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8-16(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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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존재했다. 메소포타미아의 함무라비 법전에서 노예가 등장하고, 고대 로마 제국은 아예 노예제 국가였다. 동양에서도 전쟁 포로나 기아로 인해 굶주린 사람들이 노예로 전락했다. 더불어 고대의 전쟁은 전쟁 그 자체가 노예를 양산했고, 종교가 지배한 사회에서는 이교도들을 노예화하고 지배했다. 

 

16세기 유럽인들에 의해 대항해 시대가 열리면서 인간을 상품화하는 노예 무역 시대가 열리게 된다. 16~19세기 사이 4세기에 걸쳐 유럽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노예 무역은 그들에게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주었지만, 현재 아메리카 대륙에 극심한 인종 문제를 양산하게 되었고, 아프리카에 민족주의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유럽인들에 앞서 아프리카인들을 노예화한 것은 이슬람 교도들이었다. 

 

아라비아 반도의 무슬림들은 9세기부터 아프리카 동부 잔지바르(Zanzibar) 등을 점령해 1,000년 동안 아프리카인들을 이슬람의 노예로 만들었다. 유럽인들 가운데 처음 노예 무역에 나선 자들은 포르투갈 인들이었다. 포르투갈 인들은 1502년 아프리카 동부 카나리아 제도(Canary Islands)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부족장들의 협력을 얻어 노예 무역에 나서게 된다.


화면 캡처 2024-07-12 001004.png
사진 : 브리타니아호는 "문명"이라는 글자가 적힌 큰 흰색 깃발을 들고 있었고, 그 뒤로는 영국 군인과 식민지 주민이 있었으며, 원주민 무리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원주민 무리 중 한 명은 "야만"이라는 글자가 적힌 깃발을 들고 있었다. 출처 : MODERN WORLD HISTORY

 

포르투갈인들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으로 처음 보낸 것은 1526년이었다. 포르투갈은 브라질 식민지에서 파우브라질(Pau-Brasil) 나무에서 염색제를 발견했는데, 이를 채취할 인력을 찾지 못했었다. 더구나 현지 브라질 투피 족은 무계급 사회였고, 돈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식민지의 지배자들이 현지에서 노예를 구했지만, 투피족은 목숨을 걸고 도주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자 포르투갈 정부는 아프리카에서 노동력을 수입하기로 했다. 아프리카 인들은 같은 열대지방 출신이었기 때문에 브라질의 열대 기후에 적응하기 쉬웠고, 더불어 힘이 좋았기 때문에 일을 잘했다. 

 

이후 포르투갈은 이 같은 노예 무역에서 재미를 보게 되자 사업을 확대하여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서 라틴 아메리카로 싣고 갔으며 스페인도 경쟁적으로 노예 무역에 참여하게 된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공급한 자들은 아프리카 현지 부족장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국가가 바로 콩고 왕국이다. 이 흑인왕국은 전쟁을 벌여 영토를 넓히는 과정에서 전쟁 포로와 피정복민들을 포르투갈에 팔아 넘겨 막대한 이득을 챙겼다. 


포르투갈이 아프리카의 노예 구매를 독점하고 있는 가운데 프랑스도 이 사업에 뛰어 들었지만, 콩고 왕국은 프랑스 선박을 나포하고 오히려 이들에게 사업을 할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왕국에 합병되면서 노예 무역은 스페인이 주도하게 되었다. 하지만 1640년 교황이 노예 무역을 금지하면서 카톨릭 국가였던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노예 무역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영국 국교회 국가였던 영국이 17세기에 본격적으로 노예 무역에 뛰어들게 된다. 

 

노예 무역에 관한 연구자들에 따르면, 16세기 이전에 거래된 노예 수는 전체의 3%에 불과했으나, 17세기에 16%로 급증했고, 18세기에 절반이 넘었으며, 19세기에 28.5%를 차지했다고 파악하고 있다. 이와 같은 노예 무역에 참여한 국가는 포르트갈, 스페인,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인권이 가장 잘 보장되었다는 서유럽 국가들이었다. 400년간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로 보내진 노예는 1,200만 명~1,280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보다 더 많이 추정하는 연구자는 2,000만 명으로 보기도 한다.


영국의 지리학자 토머스 키친(Thomas Kitchin)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1778년 무렵에 영국이 카리브 해에 보낸 노예가 매년 52,000명이 되었으며, 프랑스는 매년 13,000명의 노예를 팔았다고 한다. 아프리카 노예 무역은 18세기 마지막 20년 동안에 정점에 달했는데, 그 때 콩고 왕국에서 내전이 벌어져 전쟁 포로들이 대량으로 아메리카로 이동했다고 한다. 아프리카 인들을 노예로 끌고 간 선박은 매우 열악했다. 

 

좁은 선실에 흑인들을 쌓아두고 가득 실어 항해하는 도중 선채에 전염병이 돌아 사망률도 높았다. 죽은 노예는 바다에 버렸다고 하며 학자들에 따라 수송 과정에 있었던 사망자들에 대한 견해를 달리하는데, 120만~240만명이 대서양을 건너는 과정에서 질병 등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처럼 수많은 아프리카 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간 것은 유럽인들의 탐욕과 더불어 고급화된 삶 속에서 나타난 취향 때문이었다. 특히 설탕의 경우, 인도에서 생산되어 육로로 유럽에 전해졌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인도를 공격하면서 설탕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대항해 시기에 유럽인들은 카리브 해와 라틴 아메리카의 열대지역이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하다는 사실을 파악하게 되었다. 사탕수수는 키가 무려 4m나 되는데, 이를 베어 공장에 운반하고 분쇄한 다음 롤링으로 눌러 압측해 즙을 얻는다. 이것을 다시 큰 솥에 오랫동안 정제했다. 이와 같은 과정에 엄청난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주변에서 나무를 많이 베어 와야 한다. 

 

설탕을 제조하는 과정에 대량의 일손이 필요했는데, 그 노동력이 아프리카에서 공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설탕의 단맛을 알게 된 유럽에서 설탕의 수요는 크게 증가했다. 설탕 산업은 자본주의 발전에 산파 역할을 했음과 동시에 노예 무역을 일으킨 장본인이기도 했다. 아메리카에서 재배한 설탕이 대거 유럽에 수입되면서 영국인의 1인당 설탕 소비량이 16세기초에 500g에서 17세기에는 2kg, 18세기에는 7kg으로 급증했다. 즉, 유럽인들은 설탕은 귀중품에서 사치품, 생활필수품으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만큼 노예의 피땀으로 일군 설탕이 유럽인들의 입맛을 돋구었던 것이다.


1713년에서 발생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이후 체결된 위트레히트 조약에서 영국은 스페인이 가지고 있던 아시엔토(Asiento)라 불리던 노예 무역 독점권을 확보하게 된다. 이에 영국은 향후 30년 동안 114,000명의 노예를 스페인 식민지였던 포르트베로, 베라크루스 등의 노예시장에 공급하게 되었다. 영국 정부는 이 특권을 남해회사(South Sea Company)에 양도하는데, 이것이 후에 투기 과열을 초래해 투기 거품 붕괴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거품 붕괴 사건 이후, 영국인 무역상들은 대서양에서 삼각 무역을 개발했다. 영국에서 만든 총기, 술, 유리제품, 직물을 아프리카 부족에게 팔고, 현지에서 노예를 샀다. 이 노예를 아메리카 대륙에 데리고 가 팔아치웠고 설탕과 면화, 담배, 커피 등을 사서 영국으로 들여오면서 영국의 경제는 호황을 맞게 된다. 이러한 노예들은 대부분 서아프리카에서 포획되었다. 물론 유럽인들이 직접 노예 사냥에 나서지는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의 풍토병을 이겨낼 수 있는 약품을 구하지 못해 대륙 깊숙이 진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서아프리카의 현지 부족들에게 노예를 잡아 달라 부탁하면 다른 종족의 흑인들을 공격해 잡아 유럽인들에게 팔았던 것이다. 결국 가격은 노예 포획을 부탁했으니 청탁금, 의뢰비까지 현지 부족들이 풍족하게 챙겼던 셈이다. 이에 아프리카의 왕국 또는 부족들은 노예들을 줄줄이 세워 나무 족쇄로 채우고 그들을 해안가로 데려갔으며 해안에는 유럽의 노예 무역상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안에 도착한 노예들은 나무 우리에 갇히게 된다. 노예들은 길게는 몇 달동안 배가 올때까지 나무 우리에서 기다려야 했다. 

 

이들 중 건장한 남자가 대부분이었지만, 여자와 아이들도 있었다. 라틴 아메리카 등지로 갈 배가 도착하면 어느 해안 출신인지를 표시하기 위해 노예의 몸에 낙인을 찍은 다음에 배에 몰아 넣었다. 그리고 노예들을 배에 가득 채워 아메리카로 데려갔다. 그와 같은 온갖 인권유린이 자행되며 이동하는 과정에서 많은 노예가 죽어 나갔다. 아메리카에 도착한 노예들에게 노예 주인들은 처음 며칠 간 아무일도 시키지 않고 배불리 먹였다. 그리고 원기를 회복한 노예들을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들은 설탕 농장에 대부분 끌려갔으며, 면화, 담배, 커피 농장에도 배치되었다. 노예 주들은 초기에 1인당 2~5파운드에 노예를 샀고 되팔 때는 25~35 파운드에 팔아 엄청난 폭리를 취했다. 당시 노예 값이 말 가격의 30분의 1이었다고 전한다. 그 이후 노예 부족현상이 발생하면서 노예 가격은 더더욱 상승했다. 

 

노예들은 보통 새벽 3시부터 일터에 나가 하루에 17시간 동안 온갖 인권 유린 및 착취를 당하며 살인적인 노동에 혹사당하게 된다. 이들 흑인 노예들의 강제 노역이 유럽인들의 입에 맞는 설탕과 담배, 커피를 만들었던 것이다. 흑인 노예 무역이 한창이던 1770년대에 영국의 노예 무역선은 무려 190척이 되었다고 한다. 영국인들은 노예를 검은 화물, 설탕을 하얀 화물이라 부르며, 돈벌이를 했다. 

 

그와 같이 온갖 인권 유린 및 흑인 노예들을 강제로 착취해 번 돈은 영국의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성공을 촉진하여 오늘날 영국이 강대국이 된 밑거름이 되었다. 현재, 다문화가 진행되고 있는 이 때, 과거의 식민지였던 인종들이 영국에 몰려들어 영국의 경제권을 형성했고 이들이 조금씩 영국을 잠식하고 있다. 과거 노예 무역과 연관된 역사를 들어내겠다며 일부 기업들이 흑인 등 소수 인종을 위한 재정 지원 계획을 내놨다고 한다. 


과거 창립자들이 노예 무역으로 쌓아올린 부와 연관된 기업 운영사에 대한 반성으로 이같은 재정 지원 계획을 했다고 한다. 브리스틀에서는 시위대가 17세기 악명 높은 노예 무역상 에드워드 콜스턴의 동상이 끌어 내려졌다. 콜스턴은 17세기 아프리카 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흑인 노예 80,000명 이상을 수송한 인물로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옥스포드에서는 남아프리카 케이프 식민지(Cape Colony) 다이아몬드 채광권을 독점하고 식민지 총리를 지낸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의 동상을 철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옥스퍼드의 거리에는 '로즈, 다음은 당신 차례'라는 현수막이 걸렸다. 런던에 있는 윈스턴 처칠 전 총리 동상에도 '인종차별주의자'라는 낙서가 쓰였다. 인종차별 항의 시위를 하는 시위대는 처칠 전 총리를 두고 "영국 연방의 식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인종차별을 일삼았다"고 비판했다. 그런 상황에서 영국인들은 이들의 지속적인 유입과 이들의 행위들에 불만이 상당하지만 그 또한 과거의 악행에 대한 영국이 뿌린 업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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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의 대표 산업, 노예(Sl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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