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8-1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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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중국의 왕조 중에서 가장 위대한 왕조, 제국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당(唐)나라, 대당제국(大唐帝國)을 꼽는다. 청(淸)나라도 위대한 제국이지만 나는 영토 크기 같은 것을 제외하고 당(唐)제국을 가장 위대한 제국으로 보는 것이 중국의 역대 왕조 중에서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던 정책들을 펼쳤기 때문이다. 당나라 이씨(李氏) 자체가 유목민족인 선비족 출신이었다.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은 당국공(唐國公) 이병(李昞)의 자식이고 이연의 7대조는 이고(李暠)로 흉노 부족이 오늘날 감숙성 지역에 북량(北凉) 정권을 수립하자 이고는 훨씬 서쪽에 위치한 돈황 지역으로 가서 서량(西凉)을 세웠다 한다. 


화면 캡처 2024-07-12 000931.png
사진 : 8세기 말 당나라의 강역, 출처 : 나무위키, https://namu.wiki/w/%EB%8B%B9%EB%82%98%EB%9D%BC

 

이고의 시조는 전국시대 진(秦)나라 장군 이신(李信)이며 시황제가 6국을 정복하고 중원을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었던 장수이다. 그리고 이신의 4대 손인 이광(李廣)은 한 무제시기에 흉노와 전쟁에 주로 등장하는 명장이다. 이광은 한, 흉노전쟁에서 용맹을 과시하다 패배하여 흉노에 포로로 잡혔다. 그리고 현지에서 흉노의 여인과 결혼해 3남을 낳았다. 이후 이광의 자손들은 흉노에서 주로 생활했으며 후일 단석괴의 선비가 침입함에 따라 북흉노가 패배하여 서방으로 도주하자 이광의 자손들이 살고 있는 영지도 선비의 손에 들어갔다. 이 때부터 이광의 후예들은 선비와 섞여 살게 되었다.


이고는 농서군의 명문 호족 이감(李弇)의 서손으로, 이창(李昶, 자는 중견(中堅))의 서자 중 막내이다. 조부 이감은 서진 혹은 전연의 양주자사 · 무위장군 · 천수군 태수를 맡아 안세정후(安世亭侯)에 봉해져서 이고의 대까지 세습되었다. 이것으로 볼 때 흉노와 선비를 거쳐 유목 민족의 씨족장 중에서도 명문가로 뽑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서량의 왕가 가문이기도 하여 이연의 선조들은 대대로 왕손이었다. 다시 정리하여 살펴보면 시작은 한족이었지만 중간에 이광이 흉노의 여인과 결혼하여 혼혈 3형제를 낳았고 그들이 계속 자손을 이어왔다가 선비의 침입으로 인해 선비족과 섞여 살면서 서로 통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연의 선조들이 선비계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연의 모친과 수나라 양제의 모친은 자매 사이였다. 이연은 수 문제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으며, 양제의 사촌으로, 당시 가장 세력이 큰 수나라 장수들 중의 하나였다. 이연의 5대조는 북위의 홍농 태수, 4대조와 3대조는 무천(武川)에 정착한 북위의 장수였다. 조부 이호(李虎)는 우문태가 서위, 북주를 창건하는데 큰 공을 세운 개국공신 8주국(八柱國) 중 한 명으로, 당국공(唐國公)에 봉해졌다. 따라서 이러한 인연으로 인해 이연은 수나라 황실의 황족이었던 것이다. 수나라도 물론 선비족 출신이었다. 그리고 당나라는 유목 민족인 선비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개방성과 포용성을 갖추었던 제국이었던 것이다. 


나는 당나라가 아시아에서 대제국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원동력은 국적이나 출신, 신분 등을 따지지 않고 인재라면 누구라도 기용했던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인재 등용 정책이라고 본다. 당나라에게 멸망했던 백제의 흑치상지, 고구려의 고사계, 고선지 부자, 고구려를 배신한 연남생도 당나라의 고관이 되었으며 신라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장자인 김인문, 당대의 최고 신동인 최치원 등이 당나라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했다. 

 

바다의 왕자 장보고도 무장으로써 당나라에서 꽤 높은 직위에 있었다. 그리고 당 태종 시대에 계필하력, 설인귀, 이사마 등도 한족이 아닌 돌궐과 거란 출신이고 안록산의 난의 주역인 안록산도 소그드인 출신이었다. 시선(詩仙)으로 알려진 이태백도 키르기스스탄 발라사군에서 출생한 소그드인이었다.


이런 인재들이 당 제국을 일구었다. 그리고 그 중심엔 전무후무한 인재 등용 정책의 시작은 희대의 명군인 당 태종 이세민이 있었고 그로 인해 당나라는 실크로드까지 장악하며 중앙아시아와 멀리 비잔틴 제국까지 그 명성을 드러낸 대제국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전무후무한 중국의 최초 여황제인 측천무후가 탄생한 것도 당나라 때였다. 

 

한나라 때도 없었던 노비 사면과 도성 중앙에 주작대로로 불리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도로인 주작문가(朱雀門街)를 끼고 왼편에 54방(坊)과 동시(東市)를, 오른편에 또 54방과 서시(西市)를 만들어 총 110개의 방시(坊市)로 이루어진 조방도시(條坊都市)를 세계 최초로 기획한 것도 당 제국이었다. 당나라의 각종 정책은 그 당시 아시아 세계 각종 정책들의 모범이 되었고 각 국가들은 당나라의 제도를 모방하여 자신들 특유의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그런 최초의 모범 국가 역시 당 제국이었던 것이다. 


내가 대당제국에 주목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런 위대한 당 제국을 막아내고 이겼던 위대한 역사라서가 아니다. 우리가 그런 역사에 주목하고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면 그것을 넘어서 나는 당나라 제도의 장 단점을 연구하며 그런 대당제국이 강대국이 되었던 이유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고 본다. 

 

당 제국이 강대국이 되었던 제도들을 보면 왜 강대국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아시아 중세시대 초기에 모든 국가들이 그 제도를 모방하거나 받아들여 자신들의 제도에 접입시켰던 당대 최고의 모범국이 되었는지를 보면 첫째로 그런 대당제국을 이겼던 우리 조상들이 더 위대했음을 밝힐 수 있는 것이고 둘째로 그러한 당 제국 제도들의 장점을 재활용할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판은 어지럽기 그지없다. 인재가 없어 그 인물이 그 인물인 사람을 원치 않은 상황에서 계속 투표해야 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당장 선거에 나서는 후보들을 보더라도 누굴 찍어야 할지 선뜻 분간하기 쉽지 않다. 그 나물의 그 밥이라 생각하기 때문인 것이다. 뭔가 혁신적인 인재가 나와 희망을 보여줘야 하는데 그런 희망 자체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기 이를데 없다. 그리고 죄다 법조계 출신들이 많으니 다른 측의 인재들이 누가 있나 찾아보면 아쉽기 그지 없다. 


그래서 나는 대당제국의 제도들을 소환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재 등용에 있어 차등을 두지 않았던 대당제국은 그런 인재 등용의 발판으로 대제국을 이루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우리 대한민국도 굳이 서울대 출신이 아니더라도, 법대 출신 아니더라도, 인재는 찾다보면 얼마든지 있다. 그런 인재들을 학연, 지연, 혈연을 타파하고 과감히 기용해야 한다. 그 나물의 그 밥이 아닌, 학연, 지연, 혈연으로 등용된 사람이 아닌, 법조계만이 아니고 다른 계통의 인재들, 입으로만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꾼이 아니라 진정한 국민, 국가를 위한 머슴이자 일 잘하며 능력이 뛰어난 인재인 정치인을 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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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당제국과 현대 대한민국의 정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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