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7-3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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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는 포르투갈의 엔리크 왕자를 주축으로 한 15세기 초중반의 대서양 방면 해외 진출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스페인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유럽-아메리카 항로의 개척,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 남단을 통한 인도 항로의 개척, 그리고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 일주 항해가 이루어진 15세기 말~16세기 초반에 정점에 달했다. 이와 같은 영향으로 고대 이후 동양과 서양이 교역하는 육상 통로였던 육상 실크로드는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줄어들게 되었다. 

 

대서양이 아닌 북유럽 일대에서 군소 규모의 해상 무역을 독점하던 한자 동맹도 큰 타격을 입게 된다. 그리고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한 아메리카와 아시아에 식민 제국을 건설하고 그 뒤를 이은 후발 주자들인 영국과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 설립을 끝으로 대항해 시대는 막을 내리고 유럽은 식민지 장악에 혈안이 되는 근대 제국주의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는 점에서도 세계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화면 캡처 2024-07-08 074448.png
사진 : 대항해시대, 네덜란드 함선, 출처 : TIMELINE OF ART, https://www.arthistoryproject.com/timeline/age-of-discovery/

 

그리고 중세 아라비아 지역과 중근동 지방 국가들의 중계무역을 통해 경제 발전이 이 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정지되어서 현재에도 전근대적 요소가 남아있게 되는 결정적인 요소를 가져왔다. 사실상 유럽을 비롯한 범서구권과 중동 및 북아프리카를 기반으로 한 이슬람권의 경제 및 사회 문화적 격차가 이 때부터 시작되어 점차 가시적으로 눈에 띄게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근동의 수장 국가인 오스만투르크 제국도 18~19세기에 갈수록 유럽 권에 뒤쳐져 영토를 잃어갔고, 아랍 권은 20세기 중반 경, 대량의 석유 발견 이전까지 국력이 오랫동안 정체되다가 이후에는 계속 침체하게 되었다. 이에 대해 요약하자면 지역적으로 한정된 교역만을 이어가거나 서로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각 문명권과 대륙 권들이 본격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되기 시작하였고 서로의 존재를 완전히 인식하게 된 진정한 의미로서 세계사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미국으로 대표되는 신대륙을 기반으로 한 범서구권 국가들의 직접적인 탄생과 이들의 국제무대 진출은 사실상 대항해시대가 자양분이 되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본래 대항해시대를 뜻하는 Age of discovery를 직역하면 “발견의 시대”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그대로 유럽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역사관이 투영된 명칭이라 볼 수 있다. 이는 침략자이자 가해자인 유럽인들이 자신들의 입장에서 지칭한 명칭일 뿐이고 아메리카와 아시아, 오세아니아와 다른 여러 지역의 피해 국가 입장에서는 침략자들의 유입일 뿐이라는 점에 있다. 

 

또 이를 번역한 “대항해시대”라는 용어는 일본어 “大航海時代 (だいこうかいじだい, 다이코우카이지다이)”를 중역한 단어이다. 따라서 최근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 등지에서 나타나는 대항해시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보다는, 비교적 중립적이라 할 수 있는 신항로 개척으로 용어를 바꾸고 있는 추세에 있다. 참고로 검인정화 이전 중등과정 국정 사회교과서도 제5차 교육과정 중인 1989년 지리상의 발견을 신항로 발견이라는 용어로 바뀌었다.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오랜 기간 카톨릭 세력과 이슬람 세력이 대립해왔는데, 레콩키스타로 불리는 이베리아 카톨릭 세력의 이슬람 축출 과정 이후 이베리아는 가톨릭의 영향력이 강해져 갔다. 하지만 이슬람을 몰아냈음에도 불구하고 이베리아의 왕조들은 이슬람 세력을 경계했고, 동방에 있다는 전설 속의 카톨릭의 왕 프레스터 존을 찾아 동맹이 되는 것을 원했다. 

 

하지만 지중해를 통해 동쪽으로 가는 것은 오스만투르크에 의해 가로막힌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대서양을 통해 반대편으로 간다면 프레스터 존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대항해 시대가 발생한 원인 중 하나는 향신료, 특히 후추였다. 비록 중반 이후부터는 유럽의 열강들이 향신료 무역에 참여하여 수요보다 공급이 배로 급증하였기 때문에 향신료 무역이 인기가 사라져 버리긴 했지만 대항해 시대를 열게 만든 결정적 원인 중 하나였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는 대항해 시대 원양 항해가 막대한 돈과 시간, 심지어 목숨까지 걸어야 함에도 한 번 향신료를 가져오면 이러한 고생을 보상 받을만한 엄청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만큼 당시 유럽에서의 향신료는 비싸게 거래되었다. 그리고 이는 국왕, 귀족을 비롯한 수많은 투자자들의 관심을 받을만한 요소가 되었고 그로 인해 많은 탐험가들이 신항로 개척을 위한 재정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향신료는 대항해 시대 자체를 개막하게 만든 기폭제의 역할이었으며, 대항해 시대 중반부터는 개척된 항로를 바탕으로 무역이 과열되어 향신료는 예전의 장점을 상실하고 말았다. 

 

그 이후부터는 새로 유럽인들의 목표가 생기게 된 아메리카 대륙의 황금과  은, 노예, 설탕과 같은 것들이 향신료의 위치를 대신하였다. 흔히 알려져 있는 학계의 정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성립이 지중해 향신료 무역을 막아 버리고 이것이 대항해 시대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연대의 순서를 파악해도 이것이 잘못된 통설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데, 기존의 인도양-홍해의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맘루크 왕조가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흡수된 것은 1517년이다. 포르투갈의 바스코 다 가마가 인도에 도착한 것은 1498년이다. 


이는 맘루크 왕조가 멸망한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은 포르투갈이 인도양 항로를 봉쇄하여 맘루크 왕조가 향신료를 유럽에 팔 수 없게 되자 재정적자로 인해 병사들의 급여가 밀려 병사들이 정부에 반기를 든 것이었다. 오스만투르크는 기존의 지중해 무역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지는 않았다. 단지 특혜와 관세라는 장, 단점을 파악하게 하는 전략으로 당시 지중해 무역의 주체인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을 견제한 수준이었다. 통계 자료에서도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고 오스만투르크가 성립한 시기를 전후한 향신료의 가격은 크게 차이나지 않았다. 

 

물론 그 이전이나 그 후나 향신료의 가격 자체가 높은 것은 사실이나, 그 변화의 폭이 두드러진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유럽의 향신료 가격의 폭등은 맘루크 왕조의 멸망 직전인 1510년대의 현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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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 포르투갈이 아시아 해상항로에 미치는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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