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8-1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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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볼가 강, 이곳은 러시아인들은 "러시아의 영혼" 이라 부르며 상당히 신성시했다. 그 이유는 바로 볼가 강이 불가리아 인들이 살았던 터전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볼가라는 말 자체가 타타르어로 밝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해가 뜨는 동쪽의 강이라는 부분을 형상화했다. 그래서 아마도 비교언어학적으로 "볼가" "밝가" "불가" "밝은" "발칸" 으로 연결시켰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유럽에서 가장 긴 강인 볼가 강은 불가리아 인, 러시아 인들의 강으로 불리고 있다. 

 

따라서 불가리아는 오늘날 불리는 발칸과 깊은 연관성이 있으며 불가리아 인들이 제1 불가리아 제국을 세우고 발칸을 정복했을 때 비로소 발칸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발칸은 불가리아인들이 사는 땅이라는 뜻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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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러시아의 볼가 강,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동아시아에서 온 민족들이 볼가 강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서로 간의 전쟁을 통해 부족의 통합을 꾀하게 된다. 이에 대표적인 전쟁이 훈족의 이동이다. 훈족의 이동은 볼가 강 남부 일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볼가 강 중류와 카마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속해 있는 유목 민족들에게 큰 위협이 되지 못했다. 특히 불가르 인의 원류로 알려진 서흉노는 5세기 경 우크라이나 일대로 남진하여 일부 훈족의 계파들을 복속시켰다. 

 

그리고 100여 년 후, 아바르 인들이 공격해오면서 불가르 인들은 아바르 인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이후, 오우르 족을 비롯한 투르크 계통(철륵 : 鐵勒)민족들이 돌궐이 성장함과 동시에 서방으로 이동해오면서 불가르 인과 융합되었다. 본 연구자는 불가르 인의 계통을 투르크 계통화가 된 시점이 6세기 중반이라 판단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원류는 서흉노인이라는 것이고 터키 학계에서 주장하는 투르크 계통화가 되었다는 학설을 부정하지 않는다. 


국가 조직 단계에 이른 최초의 불가르 족 연합은 온(On) 오우르 족이 주축이 되어갔다. 이들은 6세기 이후 비잔틴, 아르메니아, 시리아 문헌에서 북방 카프카스 종족으로 언급되었고,이러한 연유로 북방 카프카스 지역과 흑해 북안 지역은 700년 경 ‘온 오우르의 땅(On Patria Onoguria)’이라 불렸다. On Patria Onoguria 명칭은 페르시아에서 나타난 말이다. 당시 7세기의 페르시아는 압바스 왕조의 지배에 있었고 이슬람 세력화되었기 때문에 비(非) 이슬람 지역인 흑해 북안 지역에는 아직 이슬람에 개종되지 않은 투르크 민족들이 살고 있다 보았다.

 

 630년, 중앙아시아에서 돌궐 제국이 분열되고, 이와 때를 같이하여 발칸과 동유럽에 흥기하던 아바르 인마저 626년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는 전쟁에 패배했고 630년에 아바르 제국의 왕이 사망하여 국력이 쇠퇴하자, 흑해 북안은 세력 균형의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이 때 오우르 족의 주도 하에 불가르 인이 독립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카프카스 북쪽의 스텝 지방과 볼가 강 연안에서 이주한 민족인 오우르 족은 비잔틴 제국과 경쟁하며 점진적으로 성장했고 이들은 국가를 세울 수 있는 세력이 비로소 형성되어졌다. 이들을 주도했던 오우르 족의 수장 가문은 두로(Dulo clan)가문이다. 두로 가문(Dulo clan)의 형성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 없다. 


약 670년 경, 볼가 강 일대와 우크라이나 지역, 우랄 산맥 인근 지역 등 광대한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있던 대(大) 불가리아 제국은 쿠브라트 칸이 사망하고 쿠브라트 칸의 아들들이 상속 문제로 대립하면서 해체 될 위기를 맞았다. 이는 쿠브라트 칸이 사망하면서 그 후계자에 관해 어느 누구를 지칭하지 않았고 소수의 지배층인 불가르 족이 다수의 피지배층인 오우르, 사바르, 고트, 훈족의 일부와 슬라브 계통의 민족을 통치하기에 적합한 인물이 없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게다가 투르크 계통의 민족으로 하자르(Kazar) 족이 서진해 오면서 내분으로 기초 질서가 붕괴된 대(大) 불가리아 입장에서는 하자르 족을 격퇴할 수 있는 군사력 또한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도 붕괴의 한 요인이다. 결국 유목민족 특유의 상속문제와 결부된 내부 분열은 국가와 민족의 해체로 이어지고 다른 유목민족의 침입으로 인하여 지배층이었던 민족이 피지배층으로 신분이 하락하는 현상이 유라시아 세계에 있어 반복되어왔던 것이다.


쿠브라트 칸의 사후 장남인 바트바얀(Batbayan)을 제외한 4명의 아들이 대(大)불가리아 제국을 떠났고 주민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오투즈 오우르 족은 북방으로 패주하여 오늘날 이틸 불가르(Itill Bulgar)를 건국하고 주요 세력이 된다. 쿠브라트의 장남인 바트바얀(Batbayan)을 정점으로 한 온 오구르 불가르 족은 하자르 족에 패배하여 예속되었고 카프카스 지방으로 남하하면서 산개된 세력으로 남았다. 

 

그러나 바트바얀의 동생인 아스파르후(Asparukh)는 돈 강 지역으로 북진하면서 정복민이었던 하자르 족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충성 맹세는 다분히 정치적인 것으로 하자르 족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지 않기 위한 일련의 조치였다. 아스파르후는 쿠브라트 칸의 다섯 번째 아들로 형들 4명과는 달리 상당히 유능했다 한다. 

 

일설에는 아스파르후가 쿠브라트 칸의 직계 아들이 아닌 쿠브라트 첩인 에일라(Eilla)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으나 아직 그의 출생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는 부분이 없다. 일반적으로 볼 때 아스파르후는 쿠브라트 칸의 아들이자 장남인 바트바얀을 매우 따랐고 바트바얀은 아스파르후를 자신의 아들 대신 후계자로 낙점하기도 하였다. 장남인 바트바얀이 인정할 정도로 아스파르후는 민족을 통치하는 능력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우선적으로 하자르 족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아스파르후는 휘하의 불가르 족과 그를 따르는 슬라브 인들을 거느리고 하자르 족에게 투여될 영토 확장에 나선다. 668년부터 679년까지 지속된 11년여 동안의 투나 지역과 발칸 진입 전쟁은 가장 먼저 현재 몰도바와 다뉴브 삼각주 지역을 장악하는 것을 시작으로 진행된다. 

 

현재의 몰도바와 다뉴브 삼각주 지역은 고트 족이 장악하고 있었고 훈족의 아틸라가 이 영토를 정복한 이래 지배층이 훈족이었으나 훈족의 세력이 약화된 이후에는 고트 족이 새로운 지배자로 등장해 있었다. 일단 고트 족은 375년에 시작된 게르만 민족의 이동으로 인하여 동고트 왕국을 건설했으나 훈족의 침입으로 멸망한 상태였다. 그러나 고트 족은 훈족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다시 부활했고 아바르 인들과 적절한 경쟁 관계를 통하여 나름의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370년대 훈족의 대두는 동고트족을 지배 민족에서 피지배민족으로 바꾸었다. 훈족의 침입에 맞서 당시 동고트 왕 에르마나리크는 몇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결국 패배한 뒤 자살했다. 얼마 뒤 에르마나리크의 후계자도 훈족과의 전투를 벌이다가 죽었다. 이는 서고트 왕 프리티게른(Fritigern)이 도나우 강 남쪽으로 재이주할 것을 권유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고트 족은 이탈리아 북부와 서고트 인들을 따라 아프리카 북부로 이동했고 당시 남아 있는 고트 족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았으나 아바르 제국 및 훈족과의 교류로 인하여 물려받은 기마 전술이 아직 건재했다. 

 

그러나 아스파르후와 불가르 족, 그리고 슬라브 인들은 이들 고트 족을 정복했다. 현재의 몰도바 지역을 발판으로 아바르 제국의 영토인 루마니아 동부 지역으로 진출했고 콘스탄티노플 공성전에서 패배한 아바르 제국은 루마니아 동부 지역을 비교적 쉽게 내주었다. 그리고 헤라클리우스 황제 직후 트라키아 지역을 회복한 비잔틴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게 된다. 


오늘날 불가리아 지역에 살았던 최초의 민족은 트라키아 족으로 고증되는데 그들은 로마인이 이곳에 등장하기 전부터 발칸 반도의 동편에 거주하여 왔다. 그러나 그들은 국가로 비정할 만한 형태의 체제로 발전하지 못했다. 이는 트라키아 인들이 워낙 각지로 흩어진 세력을 유지하고 있는데다 이들을 통합할 수 있는 지도자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문자를 사용하고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문학 활동을 하였으며 도시에 거주하던 트라키아 종족들은 비교적 쉽게 그리스에 문화적으로 종속되었다. 이후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로마의 문화에 다시 종속되어 여러 잡다한 문화가 섞이게 되었다. 트라키아 인은 인도유럽어족에 속하고, 호전적이며, 문신(文身), 화장(火葬)의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디오니소스 신앙이 성하여 사자(死者)를 위한 무덤(tumuli)이 많이 축조되었으며, 고고학 자료의 보고(寶庫)가 되었다. 

 

풍부한 삼림자원 · 광물자원(판가이온 산의 금 · 은)과 기름진 영토는 기원전 7세기 이후 트라키아 연안지방에 대한 그리스 인의 식민 활동을 유발하였다. 트라키아 인은 통일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소부족국가의 난립 단계에 머물렀으나 그리스 인에게 있어서는 노예 · 목재의 공급지, 흑해 무역의 중계지로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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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볼가 강, 러시아 영혼이자 어머니의 의미의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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