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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어와 한국 문화, 네팔과 쿠바에서도 배운다. 세종학당 18곳 신규 개설
    문화체육관광부는 오늘 24일, 올해 열다섯 나라에 세종학당 18곳을 신규 개설했다고 발표했다. 이번 개설로 인해 세종학당은 전 세계 88개국 256곳으로 확대된다. 특히 네팔과 쿠바에 처음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교육기관이 마련된다.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와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세종학당이 새로이 문을 연다. 네팔은 고용허가제를 통해 많은 노동자가 한국으로 향하고 있어 한국어 학습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기존의 학습 여건이 미흡한 상황이었다. 문체부는 카트만두에 세종학당이 지정됨에 따라 한국어 교육과 한국 문화 확산이 더욱 체계화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쿠바 역시 한국과 지난 2월 수교를 맺어 다양한 문화와 인적 교류가 예상된다. 중남미 지역은 한국어 학습 열기가 높은 곳으로 평가받고 있다. 세종학당이 한국어를 통한 문화교류 거점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문체부 관계자는 "중남미는 한국어 학습 열기가 높은 권역"이라며 "세종학당이 한국어를 통한 문화교류의 거점 역할을 해낼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세종학당의 확장은 네팔과 쿠바뿐만 아니라 유럽, 아시아, 오세아니아 등 다양한 지역에 걸쳐 이루어졌다. 독일의 베를린과 뷔르츠부르크,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 스웨덴의 스톡홀름,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와 지자흐, 이탈리아의 팔레르모, 인도의 벵갈루루, 중국의 청두, 카자흐스탄의 코스타나이, 크로아티아의 스플리트, 태국의 방콕, 폴란드의 카토비체, 필리핀의 일로일로와 케손시티, 호주의 퍼스에 세종학당이 신규 개설된다. 이번 개설로 세종학당은 전 세계 88개국에 256곳이다. 지난해 온·오프라인을 통해 한국어를 공부한 수강생은 21만 6,226명으로 전년 대비 20.8% 증가했다. 2020년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의 성장을 기록한 셈이다. 이러한 성과는 전 세계적으로 한국어와 한국 문화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종학당재단 관계자는 "올해 세종학당 공모 경쟁률이 5.4대 1에 달할 만큼 각 나라의 한국어 학습 열기가 뜨겁다"라며 "내실 있게 운영되도록 관리·감독을 한층 강화하겠다"라고 밝혔다. 세종학당은 앞으로도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계속해 나갈 계획이다. 세종학당의 확장은 단순히 한국어 가르치는 교육기관의 증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 문화의 세계적인 확산과 교류의 거점으로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각 나라의 세종학당은 한국어 교육뿐만 아니라 한국의 전통문화, 현대 문화, 예술 등을 소개하며 한국과 해당 국가 간의 문화적 교류를 촉진하는 역할을 한다. 이번 세종학당의 신규 개설은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열정이 전 세계적으로 높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네팔과 쿠바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세종학당이 성공적으로 운영되어 많은 사람이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깊이 있게 이해하고 즐길 수 있기를 기대한다.
    • 뉴스
    • 교육
    2024-06-24
  • 글로벌 웹툰 전시로 K-콘텐츠 확장, 필리핀부터 유럽까지 전략 진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동남아시아와 유럽을 대상으로 한국 만화·웹툰 전시를 개최하면서 K-콘텐츠의 글로벌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는 BTS와 블랙핑크 같은 K-팝 아티스트들이 해외에서 성공적으로 영향력을 넓혀온 방식을 웹툰에 적용하려는 전략의 일환이다. 웹툰 인구를 확장하고 국내 기업의 해외 시장 진출을 촉진하기 위함이다. 2022년 세계 시장에서 동남아시아 만화·웹툰 시장의 비중은 5%로 비교적 작지만, 한류에 대한 높은 관심 덕분에 이 지역에서의 수요 창출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평가된다. 또한, 유럽에서는 이미 확립된 일본 망가 소비층이 웹툰으로 이동할 수 있는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는 필리핀에서 시작하여 베트남, 인도네시아, 벨기에, 이탈리아, 싱가포르 등으로 순차적으로 이어진다. 각 국에서의 전시는 현지에서 인기 있는 K-콘텐츠 성격을 반영하여 선호도가 높은 웹툰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필리핀에서는 특히 로맨틱 코미디와 드라마 장르가 인기가 높다는 점을 고려하여, '김 비서가 왜 그럴까'와 '옷소매 붉은 끝동'을 중심으로 전시가 진행된다. '김 비서가 왜 그럴까'는 이미 현지에서 드라마로 리메이크되어 큰 성공을 거둔 바 있으며, OTT 플랫폼 Viu에서 3주 연속 정상에 오르는 등 흥행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전시장은 웹툰 속 부회장실과 비서실 등을 실제와 같이 재현하여 방문객들의 흥미를 끌 계획이다. '옷소매 붉은 끝동'의 경우, 작화를 맡은 조혜승 작가가 직접 현지에서 홍보 활동을 벌이며, 이야기 콘서트와 만화 그리기 연수회 등을 통해 웹툰에 관심을 촉발시킨다. 이 외에도 각 나라에서 재외 한국문화원을 통해 웹툰 공모, 이야기 콘서트, 사업 교류회, 웹툰 연수회 등 다양한 부대 행사가 마련될 예정이다. 이번 웹툰 전시는 한국 웹툰의 다양성과 매력을 세계에 알리고, 국제적으로 한국 문화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체육관광부 관계자는 이번 전시가 국내 웹툰 기업들의 해외 시장 진출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것으로 보고 있으며, 전시를 통해 새로운 글로벌 팬층을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 뉴스
    • 문화/행사
    2024-06-20

문화 검색결과

  •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 기념 문화 예술 교류 '현대무용' 공연 열려...
    지난 28일 용산 아트홀 대극장 '미르'에서 열린 한국·이탈리아 수교 140주년 기념 현대무용 공연은 양국 간의 문화 예술 교류를 재확인했다. (사)국제문화개발연구원(ICDI) 주최로 진행된 이번 공연은 한국의 MUT DANCE와 이탈리아의 GDO DANCE COMPANY가 주축이 되어 진행되었다. 이번 공연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중단되었던 문화 예술 교류의 재개를 의미한다. 이탈리아문화원과 (사)무트댄스, 그리고 GDO(Gruppo Danza Oggi)/UDA(Urban Dance Academy)가 주관했다. 특히 협업 공연은 이탈리아 대사관 후원으로 두 번째 성사되며 양국 간의 문화적 유대를 강화했다. 주한 ‘미켈라 린다 마그리’ 이탈리아문화원장은 “2024년 한국과 이탈리아 수교 140주년과 2024·2025 한국·이탈리아 문화 교류의 해를 맞았다. 주한 이탈리아문화원이 양국 간 열리는 이번 문화 교류 공연을 주관해 앞으로 주한이탈리아 대사관과 특히 공관장인 에밀리아 가토 이탈리아 대사님과 함께 더욱 다양한 문화 행사를 준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번 공연은 다양한 현대무용 작품으 구성되었다. 첫 번째로 GDO 무용단의 일레냐 로씨가 선보인 'That’s Life'는 두 남자와 한 여성 사이 사랑의 다툼을 다루며 인간 내면의 긴장과 감정을 표현했다. 이 작품은 사랑의 예상치 못한 전개와 퇴색, 그리고 아이러니를 통해 순수한 인간적 삶의 느낌을 전달했다. 두 번째 작품인 'Query'는 김정아 예술감독이 이끄는 MUT DANCE에 의해 선보여졌다. 이 작품은 4차 산업 혁명과 A·I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공간, 이성, 가치관을 표현하며 무대 뒤 스크린 영상을 통해 혼돈의 상황을 그렸다. 작품 'Query'는 제38회 한국무용제전에서 우수작품상 수상도 했다. 세 번째 작품인 'SOSPESO-SOSPESO'는 다시 일레냐 로씨가 등장하며 선보였다. 한 남자의 불안정한 심리적 변동을 다루면서 인간의 정지된 영혼과 그 주변의 변화를 묘사했다. 마지막 작품 'At the end Inter-Action'은 한국과 이탈리아의 안무자 및 무용수들이 공동으로 협업하여 제작한 작품이다. 일상 속 선입견과 편견의 부재를 드러내며 사람들 사이의 무의미한 생각을 탐구했다. 이번 공연은 임실비아 서울심포니오케스트라 단장 겸 예술 총감독의 인사말로 마무리했다. 임 감독은 “참석자들의 발걸음이 이번 공연을 빛내주었다.”라며 “앞으로 용산이 국제문화교류의 중심지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기대에 찬 인사말을 전했다. 이번 공연을 통해 한국과 이탈리아는 수교 140주년을 맞이해 양국 간 문화적 유대를 더욱 공고히 했다. 앞으로도 지속적인 문화 교류와 협력을 이어 나갈 것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용산구청장 박희영은 공연이 용산에서 열린 것에 의미를 부여했다. 그리고 용산을 국제문화교류의 핵심지로 발전시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이번 공연은 양국 간의 문화 예술 교류가 더욱 성숙하고 지속적인 협력으로 이어질 것을 기대하게 했다.
    • 문화
    • 예술
    2024-06-03

칼럼 검색결과

  • "아랍의 봄" 사건으로 유럽이 받은 영향, 아랍계 민족들의 유럽 정착 및 난민화
    "아랍의 봄"이 유행할 때 과거 북아프리카의 많은 국가들을 식민 지배했고 현재도 가장 지분이 많은 프랑스는 아랍의 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된다. 알제리와 튀니지의 불안은 옛 종주국으로써 북아프리카 각 지역에 지분을 가지고 있는 프랑스에게도 이와 같은 사태는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특히 북아프리카의 경제난으로 인해 북아프리카 이민자들이 끝없이 유입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만약에 이들이 아랍의 봄 혁명에 영향을 받기라도 하면 프랑스 내부도 시끄러워질 수 있는 요지가 있다. 이는 프랑스 내에서 극우파가 득세했던 상황과도 관련이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아프리카계 이민자들에 대한 반감을 갖고 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었으며 자국 국민들의 이권을 먼저 보호하라는 요구가 빗발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사르코지 대통령은 리비아 내전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시민군들과 함께 카다피의 독재 정권을 끝내고 민주화의 첫 단계에성공을 거두었으나, 201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서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에게 1차 투표에서는 28.6% 대 27.1%로 패배했으며, 2차 투표에서도 48.3%로 51.7%의 올랑드에게 3.4%, 110만표차로 패배했다. 사르코지는 임기 중에 사망한 조르쥐 퐁피두(Georges Pompidou, 1911~1974, 4년 10개월, 1969~1974)와 프랑수아 미테랑(François Mitterrand)에게 패배한 발레리 지스카르데스탱(Valéry Giscard d'Estaing, 7년 재임)에 이어 30년 만의 단임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퇴임했다. 게다가 전임 대통령인 자크 시라크(Jacques Chirac)까지 프랑수아 올랑드 지지를 선언하면서 사르코지는 완전히 고립되었고, 여기에 카다피 사건에 대한 몇몇 불편한 진실까지 드러난 부분이 결정적으로 사임한 원인이 되었다. 이리하여 프랑스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올랑드 역시 유럽의 경제위기인 유로화 사태가 계속 되는 상태에서 말리 내전에 개입한 것은 재정적인 부담으로 크게 작용했으며, 정권의 지지도가 다시 떨어지는 등 제대로 된 상황을 타개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이탈리아와 발칸 반도 국가들도 큰 영향을 받아 시위가 일어났다. 이탈리아에서는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총리의 하야를 요구하였고 알바니아와 세르비아도 영향을 받아 정권 퇴진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이탈리아의 경우, 국가신용등급 강등과 더불어 계속되어 발생하는 베를루스코니 총리의 섹스 스캔들로 인해 이탈리아의 정계는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베틀루스코니는 사생활 보호법을 개정해 언론을 통제하려 했다. 예를 들어 사법당국이 녹취한 내용을 신문이나 웹사이트에 올려 사익에 반하거나 편견을 조장한다고 판단되면 48시간 이내에 수정해야 하고 여기에 불응하면 구금 또는 벌금형에 처하게 하는 것인데, 문제는 베를루스코니가 쏟아낸 막말이 언론에 공개되자마자 모든 이탈리아 시민들이 이를 페러디하여 수많은 조롱이 섞인 광고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이미 이탈리아 내에서 경제 위기는 가속화되고 있었던데다 베를루스코니가 특단의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채 수익률은 7일 연 6.77%까지 치솟았다. 이어 정부 부채는 2조 6000억 달러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많아 파산 위기에 놓이자 로마에 10만 명의 시위대가 모여 폭동 직전까지 가게 된다. 결국 2011년 11월 12일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하야하여 마리오 몬티(Mario Monti) 총리의 중도 내각이 들어섰고, 뒤이은 선거에서 이탈리아 민주당이 제1당이 되었다. 비록 상원 과반에 실패하여 옛 집권당과의 연정은 불가피했지만 베를루스코니는 그 동안 스스로 저지른 불법행위로 확실하게 제명되었다. 또한 이탈리아는 튀니지의 재스민 혁명 이후에 튀니지에서 150km 떨어져 있는 람페두사 섬에 소요 사태를 피해 들어오는 난민들로 인해 이들에 대한 처우에 상당한 고민에 빠졌다. 특히 2011년 리비아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베를루스코니 정권과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아프리카 대륙에서 이탈리아로 밀입국하는 보트 피플들을 강제 송환시키던 리비아 군이 완전히 철수하는 상황이 발생하자 아프리카 난민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몰려드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에 상대적으로 영향을 덜 받는 영국과 독일은 추이를 지켜보기만 했다. 결국 아랍의 봄 여파로 인해 시리아가 내전으로 돌입하게 되면서 대량의 난민이 유럽으로 밀려들어왔고 이는 브렉시트에 이어서 유럽 연합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문제까지 발전하고 말았다. 유로 경제권의 불균형으로 위태로운 상황이 원래 존재하고 있었지만 당시에는 EU의 붕괴론까지 부상하며 아랍의 봄 여파가 유럽에서도 매우 심각한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아랍의 봄은 러시아와 CIS 국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치게 된다. 2000년대 혁명이 있었던 조지아,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독재자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던 러시아를 비롯한 중앙아시아 및 인근 국가들도 전면적으로 국가 내부를 단속하기 시작했다. 벨라루스, 러시아에서도 브콘탁테를 통하여 반정부 시위들이 일어나기도 했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우크라이나의 경우 2004년 오렌지 혁명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민주주의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정부패와 부정선거, 비리 등이 심했다. 그러나 이 아랍의 봄의 영향은 여전히 불씨로 남아 2014년 유로 마이단 사태를 일으켜 대통령을 탄핵하고 정권교체에 성공했다. 중앙아시아 건너 카스피 해 인근의 아제르바이잔에서도 반 정부 시위가 발생했으며 남부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사이의 아르메니아에서도 2008년부터 부정선거로 의혹받았던 샤르키샨 전 총리에 대한 불만과 아랍의 봄의 영향으로 인해 반정부 시위가 나타나기도 했지만 총리의 독재를 끝내는데 실패했다. 처음에는 민주화를 기치로 중동의 독재자들이 붕괴되어 가는 민주주의의 승리에 응원을 보내던 서구권은 이후 생각보다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가 독재를 대신하고 이들이 대두되면서 오히려 신(新) 십자군 전쟁을 선포하게 되면서 충격과 공포로 난민들과 중동의 민중들을 차별하게 되고, 과거 동구권이나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원하는 민중을 지지하고 억압하는 세력에 대한 압박을 가하였었던 것과 다르게, 독재 타도를 외치는 반군에 대해 더 이상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반군을 지원하는 물자와 무력 개입, 정치적인 압력을 동원하여 지원해준 다음 민주주의 선거로 수장이 뽑힐 정부가 인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친(親) 서방 정권이라면 다행한 일이지만, 반대로 샤리아를 주장하는 이슬람 원리주의 정권의 성격을 띄고 있다면 세속주의 친(親) 서방 정권인 독재자가 계속 존재하는 것이 유럽의 안보를 위해 나을지도 모른다는 결론이 성립되었다. 이 아랍의 봄 사태는 유럽이 갖고 있던 냉전 시대부터 이어온 민주주의의 우월성이라는 믿음에 크게 생체기를 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03
  • 집시 민족과 그들의 현실성
    유럽 국가들 중에서 수적으로 볼 때 가장 많은 집시 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곳이 루마니아이다. 집시의 정체도 알 수 없는 것이 현실이지만 집시의 기원에 관한 문제도 분명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이다. 루마니아의 집시 전문가인 콘라드 베르코비치(Konrad Bercovici)는 “세상에서 집시의 수 만큼이나 집시의 기원에 대한 이론이 존재한다”고 언급하였던 것으로 나타날 정도로 집시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다. 우선 집시라는 용어의 시작은 그리스어 아칭가노이(Atsinganoi)에서 유래하고 있다. 아칭가노이라는 용어는 동유럽에서 많이 통용되었으며, 또한 집시들 자체에서가 아닌 외부인들이 그들을 지칭할 때 주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종종 경멸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따라서 루마니아 집시들은 이 용어보다 산스크리트 기원의 집시 언어인 ‘Rrom’이라는 용어를 더욱 선호하고 있다. 집시들은 다양한 국가들에 흩어져 생활했으며, 그 곳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문화요소들을 유지하는 동시에 그곳의 여러 가지 문화요소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와 같은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집시라는 민족의 정체성은 항상 긍정적인 요소들만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고, 반대로 부정적인 면이 더욱 부각되어 나타나기도 했다. 루마니아의 집시들은 19세기 중엽까지 노예로 존재했었기 때문에 이들과 관련한 다양한 정황들은 역사적인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사실상, 집시들의 노예제도와 관련한 여러 가지 흔적들은 오늘날까지 그들의 사회 구조 속에서 남아있으며, 루마니아 인들과의 관계 및 루마니아 정부와의 관계에서도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집시 민족의 사회 내에서는 노예 제도와 관련하여 후유증을 상당히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수세기 동안 노예 제도가 지속됨으로 인해 집시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되었고, 스스로의 책임으로 행하는 진취적인 정신 또한 약하게 되었으며, 어떤 사건에 대하여 체념하는 운명론적인 삶의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집시들은 과거 자신들이 속했던 계급이나 직업에 따라서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지주, 수도원 그리고 영주 등 그들이 어디에 귀속되느냐에 따라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노예 제도는 아직도 집시들의 정신세계에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일상 생활에도 비슷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오늘날 유럽에서는 과거보다는 적게 나타나지만 아직도 집시들에 대한 인종 차별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으며, 집시의 정체성은 종종 열등 혹은 하위의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최근 집시들의 동향을 보면 이탈리아와 로마 시 정부가 이탈리아 사회에 동화되거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중, 선택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비르지니아 라지 로마 시장은 1인당 연간 최대 1000유로(약 133만원)를 주는 조건으로 본국인 루마니아로 돌아가게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안건을 내놓았다. 라지 시장은 최근 루마니아를 방문해 집시 재정착 문제에 대해 논의했으며 집시들에 대한 사회보장을 루마니아가 해줘야만 이행될 수 있는 부분이라 역설했다. 하지만 철거가 이루어진 거주촌에서 루마니아로 돌아가겠다고 신청한 집시들은 14명에 불과했다. 대다수의 집시들은 길거리에 거지같은 신세로 현지인들에게 돈을 구걸하거나 주머니를 터는 소매치기들로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는 다른 집시 거주촌들도 철거하겠다고 밝혔고 실질적으로 철거되고 있다. 이탈리아 정부가 겉으로나마 경제적인 유인을 내걸었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노골적으로 폭력을 행사해 집시를 추방하고 있다. 특히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에 맞섰던 네오나치 민병대 출신들이 크림반도를 상실한 분노의 화살을 집시에게 돌리고 있다. 수도 키예프에서는 지난 4월 ‘C14’라는 극우 단체가 집시들의 천막촌에 불을 지르는 등 폭력을 행사해 집시들을 강제로 추방했다. 이후에도 네오나치들, 프라비 섹토르 집단들의 집시 거주촌 공격이 잇따르고 있으며 이들은 인권을 무시하고 강제로 탄압하고 있다. 집시들은 야생화 부케를 팔아 생활을 유지할 뿐 키예프 시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항변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극우 단체들은 이들이 절도와 구걸을 하며 도시를 더럽혔다고 주장한다. 일련의 공격 이후 키예프에서는 집시를 보기 어렵게 되었다.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의하면 우크라이나 정부가 폭력을 방관해왔다고 지적했다. ‘C14’는 철거 폭력 장면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버젓이 인터넷에 올려 정당성을 내세워 자신들의 인권 유린 행위에 대해 합리화했다. 2016년 우크라이나의 다른 극우 단체 회원들, 특히 동부의 아조프 대원들은 집시 남성들을 집중적으로 살해했다. 이들은 집시 추적 장면을 ‘집시 사냥’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으로 인터넷에 올리기도 했다. 정부가 미온적으로 방관했던 이유로는 극우 인사들이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전쟁 영웅’이었다는 점과 정치적 이용 가치가 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유엔 등이 항의하는 가운데 2017년에야 집시 거주촌 폭력 사건 관련자에게 가택 연금 처분을 내린 것이 인권 유린에 대한 처분이었다. 또한 우크라이나 극우 세력이 ‘소프트 타겟’으로 점철된 집시에 대해 탄압을 노골화하는 것을 두고 나치즘 또는 파시즘의 부활이라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었다. 나치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집시 30만 명을 살해하는 인종청소를 감행했다. 하지만 집시를 추방해야 한다는 주도자들은 이에 대한 인권 유린을‘사회 정화’라고 하면서 이러한 행동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했다. ‘C14’를 이끄는 예우헨 카라스가 언급하기를 "우리는 파시스트로 불린다. 뭐라고 불리든 상관없다"며 “범죄자들에 대응하는 것일 뿐 인종주의적 차원의 공격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살비니 이탈리아 내무장관도 자신은 인종주의자나 파시스트가 아니며 이탈리아 인을 우선으로 한 노선을 추구할 뿐이라고 말하며 집시들에 대한 인권 유린을 합리화하기도 하였다.
    • 칼럼
    • Nova Topos
    2024-06-02
  • 수단 내전의 반군인 신속지원군(Rapid Support Forces, RSF)과 총사령관인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Mohamed Hamdan Dagalo)
    수단에서는 72시간 휴전이 끝났다. 이제는 피의 지옥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수단의 이 지긋지긋한 내전에 대해 알 부르한 대통령이 지정한 반군인 신속지원군(Rapid Support Forces, RSF)과 총사령관인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Mohamed Hamdan Dagalo)가 어떠한 자인지 알아보도록 한다. 함단 다갈로는 1973년 차드(Chad)의 수도 은자메나에서 출생했다. 그는 유년기에는 수단과의 국경인 다르푸르에서 생활했으며 경제적으로 워낙 피폐했기 때문에 청년 시절에는 아예 수단으로 이주해서 살았다. 그럼에도 다르푸르에 거주했는데 북쪽 알 파쉬르 다르푸르에서 살면서 2003년 거대한 사건과 마주하게 된다. 이는 오마르 알 바시르에 의해 벌어진 다르푸르 대학살(Darfur massacre)로 다르푸르 분쟁(War in Darfur)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수단의 주류 아랍인들은 백인에서 흑인에 걸쳐 있다. 그들 중 상당수인 흑인 자체도 아라비아 반도 등 중동과는 달리 원래 베쟈족 등 누비아 흑인들이 칼리프 오스만의 아프리카 정복 시기에 넘어온 아랍인들의 영향을 받아 아랍화된 사람들로 알려져 있다. 그로 인해 모국어를 아랍어로 사용하고 생활 습관 등도 달라진 엄연한 흑인종 아랍인으로 푸르족이라 불렸다. 이들은 시리아, 레바논 등의 백인 아랍인과는 다르다.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이 모두 미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 미국인인 것과 같이 아랍인은 아랍어를 쓰는 사람들에 대한 민족 개념 정도다. 수단이라는 국명 자체의 유래가 "흑인의 땅"이라는 빌라드 앗 수단에서 유래했고 북수단의 조상은 이집트 흑인 파라오 시대를 열었던 쿠시 왕조였다. 반면 남수단의 조상은 에티오피아와 연결되는 마쿠리아 왕국 및 알와 왕국이라 볼 수 있다. 이 푸르족들도 민족 고유 언어로 푸르어를 사용하지만 나라의 공용어도 아랍어이고 종교활동에 아랍어가 중요하기 때문에 링구아 프랑카로 일정 수준 이상의 아랍어를 쓰고 있어 이들이 흑인이지만 흔히 생각하는 흑백갈등과 같은 인종갈등이 아닌, 같은 흑인에 같은 무슬림, 같은 아랍어를 쓰는 사람들 중 다른 부족끼리의 토지를 두고 일어나는 갈등에 더 가까웠다. 유엔 보고서에도 다르푸르는 양자는 같은 언어(아랍어)를 쓰고 같은 종교(이슬람)을 믿는다고 명시되어 있다. 1980년대 초반, 이상 기후로 인해 사막이 확장되면서 물이 모자라게 된 아랍계 베두인 유목 부족들이 남쪽으로 밀려 내려와 아랍화된 누비아계 흑인 농민들과 충돌하기 시작했고, 이웃한 리비아와 차드 등지에서는 무기가 밀반입되면서 두 집단의 충돌은 유혈사태로 번지게 된다. 이에 아랍계 민병대 '잔자위드'는 수단 알 바시르 정부의 비호 아래 학살, 고문, 성폭행, 방화, 약탈 등을 저질렀고 함단 다갈로는 잔자위드 집단에 가입하여 아주 잔혹한 면을 보여주었다. 2003년 2월 잔자위드에 맞서는 반군이 조직되자 정부군은 잔자위드와 함께 소탕을 명분으로 한 조직적인 학살 행위를 벌이게 되었고 알 바시르 대통령의 눈에 들게 된다. 알 바시르 대통령의 총애를 받은 함단 다갈로는 뛰어난 리더쉽과 잔혹성을 바탕으로 군부의 실력자가 되었고 2013년 4월에는 알 바시르 대통령의 제안을 받고 민간 신속지원군(Rapid Support Forces, RSF)을 창설하게 된다. 함단 다갈로가 창설한 RSF는 수단 정부의 준군사조직으로 잔자위드 군벌이 주축를 이루고 있으며 창설 당시에는 수단 정부 산하 조직으로 시작했고 종합정부국의 소속이었다. 한편 러시아는 2010년경부터 아프리카 내 분쟁지역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오고 있었다. 러시아는 지난 수년간 어떠한 외부행위자보다도 많이 아프리카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고 수단 최대 무역항인 포트수단(Port Sudan)에 러시아 해군 물자와 더불어 기술 지원 기지를 건설하려 했다. 이는 상당한 이득이 남는 것이기에 알 바시르 대통령이 본인의 비자금 유통 및 각종 비리 사업을 위해 러시아를 끌어들였다. 2017년부터 양국은 이와 관련된 협상을 진행해 왔고 이 협상을 함단 다갈로에게 일임했기 때문에 러시아의 해군 기지를 들여오는 대신, RSF에 군사 무기 지원 및 훈련을 담당할 자들을 보내달라 요구했다. 그러자 러시아는 대량의 무기를 지원하고 RSF 민간 군사들에 대한 훈련 교관까지 파견한다. 이 때 파견된 러시아 군사 집단이 예프게니 프리고진의 "바그너 그룹"이다. 함단 다갈로의 RSF는 "바그너 그룹"의 교관들의 엄격한 군사 훈련을 받아 성장했다. 그리고 최신 무기들도 러시아로부터 사들여 수단 정부군 못지 않은 무력을 갖추게 되었다. 수단 3차 쿠데타가 발생하여 정부군과 혈전을 벌이고 있는 현재 RSF 군대의 무기는 대부분 러시아제 무기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러시아 정부가 이들 내전을 중재하지 않고 더욱 키운 것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다. 2019년 4월, 정식군부이자 수단군 사령관인 압델 파타흐 알 부르한(Abdel Fattah al-Burhan)이 미국과 서방의 사주 및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일으켜 알 바시르 대통령을 축출했을 때 함단 다갈로는 RSF를 동원해서 쿠데타를 지원했으며 당시 수단의 대통령이자 본인을 키워준 주군인 오마르 알 바시르를 축출하는데 일조를 했다. 이에 알 부르한이 다시 2021년 10월 수단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도 RSF를 통해 알 부르한을 도왔으며 이 공적을 인정받아 알 부르한이 정권을 장악한 후 2인자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러나 RSF의 강력함을 확인하고 함단 다갈로의 정치적 입김이 강해질 수 있다는 우려로 인해 알 부르한은 다갈로를 견제하려 했다. 이러한 함단 다갈로에 대한 견제는 RSF의 해체와 더불어 RSF의 사병 병력들을 정규군에 편입시키겠다고 선언하게 되자 다갈로는 강력히 반발한다. 이로써 알 부르한과 다갈로는 사이는 벌어지게 되었고 이는 내전의 단초가 된다. 그런데 다갈로는 알 부르한에게 자신의 RSF 병력들을 해체, 수단 정규군에 편입시키는데 10년간의 기한을 달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알 부르한은 자신의 주인이었던 알 바시르를 배신한 이력을 알고 있던 다갈로를 믿지 않았다. 게다가 언제든지 다갈로가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기에 알 부르한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이다. 알 부르한과 다갈로가 갈라설 수밖에 없는 것은 국제적 지원을 받는 국가도 달랐다. 다갈로는 친러성향의 인물이었던 반면 알 부르한은 미국, 캐나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는 친서방적인 성향을 갖고 있던 인물이다. 그러니 서로 외교적인 입장에서 견해 차가 상당했던 것이다. 결국 2023년 4월 15일 정규군 편입을 반대하는 RSF와 수단 정부군 간의 내전이 발생한다. 양측은 무차별적으로 서로를 살상하고 있으며 내전 발발 6일째인 4월 20일에는 민간인도 300명 이상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다갈로는 트위터와 알 자지라 언론의 인터뷰를 통해 알 부르한을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말을 공식화했다. 더불어 그는 오마르 알 바시르를 다시 집권시키려고 계획했다면서 알 바시르의 30년 독재 정권에 치를 떨었던 시민들에게 그에 대한 선전전에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다갈로에 견해에 따르면 자신들은 이슬람 극단주의 정권인 오마르 알 바시르의 재집권을 막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선전전에 불과한 것인지, 실제로 알 부르한 그와 같은 알 바시르의 복권을 추진하고 있는지에 대한 진위 여부는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러다보니 내전은 격화되었고 결국 수단 시민만 전쟁터에서 끊임없이 희생되고 있는 실정이다. RSF가 창설될 당시에는 5,000명에서 6,000명 남짓한 군대였지만 2023년 4월 기준으로는 10만 명이 넘었다고 보고가 있어 쿠데타에 이은 내전은 쉽게 종결될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31
  • 고대 페니키아의 해상 활동과 시돈의 경제적 성장
    페니키아(Phœnicia)는 고대 가나안의 북쪽에 근거지를 둔 고대 문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 도시 국가의 중심 지역들은 오늘날의 레바논, 시리아, 이스라엘 북부로 이어지는 해안에 있었다. 과거에는 페니키아 문명이 약 3200년 전에서 약 2900년 전까지 지중해를 가로질러 퍼져나간 진취적 해상 무역 문화를 보유했다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고고학 발굴의 결과, 페니키아 문명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6000년 전에 존재했던,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를 연계하는 기시(Gish) 문명과 연계되어 있다. 학자들은 기시 문명이 아프리카의 쿠마 문화(Kuma), 나일 강 유역의 쿠시(Kush) 문화와 연결 고리가 있으며, 그 관계를 연구 중에 있다. 이집트의 기록에 의하면, 페니키아인들은 무역 활동을 위해 북아프리카의 현 튀니지(고대 카르타고) 지역을 중심으로 알제리, 리비아 등 북아프리카 권역, 이탈리아 중부와 남부 도시, 이베리아 반도의 항구 도시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페니키아 본토의 도시 중 가장 완벽하게 발굴된 도시는 시돈과 티레 사이에 있는 사렙타이(Sarebthai)다. 페니키아는 최초로 갤리선 선박을 사용한 문명으로 이를 이용한 지중해 무역으로 번성했다. 페니키아 문명을 이룬 이들이 단일 민족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들은 고대 그리스와 같이 도시 국가를 이루었고, 각 도시 국가는 정치적으로 독립되어 있었다. 페니키아 도시 국가들은 서로 동맹을 맺고 협력하기도 했으나, 도시 간에 갈등이 있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레반트 지역의 티레와 시돈은 페니키아의 가장 강력한 도시 국가였다. 고대 근동 지역의 여러 왕국들은 각 시대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제국으로 발전하였다. 그들은 관개 농업을 발전시키고, 국가 간의 무역, 외교, 동맹 체결, 패권을 획득하기 위한 전쟁 등을 통하여 교류해 갔다. 고대 근동의 왕국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기존의 사회적, 정치적 질서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기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그들은 각 중동 제국들의 영토를 효과적으로 정치 및 사회로 통치하기 위해서 관리들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 구역을 만들었고, 강력한 식민지 정책을 구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2개의 대륙 사이에 놓인 팔레스타인은 여러 민족의 이동과 이주의 통로였으며, 그 결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증가하였다. 상당수의 셈어계에 속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셈족들 가운데는 아람족, 모압족, 가나안족, 아모리 족 등이 존재하고 있었으며, 그 외에도 인도와 유럽 언어를 사용하는 아나톨리아의 하티 족으로 알려진 헷족, 해안 지역에 거주하던 후리 족, 필리스티아라 불리는 블레셋 인 등이 살았다. 지중해 연안 곳곳에 도시 국가들이 세워졌으며, 예리고, 므깃도, 하솔, 게셀 등은 견고하게 요새화되었다. 이 시기에 페니키아에서는 초기 가나안 언어인 알파벳 문자가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가나안 언어는 고대 히브리어의 모체가 되었다. 고대 근동에 대한 이와 같은 관찰은 이스라엘의 기원을 확인하는 것에 있어 상당한 도움을 주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나, 이스라엘 초기의 삶을 묘사하고 있는 히브리 성경 내에 들어가 보면 고대 팔레스타인 나름의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적, 사회적 특징과 만나게 된다.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는 고대 근동의 보편적인 상황 속에서 이해함과 동시에, 그들만의 고유한 상황과 특수성을 고려해야만 할 것으로 볼 수 있다. 족장 이전의 팔레스타인의 환경에 관해서는 세계의 역사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 이는 히브리 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 민족의 시조(始祖)이자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창세기 12장)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다만, 고고학적 발굴 결과를 토대로 하여 족장 이전의 가나안 땅의 환경에 관하여 약간 그 모습을 재구성할 수 있는 정도이다. B.C 약 2000년경의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고대 근동의 역사는 인종적, 문화적, 정치적 형태의 대변혁의 시기였다. 이집트는 신왕조의 시작과 더불어 막강한 세력을 남북으로 팽창시켜 나갔다. 북쪽의 히타이트 제국 역시 상당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이러한 강대국들의 틈에서 오랫동안 지배를 받아 오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아모리 인들의 이동과 함께 큰 변화를 맞게 되었다. 이들의 이주는 강대국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종교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 밖에도, 팔레스타인을 둘러싼 지역에는 에돔(Edom), 모압(Moab), 암몬(Amon), 블레셋(Bleset) 등의 세력들이 머물러 살면서, 가나안 문화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형태를 띠게 되었다. 이들 세력은 주로 높은 문화 수준을 갖춘 도시 국가를 형성하였다. 한 통치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귀족 계급을 두고 있었으며, 때로는 도시 국가 간의 동맹 체제를 이루면서 중앙 집권 형태의 구조를 가진 제국들과 맞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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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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