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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아, 아르메니아의 유태인 아스그나스(Ashkenaz)
    노아의 장손이자 야벳의 장남인 고멜이 시메리안(Simerian)이라는 이름과 큰 영향력을 성경 및 토라와 역사에 남겼다. 야벳의 후예들이 노아의 축복을 받아 이는 아르메니아와 조지아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노아의 증손이자 고멜의 장남인 아스그나스(Ashkenaz)는 카프카스 지역으로 진출한 가문의 조상이 된다. 성경 및 토라와 카프카스 고대 역사에 등장하는 아스그나스의 흔적들은 많지 않으나 아직도 명확하게 규명되지 못하고 있으며 신화적인 부분에 있어서 무궁무진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조상으로 알려진 아스그나스(Ashkenaz)는 터키 땅 전역과 카프카스 일대를 지배했으며 야벳 계통 후예들의 대표자들처럼 인식되었다.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노아의 둘째 아들인 함(Ham), 함의 막내인 가나안(Cannan), 가나안의 둘째 아들인 헷(The Hittites) 종족의 세력들이 후일 큰 제국을 건국한 히타이트 제국과 견줄 정도로 강성해졌다. 그들은 히타이트 제국 이후에 등장한 아시리아 제국과 신바빌로니아 제국 등과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경쟁하게 된다. 물론 이들 제국들이 워낙 강대하고 파죽지세로 확장해 가는 과정에서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이 일시적으로 위축되었으며 그들의 영토는 축소된다. 그러나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메소포타미아를 장악했던 제국들에게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로 각인되어 왔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다가 고대 근동을 호령하던 강대국들의 틈새를 헤집고 들어가 대제국을 건설키도 하였다. 후일 로마 제국의 확장과 신생 페르시아 제국의 대립 속에서 지금의 카프카스 지역과 아르메니아 하이랜드라 불리는 동부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경계가 정해지면서 끝없는 고중세 시대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부상했다. 중세 시대 중반부인 서기 1200년을 전후하여 조지아와 아르메니아를 통치했던 바그라티드 왕조가 상당 기간 동안 카프카스를 통과하는 실크로드를 장악했고 카프카스 일대의 중계 무역으로 인한 부와 명예를 드러내기도 하였다. 아스그나스의 후예들은 매우 용맹했으며 유럽 러시아와 소아시아, 메소포타미아로 연결되는 지역에 있어 지정학적으로 그 명성이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의 지정학적 영토가 이전보다 위축되었기 때문에 아스그나스라는 이름이 잊혀지는 듯했다. 이 당시 아스그나스라는 이름보다 아르메니아나 조지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더 많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처럼 열국들의 뇌리에서 자취를 감춘 듯 보였던 아스그나스(Ashkenaz)가 어느새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명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 지역에 정교회가 자리 잡았고, 산악 유태인들이 자리 잡으면서 야벳의 자손들을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이 유럽의 각 지역들에 흔적을 남겼던 기록들이 적지 않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들 정교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에 의해 유럽의 주요 지역들을 망라한 유럽 자체를 가르키는 명칭으로 ‘아스그나스’가 재등장한 것이다.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대명사처럼 불렸던 아스그나스(Ashkenaz)는 유럽 전체를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던 이유는 노아가 야벳에게 베풀었던 성경 창세기에 나타난 예언적인 축복을 이루어가는 상황에서 점차적으로 동유럽과 러시아를 거쳐서 유럽의 곳곳으로 지경을 넓혀 갔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는 고중세 당대의 역사가들도 아스그나스의 확장에 대해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중세 시기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유럽에서 성지를 탈환하려고 몰려드는 십자군들을 가르켜 아스그나스(Ashkenaz)라고 불렀던 기록이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두고 어느 정도아스그나스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는 유태교의 역사와 관련 지을 수 있는데 중세 시대의 중반 이후로 아스그나스 유대인(Ashkenazi Jews)들이 유럽 전체를 대표하는 유태교 추종자들로 알려졌다. 예나 지금이나 유태인은 대개 아스그나스 유태인일 정도로 이들은 전체 유태교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아스그나스 유태인 그룹과 더불어 가장 많은 계파를 이루고 있는 세파라드 유태인(Sepharadic Jews)들은 전체 유태인의 20% 전후를 차지하는데, 이들 세파라드는 스페인을 지칭하는 단어로써 스페인 지역에서 유래한 유태인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성경이나 토라에서도 스페인이 세라파드로 불렸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부분은 스페인에서도 세라파드 내지는 아스그나스(Ashkenaz)로 나라 이름을 지칭했다는 것이다. 1939년경 유럽에는 약 1,200만 명 정도의 아스그나스 유태인(Ashkenazi Jews)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다.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아스그나스 유태인들이 존재하고 있는데 이는 유태인이라 지칭하면 모두 아스그나스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 아스그나스라는 명칭을 유태인들이 대명사처럼 사용하는 것으로 볼 때, 고대 시기 이스라엘의 북왕조를 구성했던 10개 지파들이 역사에서 사라졌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들 중 상당수가 아르메니아와 조지아의 아스그나스로 유입되었다. 남왕조 유태 왕국의 2개 지파에 속한 유태인들 중 다수도 아스그나스로 속하여 아르메니아와 조지아로 이동해 토착화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과 여건에 따라 유럽의 각 지역으로 분파, 이동했다고 본다. 아스그나스의 본 고장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 중에 12 사도들의 선교로 인해 기독교인으로 개종된 경우가 많았을 것이고, 아스그나스 유태인들의 숫자만큼이나 아스그나스 기독교인(Ashkenazi Christians)들도 적지 않은 숫자로 존재했을 것이다. 비록 많은 수의 아스그나스 유태인이나 세파라드 유태인들이 유럽 곳곳에 계속 남아 있지만, 아스그나스의 본토인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에 남은 유태인들을 포함하여 그들의 후예들이 주축이 되었고 각각 세계 최초 및 역사상 두 번째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유럽의 다른 이름인 아스그나스(Ashkenaz)도 대륙 전체가 기독교를 수용하였고 16세기 종교 개혁을 통해 그들의 후예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넘어가 그 지경을 넓혔다고 본다. 조지아나 아르메니아로부터 시작된 아스그나스 유태인 중심의 선민사상은 아스그나스로 불리는 유럽 등에서 백인 우월주의, 혹은 백인 보수 우성향, 백인 리버럴(The White Liberals), 그리고 근본주의적인 백인 기독교인들의 성경적, 사상적 근거로 악용되고 왜곡되어 왔다. 따라서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유태인들은 바빌론 유수에서 이스라엘이 로마에 정복된 이후까지 가장 먼저 해외에 진출해 뿌리 박은 자들이고 이들로 인해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게 된 근원적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과 아쉬케나지 유태인은 조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악마적인 유태인 조합으로 재탄생했다. 만약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소멸되면 유태인들이 자리 잡을 곳은 조지아, 아르메니아로 보인다.
    • 칼럼
    • Nova Topos
    2024-07-01
  • 터키-아르메니아 대학살 사건은 국제적으로 매우 복잡한 문제 - 中편
    오스만투르크는 발칸 전쟁, 리비아 전쟁,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결국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1914년, 아르메니아인을 비롯한 소수민족에게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신성한 전쟁에 참여하여 외세와 함께 싸우자고 독려했다. 특히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과 연합하여 러시아를 공격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러나 이 정보를 입수한 러시아는 즉시 이에 대응해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오스만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주면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아르메니아인 대표와 오스만 대표의 회담이 에르주룸에서 열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과 러시아 어느 측에도 참가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자력으로 독립하고자 했다. 이에 대한 아르메니아의 행위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려는 것 아니냐는 오스만 제국의 합리적 의심으로 돌아왔다. 오스만 제국은 1915년 카프카스에서 오스만 군대와 러시아 군대가 충돌하자 수백만 명의 아르메니아인들이 러시아와 내통할 것을 우려하여 이들에게 시리아 지역으로 이주할 것을 강요했다. 반면 러시아의 차르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령 아르메니아인들의 자치를 보장하면서 오스만 제국 내부의 아르메니아인도 회유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무능한 정치에 실망한 아르메니아인들은 러시아에 회유되거나 독립을 요구하는 자들이 늘어만 갔다. 한편 비슷한 시기에 발족된 청년 투르크당은 개혁파 군사집단으로, 자유주의적, 국가주의적, 법치주의적 성향을 띄고 있었다. 청년 투르크당은 초창기에는 민족주의적인 색체가 거의 없었기에 불가리아인, 아르메니아인, 투르크인, 그리스인 등으로부터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이들은 헌법을 제정하고 오스만 제국 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했던 조직이었다. 그런데 청년 투르크당은 결국 반기를 들었는데 수도인 코스탄티니예에서 벌어진 반쿠데타에 의해 주춤하자 현지의 무슬림들은 청년 투르크당 지지 세력 중 하나였던 아르메니아인들을 대대적으로 공격했다. 압둘하미트 2세에 대한 청년 투르크당의 반기는 고작 11일 만에 제압되고 탄지마트 법이 부활했지만, 이미 아다나에서는 15,000명에서 30,000명 사이로 추정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집단으로 학살된 이후에 발생한 정책이었다. 터키에서는 이 "아다나 시위 진압 사건"이 아르메니아인들이 먼저 벌인 폭동으로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이러한 아다나의 소요 사태는 시리아를 식민지로 삼고 있던 프랑스가 획책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아다나는 시리아와 가까운 지역이고 프랑스령 가지안테프와 인척 지역이었으며 이 시위에 시리아 프랑스 식민 정부가 상당한 양의 지원금을 보내주었다. 그런데 프랑스 측은 오스만 제국의 정치적 보복을 자신들에게 책임을 돌리고자 외세의 탓을 하면서 터키를 비판했다. 그러나 터키를 비판했을 뿐이지 이 사건에 아르메니아와 관련이 없다는 증거를 내놓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터키 동부 각 지역의 아르메니아인과 쿠르드족을 이용해 오스만투르크를 분할해 역사에 지워 버리려고 했던 것이 전후 1920년 세르브 조약에서도 나타나고 있는 근거로 작용하곤 한다. 프랑스는 오스만 정부를 인종주의적 성향의 학살로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더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현대에 들어와 프랑스에서 아르메니아계가 시위를 벌이며 아르메니아 학살에 대해 터키의 편을 드는 행위를 처벌하라는 주장이 프랑스 의회에서 통과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15년부터 아르메니아 학살 100주년 때까지 끊임없이 이어온 터키에 대한 규탄, 프랑스와 연관된 모종의 커넥션이 있다는 것은 합리적인 의심이라 볼 수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은 반(Van)에서도 발생하였으며 반 지역의 아르메니아인들은 동남쪽으로 강제 이주시키게 되는데 하필이면 해당 지역이 프랑스가 주둔하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프랑스보다 카프카스를 넘어 남하를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가 더 큰 적이었다. 아나톨리아 동부에서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이 군사적으로 충돌하기 시작했는데 오스만 군은 병력도 부족하고 물자도 충분하지 못해 사기가 떨어져 있는 상황이었다. 오스만 제국은 점점 청년 투르크당이 주도하기 시작하면서 오스만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집단이었지만 그렇다고 피지배민족의 권리와 인도주의 같은 사상을 갖춘 세력은 아니었다. 그에 대한 이유는 서구 열강의 오스만 제국을 침탈하는 과정들을 보고 겪으며 서구의 제국주의 관념들에 매우 냉소적인 감정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청년 투르크당에 속해 있던 오스만 제국의 재상인 탈라트 파샤(Talat Pasya)나 해군 장관 제말 파샤(Zemal Pasya), 오스만 제국의 첩보 부대인 테슈킬렛 마흐수사(Teshukilet Mahsusa)의 수장이었던 베하에딘 샤키르(Behaedin Shakir) 등은 무슬림이지만 세속주의자였고 아나톨리아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은 복속과 지배의 대상이지, 박멸과 절멸의 대상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청년 투르크당은 아르메니아인 문제를 철저하게 지배의 대상이라는 문제가 아니라 민족적인 문제로 보있다.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에 붙어 투르크 민족의 안보를 해치려고 하는 정치적인 존재로 인식했고 그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마땅히 박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에서 몰리고 있는 오스만의 입장이라면 아르메니아인들은 오스만의 영토 안에서 이적행위를 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는 탈라트 파샤와 제말 파샤의 회고록과 이들이 아르메니아인들의 이적행위와 행동을 보고 한 발언들과 행동, 이러한 형세를 보고 전술했던 유럽의 저널리스트들도 이를 어쩔 수 없는 비극으로 기술했다. 더불어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 혁명위원회가 러시아 편에 서서 조직적으로 공격하면서 터키 동부 각 지역에는 약탈과 방화, 학살은 꾸준히 벌어지게 된다. 그러자 오스만 정부에서는 이들을 테러 분자로 규정하고 1915년 4월 24일 이 위원회를 폐쇄하면서 235명의 지도자를 반역죄로 구속했다. 아르메니아 정부는 현재 4월 24일을 대학살 추모일로 정하고 지금도 추모하고 있다. 장군인 엔베르 파샤의 처남이자 반 일대 총독으로 부임해온 정치인이자 제브뎃 베이 벨베즈(Cevdet bey Belbez, 1878 ~ 1955)는 반 일대의 아르메니아인들의 촌락을 수색하여 수상한 무기들을 발견했다고 보고를 올리면서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로 돌아선다. 오스만 군이 자신들의 무기를 사진 찍어 놓고 증거라고 주장했다는 증언이 나오긴 했지만 이 또한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브뎃 베이가 반 일대의 촌락에서 수색과 학살을 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학살의 대부분은 쿠르드족과 체르케스계 보조병들이 벌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군인들도 학살에 참여한 정황이 많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정황이지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제브뎃 베이가 아르메니아인들을 완전히 제거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 문서가 있기에 이를 근거로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반면 5월 30일에는 탈라트 파샤가 러시아와 내통하는 적을 격리시키기 위해 70만 명의 아르메니아 인들을 시리아ㆍ팔레스타인ㆍ이라크 등지로 이주시키라는 명령을 내린다. 이 과정에서 양측의 무력 충돌이 발생했고 이주에 따른 기아와 질병,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사막의 혹독한 기후 등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재 아르메니아는 조직적인 학살을 지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탈라트 파샤의 이주 명령서를 학살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이주 명령서에는 학살하라고 지시한 내용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게다가 터키 측은 오스만 제국의 공문서 양식과 전혀 다른 서류이고 이는 조작되었다고 맞서고 있는 상태다. 더불어 이를 아르메니아와 함께 규탄하고 있는 집단 서방은 발칸반도 터키인 및 다른 무슬림 민족들에 대한 학살과 인종청소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눈을 감으며 철저히 이중잣대로 나서고 있다. 이는 진심으로 피해자를 위해서가 아니라 터키를 정치적으로 견제하고 오스만 제국 때처럼 성장하는 것을 억제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대표적인 것이 사망자 숫자와 희생자 성격을 둘러싼 논란이다. 이는 피해자를 위한 정의를 표방하여 나서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이해관계로, 상대의 기를 죽이기 위한 측면이다. 아르메니아는 150만 명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터키는 70만 명이 이주하는 과정에서 30만 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고 주장하며 맞서고 있다. 그러나 서구의 자료들에 따르면 희생자는 60만~150만 명으로 아르메니아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그라나 학살자 숫자는 조직적인 학살이 이루어졌느냐 혹은 불가항력이었는지는 지금도 큰 논란이다. 당시 아르메니아 전체 인구는 오스만 제국의 통계에 의하면 129만 5,000명이었다. 서구의 다른 자료들은 105만~150만 명으로 집계했다. 반면 아르메니아는 180만~256만 명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아르메니아의 통계대로라면 그 근거를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현재까지 아르메니아 측의 통계에 대한 근거는 아직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 시민들의 상당수가 학살, 기아, 전염병으로 인해 사망한 숫자가 무려 300만~400만 명에 이른다는 점에 있다. 당시 이들 중 아르메니아인들을 구분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지만 아르메니아 측의 통계는 전혀 맞지 않다. 그리고 서구의 자료들인 105만~150만 명이 사망했다고 하면 지금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또 다른 문제는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일어난 홀로코스트에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비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강대국들 이해관계의 목적에 의해 이 문제가 다루어졌다는 것에 있다. 오스만 제국의 오랜 지배를 경험했던 유럽 각국은 선거나 주요 정치적 이슈가 있을 때마다 아르메니아 출신 유권자들을 의식해 이 문제를 재기해 터키 정부를 악인으로 만들어 "투르크포비아"에 일조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핵심적인 부분은 '전쟁 중 일어났던 우발적이고 불가항력적인 비극이었는지, 혹은 계획된 조직적인 인종청소였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이는 우리에게 익숙한 어느 문제와도 닮아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면서 재기된 소련이 우크라이나인을 학살했다고 주장하는 "홀로도모르"이다. 스탈린의 정책으로 인한 운이 없는 불가항력적인 비극인지, 계획적인 스탈린의 학살인지, 이 부분에 대한 것도 정확한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국제 정치적, 강대국들 이해관계의 목적으로 해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르메니아인 학살 문제나 소련과 우크라이나의 홀로도모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측의 학자들이 머리를 마주하고 공동연구를 통해 역사적인 실체를 규명해야 한다. 그리고 명확히 밝혀진 연후, 피해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사죄와 배상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인류의 비극이 사이비 어용학자들에 의해 근거없이 해석되고 악용당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또한 터키-아르메니아, 러시아-우크라이나 모두 양측의 민족적 앙금과 역사적 적개심을 치유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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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25
  • 이슬람 문화권에서 베두인의 정의와 민족적 실체
    이스라엘 군에도 베두인들로 구성된 경보병 특수부대가 4차 중동전쟁 때까지도 존재하고 있었으며 해당 부대의 지휘관 또한 당연히 베두인이었다. 이스라엘의 베두인들은 2차와 3차 중동전쟁에서의 공훈으로 인해 이스라엘 최고 무공훈장을 받은 적도 있을 정도이나 현재는 폐지되고 없는 상태이다. 그래도 베두인 병사의 지원 복무는 계속되고 있어서 수백 명 단위의 베두인들이 이스라엘 군에서 복무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 군에는 베두인들로 구성된 BDRB (Bedouin Desert Recon Battalion) 부대가 있다. 물론 팔레스타인 베두인들에게서 배신자 취급을 당하지만 이스라엘 외에도 팔레스타인 사람으로 거주하는 베두인들도 있다. 시리아에도 베두인이 62만 명 정도 거주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리아 내전이 격화되자 시리아의 베두인들도 주변 국가인 요르단, 레바논, 터키로 이동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두인들은 이스라엘에서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편이다. 베두인들은 예루살렘과 가자 지구에서 유태인 정착촌 등에 섞여 살았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의해 많은 탄압을 받았기 때문에 가까운 촌락에도 먼 길을 돌아가야 했으며 귀중한 재산인 당나귀를 사살당해도 이에 대한 손해 배상을 못하며, 아이들이 학교에 갈 때도 유태인 아이들에게 온갖 구타와 학대를 당해 학교도 못가며 가난하게 살아가는 베두인이 자주 나타난다. 더구나 베두인들은 대부분이 가난에 시달리며 이스라엘의 빈곤층으로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극우 유대인들은 이들도 팔레스타인, 베두인-아라비아 인, 흑인들과 동급의 야만적인 종족으로 간주해 그들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이스라엘 정부가 베두인 거주지를 파괴하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베두인들에게서 반(反)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이 폭발했다. 2013년에는 베두인 주민 수천 명이 거주지 파괴에 대한 항의 시위를 벌여 여기에 놀란 이스라엘 정부가 이를 달래려고 베두인 강제 이주 계획을 취소한다고 발표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최근에는 다시 베두인들의 거주지를 파괴하고 그들을 강제 이주시키며 유대인 정착촌 건설에 나서면서 베두인들은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 베두인-아라비아 인들과 한편이 되어 그들 무장단체에 들어가 이스라엘 타도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많다. 유목민들에서는 부계(父系) 출생을 엄격하게 지키며 확대 가족과 씨족을 사회생활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흑염소의 털로 만든 유르트와 가축, 가재(家財) 등은 가족 전체의 소유물이다. 하나의 유르트에는 아흘 알 바이트(Ahl Al-Bait)가 한 사람 있어 주부의 일을 한다. 우물은 씨족에게 소속되고 이동 및 숙영(宿營)지 확보도 씨족 전원이 협력하여 한다. 몇 개의 씨족이 모여 부족을 형성하고, 부족과 지족(支族)의 수장은 세습제로 일정한 가계에서 나오는 것이 일반적으로 나타난다. 낙타는 부족들의 공유물이었고, 부족 전원이 세력을 연합해 적들과 전투를 벌인다. 보통 베두인들은 일부다처제이며, 6종의 카스트 계층들이 있다. 귀족과 평민들은 아라비아 사막의 유목민이고,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 아라비아 제족들과 베르베르 제족은 종속 민들이며, 사하라 사막 남부나 아프리카 수단에서는 흑인의 농노(農奴)가 존재하고 있고, 노예와 천민(賤民)이 있다. 노예는 남부 유럽에서 데려온 지중해 코카소이드형 백인도 있었으나, 나중에는 동아프리카 수단의 흑인들에만 국한되었다. 이들은 아라비아의 노예사냥에서 체포된 사람들인데 그들의 자손은 혼인 등에서 차별화된다. 카스트 제도로 구분되는 계급 사회는 잦은 정복 전쟁에서 생긴 것으로, 같은 카스트의 남녀 이외에는 결혼이 허락되지 않는다. 베두인들은 기마(騎馬)에도 능숙하여, 창을 사용하고 유럽 중세 기사와 같은 우월감을 가지며, 고귀한 존재라고 자부했다. 이교도인 베르베르 인과 흑인을 이슬람 화 시킨 것도 그들인데, 베두인 제족은 농경의 종속 민들과 오아시스 통상로의 상인으로부터 약탈과 재물에 대한 보호의 대가로 공납금을 취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중앙 정부의 세력 증대로 약탈과 공납에 의한 수입이 감퇴하였으며 특히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국경을 왕래하는 유목 경제가 곤란하게 되어 목축을 포기하고 농경을 생활 수단으로 하는 베두인 족도 증가하였다. 대부분 베두인 유목민 출신인 요르단 인들은 타인에게 지극한 환대를 보이고 혈족 관계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이러한 생활 태도로 볼 때 고대 베두인들 삶의 방식이다. 유목민에 기반을 둔 근대의 촌락 생활 방식은 급격하게 변화되고 있지만 그러한 기반이 되는 요소는 변하지 않고 남아 있다. 촌락의 나이 많은 여성, 때로는 젊은 여성들은 전통 의상인 길고 검은 토부(Thobe)를 입는데 어깨와 소매 등에 복잡하고 화려한 색의 작은 수를 놓아 입기도 한다. 도시 역시 전통적인 가치관이 존속하고 있다. 오래 전부터 요르단 인들은 관대함과 따뜻함, 친절함 등을 배워왔으며 요르단 사회 핵심에는 부족 간의 조화와 가족을 존중하는 사상이 많이 남아 있다. 요르단은 높은 수준의 공예로 유명하다. 다양한 종류의 공예품들이 요르단 수도 암만의 상점과 수도에서 떨어진 근교의 작은 마을 시장을 채우고 있다. 이러한 공예품으로는 그릇, 장신구, 수예품, 카페트와 전통 의상 등이 있다. 암만에서는 지역적 특성의 예술을 지닌 유리 제품을 만드는 유리를 깔때기로 부는 장인을 만날 수 있다. 유목 경제적으로 볼 때 베두인이 기르는 양은 모직의 중요한 공급원이다. 이러한 양털로 작은 베틀에서 여러 종류의 모직제품을 만드는데 관광객 및 외국인들에게 가장 널리 판매되는 것은 아라비아 융단이나 카페트이다. 각각의 카페트에는 독창적인 특징과 독특하고 섬세한 디자인이 나타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아랍 문학 작품인 <천일야화 : 아리비안나이트>는 요르단 인의 작품이며 20세기의 작가로 뛰어난 문체와 사상을 표현한 시인 무스타파 와바 앗 탈은 아랍의 주요한 시인으로 나타나며 이들 모두 베두인 출신이다. 이슬람 발생 이전의 아라비아 반도에는 베두인(Bedouin : 사막의 유목민)과 오아시스의 정착민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두 민족 모두 부족 단위로 공동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부족에는 부족장(shaykh 또는 sayyid), 신관(神官, Kāhin), 전시 군사 지도자(Qā’ìd) 및 중재자(Ḥakam) 등의 요직이 있었으며, 이들은 부족 구성원 총회(Majlis)에서 선임되었다. 부족장은 특별한 권한을 누렸다기보다 동등한 구성원 가운데 제1인자의 역할을 맡아 회의를 주재하면서 다른 부족들과의 교섭에서 부족을 대표하는 정도였다. 그는 덕망이 높고 나이가 많은 구성원 중에서 주로 선출되었다. 베두인의 신관은 부족의 제사와 축제 및 장례 등의 의식을 관장하였으며, 전쟁 시 군사 지도자로는 다른 부족과의 전쟁, 기상이변 등 위기 시에는 연로한 부족장보다는 군사적 식견과 활동력이 좋은 중년의 구성원이 더 적격으로 여겨져 선임되기도 했다. 중재자들은 부족 구성원들 간의 분규를 조정하여 해결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부족 구성원 총회에서 토의하여 최종 결정하였다. 물론 이러한 결정에는 부족 내부의 관행(Sunnah)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베두인들은 넓은 사막을 배회하면서 초원을 찾아 방목하여 생활을 이어 나갔으나, 도시의 정착민들은 농경 생활을 영위하거나 상업 활동을 통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오아시스 도시 가운데 메카와 메디나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메카는 예멘과 시리아, 이라크와 에티오피아를 이어주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상업 도시로서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또한 이 도시들은 토질이 척박하여 주민들과 가장 큰 부족인 쿠라이쉬(Quraysh) 부족은 주로 상업과 무역에 종사하여 생계를 이어나갔다. 도시의 중심에는 카바(Ka‘bāh)라는 성역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이곳에는 쿠라이쉬 족의 신상(神像) 뿐만 아니라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아라비아 반도 부족들의 신상도 존재하기 때문에 메카는 종교적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메카는 예멘에서 실어 온 향료를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및 이집트 등 각처에 공급하였고, 보다 개화되어진 지역들의 문물을 가져와 아라비아 반도에 보급한 문명의 중개도시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메카 북방 약 300㎞에 위치한 메디나는 단순히 농업 도시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쿠라이쉬 부족은 교역 활동을 통하여 협동력, 조직력 및 자제력을 함양하였으며, 베두인의 용맹성과 결합하여 후에 이슬람 제국 창건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베두인-아라비아 인이라는 개념은 인종과 혈통적인 성격보다는 셈어라는 아랍어 계통을 모국어로 공유하는 민족들의 집단이라는 개념이 강하게 나타난다. 6세기까지 아라비아 인들은 아라비아 반도의 주민들에 한정되었지만, 이슬람교의 전파로 이집트인, 메소포타미아인, 혹은 이라크인, 시리아인, 팔레스타인인 등 중동 지역의 많은 주민들이 언어적으로 동화되면서 베두인-아라비아 인으로 통칭되었다. 이러한 아라비아 인들은 한때 이베리아 반도의 안달루시아까지 진출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중국과 더불어 세계 최고의 문명을 발전시켰다. 20세기 초에는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유럽 열강들의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 운동 중에서 범아라비아주의가 발흥하였고, 아랍어 화자들 사이에 베두인-아라비아 인이라는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 7세기 이전의 아라비아 지역은 아라비아 반도 지역을 지칭했으나, 이슬람 문화권이 확장되면서 중동과 그 인근의 이슬람 문화권을 통칭하여 지칭하는 단어로 변화되었다. 또한 아라비아 지역은 역사적인 세력들로 볼 때 아라비아 제국을 뜻하기도 했고, 오늘날에는 아랍 연맹을 뜻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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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8
  • 터키 뿐 아니라 다음 날부터 모든 이슬람 국가들 이드 알 아드하(عيد الأضحى) 명절 기간의 시작
    터키 뿐 아니라 모든 이슬람 국가들은 내일부터 3일 동안 이드 알 아드하(عيد الأضحى) 축제 기간에 돌입한다. 그래서 오늘 토요일임에도 사람들이 붐비고 있는 것이다. 이드 알 피트르 축제 기간에 이드 알 아드하 축제 기간은 이슬람 국가들에서 최고 명절 기간 중에 하나인 것이다. 이드 알 아드하(عيد الأضحى)는 이슬람교의 중요한 정규 축제 중 하나로, 이슬람력 12월 10일에 열리는 제물을 바치는 축제이다. 이슬람 이전에 메카 근교에 있는 마나의 골짜기에서 있었던 제물을 바치는 관습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알라의 명으로 이스마엘을 제물로 바치려다 알라의 제지로 대신 염소를 바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아브라함은 노인이 될 때까지 자식을 얻지 못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Sarah)는 하나님께서 이 약속을 지키시리라 믿을 수 없었다. 사라는 이미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나이를 훨씬 넘어섰기 때문이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이집트인 하녀 하갈(Hagar)을 부인으로 맞을 것을 권했고 둘 사이에서는 장자 이스마일(Ishmael)이 태어났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정실인 사라를 통해서도 아들을 얻게 되는데 100살이 되어 이삭(Issac)을 낳은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렇게 얻은 귀한 아들 이삭을 산 제물로 바치라 했고 아브라함은 그 뜻을 따라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Moriah) 산으로 향한다. 하나님은 미리 다른 제물을 준비해두고 있었고 아무 의심 없이 하나님의 뜻에 따랐던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을 내린다. <꾸란(Qur‘an)>에서는 이브라힘(Ibrāhīm, 무슬림들이 아브라함을 부르는 이름)이 하니프(hanif, 유태인도 아니고 그리스도교도도 아니며 우상 숭배자도 아닌 진정한 유일신론자)라고 말한다. 이슬람에서는 신께서 이브라힘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그의 아들을 희생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을 때 주저 없이 오직 신께 복종했던 이브라힘의 신앙을 다른 어떤 것보다 중요시한다. <꾸란>에서는 또한 이브라힘이 진정으로 사랑한 아들은 이샤크(Ishag, 기독교 성서의 이삭)가 아닌 큰아들 이스마일(Ismaīl, 기독교 성서의 이스마일)이었고 하나님이 제물로 바치라고 한 것도 이스마일로 나온다. 기독교 성서 구약의 창세기 22:2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길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너에게 가리켜주는 산의 한 곳에서 그를 번제로 바쳐라”라고 되어 있으며, 16절에서도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라는 구절이 나온다. 무슬림들에 따르면 이샤크가 태어났을 때 형 이스마일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이샤크는 독자가 될 수 없다. 결국 이 일화는 이샤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며 제물로 바친 아들은 이스마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추방된 것도 이스마일이 아니라 오히려 이샤크 쪽이었다는 것이 이슬람의 해석이다. 이슬람 전통에서는 먼저 하나님과 이브라힘의 약속을 매우 중시한다. 이 약속은 이샤크가 태어나기 전에 맺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이스마일은 ‘약속의 아들’이고 이브라힘의 합법적 상속자다. 그는 장자였고 할례를 했으며 합법적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스마일의 자손이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이 위대한 민족이 마침내는 예언자 무함마드를 배출한 아라비아 민족이다. 무슬림들은 창세기에서 이샤크의 이름이 이스마일의 이름을 대신해 쓰인 것은 유태 기독교 전통의 구원의 역사에서 헤브루(Hebrew)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결국 역사적으로 유태인과 아라비아인은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이고 민족이 갈라진 계기는 바로 이브라힘의 아들 이스마일과 이샤크의 상속권 분쟁 때문이었다. 유태인들은 적통을 이삭으로 보는 것이고 아라비아인들은 적통을 이스마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유태인과 아라비아인은 모두 이브라힘의 자손이라는 역사를 공유하고 있다. 이삭은 어머니가 유태인 출신이고, 이스마일은 어머니가 이집트 출신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래서 결국은 유태교와 이슬람과 기독교는 모두 같은 역사를 공유하게 되는 것이다. 순례자뿐만 아니라 일반 신도들도 한 사람에 염소 한 마리씩(낙타는 7명이 한 마리)를 제물로 바치고, 그 고기의 3분의 1은 자기가 먹고 나머지는 다른 사람에게 주거나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데, 이 물건들은 신의 것으로 간주하여 매매하지 못한다. 신도들은 깨끗한 옷을 입도록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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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7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설립과 활동
    14세기, 유럽 사람들은 베네치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가 지은 <동방견문록>을 읽고 놀라게 된다.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원나라는 고도로 발달된 선진 문명국이었다. 당시 유럽 사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월등한 중국의 생활 문화 수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고, 미지의 동방 세계에 대한 동경을 하게 된다. 그러나 유럽인들에게 경이와 선망의 대상이던 중국의 위상은 180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쇠퇴하게 되었다. 유럽이 18세기 중반부터 폭발적인 경제 성장과 근대적인 변혁을 이루었다면, 중국은 전통적인 경제 체제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기술 혁신과 산업화에서 뒤처졌던 것이다. 유럽과 중국의 서로 다른 경제 체제는 결국 번영과 몰락이라는 상반된 결과를 갖게 된다. 두 세계의 결정적인 차이는 기업 경제에서 찾을 수 있다. 유럽은 기업이라는 조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 부와 번영을 이루었다. 반면 중국은 관료제 중심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민간의 상업성을 억제하였고 결국 유럽에 추월당했다. 16세기는 유럽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지중해에서 대서양으로 옮겨가며 무역 범위와 규모가 비약적으로 확대된 시기다. 특히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달로 인해 신항로 개척과 아메리카 대륙 발견이라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무역 상인들은 인도와 중국 등 아시아 지역에서 향신료와 차 등의 기호품을 취하여 유럽 지역에 되팔며 이득을 얻었고, 라틴 아메리카에서 대량의 은을 조달해 부를 일구게 된다. 17세기에 접어들며 포르투갈은 스페인에 밀리며 동아시아 무역 지배권이 점차 약해지기 시작한다. 이 때를 놓치지 않고 동아시아 무역에 진출한 나라가 바로 네덜란드이다. 네덜란드는 1602년 최초의 주식회사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동아시아로의 진출을 노렸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왕실이나 특정 귀족의 지원이 아니라 일반인에게서 동아시아 무역을 위한 투자 자본을 모으면서, 무역 이익을 투자 금액에 따라 배분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이 때 투자 자금의 권리를 증명하는 증서를 발급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주식이라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유럽에 최초로 주식과 투자의 개념을 도입하여 왕실의 재정 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대규모 무역을 가능하게 함으로 인해 대항해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곧 영국과 포르투갈을 제치고 최고의 무역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이처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성공할 수 있는 기반에는 경영과 투자가 분리된 분업 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 대규모 무역은 성공했을 때 수익이 큰 만큼 실패했을 때 위험도 컸다. 셰익스피어의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서 안토니오가 샤일록에게 죽을 뻔했던 이유도 그의 전 재산을 실은 선박이 폭풍우를 만나 제 때 돌아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처럼 주식회사에서는 많은 주주에게서 예산을 나누어 출자를 받기 때문에 위험이 분산되는 효과가 있고, 그만큼 공격적인 투자가 가능해진다. 또한 이와 같은 공격적인 투자는 막대한 수익을 창출할 확률을 높인다. 이와 같이 위험 분산과 위협 대비 고수익이라는 두 가지의 형태를 잡을 수 있었던 것이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주식회사의 성공 요인인 셈이다. 17세기 이후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승승장구하며 유럽 전역에 주식 투자를 활성화시켰고 경제의 새로운 시작을 열었다. 주식을 관리하고 거래하는 장소로 증권거래소가 생겨났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성공에 자극받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이어 동인도회사가 설립됐다. 이에 기업 경제가 시작된 것이었다. 원양 회사들이 수년 사이에 14개로 늘어나자 지나친 경쟁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선단 이익이 상당수 줄어들었다. 게다가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영국 등 열강과 경쟁하려면 규모가 크고 강한 회사가 필요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상공업이 가장 발달한 홀란트 주와 제일란트 주 총독인 오라녜 공 마우리츠(Maurits van Orange)와 네덜란드 연합 전국 회의 의장 요한 반 올덴바르네벌트(Johan Van Oldenvarnebert)가 나서서 상인들과 협상하며 회사 통합을 유도했다. 한 회사로 합치면 후추 무역 독점권을 주겠다고 제의한 것이다. 의회 역시 외적을 격파하고 나라를 지키자며 상인들의 애국심에 호소했다. 당시 공화정을 표방한 네덜란드에서는 전국 회의가 최고 권력 기관이었다. 전국 회의와 주 정부의 주요 결정권자들이 대부분 상인 가문 사람이었다. 그 무렵 주요 상인 가문 200여 곳이 북부 저지대를 다스렸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가 탄생했다. VOC는 네덜란드어로 ‘하나로 통합된 동인도회사’라는 뜻의 단어의 앞자리를 글자를 따서 지어진 이름이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가 설립된 것은 영국보다 2년 늦은 1602년이었다. 그 무렵 동양 탐험에는 엄청난 자본이 필요했다. 물론 이러한 탐험에는 한 두 사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네덜란드에 거주한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은 앤트워프 시절에 시도했던 ‘주식회사’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해 냈다. 동인도회사 설립에 필요한 자본을 6개 항구 도시 무역 상인들과 시민들의 투자로 충당했다. 선주나 상인 뿐 아니라 중산층도 아시아 무역에 투자할 수 있었다. 이에 약 650만 길더가 모였다. 당시 총 1,143명이 투자했는데, 그 중 해상 무역을 주도하던 선주 81명이 투자 자본의 절반 이상을 투자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과거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태인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이렇게 모은 자본으로 설립한 근대 최초의 주식회사이자 17세기 세계 최대 회사였다. 중세 베네치아에서도 상인들이 합자 회사 형태를 만들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최초의 주식회사는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베네치아와 다른 점은 기업공개(IPO·Initial Public Offering)를 정식으로 했다는 점에 있다. 기업의 전반적인 경영 내용을 알리는 기업공개(IPO)와 주식회사를 통해 각종 사업에 필요한 자금을 여러 사람에게서 모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한 이들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상상이 모태가 되어 탄생한 동인도회사는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가 넘는 대규모의 경영을 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가 이 때 탄생한 것이다. 당시 투자자 81명의 반 이상이 아쉬케나지 유태인이었다. 특히 1585년 이후 앤트워프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옮겨 온 아쉬케나지 유태인 무역상과 금융인들이 주축이었다. 동인도회사는 투자 지분이 많은 81명 가운데 일부와 기존 원양 상사 14곳의 이사 60인으로 첫 ‘주주 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러다가 그 수를 점점 줄여 나중에는 ‘17인 주주 위원회’로 귀결되었다. 여기서 크고 작은 모든 결정을 내렸다. 지역별로는 암스테르담에서 모인 자본이 57.4%를 차지하여 17인 가운데 과반수 이상을 배정 받아야 했으나 다른 도시 5곳의 견제로 8인 자리 만을 배정 받았다. 암스테르담 상인들이 회사를 마음대로 운영하지 못 하게 막은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많은 4인 자리를 배정받은 로테르담에도 아쉬케나지 유태인들이 상당하여 지분이 많은 유태인들의 발언권이 가장 강력했다. 동인도회사가 주력으로 진출했던 인도네시아 유태인 공동체 서류에 적혀져 있던 글에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주요 자금 조달자는 유태인 ‘이사크 르메르(Isaac le Maire)’이고 경영진의 대다수는 유태인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동인도회사에서 아쉬케나지 유태인의 비중이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급격히 성장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성장세에 따른 경영진들의 인센티브 제도가 법으로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될 때, 동인도회사 이사들은 주주로써의 수익 뿐 아니라, 경영자 인센티브로 총 수익의 1%을 추가로 받게 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VOC의 설립을 승인하면서 면허장에 경영진에 대한 보상 제도를 만들어 선박의 운항 횟수를 늘리도록 유도했다. 운항 횟수가 늘면 세입이 많아져 정부로서도 무역 증가와 세수 확보라는 최고의 효과를 얻는 셈이었다. 향후 또 생길지 모를 출혈 경쟁을 방지하려 동인도회사에 동양 무역 독점권과 식민지 개척 권한을 부여했다. 또한 동양으로 떠난 배와 교신하는 데 1년 이상이 걸리는 점을 고려해, 현지에서 판단해 조치할 수 있도록 ‘조약 체결 및 협상권, 식민 정착지 건설, 화폐 주조권, 사법권, 전쟁 발동권’을 주어 하나의 국가로서 활동하게 해주었다. 이를 위해 동인도회사는 자체 군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국가가 부여하는 이러한 각종 특권의 조건으로 25,000길더를 지불했다. 의회는 이 돈을 유용하지 않고 다시 동인도회사에 재투자했다. 이는 곧 네덜란드 의회가 동인도회사의 대주주가 된 셈이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처음 동인도회사에 21년 동안 영업이 가능한 특허장을 발급했는데, 그 뒤 10년마다 1번씩 자산 평가를 해 투자 기간을 연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군대를 보유한 것은 첫째, 상선들을 해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군함이 호위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먼 거리 항해에 필요한 중간 보급 항구를 지키기 위한 요새에도 군대가 주둔할 필요가 있었다. 셋째, 무역을 금지하는 나라에 함포 위협으로 문호를 개방하게 하는 데 필요했다. 넷째,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게 되면 통치하는데 군대는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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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3
  • EU 의회 선거 결과에 따라 국제정치의 다변화 가능성
    지난 6일부터 시작된 EU 의회 선거가 어제 9일에 끝나고 현재 개표 중에 있다. 지난 5년 전과 다르게 이번에는 브렉시트로 인해 탈퇴한 영국을 제외하고 EU에 속한 모든 국가가 치르게 된다. 이번 선거에는 영국의 탈퇴 이후, 처음 치뤄지는 선거라 EU 의회 내 회원국들의 할당 의석이 재조정되어 27석이 프랑스를 포함한 회원국들에 추가적으로 할당되었으며, 46석이 줄어들어 총 705석으로 줄어들었다. 일부 국가 출구 조사와 선거 전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1차 예측 결과를 발표한 것에 따르면 예상대로 극우 세력의 정당들이 크게 약진했다. 프랑스 EU 의회 선거 출구 조사 결과 극우 정치인 마린 르펜이 이끄는 국민연합(RN)이 약 32%의 득표율을 기록할 것으로 예상됐으며 독일은 보수 성향 기독민주당(CDU), 기독사회당(CSU) 연합이 29.5%의 득표율로 무난하게 1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되었다. 여기에서 특이한 점은 독일대안당(AfD)이 상당한 선전을 보였다는 것에 있다. 이 정당은 EU 의회 선거를 앞두고 뇌물 스캔들과 나치 옹호 발언 등으로 물의를 빚어 EU 의회 ID에서도 퇴출당했었지만 그래도 독일 국민들 상당수의 지지를 얻었다. 이처럼 유럽 내에서 우익 세력이 득세하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 극우파들은 타 지역들과 비교했을 때 보통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적 반공주의 좌익보다는 세속적인 내셔널리즘에 기반한 경우가 대부분으로 나타난다. 물론 세속적 서양 극우파들도 기독교를 내세우는 경우도 많은데 대게 교리에 기반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아니라 세속적 기독교 정체성주의이다. 대표적인 것이 독일의 기민당이나 기사당이다. 다만 동유럽 지역과 일부 서유럽, 남유럽 나라들도 예외로 종교적 근본주의와 민족주의가 합쳐진 혼종 극우도 존재하지만 이런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런데도 유럽 내에서 이같은 극우세력들이 다시 환대 받는 이유는 정세 불안으로 인한 경제 악화, 그리고 이를 만회하지 못하는 기성 정권에 대한 불신과 이들의 무능에 대한 규탄, 그리고 책임 지지 못할 각종 포퓰리즘 정책과 더불어 리버럴리티들과 좌파 세력의 공조로 이루어진 무분별한 난민 입국, 그리고 최악의 물가 상승 등이 한꺼번에 겹쳐서 그렇다. 이러한 반(反) 이민주의는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의 고취로 이어지며 그로 인한 변형적인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로 이어진다. 물론 모든 정체성 정치가 극단주의와 결부되는 것 또한 아니지만 현재 같은 상황에서 충분히 극단주의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통해 여러 정체성의 특수성이 부각되면서 여론은 수많은 갈래로 분열한다. 이렇게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황에서 각 집단은 극단주의화 될수록 유리하다. 특히 유럽에서 고조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극우 특유의 선민의식(Elitism)과 피해의식(Victim mentality)을 한꺼번에 주입시켜 타 민족에 대한 배타성(Exclusion) 및 공격성(Aggression)을 발동시키고 선동하는 것에 특화된 방향으로 진화해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처럼 변화되어 가는 것의 일례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을 들 수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의 패배 이후, 베르사유 조약이라는 독일 역사상 최악의 치욕을 당하며 막대상 배상금까지 떠 안게 된 독일은 모든 국민들이 좌절한 상태였고, 무능한 정부와 사회에 대해 불만과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나타나 자신들이 좌절하게 된 것에는 무능한 정부와 유태인들 때문이라는 인종적 배타성(Racial Exclusion)으로 몰아갔고 이러한 피해의식들이 모여 또 다른 군중심리(Herd mentality)가 형성되었다. 그러면서 이는 강한 공격성(Aggression)을 띄게 되어 결국 유태인, 로마인(집시) 등의 타 인종, 민족 말살로 이어진다. 그 다음 상대는 베르사유 조약에서 자신들, 독일인들에게 잊지 못할 좌절감을 안겨 준 영국, 프랑스 등의 외부세력이었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제2차 세계대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게 된 것은 좁게 보면 전범들인 나치와 히틀러의 광기이지만 그 광기를 불러 일으킨 것은 패전국인 독일을 아예 빈사 상태까지 압박하고 몰아갔던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승전국들이었다. 이러한 역사적 교훈으로 볼 때, 자국민들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이들은 좌익과 우익의 리버럴리티들, 현재 집권하고 있는 EU의 인사들이었다. 거기에 자국민들은 분노를 느끼고 있으며 그들끼리 새로운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주창하고 있는 것이다. EU 각 국의 국민들은 우선 자국민들에 대한 복지와 복리, 그리고 자국민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형태의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원하고 있다. 더 이상의 난민을 거부하며 자국 경제를 회생시키는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빠른 종식과 더 이상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중단까지 요구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이 나올 수 있다. 어쩌면 이러한 유럽의 어려움에 대한 타개 책에서 이 모든 상황이 러시아 때문이라 상정하고 국민들에게 이를 설득시켜 러시아에 대한 적대 및 히틀러 때처럼 전쟁을 획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과거 히틀러가 그러했던 것처럼, 내부가 나치당에 의해 안정되자마자 불만의 화살을 영국과 프랑스에 겨누었던 것처럼 모든 원인의 그 다음이 원흉이 러시아라며 러시아에게 겨눌 수도 있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 상황이 된다면 우려하고 있던 제3차 세계대전의 트리거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U 의회에 누가 들어가느냐에 따라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이유 중에 하나가 여기에 있다. 저들의 극우 정당들이 이기고 있다해서 마냥 좋아해서도 안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반(反) 이민과 그린딜(Green Deal, 탄소중립목표 달성을 위한 EU 정책) 반대를 내세우는 극우 정당들을 여전히 믿을 수 없는 것이 그 동안 러시아에 대해 강경 노선들을 취해 왔던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 집행위원장이 조르자 멜로니(Giorgia Meloni) 이탈리아 총리에게 연정 및 협력 가능성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물론 집행위원장 재선을 위해서는 EU 의회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 안정적이기 때문에 멜로니 총리가 속한 EU 의회 정당 보수 개혁 연합과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이처럼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EU는 히틀러가 행했던 인류사의 잔인한 폭력성을 되돌아봐야 한다. 지난 6일, EU 의회 선거가 한창 진행 중일 때, 프랑스의 노르망디에서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80주년을 맞아 행사를 치뤘다. 이 행사에서 세계 대전을 종식시키는데 최대 공을 세운 러시아 (당시 소련)을 배제했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를 참석시켰다. 우크라이나 지도부가 나치고 뭐고 따지기 전에, 소련의 역사를 지우고 소비에트의 일원이었음을 부정하는 젤렌스키를 초정한 것은 큰 행사의 의미를 퇴색시킨 셈이다. 그 또한 서유럽은 히틀러와 나치가 행했던 교훈을 잊은 것이나 다름 없다. 이번 EU 선거를 특별하게 보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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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10
  • 쿠르디스탄과 이스라엘의 관계, 마냥 우호적인가?
    나는 늘 그렇듯이 터키 디야르바크르에서 쿠르드족과 쿠르디스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현재 디야르바크르의 분위기는 반(反) 터키 정서가 여전하다. 쿠르디스탄의 수도는 디야르바크르이고 쿠르디스탄의 영토는 북쿠르디스탄, 이라크 쿠르디스탄, 로자바 쿠르디스탄으로 나뉘어 있다. 디야르바크르는 북쿠르디스탄에 속해 있다. 디야르바크르를 걸어보면 중심대로인 가지대로에 이스라엘 국기가 바닥에 새겨져 있다. 보통 국기라면 어딘가에 내걸거나 하는 것이 원칙인데 바닥에 새겨져 있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는 밟고 가라는 것이나 다름 없는데 한 나라의 상징인 국기 모형이 이렇게 일반인들에게 지저분하게 밟히는 것은 해당 국가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 없다. 그 대신 팔레스타인 국기는 도처에 팔고 있는데 이스라엘 국기처럼 바닥에 새기지는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대한 쿠르드인의 감정이 어떤지 물어보니 10명에서 7명은 매우 좋지 않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스라엘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들은 "배신자(Betrayer)" 라는 것이고 팔레스타인 문제가 그 다음이다. 모두들 쿠르드족이 이스라엘의 지원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런 쿠르드족은 현재 이스라엘을 증오하고 있다. 왜 그러는 것일까? 1931년 유태인의 정보기관 모사드(Mossad)의 한 인물이 쿠르디스탄에 잠입했다. 그는 현 팔레스타인 땅에 유태인들을 들어가게 하여 이스라엘 건국의 준비를 하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디야르바크르를 방문해 쿠르드인들을 비롯한 그곳의 비 아랍권 세력들, 이란 및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인들과 접촉하여 앞으로 있을 이스라엘 건국을 위한 장기적 비전을 구축하려 했다. 그는 쿠르드인에게 미국과 영국 및 서방 국가들이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한 국가를 건국할 것이니 이 건국을 지지해주고 또한 지원해준다면 쿠르드인이 터키 공화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도록 적극 지지하며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라크와 아르메니아 일대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가 되어달라 요청했고 이런 그의 제안에 쿠르드인들은 이 모사드 요원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 모사드 요원이 바로 모사드 정보기관의 창립 국장인 레우벤 실로아흐(ראובן שילוח)이다. 이 때부터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건국에 대한 장기적인 비전이 만들어지는데 쿠르드인들이 이를 적극 도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을 당시 이라크의 유태인들은 이란 왕정과 이스라엘 정부, 쿠르드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쿠르디스탄 지역을 통과하는 조건으로 이라크를 탈출했다. 한편 쿠르드인들은 이 기간 동안 터키 내에서 소요 사태를 일으켜 터키의 관심을 소요 사태로 향하게끔 하고는 이스라엘 건국에 대해 큰 관심을 쏟지 않도록 간접적으로 돕기도 했다. 쿠르드인은 17년이 지난 상황에도 이스라엘의 그 약속을 지킨 것이다. 따라서 비 아랍권 국가 중 하나였던 이스라엘은 중동에서 또 다른 비 아랍권인 쿠르드인들과의 관계를 강화했다. 1958년부터 이스라엘은 이라크의 쿠르드인 무장단체 페쉬메르가를 1970년대까지 지원하기도 했다. 1963년부터 1973년까지 이스라엘군은 쿠르디스탄 지역으로 파병하여 병원을 지어주기도 했고 식량과 무기도 지원하면서 그들의 무장 독립 투쟁을 도왔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끝내 돕지 않았다. 무장 독립 투쟁에 식량과 무기 지원하며 돕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그들의 독립을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스라엘에게서 쿠르드는 터키와 이라크를 대신 싸워주면서 이들 국가들의 국력을 낭비하게끔 하는 존재로 이용했던 것이다. 1975년에는 이란(팔라비 왕조)-이스라엘-쿠르드가 삼각 동맹을 맺어 이라크를 견제하여 중동 국가들을 상호 간 혼란에 빠지도록 했다. 이후 이란에서는 이란 혁명이 나타나 제정이 폐지되고 새로운 신정 정부는 반미와 반 서방, 반 이스라엘주의를 내세우며 이들 동맹에서 이란은 제외되었고 이스라엘과 쿠르드의 동맹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이 때 호메이니의 탄압을 받던 일부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로 망명하기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이유로 인해 이스라엘과 다수의 쿠르드인들은 서로 협력적인 관계가 되었고, 중동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전체적인 보이콧 운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이라크 쿠르디스탄에서는 반이스라엘 보이콧이 적었으며 북쿠르디스탄에는 이스라엘을 더욱 응원하는 등 오히려 이들은 이스라엘에서 만든 제품들을 적극 사용하기도 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쿠르드인들이 훨씬 이득이었다. 적대국에서 소요사태를 일으켜 이스라엘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게 하고 그와 같은 혼란 기간 동안 중동과의 잇달은 전쟁에서 소모된 국력을 그 사이에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쿠르디스탄의 독립 국가 승인에는 매우 미온적으로 나왔다. 이스라엘이 약속을 지키진 않지만 주변 중동 국가들에게 있어 미운 털이 박혀온 쿠르드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에 독립을 승인해달라고 적극적으로 주장하지 못했다. 이미 이스라엘과 공동 운명체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2000년대에는 이스라엘 군과 정보기관 요원 수백명이 이라크 북부 쿠르드족 지역과 이란, 시리아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쿠르드 특수부대원들을 훈련시키며 정보를 수집했다. 특히 이스라엘은 이란의 핵무기 개발 능력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미국-이라크 전쟁에서 결국 이라크 대통령인 사담 후세인이 타도되고 임시정부가 만들어졌을 때, 이스라엘은 시아파 민병대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쿠르드인 특수부대를 활용하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아울러 이란 영토내에 이스라엘 첩보원들이 활동할 수 있는 기지를 만들려 했다. 이 또한 쿠르드인들이 적극 도왔고 사담 후세인이 타도 되었을 때, 최소한 이라크 쿠르디스탄의 독립을 기대했지만 미국 측에서 이를 거부해 이들 또한 독립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그런 미국을 전혀 설득하려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이스라엘이 미국에게 쿠르디스탄 독립을 반대했다는 설도 나돌고 있다. 게다가 쿠르드족 독립의 운을 띄워주면서 이라크 내 수니ㆍ시아파와의 갈등 및 이란을 견제하는 효과까지 한꺼번에 노리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전략이었다. 대표적인 것이 2017년 이라크 쿠르디스탄 독립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한다는 성명이었다. 그리고 2019년 터키가 본격적으로 쿠르디스탄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네타냐후 총리는 본인의 트위터에 "이스라엘은 시리아 내 쿠르드 지역에 대한 터키의 침략을 규탄하고 터키와 그 대리인들의 쿠르드족 인종청소에 경고한다(Israel condemns Turkish aggression against Kurdish areas in Syria and warns of ethnic cleansing of Kurds by Turkey and its proxies)."고 적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은 용감한 쿠르드인들에게 인도주의적 도움을 줄 준비가 됐다(Israel is ready to provide humanitarian assistance to brave Kurds)고 했다. 이건 쿠르드인 입장에서는 웃기는 일이다. 쿠르드인이 원하는 것은 터키, 시리아, 이라크, 이란으로부터 완전한 쿠르디스탄 공화국을 설립하고 독립하는 일이다. "인도적 지원(Humanitarian assistance)"이라는 단순한 사탕발림식의 이야기가 아니라 독립과 정부 수립에 대한 확신이었다. 그러나 이미 미국은 쿠르드 독립에 별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쿠르디스탄으로 인해 중동에서 새로운 소요 사태가 발생하는 것을 경계했다. 따라서 터키군이 쿠르드군을 공격한 것은 사실상 미국 정부의 묵인 아래 진행되었던 것이라 이스라엘 입장에서도 고민이 컸던 것이다. 당시 쿠르드인은 시리아에서 미군을 도와 IS 격파에 나서서 실제 이들 토벌에 공을 세우고 막대한 인원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이 시리아 철군을 결정하면서 터키군 군사작전에 불개입을 선언했다. 쿠르드인들은 미국과 서방국가, 이스라엘 등에 이용만 당하고 버려진 셈이 되었다. 당시 AFP통신은 "미국 지도자의 쿠르드인 포기는 이스라엘에 깊은 우려를 초래했다"고 분석했을 정도니 이스라엘의 고충 또한 알만하지만 결국 이스라엘은 미국의 손을 들어주며 또 다시 쿠르드를 배신했다. 이후 이스라엘은 2019년 하반기에 유태인들은 2000년 동안 박해와 추방으로 고통받았다며 이스라엘에는 쿠르드 출신 유태인들이 많고 중동에서 온건하며 서방 친화적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쿠르드인들은 이 때 이스라엘에게 자치독립을 추구하는 쿠르드인과 군사 · 경제 등에서 우호 관계를 유지하명서 정작 팔레스타인의 자치독립은 인정하지 않아 그 모순점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이 때부터 쿠르드인들은 이스라엘을 증오하기 시작했고 작년 10월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벌어지자 적극적으로 팔레스타인을 응원했다. 이제는 쿠르드 노동자당인 피케이케이조차도 이스라엘을 돕지 않을 것임을 선포했다. 쿠르드인들을 이용하려고만 했던 이스라엘은 이 모든게 자업자득(自業自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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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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