통과를 미루고 있다. 만약 터키가 미국의 말을 듣지 않거나 미국의 이익에 벗어나게 하는 행위를 한다면 이 법안을 미 하원에 주제로 내놓으면서 터키 정부를 압박하는 수단으로 활용이 가능하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을 비난하는 결의안은 터키에게 당근 및 채찍을 주면서 지랫대 역할을 할 수 있는 전략적 무기인 셈이다. 그런데 그동안 아르메니아인들은 터키에 대해 격렬하게 투쟁을 해왔다. 당시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유럽 주요 도시에 부임하고 있는 터키 외교관들은 축하 대신 위로 전화를 받았다 한다. 당시 터키 외교관들에게 유럽은 매우 위험한 근무지였다. 특히 아르메니아의 극우단체인 아살라(ASALA)는 유럽 각국에 암약하여 포진하면서 표적 테러를 자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대놓고 표적 테러를 저지르는데도 유럽 각국은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 유럽은 "러소포비아" 못지 않게 "투르크포비아"를 갖고 있다. 지금은 "러소포비아"에 묻혀 드러나지 않고 있을 뿐이지만 당시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유럽 내에서 "투르크포비아"는 엄청났다. 게다가 7~80년대에 중동에서 잇달아 전쟁이 벌어지고 오일쇼크까지 터지면서 중동에 대한 반감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그러한 반감은 엉뚱하게도 터키에도 옮겨 붙었다. 무슬림들이 많고 중동하고의 관계 또한 깊다는 것에서 나타난 일종의 기피현상인 것이다. 이 때 아르메니아 극우단체 아살라에게 희생된 터키 외교관만 해도 46명에 달했다. 그만큼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있어 터키는 학살 주범으로 마땅히 응징해야 할 대상이었다. 그러면서 터키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 그들에게 있어 최종적인 목표였다. 그러나 이처럼 테러를 통해 아르메니아의 슬픈 과거사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오히려 악수를 갖고 왔다. 이들 극우주의자들은 테러리스트들로 국제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자 아르메니아 정부가 나서 외교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방향으로 전략을 선회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 전략도 이전에 펼친 테러 문제 때문에 상당수의 국가들이 아르메니아를 기피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에 대해 파악해보면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요소들이 혼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오스만투르크 제국 치하에서 아르메니아 정교도들은 밀레트(Millet)라는 투르크식 소수민족 공동체 내 총대주교가 관할권을 행사했고 이는 종교적 자유와 민족적 자치를 함께 누렸었다. 애초부터 무슬림이 아니라고 이들은 탄압 받지 않았던 것이다. 1876년 9월 주 이스탄불 영국 대사 엘리어트 경이 본국에 보낸 외교문서에 의하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오히려 일반 터키인들보다 부유하며, 월등히 높은 삶의 질을 누리고 있다고 기술되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독립 국가 건설을 원했다. 오스만 제국과 무장 투쟁을 벌이면서 끊임없이 독립을 추구했다. 특히 1877~1878년 사이에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의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을 점령하자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러시아를 지원하면서 오스만 제국을 배신했다. 이러한 사건들을 계기로 아르메니아 독립 국가 건설을 노리는 민족주의 단체들이 등장했고, 훈체크라던지, 다시나크파 같은 극우 정당들도 결성되어 터키인들을 약탈하고 강간하며 학살하고 다녔다. 그러나 이들이 했던 참혹한 행위는 유럽 내 아르메니아계와 리버럴 세력들에 의해 철저히 묻혀졌다. 이들은 터키 내 에르주룸, 비트리스, 반, 엘라지으, 디야르바크르, 시바스 등 동부 지역 6개 주를 아르메니아 민족국가의 영토로 규정하고 독립을 위한 무장 투쟁을 본격화했다. 그러나 같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쿠르드족이 아르메니아에 반발했다. 해당 지역들은 아르메니아보다 쿠르드족이 이미 먼저 와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해당 지역들은 쿠르디스탄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최초의 무장 투쟁은 1890년 에르주룸에서 발생했다. 오스만 제국의 주요 시설과 시민들을 향해 테러를 저질렀고 이 같은 행위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면서 쿠르드족과도 대립형세를 띄게 되었으며 쿠르드족들은 그 사이에 민병대를 조직해 아르메니아와 맞서 싸웠다. 당시 이 6개 주의 인구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차지하는 비율은 15% 정도였고 상당수가 쿠르드족이었기에 숫적에서 열세를 보였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아르메니아인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오스만 정부가 보장해주었기 때문에 풍족한 삶을 향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투쟁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터키인들은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로 인해 러시아-오스만 전쟁에서 패배했다고 생각했으며 결국 아르메니아인들에게 대한 불신은 크게 확산되면서 불행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다. 주제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는 上, 中, 下편으로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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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6-24
  • 이슬람 문화권에서 베두인의 정의와 민족적 실체
    이스라엘 군에도 베두인들로 구성된 경보병 특수부대가 4차 중동전쟁 때까지도 존재하고 있었으며 해당 부대의 지휘관 또한 당연히 베두인이었다. 이스라엘의 베두인들은 2차와 3차 중동전쟁에서의 공훈으로 인해 이스라엘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적도 있을 정도이나 현재는 폐지되고 없는 상태이다. 그래도 베두인 병사의 지원 복무는 계속되고 있어서 수백 명 단위의 베두인들이 이스라엘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군에는 베두인들로 구성된 BDRB (Bedouin Desert Recon Battalion) 부대가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 베두인들에게서 배신자 취급을 당하지만 이스라엘 외에도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거주하는 베두인들도 있다. 시리아에도 베두인이 62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자 시리아의 베두인들도 주변 국가인 요르단, 레바논, 터키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두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편이다. 베두인들은 예루살렘과 가자 지구에서 유태인 정착촌 등에 섞여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의해 많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가까운 촌락에도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귀중한 재산인 당나귀를 사살당해도 이에 대한 손해 배상을 못하며,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도 유태인 아이들에게 온갖 구타와 학대를 당해 학교도 못가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베두인이 자주 나타난다. 더구나 베두인들은 대부분이 가난에 시달리며 이스라엘의 빈곤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극우 유대인들은 이들도 팔레스타인, 베두인-아라비아 인, 흑인들과 동급의 야만적인 종족으로 간주해 그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베두인 거주지를 파괴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베두인들에게서 반(反)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다. 2013년에는 베두인 주민 수천 명이 거주지 파괴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여 여기에 놀란 이스라엘 정부가 이를 달래려고 베두인 강제 이주 계획을 취소한다고 발표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시 베두인들의 거주지를 파괴하고 그들을 강제 이주시키며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나서면서 베두인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베두인-아라비아 인들과 한편이 되어 그들 무장단체에 들어가 이스라엘 타도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다. 유목민들에서는 부계(父系) 출생을 엄격하게 지키며 확대 가족과 씨족을 사회생활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흑염소의 털로 만든 유르트와 가축, 가재(家財) 등은 가족 전체의 소유물이다. 하나의 유르트에는 아흘 알 바이트(Ahl Al-Bait)가 한 사람 있어 주부의 일을 한다. 우물은 씨족에게 소속되고 이동 및 숙영(宿營)지 확보도 씨족 전원이 협력하여 한다.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형성하고, 부족과 지족(支族)의 수장은 세습제로 일정한 가계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낙타는 부족들의 공유물이었고, 부족 전원이 세력을 연합해 적들과 전투를 벌인다. 보통 베두인들은 일부다처제이며, 6종의 카스트 계층들이 있다. 귀족과 평민들은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이고,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 아라비아 제족들과 베르베르 제족은 종속 민들이며, 사하라 사막 남부나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흑인의 농노(農奴)가 존재하고 있고, 노예와 천민(賤民)이 있다. 노예는 남부 유럽에서 데려온 지중해 코카소이드형 백인도 있었으나, 나중에는 동아프리카 수단의 흑인들에만 국한되었다. 이들은 아라비아의 노예사냥에서 체포된 사람들인데 그들의 자손은 혼인 등에서 차별화된다. 카스트 제도로 구분되는 계급 사회는 잦은 정복 전쟁에서 생긴 것으로, 같은 카스트의 남녀 이외에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베두인들은 기마(騎馬)에도 능숙하여, 창을 사용하고 유럽 중세 기사와 같은 우월감을 가지며, 고귀한 존재라고 자부했다. 이교도인 베르베르 인과 흑인을 이슬람 화 시킨 것도 그들인데, 베두인 제족은 농경의 종속 민들과 오아시스 통상로의 상인으로부터 약탈과 재물에 대한 보호의 대가로 공납금을 취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중앙 정부의 세력 증대로 약탈과 공납에 의한 수입이 감퇴하였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경을 왕래하는 유목 경제가 곤란하게 되어 목축을 포기하고 농경을 생활 수단으로 하는 베두인 족도 증가하였다. 대부분 베두인 유목민 출신인 요르단 인들은 타인에게 지극한 환대를 보이고 혈족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러한 생활 태도로 볼 때 고대 베두인들 삶의 방식이다. 유목민에 기반을 둔 근대의 촌락 생활 방식은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지만 그러한 기반이 되는 요소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촌락의 나이 많은 여성, 때로는 젊은 여성들은 전통 의상인 길고 검은 토부(Thobe)를 입는데 어깨와 소매 등에 복잡하고 화려한 색의 작은 수를 놓아 입기도 한다. 도시 역시 전통적인 가치관이 존속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요르단 인들은 관대함과 따뜻함, 친절함 등을 배워왔으며 요르단 사회 핵심에는 부족 간의 조화와 가족을 존중하는 사상이 많이 남아 있다. 요르단은 높은 수준의 공예로 유명하다.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들이 요르단 수도 암만의 상점과 수도에서 떨어진 근교의 작은 마을 시장을 채우고 있다. 이러한 공예품으로는 그릇, 장신구, 수예품, 카페트와 전통 의상 등이 있다. 암만에서는 지역적 특성의 예술을 지닌 유리 제품을 만드는 유리를 깔때기로 부는 장인을 만날 수 있다. 유목 경제적으로 볼 때 베두인이 기르는 양은 모직의 중요한 공급원이다. 이러한 양털로 작은 베틀에서 여러 종류의 모직제품을 만드는데 관광객 및 외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판매되는 것은 아라비아 융단이나 카페트이다. 각각의 카페트에는 독창적인 특징과 독특하고 섬세한 디자인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아랍 문학 작품인 <천일야화 : 아리비안나이트>는 요르단 인의 작품이며 20세기의 작가로 뛰어난 문체와 사상을 표현한 시인 무스타파 와바 앗 탈은 아랍의 주요한 시인으로 나타나며 이들 모두 베두인 출신이다.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인(Bedouin : 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두 민족 모두 부족 단위로 공동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부족에는 부족장(shaykh 또는 sayyid), 신관(神官, Kāhin), 전시 군사 지도자(Qā’ìd) 및 중재자(Ḥakam) 등의 요직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구성원 총회(Majlis)에서 선임되었다. 부족장은 특별한 권한을 누렸다기보다 동등한 구성원 가운데 제1인자의 역할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면서 다른 부족들과의 교섭에서 부족을 대표하는 정도였다. 그는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구성원 중에서 주로 선출되었다. 베두인의 신관은 부족의 제사와 축제 및 장례 등의 의식을 관장하였으며, 전쟁 시 군사 지도자로는 다른 부족과의 전쟁, 기상이변 등 위기 시에는 연로한 부족장보다는 군사적 식견과 활동력이 좋은 중년의 구성원이 더 적격으로 여겨져 선임되기도 했다. 중재자들은 부족 구성원들 간의 분규를 조정하여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부족 구성원 총회에서 토의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부족 내부의 관행(Sunnah)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베두인들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이어 나갔으나, 도시의 정착민들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 메카와 메디나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와 에티오피아를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상업 도시로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또한 이 도시들은 토질이 척박하여 주민들과 가장 큰 부족인 쿠라이쉬(Quraysh) 부족은 주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도시의 중심에는 카바(Ka‘bāh)라는 성역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쿠라이쉬 족의 신상(神像) 뿐만 아니라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의 신상도 존재하기 때문에 메카는 종교적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메카는 예멘에서 실어 온 향료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및 이집트 등 각처에 공급하였고, 보다 개화되어진 지역들의 문물을 가져와 아라비아 반도에 보급한 문명의 중개도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메카 북방 약 300㎞에 위치한 메디나는 단순히 농업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쿠라이쉬 부족은 교역 활동을 통하여 협동력, 조직력 및 자제력을 함양하였으며, 베두인의 용맹성과 결합하여 후에 이슬람 제국 창건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베두인-아라비아 인이라는 개념은 인종과 혈통적인 성격보다는 셈어라는 아랍어 계통을 모국어로 공유하는 민족들의 집단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나타난다. 6세기까지 아라비아 인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들에 한정되었지만, 이슬람교의 전파로 이집트인, 메소포타미아인, 혹은 이라크인, 시리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중동 지역의 많은 주민들이 언어적으로 동화되면서 베두인-아라비아 인으로 통칭되었다. 이러한 아라비아 인들은 한때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시아까지 진출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초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유럽 열강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 중에서 범아라비아주의가 발흥하였고, 아랍어 화자들 사이에 베두인-아라비아 인이라는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 7세기 이전의 아라비아 지역은 아라비아 반도 지역을 지칭했으나, 이슬람 문화권이 확장되면서 중동과 그 인근의 이슬람 문화권을 통칭하여 지칭하는 단어로 변화되었다.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역사적인 세력들로 볼 때 아라비아 제국을 뜻하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아랍 연맹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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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8
  •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의 범주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역사 시대도 아니고 또한 역사학의 범주도 아니다. 역사학의 범위는 엄연히 체계화된 문자로 기록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여러 문명이라는 존재가 피어나던 시기부터 시작된다. 기록화 되긴 이전의 시대인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인류사(Human history)의 범주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도 역사긴 하지만 성문화 되어진 역사가 아닌 존재만 가지고 있는, 체율체득(體律體得) 형태에 생존의 역사다. 흔히 고고학과 역사학을 혼동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고학과 역사학은 엄연히 종류가 다른 학문이고 이것을 햇갈려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녕 아마추어들이다. 고고학을 두고 역사학을 위한 과학적인 학문이라 착각하는 아마추어들도 있다. 고고학은 역사학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좀더 진보된 과학적인 발견을 분석하는 학문이고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많은 타 종류의 학문들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대입할 수 있는 종합 집약적인 학문(Comprehensive Intensive Disciplines)이라 정의할 수 있다. 거기에는 역사학이 갖고 있는 문헌학(Philology) 비중이 높긴 하지만 어쨌든 고고학과 역사학은 별개의 학문이다. 우리가 흔히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하는 것은 석기 시대와 금속 도구 시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문명(Civilization)의 사전적 정의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말한다. 원시적인 인간의 생활, 삶의 형태들이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통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진화한 형태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에서 금속 도구를 사용하는 시대는 인류가 살아가는 삶의 질이 진보했다는 것에서 인류사에 큰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석기 시대의 인류는 생존을 위한 시기라 보면 된다. 그 자체가 원시적이었고 어쨌든 살아 남기 위한 생존 본능의 시대다. 특히 구석기 시대의 경우, 개별 집단 및 씨족 집단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타 집단을 만나게 되면서 함께 융합된 집단으로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인간은 원시 동물 개개별적으로 치면 매우 약한 존재로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원초적 본능에서 진화할 수 있는 뇌구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발달한 것에는 신경과학적인 구조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의 뇌는 다른 동물들의 뇌에 비해 크고 신경세포의 숫자도 훨씬 더 많다. 영장류의 뇌에서는 뇌가 커져도 신경세포의 크기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으며 영장류의 뇌에서 신경세포의 숫자를 10배 늘리려면 뇌가 11배만 커지면 된다. 하지만 같은 질량의 사람의 뇌에는 860억개의 신경세포가 있는데 이는 호모 에렉투스의 뇌 신경 세포의 개수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초의 도구를 사용했던 종인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두개골의 용량이 600cc에 불과한 종이지만 보통 현생인류의 탄생을 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의 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근거로 들 수 있는데 이는 거의 오랑우탄과 침펜지에 중간속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확연히 구분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웅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호모 루돌펜시스(Homo rudolfensis) 시기는 흔히 불이 발견되었다고 추정된 시기와 일치한 시기이고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뇌는 조금씩 진화해 갔다. 그러면 석기 시대라고 하는 인류사에 있어 도구적 진보(Instrumental progress)에 대해 어떤 논의들이 있을까? 이와 같은 도구적 진보에 대해 신경과학적인 부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발생학(Embryology)이다. 이를 두고 실제로 ‘발생학적 선택’ 이라고 하는데, 토마스 새들러(Thomas Sadler)의 저작 <사람발생학(Longmans Medical Embryolgy)>에 의하면 "뇌의 발생 과정에서 다른 동물의 뇌와 두드러지는 차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크기(Size)’, ‘구성(Construction)’, ‘에너지 소비(Energy consumption)’, ‘혈류량(Blood flow rate)’, ‘좌우 비대칭(Left-Right asymmetry)’ 등이다." 하고 하였다. 인간의 뇌는 멜론 비슷한 크기를 갖고 있으며 체중의 2.5%에 달하는 무게를 갖고 있다. 총 1천억 개 신경 세포와 1천조 개 시냅스가 있어 뇌 자체를 두고 작은 우주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뇌는 인간 에너지 소비량의 20%를 소모하는 존재이며, 혈류량도 750 ml/min라는 엄청난 양을 갖고 있고 좌우 뇌가 비대칭적으로 기능하고 있어 다른 동물들의 뇌와 세부적으로 다른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본능에서 벗어나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진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문명이라는 것도 탄생이 되는 것이고 개별적인 집단에서 좀 더 조직적인 집단으로 변모함으로써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천적으로 원시 생태계의 구조를 바꾸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어떠한 예술적 가치의 창달이라든지, 문화적, 문명적인 발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 토기를 가지고 여러 의미 부여를 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러한 해석론적 시각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에 있다. 예술적 가치, 문화, 문명적인 발상은 금속병용기 시기부터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때는 정주민족의 경우,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농업에 종사하며 안정화 되어가는 시기이고 삶의 질이 점차 풍족해져 가는 시기이다. 그래서 나는 구, 신석기의 경우 구석기는 원시 상태의 단계고 신석기는 문명 사회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박하며 반론을 재기하는 학자도 여럿 존재한다. 그러면 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프랑스 라스코나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라던지,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흔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문자가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어떤 체계적인, 혹은 갑자기 떠오르는 발상 등을 통해 표현하게 되는데 여기에 구체적으로 체계화 되어진 문자가 석기 시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동굴벽화나 암각화는 어떠한 진화된 사고에 의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픈 내용을 문자처럼 그릴수도 있고 자기가 속한 부족과 이미 약속되어진 언어 수단 및 부호가 될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도로 구체적이고 표현화된 예술작품의 생성은 석기 시대가 아닌 금속병용기 이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문자도 없던 시절에 예술 작품을 생각한다는 굉장히 문명사적으로도 언발란스한 일이다. 더불어 사람의 부분적인 문맹화 시대도 아닌 인간 전체가 문맹인 시기, 생존 본능, 씨족 보호 본능이 우선이던 시기에 어떠한 문명적 발상, 문화적 발상을 과연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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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8
  • 부남 왕국과 고대 동남아시아 문화
    부남 왕국의 출현 이전에도 이곳에서는 고도의 문화가 존재했던 것이 확실하며, 그것은 다량의 정교한 출토 유물들이 존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호치민 시 서쪽 껀저(Can Gio)라고 하는 곳에서 발견된 옥 귀걸이와 금귀걸이, 팔찌 등은 B.C 6세기로부터 B.C 1세기 정도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모양새가 매우 세련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곳은 참족의 영토로 부남과의 연계성이 나타나고 있음이 확실히 밝혀지고 있다. 그리하여 설화에서 언급되는 소마가 지배하던 곳은 단순히 원시적 단계의 미개 지역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부남은 이후기 5세기 초를 전후하여 카운딘야 혈통 계열로 내려오던 왕권을 장군 판시만(Phan Shih Man)이 쿠데타로 차지한 후 왕위 계승 문제로 혼란을 겪기도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그 영토들이 비약적으로 팽창하여 지배 영역은 동쪽으로 현 베트남 남부의 거의 모든 지역, 서쪽으로 현재의 캄보디아, 태국, 말레이반도, 미얀마에까지 확대되었다. 이는 대륙부 동남아시아 해안 지역 대부분을 그 지배 영역하에 둔 것이다. 그러나 부남이 동남아시아 남쪽 해안 지역을 모두 장악했다고 하여 로마나 아니면 진나라 시대(秦代) 이래 중원 왕조와 같이 넓은 영토의 대제국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지배의 영역은 부남 왕에게 복종하는 종속국들로 연결되는 범위였을 뿐이지 중앙에서 관리가 파견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부족들과 토착 지도자들의 지배권은 그대로 인정되는 형태였고 이들은 부남의 중앙 정부에 조공을 바치고 있는 정도였다. 단지『南齊書』에서 언급한 것 같이 복종하지 않는 국가들은 공격하여 그 백성들을 노예로 삼았다고 하는데 이러한 사료적인 부분을 분석해 볼 때 부남의 권력 중심과 주변부의 지배, 복종 관계를 참조할 수 있다. 당시 중국에서는 삼국 시대에 해당되는 시기라 부남은 삼국 가운데 가장 남부에 위치했던 오(吳)와 국교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삼국의 항쟁 기간에 교역을 통한 부(富)의 증대 및 외국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관심이 많았던 오나라도 부남과의 교류에 적극적이었기 때문에 양국의 인적 물적 교류는 활발했다. 오나라에서 파견된 주응(朱應)과 강태(康泰)는 부남을 거쳐 말레이반도의 몇 개 국가들까지 방문하고 돌아오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을 주응(朱應)은『扶南異物志』, 강태(康泰)는『扶南土俗』과『吳時外國傳』같은 기행문을 책으로 남겼다. 아쉽게도 현재 이 책들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그들의 관찰은 중국의 사료 곳곳에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초기 부남에 대한 중국 사서『南齊書』와『梁書』등의 기록이 비교적 상세하고 정확하게 그들에 대한 풍습과 문물을 서술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응(朱應)과 강태(康泰)의 기록을 참조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부남에서는 재화를 유통하는 수단으로 금과 은이 사용되었다. 남자는 빈부에 따라 비단 천이나 무명천으로 치마처럼 옆으로 감싸 몸을 가리고, 여성은 머리로부터 입는 단벌의 의상을 착용했다고 중국 사서들은 전하고 있다. 각종 금은 그릇을 즐겨 사용했다는 것으로 보아 매우 풍족한 사회였음을 알 수 있고, 왕은 수 개 층으로 이루어진 궁에 살며, 백성들은 주상 가옥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해지고 있다. 현재도 동남아시아 사회에서 인기 있는 닭싸움이 성했고 돼지싸움도 중요한 유희였다고 한다. 왕은 행차할 때 치장한 코끼리를 타고 왕비를 비롯한 부녀자들도 능히 코끼리를 탈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물을 파지 않고 한 연못물을 공동으로 사용했다 하며 여러 가지 장례 풍습도 소개되고 있다. 주로 화장을 했으나 강물에 시체를 버리든가 들판에 두어 새가 처리하게 하는 조장 풍속도 있었고 그냥 땅에 매장하는 방식도 있었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부분은 중국 사료에 기재되어 있는 부남의 형벌 제도라 할 수 있는데『南齊書-蠻東南夷列傳』에는 그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나라에는 감옥이 없다. 만약 송사가 생기면, 달걀만한 금가락지를 끓는 물에 넣어 그것을 꺼내게 하든가 쇳덩어리를 붉게 달구어 손 위에 올려놓고 일곱 보를 가게 하면, 죄 있는 자는 손이 타고 죄 없는 자는 상하지 아니한다. 또, 물속에 들어가게 하면 옳은 자는 가라앉지 아니하고 옳지 않은 자는 즉시 가라앉는다.” 위 사료에서 언급한 것처럼 감옥이 없는 것은 인력이 중요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되도록 사형을 적게 판결하고 노역으로 충분히 이용하기 위해 즉각적인 대응 처벌을 하는 것으로 끝냈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러한 즉결처분은 노예 제도가 적절한 처벌로 사용되기도 했을 것이다. 송사가 일어난 경우에 해결 방식은 매우 황당해 보이기도 하지만 당시 동남아시아의 사회 현상으로 볼 때 법 제도와 같은 확실한 중앙 집권에 의지하지 않고 신권(神權)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확실한 판단이 힘들기 마련인 경우, 종교적 신성성과 응보 관념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이러한 판결 방식이 충분히 존재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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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7
  • 프랑스 대통령의 발언, 유럽 전체의 파국이 될 수 있는 위험한 도박
    최근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매우 위험한 발언을 표명하면서, 정치적 파장을 몰고 왔다. 이것은 프랑스 핵무기가 유럽 방위의 일부분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언급한 발언이다. 즉 프랑스의 핵무기가 자국 방어를 위한 목적을 넘어서서, 유럽의 핵 억지력 강화로까지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러한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프랑스의 핵 교리에도 분명히 어긋날 뿐만 아니라, 핵 강국인 러시아에 대한 자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매우 위험한 발언이다. 프랑스가 핵보유국이 된 까닭은 적은 핵무기로 미국에 의존하지 않고, 외부의 실질적 위협으로부터 자국 영토를 독자적으로 방어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또 핵무기는 재래식 무기의 열세를 만회할 수 있는 효과적 수단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참담한 패배를 경험했던 프랑스로서는 이 점이 특히 중요했다. 사실 프랑스는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여러 번 핵실험을 남태평양에서 실시했으며, 지하 핵실험도 감행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 해외령이 남아 있는 프랑스로서는 세계에 어디서든지 자국의 영토에 대해 위협이 된다면, 이에 대한 핵 반격도 염두에 두고 있다. 물론 이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샤를 드골 대통령이 프랑스의 핵무장을 추진했던 것은 미국의 핵우산 정책에 대한 신뢰성 때문이다. 거기에는 유럽이 당시 소련의 재래식 공격을 받았을 때에, 미국이 과연 핵 보복을 선제적으로 할 것인지, 그리고 이때 어떤 사용조건인지에 관해 드골 대통령의 합리적 의심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핵 보복을 감행할 때 내세웠던 전제조건은 소련의 재래식 공격이 나토를 압도했을 때, 혹은 유럽이나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핵 공격이 임박했을 때이다. 그런데 두 경우 모두 언제든 그러한 조짐이 보인다면, 미국은 핵무기를 통한 선제공격도 불사하겠다는 뜻도 된다. 실로 무시무시한 얘기다! 드골 대통령은 아마도 이러한 미국의 선제공격이 소련의 맞대응으로 미국 본토에 대한 위협이 있을 것인데, 이를 감수하고라도 과연 그렇게 선제공격을 감행할 군사적 능력이 미국에게 있느냐라는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보면, 프랑스의 핵무장이 이 두 가지 조건을 상쇄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프랑스의 핵무장이 소련의 재래식 무기에 대한 나토의 열세를 만회하고, 대소 핵전략도 상쇄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도 이러한 조건이라면, 프랑스의 핵무장을 굳이 반대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것은 외교적 협상에 따른 결과이다. 프랑스는 약 300개의 핵탄두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거리가 300-500 킬로미터 정도인 공대지 순항미사일과 사거리가 약 10,000 킬로미터 정도인 잠수함 탑재 탄도미사일, 사거리가 약 3,500 킬로미터 정도인 지상형 중거리 탄도미사일 등등이 있다. 또 프랑스는 핵추진 항공모함을 통해 핵무기를 다양하게 활용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프랑스의 핵무기는 그 사용에 있어서 분명히 외부로부터의 명확한 위협을 전제한다. 사실 프랑스는 핵무장 이후로 핵무기를 사용할 만큼 외부로부터의 명확한 위협이 없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는 핵보유국이지만, 이를 실제로 사용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에 외교를 통해 국제사회에 영향력을 유지하곤 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유럽은 러시아에 대한 긴장도가 높아졌다. 그러나 이를 근거로 프랑스의 핵무기를 유럽 방위에 활용하려는 시도는 타당하지 않다. 프랑스는 우크라이나로부터 약 2,100 킬로미터, 러시아로부터 6,200 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사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적 영향도 없다. 특히 프랑스 자체의 영토에 아무런 위협이 존재하지 않는데, 핵무기로 유럽의 억지력을 강화하는 것은 오히려 프랑스 자체의 방어력을 약화시킬 우려가 크다.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당장 러시아의 거친 비난을 받았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자. 마크롱 대통령의 발언은 매우 현실적이지도 않고, 아무런 실익도 없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프랑스의 핵무기를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동유럽 쪽에 전진 배치하는 것을 뜻한다. 이에 관해 가장 긍정적인 신호를 보내는 국가는 독일이다. 전범국인 독일은 핵무기를 보유하지도, 배치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프랑스의 핵무기를 활용하면서, 그 비용을 어느 정도 부담하는 것도 현실적으로 나쁘진 않다. 그런데 독일의 이러한 태도에는 차후 재무장이 진전되면, 핵무장도 배제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 프랑스가 말하는 외부 위협이라고 것도 현재 시점에서 보면 러시아일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가 프랑스의 위협이라고 말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물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노력이 실질적으로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어서, 유럽연합의 핵심축인 프랑스가 핵무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려는 의도는 이해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오히려 자신의 조급함을 노출하는 것에 불과하고, 더 나아가 러시아의 핵전쟁 위협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갖고 왔다. 실로 무모한 정략적 발언이다! 프랑스의 핵전력이 러시아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에서 마크롱 대통령의 무모한 발언은 러시아를 자극함으로써, 자칫 유럽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 올 수도 있다.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장기전으로 인해 우크라이나가 수세에 몰리고 있는데, 이 전쟁이 유럽 전체로 확장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나토와 러시아의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고, 이는 실로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나리오는 누구도 바라는 바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이 완전히 배제되기는 어렵다. 실제로 핵무기를 직접 사용한 국가는 미국이 유일한데, 이를 통해 한 가지는 확인할 수 있다. 즉 핵무기의 가공할만한 위력이 전쟁을 빨리 끝내는 데 효과적이었다. 이때는 일본이 핵무기를 갖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서로 핵보유국이라면, 이 유용성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 마크롱 대통령의 핵무기 발언은 아무리 정치적이라고 해도 러시아와의 관계를 적대적 관계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오히려 그 발언이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핵무기가 언제든 어디서든 프랑스를 겨누고 있음을 공언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러시아의 핵무기가 프랑스를 겨누면, 사실상 유럽 전체를 언제든 핵 전쟁터로 만들 수 있다. 거기에는 러시아가 지금까지 한 번도 핵무기를 직접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 별로 현실적 이득이 없기 때문이라는 명확한 명분도 있다. 요즘 러시아가 핵전쟁 연습을 벨라루스와 공동으로 벌이는 것도,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과 신형 무기를 실전 배치하고, 러시아 군대를 현대화하는 것도 이를 유럽에 인식시키기 위함이다. 그와 같은 명분은 러시아의 인내심과 연관되어 있는데, 이를 누구든 자극하면 언제든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유럽 안보에서 러시아와 등을 지는 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이와 정반대로 진행되니까, 유럽연합 스스로가 국제적 지도력을 포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국가의 책임 있는 지도자가 핵무기를 섣불리 언급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이에 동조하는 지도자도 유럽 전체를 자칫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이를 계기로 군비경쟁에 가세하는 것도 과연 과거의 악몽을 실로 망각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일부에서는 프랑스 대통령의 돌출발언에 가까운 언급이 자국 원전 수출을 동유럽에 확장하고, 또 유럽산 무기의 판매와 취득을 강화하려는 마크롱 대통령의 포석이 깔려 있다고 보기도 한다. 또 프랑스가 핵무기를 언급하는 것은 유럽연합과 나토에서 프랑스의 지도적 역할을 보여줌으로써, 영국이나 독일을 은근히 견제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유럽의 안보에서 주도권을 프랑스 쪽으로 갖고 오는 방법이 핵무기 보유를 통해 러시아와 껄끄러움을 어느 정도 감안하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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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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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의 범주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역사 시대도 아니고 또한 역사학의 범주도 아니다. 역사학의 범위는 엄연히 체계화된 문자로 기록이라는 것이 나타나고 여러 문명이라는 존재가 피어나던 시기부터 시작된다. 기록화 되긴 이전의 시대인 구석기(Paleolithic)와 신석기(Neolithic)는 인류사(Human history)의 범주로 들어간다. 물론 이것도 역사긴 하지만 성문화 되어진 역사가 아닌 존재만 가지고 있는, 체율체득(體律體得) 형태에 생존의 역사다. 흔히 고고학과 역사학을 혼동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고고학과 역사학은 엄연히 종류가 다른 학문이고 이것을 햇갈려 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정녕 아마추어들이다. 고고학을 두고 역사학을 위한 과학적인 학문이라 착각하는 아마추어들도 있다. 고고학은 역사학을 위한 학문이 아니라 좀더 진보된 과학적인 발견을 분석하는 학문이고 고고학을 연구하는데 있어 많은 타 종류의 학문들을 다양하게 수용하고 대입할 수 있는 종합 집약적인 학문(Comprehensive Intensive Disciplines)이라 정의할 수 있다. 거기에는 역사학이 갖고 있는 문헌학(Philology) 비중이 높긴 하지만 어쨌든 고고학과 역사학은 별개의 학문이다. 우리가 흔히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하는 것은 석기 시대와 금속 도구 시대의 차이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문명(Civilization)의 사전적 정의는 고도로 발달한 인간의 문화와 사회를 말한다. 원시적인 인간의 생활, 삶의 형태들이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통하여 기하급수적으로 진화한 형태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에서 금속 도구를 사용하는 시대는 인류가 살아가는 삶의 질이 진보했다는 것에서 인류사에 큰 혁명적인 전환기를 맞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선 석기 시대의 인류는 생존을 위한 시기라 보면 된다. 그 자체가 원시적이었고 어쨌든 살아 남기 위한 생존 본능의 시대다. 특히 구석기 시대의 경우, 개별 집단 및 씨족 집단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타 집단을 만나게 되면서 함께 융합된 집단으로 살아가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인간은 원시 동물 개개별적으로 치면 매우 약한 존재로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과 동물이 다른 점은, 원초적 본능에서 진화할 수 있는 뇌구조가 다르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가 발달한 것에는 신경과학적인 구조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인간을 비롯한 영장류의 뇌는 다른 동물들의 뇌에 비해 크고 신경세포의 숫자도 훨씬 더 많다. 영장류의 뇌에서는 뇌가 커져도 신경세포의 크기가 거의 변하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으며 영장류의 뇌에서 신경세포의 숫자를 10배 늘리려면 뇌가 11배만 커지면 된다. 하지만 같은 질량의 사람의 뇌에는 860억개의 신경세포가 있는데 이는 호모 에렉투스의 뇌 신경 세포의 개수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최초의 도구를 사용했던 종인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두개골의 용량이 600cc에 불과한 종이지만 보통 현생인류의 탄생을 나는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is)의 출현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근거로 들 수 있는데 이는 거의 오랑우탄과 침펜지에 중간속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확연히 구분히 되기 때문이다. 참고로 타웅에서 발견된 오스트랄로피테쿠스는 도구를 사용한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호모 루돌펜시스(Homo rudolfensis) 시기는 흔히 불이 발견되었다고 추정된 시기와 일치한 시기이고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사피엔스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뇌는 조금씩 진화해 갔다. 그러면 석기 시대라고 하는 인류사에 있어 도구적 진보(Instrumental progress)에 대해 어떤 논의들이 있을까? 이와 같은 도구적 진보에 대해 신경과학적인 부분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이 발생학(Embryology)이다. 이를 두고 실제로 ‘발생학적 선택’ 이라고 하는데, 토마스 새들러(Thomas Sadler)의 저작 <사람발생학(Longmans Medical Embryolgy)>에 의하면 "뇌의 발생 과정에서 다른 동물의 뇌와 두드러지는 차이를 찾을 수 있는 것은 ‘크기(Size)’, ‘구성(Construction)’, ‘에너지 소비(Energy consumption)’, ‘혈류량(Blood flow rate)’, ‘좌우 비대칭(Left-Right asymmetry)’ 등이다." 하고 하였다. 인간의 뇌는 멜론 비슷한 크기를 갖고 있으며 체중의 2.5%에 달하는 무게를 갖고 있다. 총 1천억 개 신경 세포와 1천조 개 시냅스가 있어 뇌 자체를 두고 작은 우주라고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뇌는 인간 에너지 소비량의 20%를 소모하는 존재이며, 혈류량도 750 ml/min라는 엄청난 양을 갖고 있고 좌우 뇌가 비대칭적으로 기능하고 있어 다른 동물들의 뇌와 세부적으로 다른 구조를 띄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는 본능에서 벗어나 생존하기 위해 끊임없이 진화하고 진보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렇기에 문명이라는 것도 탄생이 되는 것이고 개별적인 집단에서 좀 더 조직적인 집단으로 변모함으로써 대형 동물이나 포식자들의 천적으로 원시 생태계의 구조를 바꾸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시기에는 어떠한 예술적 가치의 창달이라든지, 문화적, 문명적인 발상 따위는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석기 시대 토기를 가지고 여러 의미 부여를 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는데 나는 그러한 해석론적 시각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에 있다. 예술적 가치, 문화, 문명적인 발상은 금속병용기 시기부터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 때는 정주민족의 경우, 수렵과 채집에서 벗어나 농업에 종사하며 안정화 되어가는 시기이고 삶의 질이 점차 풍족해져 가는 시기이다. 그래서 나는 구, 신석기의 경우 구석기는 원시 상태의 단계고 신석기는 문명 사회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로 보고 있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반박하며 반론을 재기하는 학자도 여럿 존재한다. 그러면 석기 시대에 그려진 것으로 프랑스 라스코나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라던지, 한국의 반구대 암각화와 같은 흔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이냐고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시절에 문자가 존재했는지의 여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인간의 사고는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어떤 체계적인, 혹은 갑자기 떠오르는 발상 등을 통해 표현하게 되는데 여기에 구체적으로 체계화 되어진 문자가 석기 시대에 등장하지 않은 것은 확실하다. 그러면 동굴벽화나 암각화는 어떠한 진화된 사고에 의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자신이 표현하고픈 내용을 문자처럼 그릴수도 있고 자기가 속한 부족과 이미 약속되어진 언어 수단 및 부호가 될 수도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고도로 구체적이고 표현화된 예술작품의 생성은 석기 시대가 아닌 금속병용기 이후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는 것이다. 문자도 없던 시절에 예술 작품을 생각한다는 굉장히 문명사적으로도 언발란스한 일이다. 더불어 사람의 부분적인 문맹화 시대도 아닌 인간 전체가 문맹인 시기, 생존 본능, 씨족 보호 본능이 우선이던 시기에 어떠한 문명적 발상, 문화적 발상을 과연 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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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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