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31(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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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에 첫 발을 디딘 때부터 현재까지의 아메리카는 전 세계적으로 음주문화가 보편된 국가다. 전 세계에서 몰려든 여러 이민자들의 다양한 문화들이 물자가 풍부한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서로 융화되면서 함께 어울리는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게 되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크게 만들어 대륙적인 자부심을 뽐냈던 기조가 음주 문화에도 큰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생각된다. 

 

매우 어려운 시기에는 곡물로 발효한 술이나 과실로 발효한 술 등의 소비량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아메리카 식민지들은 흑인 노예들에게도 닭고기를 식사로 나눠줬던 풍요로운 곳이었다. 그리고 1700년까지 아메리카 식민지 시민들은 발효된 복숭아 주스와 진한 사과로 증류한 증류주, 그리고 럼주를 마셨다. 이들은 대부분 서인도 제도에서 수입하거나 서인도 제도에서 재배된 당밀을 증류해 만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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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미국의 대륙금주령, 출처 : Thirsty Swagman, by Claire Bolgil

 

이와 같이 아메리카에서 술이라는 것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융합된 아메리카 식민지 문화의 중요한 부분 중 하나였고 사람들은 바베큐를 구울 때나 간혹 시장이 열리는 날, 그리고 각 주(州)에서 벌어지는 선거 때마다 술 주전자나 술이 든 그릇을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선거 후보자들은 시민들에게 공짜 술을 아낌없이 나눠줬고 이에 인색한 후보자는 선거에서 이길 기회가 없었을 정도였다. 심지어 금욕적인 종교 생활로 유명한 뉴잉글랜드 사람들도 술을 많이 마셨다. 

 

청교도들은 알코올을 ‘신의 선한 창조물’이라고 불렀다. 이는 자신의 조상들과 신이 주신 자랑스러운 문화적 산물이지만 조심하게 그 문화를 즐겨야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1770년이 되자 아메리카 13개 주(州) 주민들은 식사 때마다 술을 일상적으로 마시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하루를 시작하면서 한 잔, 하루를 마무리하면서 한 잔으로 자신들 인생의 시간을 마무리했다. 


이후 아메리카 13개 주(州)가 독립하여 미국이 되었고 미국의 모든 연령대의 사람들이 술을 마셨는데, 아기들은 부모들이 럼을 마시고 남은 머그 잔 바닥에 설탕이 많이 든 부분을 마시곤 했다. 신생국이었던 당시 미국인들은 한 사람당 연간 3.5갤런 정도의 알코올을 소비했고 여기서 표기되는 3.5갤런 알코올은 일반적인 술 3.5갤런이 아니라 순수 에탄올 3.5갤런을 뜻한다.  

 

이는 리터 기준 13.24ℓ, 우리 한국과 비교한다면 16.9℃치 소주를 220병 정도 마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음주량을 과시했다. 미국독립전쟁이 일어날 무렵에 평균적인 사람이 80프루프 치 술을 연간 8.75갤런 마신다는 것으로 통계가 잡히는데 현재 소비 수준보다 45%나 높은 수치를 보이고 있을 정도로 미국 초창기 때 음주량은 대단히 높은 수준이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고위층이 주로 술을 마시는 편이었다. 건국의 아버지들도 종종 술을 마셨는데 대니얼 오크렌트(Daniel Okrent)의 기록에 의하면, 조지 워싱턴은 농장에 증류기를 가지고 있었고, 미국 2대 대통령이자 미국 역사상 최초의 부통령인 존 아담스(John Adams, 1735~1826)는 매일 진한 사과주를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했다고 한다. 


미국 3대 대통령인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은 와인 수집뿐만 아니라 유럽 포도를 수입해서 직접 재배하여 와인을 만드려고도 했다. 그러나 기후와 토지의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에 실패했으나 직접 호밀을 길러 위스키를 만드는 등 대단한 애주가였다. 미국의 4대 대통령인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 1751~1836)은 매일 위스키를 한 파인트씩 마셨고, 미국 육군 사병들은 1782년 이래로 매일 배급의 일환으로 4온스의 위스키를 받았다. 

 

한편 조지 워싱턴 자신은 '강한 주류의 온건한 사용으로 인한 이로운 점은 모든 군대에서 경험되었기 때문에 이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라고 말했으며 실제로 대통령 선거를 유세하면서 맥주를 돌렸었다. 메사추세츠 지사였던 사무엘 아담스(Samuel Adams, 1722~1803)는 아예 주류 사업에 관여하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1800년대가 되자 영국이 노예 제도와 관련됐다면서 미국의 럼주 생산과 당밀 생산에 참여를 중단했고 그리하여 미국 연방 정부는 럼주에 세금을 물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세금부과에 럼주의 소비가 줄어드는 도중 중서부 지대에서는 이른바 '옥수수 벨트(Corn Belt)'가 생기게 되었다. 


이는 옥수수를 운반하다가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농부들이 아예 옥수수를 위스키로 만들어서 팔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옥수수로 만든 버번 위스키로 인해 1820년대에는 위스키가 25센트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팔리게 되었다. 당시 차나 커피, 와인, 맥주, 심지어 우유보다 더 저렴한 가격이었다. 거기에 영국 해군의 준사관 이하에게 희석한 럼주를 매일 지급하던 관행을 그대로 따르고 있었던 미국 해군과 미국 해안경비대 역시 비싸진 럼 대신 저렴한 버번을 납품 받아 지급하는 것으로 바꾸게 되면서 위스키의 소비가 폭증하게 된다. 

 

그러한 위스키 소비 경제로 인해 단가가 계속 저렴해지면서 전국적으로 증류소가 5배 이상 증가하게 된다. 그렇다면 당시 위스키는 미국에서 어느 정도로 소비되었을까? 도시에서는 노동자들이 주말 동안 마신 술로 인한 숙취로 월요일에 출근을 못했을 때 사장들 본인들부터가 숙취로 인한 결근을 이해해줬을 정도였다하니 소비량이 거의 폭발적 수준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1830년에는 시골 마을에서 종이 오전 11시와 오후 4시마다 울렸는데 그 이유는 럼과 물이 섞인 칵테일인 그로그를 마실 시간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당시 영국인 여행자였던 프레데릭 메리어트는 자신의 저서인 에서 “미국인들은 술 한 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면 반드시 술을 마셔야 한다. 헤어져도 마셔야 한다. 당신이 누군가와 친분을 맺으면, 마셔야 한다. 당신이 거래를 끝내면 마셔야 한다. 만약 싸우게 되더라도 마셔야 한다. 화해하게 되면 마셔야 한다. 날씨가 더우면 마신다. 날씨가 추워도 마신다. 선거에 성공하면 마시면서 기뻐한다. 그렇지 않으면, 마시면서 욕을 한다. 그들은 아침 일찍부터 술을 마시기 시작하고, 밤 늦게 떠난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마시기 시작하고, 곧 무덤에 갈 때까지 마신다." 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1830년이 되면서 1인당 80프루프 짜리의 술을 1주마다 1.7병씩 마심으로써 연간 순수 에탄올 섭취량이 7갤런에 달했다. 이러한 음주문화의 기조가 1900년대 초까지 계속되었기 때문에 다양한 사회 문제들이 야기되면서 수정헌법 18조가 나와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금주령은 금주를 권유하던 방식이 아니었고 강제로 제재했다는 것이 문제였는데 그로 인해 미국인들이 사회적 불만들이 싹트게 되었고 결국 1933년 2월에 수정헌법 21조가 의회를 통과했다. 같은 해 12월 5일 인준이 완료되어 금주법이 해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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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륙금주령과 이후, 미국의 음주문화가 보편화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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