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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지법, 이재명 전 대표 흉기 공격 사건에 징역 15년 선고
    부산지방법원 형사6부(재판장 김용균)는 이재명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향한 흉기 공격 사건으로 구속기소 된 60대 김아무개씨에게 징역 15년과 5년간의 보호관찰을 명령했다. 김씨는 살인미수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를 받았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범행 조력자 A씨에게는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되었다. 검찰은 이번 사건을 "명백한 정치적 테러"라며 20년의 중형을 구형했다. 김씨의 계획된 범행,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중대한 상해 가능성, 살해 실패에 대한 자책만 있고 사죄나 반성이 없는 점을 강조했다. 반면, 재판부는 생명 침해 시도, 선거 자유 방해 및 사회적 합의 신뢰 파괴 등을 이유로 엄벌을 지지했다. 재판부는 김씨가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이 전 대표를 악마화하고 공격한 행위를 엄중히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들은 김씨의 오랜 적대감과 혐오감이 범행으로 이어졌으며, 이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은 사건 발생 후 약 6개월 만에 나왔으며, 그동안 진행된 공판기일에서 증인 심문과 양측의 주장이 검토되었다. 김씨는 지난 1월 부산 강서구에서 이 전 대표를 향해 흉기로 공격을 가했으며, 사건 당시 이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 전 대표를 겨냥한 이번 공격은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과 마크 리퍼트 전 미 대사를 대상으로 한 비슷한 정치적 테러 사건과 비교되었다. 이 사건들과 비교했을 때, 이번 사건의 형량은 더 무거웠으며, 재판부는 김씨의 사과가 진정성 있는 반성으로 보기 어렵다고 평가했다. "피고인은 법정에 이르러 뒤늦게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한다는 뜻을 표했으나, 범행 과정과 수사 기관에서 보여준 태도 및 동기를 봤을 때, 이 사죄의 진정성에 의문이 있다."라고 재판부는 지적했다. 이로써 김씨는 역사적인 정치적 테러 사건의 가해자로 기록되며, 법의 엄중함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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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국민의힘 전당대회 중심에 선 '읽씹' 논란, 한동훈 대 원희룡과 나경원의 갈등 격화
    한동훈 전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김건희 전 코바나콘텐츠 대표의 문자메시지를 무시한 것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이 격노했다는 소위 '읽씹' 논란이 국민의힘 전당대회의 주요 화제로 부상했다. 이 논란은 김 전 대표와 친윤계 핵심 그룹이 한 전 위원장을 공격하기 위해 문자 내용을 고의로 유출했다는 의혹과 함께, '김건희 전당대회 개입설'까지 불러일으켰다. 한 전 위원장은 서울역 인근 쪽방촌 방문 후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읽씹 논란'에 대해 언급하며, 집권당의 비대위원장과 영부인이 사적인 방식으로 정무적인 논의를 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밝혔다. 그는 총선 기간 대통령실과 공적 통로를 통해 소통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김 전 대표의 '명품백 의혹 사과'에 대해서도 국민의 걱정을 덜어드리기 위해 여러 차례 사과의 필요성을 전달했다고 덧붙였다. 한 전 위원장은 CBS 라디오에서 공개된 김 전 대표의 문자 내용이 재구성되었다고 주장하며, 보도가 왜곡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또한 왜 이 시점에 해당 이슈가 불거졌는지 의아하다고 언급하며, 이는 친윤계의 공세 일환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김규완 CBS 논설실장은 김 전 대표(김건희)가 문자를 보낸 후 한 전 위원장이 응답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김 여사가 모욕감을 느꼈다고 전했다. 김 전 대표의 문자는 명품백 수수 의혹이 고조되던 시기에 발송되었으며, 이에 대한 사과 및 조치를 요구했다고 한다. 장예찬 전 최고위원은 김 논설실장의 방송 내용이 사실과 부합한다고 확인하며,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이 아프지만, 보수 재건을 위해 필요한 진단이라고 언급했다. 반면, 천하람 의원은 이러한 정보를 공개할 수 있는 사람이 김 전 대표이거나 한 전 위원장뿐이라고 주장하며, 이는 김 전 대표의 전당대회 개입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원희룡 전 장관은 한 전 위원장의 해명을 '충격적'이라고 평하며, 영부인의 문자에 답하지 않은 것은 예의에 어긋난다고 비판했다. 원 전 장관은 이를 '절윤' 현상의 증거로 해석하며, 한 전 위원장이 적절하게 대응했다면 당의 어려움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나경원 의원은 한 전 위원장의 판단력이 미숙했다고 비판하며, 그의 경험 부족이 오판을 불러왔다고 지적했다. 나 의원은 한 전 위원장이 당원과 국민, 그리고 당 총선 후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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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더불어민주당, 특검법 수용 촉구 및 방통위원장 후보에 대한 비판 제기
    더불어민주당은 어제(5일) 통과된 '채 상병 특검법'에 대해 윤석열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 국민의 분노를 예고하며 법안 수용을 촉구했다. 박찬대 당 대표 직무대행은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대통령의 결정이 국민의 뜻을 따를 것인지, 아니면 거부권을 남발하며 국민과 대립할 것인지에 달려있다고 언급했다. 박 직무대행은 박근혜 정권의 몰락을 예로 들며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박 직무대행은 젊은 해병의 죽음을 둘러싼 은폐 및 조작 의혹 해결이 정파적 문제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이 문제가 공정과 상식을 바라는 국민의 기대와 관련 있다며 대통령에게 올바른 선택을 촉구했다. 더불어, 어제 방송통신위원장 후보로 지명된 이진숙 전 대전MBC 사장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박 직무대행은 이 후보자를 이명박 정권 시절 MBC를 통제하려 했던 김재철 전 사장과 비교하며 강한 언어로 비난했다. 그는 이 후보자가 공영방송의 흑역사를 만든 인물로, 이러한 인물에게 방통위원장을 맡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박 직무대행은 또한 공영방송을 극우 유튜브처럼 만들려는 시도에 대해 우려를 표하며, 윤석열 대통령에게 이진숙 후보자의 지명 철회를 강하게 요구했다. 그는 대통령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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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5
  • 박찬대 원내대표, 필리버스터 비판 및 채상병 특검법 강조
    박찬대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4일 오전 더물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서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를 "채상병 특검법을 막기 위한 궤변"이라고 명명하며 용산 방탄을 위한 조치로 해석했다. 박 원내대표는 국민의힘의 행동이 특검법 통과를 지연시키고 있다고 혹평했다. 채상병 특검법은 억울하게 사망한 해병대원 채상병의 사건을 다루며, 사건의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목적으로 한다. 이 법안은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었으며, 박 원내대표는 이 법의 통과를 강력히 지지했다. 박 원내대표는 또한 채상병 순직 1주기를 언급하며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진상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그는 수사 방해와 은폐, 조작 의혹의 질문을 제기하며 관련자들의 책임을 추궁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국회법 절차에 따라 특검법을 통과시키겠다고 밝혔다. 특검법이 통과되면 관련 사항은 윤 대통령에게 넘어갈 예정이다. 박 원내대표는 특검법 수용 여부가 윤 정부의 국정 기조 변화를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가 될 것임을 언급했다. 그는 또한 윤 대통령 탄핵 국민청원이 100만 명을 넘었다고 언급하며 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 국민의 신뢰 손상과 정부의 몰락 가능성을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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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4
  • 국회 대정부질문 파행, 민주당 '채해병 특검법' 본회의 상정 추진
    제22대 국회의 첫 대정부질문이 김병주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막말 논란으로 파행을 빚었다. 더불어민주당은 3일 '채해병 특검법'을 본회의에 반드시 상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민주당은 이날 경제 분야 대정부질문을 마친 뒤 채해병 특검법을 본회의에 올릴 계획이다. 민주당은 4일까지 채해병 특검법을 본회의에서 처리하겠다는 방침이다. 국민의힘의 필리버스터 가능성을 고려해 이날 표결을 진행할 예정이다. 민주당은 전날 본회의에 채해병 특검법을 상정하려 했으나, 김병주 의원이 질의 도중 '정신 나간 국민의힘'이라는 발언을 사용하면서 본회의가 파행으로 치달아 무산됐다. 박찬대 민주당 원내대표는 "(채해병 특검법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부분"이라며, "채해병 1주기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특검법을 관철하겠다고 한 국민과 약속을 지키는 과정에서 국민의힘은 곤혹스러울 것"이라고 밝혔다. 박 원내대표는 "국민의힘은 빌미만 있으면 파행하려고 할 가능성이 높다"라며, "민주당은 크게 관여하지 않고 국회법에 따라 진행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이날 단독으로라도 채해병 특검법 상정과 표결을 강행하겠다는 방침이다. 여당은 필리버스터를 예고했지만, 야당이 24시간 뒤 강제로 토론을 종료하는 경우 이를 막을 수단이 없다. 윤종군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본회의 파행이 지속되더라도 중요한 표결을 미루지 않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채해병 특검법이 본회의를 통과하면 대통령은 15일 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4일 채해병 특검법이 본회의를 통과하고, 윤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민주당의 목표대로 채해병 1주기인 7월 19일 직전에 국회 재표결이 가능하다. 민주당은 여론의 지지를 바탕으로 재표결 시 여당의 이탈표를 기대하고 있다. 채해병 특검법 통과를 위해서는 여당의 최소 8표 이상의 이탈표가 필요하다. 현재 여당에서 안철수 의원, 김재섭 의원, 조경태 의원이 채해병 특검법에 찬성 입장을 밝힌 상태다. 민주당의 채해병 특검법 상정 추진은 국민의힘과의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여당은 필리버스터로 저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지만, 민주당은 법적 절차를 통해 이를 강행하려 하고 있다. 이번 대정부질문 파행과 채해병 특검법 상정 문제는 향후 국회 운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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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3
  • 민주당, 바이든 대체론 대두… 해리스와 미셸 오바마 주목
    미국 대선 첫 TV 토론 이후 민주당 내부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교체론이 제기되고 있다. CNN과 여론조사기관 SSRS가 실시한 조사 결과, 바이든 대통령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양자 대결에서 43% 대 49%로 뒤졌다. 반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트럼프와의 가상 대결에서 45% 대 47%로 박빙을 보였다. 해리스는 특히 여성과 무당층에서 강세를 나타냈다. 조사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대결할 경우 여성 응답자의 44%만이 바이든을 지지했지만, 해리스 부통령에게는 절반인 50%가 지지를 보냈다. 무당층에서도 바이든은 34%의 지지를 얻은 반면, 해리스는 43%의 지지를 받았다. 이는 해리스 부통령이 일부 유권자층에서 바이든보다 더 경쟁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개빈 뉴섬 캘리포니아 주지사와 트럼프 전 대통령의 가상 대결에서는 43% 대 48%로, 피트 부티지지 교통부 장관과의 대결에서는 43% 대 47%로 나타났다. 민주당의 또 다른 유력 후보인 그레첸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와의 대결에서는 42% 대 47%로 집계됐다. 한편, 로이터와 입소스가 실시한 조사에서는 바이든 대통령과 트럼프 전 대통령이 각각 40%의 지지율로 동률을 기록했다. 해리스 부통령과 트럼프의 가상 대결에서는 해리스가 42%, 트럼프가 43%로 오차 범위 내에서 1%포인트 차이를 보였다. 일각에서 꾸준히 민주당의 대안 후보로 거론되는 미셸 오바마 여사는 트럼프 전 대통령과의 가상 대결에서 50% 대 39%로 압도적인 지지율을 기록했다. 오바마 여사는 백악관을 떠난 이후에도 저서 집필 등을 통해 대중과 꾸준히 소통하며 높은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는 정치에는 참여할 뜻이 없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바이든 대통령의 '고령 리스크'가 드러난 첫 토론 이후, 바이든 측은 여론 조사 결과에 주목하며 위기론을 잠재우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질 바이든 여사를 비롯해 아들 헌터 바이든 등 가족들은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완주를 강하게 설득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CNN을 포함한 여러 여론 조사 결과는 바이든 대통령의 '토론 후폭풍'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CNN 조사에서 민주당 및 민주당 지지자의 56%는 바이든 대통령 이외의 후보를 내세울 경우 대선 승리 가능성이 더 높다고 답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이 승리 확률이 높다는 답변은 43%에 불과했다. 이는 지난 1월 조사에서 바이든 대통령을 내세우는 것이 경쟁력이 높다는 답변이 53%였던 것과 대비된다. 바이든 대통령의 지지율은 36%로 CNN 자체 조사 기준 최저치를 기록했다. 바이든 대통령을 강력하게 지지하지 않는다는 답변도 45%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호감도는 34%에 불과했으며, 비호감을 품은 비율은 58%에 달했다. 로이터 조사에서도 민주당 지지자의 32%는 바이든 대통령이 후보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밝혔다. 응답자의 59%는 바이든 대통령이 공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 늙었다고 답변했다. 이와 같은 조사 결과는 민주당 내부에서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교체론이 더욱 힘을 얻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참모들은 이러한 위기론을 잠재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여론의 흐름은 쉽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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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3
  • 이준석 의원, “국민의힘 당 대표는 김건희 여사만이 적임자” 주장
    이준석 개혁신당 의원은 2일, 윤석열 대통령이 국민의힘 당을 주도적으로 통제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BBS 라디오 '함인경의 아침저널'에 출연한 이 의원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한 후보 중 누가 당선되더라도 수직적 당정관계를 해소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은 여당 대표가 안정적으로 당을 운영하기 위해서는 김건희 여사가 당 대표가 되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대통령은 이준석을 몰아내고, 김기현 대표도 본인이 세우고 몰아냈으며,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도 세우고 몰아내려고 했다. 굉장히 별난 분"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이 의원은 "당 대표 후보로 김 여사가 오지 않는 한 대통령이 가만히 안 둘 것"이라며 "여당 대표가 김 여사가 되지 않는 한 대통령이 가만히 안 둘 것으로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어서 그는 "굳이 화합형 지도자를 찾자면 윤상현 의원"이라며 "윤 의원은 윤 대통령이 대선에 출마할 때 끝까지 사람들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애썼던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이 의원은 국민의힘 전당대회 당 대표 경선을 '서울대 법대 반장선거'로 표현했다. 그는 "어떻게 한 당에 대통령, 비대위원장, 전직 비대위원장, 전당대회 후보, 전직 대표 전부 다 서울대 법대 출신이냐"라며 "이렇게 되면 유전적으로 이상이 생기고, 대한민국 정치 전반에서도 문제가 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 의원은 "서울대 법대 출신들이 모여 있으니 결국에는 배신자 논란과 충성 논란만 생긴다"라고 했다. 그는 "과거에 윤 대통령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것처럼 관계에만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며 "당이 바뀌려면 지금 위기 상황에서 비전이 나와야 하는데, 하나도 안 나오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한동훈 후보를 향한 비판도 이어졌다. 이 의원은 "한 100일 전까지만 하더라도 '여의도 사투리' 쓰지 않고 국민의 언어로 얘기하겠다더니, 지구당 부활을 전당대회 대표 공약으로 냈다는 것 자체가 여의도 사투리에 찌들어버린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어 "대통령 하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는데, 대통령 하고 싶은 것 하나밖에 없는 한 검사 출신 정치인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이 이 지경이 됐다"라고 날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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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2
  • 정청래 최고위원, 정부 비판 강조
    정청래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이 1일 국회 본청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강한 비판을 제기했다. 윤 대통령 탄핵 청원이 78만 명을 넘어선 것을 언급하며, 국민을 억압하고 야당을 탄압하는 정권의 미래에 대해 부정적 전망으로 일관했다. 정 최고위원은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됐나"라며 현 정부의 정치, 경제 상황을 비판했다. 그는 가수 정수라의 노래 '아! 대한민국'을 개사해 정부와 여당을 비판하는 가사를 낭독하며, 현재의 정치적, 사회적 문제들을 강조했다. 그는 "하늘에 오물풍선 떠 있고, 바다엔 핵오염수 흐르고, 저마다 누려야할 권리가 오늘도 억압받는 곳"이라 말했다. 또 "국민은 대통령 탄핵을 외치고, 대통령는 총선 민심을 짓박고, 인권과 민주주의는 끝없이 추락하는 곳"이라 전했다. 정 최고위원의 발언은 특히 현재 정부의 정책과 행태가 국민의 권리를 억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윤 대통령이 총선 민심을 무시하고 인권과 민주주의를 추락시키는 등의 행위를 강하게 비판했다. 정 최고위원은 또한 경제 상황에 대해 IMF 시절보다 더 어려워졌다고 평가하며, 정부의 정책 실패를 지적했다. 그는 대통령이 민심을 무시하고 거부권을 남발하는 현실을 비판하며, 이러한 행태가 국민의 분노를 증폭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탄핵 청원의 참여자가 곧 100만 명을 넘어설 기세라고 언급하면서, 이는 국민의 강한 불만과 정권 교체에 대한 열망을 반영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김진표 전 국회의장의 회고록에서 언급된 윤 대통령의 발언을 인용하며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대통령이 유도 조작 가능성을 언급한 것에 대해 충격을 표현했다. 정 최고위원은 "국민과 정권의 한판 싸움에서 반드시 국민이 이길 것"이라며 자신감을 표현했다. 또한, 서영교 최고위원도 탄핵 청원의 급속한 증가를 언급하며, 국민의 분노와 간절한 마음을 드러냈다. 서 최고위원은 대통령에게 반성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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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미래 고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최근 대선 첫 TV 토론회에서 약한 모습을 보이며 대선 사퇴 요구가 증가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현재 캠프 데이비드 대통령 가족별장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 모임은 가족사진 촬영을 위해 예정된 일정이지만 중요 결정이 가족과 함께 상의했던 평소와 같이 정치적 미래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지난 30일(현지 시간)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7번의 유세를 마친 후 캠프 데이비드로 이동했다. 이곳에서 영부인 질 바이든과 자녀, 손주들이 합류할 예정이다. 이번 별장 모임은 봄에 계획되어 있었다. 하지만 가족과의 중요한 결정을 논의하는 시간이 될 수 있다. 바이든은 항상 중요한 결정은 가족과 함께 한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토론회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목소리가 쉬고 말을 더듬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이 때문에 그의 고령에 대한 우려가 증폭되었다. 그러면서 그의 대선 경쟁력을 의심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미국 언론과 정치권에서 민주당 후보 교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바이든 대통령은 현재 민주당 대의원의 99% 지지를 확보하고 있다. 그의 자진사퇴만이 후보에서 내려올 수 있다. 하지만 TV 토론 이후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NYT는 사설을 통해 바이든 대통령의 경선 하차를 촉구했다. 또 미국 CBS 방송과 유고브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72%의 미 유권자가 그의 대선 출마에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그렇지만 바이든 대통령의 가족은 계속해서 경선에 참여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특히 아들 헌터 바이든은 사퇴 압력에 저항하라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헌터 바이든은 최근 총기 불법 소지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아들에 대한 신뢰와 애정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며 지지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가족 모임에서의 결정은 그의 정치적 거취는 물론 미국 정치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그의 거취 결정에 대한 세계적 이목이 집중된 이유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미국 내외의 정치적 균형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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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 국민의힘 전당대회 '배신의 정치' 논란
    국민의힘 7월 23일 전당대회를 앞두고 한동훈 후보를 둘러싼 '배신의 정치' 논란이 국민의 힘 내부를 더욱 격화시키고 있다. 한 후보의 '채 상병 특검' 수용을 배신으로 보는 주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배반이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이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겨냥해 사용했던 '배신의 정치' 용어와 맥을 같이한다. 당시의 보수 분열을 연상시키는 논란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어대한(어짜피 대표는 한동훈)의 상황에서 특히 원희룡, 나경원, 윤상현 등 주요 후보들의 발언을 통해 그 긴장감을 더하고 있다. 당원의 공포심을 통해 각 후보는 한 후보에 대한 비판을 높이고 있다. 과거를 소환하고 ‘배신자’라는 낙인을 통해 각자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희룡 후보는 기자회견을 통해 한 후보를 향한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했다. 원 후보는 한 후보의 행동을 "인간관계의 배신, 당원들의 배신, 그리고 당정 관계의 충돌로 이어지는 행위"로 규정하며, 이는 "2017년 당시 당과 대통령의 충돌이 초래한 자멸의 경험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발언은 한 후보의 행동이 당의 분열을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나경원 후보 캠프 또한 한 후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캠프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당원들은 박근혜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내쳤던 장면을 잊지 못하고 있다"라며 "보수의 갈라짐과 분열이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채 해병 특검의 칼끝은 명백히 대통령을 겨냥하고 있다"라며 한 후보의 특검 수용을 사익을 위한 정치적 선택으로 비난했다. 윤상현 후보는 '절윤(絶尹)' 즉, 윤 대통령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배신의 정치'가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윤 후보는 이러한 전략이 과거에도 실패했으며, 당과 국민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박근혜·윤석열 정부의 '배신자' 표현은 '집권 3년 차'의 비슷한 시점에 등장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과 박 전 대통령의 위상이 많은 차이가 난다. 박 전 대통령은 지지율이 당시 50%였고, 현재 윤 대통령은 25%대의 지지율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배신의 정치’라는 프레임이 작동하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한 후보가 오히려 ‘반윤’기조의 ‘합리적 보수’ 이미지로 차기 권력으로 급부상할 수 있다는 전망이다. 국민의힘 당 대표 후보의 각 발언은 한동훈 후보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이 대부분이다. 보수 진영 내부의 분열을 걱정하며 한동훈은 당 대표에 적격하지 않다는 논리이다. 앞으로 23일 전당대회를 통해 국민의힘은 새로운 리더를 선출한다. 이 과정에서 당내 다양한 의견과 비판이 향후 어떻게 흘러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 뉴스
    • 정치
    2024-07-01

과학 검색결과

  • 전주 중학교에서 발생한 딥페이크 음란물 사건, 경찰 조사 중
    전북 전주의 한 중학교에서 남학생들이 교사와 동급생의 얼굴을 나체 사진과 합성한 사건이 발생해 사회적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들 학생은 인공지능(AI)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음란물을 제작하고 유포했으며, 현재 경찰 조사를 받고 있다. 딥페이크는 AI 기술을 활용해 생성된 가짜 이미지나 오디오, 비디오를 말한다. 이 사건은 딥페이크 범죄가 점점 사회문제로 부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최근 딥페이크를 악용한 가짜 동영상 및 뉴스 유포 사례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를 근절할 명확한 대책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다. 가해자를 특정하고 혐의를 입증해 처벌하기 어려운 점도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서울대 딥페이크 성범죄 사건에서 보듯, 해외 서버를 이용한 딥페이크 음란물 유포 시 가해자 추적이 어렵고, 혐의 입증 역시 까다로운 상황이다. 심지어 유포 목적이 없이 개인 보관용이라고 주장할 경우 실질적인 처벌이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성형 AI의 발전은 딥페이크 범죄 외에도 지식재산권 분야에서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AI가 인간의 최소한 개입만으로 창작물을 생성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하면서, 저작권 침해와 같은 이슈가 발생하고 있다. 생성형 AI 기술은 2022년 11월 Open AI에 의해 개발된 챗GPT의 등장으로 급부상했다. 현재 주요국에서는 AI 규제 법령을 시행 중이다. 유럽의회는 3월에 AI 기술의 안전성과 기본권 준수를 보장하는 인공지능 법(AI Act)을 승인했다. 미국에서는 바이든 대통령이 ‘안전성·보안성·신뢰성을 갖는 AI의 개발과 활용에 관한 행정명령’에 서명하며, AI 규제를 강화했다. 중국도 생성형 AI 서비스 관련 법률을 제정해 시행 중이다. 전문가들은 생성형 AI 기술의 부작용이 증가함에 따라, 서비스 제공자의 책임 한계를 명확히 하고,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를 통해 AI 기술의 발전과 사회적 문제 해결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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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7-01

칼럼 검색결과

  • 러시아-북한 회담 '포괄적 전략 동반자'의 의미
    김정은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어제 있던 19일 정상회담을 계기로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договор о Всеобъемлющем стратегическом партнерстве)' 관계로 격상하기로 합의했다고 한다. 이는 매우 급격한 관계 격상으로 보이는데 이를 동맹으로 의미하면 안 되고 그에 준하는 수준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러시아와 한국도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가 체결되어 있다. 2008년 이명박 대통령은 9월 러시아를 공식 방문하여 당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개최했고, 양국 관계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하기로 하여 올해 16년째를 맞이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포괄적 전략 동반자"의 의미는 "상호 보존 원칙"에 의거한 것이다. 2000년 '선린 우호 관계'를 맺은 이후, 이 관계를 약간 격상한 것 뿐이다. 더불어 동맹의 전 단계로 만들면서 어느 누구도 동맹을 만들지 않고 선을 지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포괄적 전략 동반자(договор о Всеобъемлющем стратегическом партнерстве)' 관계는 북한만이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 몽골, 베트남, 아르헨티나, 우즈베키스탄과 맺고 있기에 러시아와의 외교 관계를 이들 나라 수준으로 끌어 올려준 것이다. 그리고 묘하게도 오늘 푸틴 대통령은 같은 포괄적 전략 동반 국가인 베트남으로 날아갔다. 이러한 협력 관계 명칭은 외교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외교 전문가들의 견해에 나는 동의한다. 모처럼만에 전문가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 "포괄적(Всесторонний)"이라는 수식어에 군사 뿐 아니라, 경제, 무역, 외교, 우주항공 등 전방위적인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어제 포스팅에 두만강 개발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다. 안보적인 측면으로 본다면 분명히 여기에 "양자 간에 침공을 당했을 경우"를 명시하고 있다. 여기에 북한이 침공을 당했을 경우, 유사시에 러시아군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이즈베스띠야에 따르면 "В частности, соглашение подразумевает оказание взаимной помощи в случае агрессии против одного из участников, при этом оно носит оборонительный характер. (이 합의는 참가국 중 한 국가에 대한 공격이 발생할 경우 상호 지원 제공을 의미하지만 방어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 라고 했다. 즉, 북한이나 러시아가 침공을 받는 경우에만 작동되는 협정이다. 따라서 북한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를 공격했을 때, 공식적으로 러시아에 무기를 제공해도 아무런 저촉을 받지 않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반대로 북한의 안보가 위협을 받으면 러시아가 지원을 할 수 있다는 얘기기도 하다. 북한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상호 안보 형식으로 국방을 강화하고 수성하는 측면에서 안전을 보장 받았다는 것이 핵심인데 이는 김정은이 전략을 잘 짠 것으로 보아야 한다. 자꾸 소요사태를 일으키려는 미국, 그리고 대북방송과 삐라를 북으로 보내며 도발하는 한국으로부터 러시아라는 강력한 뒷배를 둠으로써 전략적으로 수성을 더욱 견고화시켰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다만 여기에는 함정이 숨어 있는데 북한이 선제 공격했을 때, 러시아가 돕는다는 조항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협정에 넣지 않은 것은 우리 대한민국과의 관계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후일 러시아는 대한민국과의 관계가 복원될 때, 양국 간의 파트너쉽으로 인해 남북통일에도 전략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그러나 만약 대한민국이 여전히 러시아에 위협적인 태도를 보이며 북한을 지렛대로 삼아 움직일 수도 있다고 봐야 한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한반도 문제에 조금 더 개입할 수 있는 명분이 만들어진 셈이 된 것이고 큰 구도로 보자면 미국의 동북아시아 전략이 러시아에 의해 상호 대치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줄타기를 잘해야 한다. 그 전에까지만 해도 간접적으로 러시아에게 경고도 하고 압박을 주면서 제재도 했지만 19일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이 체결되면서 러시아가 한반도 문제 더 깊이 관여하게 된 셈이 되었다. 미국은 주한미군도 축소되어 있으며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에 원조를 보내느라 대한민국에서 무슨 일이 터지면 지원할 수 있는 부분에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올해 미국 대선으로 볼 때 트럼프가 당선이 되면 주한미군이 철수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주한미군이 철수했을 때 우리도 이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이전에 나는 대한민국이 핵과 같은 비대칭 전력을 갖는다면 서방의 제재도 받을 수 있고 사드 배치에 환장했던 중국이 대한민국에 대해 어떤 제재를 가할 지 알 수 없기에 반대를 하는 입장이었다. 러시아와 북한이 "포괄적 전략 동반자" 협정이 맺어지고 안보상 상호 보완적 요소가 강화되자 우리도 여기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해야 한다. 핵과 같은 비대칭 전력을 강화하고 이를 위해 가장 먼저 모스크바로 날아가 이 부분에 대한 협상을 하고 러시아로 하여금 중국을 설득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우리가 중국을 설득하기에는 어려운 일이고 이는 러시아가 해줄 수 있는 부분이다. 대한민국의 외교와 안보는 러시아를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는 셈이다. 러, 북, 중이 가까워진 이상, 우리도 러시아와 중국을 전략적으로 잘 이용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러시아는 우리에게 먼 나라가 아니고 동북아시아 문제에 있어 가까이 해야 할 나라가 됐다. 이제 앞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올해 11월에 벌어진 미국 대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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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0
  • 푸틴이 방북, 두만강 개발에 대한 이야기에도 초점을 맞춰야
    18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북한을 국빈 방문하기로 한 푸틴 대통령이 19일 새벽 북한에 도착했다. 오전 2시가 넘은 시각 푸틴 대통령이 북한 수도 평양에 도착했다. 푸틴 대통령의 방북 일정은 러시아와 서방의 대립이 격화하는 가운데 러북 밀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는 곳에서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2년 전부터 푸틴 대통령이 동방으로 눈을 돌리겠다고 발표한 이후, 앞으로 러, 북, 중 3자 간 회담도 이어질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방문 일정의 기간이 1박 2일에 불과하기에 많은 얘기보다는 양국간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 협정(договор о всеобъемлющем стратегическом партнерстве) 에 주목될 예정이다. 유리 우샤코프(Юрий Ушаков) 보좌관이 언급하기를 안보 문제를 포함한 각 부문 협력을 망라하는 포괄적인 전략적 동반자 관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협정은 기존의 러북 간에 체결된 문서들, 즉 1961년 소련과 북한의 소-북 우호협조 및 상호 원조에 관한 조약', 2000년 '우호·선린·협조 조약', 2000년과 2001년 러북 선언 등을 대체할 것이라 했다. 또한 당연히 국제법의 모든 기본 원칙을 따르고 어떠한 도발적 성격도 없으며 어느 국가를 직접 겨냥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대한민국 언론들이 말한 것처럼 러시아가 북한에 군사 전략적인 부분을 주고 북한은 러시아에게 대 우크라이나 전쟁에 군사 무기를 공급하는 등의 상호 군사 협력을 하려는게 아니다. 그리고 북한과 "군사동맹" 체결하려 한다는 확인되지 않은 얘기를 뉴스랍시고 보도하는 기자들이 있었다. 참 부끄러운 일이다. 두 정상은 또 경제와 안보, 에너지, 우주항공, 교통, 국제 협력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 증진 방안을 논의하게 되는데 경제, 에너지 등에 초점이 맞춰질 것으로 생각된다. 데니스 만투로프 제1 부총리와 알렉산드르 노박 에너지 부문 부총리를 비롯해 안드레이 벨로우소프 국방장관, 세르게이 라브로프 외무장관, 미하일 무라시코 보건장관, 유리 보리소프 로스코스모스(연방우주공사) 사장, 올렉 벨로제로프 철도공사 사장 등이 푸틴 대통령을 수행하기에 단독 비공식 정상회담에서는 수행원 중 특정 인원들이 포함되며, 가장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들이 논의될 예정이기 때문에 꽤 많은 시간이 할애될 것이라 했다. 그리고 러시아 입장에서 군사적인 부분보다 가장 중요한 현안은 두만강 문제다. 과거 1960년대 소련은 중국, 북한과 더불어 두만강 일대의 개발에 대해 논의한 바 있다. 그러나 소련과 중국의 영토분쟁이 발발하고 북한과 중국 간의 협의도 강화되면서 이는 사실상 없던 일이 되어버렸다. 그 다음에 나타난 것이 두만강개발계획(TRADP : Tumen River Area Development Programme)의 일원이자 유엔개발계획의 지원으로 출범한 광역두만개발계획(Greater Tumen Initiative, GTI)이다. 당시 이 프로젝트의 참여 국가는 대한민국, 북한, 중국, 몽골, 러시아였지만 2009년 북한이 이 프로젝트에서 탈퇴해 현재 대한민국, 중국, 몽골, 러시아만 회원국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15년 만에 북한이 이 프로젝트 합류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본래 이 프로젝트는 대한민국 부산에서 울산과 속초를 이어주는 동해안 일대, 북한의 나진, 선봉시 등 두만강 유역, 중국의 동북 3성과 내몽골 몽골 동부지역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일부를 아우르는 매우 광대한 영역을 아우르는 동북아시아 최대 개발 계획이며 다자간 대형 프로젝트로 키우려고 했었다. 한반도 동부 회랑으로 알려진 환동해 지역이 이 계획에서 중심점을 차지하고 있으며, 지정학적 위치로 인한 엄청난 경제적인 이익이 잠재되어 있었다. 이는 가입 회원국들 간 서로 이익이 어느 정도 충돌하지 않으면서 주도권이 어느 정도 분산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 관련 총회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대한민국에게 이것이 크게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러시아와 몽골이 매우 소극적이고 북한이 탈퇴했기 때문에 그 의미가 퇴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올해 러시아-중국 간의 정상회담에서 두만강 프로젝트 논의가 나오면서 이 일대 개발 이야기가 공론화 되었다. 러시아는 그동안 중국 영향력 확대를 우려해 중국 선박 항해에 부정적이었으나 서방 제재를 받는 러시아와 북한이 접근하는 등 3국간 역학관계가 바뀌어 이제는 두만강이 중요해지게 됐다. 우선 러시아-중국이 합의했지만 문제는 북한의 동의와 합의가 매우 중요하다. 이 문제가 성사되면 중국 입장에서는 동북 3성 일대의 물류 허브가 생성되는 것이고 비약적 경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연변이나 만주 일대, 하얼빈의 조선족들이 더 이상 한국을 찾지 않을 것이다. 자국 내 경제가 성장하는데 대한민국에 일하러 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지역이 잘 되면 대한민국에 있던 조선족도 한국 생활 정리하고 중국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크다. 조선족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우리 입장에서는 어쩌고 보면 희소식이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낙후된 하산 일대를 군사 지역에서 민간 지역으로 개방하고 하산 지역에 대한 개발이 이루어질 수 있다. 그 동안 버려진 깡촌에 불과한 하산이 중국 심천과 같은 경제 물류 허브로 바뀔 수가 있는 것이다. 하산의 잠재적 가능성은 높았었지만 군사 지역으로 묶여 있었던데다 북한, 중국 등과의 관계가 냉랭해져 사실상 활용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러시아-북한 간의 정상회담으로 이 지역의 길이 열린다면 하산 지역은 육로 지역으로 판별해 볼 때 3국 간 육상 최대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게다가 러시아는 나진, 선봉 지역에 대대적인 투자를 할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알렉산드르 노박 에너지 부총리와 올렉 벨로제로프 철도공사 사장이 이번 방북에 동행한 이유가 이 때문이다. 나진, 선봉에 대한 러시아의 투자, 그리고 중국의 지원 등이 이루어진다면 환동해의 새로운 물류 허브로 탄생할 수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나진, 선봉보다 속초와 부산을 염두해 두고 환동해물류 허브로 만들고자 노력했지만 러시아에 대한 제재로 인해 생각보다 느리게 진척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나진, 선봉이 열리면 속초는 가능성이 희미해지고 이를 목적으로 만들었던 양양 국제공항은 막대한 적자를 내며 문을 닫아야 할지도 모른다. 러시아가 집중하고 있는 북극 항로의 문제도 여기에 있는데 나진, 선봉이 열리며 굳이 물류 선박이 부산에 기항하지 않아도 된다. 나선 지역에 기항하고 동남해안으로 그냥 통과만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되면 부산도 사실상 손해를 보게 된다. 그만큼 환동해 경제적인 부분으로 볼 때 우리 대한민국에도 매우 중요한 얘기인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한테도 아직 골든타임은 남아 있다. 가장 시급한 부분은 우리 대한민국과 블라디보스톡 간의 항공 운행이 재개 되어야 한다. 모스크바는 시간이 걸릴지 몰라도 블라디보스톡만큼은 이전처럼 항공 운행이 재기되어야 연해주 지역 문제에 다시 관여할 수 있다. 그러면서 환동해 지역 전체에 대한 러시아의 투자를 끌어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광역두만개발계획(Greater Tumen Initiative, GTI)의 회원국이라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제 환동해 지역은 러시아와 중국의 대 동방 정책으로 인하여 동북아시아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에 숟가락 담그지 못하면 우리는 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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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0
  • 유럽의회 선거 결과, 마크롱 대통령의 조기 총선 카드는 독배인가 아니면 승부수인가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에게 치명타를 가했다. 유럽의회 선거는 유럽 연합회원국들이 자국의 선거법에 따라 정당에 투표하며, 그 결과에 따라 각 회원국은 인구에 비례해서 할당된 의석수 내에서 당선인을 배분해 유럽의회 의원을 선출한다. 프랑스의 경우에 할당된 의원 수는 총 720석 중 81석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정당 지지율인데, 프랑스 집권 여당인 중도성향의 자유당 그룹에 속하는 ‘르네상스당’은 약 14.5% 정도를 득표했던 반면, 극우 성향의 ‘정체성과 민주주의’에 속하는 ‘국민연합’은 약 31.4% 정도를 득표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기준으로 총선을 생각해 보면, 집권 여당은 전체 하원 의석 577석 중 현재 249석이니까, 그 절반 정도인 125∼155석 정도가 될 것이다. 이와 반대로, 국민연합은 현재 89석보다 150석 정도가 많은 235∼265석 정도가 될 것이다. 원래 정치 일정대로 총선이 실시된 경우에, 집권 여당은 완패가 될 수밖에 없다. 사실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각국 집권당에 관한 중간평가의 성격이 강하다. 마크롱 대통령이 속해 있는 제3당인 중도 자유당 그룹은 현재 102석에서 79석으로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이와 반대로 극우 정당인 정체성과 민주주의가 현재 49석에서 58석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측되고, 여기에 이탈리아의 멜로리 총리가 속하는 극우 정당인 ‘이탈리아 형제들’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유럽의 보수와 개혁’이 현재 69석에서 73석으로 늘어나게 되면, 이 두 정치 그룹의 예상 의석수는 합쳐서 128석이 되기 때문에, 제3당이 자유당 그룹을 앞지르게 될 것이다. 거기에 무소속과 기타 정당의 의석수가 100석 정도로 극우에 가깝다고 하면, 이번 유럽의회 선거 결과는 극우파의 약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이러한 결과를 인정하면서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카드를 제시했다. 프랑스의 의회해산권이 대통령에게 있으므로, 마크롱 대통령은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을 통해 프랑스 국민에게 선택권을 돌려주면서 표심의 결과에 따르려는 것이다. 그런데 외견상으로 이것은 분명히 ‘국민연합’의 허를 찌른 것이다. 르펜은 유럽의회 선거 결과의 기세를 몰아 원래 정치 일정대로 진행하게 되면, 2027년 4월에 대통령 선거에서 2022년에 패배를 설욕하게 되고, 그해 6월에 총선이 실시될 것이니까, 총선도 승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현재 프랑스의 정치 상황으로 보아 이 시나리오는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러나 마크롱 대통령이 원래의 정치 일정을 뒤집어서 3년이나 앞당겨서 조기 총선을 실시하게 되면, 그 결과에 따라 르펜도 대통령 선거 때까지 시간이 아직 많이 남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른 변수들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에 당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욱이 현재 국민연합의 대표인 바르델라도 현재는 르펜과 함께 하지만, 그 결과에 따라 다른 행보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그 반대라면, 총리가 바르델라가 되면, 르펜은 대선후보로 나갈 것이다. 이것은 극우파가 대통령도 총리도 되는 최악을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마크롱 대통령은 중도성향으로 프랑스의 정치지형으로 보면 주류 정치와 다소 거리가 멀고 이른바 제3의 길이라고 볼 수 있다.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그는 1차 선거 결과로 24.01% 득표율을, 2차에서는 66.10% 득표율로 당선했다. 프랑스 대통령의 임기는 과거에 7년이었지만, 시락크 대통령 재임 때 임기를 5년으로 단축했고, 1번 연임은 가능하다. 마크롱 대통령은 2022년에 1차에서 27.85% 득표율을 기록했고, 2차에서는 58.54% 득표율로 재선으로 당선했다. 이러한 양상으로 보면 마크롱 대통령은 결선에서 표심을 모으는데 분명히 일가견(一家見)이 없지는 않다. 사실 그는 제3의 길을 지향하다 보니, 자신의 취약한 지지기반으로 인해 때론 좌충우돌과 돌출발언으로 많은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다. 마크롱 대통령의 이번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카드는 현재의 시점에서 보자면, 녹록하지 않다. 최근 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극우파가 약 29.5% 지지율을, 좌파가 약 18.5% 지지율을, 중도파가 약 18% 지지율을 보인다. 이번에 마크롱 대통령의 총선 조기 실시에 관해 프랑스의 원로정치인들도 극우파의 집권을 걱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지금과 같은 여세로 극우파에게 집권의 기회를 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오고 있다. 거기에 정통 우파인 ‘공화당’의 시오티 대표가 ‘국민연합’과 동맹을 제안했다가, 제명 위기로 번졌다. 아무리 그대로 나치독일에 맞서 드골주의 노선을 고수하고 있는 정통우파 정당의 대표가 극우파인 ‘국민연합’과 손을 잡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개인적 의견이라고 해도, 극우파와 협력하지 않는다는 정치적 금기를 깬 것은 정도(政道)를 넘어섰다는 당 안팎에서 강한 반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초라한 공화당의 현재 위상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좌파 연합(‘굴복하지 않은 프랑스’, ‘사회당’, ‘녹색당’, ‘공산당’)도 공천 문제로 균열의 조짐이 벌써 나타나기도 한다. 극우파에 맞서 4개의 연합체로 이루어진 좌파 연합은 극좌 성향의 멜랑숑 대표가 온건파를 공천대상에서 배제하려는 움직임으로 내분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국민은 프랑스 현재 당면한 문제의 해결에 있어 많은 문제가 정치적으로 있지만, 그래도 극우파 집권만은 안 된다는 생각에 전국적으로 시위에 나섰다. 수십만의 시위 인파가 반극우세력 연대의 물결로 가득 채우고 있다. 마크롱 대통령이 이러한 점에서 일종의 도박과 같은 정치적 승부수를 과감하게 그리고 빨리 던진 것은 직접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의 하원 선거(총선)에서 중도파를 끌어들이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물론 마크롱 대통령으로서는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 실시라는 카드 이외에 다른 마땅한 카드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현재 집권 여당의 의석수는 총 577석 중 250석으로 야당 전체가 327석보다 적다. 그러다 보니 각종 정부 정책이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중도파가 그동안에 외연을 확장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손익계산만을 분주히 했을 뿐, 실질적으로 프랑스가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성과 성찰이 우선 필요하다. 극단주의가 득세하는 것은 현재 집권 세력이 당면한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비전 그리고 국민의 기대에 부합하는 신뢰를 전혀 보여주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각종 개혁과제와 경제침체 등등으로 인한 국민의 실망감과 분노, 젊은 층들의 미래에 관한 절망감 때문이다. 또 거기에 편승해서 포퓰리즘적인 정책 남발로 극우파가 표심을 파고들면서, 마치 금방이라도 자신의 정책이 수행될 수 있는 것처럼, 표심을 흔들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극단주의가 득세하게 되면, 그 역풍은 누구도 어떤 세력도 결코 막을 수 없게 된다. 또 극단주의가 프랑스적인 정서와 전혀 합당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프랑스사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프랑스 국민은 마크롱 대통령과 여당을 지지해서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나치독일의 치욕과 악몽을 경험했기 때문에, 극우파의 집권만은 안 된다는 생각으로 거리에 나선 것이다. 왜냐하면 정치적 극단주의란 결국 서로를 스스로 파멸시키는 것일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성취로 이루어 놓은 모든 것을 파괴하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 불을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조기 총선을 앞두고 각 정파는 합종연횡을 통해 의회 권력에 서로 다가가려고 하지만, 누가 갈 수 있는지는 전적으로 프랑스 국민의 선택에 달려 있다. 만일 ‘대이변’이 일어날 경우, 프랑스는 격동에 휩싸일 것이고, 마크롱 대통령은 남은 임기 동안에 상당한 사임 압박에 더욱 시달릴 것이다. 현재의 조기 총선으로 인한 일시적 혼란보다 더 큰 혼란이 벌어진다면, 사실 극우파는 오히려 역풍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극우도 극좌도 싫다면, 이번 총선의 투표가 최선도 최악도 아니라면, 결국 프랑스 국민은 차악(遮惡)의 선택권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거기에 마크롱 대통령의 어설프지만, 현재로서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카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카드가 독배도 될 수 있을 것인데, 그렇다면 아마도 마크롱 대통령은 독배를 마신 이후 시간이 좀 지나서 독배였음을 알게 될 수도 있지만, 이와 반대로 처음부터 독배가 아니었는데, 마크롱 자신이 독배로 먼저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둘 중 어느 것이든 이번 프랑스 조기 총선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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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9
  • 불가리아 정부의 부정부패와 전쟁은 현재진행형
    불가리아는 전기 요금 인상으로 인해 보이소프 총리와 내각이 사퇴를 했으며 당시 정부는 국민에게 사죄를 했고 선거에서도 패배하여 의석이 117석에서 97석으로 크게 줄게 된다. 그러나 불가리아의 새로운 연정 정당인 사회당과 민주당 연정 정권 또한 정확히 과반인 120석의 의석 중 하원이 84석을 얻었고 상원은 36석을 얻었지만 여기에 불가리아 유럽 발전 시민당을 지지하는 국민들과 사회당을 지지하는 국민들 사이에 패가 갈려 조기 총선 요구와 더불어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를 6년 여에 걸쳐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2019년 소티르 차차로프 불가리아 검찰총장에 의해 플라멘 게오르기에프 반부패위원장에 대한 체포 영장이 떨어지게 된다. 체포 혐의는 부동산 개발업자로부터 수도 소피아의 고급 아파트를 저가에 사들였다는 혐의 때문이었다. 혐의로만 보면 불가리아 최대의 부패 스캔들 중 하나인 고급 아파트 스캔들인데 이와 같은 저가 매입 혐의는 명백한 불법으로 다른 직책도 아닌 반부패위원장이 그와 같은 범죄 행각을 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이에 대해 EU는 불가리아에 대해 맹렬히 비판했다. EU는 각종 개혁의 기준을 정해주고 평가와 재정지원을 연결함으로써 부정부패 척결과 개혁 작업을 촉구하고 있다. 개혁 작업이 가장 활발한 곳은 사법부와 경찰 조직이다. 불가리아 정부는 일선 경찰의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2019년부터 동영상 신고제를 도입했다. 경찰의 뇌물 수수나 근무 태만의 경우 시민들이 촬영 후에 신고를 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사실 이러한 동영상 신고제는 이미 2012년부터 도입이 되었지만 효과가 미미했었다. 그러나 2019년부터는 시민들의 신고가 들어오면 바로 수사를 진행해 확인하고 때로는 부패가 확인되면 공무원들을 경질하면서 벌금을 부과하기도 했다. 지방 경찰들의 부정부패를 없애기 위해 지방정부에 주어진 경찰의 통제, 명령, 작전권을 중앙경찰로 가져왔다. 또한 조직 범죄에 맞서기 위해 강력 범죄 총국도 신설하고 모든 경찰 지휘권을 경찰청장에 해당하는 경찰 사무국장에게 집중시키기도 했다. 당시 파블린 다미트로프 내무부 사무총장은 경찰이 국민들의 신뢰를 많이 얻지 못하는 상황에 국민들의 의견을 듣고 각종 개혁을 통해 변화를 하고자 한다며 이를 통해 우호적인 여론도 이끌어 내야한다고 역설했다. 이와 같은 부정부패와의 전쟁은 수많은 화물과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으로 부정부패의 소지가 많은 국경의 세관과 경찰에 대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불가리아 정부는 부패와 마피아의 자금원 역할을 해온 국경 부근 면세점을 폐쇄했다. 또한 2008년에는 EU의 가입과 더불어 각종 화물의 통관 업무도 일원화해 부정부패의 소지를 줄이기도 했다. 국경 이미그레이션을 총괄하는 코미사르 페테루이코프는 2019년부터 뇌물 수수 관련 감시 기관이 생겨나 돈을 주고 받으며 무마하려는 경우 바로 붙잡혀 검찰로 넘겨지는 시스템으로 바뀌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부정부패 이미지 개선을 위한 세관원들의 다이어트까지 시작되었다. 100kg 이상의 세관원은 욕심이 많은 부패 세관원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2019년 초에 임명된 멩켈레바 타체바 법무장관은 최근 불가리아에서 개혁의 대명사로 큰 화제를 몰고 다니고 있다. 그녀는 여성 법무장관이지만 고위 공무원 6,000여 명의 재산 변동 내역 공개를 추진하고 있는데다 정치인들의 기업 자금 유용의 방지와 사법부 개혁에도 직접 나섰기 때문이다. 정치범이나 조직 범죄 관련 사건에 대한 재판이 지연되거나, 취소되는 사건에 대해서도 그 이유를 분명히 하도록 요구했으며 또한 그 이유가 만약 법원의 잘못이라면 사법부에 시정을 요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이 뿌리 깊은 부패와의 전쟁은 타체바 장관 혼자만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부패가 발생할 수 있는 상황이더라도 부패를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불가리아 정부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EU는 최근 불가리아의 개혁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5억 유로, 약 8천억 원의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하기도 했다. 물론 불가리아의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은 것은 사실이다. 또한 절반의 성공이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그러한 평가 때문이다. 하지만 EU 가입과 함께 시작된 개혁은 수십년이 지나도 계속되어야 한다. EU의 평가와 지원과는 별개로 부정부패 척결을 위한 개혁은 국가의 정치 경제적 성장을 위한 최소한의 주춧돌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근 불가리아에 대해 미국은 역대 최대 규모의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미 재무부와 국무부는 불가리아인 6명과 64개 기관을 부패와 관련해 포괄적 역할을 한 혐의로 제재 대상에 올렸다. 제재 대상에 오르게 되면 미국 내 자산이 동결되고 미국 금융시스템에 대해 접근이 제한되며 미국인과의 거래 금지 등 조처를 당하거나, 비자 제한으로 인해 미국 입국이 금지되는 불이익을 보게 된다. 제재를 받은 개인 중에는 전직 국회의원과 관리, 기업인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 중에 한 인사는 러시아가 불가리아 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채널을 만들어준 혐의까지 받고 있다. 국제투명성기구에 따르면 불가리아는 EU에서 가장 부패한 국가로서, EU 집행위로부터도 부패 근절에 실패했다는 비판을 받아 왔던 또한 사실이다. 미국의 이와 같은 조처는 2018년에도 불가리아에서 대규모 반부패 시위가 벌어진 데 이어 선거를 앞두고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한 불가리아 국가 행정감찰관 콘스탄틴 펜체프가 언급하기를 불가리아의 사법부도 그 부패가 심하다고 밝혔다. 2009년 이래 사법부 내의 개혁이 없어 부패가 더 악화되었다고 진단하였으며, 개혁에 대한 사법부의 의지가 전혀 없기 때문에 이 문제는 계속 될 것이라 하였다. 더불어 검사를 대상으로 한 설문 조사 결과 80%의 응답자가 불가리아 사법 시스템에 문제가 있으며 개혁이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현 검사장 소티어 트산사로바에 대한 질문 결과 31%는 현 검사장 취임 후 긍정적 변화가 있다고 응답하였으나 40%는 결정적인 개혁은 없었다고 응답했으며 23%는 부패 정도가 이전보다 더 악화되었다고 응답하는 등, 다른 곳과 달리 사법부의 경우, 부패의 그 뿌리가 매우 깊어 이를 없애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 보인다. 당시 논의되었던 사법구조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는 기소 시스템으로 투명하지 않은 사건 배당 과정에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또한, 악법과 빈번한 법률 개정도 문제점으로 꼽히기도 했다. 게다가 재무부와 사법부까지 관여된 고급 아파트 스캔들은 단일 규모로 볼 때 지금까지 부패 중 가장 큰 사건이라 언급했다. 플라멘 게오르기에프 반부패위원장은 2018년 재산 신고 당시 아파트의 186㎡에 달하는 테라스 면적을 누락하는 등 재산을 축소 신고한 혐의도 함께 받고 있다. 검찰의 발표 후 루멘 라데프 불가리아 대통령은 2018년부터 반부패위원회를 맡아온 게오르기에프 위원장을 해임했다. 불가리아의 의회 역시 찬반 120대 3으로 게오르기에프 위원장의 퇴진에 찬성했다. 그러나 게오르기에프 위원장은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며 오래전부터 사임을 고려해왔다고 말하는 등, 적반하장의 모습을 보여왔다. 게다가 당시 야당인 유럽발전시민당(GERB)의 부총재 역시 게오르기에프 위원장에게 아파트를 판매한 부동산 개발업자에게서 시장가격보다 저렴하게 고급 아파트를 구매한 의혹을 받고 사임하기도 했다. 고급 아파트 스캔들로 불린 이 사건으로 불가리아 사법부와 내각 장관과 차관들이 대부분 사임했으며 고위 관리의 도덕성 문제를 지적하고 성토하는 상황이 이어지며 스캔들 재판은 올해가 최종 선고를 하는 해로 최종 선고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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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8
  • 대한민국의 석유와 가스 시추 성공 사례
    필자가 있는 터키 하산케이프 지역은 바트만과 마찬가지로 상당수의 유전들이 분포해 있다. 비록 터키가 산유국 상위층에 들 정도로 많이 나오고 있는 국가는 아니지만 터키의 상당수 유전이 이곳에 있으며 석유 생산량 꽤 괜찮은 편이다. 문제는 이 지역이 쿠르디스탄 지역, 쿠르드족이 살고 있는 지역이라는 것인데 이 유전과 석유 자원 때문에 터키 정부는 쿠르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는 측면도 있다. 유전 얘기하니까 얼마 전 동해 유전 때문에 한창 떠들썩 하길래 예전에 그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아 자료를 찾아봤다. 그런데 울산광역시의 남동쪽에 있는 대륙붕 제6-1광구에 가스전이 발견되었었다는 기록을 찾아냈다. 당시 한국석유공사가 1998년 7월 탐사 시추에 성공한 한국 최초의 가스전으로, 채굴 가능한 매장량은 액화천연가스(LNG) 기준 500만톤 정도였다고 했다. 2004년 11월부터 상업 생산을 시작했으며 채굴량은 하루 약 1,000톤이고, 한국가스공사를 통해 우선 경상도에 공급했다. 하루 1,000톤은 전국 LNG 소비량의 약 2%이고 LNG 외에 휘발유성 원유인 초경질원유(컨덴세이트)도 하루 750배럴씩 생산해 국내에 공급했다. 그거 나오기 이전에는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라는 수식어를 갖고 있었다. 이 유전이 나옴으로써 대한민국은 순식간에 산유국 지위에 오르게 됐지만 그것도 잠시, 2021년 12월 31일부로 매장량 고갈로 인해 가스 생산이 종료되었다. 잠깐 설랬단 기억이 있지만 그냥 설레고만 말았었다. 이 가스전의 개발로 불과 17년이란 짧은 기간이었지만 한국도 산유국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고, LNG 일부를 국내에서 자체 조달할 수 있었다. 2021년 12월 31일 생산 종료까지 17년 동안 천연가스 4,100만 배럴, 초경질유 390만 배럴을 생산하면서 24억 달러 가량의 수입 대체 효과를 냈었다. 물론 이러한 전례가 있었기에 동해에는 석유가 매장되어 있을 가능성은 크다. 즉, 여러 사례들을 보았을 때, 천공이 마냥 뻘소리 한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석유가 실제로 매장돼 있는지 전망하기 위해서는 기반암, 저류층, 덮개암, 트랩 등 4가지 구조를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동해 심해에서 이 같은 요소들을 확인 될 수 있는 부분이 있긴 하다. 기본적으로 분지 바닥을 기반암이라고 하고 그 위에 퇴적층이 쌓인다. 여기에 석유가 쌓이려면 배사구조로 구멍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을 '트랩될 수 있는 구조'라고 흔히 언급되고 있다. 더불어 석유는 가볍기 때문에 부력으로 인해 상층로 떠오르게 되는데, 덮개암이 그 위를 덮어 날림을 방지하는 구조다. 심해 해저에서 그런 상황이 있다면 앞서 언급한 4가지 구조가 맞아 떨어질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우리 대한민국의 시추 기술을 세계 정상급이고 이미 중동 유전 개발에 여러 기업들이 참여해서 시추 기술을 보여준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비용이다. 정부가 영일만 시추를 하게 된다면 시추공 1개 당 1,000억원 정도가 소요된다. 시추공들이 다발로 삽입되면 우리가 석유나 가스 수입한 것보다 더 비싸다는 얘기다. 그러려면 어느 정도 이 가능성에 대해 검토해보고 꽤 장기적인 측면에서 계획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그런 장기적인 플렌이 매우 약한 나라다. 게다가 정권이 바뀌면 다른 방향의 정책성이 우선 순위가 될 수 있어 꾸준히 이 작업을 한다는게 불가능에 가깝다. 언제든지 중단될 수 있는 사업에 윤 정권이 앞으로 3년 남았는데 그 3년 동안 막대한 자금을 동해에 쏟아 부으며 유전을 설치해 시추할 가능성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후 처음 국정 브리핑을 열고 "포항 영일만 앞바다에서 막대한 양의 석유와 가스가 매장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물리탐사 결과가 나왔다"며 "올해 말 첫 번째 시추공 작업에 들어갈 예정"이라고 언급했다. 폴란드 방산 계약 대금이 완납이 된 것도 아니고 우크라이나에 또 많이 퍼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일만 벌려 놓고 거둬들인 것 없이 또 다른 투자를 한다는 것은 매우 불안한 일이다. 덕분에 석유나 가스 관련하여 주식이 오르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3년 후에는 어떨까? 여기에 주식을 사들이는 자들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만약 시추에서 매장 가능성이 떨어진다면 재정적 낭비에 대해 책임질 사람이 누구일까? 윤대통령의 임기 끝나면 책임을 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테고 왜 이런 무리한 사업을 계속 추진하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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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7
  •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어색한 만남으로 인한 빛바랜 기념식
    1944년 6월 6일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를 좌우할 결정적인 상륙작전이었던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나치 독일에 맞서 유럽 대륙에 교두보를 마련할 수 있었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이었다. 프랑스 북서 쪽의 노르망디 지역은 영국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와이트섬에서 보면, 영국 해협을 사이에 두고 코탕탱반도와 오른 강을 따라 캉을 중심으로 하는 바스노르망디 지역과 세느강과 외르강을 끼고 루앙을 중심으로 하는 오트 노르망디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현재는 두 지역이 병합되어서 캉에는 지방의회가 있고, 루앙에는 도청이 있다. 이번에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노르망디의 생 로랑 쉬르 메르(칼바도스 주의 지역 공동체)를 방문했고, 그가 연설한 곳은 이른바 프앙테 뒤 오크인데, 이곳은 약 80 킬로미터의 노르망디 해변에서 보면 30 미터 길이의 절벽이다. 그 당시에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상륙작전을 위해 노르망디 해변을 5개의 해변으로 나누어서 각각 동쪽에서부터 서쪽으로 유타 해변, 오마하 해변, 골드 해변, 주노 해변, 스워드 해변이라고 명명했다. 프앙테 뒤 오크는 오마하 해변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6.4 킬로미터 떨어져 있는데, 나치 독일은 이른바 대서양 방벽의 일부로 콘크리트 구조물과 해안포대를 통해, 이곳을 요새화했다. 미군은 이곳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군인들의 피해가 컸다. 미군 225명 중 135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까닭은 미군이 장비를 상륙정에 싣고 해변에 상륙하면서, 독일군의 저항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해변에 상륙한 다음에 절벽을 오르면서도,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바이든 대통령의 연설은 자유와 민주를 위해 침략에 맞설 것과 미국의 고립주의에 대한 견제를 강조하면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서방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준 것이었다. 더욱이 이곳은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이 40년에 전에 연설했던 장소이기 때문에, 바이든 대통령으로서는 레이건 전 대통령의 향수를 자극하면서도 동시에 트럼프 전 대통령을 견제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연합국의 상당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승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러시아(당시에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의 최종적 승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마크롱 대통령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초대하지 못했지만,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결코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마크롱 대통령도 그 당시에 러시아의 도움을 의도적으로 회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 행사에 마크롱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초청한 것은 역설적이다. 우크라이나는 그 당시에 나치독일에 협력했던 국가인데,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초청되고, 독일 숄츠 총리와 함께 자리에 선다는 것은 이번 기념식을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물론 어떤 국자의 지도자를 기념식에 초청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주최국의 판단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기념식의 원래 취지에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나치 독일에 맞서 약 15만 명의 군인들이 전장에 투입되어 약 1만 명의 사상자가 생겼던 지상 최대의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것은 승리를 기념하는 이벤트 행사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치 독일과 같은 침략전쟁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도록 서로 협상하고 중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이와 달리 각국 지도자들의 발언을 보면, 그것보다는 허울 좋은 추상적인 말로 그럴듯한 외교적 수사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공통점이 있다면, 각국 지도자들이 대체로 낮은 지지율로 인해 내치에서 상당히 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까지 실시된 유럽 의회 선거는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의 의회 해산과 조기 총선이라는 결과를 가져 왔다. 이것은 마크롱 대통령이 사실 위험한 도박을 한 것인데, 파리 올림픽을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에 고육지책으로 제시한 비장의 카드였다. 극우파의 약진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피로감과 더불어 인플레이션, 에너지 가격 인상, 반이민주의 정서, 실업률 증가 등등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표심으로만 보자면, 이번 기념식에서 각국의 지도자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엘리트주의자들의 자화자찬으로 가득 차 있을 뿐인데, 그들의 미래에 대해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울 뿐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일이 반쪽짜리 행사로 만든 것은 어찌 보면 유럽이 처한 냉정한 현실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한때는 연합국으로 나치독일에 맞서 모두 함께 싸웠지만, 지금은 오직 자국의 이익을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도 불사하겠다거나. 우크라이나에 지상군을 직접 파병하겠다거나, 혹은 우크라이나에 제공한 서방 무기를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본토 공격에 사용하도록 허용하는 것이 과연 유럽의 평화를 위한 지도자의 발언이라고 볼 수 있는가! 전쟁을 끝내고 중재하기 위한 중재도 협상도 지지부진한 상태에서 정치적 발언이라 하는 것이 과연 누굴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가면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의 피해만 극심하고, 시간이 갈수록 그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뿐이다. 더 나아가 향후 우크라이나 재건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방향은 아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시간이 우크라이나 편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번 기념식에 참석해서 각국에 지원을 호소하고 있지만, 2년 전과 비교하면 사뭇 격세지감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지원 결정이 우크라이나의 현실적 상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지는 우려의 시각도 많다. 오히려 그와 같은 지원 방안이 유럽 각국에게는 극우세력들의 부상으로 나타나서, 정치적 변화가 발생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같은 획기적 돌파구도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치열한 소모전과 공방전 그리고 이로 인한 막대한 인명피해만 커지고 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독일군은 연합군이 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문제는 어느 지점으로 연합군이 상륙할 것인지에 따라 독일군의 대응도 달랐을 것이라는 점이다. 연합군이 노르망디 쪽으로 상륙할 경우에, 독일군은 3개의 보병사단과 다소 남쪽에 2개의 기갑 사단으로 방어해야 했다. 그런데 이 경우에 문제는 연합군이 독일 해공군보다 월등한 공중포격전의 우위에 있는 상황에서 해병대와 공수사단과 같은 특수부대원들의 상륙을 보병 위주의 독일군이 저지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려웠다는 점이다. 또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연합국이 우선 파리를 입성하려는 계획이었기 때문에, 연합군은 파 드 칼레에 주둔했던 독일군과 교전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진 것처럼 보인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은 됭케르트 철수 작전과 더불어 연합군의 반격을 위해 매우 중요했다. 독일은 이를 통해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결국 독일은 패전국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은 연합국 승리의 기념일이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정치적 행사로 변질이 되어 버렸다.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동맹도 없고, 각국의 이익을 위해 합종연횡하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명분과 도덕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이 과연 필요한지는 의문이다. 또 그 결과가 전 세계를 위기로 몰아넣고, 긴장감을 조장하는 것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유럽의 지도자들은 거기에 편승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손익계산만 하고 있을 뿐이다. 별로 표심에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 지도자는 자신의 정치적 능력이 무능하다는 사실 밖에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자국으로부터도 별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지도자가 국제무대에서 과연 지도자로서 인정받기는 어렵다. 그동안에 유럽연합의 두 축이었던 독일 총리와 프랑스 대통령은 이제 역사의 엄정한 무대에서 서서히 사라질 상황에 처해 있다. 물론 차후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매우 불확실하고, 좋지 않다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 기념식, 프랑스는 독일에 참담한 패배를 당했지만,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도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독일군의 후방을 괴롭혔고, 독일군의 수송과 보급을 차단하는 역할을 상당히 수행했다. 5년마다 열리는 이 기념식에서 개최국인 프랑스는 분명히 그 의미가 남다르다. 그러나 이번처럼 반쪽짜리 기념행사는 그 의미를 퇴색시키고, 더 나아가 국제적 위상도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기보다 퇴락의 폐허만 바라보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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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6
  • 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 사망 1주기 되는 오늘
    이탈리아 절대 권력의 상징, 이탈리아 현대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거물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Silvio Berlusconi, 1936~2023)가 오늘 오전 밀라노의 산 라파엘레 병원에 별세했다. 베를루스코니는 만성 골수 백혈병(CML)에 따른 폐 감염으로 지난 4월 5일부터 45일간 이곳 병원에 입원했었다. 약간의 차도가 생겨 지난 달 5월 19일에 퇴원했다가, 최근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다시 입원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확한 사망 원인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으나, 지병인 백혈병 악화에 따른 합병증으로 추정되고 있다. 비록 정치적인 행적으로보나 사생활적인 부분을 보면 그리 도덕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1994년부터 2011년까지 3기에 걸쳐 총리로 장기간 집권하며 이탈리아 현대사와 유럽 현대사에 있어 한 획을 그은 인물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게다가 그의 기행이 무엇이든, 부정부패를 많이 저질렀고 이탈리아의 경제를 파탄나게 했던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계속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이탈리아 국민들에 있어 애증의 존재였기 때문이다. 이는 그의 정적이나 마찬가지였던 마테오 렌치 전 총리도 그를 추모하며 트위터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사랑했고, 또 미워했다”고 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의 업적으로는 “정치뿐만 아니라 경제, 스포츠, 텔레비전 등 이탈리아인의 삶에 미친 막대한 영향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 이탈리아의 집권당인 FdI는 “우리는 그를 이탈리아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하고 결단력 있으며 높이 평가받는 인물 중 하나로 기억할 것”이라며 “그의 가족에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현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또한 베를루스코니를 “투사”라고 칭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것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그 용기와 결단력이 그를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우리는 그와 함께 싸워 이기고, 패배하는 등 많은 전투를 치러왔고 그를 위해서라도 우리가 함께 세운 목표를 지킬 것”이라며 작별을 고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가 이끌었던 전진 이탈리아당은 “우리는 당신을 절대 보낼 수 없다”며 “안녕히 가세요 총리, 당신의 정치 공동체로부터”라고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귀도 크로세토 이탈리아 국방장관 또한 트위터를 통해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죽음은 “큰 빈자리를 남겼다”며 “한 시대가 지나가고, 한 시대가 막을 내린다. 나는 그를 매우 사랑했다”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베를루스코니 전 총리의 오랜 정치적 동지인 안토니오 타야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외교장관은 “슬픔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감사했다”고 애도했다. 베를루스코니와 경쟁했던 중도 좌파 민주당의 엘리 슐레인은 “모든 것이 우리를 분열시키고 그의 정치적 비전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았지만 인간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주인공이었던 한 사람에 대한 존경은 여전히 남아 있다. 민주당을 대표해 깊은 애도를 표한다”고 했다. 마테오 살비니 이탈리아 부총리 겸 교통장관은 “오늘 위대한 이탈리아인이 우리에게 작별을 고했다”며 “어떤 관점에서 보든 모든 분야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중 한 명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오늘 위대한 친구를 잃었다”며 망연자실한 심정을 덧붙였다. 그가 행한 비행이나 기행에 비해 이런 정도를 평가와 애도를 받는다면 베를루스코니가 얼마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애증의 존재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마 한국이었으면 평생 욕 먹어도 모자랐을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베를루스코니는 악행도 무수히 남겼지만 업적도 그만큼 남겼던 유럽 현대사에 있어 "살아있는 고목이자 거물"이었다. 파올로 젠틸로니 유럽 집행위원회(EC) 재무장관 겸 전 총리는 “최근 수십 년간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지도자,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별세했다”라고 애도했으며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도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에 대해 유럽의 위대한 정치인이고 정치의 '마지막 모히칸족' 중 한 명이었다"며 "베를루스코니가 권좌에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탈리아에 좋은 일이었으며, 이탈리아 내정을 안정시키는 요인이었다." 라며 그를 추모했다. 베를루스코니는 1936년 밀라노에서 출생했다. 그는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병역기피를 한 것과 크루즈 함선에서 가수를 한 것을 제외하면 매우 평범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었다. 그러다가 건설업 사장이 되어 밀라노 교외에 밀라노2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분양을 했는데 이게 대박나면서 건설 재벌이 될 수 있는 길을 열게 되었고, 당시 밀라노 시장인 베티노 크락시와도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이후 베티노 크락시는 그의 정치 스승이 된다. 이후 자유 라디오 운동에 큰 영감을 받아 방송 진출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는 1973년 텔레밀라노라는 케이블 방송사를 열어 사장이 되었다. 그러나 1977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판결로 민영방송 금지조항이 폐지되자 방송사업을 더욱 확장해 지상파 방송사를 차리면서 언론계 재벌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금을 어떻게 조달했는지에 대해 시칠리아 마피아와의 연루설과 정경유착설 등 여러 구설수들이 있었지만 지주 회사 핀인베스트의 복잡한 지분관계로 인해 제대로 된 수사 없이 넘어갔다. 당시 이탈리아는 베를루스코니가 정계에 있기 전부터 이미 부정부패와 그로 인한 언론통제가 만연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에 타 군소 민영방송사(Rete4, Italia 1)들의 지분을 구입하여 최종적으로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 자신의 방송이 송출되는 광활한 방송망을 가지게 되면서 본격적인 언론계 재벌이 된다. 1983년 베를루스코니의 자금 지원을 받은 그의 정치적 스승인 베티노 크락시가 총리가 되자 베를루스코니는 이러한 기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방송 규제의 완화를 이끌어냈고, 그로 인해 더욱 큰 돈을 벌게 되었다. 방송 규제 완화 규정 중 일부가 로마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판결을 받으면서 세의 확장이 주춤했었지만, 기민당과 사회당에 정치자금을 적절하게 제공했고 1990년 생방송 뉴스 프로그램 방영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정치적인 영향력까지 거머쥐게 되는, 이른바 거물로써 출발이 이루어졌다. 1992년 마니 풀리테, 불법 정치 자금 사건으로 인해 베티노 크락시를 비롯한 유력 정치인들이 몰락하게 되면서, 1994년 총선에서 좌익민주당의 집권이 유력해졌다. 이 때 베를루스코니는 전진 이탈리아당(Forza Italia)을 창당하고 직접 정치에 뛰어 들었다. 베를루스코니는 비디오 민주주의라는 평이 나왔을 정도로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방송망과 신문들을 총동원하여 기존의 사회당과 기민당 지지층을 대거 확보했고, 성공한 기업가 겸 A.C 밀란 축구 구단주로서의 이미지를 활용하여 총선에서 승리했으며 우파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막상 집권 이후에는 북부 동맹과의 불화가 있어 결국 1년도 채 지나지 않아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했고 1996년 총선에서 참패해버렸다. 그러나 자신의 주특기인 미디어를 이용해 좌익 민주당을 대대적으로 공격한 끝에 2001년 총선에서 다시 승리하였다. 2기 집권 당시에는 이라크 전에 참전하는 문제와 RAI 장악 등으로 여러모로 평이 좋지 않았고, 경제 정책도 생각보다 큰 이슈를 만들어 내지 못하여 이전 정권과 다를 바 없다는 평을 받게 된다. 그러한 와중에 1당을 안정적으로 장악하기 위해 선거법을 개정하였는데 2006년 총선에서 아깝게 패배해버렸지만 득표율이 1% 차이도 나지 않았기 때문에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더불어 2008년 총선에서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며 3선 총리가 되었다. 세 번째로 총리가 되자 중도우파 정당인 자유의 인민을 창당해서 2개 당의 당 대표까지 역임했다. 3기 집권 내내 이탈리아 경제는 악화된 상태로 떨어졌고 청년 실업률은 30~40%대까지 치솟아 결국 2년 만에 총리직에서 퇴진했다. 2013년 의원 임기가 종료되자 자유의 인민당을 정리했다. 2017년 지방선거에서 베를루스코니는 의외로 선전하면서 정치적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2018년 총선에서 베를루스코니는 극우파 북부동맹을 포함하는 중도-우파 연합을 맺어 선거에 임했다. 때마침 집권 중이었던 중도좌파 민주당이 포퓰리즘 정당인 오성운동의 집권을 막으려는 목적에서 선거법을 개정하여 원내 1당에게 다수의석을 부여하는 방식의 선거법을 철폐하고 정당 연합도 표를 받을수있도록 선거법을 통과시켜 놓았다. 그러자 베를루스코니를 싫어하는 유권자들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루스코니가 정치적으로 완전히 부활하게 된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다. 그는 이탈리아 지식인들이나 많은 국민들에게 무능한 정치인을 넘어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다. 특히 현대 이탈리아 영화를 대표하는 영화감독 중 한 명인 난니 모레티는 거의 마이클 무어가 조지 W. 부시를 싫어하는 수준으로 베를루스코니를 극혐하여 베를루스코니를 비판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움배르토 에코는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정치인이 언론과 결합하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지 예로 들기도 했다. 바티칸과 한 때의 동맹이었던 우파 정치인들에게까지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여성편력 또한 대단하고 갖가지 망언을 아무렇지도 쏟아냈다. 그래도 그가 이탈리아 내에서 인기가 있는 이유는 이탈리아 국민들의 감성과 문화를 자극하는 고도의 이미지 메이킹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베를루스코니 가(家)와 그의 친인척들이 이탈리아 민영 언론을 독과점했기 때문인 것도 있다. 더불어 2013년 이후부터 시민결합을 지지해왔고 동성결혼에 있어서도 적극적 반대가 아닌 유보적인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는 결국 백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갖은 기행과 비행을 저질렀지만 유럽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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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5
  • 알렉세이 나발니의 일생과 죽음이 미치는 영향 - 1부
    푸틴 대통령과 대적한 러시아의 반 체제 인사이자 횡령 사기범인 알렉세이 나발니(Алексей Навальный)가 지난 16일 야말-네네츠 제 3교도소에서 사망했다. 푸틴과 맞서온 그의 인생을 함 조망해본다. 그는 1976년 생으로 모스크바 주 부틴이란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아나톨리 이바노비치 나발니(Анатолий Иванович Навальный)는 우크라이나 키예프 출신이고 어머니 류드밀라 이바노브나 나발나야(Людмила Ивановна Навальная)는 러시아 출신으로 그는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인 셈이다. 나발니가 우크라이나에 호의적이었던 이유는 자신의 부친이 우크라이나인이기도 했고 본인도 우크라이나계라는 자부심도 갖고 있다. 2010년대 타스통신에서 한 나발니의 인터뷰를 본적이 있는데 자신은 러시아인으로 살고 있지만 한켠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다 한다. 그리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자신의 가계의 대한 내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친우크라이나계 인사였던 보리스 넴초프와 가깝게 지냈고 크림 합병에 대해 찬성하긴 했지만 당시 정치인으로써 나발니의 세력이 미미했기에 우선 자신의 인지도에 상처가 되지 않는 선에서 마무리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반전 시위 선동에서 보면 알 수 있는데 이 때도 푸틴 대통령을 비난하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애정을 보여준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즉, 그는 대놓고 러시아인이면서 반러시아 행세를 했던 것이다. 나발니는 모스크바로부터 남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오브닌스크에서 자랐으나, 어릴 때 여름에는 우크라이나에 있는 그의 할머니와 지냈다고 한다. 나발니는 본인 스스로 어린 시절을 회상했을 때, 키예프의 생활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강한 애정을 갖게 되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그는 이례적으로 쉬꼴라를 모스크바에서 키예프로 옮겨 키예프에서 쉬꼴라를 졸업했다. 그는 몸과 국적만 러시아인이지 속 전체는 우크라이나인이었던 것이다. 그는 1993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러시아 민족 우호 대학교에 입학하여 1998년 법학학사학위를 취득했고 연방 지원 금융 대학에서 증권과 투자, 환전, 그리고 금융 경제를 공부했다. 당시 러시아의 입장에서 1998년 모라토리움 선언하는 등, 경제적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에 금융 경제에 대한 관심을 갖고 기존의 법학에서 금융경제학으로 잠깐 외유를 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원래의 나발니의 성향은 좌파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정계에 입문했고 2000년 진보주의와 사회, 녹색자유주의, 친유럽 성향이면서 대표적인 친서방 리버럴 정당인 야블로코(Яблоко)에 입당한다. 이 정당은 사유재산을 보호하고 동등한 기회를 보장하기 위한 정치, 경제에서의 공정한 경쟁을 지지하는 정당으로 외교적으로는 러시아의 유럽 연합 가입과 미국과의 우호관계 수립 등 서방과의 관계 강화를 주장하고 있는 정당이다. 여기서 활동한 나발니는 친서방 인사 및 미국의 정계권 인사들과도 접촉을 가지며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나발니의 영어 실력은 러시아어 억양이 강하기는 하지만 단어 및 어휘선택이 탁월할 정도 유창했던게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확실한 인종주의자이기도 했다. 2004년 나발니는 피부색이 다른 카프카스계 군인들을 바퀴벌레에 비유하며 “사람은 총으로 죽여야 하지만 바퀴벌레는 슬리퍼로 밟아 죽여야 한다.”고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그는 카프카스계 민족들을 매우 경멸했는데 카프카스 지역의 민족들이 러시아 경제권에 진입해 러시아인들의 취업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서 이민족들을 매우 싫어한 것이다. 그는 2006년 반 외국인 성향을 띈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을 승인해 줄 것을 모스크바 연방 특별시 시청에 청원하고 참관인 자격으로 이 시위에 참여했다. 말 그대로 성향 자체가 인종차별적인 면과 과격한 전체주의 나치의 성향을 그대로 갖고 있었다 보면 된다. 나발니는 카프카스, 중앙아시아, 그리고 동양인을 혐오했는데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자체가 그와 같은 성향을 띄고 있다. 즉, 유색인종 차별, 과도한 폭력성 자체의 광기 어린 모습을 갖고 있었더 것인데 이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당시 갖고 있던 유색인종에 대한 편견 및 무시, 차별, 폭력성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겠다. 나도 당시 모스크바 마야꼽스까야에서 푸쉬낀스까야까지 러시아인의 행진(Русский марш) 시위 행렬에서 목소리 구호를 외치고 연설하며 독려하는 나발니를 본적이 있다. 당시 그를 가까이서 보지는 못했지만 연설하며 독려하는 표정과 그 제스처가 어딘가 많이 익숙한 모습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돌프 히틀러가 총통이 되기 전, 선동하는 그의 제스쳐와 참 많이 닮았다. 물론 그가 나치 성향을 갖고 있지만 네오나치는 아닌듯 싶다. 나치 표식을 몸에 새기지 않았고 나치라 할만한 어떠한 물건도 발견된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나발니는 2007년 야블로코로부터 인종차별적, 민족주의적 활동 등으로 당의 규정에 위배되는 행위를 저질렀다며 제명 되어 버렸다. 야블로코 당에서 제명당한 이후에도 나발니는 '러시아인의 행진' 시위에 지속적으로 참가하면서 "러시아 인민해방운동(Национального Русского Освободительного Движения, НАРОД)" 정당을 창설했다. 그리고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이 발발하자 나발니는 극우로 돌아서 당시 대통령인 메드베제프와 푸틴 총리를 적극 지지했다. 그는 자신의 블로그에 '그루지야(현 조지아)에 대한 적극적 봉쇄조치가 필요하며 크루즈 미사일을 동원해 그루지야 참모 본부를 공격해야 하고 남오세티야 공화국 상공을 지나는 모든 항공기들을 격추시켜야 한다고 적어 논란을 일으킨다. 또한 나발니는 러시아 내에 있는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들(грызуны)"이라 비하하며 그들을 전부 추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전쟁 이후에는 남오세티야 공화국과 압하지야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해야 한다고 언급해 조지아 국민들의 분노를 샀다. 남오세티아 전쟁이 승리로 끝난 후, 그동안 공부한 금융경제학과 투자에 관한 전문성을 내세워 2008년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루크오일, 그리고 수르구트네프트 가스, 이렇게 5개의 가스 회사 주식을 30만 루블 어치를 사들여 주주행동주의자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회사들이 소유한 금융 재산의 투명성을 강조했지만 당시만 해도 러시아는 금융 관련 부패가 심각했었고 이 부분이 정치권과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자료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특히 로스네프트, 가스프롬, 가스프롬 네프트 등에는 상위 직원들이 횡령과 회사 투명성을 차단하는 행위를 자행했고 이를 파악한 나발니는 주 정부의 부적절한 예산 지출과 부실한 주 정부 서비스 등을 지적하면서 연방 정부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처럼 친서방 리버럴에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 서방 리버럴 인사들과 교류가 두텁고 반골 기질까지 있는 나발니를 주목한 것은 미국 정가였다. 그는 2010년 미국으로 들어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예일 대학에서 World Fellows 프로그렘을 수행했다. 최근 미국 대통령 여섯 명 중 네 명이 예일 출신일 정도로 미국 정가와 뿌리 깊은 관계를 갖고 있던 예일 대학에서 나발니 수많은 리버럴 정가 인사들을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러시아로 돌아와 가장 먼저 한 일은 푸틴을 비판하는 일이었다. 미국에서 어떠한 권유를 받았는지 알 수 없지만 이 때를 계기로 그는 철저히 반 체제, 반 푸틴 인사로 돌아서기 시작했다. 이 정도 설명했으면 충분히 눈치챘을 것이다. 그는 딥스테이트의 개가 되어 러시아로 돌아와 체제 전복을 꾀했던 것이다. 이 때부터 그가 가까워진 인물이 바로 보리스 넴초프다. 그는 넴초프의 지지를 받아 트랜스네프트 가스 회사의 비밀 회계 감사 자료를 공개한다. 이 때부터 그는 반 부패 활동을 시작한다. 행정상 필요한 물자 조달 등을 모든 러시아 정부가 온라인에 게시 및 공고하여 입찰을 하도록 하는 로스필 프로젝트를 촉구했다. 일반 개인이 도로에 있는 구멍들을 러시아 정부에 보고하고, 러시아 연방 정부가 불만사항들에 응답하게 한 로스야마 프로젝트도 진행했다. 그러한 행위는 러시아 우파 정당들의 공격을 불러왔고 결국 나발니는 러시아 인민해방운동 해산했다. 2011년 6월 로이터와 영어로 능숙하게 인터뷰 했는데 "푸틴의 정치 체제는 부패에 의해 매우 약화되고 있으며, 러시아 연방에서도 5년 이내에 아랍의 봄과 같은 반정부 데모 시위가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하며 러시아 내 반 정부 시위를 벌일 것임을 예고했다. 그리고 체제 개혁을 진행 중에 있던 푸틴의 모든 정책을 반대하며 이를 규탄하기 위해 여러 곳에서 지지자들을 모아 시위를 야기했다. 그로 인해 2018년까지 10차례나 행정구류(Административный арест)를 당해 총 192일 간 구금되기도 했다. 처음에 러시아 국민들은 그의 반 부패 조사 행위를 응원했다. 소련 해체 이후, 경제적 침체와 공무원들의 부패에 시달리고 있던 시민들의 지지는 갈수록 올라갔다. 여기에 힘을 받은 나발니는 여러 곳에서 후원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것의 그의 몰락의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발니는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적 성향은 그대로 갖고 있었는데 치과 의사로 변장해 외국인들을 '러시아 민족의 뿌리를 뒤흔드는' 충치에 비유하며 추방을 요구하는 영상을 올려 논란을 빚게 된다. 그런데 이 영상에 환호하는 지지자도 있었지만 반 부패 척결에 적극 찬성하는 시민들은 이 영상을 보고 나발니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당시에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를 토대로 보리스 넴초프가 있는 인민자유당(Партия народной свободы, PARNAS)에 입당했고 넴초프의 후원을 받아 2013년 나발니는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 출마한다. 그는 선거 유세 과정에서 그의 인종차별적 발언 등이 도마에 오르자 블로그를 통해 '조지아인들을 설치류 떼라 비하한 것을 사과한다'고 말했으나 전쟁에 찬성했던 과거 행적에 대해서는 별다른 해명을 내놓지 않았다. 이에 조지아인들은 시장 선거가 아니면 그가 사과했을까?, 혹은 모스크바에 거주하는 조지아계 러시아인들의 표가 급했을 것이라 그를 조롱하기도 했다. 즉, 아무도 그의 사과를 진정성 있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남오세티아 전쟁에 찬성했던 것에 대해 해명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진정성이 없다 판단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그 와중에도 중앙아시아 이민자에 대한 지원 중단을 요구하는 ‘코카서스 급식 중단' 캠페인에 깊숙이 관여했다. 그런 그를 카프카스 민족들 중 누가 진정성 있는 사과라 볼 수 있겠는가? 당시만 해도 이러한 인종차별이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낙선한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선거가 시작되고 27.24%, 632,697표를 얻어 선전했지만 세르게이 소뱌닌에게 밀려 결국 큰 차이로 낙선했다. 물론 선전은 했지만 타 민족 러시아계 시민들이 소뱌닌에게 몰표를 던졌기 때문에 낙선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거에 불복해 지지자들을 이끌고 시위를 조장해 또 다시 구류 조치를 당했고 2014년 12월 30일, 그는 프랑스 화장품 회사 이브 로셰의 러시아 연방 지사 등으로부터 3,100만 루블 (약 5억 9천만 원)을 횡령하여 사기 혐의로 기소되어 재판을 받게 된다. 그는 징역 3년 6개월 실형에 3년 6개월 집행유예까지 추가하여 7년 형을 받는다. 재판이 끝난 후, 러시아 연방 법원 건물 밖에 모여 있던 지지자들을 향해 "현 정권은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붕괴돼야 한다. 오늘 모두가 가두 시위에 나서 달라"고 촉구하며 내란을 조장했다. 그리고 집권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을 '사기꾼들과 도둑놈들의 정당' 이라 비판했다. 2018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의사를 보였으나, 2017년 12월 25일 러시아 연방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2014년의 횡령죄 판결에 따라 나발니의 출마 자격을 박탈하게 된다. 이에 나발니는 지지자들에게 대선 보이콧을 촉구하며 2018년 1월 28일 대대적인 시위를 예고했다. 그러나 해당 시위는 결국 불법으로 규정되어 그의 지지자들 상당수가 투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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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2
  • 라틴 아메리카 독립 영웅이자 대부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 명(明)과 암(暗)
    볼리바르는 아르헨티나와 칠레에서 스페인 세력을 격퇴한 호세 데 산 마르틴과 과야킬 회담을 한 이후, 부장인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Antonio José de Sucre, 1795~1830) 를 보내 아야쿠초와 후닌 전투에서 스페인의 부왕(副王, Viceroy)을 사로잡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원래 스페인의 부왕은 본국 군주를 대신하여 한 지역을 통치하는 직책으로 다른 나라의 총독에 해당하고 직책이다. 참고로 19세기 독립하기 전 멕시코를 비롯한 중앙아메리카 일대는 누에바에스파냐 부왕 령(領)으로 총독 직할지였으며 페루에는 페루 부왕령이 설치되어 있었다. 페루를 해방시킨 볼리바르는 남미 대륙에서 스페인 세력들을 영구히 일소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볼리바르는 지금의 콜롬비아, 에콰도르, 파나마, 베네수엘라에 해당하는 그란 콜롬비아(Gran Colombia)의 종신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볼리바르의 몰락은 이러한 정점에 오른 이후부터 시작된다. 연이은 반란이 발생했고 권력 투쟁이 빈번했다. 그러는 사이 페루 남부가 볼리비아 공화국으로 떨어져 나갔고 1830년에는 결정적으로 정치권에서 실각한 뒤, 콜롬비아에 들어가 여생을 살았다. 정계에서 반강제적으로 은퇴한 이후 볼리바르는 지지자인 호아킨 미에르(Joaquín Mier)의 별장에서 지병인 결핵을 앓으며 요양하고 있다가 콜롬비아 북부의 산타 마르타 근처인 산 페드로 알레한드리노(San Pedro Alejandrino) 농장에서 폐결핵으로 인해 4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는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한 지 불과 8개월 만의 일이었다. 이러한 시몬 볼리바르에 대한 평가는 명과 암이 뚜렷하게 나타난 인물이자 장, 단점이 명확한 인물로, 인간적인 면이나, 그의 정치 철학과 성향에 대해서는 확실히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었다. 그는 해방자(El Libertador)로써 군인과 군에서 리더로는 부족함이 없는 인물이다. 1813년 10월, 독립군 총사령관으로 카라카스 시에 입성한 볼리바르에게 수여된 칭호인 "엘 리베르타도르(해방자)"는 아무에게나 찬사받으며 수여되는 호칭이 아니다. 그러나 볼리바르에게 늘 따라다니는 악평은 그가 진정으로 해방하고자 했던 것인 스페인 혼혈 백인인 크리오요였고 흑인이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해당되지 않았다. 그는 인종주의자의 틀을 벗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코뮤니즘 이론을 창설한 카를 마르크스가 1858년 엥겔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볼리바르를 언급하며 "가장 비겁하고, 횡포하며, 비참한 악당"이라 평가절하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인도에서는 영웅일지 모르지만 인류적으로 볼 때 흑인에 대한 인종적 편견이 심했던 마하트마 간디와 놀랍도록 유사한 부분이 많다. 그러나 그러한 볼리바르에 대해 변명이 아닌 변명을 해보자면 당시 남미에는 유럽계 백인과 백인의 형질이 강한 메스티소 인종들의 인구가 더 많았고 개국 이후, 지배층들이 차루아, 테우엘체, 카웨스카르, 오나, 마푸체, 아파치와 같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토벌 및 학살하고 무력으로 원주민 땅을 합병했던 우루과이나 아르헨티나, 칠레, 멕시코 등과는 달랐다. 이는 현재의 에콰도르와 콜롬비아, 페루 등이 속해있던 옛 그란 콜롬비아 지역은 백인, 메스티소, 흑인, 원주민 등등 여러 인종들이 섞여 있었다. 게다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독립국가 수립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골수 왕당파 성향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그란 콜롬비아의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피흘려 건설한 자유 민주주의 정부가 원주민들의 반란으로 인해 무너질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에 있었다. 볼리바르가 유년기 때 그를 보살펴주고 키워줬던 흑인 노예 이폴리타에 대한 호의적인 기억으로 인해 흑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높은 차별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런 부분은 간디와의 차별성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정치적인 배경으로 볼 때 볼리바르의 원주민을 배제하는 정책이 반드시 인종차별의 의도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현재 스페인-라틴 아메리카 학계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볼리바르가 딱히 백인 우월주의자인지에 대해서 회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학자들도 많다. 볼리바르는 어릴적에 자기 또래의 노예 아이들과 거리낌 없이 친하게 지냈고 아이티에 망명했을적에 백인과 흑인이 뒤섞인 혼성 군인 아이티 군의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이런 것으로 볼 때 적어도 흑인에 대해서는 그다지 차별의식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또한 볼리바르가 다른 독재자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독재의 패턴이 다르고 다른 자유 민주주의자들에게 인정 받는 점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위해 독재자의 길을 간 것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보통 독재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이나 권력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초심을 잃고 변해갔던 자들이 많았다. 이와는 달리 볼리바르는 이제 막 독립한 남미가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큰 통합에 이르기 위해서 소수의 엘리트에 의한 지배가 효과적일 수 있다고 생각해 종신 대통령에 취임했다. 실제로 그는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자신의 권력으로 부정축재를 벌이거나 반대파를 숙청하는 등의 독재자로써 흔히 나타나는 전횡을 부리지 않았다.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 하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했으면 그의 직위를 그대로 유지시켰으며, 심지어 자신을 암살하려다 실패한 인물들도 주동자만 국외로 추방하고 나머지는 석방시켜주는 관대한 처벌을 내리기도 했다. 또한 평생 재산에 대한 욕심도 없었는데 그란 콜롬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대통령직과 후계자 지명권을 포함한 모든 정치적 권한을 포기하고 물러났을 때, 의회에서 거액의 연금을 평생 지급하겠다고 제안했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했다. 물론 원래부터 볼리바르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독립 운동을 하면서 가산을 거의 탕진했고, 대통령직에 있으면서도 퇴임 후, 자신이 돌아갈 집조차도 없어 호아킨 미에르의 집에 머물렀으며 모아 놓은 재산도 없었기 때문에 퇴임 후에도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그가 47세에 폐결핵으로 사망했을때, 의사가 장례를 준비하면서 그의 낡고 해진 셔츠를 보고 놀랐을 정도로 그는 청빈한 삶을 살았다. 통일 라틴 아메리카 건설이란 숭고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지만, 결국 한계에 부딪혔던 안타까운 실패자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식민지 독립의 영웅이라는 측면에서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나 칠레의 베르나르도 오이긴스, 아르헨티나 호세 데 산 마르틴 등과 비슷한 부분이 있었지만,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식민지는 미국이나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합된 단일 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하고 국력을 키우지 못해 이후에도 큰 혼란을 겪었다. 이는 지리적인 요인이 컸는데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칠레와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아르헨티나의 경우 지정학적으로 안데스 산맥을 사이에 두고 태평양과 대서양 연안의 해안 저지대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스페인의 식민 통치에서 독립 후 단일국가를 건설하기 수월했다. 그에 비해 볼리바르가 독립시킨 남미 식민지들인 콜롬비아와 베네수엘라, 페루, 에콰도르는 안데스 산맥과 아마존 밀림, 소택지 등 고립되고 험준한 지리 지형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들 국가들을 통합시켜 칠레, 아르헨티나처럼 통일 국가를 남미 대륙에 수립하기에는 지정학적으로도 악조건이 적지 않았다. 워싱턴이나 산 마르틴, 오이긴스보다 더 훨씬 악조건을 갖고 있었고 그로 인해 결과는 썩 좋지 못했다. 조지 워싱턴이 독립시킨 미국의 13개 식민지는 거대한 연방으로서 세계 패권을 장악한 초강대국으로 성장했고 오이긴스가 독립시킨 식민지 칠레, 산 마르틴이 독립시킨 식민지 아르헨티나는 통합에도 성공했으며 독립 이후 한 동안 라틴 아메리카 역내에서 세계 5위의 선진국이자 강대국의 위세를 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옛 그란 콜롬비아는 안타까운 실정이 아닐 수 없다. 이들 국가들이 볼리바르의 이상을 이루지 못한 것은 물론 볼리바르의 개인적인 문제도 있는데, 일단 볼리바르부터 독재자가 되어 종신 대통령을 하려다가 결국은 자신이 새로 건국한 공화국을 다른 인물에게 물려주었다. 정치적인 독재가 가능했음에도 악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면서 두 번 재임 후 은퇴한 조지 워싱턴과 다른 행보를 보였다. 또한 볼리바르는 자유 민주주의 공화국의 영향 받기는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인종주의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았고 아메리카 원주민의 경우, 흑인과 다르게 잠재되어 있는 적으로까지 여겼다. 볼리바르는 흑인을 제외한 유색 인종을 멸시했는데 이는 원주민 공동체 토지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그의 기여로 남미가 독립한 이후 원주민들의 처우가 급격히 나빠졌다는 것을 보면 이들에게 있어 볼리바르는 새로운 식민지 독재자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페루와 볼리비아에서는 다수 민족인 원주민들의 지위가 점점 높아지면서 볼리바르를 국부로 인정하지 않고 존경조차하지 않는 국민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물론 페루와 볼리비아가 지금처럼 독립국가로 존재하며 잉카 제국의 후신을 칭할 수 있게 된 것도 결과론적으로 보면 볼리바르가 주도한 독립운동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에 애증의 대상 중 하나로 보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는 원주민들만이 아니라 중국인 등 황인종 및 노예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란 콜롬비아 건설 이후, 아이티의 '흑인 혁명'에 대해 여타 크리오요들과 같이 매우 급진적이고 위험하다 생각했으며 이후 1812년 제1 공화정 실패 이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선언했지만 이는 본인의 군대에 가담하는 노예에 한해서 해방시켜 주었다. 그 후 1816년 1월 아이티의 흑인 대통령 페티옹에게 도움을 받기 위해 베네수엘라의 노예 제도를 폐지하기로 약속했고, 아이티의 도움이 그가 식민지 독립을 성취하는 기반이 되었지만 이후 독립 투쟁에 가담한 노예 농장주들에게 지위를 보장하기로 약속했고 1821년 그란 콜롬비아의 대통령이 되었을 때에도 전면적인 노예 해방을 미루어 노예 농장주들과 약속을 우선하는 모습을 보였다. 흑인에 대해서는 그나마 나았지만 시종일관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했으며 아이티 방식의 혁명을 경계했다. 볼리바르는 흑인 반란에 대해 스페인의 침입보다 1,000배 더 나쁘다는 발언을 하면서 흑인들의 반발을 샀다. 동시에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던 물라토 지지자들에 대해 정치적인 탄압을 자행하면서 흑인 혁명에 대한 노골적인 적개심을 보였다. 이는 그가 혼혈이었지만 백인으로 받아들여졌으며 크리오요라는 특권계층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볼리바르가 살았던 시대에 가장 큰 논란이 되었고 치명적인 결점으로 비판받았으며 지금에도 자주 회자되는 사건이 구아이라 항구에서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 대한 배신이었다.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는 볼리바르와 다른 라틴 아메리카 통합론자들의 사상적인 스승었고 독립 투쟁의 선구자(Precurser)로 불리고 있는 라틴 아메리카 독립 운동계의 거물이었던 인물이다. 또한 미란다는 볼리바르를 매우 총애했는데 그를 세계적인 베네수엘라인, 혹은 나폴레옹에게 미치지 않은 돈키호테라고 불렸고, 6개 국어를 구사하는 지식인이기도 했으며 조지 워싱턴 미국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 미국 대통령, 윌리엄 피트 영국 총리, 나폴레옹 프랑스 황제, 예카테리나 2세 러시아 차르, 프리드리히 2세 프로이센 왕과 같은 세계 지도자들과 교류하던 명사였다. 그러나 미란다와 볼리바르가 세운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이 잇다른 악재에 시달리게 되면서 스페인 왕당파의 군세에 의해 수세에 몰리는 등 상황은 악화되자 볼리바르 자신이 지키던 독립파의 중요 거점이었던 푸에르토 카베요의 산 펠리페 성이 함락되면서 미란다는 이대로라면 독립이 좌절될 것이 우려되었다. 우선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1816년 7월, 왕당파와 휴전 협정을 맺고 영국으로 가서 외교적 지원을 요청하려고 했다. 그러나 볼리바르는 자신을 따르는 장교들을 이끌고 구아이라 항구로 간 미란다를 체포해서 왕당파에 넘겼다. 그 대가로 자기 자신은 왕당파에게서 풀려나 미란다와 자신이 헌신했던 베네수엘라 제1 공화국을 떠나 자메이카로 도주하는 역대급 만행을 저지른다. 이 때 볼리바르가 프란시스코 데 미란다에게 내린 죄목은 황당하게도 반역죄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볼리바르에게 있어 두고두고 흑역사로 남았다. 후일 본인이 실각된 후, 가장 후회되는 사건이라 회고한 것도 "구이아라 배신 사건"이었고 이는 볼리바르의 어두운 부분을 두고 두고 규탄당하는 트라우마로 남았다. 볼리바르는 정치적으로도, 사상적으로도, 이념적으로도 실패한 인물이지만 라틴 아메리카를 독립시킨 영웅으로써 가치는 아직도 살아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에 대한 호불호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국부로써 존경도 받고 미움도 함께 받는 애증의 인물임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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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쿠르디스탄과 이스라엘의 관계, 마냥 우호적인가?
    나는 늘 그렇듯이 터키 디야르바크르에서 쿠르드족과 쿠르디스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디야르바크르의 분위기는 반(反) 터키 정서가 여전하다. 쿠르디스탄의 수도는 디야르바크르이고 쿠르디스탄의 영토는 북쿠르디스탄, 이라크 쿠르디스탄, 로자바 쿠르디스탄으로 나뉘어 있다. 디야르바크르는 북쿠르디스탄에 속해 있다. 디야르바크르를 걸어보면 중심대로인 가지대로에 이스라엘 국기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보통 국기라면 어딘가에 내걸거나 하는 것이 원칙인데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는 밟고 가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한 나라의 상징인 국기 모형이 이렇게 일반인들에게 지저분하게 밟히는 것은 해당 국가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 없다. 그 대신 팔레스타인 국기는 도처에 팔고 있는데 이스라엘 국기처럼 바닥에 새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대한 쿠르드인의 감정이 어떤지 물어보니 10명에서 7명은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스라엘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은 "배신자(Betrayer)" 라는 것이고 팔레스타인 문제가 그 다음이다. 모두들 쿠르드족이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 쿠르드족은 현재 이스라엘을 증오하고 있다. 왜 그러는 것일까? 1931년 유태인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의 한 인물이 쿠르디스탄에 잠입했다. 그는 현 팔레스타인 땅에 유태인들을 들어가게 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디야르바크르를 방문해 쿠르드인들을 비롯한 그곳의 비 아랍권 세력들, 이란 및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인들과 접촉하여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장기적 비전을 구축하려 했다. 그는 쿠르드인에게 미국과 영국 및 서방 국가들이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한 국가를 건국할 것이니 이 건국을 지지해주고 또한 지원해준다면 쿠르드인이 터키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적극 지지하며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라크와 아르메니아 일대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달라 요청했고 이런 그의 제안에 쿠르드인들은 이 모사드 요원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모사드 요원이 바로 모사드 정보기관의 창립 국장인 레우벤 실로아흐(ראובן שילוח)이다.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이 만들어지는데 쿠르드인들이 이를 적극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을 당시 이라크의 유태인들은 이란 왕정과 이스라엘 정부, 쿠르드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쿠르디스탄 지역을 통과하는 조건으로 이라크를 탈출했다. 한편 쿠르드인들은 이 기간 동안 터키 내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켜 터키의 관심을 소요 사태로 향하게끔 하고는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큰 관심을 쏟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돕기도 했다. 쿠르드인은 17년이 지난 상황에도 이스라엘의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따라서 비 아랍권 국가 중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또 다른 비 아랍권인 쿠르드인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1958년부터 이스라엘은 이라크의 쿠르드인 무장단체 페쉬메르가를 1970년대까지 지원하기도 했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이스라엘군은 쿠르디스탄 지역으로 파병하여 병원을 지어주기도 했고 식량과 무기도 지원하면서 그들의 무장 독립 투쟁을 도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끝내 돕지 않았다. 무장 독립 투쟁에 식량과 무기 지원하며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서 쿠르드는 터키와 이라크를 대신 싸워주면서 이들 국가들의 국력을 낭비하게끔 하는 존재로 이용했던 것이다. 1975년에는 이란(팔라비 왕조)-이스라엘-쿠르드가 삼각 동맹을 맺어 이라크를 견제하여 중동 국가들을 상호 간 혼란에 빠지도록 했다. 이후 이란에서는 이란 혁명이 나타나 제정이 폐지되고 새로운 신정 정부는 반미와 반 서방, 반 이스라엘주의를 내세우며 이들 동맹에서 이란은 제외되었고 이스라엘과 쿠르드의 동맹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 때 호메이니의 탄압을 받던 일부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과 다수의 쿠르드인들은 서로 협력적인 관계가 되었고,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체적인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라크 쿠르디스탄에서는 반이스라엘 보이콧이 적었으며 북쿠르디스탄에는 이스라엘을 더욱 응원하는 등 오히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만든 제품들을 적극 사용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쿠르드인들이 훨씬 이득이었다. 적대국에서 소요사태를 일으켜 이스라엘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그와 같은 혼란 기간 동안 중동과의 잇달은 전쟁에서 소모된 국력을 그 사이에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쿠르디스탄의 독립 국가 승인에는 매우 미온적으로 나왔다. 이스라엘이 약속을 지키진 않지만 주변 중동 국가들에게 있어 미운 털이 박혀온 쿠르드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에 독립을 승인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했다. 이미 이스라엘과 공동 운명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2000년대에는 이스라엘 군과 정보기관 요원 수백명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지역과 이란, 시리아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쿠르드 특수부대원들을 훈련시키며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 능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국-이라크 전쟁에서 결국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이 타도되고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시아파 민병대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쿠르드인 특수부대를 활용하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란 영토내에 이스라엘 첩보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려 했다. 이 또한 쿠르드인들이 적극 도왔고 사담 후세인이 타도 되었을 때, 최소한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기대했지만 미국 측에서 이를 거부해 이들 또한 독립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런 미국을 전혀 설득하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이 미국에게 쿠르디스탄 독립을 반대했다는 설도 나돌고 있다. 게다가 쿠르드족 독립의 운을 띄워주면서 이라크 내 수니ㆍ시아파와의 갈등 및 이란을 견제하는 효과까지 한꺼번에 노리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전략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2017년 이라크 쿠르디스탄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이었다. 그리고 2019년 터키가 본격적으로 쿠르디스탄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네타냐후 총리는 본인의 트위터에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쿠르드 지역에 대한 터키의 침략을 규탄하고 터키와 그 대리인들의 쿠르드족 인종청소에 경고한다(Israel condemns Turkish aggression against Kurdish areas in Syria and warns of ethnic cleansing of Kurds by Turkey and its proxies)."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용감한 쿠르드인들에게 인도주의적 도움을 줄 준비가 됐다(Israel is ready to provide humanitarian assistance to brave Kurds)고 했다. 이건 쿠르드인 입장에서는 웃기는 일이다. 쿠르드인이 원하는 것은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으로부터 완전한 쿠르디스탄 공화국을 설립하고 독립하는 일이다. "인도적 지원(Humanitarian assistance)"이라는 단순한 사탕발림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립과 정부 수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쿠르드 독립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쿠르디스탄으로 인해 중동에서 새로운 소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경계했다. 따라서 터키군이 쿠르드군을 공격한 것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묵인 아래 진행되었던 것이라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고민이 컸던 것이다. 당시 쿠르드인은 시리아에서 미군을 도와 IS 격파에 나서서 실제 이들 토벌에 공을 세우고 막대한 인원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이 시리아 철군을 결정하면서 터키군 군사작전에 불개입을 선언했다. 쿠르드인들은 미국과 서방국가, 이스라엘 등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셈이 되었다. 당시 AFP통신은 "미국 지도자의 쿠르드인 포기는 이스라엘에 깊은 우려를 초래했다"고 분석했을 정도니 이스라엘의 고충 또한 알만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미국의 손을 들어주며 또 다시 쿠르드를 배신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2019년 하반기에 유태인들은 2000년 동안 박해와 추방으로 고통받았다며 이스라엘에는 쿠르드 출신 유태인들이 많고 중동에서 온건하며 서방 친화적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쿠르드인들은 이 때 이스라엘에게 자치독립을 추구하는 쿠르드인과 군사 · 경제 등에서 우호 관계를 유지하명서 정작 팔레스타인의 자치독립은 인정하지 않아 그 모순점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작년 10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벌어지자 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응원했다. 이제는 쿠르드 노동자당인 피케이케이조차도 이스라엘을 돕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 쿠르드인들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이스라엘은 이 모든게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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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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